센스와 스킬의 아이스크림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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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창의적인 회사는 어디일까요? 답이 없는 질문이지만,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곳 중 하나는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이 아닐까 합니다. 우아한형제들의 크리에이티브를 이끄는 한명수 CCO는 업계에서 말랑말랑한 사고를 하기로 유명해요. 재치 있고, 유연하며, 유머러스한 크리에이티브는 우아한형제들의 톤앤매너에 큰 영향을 미쳤죠. 그런 대단한(!) 분이 «비애티튜드»에 한 편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감각과 기술, 센스와 스킬이 무인 아이스크림 점포 앞에서 나누는 대화인데요. 그 자체로 즐거운 만담이면서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우화 느낌이 솔솔 납니다. 오직 «비애티튜드»에서만 접할 수 있는 영감 넘치는 텍스트!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감각()’과 ‘기술()’이 무인 아이스크림 점포 앞에서 대화를 나눈다.

: 덥죠, 그쵸? 예전에 우리 자주 만나고 친했는데 요즘은 잘 못 만나네요. 아이스크림 이거 1+1인데 제가 살게요.

: 고마워요. (봉지를 뜯어서 표면에 묻은 얼음 알갱이를 찬찬히 혀로 떨어뜨리며) 그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저는 아직도 바쁘게 지내요. 쉼 없이 저를 필요로 하는 온갖 전문직 인간들이 자격증 딴다고, 시험 점수 올린다고, 평가받아야 한다고 저를 찾거든요. 예술 카테고리라고 하나요? 문화 콘텐츠로 먹고사는 계통에서도 저를 온갖 커리큘럼으로 잘라 재포장해서는 온라인에서 강좌로 팔고 사느라 아주 바쁘답니다.

: 좋으시겠어요. 늘 인기가 많아서. (전혀 부럽지 않지만, 상대방을 존중하듯 약간 부럽다는 윙크)

: 회사에서도 스킬업해야 승진한대나 뭐라나, 웬만한 말발 좋은 강사들이 뽀갠다 시리즈로 섬네일 이쁘게 해서 별의별 강좌들을 게시판에 올려놓으니 늘 인기죠. 허허.

: 좋으시겠어요~~ (한 번 더 존경스러운 투로)

: 돈벌이가 되어서 좋긴 하죠. 어떤 영역이든 초급일 때는 스킬 셋을 장착하지 않으면 쓸모없는 취급을 당할 테니,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기꺼이 돈과 에너지를 투자하니까요. 센스 님 당신은… 음… 그런데 찾으려고 하면 잘 안 보이는데 어디 계신 거예요?

: 늘 당신 곁에 있긴 해요. (또 반대쪽 눈으로 윙크하며)

: 아, 맞아. 계시긴 한데 눈에 진짜 안 띄긴 하더라고요. 당신은 초급반 인간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고 상급반 인간에게 좀 거론이 되는 그런 상태인가요?

: 초급, 중급, 상급이란 표현이 좀 거슬리네요. (그래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느긋하고 상냥하게) 당신, 스킬 님께서는 항상 경쟁, 성공, 평가에 길들여져 있으니까 뭐든 순서대로 ‘나래비’ 세우는 게 익숙할 거라 충분히 이해돼요. (나라비ならび 발음도 틀리게 내뱉으면서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저는 모든 인간 안쪽에 고스란히 깊게 담겨있는 터라 저를 일깨우지 않으면 굳이 바깥으로 나오진 않는 편이죠.

: (박수치며) 그렇군요! ‘감각이 좋다’라는 말이 ‘기술이 좋다’라는 말보다는 훨씬 근사한 것 같아요. 우리가 옷 잘 입거나 이쁜 거 잘 골라낼 때 ‘감각 죽이는데~’ 라는 말을 쓰는데 그럴 때 당신은 기분이 좋은 거죠?

: 아뇨. 그건 감각의 영역에서 아주 째깐한 일부 끄트머리를 얘기하는 것 같고요, 진짜 감각의 의미는 이럴 때 드러나죠. 뭔가의 압도적인 흐름이나 유행이 있을 때 그것을 따르지 않고 거스르는 힘을 보면서 ‘얘는 감각이 탁월하다’는 말이 튀어나오는 듯싶어요. 또는 하던 일을 멈추고 ‘왜 꼭 이렇게만 해야 하지? 재미없게?!’라고 질문할 때도 꽤 빛이 나죠. 인간들이 저를 키우려고 해도 특별한 양육법이나 매뉴얼이 없는 이유이기도 한데, 외부에서 양껏 밀어 넣어 학습한 ‘기술’을 굳이 다 쓰지 않으려 하는 여유? 반항! 의심…같은 것일 수도 있어요.

: Aㅏ… 근데 어떻게 아셨어요? 외부에서 인간 내부로 들어가는 게 저의 속성인걸? (들켰다는 민망함으로 배시시 웃으면서)

: (풋 – 웃으며) 걍 보면 보이잖아여. 당신은 늘 인간 바깥에 있드만…

: 그래도 인간 안에 한 번 들어가 잘 박히면 제법 그럴싸하게 움직여요! (남들은 잘 알아채지 못하는데 센스는 너무나 자신을 잘 들여다보는 게 겸연쩍고 부끄럽지만, 그래도 귀엽게 웅변하듯)

: 법조계, 과학계, 글 쓰는 분야, 스포츠, 문화예술 할 것 없이 다 외부의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여 기량을 닦잖아요. 인간들 자기 안에는 원래 ‘기술’이란 것이 없으니까요. (두 팔을 벌리며 하늘을 보며)

: ‘감각’은 그럼 외부로부터 배워 익히는 게 아닌 건가여?

: 그럴 수도 있지만 대개, (살짝 뜸을 들이며) 내부에 숨어있는 편이죠.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어려워요. 제가 쫌 까다롭고 신비로운 영역이라… (살짝 우쭐대는 표정으로)

: 저희 둘이 처음에는 가까이 붙어 있었잖아요. 센스 님~ (오래전 빙하기 이전 시대를 상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인간들이 처음 이 땅에 태어나서는 저희 둘을 구분도 안 되게 막 버무려 사용해 줘서 센스 님도 킬킬 웃고 저도 많이 웃고 그랬는데요. 인간 어린이들이 젓가락질 기술을 배울 때도 기어코 자기 멋대로 해보려고 막 그릇 채 입을 대면서 경이로운 다툼을 하잖아요. 엄마 인간들은 기어코 어른들의 세상을 (뭐가 좋다고) 물려주려고 손가락 위치와 각도를 가르치고 애쓰면서요.

: (유명한 신생대 빙하기 말고 중시생대 풍골라 빙하기를 굳이 떠올리며) 그러게요. 후후. 가만히 냅둬도 자신만의 방식을 어떡하든 찾아낼 수 있는 감각이 모두에게 다 숨어있는데 그걸 기다려 주지 못하는 것 같아요. 세상이 망하지도 않거니와 약간 쪽팔린 게 다인데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요. 저한테는 누가 막 강요하면 저는 스으을쩍 사라지는 편이에요. 억지스러우면 저는 말라죽거든요.

: 그쵸. 그런 것 같아요. 어느덧 어느 순간 저희 둘은 자주 못 만나게 된 것 같아요. 인간들은 저희 둘을 같이 불러내는 일이 귀찮은 것 같더라고요. 제가 항상 더 인기가 많잖아요. (어쩔 수 없다는 한쪽 눈썹 찡긋거리는 표정과 어깻짓을 하며)

: 가성비의 풍조 때문인 걸까요. 인간들의 욕망이 뾰족한 삼각형 피라미드 모양 같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위계가 없는, (진정 풍성함과 온전함의 상징인) 두루뭉술 써클 원형 모양이 쿠사마 야요이의 똥그라미로 그냥 막 사치품에 처발라지니까 나도 내가 뭘 하나 싶으면서 헛헛해져요. (똥그라미의 ‘똥’자에 유난히 힘줘 발음하며) 그 ‘똥’그라미도 사실 복제된 표면 기술이잖아요. 저는 결국 ‘똥’그라미 모양에 현혹되지 않는 인간들에게만 뜸하게 필요한 존재인가 봐요. (허공에 동그라미를 천천히 그려보며)

: 크~ 인간들이 저를 많이 좋아해서 자기 인생에서 십 수년간 저를 막 닳고 닳도록 쓰다가 어느 순간 저 때문에 큰 기회와 문제 앞에서 막힐 때면 미안해지기도 해요. 날 너무 믿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도 안 들리나 봐요. (불쌍한 인간들을 애처로워하는 표정으로)

: 근데 아이스크림 너무 빨리 드시는 거 아니에요? 스킬 님? 합성 착향료인 액상과당은 설탕보다 저렴하고 당도는 6배나 높아 체내 흡수 속도가 과도하게 빠르다고요. 너무 많이 드시면 간에서 분해한 과당이 지방산으로 전환되어 지방간이 위험해지는뎅…

: 꼭 저 같죠. 그쵸. 흐흐. 빠르고 효과 만점인~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센스 님의 아이스크림을 부럽게 바라보며)

: (끄덕이며) 당신을 쓰면 쓸수록, 반복할수록, 기량이 좋아진다는 착각이 들잖아요. 속도도 빨라지고 실수도 안 하게 되면서요. 게다가 주위의 칭찬까지 들으면 숙련된 인간들은 대부분 그 상태로 쭈욱 가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가만히 그 인간 안에서 놀면서 쉬고 있고 말이죠. (심심하고 따분한 한숨을 크게 쉬며 눈물 한 방울을 흘리는)

: 얼마 전 저를 오랫동안 믿고 살아왔던 성실하고 착한 중년의 IT전문가가 문득 자신이 쓸모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걸 깨닫고는 멋쩍어하더라고요. 예전에는 저 때문에 나름 먹고 살았을 텐데 환경이 바뀌고 주위의 기대치가 바뀌면서 ‘감각’…그러니까 센스 님 당신을 꺼내야 하는데 막 찾아도 안 나오니까 먹먹해하더라고요. 좀 나와주시지 그러셨어요? 숨어 계시기만 하구~~ (얄밉다는 듯이)

: 그러게요. 저도 알아요. 그 순간을요. (일부러 숨어있지 않았다고 손사래를 살살 치며) 저를 찾긴 하는 것 같은데, 제가 좀 자라거나 힘이 생겼어야 튀어 나가지 한 번도 써주지 않았으면서 갑자기 부르면 어떻게 나가요? 맨날 그 인간은 편리함만 따지고, 효율성을 체크하고, 예전 하던 대로만 하고… 남에게 훈수는 잘 두지만 자신한테는 너그럽던데요…

: 그렇긴 하겠네요. 당신도 나름의 근육이 있을 테니 평상시 근력이 붙어있어야 뿌슝 움직이는 거잖아요. (자기 팔 근육을 자랑스레 살짝 만져보며)

: 편리하게 살려고만 하니까 그랬으리라 해요. 그런데 편리하게 살려고 한다는 사실조차 자기 스스로 모르는 게 이미 ‘감각이 없다’는 증거겠지요. 후후.

: 저의 또 다른 이름이 ‘편리함’인뎅. ㅋㅋ

: ‘익숙함’ 아니었어여?

: (센스의 입술에 손을 대며) 쉿, 조용히~ 당신 이름을 저도 까발릴 거에여…

: (해볼 테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저는 딱히 규정된 이름으로 부를 수 없을 텐데요…

: (급 포기하며 말랑말랑한 표정으로) 냐아핳~ 당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 (온화하게) 늘 곁에 있다니까요. 

: (헤어지기 싫은 표정으로) 저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속 깊은 곳에서 당신을 계속 자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온라인 클래스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으시잖아요.

: 저의 근육이 붙어서 잘 활성화된 인간을 함께 벗하면 좀 도움이 되지요. (‘벗’이란 말에 크게 호흡을 불어넣으며) 그런 인간을 가까이서 보면 뭔가 작은 일을 하더라도 남다르게 할 거거든요. 템플릿 같은 걸 하나도 안 쓰는 거 보면 딱 느낌이 오잖아요. (템플릿 요청하는 사람들을 안스러이 여기며) 겉모양보다 그 인간의 이유를 궁금해하면 어느 정도 감각이 자라날 계기가 생길 거예요.

: 근데 그런 사람과 어떻게 가까워져요? 만나주지도 않잖아요. 센스 있는 사람은 센스 있는 사람끼리만 뭔가 주고받던데…

: (뭔가 들켰다는 듯이 얼굴이 발그래지며) 그게.. 그것이… 노력과… 의…지로…

: ‘노력’과 ‘의지’는 스킬 분야에서 애용하는 말인뎅…

: ‘매력’과 ‘의자’라고 하죠 뭐 그럼… (어물쩍 지갑을 꺼낸다)

: (지갑 여는 걸 보자마자) 저 의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더 먹어도 돼요?

Writer

한명수는 우아한형제들의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CCO)다. 배달의민족 본연의 서비스는 물론, 다양한 한글 서체 개발에서 조직 문화 개선까지 다각도로 참여하며 회사와 사회에 유쾌함과 즐거움을 불어넣는 중이다. 홍익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국내 최초 억대 연봉 디자이너로 꼽히며, 싸이월드 서비스 디자인을 맡은 대한민국 웹 디자이너 1세대이기도 하다. 업계에서 괴짜로 유명한 그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는 작업을 꾸준히 하면서 생존했다. MBC ‹무한도전› ‘면접의 신’ 편, CBS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등 여러 미디어에 등장하며 대중과의 소통을 놓치지 않고 있다.

밀면을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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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게는 영혼을 적시는 소울푸드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김치찌개, 통닭 등이 꼽히는데요. 김도훈 님의 소울푸드는 바로 아구찜과 밀면입니다. 마산에서 태어나 정통 아구찜을 즐기던 그는 부산으로 옮겨가 밀면의 세계에 푹 빠졌는데요. 서울에서 활동하며 평양냉면에도 도통해지고 그 힘든 ‘성조’ 사투리도 표준어로 고쳤지만, 밀면을 좋아하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았답니다. 왜냐하면, 소울푸드니까요! 다양성의 마음으로 ‘밀면 먹기’를 권하는 그의 솔직한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나에게도 ‘소울푸드’가 있다. 아,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문화적 전유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이라면 ‘너는 아프리카계 미국 흑인이 아닌데, 어떻게 소울푸드가 있느냐?’라며 이미 불평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소울푸드는 미국 남부 흑인의 전통 음식을 의미하는 게 맞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소울푸드라는 단어는 누군가의 영혼을 울리는 어린 시절의 음식, 혹은 고향의 음식을 뜻하는 의미로 넓게 통용됐다. 그러니 여기서 소울푸드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허락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그렇다.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네이버에 한 번 검색해 보시라. 이미 ‘엄마가 끓여주던 김치찌개’나 아빠가 퇴근길에 사 온 ‘통닭’은 한국인의 소울푸드가 된 지 오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소울푸드 치킨&와플

그래서 나의 소울푸드는 무엇인가. 나는 마산에서 태어났다. 마산은 고유의 대표적인 음식 몇 가지를 가진 도시다. 가장 유명한 건, 역시 아구찜이다. 마산은 아구찜의 고향과도 같은 도시다. 서울에도 ‘마산 아구찜’이라는 이름으로 영업하는 가게가 한두 곳이 아니다. 그런데 마산 아구찜은 지금 서울에서 파는 마산 아구찜과는 다르다. 내 어린 시절, 그러니까 1980년대에 먹었던 아구찜은 말린 아구로 만든 것이 기본이었다. 지금처럼 통통한 생아구 살을 발라 먹을 수 있게 된 건 신선 유통이 발전한 이후다. 마산 오동동 아구찜 골목에 있는 오랜 가게들은 다 말린 아구로 찜을 했다. 전분을 넣지 않아 국물은 더 빨갛고, 덜 걸죽했다.

나는 쿠팡이츠로 굳이 아구찜을 시킨 다음 불평하는 버릇이 있다. ‘말려서 꼬들꼬들하고 감칠맛이 나는 아구로 만들지 않은 아구찜이 무슨 아구찜인가!’ 짜증을 내며 생아구살을 맛있게 발라 먹는다. 들어보니 요즘은 마산에서도 생아구로 만든 아구찜이 더 인기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말린 아구는 특유의 감칠맛이 지나치게 진한 나머지, 꼬릿한 맛이 난다. 젊은 세대는 그 맛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단다. 하지만 당신이 마산에 갈 일이 있다면 꼭 오동동 아구찜 골목에서 말린 아구로 만든 찜을 먹어야 한다. 아구로 만든 코다리찜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좀 더 잘 이해가 갈 것이다.

아구찜은 확실히 나의 소울푸드였다. 1980년대에는 외식이라는 것이 그리 발전하지는 않았다. 당시 막 생기기 시작한 ‘가든’ 스타일의 고깃집을 제외하면, 밖에서 음식을 사 먹는 일이 아주 익숙하지는 않던 시절이다. 그래서 주말이면 내 가족은 아구찜을 먹으러 갔다. 벌건 국물에 밥을 비벼 마른 아구 한 점을 올리면 그렇게 밥이 맛이 났다. 부산으로 이사를 가자 오동동의 아구찜을 먹을 수 없게 됐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마산 사람 눈으로는 영 거칠고 투박했다. 부산으로 간 이후에도 오랫동안 마산이 그리웠다. 하지만 거기에도 지금 나의 소울을 건드리는 푸드는 있었다. 밀면이다. 서울 사람인 당신이 부산에 내려가서 한 젓가락을 먹은 후 ‘빨갛고 달달한 맛이 그냥 분식집 냉면이랑 비슷해서 도저히 고고한 평양냉면과 비교할 수 있는 음식은 아니군’이라고 주변 부산 사람들 귀에는 들리지 않게 불평하는 바로 그 음식 말이다.

밀면은 주말의 음식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선포했다. “주말에는 밥을 하지 말고 사 먹기로 한다.” 아버지는 외국 생활을 오래 한 덕에 여전히 꼿꼿하기 그지없는 경상도 남자임에도 조금 세련된 구석이 있었다. 그건 ‘주말에는 가사 노동을 하지 말자’는 일종의 선언이었을 것이다. 주말의 모든 식사를 주문해서 먹은 건 아니었다만, 그래도 큰 압력밥솥에 매끼 밥을 하는 일은 사라졌다. 특히 토요일 점심은 거의 무조건 밀면이었다. 토요일도 학교를 가는 시절이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면 어머니는 만 원짜리 지폐를 하나 들려주며, “요 앞 밀면집 가서 포장 좀 해온나”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살던 지역은 부산에서도 가장 내륙에 위치한 동래였다. 당시 동래에서 꽤 유명하던 ‘동래밀면’이 집 근처에 있었다. 방탄소년단 정국과 RM이 다녀간 이후 요즘은 아미들이 부산에 가면 꼭 찾는 맛집이 되었다고 들었다. 설마 그걸 가게 간판에 걸어놓았을까 싶었는데 구글로 사진을 찾아보니 정국과 RM의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있다. 하이브 직원이 이 글을 읽고 동래밀면을 초상권 위반으로 고발하지 않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부산 동래밀면 내 BTS RM이 다녀간 자리

하여간 토요일 점심마다 먹던 밀면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맛있었다. 한약재를 넣어 함께 우린 돼지고기 육수에 빨간 다대기를 넣고 슥슥 휘저은 뒤 국물을 들이키는 순간, ‘캬, 이게 부산의 맛이지’ 싶었다. 아니면 경상도의 맛이지 싶었다. 나도 알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서울 독자들, 특히 평양냉면이야말로 차가운 면 요리의 진수라고 생각하는 식도락가라면 이미 고개를 젓고 있을 것이다. 그래. 인정한다. 밀면은 평양냉면의 부산식 카피다. 그렇게 시작했다. 함경남도 흥남시에서 동춘면옥이라는 냉면집을 하던 주인장이 한국전쟁 시절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가 차린 ‘내호냉면’이 밀면의 시작이다. 전쟁통에 메밀을 구할 수 없자 미군이 원조한 밀가루로 면을 만들고 함흥냉면처럼 다대기를 올렸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의 아름다운 만남이 전쟁 시절 부산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밀면은 부산 지역의 전통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필동면옥 전경

나는 서울서 처음으로 평양냉면을 먹었던 날을 기억한다. 2004년 여름이었다. 직장 선배가 데려간 ‘필동면옥’에서 육수를 마시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서울 사람에게 말했다. “행주 빤 물 같은데요?” 나는 아직도 그때 보았던 경멸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남쪽 바닷가에서 올라온 ‘상놈’은 진짜 서울의 맛을 모른다는 듯한 눈빛. 물론 그 경멸의 눈빛을 되갚고자 나는 열심히 서울 사람이 되기로 했다. 사투리도 표준말로 바꾸었다. 경상도 사람이 사투리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경상도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정치과몰입자 중에서는 ‘경상도 사람들은 경상도 권력을 누리기 위해 사투리를 고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무슨 소리냐. 경상도 사투리(그리고 함경도 사투리)는 한국에서 거의 유일한 성조어다. ‘부산러’들은 성조로 말을 하고 성조로 알아듣는다. 우리는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2의 2승, 2의 e승, e의 2승, e의 e승을 구별하여 발음할 줄 안다. 그냥 좀 다른 언어인 것이다. 고치기가 정말이지 힘들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경상도 출신 서울인들이 ‘워료일’을 ‘월료일’이라고 전혀 다른 지점에 강세를 두고 발음하며 ‘나는 완벽한 서울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을밀대

우래옥

을지면옥

서울 생활 20년 만에 나는 거의 완벽한 서울 사람이 됐다. 평양냉면 애호가가 됐다. 필동면옥과 을지면옥과 을밀대와 우래옥의 맛을 구분할 수 있는 서울 사람이 됐다. 하지만 나는 밀면 앞에서 코를 드는 서울 사람들에게 아직 굴복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평양냉면 애호가들은 밀면은 다 비슷비슷한 맛이라며, 어차피 강렬한 다대기를 넣어 매운맛에 먹는 냉면 유사품이라며 코웃음을 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부산 유명 밀면집의 밀면 맛을 구분할 수 있다. 화끈하고 거친 가야밀면, 소담하고 차분한 개금밀면, 부드럽고 가정적인 동래밀면과 국제밀면, 한약재 맛이 강한 춘하추동 밀면. 그 모든 밀면집의 맛은 다 다르고 개성이 있다. 모든 것을 서울 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해석하는 한국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건 로컬리티, 그러니까 지역성이다.

모든 것이 전주비빔밥은 아니다. 전주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어떤 비빔밥집이 최고의 비빔밥집인가를 두고 격렬하게 논쟁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의 소울푸드인 밀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부산에 놀러 간다면 밀면 투어를 강하게 권하고 싶다. 다대기에 숨은 개성을 발견하기를 권한다. 삼시세끼 밀가루 음식만 어떻게 먹냐고? 탄수화물 중독인 당신은 어차피 어제도, 오늘도 배민으로 밀가루 음식을 시켜 먹었다. 괜히 빡빡하게 굴지 말라. 글루텐 프리 밀가루로 만드는 밀면은 없나요? 맙소사. 인정한다. 이 질문을 던지는 당신은 100% 서울 사람이다. 당신은 그냥 서울을 떠나지 말라. 아니, 서울도 글루텐으로부터 자유로운 도시는 아니다. 당신은 캘리포니아로 가야만 한다.

Writer

김도훈(@closer21)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 평론가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고, 『낯선 사람: 뒤흔들거나 균열을 내거나』를 내놓았다.

 

현대미술 설명서: 아카이브가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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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겐 아카이빙이 생명이다!’ 이런 말을 종종 들어보셨을 텐데요. 대체 현대미술에 종사하는 창작자에게 아카이브란 어떤 영향을 끼치는 걸까요. «비애티튜드»에 현대미술 설명서를 연재하는 박재용 작가는 이번 글의 주제를 아카이브로 잡으면서 아주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픽션과 논픽션이 섞인 세계에서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요절 작가의 아카이브 사태를 간접 체험해볼 유일한 기회입니다. 이번 요절복통 아티클을 놓치지 마세요!

매일을 기록한 온 카와라(1932-2014)의 ‹날짜 그림(Date Painting)›과 그의 도록을 위한 부록(?)으로 만든 ‹날짜 그림› 스티커 시트

현대미술 설명서: 아카이브가 뭐길래

모니터 혹은 모바일 디바이스로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 당신은 미술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혹은 장르와 관계 없이 활동하는 우리 시대의 창작자라 하더라도 별 상관은 없다). 이번 달에는 뭘 또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며 화면을 스크롤하려는 찰나, 갑자기 가슴을 꽉 누르는 듯한 압박감과 함께 쥐어짜는 통증을 느낀다. 식은땀이 나고, 숨은 쉬기 어렵고,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토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손에 쥐고 있던 마우스나 휴대전화는 이미 바닥에 떨어졌다. 갑자기 시야가 흐려지면서 모든 게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당신은 창작 활동의 과로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스트레스로 인해 급성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상을 떠나기 전 당신이 마지막으로 본 풍경은 바로…

급히 꾸려진 당신의 장례식엔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전시 오프닝만큼이나 손님이 많다. 아직 창작의 꽃을 다 피우지 못하고 떠난 당신은 작가로서의 활동이 길지는 않았지만, 오랜 학교 생활을 하며 동료와 좋은 기억을 많이 쌓았다. 그런 만큼, 당신의 친구도 웬만하면 당신의 마지막을 함께 하려 시간을 낸다. 개중에는 심지어 잠시 교환학생을 다녀왔던 나라에서 부고를 듣고 급히 달려온 외국 친구에, 내일 오프닝을 앞둔 전시를 준비하다 달려온 학교 동기도 있다. 장례식장 한쪽에 놓인 대형 LED 스크린에는 당신의 휴대전화에 남은 작업실 사진, 동료들과 밤새 전시장 설치를 마치던 모습, SNS에 올렸던 여행 사진으로 만든 슬라이드쇼가 돌아가고 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작가의 장례식. 당신의 작업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슬프고 아쉬운 일이지만, 보통의 장례식과 달리 젊은 조문객으로 북적이는 장례식장에서는 사뭇 활기찬 기운마저 느껴진다. 며칠 뒤 있을 발인에는 당신의 조형예술학과 석사 과정 동기들과 최근 당신의 개인전을 기획했던 큐레이터 동료가 관을 들고 장지로 이동할 예정이다.

전반적으로는 슬프지만 기운 넘치는 이 장례식장 한구석에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고민 중인 사람도 있다. 그중 한 명은 당신이 최근 몇 년간 국내외에서 빠르게 주목받은 덕분에 인연을 맺은 갤러리에서 당신을 담당하는 갤러리스트다. 갤러리에서 훨씬 오래 일한 자신의 상사보다 상대적으로 젊고 경력이 짧은 그는 당신이 작가로 급격히 지명도를 높이는 동안 함께 성장했다. 친구이자 동료, 사업 파트너와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어쩌면 지난 몇 년 동안 당신의 모든 작업과 창작 과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이가 바로 그일지도 모른다. 어떤 작업을 얼마나 진행했는지, 어느 작업이 누구에게 판매되어 소장 중인지 등을 거의 모두 알고 있는 것 또한 그의 몫이었다. 심지어 스튜디오에 보관하기 어려워 창고나 수장고에 보낸 작업이 어디에 있는지는 갤러리스트인 그가 당신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머릿속은 당신이 세상을 떠나 느끼는 슬픔과 더불어 갖가지 계산으로 복잡하다.

무엇보다, 심근경색으로 생을 마감하기 전 당신의 망막에 마지막으로 맺혔던 장면이 갤러리스트의 심경을 복잡하게 한다. 얼마 전 구입한 당신의 맥프로를 켜면 가장 먼저 보이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약 10년 전부터 당신의 바탕화면과 드롭박스, 구글 드라이브, 네이버 N드라이브와 개수를 세기 힘든 외장하드, USB 메모리 등에 무작위로 저장된 작업 파일들이 장례식장을 지키는 그의 눈앞에 소용돌이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중이다. ‘혼돈 속의 질서’라고 했던가. 당신의 정리 시스템에는 분명히 어떤 질서가 존재했다(고 생각하는 건 장례식장 전체가 보이는 자리를 전략적으로 선점한 채 미술계 인사들을 관찰하다 넋이 나간 듯 보이는 갤러리스트의 망상인지도 모른다).

패션 위크에서 런웨이 쇼를 여는 패션 하우스와 컬래버레이션을 할 정도로 유명한 작가로 자리 잡은 당신이었지만, 아직 행정업무 처리나 작품과 자료 아카이브 구축을 담당하는 조수를 둬야 할 만큼 경력이 길지는 않았다. 작가의 전 생애에 걸친 모든 창작물을 목록화한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é’ 제작은 당신이 수십 년 뒤에도 여전히 성공적인 작가로 남아있을 때나 꿈꿀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작업실 밖에서 당신을 만난 사람들은 적당히 흐트러져 있지만 항상 깔끔한 옷차림을 유지하는 ‘서울 기반의 동시대 미술 작가’인 당신이 10년째 정리하지 않은 온갖 파일 꾸러미를 짊어진 ‘디지털 호더Digital Hoarder’일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우주의 엔트로피가 영원히 증가하는 것처럼 멈추지도 않고 계속 쌓여가는 파일 더미가 영감의 원천이라는 사실 또한 알 리가 만무했다.

1990-92년 시기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런던 스튜디오를 아일랜드의 휴레인 미술관이 1998년에 구매하여 통째로 옮겨 놓은 모습.

스튜디오의 모든 물품의 상세 내역을 별도의 웹사이트(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 페리 오그덴, 제공: 프랜시스 베이컨 이스테이트.

‘그건 그렇고…’ 갤러리스트는 다시 생각한다. ‘지금 당장 급한 건 파일 정리가 아니라 스튜디오와 창고 정리 아닐까?’ 애써 두둔해보자면, 당신의 스튜디오는 매우 ‘창의적인’ 상태다. 마치 아일랜드의 한 미술관이 바닥에 떨어진 휴지 조각까지 통째로 옮겨간 현대미술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런던 스튜디오와 같은 모습이랄까? 불행 중 다행이라면 죽을 때 이미 참여 중이던 국내외 미술관, 갤러리, 대안공간 스물두 곳에 작업이 나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시장에 놓인 작업은 어쨌든 세심한 보살핌을 받았고, 운송업체가 작업을 반출하기 전, 전시장 도착 직후, 전시 종료 후 다시 포장해서 내보내기 전에 ‘컨디션 리포트’를 작성해두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뒤죽박죽 작업 더미와 문서 더미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디에선가 전시가 된 기록이 남겨진다면 언젠가 당신의 작업이 진짜라는 걸 확인해 줄 귀중한 자료가 될 테니까.

하지만 한 줌의 다행이 있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너무 일찍 한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어버린 당신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미술 시장의 모든 사람이 기를 쓰고 뒤쫓는 엄청난 가치를 창출하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누가 억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희소성’이라는 가치다. (한때 세상의 모든 부를 다 안겨줄 것 같았던 NFT가 획기적이었던 건 바로, 이 희소성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똑똑한 자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희소성’을 ‘무한히’ 만들 수 있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청소 대행업체를 부르면 100리터 재활용 봉투와 잡스러운 건설 자재를 담는 마대, 5t짜리 트럭 두 대를 가져와 모든 걸 다 치워버릴 수 있는 당신의 스튜디오. 그 안에 대체 어떤 희소한 것이 숨겨져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빈소를 열자마자 들러서 거액의 조의금을 두고 간 갤러리 대표 역시 갤러리스트에게 최대한 빨리 당신이 만들어 둔 작업을 목록으로 정리해서 보고하라며 넌지시 귓속말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차라리 프랜시스 베이컨의 런던 스튜디오처럼 작가의 스튜디오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소장품으로 만들어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수집하라고 접근해보는 건 어떨까? 재작년 개관한 홍콩의 시각문화 뮤지엄 M+는 작가의 작업만 수집하지 않고, 거리의 간판이나 디자이너가 작업한 공간 전체를 소장품으로 수집하기도 했으니, 한국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갤러리스트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져만 간다.

엄청난 걸작을 잔뜩 남겨놓고 세상을 떠난 무명 화가의 작품을 둘러싼 호러 스릴러 영화 ‹벨벳 버즈소Velvet Buzzsaw›(2019).

욕망에 눈이 먼 갤러리스트는 작가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이 모르는 곳에 작업을 숨기려는 음모를 꾸민다. 그리고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1년에 여섯 사람 몫을 하는 것처럼 보이던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여섯 배 빨리 세상을 떠날 줄 미리 알았다면 뭔가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한국의 미술 대학에서도, 외국의 아트 스쿨에서도, 작업을 아카이빙하는 교육은 그리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artworkarchive.com 같은 구독형 서비스를 알았다면 도움이 되었을까? 1년 동안 한 달에 24달러를 내면 무제한으로 작업의 정보를 기록할 수 있고, 어떤 작업이 어디에서 전시되고 있는지도 추적할 수 있다 (물론, 사용자가 꼼꼼히 기록한다는 전제하에). 아니면, 당신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 한참 전에 (이제서야 개관을 앞둔)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같은 곳이 문을 열었다면? 그랬다면…제 작업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하는 일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졌을까? (물론, 막상 아카이브에 가서는 앞서 세상을 살았던 작가가 남긴 뒤죽박죽 기록을 영원히 정리하는 아키비스트의 모습을 접하며 ‘역시, 소용이 없군’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당신이 남긴 산더미 같은 아날로그, 디지털 작업과 자료가 당장은 갤러리스트의 엄청난 골칫거리가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당신이 잘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설령 학생 시절부터 만든 모든 것에 꼼꼼히 번호를 부여하고 분류해 두었다 한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테니까. “아카이브는 항상 자료가 부족하다.” (이 문장은 아를레트 파르주가 쓴 『아카이브 취향』(김정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0)에서 빌려온 것이다. 모든 아카이브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언제나 새로운 배열과 해석이 필요하다. 아무리 단단하게 잘 구축한 아카이브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갤러리스트가 잠시 상상한 것처럼, 화산 폭발 현장을 방불케 하는 복잡다단한 당신의 스튜디오 전체가 하나의 수집 항목이 되어 어느 미술관 수장고로 통째로 옮겨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박현기, ‹무제›, 1980.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다시 한번 다행인 건, 비록 당신은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지만, 당신의 작업은 그렇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개인의 기록이나 국가적인 역사에 관한 아카이빙도 아직 갈 길이 먼 한국에서, 미술 작가가 남기고 떠난 작업과 사물이 종종 처치 곤란한 짐이 되거나 보호받지 못한 채 사라질 뻔한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물론, 모든 역경을 뚫고 끝까지 살아남은 자료는 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아카이브 자료’가 되어 온 세상에 낱낱이 노출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화가 이중섭(1916-1956)이 살아생전 아내에게 보낸 편지는 국립현대미술관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영원히 남겨지게 되었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보냈던 인스타그램 DM이 뭐였는지, 죽기 며칠 전 트위터의 익명 계정에 툴툴거리며 남겨둔 말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는가? 당신의 사망 20주기를 추모하는 회고전에는 당신이 이곳저곳에 실명과 익명으로 남긴 디지털 발자국을 전시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깔끔한 종이에 인쇄되어 액자에 들어간 채. ‘왜 그걸 안 지웠지?’라는 후회가 드는 것도 있겠지만, 자고로 작가의 삶이 그러한 것을 어찌할까. 심지어 미국 국회 도서관에는 2006년부터 2017년 12월 31일까지 모든 트위터 사용자가 올린 모든 공개 메시지가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트위터 메시지를 감당할 수 없어 2018년 1월 1일부터는 선별적으로 ‘중요한’ 트윗만 보관하기로 했다.)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당신이 여전히 유효한 작가로 남아 있다면, 당신이 어느 겨울밤 술에 취해 올린 트윗 하나가 그 시기에 창작한 어떤 작업을 이해하는 미술사적 단서로 여겨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장례식장의 밤이 깊어져 가는 사이, 당신의 친구이자 동료, 사업 파트너인 갤러리스트는 생각을 정리한다. 이렇게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당신의 1주기를 맞이하는 내년 이맘때면 사망 직전 당신이 집중하고 있던 새로운 작업이 세상에 공개될 것이다. 전시 도록에는 진지한 미술사 연구자와 생전에 당신의 작업에 대해 평론을 썼던 여러 평론가가 당신의 삶과 작업 전체를 훑는 여러 편의 에세이를 쓰게 된다. 도무지 정리가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작업과 자료는 ‘혼돈 속의 질서’를 만들어 정리될 것이다. 그중 일부는 새롭게 문을 여는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에, 일부는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아카이브에, 또 다른 자료는 홍콩에 있는 아시아아트아카이브에 기증될 것이다.

당신의 작업이 앞으로도 계속 중요하게 여겨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고, 잠깐이나마 당신의 작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갑작스러운 죽음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영원히’ 보관하며 ‘끊임없이 재해석되어야 하는’ 아카이브에 당신의 작업을 둘러싼 자료를 성공적으로 기증하게 된다면, 적어도 당신이라는 작가와 당신의 작업이 미술의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에서 영원히 잊히는 일만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떠난 당신을 아카이브의 한 조각으로 남겨두는 게 부디 당신이 남겨둔 작업을 더 좋은 가격에 판매하는 것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갤러리스트로서는 더 바랄 게 없다.

1993년에 열린 전시 자료를 찾기 위해 방문한 뉴욕 휘트니 미술관의 자료 상자에서 찾은 1993년 신문 기사 스크랩. 

사진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미술관에서는 30년 전 치러진 전시와 관련된 편지와 문서를 모두 실물로 보관하고 있다. 사진: 박재용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 혹은 모바일 스크린으로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냈다면, 당신은 다행히 심근경색으로 삶을 마감하진 않았다. 하지만 당신은 스물두 곳의 국내외 미술관, 갤러리, 대안공간에서 동시에 전시를 진행하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당신의 디지털과 아날로그 공간의 정리 상태는…글을 쓰는 나로서는 그 부분에 대해 알 도리가 없다. 당신의 컴퓨터 바탕 화면과 작업실이 부디 이 글의 주인공이나 프랜시스 베이컨의 스튜디오 같은 상태는 아니길 바랄 뿐이다.

만일 비슷하다면,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예술가 생존법』(헤더 다시 반다리, 조나단 멜버 저, 김세은 번역. 미진사, 2015)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 『ART/WORK』에서 작품을 분류하고 기록하는 부분을 한 번 읽어봐도 좋겠다. 당신이 미술사에 기억되고 기록될 만한 작가이자 의미 있는 사람으로 남게 될지, 당신 인생의 어느 부분이 어떤 식으로 편집되거나 포착되어 미술관의 좌대나 벽에 걸리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

나름의 체계를 갖춘 작은 아카이브를 스스로 만들어보는 건 작가로서도, 한 사람으로서도 의미 있는 일임이 틀림 없다. 일단 바탕 화면에 쏟아 내린 파일 더미와 작업실 한구석을 차지한 작업을 상대로 작은 질서를 부여해보는 건 어떨까. ‘아카이브’를 열쇳말 삼는 미술 전시의 서문이나 관련 자료에서는 항상 빠지지 않는 책이 한 권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쓴 책 『아카이브 열병(Archive Fever)』(Éditions Galilée, 1995)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에서는 아직 단 한 번도 개인이나 집단이 열병에 걸린 것처럼 아카이빙에 매달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러게. 대체 아카이브가 뭐길래?

살펴보면 도움 되는 아카이브 몇 가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021년 말 개관을 목표로 준비한 미술 아카이브. 2017년부터 자료 수집을 시작했고, 2023년 올해 마침내 문을 열 예정이다. 

2000년에 설립된 아시아 현대 미술 아카이브. 아시아 지역에 존재하는 미술의 ‘여러 가지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미국과 인도에도 지부가 존재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있는 미술아카이브 소장품을 검색하고, 직접 열람을 요청할 수 있다. ‘아카이브 계층보기’ 기능을 제공한다.

현재 약 20만 점의 작업을 색인으로 만든 온라인 컬렉션. 이 중 9만점 이상을 온라인에서 바로 열람할 수 있다.

1만 4000개 이상의 전시, 행사, 퍼포먼스,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 문서, 영상 43만 5000점 이상을 보관 중인 온라인 아카이브. 고화질 이미지로 전시를 소개하는 웹사이트 https://www.contemporaryartdaily.com/ 의 스핀오프로 만들어졌다.

199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된 디지털 아카이브. 현재, 7350억 개의 웹페이지, 4100만 개의 책과 글, 1470만 개의 오디오 기록, 840만 개의 영상, 440만 개의 이미지, 89만 개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수록 중이다. ‘Wayback Machine’ 페이지에서는 특정 웹사이트 주소를 입력해 최대 26년 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산하의 예술기록원에서 2011년부터 운영하는 웹사이트. 20세기 중후반 한국에서 이뤄진 다양한 예술 전시, 공연 등의 기록을 볼 수 있다.

2007년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 시작한 미술 아카이브. 자료를 검색할 수 있는 웹사이트와 함께, 물리적인 공간을 운영한다.

동시대 미술 창작을 기록하는 아카이브이자 라이브러리. 작가의 아카이빙 구축을 돕는 작업도 함께 진행한다.

Writer

박재용(@publicly.jaeyong)은 현대미술서가 서울리딩룸
(@seoulreadingroom)의 장서광이자, 뉴오피스(@new0ffice)에서 일한다.
큐레이터이자 통번역가, 연구자, 교육자이며, 허영균과 함께
NHRB(@NHRB.space)의 공동 아트디렉터를 맡고 있다.

현대미술 설명서: 예술하려면 ‘미쳐야’ 하나요?

Report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이 XX, 미쳤네. 대박!” 광기를 예술가의 천재성과 동일시하는 관점은 옛날 옛적부터 있었어요. 정신이 아파 보일수록 천재의 비밀스러운 축복이자 저주라고 수군거리기도 했죠. 근데 예술가들은 진짜 어느 정도 미쳐야 위대해지는 걸까요? 결국 예술에는 광기가 필수 불가결한 조건일까요? 박재용 작가는 창조성과 광기에 대한 여러 예시를 살펴보며 우리가 아는 선입견을 분석하고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읽기만 해도 흥미로운 미친(?)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박이소, ‹우리는 행복해요를 위한 드로잉›, 2004, pencil, color pencil on paper, 30×21cm

창조성과 광기

창조적인 사람의 정신에 어딘가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예컨대 기원전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가 했다는 말을 살펴보자. “약간의 광기도 없는 위대한 천재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대 그리스인이 보기에 창조성이나 천재성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안겨준 선물이었고, 그런 선물을 받은 사람은 그 대가로 광기나 산란한 정신 상태를 앓았다.

알브레히트 뒤러, 멜랑콜리아 I, 1514

주류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마녀로 취급하며 화형에 처하던 중세 시대를 지나서도 이런 생각은 이어졌다. 16~17세기 유럽의 엘리트 계층 사이에선 ‘멜랑콜리Melancholy’가 유행했다. 구슬픈 모습으로 슬픔에 잠겨 생각에 빠진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더 예술적이고 창조적이라는 분위기를 풍긴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한편, 이때 멜랑콜리는 단순히 슬픈 감정뿐 아니라 우울감과 불안 등 오늘날 우리가 ‘정신과 질환’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증상을 포괄했다. 창조적으로 되기 위해 반드시 미쳐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정신이) 좀 아파 보이면 창조적일 거라는 생각이 팽배했던 셈이다.

한편, 18~19세기에 유행했던 낭만주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낭만주의에서는 광기가 마치 천재의 특징인 것처럼 여겨졌다. 광기는 일종의 고양된 정신 상태이며, 광기를 통해 평범한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숨겨진 영역이나 인식에 닿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타고난 재능, 예술을 향한 열정,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불행과 이로 인한 고독함, 그리고 일반인이 지닌 뻔하디뻔한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까지. 이제 광기는 마치 창조성의 필요 조건이라도 되는 듯 여겨졌다. 일반인의 사고로 이해하기 어려운 ‘고독한 천재 예술가’의 고정 관념은 이렇게 굳어진 것이다.

미친 예술가들

그런데 예술을 하려면 정말 ‘미쳐야’ 할까? 이 질문에 화답하듯,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많은 예술가들이 광기를 드러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스스로 귀를 자른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가스 오븐에 머리를 넣고 자살한 실비아 플라스(1932~1963), 조울증을 앓다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버지니아 울프(1882~1941), 거식증과 조현병에 시달리다 짧은 생애를 마감한 이중섭(1916~1956)까지…당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이름을 알린 많은 예술가들이 정신적인 문제를 겪었다. 물론 그들이 살던 시대에는 오늘날의 정신의학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정확한 증상은 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추측할 뿐이다. 정말 ‘제대로’ 미친 예술가는 의료 기록이 남아 있는 20세기 이후의 예술가 중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Andy Warhol at the Jewish Museum, 1980 © Bernard Gotfryd

“어렸을 적에 1년 간격으로 세 번의 신경쇠약을 겪었죠.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걸 멈출 수 없었어요. 여름 내내 찰리 맥카시 인형과 종이를 오려낸 인형과 함께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답니다.” 

– 앤디 워홀(1928~1987)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앤디 워홀의 증상은 그가 초등학생이던 여덟 살 때 처음 발생했다. 멈추지 않는 증상에 친구들의 놀림과 따돌림까지 더해지자 결국 워홀은 8주 동안 학교를 쉬게 되었다. 그때 워홀의 어머니는 그의 식사를 ‘캠벨 수프’로 대신했고, 불안감에 휩싸인 어린 워홀에게 점잖은 신사인 클라크 켄트가 슈퍼맨으로 변신하는 슈퍼히어로 만화를 안겨주었다. 워홀은 이때부터 유명인이 되는 꿈을 품었다고 한다.

앤디 워홀은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피부의 일부가 하얗게 뜨는 백반증을 앓았고, 종기로 고생했으며, 이로 인해 코에 피지선 문제가 생겨 붓기에 시달렸다. 게다가 음낭에는 작은 혈관종이 있어 그의 자신감에 영향을 미쳤다. 그로 인해 워홀은 외모에 엄청난 신경을 쓰게 되었고, 다양한 화장품으로 외모를 꾸미고 성형수술까지 받게 되었다. 1950년대 중반에는 심지어 부어 오른 코를 사포로 갈아내는 시술을 받기도 했다. (다만, 이 수술의 효과는 ‘일시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마약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평생 하루에 두 알씩 복용한 체중감량제 처방전에는 (현재 한국에서 마약류로 분류하는) 메스암페타민이 포함되어 있었다.

워홀의 총격 사건을 보도한 «Daily News» 1968년 6월 4일 기사

기록에 따르면, 앤디 워홀은 공감 능력이 부족했고, 자신이 운영하던 ‘팩토리’ 직원에게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은 악덕 고용주였다. 1968년 그는 불만을 품은 동료 작가에게 총을 맞아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이때 자기 목숨을 살려준 의사에게 치료비 3000달러(2023년 기준으로 약 3000만원)를 죽을 때까지 지불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워홀이 사망하고 30년이 지난 뒤 그가 남긴 610개의 ‘타임캡슐’을 개봉하면서 밝혀졌다. 더불어 오랫동안 이어지는 인간관계를 맺기 어려워했고, 이와 동시에 인정과 칭찬을 갈구했다. 그런 워홀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였다.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되는 것 그리고 부자가 되는 것. 요약하면, 워홀은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앓았다.

워홀은 쇼핑 중독자이기도 했다. 일단 물건을 구매하면 절대 버리지 않았기에 그의 집은 10만 개가량의 물건으로 가득 찼다. (대부분은 워홀이 사망한 후 포장을 뜯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의 작업실인 팩토리에 남겨진 610개의 타임캡슐에는 각종 영수증, 개봉하지 않은 편지, 고장 난 장난감, 편지, 음반, 상한 피자 조각 등이 들어 있었다. 게다가 워홀은 갖가지 공포증에도 시달렸다. 어릴 적부터 어두운 곳을 무서워했고, 개인 주치의를 두고 주기적으로 피부과를 방문했지만, 병원 공포증이 있어서 담낭 제거 수술을 미루기도 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전시를 열었기에 극복한 것 같기는 하지만, 한때는 비행 공포증이 있다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이 모든 강박과 성격 이상―혹은 광기는―앤디 워홀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증거인 걸까? 이처럼 성공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워홀처럼 ‘미쳐야’ 하는 걸까?

미친 사람이 정말로 더 창조적이다?

‘고뇌하는 예술가’라는 고정관념이 얼마나 유효한지와는 별개로, ‘창조성과 광기’라는 주제를 정신질환의 관점에서 다루려는 연구는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그중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예는 정신의학자 아놀드 루드비히가 쓴 책 『천재인가 광인인가(The Price of Greatness)』이다. (원서는 1995년, 한국어판은 2007년에 출간됐다) 루드비히는 1000여 명의 비범한 사람들이 어떤 정신질환을 앓았는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주변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꼼꼼히 조사했다.

루드비히가 세운 가설은 천재적인 창의성이 정신질환―혹은 광기―과 유의미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었고, 적어도 그의 검증에 따르면 결론은 ‘그렇다’에 가깝다. 예술계 종사자들은 조현병이나 조울증처럼 정신질환을 겪을 확률이 일반인 대조군에 비해 높았다. 뿐만 아니라 예술계 종사자의 친인척들 역시 정신질환을 겪는 비율이 높았다. 고대 그리스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창조성은 정말로 정신질환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신의 선물인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하는 건 지나친 비약임을 명심하자).

Louis Vuitton × Yayol Kusama in Paris

이와 같은 주장은 유전자 차원에서도 검증이 이뤄졌다. 저명한 학술지 «네이처 뉴로사이언스Nature Neuroscience»에 실린 논문 「유전 변이가 창조성을 정신의학적 문제에 연결짓다(Genetic variation links creativity to psychiatric disorders)」는 조현병 및 조울증과 관련한 유전적 위험 수치가 창조성과 관련이 있음을 밝혔다. 역시나 일반인 그룹과 예술 단체 가입자 사이에 정신질환 비율이 유의미한 수치로 차이가 났던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은, ‘예술 종사자 = 정신질환자’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예술 종사자는 보통 사람과 정신질환을 앓은 사람의 중간 어딘가에 존재한다. 조울증과 조현병 등의 정신질환을 인지와 감정 처리의 일탈로 빚어지는 결과라고 보았을 때 남다른 생각에서 유래하는 창조성의 특성을 되짚어보면 어느 정도 유사점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광기와 창조성은 그야말로 ‘한 끗’ 차이라는 이야기다.

박이소의 유작인 ‹우리는 행복해요›는 그가 남긴 드로잉을 바탕으로 부산, 로스앤젤레스 등 여러 장소에서 재현됐다.

내가 조금은 ‘미친’ 것 같다면

“남들처럼 일하고 돈 벌고 하는 방식에는 전혀 적응이 안 되니, 이런 보호구역에 들어가서 약간 아픈 척하면서 적당히 뭉개 보려고 (작업을) 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예술의 영역이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호구역이나 양호실 같다고 생각합니다.”

-고(故) 박이소(1957~2004)

치료가 필요한 정신질환을 앓거나 전문가를 통한 상담이 필요한 심리 상태에 놓여있지는 않더라도, 창조성을 요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느 정도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구석이 있고, 창작자의 일이란 그걸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며 스스로(를) 이해하고 이를 타인에게도 전달하는 것일 테니까. 모든 게 마냥 편하고 좋기만 하다면, 세상이 참 살기 좋고 아름답다는 말을 던지거나 예술의 순수한 형식적 측면을 따지는 일 외에 할 게 없을지도 모른다.

인격 장애를 겪은 앤디 워홀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러 예술가처럼 상태가 정신질환에 이를 지경은 아니더라도, 창조성을 다루는 우리 모두는 조금씩 ‘미쳐’ 있다. 자기를 둘러싼 환경의 갑갑함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조금씩 어긋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만약 이런 점을 어느 정도 타고났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스스로와 주변의 (몸과 마음에 대한) 건강에 주의를 더욱더 기울여야 한다. 창조성과 광기 또는 정신질환의 관계를 다룬 여러 연구를 살펴보면, 결국 창조성을 타고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정신질환에 더 취약하기 때문이다.

혹시 내가 가진 창조성이 나를 힘들게 만드는가? 그렇다면, 스스로의 창조성에 도취하거나 소통의 어려움을 토로하기 전에 자신과 주변을 돌보는 시도를 해보자. 지금은 2023년이고, 지구가 불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집중해야 할 키워드는 ‘고독한 천재 예술가’가 아니라 미친 사람들마저도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연대’와 ‘협업’이다. 자조적인 비난처럼 쓰이는 ‘예술가병’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한다. ‘예술’ 혹은 ‘예술가’라는 알량한 단어를 방패 삼아 온갖 기행을 일삼고, 때로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모습은 창조성을 질환으로 치환하는 지름길이다. 2023년을 살아가는 우리는―그러니까 당신은―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다.

참고

1.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이규현 옮김, 나남출판, 2003)에서 광기 역시 사회 지배적 권력에 의해 ‘구성’되는 것임을 밝힌 바 있다. 그런 점에서, 하미나의 인터뷰집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여성 우울증』(동아시아, 2021)을 추천한다.

2.  앞서 본문에서 소개한 아놀드 루드비히의 『천재인가, 광인인가 – 저명 인사들의 창의성과 광기의 연관성 논쟁에 대한 연구』(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07) 역시 읽어볼 만하다. 아쉽게도 절판인 탓에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으니, 도서관 이용을 권한다.

3. 예술인복지재단은 “예술창작활동 과정에서 심리적‧정신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예술인의 고충해소를 통해 창작의욕과 심리적 건강을 도모”하고자 예술인 심리상담을 제공한다. 개인과 집단 모두 신청할 수 있다. http://www.kawf.kr/welfare/sub02.do

Writer

박재용(@publicly.jaeyong)은 현대미술서가 서울리딩룸(@seoulreadingroom)의 장서광이자, 뉴오피스(@new0ffice)에서 일한다. 큐레이터이자 통번역가, 연구자, 교육자이며, 허영균과 함께 NHRB(@NHRB.space)의 공동 아트디렉터를 맡고 있다.

유일하게 남은 청춘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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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지금 한국은 ‹슬램덩크› 열풍입니다. 일본에서는 1990년, 한국에서는 1992년 첫선을 보인 만화 ‹슬램덩크›의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감독과 각본을 맡은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얼마 전 개봉했기 때문이죠. 일본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 만화로 꼽히는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30년 세월을 넘어 다시 한번 한일 양국을 강타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두가 이미 ‹슬램덩크›에 대한 글을 쓴지라 지독히도 써지지 않았다고 고백한 김도훈 작가의 ‹슬램덩크› 글을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사실 이 글은 지난주에 썼어야 한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쓰지 못했다. 큰일이다. 그동안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매체에, 지나치게 많은 ‹슬램덩크› 관련 글을 써버렸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미 다 나왔다. 지금 당장이라도 구글이나 소셜 미디어에 ‘슬램덩크’를 검색해보시라. 과거의 영광을 스크린으로 다시 보며 울부짖는 엑스세대 아재들의 글, 그게 보기 싫다고 불평하는 Z세대의 글, 그 사이에서 마음껏 좋아하면 아재 취급을 받지 않을까 갈팡질팡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글이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나는 전자다. 1976년에 태어났으니 확실히 엑스세대다. 아재다. 모든 엑스세대 아재가 ‹슬램덩크›를 좋아했던 건 아닐 것이다. 나도 딱히 그걸 좋아할 이유는 없었다. 내가 ‹슬램덩크›를 읽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었다. 나는 농구를 좋아한 적이 없다. 당시 한국에서 농구의 인기는 점점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농구대잔치’가 야구를 위협할 정도로 폭발하던 시기는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 아마도 한국 최초의 현대적 슈퍼스타 농구선수였을 문경은이 프로에 데뷔한 시기는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1994년이었다. 다만 마이클 조던의 이름은 모두가 알았다. 농구는 확실히 미국의 스포츠였다.

나는 농구가 싫었다. 농구라는 이름부터 싫었다. 싫어하는 걸 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건은 고등학교 1학년 체육 시간에 벌어졌다. 왜 체육 선생이 농구를 실기평가에 어울리는 스포츠라고 생각했던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실기는 간단했다. 코트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농구공을 드리블해 골대에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일단 드리블은 가능했다. 문제는 골이었다. 아무리 골대를 향해 공을 던져도 도무지 바스켓에 들어가질 않았다. 대여섯 번을 실패하자 애들이 응원을 시작했다. 내 삶이 농구 만화라면 열띤 응원을 받는 순간 “대지여, 바다여, 산이여,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여. 아주 조금씩 나에게 원기를 나눠 줘!”라고 외치며 멋지게 골대에 공을 넣었을 것이다. 인생은 만화가 아니다. 그로부터 나는 운동장 한쪽에 있는 농구장 출입을 영원히 (심적으로) 금지당했다.

잘된 일이었다. 나는 어차피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나는 그저 스포츠 선수들을 좋아했을 뿐이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되면 스탠드에 앉아 농구하는 친구들을 감상하며 ‹슬램덩크›를 읽었다. 몰래 읽었다. 그리고 곧바로 빠져들었다. 도대체 왜? 그건 내가 남자 고등학교라는 약육강식의 피라미드에서 본질적으로 최하위에 속하는 허약한 모범생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나에게 고등학교 3년과 군대 2년 중 무엇을 다시 겪겠냐고 말한다면 나는 아무런 고민 없이 군대를 선택할 것이다. 군대에는 규율이라도 있다. 그 시절 고등학교에는 규율도 없었다. 내가 무슨 ‹말죽거리 잔혹사› 시절에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건 아니다. 그럼에도 1990년대의 고등학교는 세렝게티에 가까웠다. 거기서 나의 위치는 약간 발이 빠른 톰슨가젤 정도였을 것이다. 덩치가 크면 물소라도 되었겠지만 165cm가 채 되지 않는 키로 그런 위치를 점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송태섭이 되었다. ‹슬램덩크›를 읽는 동안 나는 송태섭이었다. 160cm대의 키로 도내 최고의 가드가 되고 싶은 송태섭이었다. 특히 나는 송태섭이 교화되기 전 정대만 일행과 맞서 싸우는 장면에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송태섭은 작은 키라는 육체적 약점을 뛰어넘기 위해 빠른 스피드와 지형지물을 싸움에 이용했다. 그는 싸울 때마다 책상 같은 물건을 딛고 뛰어서 발로 상대방을 가격했다. 바로 그거였다. 나는 교실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책걸상을 집어던지며 과하게 장난을 거는 놈들을 보며 ‘지금 책상을 딛고 뛰어서 발로 머리를 가격한다면 충분히 저놈을 쓰러뜨릴 수 있겠지’하는 망상을 하곤 했다. 이 망상을 가장 훌륭하게 극화한 것은 웨이브Wavve의 오리지널 드라마 ‹약한영웅 Class 1›이다. 아직 보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반드시 보길 권한다.

물론 나는 고등학교 시절 단 한 번도 누군가와 싸운 적이 없다. 톰슨가젤은 사자에게 덤비지 않는 법이다. 톰슨가젤은 오히려 톰슨가젤과 파벌을 나눠 싸우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그걸 통해 ‘약자의 연대’ 같은 건 좀처럼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는다는 뼈아픈 사실을 배웠다. 약자의 연대가 그렇게 잘 이루어진다면, 세상에 학교 폭력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공정하게 따져보자면, 나는 ‹슬램덩크›를 좋아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탐독하던 아다치 미츠루(安達充)의 세계가 오히려 나에게 딱 맞는 만화였다. ‹터치›와 ‹H2›의 온건한 세계야말로 내가 더욱 아끼고 사랑해야 할 젊음의 유토피아였다. 아니, 생각해보시라. ‹슬램덩크›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양아치다. 교실에서 난리를 피우는 양아치들과 함께 살면서 양아치가 주인공인 만화를 좋아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슬램덩크›는 일종의 판타지였다. 온갖 양아치가 다 등장하지만 희한하게 온건하고 바람직했다. 양아치는 양아치와 싸웠다. 양아치가 보통의 학생들을 건드리는 장면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모든 양아치에게는 각자의 이유가 있었다. 각자의 청춘이 있었다. 각자의 꿈이 있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井上雄彦)가 선택한 것이 그가 좋아하던 스포츠인 농구였을 따름이다. ‹슬램덩크›가 그냥 농구 만화였다면, 나는 그 만화의 모든 장면을 여전히 기억하고 애장판을 사들이며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른 중년과 함께 풋내기 슛을 흉내 내며 눈물을 쓱 닦지는 않았을 것이다. ‹슬램덩크›는 농구 만화가 아니었다. 그건 당시 청춘이던 나조차도 꿈꾸지 못했던 청춘의 절정이었다.

솔직히 말하자. 나는 키 작은 약골의 모범생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덕에 이렇게 글을 써서 먹고사는 어른으로 성장했지만, 그 시절 마음속의 나는 송태섭이었다. 종종 강백호였다. 가끔 서태웅이었다. 때로는 심지어 양호열이었다.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 우리는 우리와 닮은 캐릭터를 우상화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순간 되고 싶은 캐릭터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고, 그런 캐릭터는 우리 자신과 전혀 닮은 데가 없다. 우리 상상 속의 우리는 정치적으로 공정할 수 없다.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악인을 목격하는 순간 머릿속으로 그를 시원하게 두들겨 패는 상상을 하는 당신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것이다.

‹슬램덩크 더 퍼스트› 공식 티저 이미지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 되었나. 소설가 김애란의 위대한 표현처럼, 나는 자라 겨우 내가 됐다. 당신은 자라 겨우 당신이 됐다. 우리는 자라 겨우 우리가 됐다. 자라면서 우리는 우상을 잃었다. 모든 우상은 우리와 함께 자라 겨우 그런 존재가 됐다. 우리는 자라면서 많은 만화적 우상을 떠나보냈다. 그 시절 열광하던 많은 만화 캐릭터는 십수 년에 걸쳐 지루하게 서서히 성장하다가 재미없게 사라지곤 했다. 혹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캐릭터들처럼 갑자기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진화한 뒤 “니들이 열광하던 에바는 끝났어. 이젠 현실을 직시해”라며 완벽한 작별 인사를 해버렸다. 유일하게 남은 것이 ‹슬램덩크›다.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갑자기 ‹슬램덩크›를 닫아버렸다. 속편을 향한 모두의 희망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천재니까”라는 대사와 함께 모든 것이 끝났다. 강백호도, 서태웅도, 송태섭도, 더는 성장하지 않았다. 어른이 될 길목에서 그들의 청춘은 멈췄다. 바로 그 덕분에 그들은 여전히 늙은이들의 우상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열광하는 아재와 줌마들은 캐릭터의 새로운 성장을 보고 싶은 게 아니다. 그 시절 그대로 머물러 있는 청춘 속으로 다시 뛰어들고 싶은 것이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슬램덩크›의 속편이 아닌 것이 정말이지 기쁘다. 그들은 그 시절에 머물러야 한다. 그들은 성장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성장하는 순간,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물불 가릴 줄 모르는 멍청하고 대범한 청춘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살아보니 우리는 천재가 아니었다. 강백호도 어쩌면 천재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혹은, 결국 부상에서 극복하지 못한 채 동네에서 운동화 대리점을 경영하는 검은 머리의 덩치 크고 성격 좋은 아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맙소사, 우리에게 그따위 미래는 필요 없다. 우리의 미래는 이따위가 됐지만, 강백호와 송태섭의 미래는 그따위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러니 ‹더 라스트 슬램덩크›는 절대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누군가 이노우에 다케히코에게 내 간절한 메시지를 꼭 전달해주길 부탁드린다.

Writer

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loser21

그의 시에는 힙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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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래퍼는 거리의 시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랩이 시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인데요. 실제 랩이 지닌 라임은 영미권의 시문학에서 비롯했답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랩으로 표현하는 래퍼가 있을 정도죠. 힙합 저널리스트 김봉현 작가는 랩이 새로운 세대의 음악인 동시에 고전적인 시라고 믿습니다. 그런 면에서 박노해 시인을 가리켜 ‘랩이 곧 시의 친구이자 동료임을 알아본 시인’이라고 말하죠. 박노해 시인의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에서 김봉현 작가의 시선을 사로잡은 랩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 아티클에서 함께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힙합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말이 있다. 바로 ‘래퍼는 거리의 시인’이다. 나 역시 그랬다. 즐겨 들은 힙합에는 꼭 이런 가사가 있었다. ‘내 랩은 한 편의 시/ 나는 거리의 시인이지/ 내 시는 깊고 난 절대 쓰러지지 않아.’ 그럴 때마다 궁금했다. 이건 그냥 비유일 뿐일까, 아니면 정말로 랩이 시라는 뜻일까?

랩은 시와 관련 있다. 아니, 사실 랩은 시로부터 나왔다. 예를 들어, 랩이 지닌 ‘라임rhyme’은 영미권 시문학에서 비롯한 것이다. 영시에는 예전부터 라임이란 개념이 존재했고, 오래된 영시는 모두 라임을 맞추고 있다. 물론 동시대 음악 장르로 한정한다면 라임은 랩의 전유물에 가깝지만, 그 범위를 ‘과거’로 넓히고 ‘언어예술’로 확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랩이 지닌 라임은 랩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Sonnet는 오늘날로 치면 랩 가사나 다름없다. 그의 「소네트 18」을 비트에 맞춰 낭독해보자. 깜짝 놀랄 정도로 완벽한 랩으로 다가온다. 노파심에 말하면, 소네트를 랩 가사의 모양에 맞게 수정하고 다듬는 작업을 거친다는 말이 아니다. 소네트를 훼손하지 않고 원본 그대로 리듬에 맞춰 퍼포먼스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현재 영국에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랩으로 표현하는 ‘아칼라Akala’라는 래퍼가 있다. 그는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기를 맞아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대담을 나누고, 그의 공연에 참여하기도 했다.

래퍼 나스Nas (오른쪽 첫 번째) © Danny Clinch

‘할렘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던 미국의 시인 랭스턴 휴스Langston Hughes 또한 마찬가지다. 만약 ‘시인’ 랭스턴 휴스의 시와 ‘갱스터 래퍼’ 아이스-티Ice-T의 랩 가사를 나란히 적어놓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무엇이 시고, 무엇이 랩인지 온전히 구별해내는 사람이 과연 많을까?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둘 다 라임을 가졌고, 자유롭게 줄을 바꾸는 ‘구절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즉 시와 랩은 서술적 산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함축적·운율적 언어를 공통으로 지니고 있다.

물론 현대 자유시에 관해 논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다. ‘자유’라는 단어에서 알아챌 수 있듯 현대 자유시는 정형화된 운율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장(?)만 바뀌었을 뿐 현대 자유시 역시 다양하고 섬세한 시적 형태를 활용해 완성된다. 이는 랩 또한 마찬가지다. 오히려 과거의 시가 지닌 정형성을 여전히 보존하는 쪽은 랩이기 때문이다.

랩이 시가 아니라는 편견에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작용하는 것 같다. 하나는 랩은 ‘직설’이라는 단정이다. 물론 직설과 솔직함이 랩의 주요한 매력 중 하나로 작용한 점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랩은 거기에 머무르거나 그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니다. 랩은 직설인 동시에 수많은 비유적 언어를 활용한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리포트할 때도 있지만 그럴듯하게 지어진 스토리텔링인 경우도 많다. 랩이 시가 아니라는 편견에 기여하는 다른 하나는, 랩이 다루는 몇몇 주제에 관한 윤리적 거부감과 부당한 폄하다. 예를 들어 ‘돈’에 관한 랩 가사가 있다고 치자. 실제로 힙합의 역사에는 돈을 지칭하는 수많은 슬랭(은어)이 존재한다. 이미 수많은 비유적 언어를 창조한 랩은 그 자체로 새로운 사전을 보유한 존재가 된다.

나스2_(출처danny_clinch_photo)

래퍼 나스 © Danny Clinch

사람들은 왜 시를 좋아하는 걸까. 아마도 시가 ‘시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의 시적인 면모가 사람에게 감흥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랩이야말로 시적인 면모를 가장 강하게 지닌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랩 가사가 한 편의 시라면 랩은 입으로 표현하는 시다. 랩은 새로운 세대의 음악인 동시에 고전적인 시인 것이다.

랩을 반기는 시인들이 있다. 랩이 곧 시의 친구이자 동료임을 알아본 시인들이 있다. 박노해 시인도 그중 한 명이다. 박노해 시인은 아무래도 일단 『노동의 새벽』으로 기억된다. 그가 27살에 쓴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은 금서였음에도 100만 부가 발간됐다. 아마 한국에서 가장 상징적인 시집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는 군사정권 아래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기도 했다.

전쟁의 레바논에서 박노해 시인의 모습, 2007년 © 느린걸음

물론 박노해 시인에게 『노동의 새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를 통해 그는 꾸준히 세상에 목소리를 내왔고 많은 이에게 영향력을 끼쳐왔다. 래퍼 송민호의 인터뷰가 그 흥미로운 예다. «에스콰이어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평소에 시집을 많이 읽는다며 “박노해 선생님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정말 감명 깊게 읽기도 했죠”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송민호는 V LIVE에서 이 시집을 “내가 본 시집 중 최고”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놀랄 일은 아니다. 어쩌면 시인과 래퍼는 배다른 형제나 다름없으니까.

작년 박노해 시인은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이후 12년 만에 새로운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를 출간했다. 이 시집은 내게 조금 특별한 흥미로움을 안겨주었다. 박노해 시인을 가리켜 ‘랩이 곧 시의 친구이자 동료임을 알아본 시인’이라고 말하게 된 이유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그는 노동 시인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다른 누군가에게 그는 아마 랩에서 자기의 얼굴을 발견한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시인으로 기억될 것 같다.

시집에 수록된 「비움의 사랑」을 보자.

없네
네가 없네

해는 뜨고 별이 떠도
네가 있던 그 자리엔
네가 없네

나 그렇게 살아가네
비움으로 살아가네

사랑이 많아서
비움이 커져가네

너와 함께한 말들도 비워지고
너와 함께한 색감도 비워지고
너와 함께한 공기도 비워지고

나 홀로 있는
비움의 시간이 많아지네

여기 이 자리에 네가 없어도
난 네가 차지했던 그만큼의 공간을
그대로 비워두려 하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어
나는 결여된 사람이 되어가네

나는 비움의 파수꾼
나는 빈 사랑의 수호자
비움으로 너를 지키려 하네

이제 그 자리에 네가 없네
그 비움의 자리에 내가 사네

살아남은 사람은 어쨌든
다시 살아야 한다는 걸
나도 모르는 바 아니나

이 가득한 세계 한가운데서
나는 점점 제외되어가네

사랑이 많아서
비움이 커져가네

슬픔이 많아서
비움이 푸르르네

비움이 깊어서
가득한 사랑이네

– 박노해, 「비움의 사랑」, 『너의 하늘을 보아』, 느린걸음, 25~27쪽

[시구절]이미지-2

이 시는 박노해 시인이 미국의 래퍼 ‘투팍2Pac’의 어머니인 아페니 샤커Afeni Shakur의 글에서 일부를 따온 작품이다. “여기 이 자리에 네가 없어도 / 난 네가 차지했던 그만큼의 공간을 / 그대로 비워두려 하네”라는 부분에 영감을 받았다. 아마 투팍은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래퍼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는 서부 힙합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가족, 흑인 공동체, 친구 등에 관한 인간적이고 문학적인 가사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당시 힙합 진영 간의 대립에 휘말려 2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투팍의 어머니인 아페니 샤커가 단지 투팍의 생물학적 어머니만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오히려 아들인 투팍이 어머니인 아페니 샤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한 해석이 아니다. 아페니 샤커는 흑인투쟁단체 ‘블랙팬서Black Panther’의 일원이었다. 그녀가 감옥에 있을 때 투팍을 임신 중이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참고로 투팍은 예술고등학교를 나왔고 시를 즐겨 쓰던 청년이기도 했다. 그의 자작시를 모은 시집 『콘크리트에서 핀 장미(The Rose That Grew from Concrete)』도 체크해두자.

투팍-샤커2-어머니와(1)
투팍-샤커3-어머니와(2)

투팍과 그의 어머니 아페니 샤커의 모습

박노해 시인은 자신의 새로운 시집에 래퍼 ‘나스Nas’의 영향을 받은 시를 싣기도 했다. 사실 이 시야말로 나를 잡아 멈춰 세운 주인공이다.

어느 날인가
이 세상에 나를 위한 곳이 없다고 느낄 때
여기가 지옥이다

어느 날인가
이 세상에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없다고 느낄 때
여기가 지옥이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나를 바라봐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
여기가 나의 지옥이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내가 바라봐 주고 사랑해 준 사람이 없음을 알았을 때
내가 그 지옥이다

누구의 죄냐고,
누가 날 이렇게 만들었냐고,
예수를 패버리러 지옥으로 쫓아갔을 때

그는 이미 피투성이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를 끌어안고 누군가 울부짖고 있었다
몇 번인가 지옥을 들락거리던 내가 울고 있었다

– 박노해, 「예수를 패버리러 지옥으로 쫓아갔지」, 『너의 하늘을 보아』, 느린걸음, 223~224쪽

[본문-표지컷]예수를패버리러

시집 이미지 ⓒ느린걸음

‘예수를 패버리러 지옥으로 쫓아갔을 때’라는 시구절은 래퍼 나스의 가사에서 따왔다. 원문인 ‘When I was twelve, I went to hell for snuffing Jesus’은 힙합 역사에서 세상을 놀라게 한 구절로 남아 있다. 당시 스무 살 남짓의 신인이었던 나스의 놀라운 랩 실력과 문학적이고도 과감한 가사가 더해진 덕분이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나 이 구절에 영감받아 한국의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완성했다.

나스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뉴욕의 험난한 뒷골목에 대한 랩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무작정 불만을 포악하게 토해낸다거나 사실만을 나열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성찰적으로 조명하며 문학적으로 승화했다. 다시 말해 ‘아름답지 않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의 방식과 수준이 ‘아름다웠다’는 말이다. 나스에게 ‘거리의 시인(Street Poet)’이라는 칭호가 붙여진 이유이기도 하다. 아마 박노해 시인도 이런 점을 알아챈 것이 아닐까. 그리고 시인 역시도 이런 존재들이 아닐까. 사실 이 글의 서두에 인용한 ‘내 시는 깊고 난 절대 쓰러지지 않아’라는 랩 구절은 바로 나스의 것이다. ‘My poetry’s deep, I never fell.’

래퍼 나스의 앨범 ‹Illmatic› 표지

힙합에는 ‘킵잇리얼Keep It Real’이라는 태도가 있다. 랩 음악, 혹은 래퍼의 인터뷰에서 한 번쯤은 접해봤을 것이다. 대략 이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① 너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할 것
② 거짓말하지 말고 늘 진실할 것

힙합 세계에는 다른 음악 장르에 없는 전통이 있다. 곡의 가사는 뮤지션이 직접 써야 한다는 전통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곡의 가사는 자기가 직접 쓰는 것이 옳고, 그래야 떳떳하다는 생각이 있다. 다른 음악 장르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광경이다. 힙합의 이러한 전통은 우리가 랩 음악을 ‘자서전’처럼 느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힙합을 가리켜 가장 ‘자기 고백적’인 음악이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음악을 통해 래퍼가 종종 자신의 실제 삶을 털어놓기 때문에 우리는 래퍼 이름을 네이버에서 검색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의 음악을 들으면 된다. 그 안에 그의 실제 삶이 전부 담겨있기 때문이다.

투팍-샤커1

나는 박노해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킵잇리얼 말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수많은 시에 투영하고 있었고, 자신이 실제로 목격한 것을 시에 담아 고발하고, 알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이건 힙합인데?”라고 중얼거렸다. 우리는 음악이 아닌 무언가를 보고 ‘이거 재즈인데?’ 혹은 ‘이거 클래식인데?’라고 말하진 않지만, ‘이건 완전 힙합인데?’라는 말은 자주 한다. 힙합은 음악이면서 동시에 태도이자 가치관으로서 강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박노해의 시를 읽고 힙합을 느꼈다.

진지하게 말하건대, 박노해 시인이 만약 30년 더 늦게 태어났다면 래퍼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래퍼가 되었을 확률이 아마 꽤 높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랩은 새로운 세대의 음악인 동시에 고전적인 시이고, 시가 했던 역할을 지금 랩이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에서 발견한, 랩 가사 같은 시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어쩌라고, 어쩔 거야
내가 태어났다니까
내가 등장했다니까

이런 세상에 너 어떻게 살 거냐고
날 겁주지 말라니까
이거 배우고 저거 잘하고
남을 밟고 싸워 이기라고
날 떠밀지 말라니까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인생
내가 찾아서 간다니까, 내 길
부딪히고 쓰러지고 일어서고
내가 해낸 게 진짜 나라니까

– 박노해, 「아이가 온다」, 『너의 하늘을 보아』, 느린걸음, 122쪽

Writer

김봉현(@youknowmysteez_)은 힙합 저널리스트다. 2003년부터 음악에 대한 글을 쓰며 책을 낸다. ‘서울힙합영화제’를 주최했고 엠씨메타, 김경주 시인과 ‘포에틱저스티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몇 년 전부터 한국 힙합 앨범을 바이닐로 제작/발매하고, 라이너 노트를 작성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한국힙합, 열정의 발자취』, 『힙합: 블랙은 어떻게 세계를 점령했는가』, 『한국힙합 에볼루션』 등이 있다.

주광문을 찾습니다

Report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김도훈 작가가 이번에 보내온 에세이 주제는 바로 축구입니다. 이번 2023 카타르 월드컵에서 펼쳐진 명장면에 대한 찬사일까요. 아쉽게도 땡! 대한민국에서 조심해야 할 대화 주제인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입니다. 벌써부터 진저리가 난다고요? 잠시만 진정하고 숨을 고르게 들이쉬고 내뱉으며 글에 살짝 발을 담가 보세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빨려들 듯 읽다 보면 나중에 자발적인 사람 찾기를 시작할지도 몰라요. 그게 누구냐고요?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시죠!

이 글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다. 그러니 평소 예비역이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에 진력난 분이라면 지금 빠져나와도 좋다. 누구도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따위를 듣기 위해 태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 이 페이지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분이라면 안심하셔도 좋다. 이 글은 축구를 정말이지 증오한 남자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다. 예비역들이 전역 후 첫 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할 때만큼 의미가 없진 않을 것이다. 아니, 요즘도 전역 후 후배들과 술자리를 하는 예비역 선배라는 존재가 존재하는가? 그건 나도 나이 든 엑스세대라 잘 모르겠다.

그 사람의 이름은 주광문이었다. 나는 1996년에 남들보다 일 년 정도 늦게 군대에 갔다. 당시 대학생은 2학년을 마치면 군대에 가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나는 그들과 맞춰 가지 못했다. 군대에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너 같은 애는 훈련소에서 죽는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은 탓에 1년 정도 수영장을 다녔다. 하지만 습득 속도가 늦어서 수영보다는 수다에 집중하는 어머니뻘 선생님들과 항상 같은 클래스에 머물렀다. “좋은 데로 못 빠지면 운전병이라도 해야지”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은 탓에 몇 번이나 떨어진 코스 주행 테스트에서도 반드시 성공을 거두어야 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군대에 가서 정말로 필요한 건 수영도, 운전면허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그건 축구였다. 나는 축구를 공부하고 군대에 갔어야만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 사람 때문이었다. 주광문이다. 아까부터 계속 튀어나오는 주광문이라는 이름은 누구냐. 나의 군대 선임이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미리 드린다.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듣느라 여기까지 참은 것도 모자라서 당신은 내 군대 선임의 이름까지 알게 됐다. 인터넷에는 참 알 필요 없는 헛된 정보가 많다.

한국 군대의 현실을 극사실주의로 표현한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중 행정병의 모습

나는 행정병이었다. 지원과라는 곳에서 일했다. 뭐든 지원하기 위한 서류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내가 담당한 서류들은 대개 ‘군사보안’이라는 글귀가 찍혀 있었다. 군대에서 절대 유출되면 안 되는 것이 군사비밀이다. 3급 비밀은 누설되는 경우 국가 안전 보장에 손해를 끼칠 수 있는 비밀이다. 2급 비밀은 국가 안전 보장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는 비밀이다. 1급 비밀은 국가 간의 외교 관계를 단절시키고 전쟁을 유발할 수 있는 비밀이다. 내가 다루었던 비밀 서류 중 국가 안전 보장에 손톱만큼도 생채기를 낼 수 있는 비밀은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주광문이 있었다. 그는 지원과 선임이었다. 180cm가 훌쩍 넘는 키에 살 반 근육 반으로 만들어진 군사 기계였다. 군사 기계가 왜 행정병이 근무하는 지원과에 있는가? 행정병은 나 같은 최약체 남자가 후방에서 서류 작업이나 하라고 생긴 보직이다. 군사 기계로 태어난 사람은 해병대나 전방으로 보내야 한다. 그런데 왜 주광문은 행정반에 있을까? 다른 선임들 말을 들어보니 지나치게 오랫동안 인력이 공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는 아예 지원과가 굴러가지 않을 지경에 이르자 그들은 일단 누구라도 신병이 들어오면 행정병으로 받겠다고 선언한 모양이다. 그게 주광문이었다. 컴퓨터 자판에 손가락 한 번 올려본 적 없는 군사 기계.

군사 기계는 나를 내심 좋아했다. 잘 굴려 먹을 수 있을 것도 같은, 대충 눈치 빠른 듯한 졸개가 하나 생겼으니까 싫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군사 기계는 츤데레였다. 매우 육체적으로 강력한 츤데레였다. 친근함을 주먹으로 풀었다. 본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대화를 하다가 재미가 있으면 주먹으로 내 어깨를 쳤다. 재미있어도, 재미없어도 주먹으로 쳤다. 풀 스윙으로 쳤다. 나는 경쾌하게 날아갔다. 아니다. 나는 지금 군대 내부의 폭력성을 고발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1996년이었다. 폭력이 지금보다 훨씬 일상화된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도구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츤데레는 참을 수 있었다. 큰 문제가 발생했다. 군사 기계는 심지어 축구 기계였다. 그는 축구를 좋아했다. 사랑했다. 무엇보다도 토요일 정오의 평온함을 즐기려는 후임들을 깨워서 자외선이 위험 농도로 작렬하는 연병장에 불러모아 해가 질 때까지 축구를 시키는 행위 자체를 사랑했다. 군대 축구에는 규칙이 없다. 옐로카드도 없다. 레드카드도 없다. 그래서 그걸 군대에서는 ‘전투 축구’라고 부른다. 나는 그걸 ‘축구 학살’이라고 부르겠다.

전투 축구의 모습, 사진 출처: 가츠의 군대 이야기

전투 축구의 모습, 사진 출처: 가츠의 군대 이야기

군대 축구를 지칭하는 군대스리가 밈, 명칭의 유래는 독일의 프로축구 리그인 분데스리가와 군대의 합성어이다.

주광문은 나를 몇 번 경기에 집어넣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도 스탠드에 앉아 책을 보는 척하며 축구하는 남자아이들을 지켜보던 사람이다. 심지어 나는 한국을 완전히 들었다 놨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도 보지 않았다. 내 기억에 멕시코 월드컵은 한국에 월드컵 붐을 일으킨 첫 번째 행사였다.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이후 32년 만에 동아시아 1위로 본선에 진출한 상태였다. 발전한 기술 덕분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생중계를 볼 수 있던 월드컵이기도 했다. 당연히 모든 국민이 잠을 설치고 월드컵을 지켜봤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신났다. 장벽은 거대했다. 하필 16강을 두고 붙어야 하는 상대가 디에고 마라도나가 있던 아르헨티나와 전 대회 우승국인 이탈리아였다. 불가리아는 좀 해볼 만한 상대였다. 아니다. 역시 만만찮았다.

마라도나는 정말이지 위대했다. 그는 거의 혼자서 필드를 질주하며 한국을 3:1로 짓밟았다. 그럼에도 감격스러운 경기였다. 대표팀 주장 박창선이 넣은 골은 한국 월드컵 역사상 첫 골로 기록됐다. 다음 경기인 불가리아전에서 한국은 1:1로 비겼다. 김종부가 넣은 동점 골은 한국 월드컵 역사상 첫 승점 1점으로 기록됐다. 다음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누구도 한국에게 돈을 거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한국은 기억할 만한 경기를 펼치며 3:2로 아깝게 졌다. 최순호와 허정무의 골이 들어가던 순간 한국 아래 지각판이 분명 흔들렸을 것이다. 아니 잠깐, 멕시코 월드컵을 보지도 않았다면서 경기 내용은 어떻게 이렇게 잘 아냐고? 다 새로 공부한 것이다. 글쟁이가 쓰는 것이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라고 믿지는 마시라.

86년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전, 디에고 마라도나와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들의 모습

다시, 주광문이 있었다. 한국 축구의 역사적인 순간에도 딱히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현실에서 축구를 한다고 연병장으로 밀어내는 주광문이 있었다. 나는 몇 주를 뛰었다. 의미 없이 뛰었다. 공은 거의 내 근처에 오지 않았다. 공이 내 근처에 오면 내 발은 공을 찼다. 차기는 했다. 공은 항상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누구도 나에게 공을 패스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임병은 뛰어야 한다. 뛰는 모습을 선임에게 보여줘야만 한다. 가장 크나큰 죄악은 군대에서 축구를 하다가 짝다리를 짚고 쉬는 것이다.

주광문은 아예 클래스를 만들었다. 5시간 넘게 진행된 축구가 끝나고 나서도 한 시간 더 진행되는 클래스였다. 강사는 주광문, 학생은 김도훈. 둘만의 클래스였다. 그는 일부러 공을 뻥뻥 연병장 한가운데로 찼다. 그럼 나는 짧은 다리로 공을 찾아오기 위해 뛰었다. 찾아온 공은 다시 연병장으로 날아갔다. 그게 수십 번 반복됐다. 주광문은 “너는 체력이 문제야. 체력이”라고 외쳤다. 나는 이 문단을 쓰면서 약간의 PTSD를 느끼고 있다. PTSD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법 중 하나는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에 대해 글로 쓰는 것이라고 들었다.

다행히 주광문의 축구 교실은 두어 달 뒤 멈췄다. 포기한 것이다. 그는 나 같은 놈은 축구 따위 하지 말고 물 주전자에 차가운 물 떠 놓고 선수들 응원이나 하는 게 나을 거라고 했다. 정답이었다. 사실 내가 가장 되고 싶었던 건 언제나 치어리더였다. 말이 나온 김에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영화 중 하나는 커스틴 던스트Kirsten Dunst가 치어리더로 나오는 영화 〈브링 잇 온Bring It On〉이다. 이 영화가 나온 게 2000년이다. 그해 태어난 사람들도 벌써 22살이다.

치어리더 영화 ‹Bring it on›, 2000, 포스터

나는 얼른 이 글을 정리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이 글은 그토록 싫어했던 축구를 좋아하게 된 사람의 이야기다. 도대체 축구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이 글 어디에 나오냐고? 지금 할 생각이다. 나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축구를 좋아하게 됐다. 나는 월드컵이 열리기 한 달 전 사귀던 사람에게 차였다. INFP답게 롤러코스터의 ‘Last Scene’을 수백 번 반복해 들어도 도무지 슬픔(과 차인 것에 대한 자학)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 친구가 말했다. “내일 월드컵 보러 가자. 사직 구장에서 중계해 준단다.” 내가 축구만큼 견딜 수 없던 것이 붉은 악마 티셔츠였다. 붉은 악마 구호였다. 그런 집단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행위에는 가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나는 울고 있었다.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얼굴에 태극기 문양을 붙이고 친구와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안정환이 이탈리아전 연장 후반에 골든골을 넣는 순간이었다. 축구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월드컵은 위대한 것이었다. 이별(이 아니라 차인) 슬픔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휘발됐다. 나는 밤새 부산 시내를 돌아다니며 “대한민국!”을 외쳤다. 그러니 이 글은 결국 축구에 PTSD를 가진 남자가 어떻게 실패한 연애를 월드컵으로 극복하고 축구를 사랑하게 됐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아, 이 글을 쓴 목적이 하나 더 있다. 나는 주광문을 찾고 있다. 진심으로 찾고 있다.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다. 나이가 들면 그냥 별의별 사람이 다 보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전라도 남쪽 지방에서 온 1977년생 주광문을 아는 분은 꼭 연락을 부탁드린다. 쓰고 보니 이 자식은 나보다 나이도 어렸다.

2002 한일 월드컵 붉은 악마 모습, 사진 출처: 한국일보 자료사진

Writer

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loser21

당신 안의 에디터십

Report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편집으로 창작하기‘를 연재하는 최혜진 작가의 여덟 번째 에세이가 도착했습니다. 장장 8개월 동안 진행하던 연재를 끝내는 마지막 원고예요. 이번 글에서는 우리에게 에디터십이 갖는 진정한 가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에디터십은 무의미와 공허함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독자를 지킬 수 있답니다. 무엇보다 자기 서사의 편집권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는 믿음만 버리지 않으면 그 어떤 시련과 환경적 제약 속에서도 언제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고치고 갱신할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우리 안의 편집자를 깨우자고 외치는 최혜진 작가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가 영화감독이 되기 전, 정확하게는 방송국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입사했을 무렵, 선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누군가 한 사람을 떠올리며 만들어라.” 소설가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도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독자, 관객, 대중 등 집단을 통칭하는 단어에는 구체적 얼굴이 없다. 누구든 들으라고 공중에 쏘아 올린 이야기는 어디에도 꽂히지 않고 증발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자신을 보자. 수십에서 수백 개의 선택지가 있는 기사, 뉴스레터, 유튜브 영상, 블로그 포스팅 제목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는가. ‘나랑 상관있는 이야기’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야기 들어줄 사람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면 타깃 수용자가 좁아져서 불리할 것 같지만, 정확한 연결고리가 되는 디테일을 담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전달력이 높아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커트 보니것의 에피소드를 마음에 새겨둔 이유다.

소설가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영화감독

‘편집으로 창작하기’를 연재하는 지난 8개월 동안 나는 후배 에디터 한 명을 자주 떠올렸다. 그는 호기심 많고, 트렌드에 밝고, 유행하는 건 한번쯤 경험해야 직성이 풀리며,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떠들 때 에너지가 차오르는 친구다. 전통적인 미디어 회사의 편집부에 속해 본 적이 없고, 독립 매거진을 만들면서 독학으로 일을 배웠다. 그렇게 에디터 직함을 달긴 했지만, 정확히 에디터가 뭐 하는 사람인지 설명하긴 어렵다고 느낀다. 다가오는 파도에 몸을 맡기는 서퍼처럼 매일매일 성실히 업무를 하다가도 문득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에디터로서 나의 전문성은 뭘까?’ 질문하며 아득한 심연을 내려다보는 기분에 시달린다.

언젠가 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플루언서도 사진 촬영하고, 베스트 컷을 셀렉하고, 이목을 끄는 글을 쓰잖아요. 누구나 글 쓰고 영상 만드는 시대인데, 제가 그들보다 뭐가 나은지 모르겠어요. 유명한 게 그냥 최고 아닌가 싶어요.”

유명세가 곧 자본이 되는 주목 경제 시대에 누구나 한번쯤 품어봤을 회의감이겠지만, 마음이 조금 아팠다. 직업적 자존감의 뿌리를 어디에 내려야 할지 몰라서 타인의 삶을 기웃거렸던 주니어 시절의 내가 생각나서였다. 한번쯤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에디터로서 배우고 훈련한 ‘에디터십 editorship’이 어떻게 내 삶을 바꾸었는지, 비단 직업적 측면뿐 아니라 자존을 지키며 살고 싶은 한 개인에게 얼마나 단단한 중심축이 되어주었는지, 에디터를 에디터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에디터십의 사전적 의미는 ‘편집자로서 갖추어야 할 능력이나 정신’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편집자 수만큼 에디터십의 정의도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이 지면은 나에게 할애된 공간이니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내 생각을 실컷 풀어보겠다.

나는 내가 에디터라는 사실이 좋다. ‘이 무슨 앞뒤 맥락 없는 자랑질인가’ 싶은 독자도 계시겠지만, 한 명의 직업인이 19년 동안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면서 도달한 안정감에 대해 한번쯤 이야기 들어보는 것도 유익하지 않겠냐고 우겨보고 싶다. 게다가 모든 것이 과잉인 동시대에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의 새로운 연결 가능성을 알아보고 맥락에 맞게 재료를 다룰 줄 아는 에디팅 능력이 모든 영역에서 점점 더 필요해진다. 뚜렷한 관점을 가지고 정보를 다루는 능력을 키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에디터십을 고민하는 글 읽기가 결코 손해는 아닐 것이다.

내가 에디터라는 직업을 좋아하는 첫 번째 이유는 언제나 타인과 현상 가운데에서 작업의 재료를 얻기 때문이다. 에디터는 혼자 일할 수 없다. 인터뷰 기사를 만들려면 인터뷰이에게 연락해서 만남을 청해야 하고, 공간을 소개하려면 당연히 그곳을 방문해야 한다. 올겨울 유행하는 숏패딩이나 눈에 띄는 디자인 체어를 소개하려 해도 일일이 브랜드 담당자와 소통해야 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 칼럼을 쓰려면 관련 서적을 훑거나 논문을 검색하거나 믿을 만한 전문가에게 전화를 돌려야 한다.

‘만남’과 ‘묻기’를 두려워해서는 좋은 에디터로 성장하기 힘들다는 의미다. 나는 이 사실에 자긍심을 느낀다. 타인과 세상 구석구석에 관심을 두면서 무언가 귀한 것이 있으리라 믿으며 귀를 열어두는 태도,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인식을 갱신하는 자세. 에디터십을 가진 사람은 기꺼이 자신을 더 넓은 세계로 보내고, 만나고, 질문할 줄 안다.

이렇게 동시대 한복판에 자신을 던져넣은 에디터는 ‘의미’를 찾는다. 재료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새로 생긴 카페 메뉴판에도 의미가 있고, 서점가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의미가 있다. 우연히 엿들은 택시 기사님의 혼잣말이나 5세 어린이의 엉뚱한 질문에도 의미가 있다. 8월에 나오는 아오리 사과와 10월에 나오는 홍옥의 차이를 감지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지 설파할 수도 있고, 2022년에 개봉한 한국 독립영화 목록과 2021년의 목록을 비교하면서 지적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 에디터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무의미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 내가 생각하는 에디터십의 두 번째 미덕이 있다. 난장판 같은 재료, 정보, 데이터를 마주하고도 ‘의미는 언제나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태도다. 사소하다고, 익숙하다고, 당연하다고 쉽게 넘겨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유의미한 신호를 포착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해보는 습관이 중요하다. “나는 이 물건을, 이 현상을, 이 작품을, 이 사람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자문자답하는 시간이 에디터를 에디터답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해석은 언제나 주관성을 바탕으로 한다. 객관적 해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에디터로 일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주관성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일이다. 오류가 있고, 불완전하고, 시시하게 느껴져도 ‘이것이 내가 보고 이해한 세계에 대한 인식입니다’라고 자기 버전의 해석을 내놓아야 한다. 에디터십은 결국 보호막을 벗고 자기를 드러낼 용기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에디터가 용기 있게 내놓은 해석은 때때로 독자에게로 가서 세상을 이해하는 프레임으로 작동한다. 마트에서 늘 보던 사과가 버라이어티한 이야깃거리를 품은 재료로, 별 관심 없던 예술가가 중요한 인생 교훈을 주는 존재로, 새로 생긴 카페 메뉴판이 동시대 미감의 보고로 보이는 것이다.

박혜수, ‹꿈의 먼지›, 2011 © www.phsoo.com

그래서 나는 에디터십이 무의미와 공허함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독자를 지킨다고 믿는다. 아무리 화려한 성취를 해도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질문이 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사람은 의미 없이 살 수 없는 동물이니까. 성실히 이 세계를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의미를 읽어낸 후 배열을 가진 이야기로 바꿔낼 줄 아는 능력이 가치롭다고 믿는 이유다. 이런 에디터적 사고력으로 얼마나 창조적인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소중한 증거인 최애 아티스트 박혜수 작가를 마지막으로 소개하며 연재를 마치려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는 «올해의 작가상 2019» 후보에 오르기도 한 박혜수 작가는 언제나 설문 조사와 취재, 인터뷰로 작업을 시작한다. 타인과 주변의 현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 그가 하는 예술이다. 일례로 공공장소에서 엿들은 방대한 양의 대화를 수십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후 전시의 재료로 쓰거나(‹Dialogue-Archive›, 2009), 온라인 설문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당신이 버린 꿈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방대하게 수집한 답변을 활용해 창작의 재료로 사용한다. (‹대화 프로젝트 Vol.1-Dream Dust›, 2011)

2011년 «제10회 금호 영아티스트»에서 선보인 설치 작업 ‹꿈의 먼지›는 사람들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버릴 수밖에 없었던 꿈을 적은 설문지를 분쇄기에 넣어 날리도록 한 작업이다. 2017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do it 2017, 서울»전에서는 관람객이 다른 사람의 조각난 꿈―분쇄한 설문지―에서 자신의 꿈과 관련된 단어나 문장을 찾아 연결 짓도록 했다.

박혜수, ‹꿈의 먼지›, 2017, 출처: 작가 유튜브

7년여 동안 ‹꿈의 먼지› 작업을 이어가며 수천 명의 실패한 꿈을 모아보니 ‘사랑’이 매우 높은 순위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작가는 다음 프로젝트로 ‹대화 프로젝트 Vol.2-Goodbye to Love›를 이어간다. 이번에는 헤어진 연인이 남긴 물품과 사연을 수집하는 설문을 기획했다. 사람들이 남긴 답변과 연애편지, 자화상, 목걸이, 속옷, 향수, 옷, 인형 등의 물품은 이후 설치미술, 영상, 음악, 사진, 퍼포먼스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되었다.

박혜수, ‹Goodbye to Love I›, 2013 © 최혜진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꿈과 사랑을 포기하게 만든 원인이 궁금했고 나는 ‘보통’이라는 기준을 주목했다. 그렇게 자신다움을 다 제거하면서 눈에 띄지 않는 ‘보통’이 되어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란 의문이 이어졌고, 그 끝엔 ‘우리’가 있었다.”
– 박혜수, 『묻지 않은 질문, 듣지 못한 대답』, 돌베개, 42쪽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2019»에서 선보인 작품 ‹우리친밀도 검사 – 중산층 300명(모집단) / MMCA 관객›은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믿는 관객 300명이 ‘우리나라’, ‘우리민족’, ‘우리가족’, ‘우리회사/학교’를 얼마나 친밀하게 느끼는지 0~5점의 지표로 시각화한 작품이다. 전시를 보는 관객 누구라도 벽에 걸린 실타래 중 자신의 성별과 나이대에 해당하는 것을 풀어서 작품에 덧댈 수 있다.

박혜수, ‹우리친밀도 검사 – 중산층300명(모집단) / MMCA 관객›, 2019 © 최혜진

박혜수 작가의 작업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당신은 어때요?’라고 묻는 목소리와 대면하게 된다. ‘당신은 왜 그 꿈을 버렸나요? 헤어진 연인이 남긴 말과 물건을 왜 여전히 간직하고 있나요? 당신은 보통 사람인가요? 왜 자신을 보통이라고 생각하나요? 당신이 정의하는 ‘우리’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요?’ 등의 질문 앞에서 ‘나는 어떻더라…?’라며 자기와의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집요하게 주변을 관찰하고, 질문을 던지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의미를 시각화하는 박혜수 작가의 작업 방식은 그 자체로 에디터적 사고력을 배우기 위한 너무나 훌륭한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그를 아끼고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언제나 ‘관객’을 자기 삶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작가’의 자리로 초대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저는 관객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편은 아니에요.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던지는 주제에 대해서 관객이 스스로 질문을 찾아나갔으면 해요. 거기에 대해서 제가 명제화된 메시지를 넘기면 관객이 그냥 그것을 바라보는 존재만 되버리는 게 싫어요. 그 사람의 삶에서 이어져 나갔으면 좋겠어요.”
– 박혜수, «올해의 작가상 2019» 인터뷰 중

올해의 작가상 인터뷰, 2019, 출처: koreaartistprize

에디터로 일하며 얻은 가장 소중한 삶의 자산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의미의 최종 편집권이 나에게 있다는 감각’이다. 삶은 언제나 예측 불가하고, 뒤죽박죽 난장판 같은 사건과 사실이 끊임없이 들이닥친다. 그중 어디에 주목하고 어떤 가치와 만남과 기억을 소중히 여길지에 따라 인생의 의미와 만족도가 달라진다.

CCTV나 홈비디오로 기록한 무편집 영상이 영화가 될 수 없듯 자신이 살아온 모든 순간을 누락 없이 축적한다 해도 곧장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그려놓은 자아상은 다시 말해 ‘내가 나에게 들려주는 나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편집권을 타인에게 내어주고 주체적인 삶을 살긴 어렵다.

외부에서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내 힘으로 바꾸지 못할 환경적 제약이 있더라도, 자기 서사의 편집권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믿음만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 나에 대한 이야기를 고쳐 쓰고 갱신할 수 있다. 그러니 에디터십을 지키자. 우리 안의 편집자를 깨우자. 이 이야기가 하고 싶어 지난 8개월 동안 구구절절 긴 편지를 썼다. 그간 ‘편집으로 창작하기’ 연재를 읽어주신 비애티튜드 독자께 깊이 감사드린다.

Writer

최혜진(@writer.choihyejin)은 19년 차 잡지 에디터다. «디렉토리», «1.5°C», «볼드저널» 편집장으로 일했고, 에디터십을 기반으로 기업의 브랜드 미디어 전략을 제시하는 일을 한다. 『우리 각자의 미술관』,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등 일곱 권의 예술서를 썼다. 동료애 기반의 에디터 커뮤니티 ‘Society of Editors’(@society.editors)를 이끌고 있다.

현대미술 설명서: 왜 자꾸 망가뜨리려는 걸까?

Report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현대미술 설명서’라는 연재 글을 시작한 박재용 작가의 세 번째 글이 도착했습니다! 이번 주제는 요즘 들어 빈번하게 들리는 예술 작품 테러(?)에 대한 고찰입니다. 기후 운동 단체가 명화에 토마토수프를 끼얹고 손에 접착제를 발라 액자나 벽에 붙이고 성명을 발표하는 일이 올해 자주 일어났어요. 이런 작품 망가뜨리기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면서 예전의 망가뜨리기와 요즘의 망가뜨리기 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거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봐야 할지 설득력 있는 논조로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꼼꼼한 정보 정리에 감탄이 나오는 이번 에세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티클에서 직접 확인해보세요!

트위터 @lukexc2002 갈무리

2022년 5월 29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c.1503~19)

“모든 예술가여, 지구를 생각해보세요. 제가 이 일을 한 건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의 행성을 생각해 보자고요.”

가발과 립스틱으로 노파 변장을 한 36세 남성이 루브르 뮤지엄의 하이라이트, ‹모나리자Mona Lisa›에 케이크를 집어 던지고서 외쳤다. 1956년 볼리비아인 우고 웅하가 비예가스Hugo Unjaga Villegas가 보호 유리로 덮은 그림에 돌덩이를 던져 물감이 떨어진 후부터 강화 유리로 보호하던 ‹모나리자›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이젠 그저 강화유리가 아니라 반사율 0.7%, 투과율 98%를 자랑하는 Guardian Clarity™ 유리에 둘러 싸인 ‹모나리자›에게 케이크 공격은 스쳐 지나는 바람만큼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박물관 경비원들이 즉시 남성을 체포했고, 그는 프랑스 경찰이 관리하는 정신과 병동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남성이 석방되었는지, 여전히 정신과 병동에 감금 중인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2022년 6월 30일, 빈센트 반 고흐의 ‹꽃 핀 복숭아나무›(1889)

환경 운동 단체 ‘저스트스톱오일Just Stop Oil’ 활동가들은 영국 런던과 글래스고에 있는 미술관에서 접착제를 바른 두 손을 회화 작품에 갖다 댔다. 정확히는 회화의 캔버스가 아니라 액자에 손을 붙였다. 그중 하나는 빈센트 반 고흐의 것으로, 1889년에 제작한 ‹꽃 핀 복숭아나무(Peach Trees in Blossom)›였다. 불과 얼마 전인 지난 11월 22일 영국 법원이 내린 판결문에 따르면, 고흐의 그림을 품고 있던 액자는 그림 그 자체보다 오래된 것으로, 접착제로 인해 원래 상태로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손상을 입었다. 활동가 중 한 명인 에밀리 브로클뱅크에게는 3주간 수감 조치와 재학 중인 학교에서 6개월간 정학 조치, 이후 6주 동안 전자 감시를 받는 야간 통행금지 선고가 떨어졌다.

Photo courtesy of Just Stop Oil

2022년 10월 14일,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1888)

이번에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일이 벌어졌다. 저스트스톱오일의 또 다른 활동가들이 빈센트 반 고흐의 또 다른 작품, ‹해바라기(Sunflowers)›에 깡통에 든 토마토수프를 끼얹고 접착제로 손을 벽에 고정하며 크게 외쳤다.

“급증하는 생활비 문제는 석유 가격 문제 때문입니다. 추위에 떨고 굶주린 수백만 명의 가족들에게 연료 가격은 접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깡통에 든 수프 하나 데울 만큼의 연료도 없단 말입니다.”

이날은 저스트스톱오일이 런던 시내 전역에서 벌인 시위의 네 번째 날로, 연좌시위 참여자 중 일부는 도로에 접착제로 자신을 고정했고, 고속 도로 통행을 저지하려 했으며, 하루 동안 50명이 넘는 활동가들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번에도 그림은 손상되지 않았다. 반사율이 극도로 낮기 때문에 존재를 알아차리기 어려운 얇은 ‘뮤지엄 글라스’가 외부 오염 물질로부터 그림을 차단한 덕분이다.

“I want to scream! Stopp oljeletinga glues onto the Scream by Munch, National Museum in Oslo” on YouTube by Stopp Oljeletinga!

2022년 11월 11일,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1893)

노르웨이 오슬로에 자리 잡은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서 독일, 핀란드, 덴마크 국적의 세 활동가가 만났다. 그리고 석유 시추 중단을 촉구하는 시민단체 ‘스토프 올리엘레팅아Stopp oljeletinga’를 대표해 뭉크의 걸작 ‹절규(The Scream)›를 향해 진격했다. 두 명의 활동가가 작품이 걸린 벽에 자신을 접착제로 고정하는 동안 나머지 한 명은 이 모습을 촬영했고,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경비원이 이들을 막기 위해 달려왔다. 세 명 모두 경찰에 즉시 체포되어 구류 조치에 취해졌다. 역시나, 작품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이번에도 빛을 반사하지 않아 있는 듯 없는 듯 작품을 보호하던 ‘뮤지엄 글라스’ 덕분이었다.

2022년 5월 29일부터 11월 18일까지 채 6개월이 되지 않는 사이, 파리, 빈, 바르셀로나, 밴쿠버, 오슬로, 로마, 베를린, 헤이그, 포츠담, 런던, 멜버른, 드레스덴, 바티칸, 밀라노, 피렌체, 글래스고, 맨체스터에서 이렇게 공격당한 작품의 수는 무려 22점에 달한다. 위의 몇 가지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듯, 작품 자체를 치명적으로 파손한 경우는 사실상 없다. 널리 알려진 예술 작품은 대부분 특수한 재질의 유리로 보호하거나, 애초에 삼엄한 경비와 감시를 받기 때문이다. 고흐의 ‹해바라기›에 토마토수프를 끼얹은 활동가는 이렇게 묻는다.

“예술과 삶 중 무엇이 더 가치 있는 걸까요? 여러분은 그림을 보호하는 데 더 관심이 있나요, 아니면 지구와 인류를 지키는 데 더 관심이 있나요?”

뭉크의 걸작 ‹절규(The Scream)›를 향해 진격한 두 활동가

작품을 보호하는 ‘뮤지엄 글라스’

예술 작품, 이렇게 망가뜨립니다

사실, ‘예술 작품 망가뜨리기’에는 유구한 역사가 존재한다. 뮤지엄이 예술품과 유물을 안전하고 영구적으로 보관하는 장소로 자리 잡은 이래, 오랜 역사를 지닌 기념물이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이래, 인류는 언제나 금지된 것에 대한 위반 욕구를 마음껏 발산해왔다. 예컨대 20세기 최고(?)의 예술품 훼손꾼(vandal)으로 알려진 한스요아힘 볼만Hans-Joachim Bohlmann(1937~2009)에겐 기후 위기 활동가가 벌이는 행동은 새 발의 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한스 요아힘 볼만

어릴 적부터 인격 장애를 앓고 다양한 치료를 받아 오다 40세부터 본격적으로 예술품 훼손질을 시작한 볼만은 1977년부터 2006년까지 총 50점이 넘는 작품을 망가뜨렸고, 망가진 작품의 가치는 당시 기준으로만 따져도 1억 3800만 유로에 달한다. 공공 기물 파손과 사유 재산 파손죄로 감옥에 수감되었고, 여러 차례 정신 병원에 강제 입소했으나 탈출에 성공해 작품 훼손꾼의 명성을 이어간 그가 가장 즐겼던 방식은 바로 ‘염산 끼얹기’였다. 16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던 볼만은 2005년 1월 석방되었고, 이듬해인 2006년 6월 25일 암스테르담에 있는 국립미술관인 라익스 뮤지엄에서 마지막 활동을 펼쳤다.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기념하는 단체 초상화인 ‹뮌스터 평화를 기념하는 암스테르담 시민 경비대 연회(Banquet of the Amsterdam Civic Guard in Celebration of the Peace of Münster)›(1648)에 시너를 끼얹고 불을 지른 것이다. 비록 ‹모나리자›처럼 막강한 방탄 기능을 탑재한 보호 유리가 둘러싸진 않았지만 두꺼운 바니시로 외면을 처리한 덕분에 작품은 크게 망가지지 않았다. 볼만은 다시 3년 형을 선고받았고, 2009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예술 작품 망가뜨리기의 역사를 돌아보면, 볼만의 방법은 여러 가지 전형적인 수법의 하나에 불과하다. 주로 회화 작품을 타깃한 망가뜨리기 시도는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 산(酸)이나 물감 끼얹기
  • 칼이나 날카로운 물체로 찢기
  • 망치나 둔기로 부수기
  • 립스틱이나 마커 등으로 선 긋기
  • 총포류를 발포하기
  • 손가락으로 옹졸하게 구멍 뚫기
  • 기타 방법 (전원 뽑아서 물속으로 던지기, 동상 목 자르기 등)

잊을 만하면 망가지는 예술품들

걸핏하면 작품 망가뜨리기의 대상이 되는 단골 작품도 존재한다. 1956년 한 해 동안 무려 두 번이나 공격당한 ‹모나리자›가 대표적이다. 한 번은 면도날에 공격당했고, 또 한 번은 관람객이 ‘그냥’ 던진 돌멩이에 맞았다. 이런 빈번한 공격에 대해 살바도르 달리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모나리자›는 모든 미술사에 있어 독특한 힘을 지닌 터라 가장 폭력적이고 다양한 공격성을 끌어낸다” ‹모나리자›는 이후에도 도쿄국립박물관 전시에 참여했다가 스프레이 페인트 공격을 받거나(1974), 루브르 뮤지엄 기념품숍에서 산 머그잔으로 두들겨 맞았고(2009), 올해에는 케이크 공격을 받았다. ‘그냥’, ‘영국 시민권을 거부당한 서러움’, ‘기후 위기에 대한 인식 향상’까지, 공격 이유는 다양했다.

볼리비아인 우고 웅하가 비예가스가 ‹모나리자›에 돌덩이를 던졌다는 1956년 12월 31일 «뉴욕타임스» 기사.

100년이 넘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받는 작품이 또 있다. 바로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의 명물인 ‹인어공주› 동상이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 쓴 동명의 동화 속 주인공을 기리는 이 동상은 1913년 코펜하겐 부둣가에 설치한 이래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공격을 받아왔다. 정치적이거나 예술적인 의도를 품은 공격도 많았지만, 술에 잔뜩 취한 코펜하겐 주민의 무용담 소재가 되기 위해 팔이 뜯겨 나가거나 목이 잘린 적 또한 결코 적지 않았다는 점이 ‹인어공주› 훼손을 둘러싼 정설이다.

‹인어공주› 동상의 목이 잘린 것은 1913년부터 지금까지 두 번. 1964년 4월 24일에 갑자기 사라진 목의 행방은 영원히 모르게 됐고, 수십 년이 지난 뒤에야 예술가 집단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회원들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동상 머리는 복원했는데 1998년 1월 6일 갑자기 다시 사라졌다. 다행히 동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텔레비전 방송국으로 배송된 머리는 약 한 달 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단단히 붙게 됐다. 2003년 폭발물로 인해 동상이 날라가버렸지만, 수색 끝에 인근 바닷가에서 발견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2006년에는 누군가 동상에 녹색 페인트를 끼얹은 뒤 동상의 손에 남자 성기 모양의 딜도를 붙여 두기도 했다. 그렇게 한동안 잠잠하던 ‹인어공주›는 전 세계가 전쟁과 갈등을 겪은 격변의 시기였던 올해, 홍콩 민주화와 인종 차별 문제를 담은 그라피티 메시지로 다시 한번 공격 대상(혹은 메시지 전달을 위한 수단)이 되고 말았다.

2022년 1월, ‘홍콩을 자유롭게 하라’ 그라피티 세례를 받은 ‹인어공주›

2022년 7월, ‘인종차별주의자 물고기’ 그라피티 세례를 받은 ‹인어공주›

작품 망가뜨리기에도 이유가 있다

이처럼 예술 작품 망가뜨리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1845년에는 영국박물관에 전시 중이던 로마 시대의 포틀랜드 항아리가 한 취객에 의해 산산이 조각나기도 했다. 파손 즉시 도자기 조각을 그러모아 복원했지만,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상태가 된 것은 여러 차례의 시도를 거쳐 100년도 더 지난 1987년이었다. 술에 취해 항아리를 망가뜨렸다고 알려진 윌리엄 로이드는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익명의 후원자가 보석금을 납부해 풀려났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로이드의 본명은 윌리엄 멀캐히로, 당시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에서 대학을 다니다 ‘실종 상태’로 사라진 인물이었다. 정확한 사연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았지만, 마치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학생이 신분을 숨기고 도쿄로 건너가 박물관의 소중한 유물을 망가뜨린 것과 유사하다.

그런가 하면, 총열을 짧게 잘라낸 엽총을 코트에 숨겨 작품에 총을 쏜 사람도 있다. 1987년 7월, 로버트 케임브리지는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 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 안나와 성 모자(The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 and St John the Baptist)›(c.1499~1500)에 발포했다. 다행히 보호용 유리가 깨질 때 충격을 흡수하면서 작품이 구멍 나지는 않았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엽총과 함께 체포된 그는 작품에 총을 쏜 이유에 대해 ‘영국의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에 불만이 크기 때문이라고 밝혔고, 이후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다.

총과 총알이 없다면 그 대신 작품에 구토를 할 수도 있다. 1996년 캐나다의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유발 브라운은 온타리오에서 전시 중인 피터르 몬드리안Pieter Cornelis Mondriaan의 ‘데 스테일De Stijl’ 풍 작품에서 원색 부분만 골라 그 위에 토사물을 갈겼다. 혹시나 전기로 구동되는 작품이라면 전원을 뽑아버리거나 물에 빠뜨릴 수도 있다. 2004년 주스웨덴 이스라엘대사 즈비 마젤은 이스라엘계 스웨덴 아티스트 드로르 페일러의 설치 작품 ‹백설공주와 진실의 광기(Snow White and the Madness of Truth)›의 일부인 조명기 전원을 뽑아 수조에 집어넣었다. 페일러의 작품이 묘사하는 인물이 팔레스타인 자살 폭탄 테러범이라는 점에 격분했던 것으로, 작품이 “자살 폭탄범을 미화”하고 “이스라엘인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Snow White and the Madness of Truth – The attack” on YouTube by Dror Feiler

Snovit och sanningens vansinne

돈에 눈이 멀어 작품을 망가뜨리는 건 어떨까? 2022년 7월, 멕시코 출신의 사업가이자 컬렉터인 마르틴 모바라크는 추정가 1000만 달러에 이르는 프리다 칼로의 드로잉을 불태우는 행사를 연 뒤, 해당 작품을 1만 개의 NFT로 ‘민팅Minting’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해당 NFT는 1만 개 중 4개가 판매되었고, 달러로 환산한 판매 총액은 1만 1000달러에 불과하다. 멕시코 검찰 당국은 중요 국가 문화재를 파괴한 죄를 물어 모바라크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Burning of a $10M Frida Kahlo Painting” on YouTube by FridaNFT

망가뜨리는 척만 한 거라면?

다시, 약 6개월 동안 여러 나라에서 반복되는 작품 망가뜨리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망가뜨리는 척만 하는) 활동을 생각해보자. 작품에 불을 지르거나, 목을 자르거나, 총을 쏘고, 폭파하고, 직접 토를 끼얹고, 전원을 뽑는 식의 망가뜨리기 활동과 기후 활동가들의 작품 망가뜨리기(하는 척) 활동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저스트스톱오일의 한 활동가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의 행동이 미술 작품에 손상을 가하지 않는다는 점을 전문가에게 확인했고, 손상이 일어나더라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미리 상담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같은 단체가 불과 며칠 전 런던에서 화석 연료 럭셔리 자동차 매장을 습격한 모습을 보면, 미술관에 걸린 작품에 토마토수프나 으깬 감자를 끼얹은 건 그야말로 하나의 ‘제스처’였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트위터 @JustStop_Oil 갈무리

사실, 국내 언론을 통해 소식을 접할 때는 더 큰 맥락을 완전히 삭제한 채 이뤄지는 경우가 많고, 최근 자주 들려오는 작품 망가뜨리기 시위에서도 이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대체로 우리는 유리가 보호하는 작품에 무언가를 뿌린 활동가들이 체포되기 전에 어떤 메시지를 던졌는지 알 길이 없다. 한국어로 소식을 전하는 매체는 미술관에서 이런 해프닝이 벌어질 때 미술관 밖에서도 도로 점거와 고속도로 차단, 국회의사당이나 화석 연료 자동차 매장에 대한 페인트 투척, 도로에 접착제로 몸을 붙이는 연좌시위 등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쏙 빼놓고 활동가들이 유명한 예술 작품을 망가뜨리려 했다는 소식만 전하곤 한다.

지난 20세기만 하더라도 예술 작품을 망가뜨리려 했던, (그리고 실제로 망가뜨린) 많은 이들은 대체로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다. 21세기가 된 지금, 우리는 더 큰 시민 운동의 일부로 작품을 망가뜨리는 척하는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종종 우리 생활에 불편함을 초래하는 파업이나 시위를 마주할 때, 그런 일이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지 살펴보면 항상 비슷한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좋은 말로 설득도 해보고, 감정적인 호소도 해보고, 법적으로 문제를 제기해봤지만 결국 제대로 된 답을 주어야 할 그 누구도 자기 할 일을 하지 않았기에 이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일상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입장에서 이를 무조건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상대방 입장을 놓고 보면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할지 생각하게 되는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지난 7월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서 산드로 보티첼리의 ‹봄(Primavera)›(c.1477~82)에 손을 접착제로 붙인 ‘마지막 세대(Ultima Generazione)’ 활동가들은 성명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예술의 유산을 방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와 공유하는 이 행성을 보살피고 보호해야 합니다.” 잠깐의 불편함을 일으키는 것에 불과하다면, 심지어 작품을 정말로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면, 게다가 총알도 뚫지 못하는 저반사 강화 유리가 작품을 단단히 보호하고 있다면, 인상파 회화나 르네상스 거장의 작품에 토마토수프 깡통 하나쯤 끼얹는 건 어쩌면 위기에 놓인 인류의 일원인 우리가 막막한 미래에 대해 단 1분이라도 생각할 시간을 갖게 만드는 가장 빠르고 급진적인 방법인지도 모른다. 대체 왜 자꾸 망가뜨리려 하는 건지 질문을 던지며 미술과 우리의 미래에 대해 조금이라도 고민할 수 있으니까.

Writer

박재용(@publicly.jaeyong)은 현대미술서가 서울리딩룸(@seoulreadingroom)의 장서광이자, 뉴오피스(@new0ffice)에서 일한다. 큐레이터이자 통번역가, 연구자, 교육자이며, 허영균과 함께 NHRB(@NHRB.space)의 공동 아트디렉터를 맡고 있다.

덩크 로우를 사고야 말았다

Report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이번 글에서 김도훈 작가는 최근에 많은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만든 나이키 덩크에 대해 말합니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신어서 이제는 일종의 국민 운동화가 되어버린 것 같지만, 그렇다고 끝까지 버티며 그 유행에 편승하지 않는 건 쉽지 않아요. 김도훈 작가가 어떠한 내적인 갈등을 겪으며 결국엔 구매 버튼을 누르게 되었는지, 더 자세한 이야기는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나이키Nike를 샀다. ‘덩크 로우Dunk Low’다. 할로윈 모델이다.

나는 나이키를 살 생각이 없었다. 덩크 로우는 더더욱 살 생각이 없었다. 사실 나이키 덩크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딱히 인기 있는 운동화는 아니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모두가 『슬램덩크Slam Dunk』를 읽었다. 주인공 강백호가 가게 주인으로부터 강제로 빼앗은 에어 조던은 모두가 신고 싶어 하는 신발이었다. 농구 좀 한다는 친구들은 모두 ‘에어 조던Air Jordan’을 신었다. 농구를 못하는 친구들도 에어 조던을 신었다. ‘덩크 하이Dunk High’ 모델은 가격도 에어 조던보다 저렴하고 디자인도 심플하니 예뻤다. 하지만 나는 지금 1990년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 시대의 미적 기준은 지금과 조금 달랐다. 뭔가 주렁주렁 달리고 색이 화려해야 비로소 예쁜 것이었다. 물론 그 시대의 패션이 요즘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딱히 걱정은 없다. 그때와 똑같은 패션은 아니다. 새로운 세대가 재해석한 패션이다.

‹슬램 덩크›는 일본 만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스포츠 만화이며, 한국에선 1992년 도서출판 대원이 «주간 소년챔프»를 통해 연재를 개시한 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해당 장면에서 농구 ‘풋내기’ 강백호는 나이키 덩크를 처음으로 구매하고 있다.

지금 덩크 로우는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불타오르는 운동화일 것이다. 모두가 나이키 홈페이지에서 ‘더 드로우THE DRAW’를 기다린다. 사실 덩크 로우에 빠지기 전까지는 대체 왜 운동화 따위를 드로우, 그러니까 추첨 방식으로 구매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일가친척은 물론 친구들 계정까지 모조리 빌려서 응모한다고 했다. 대상은 언제나 덩크 로우였다. 그러다 보니 이젠 덩크 로우 모델의 거의 모든 나이키 운동화는 드로우 형태가 아니면 구입이 애초에 불가능해졌다. 드로우에 실패한 당신은 ‘크림Kream’ 같은 리셀 애플리케이션, ‘프루츠Fruits’ 같은 빈티지 거래 애플리케이션, 혹은 번개장터에 암약한 리셀러가 두 배 혹은 십수 배 이상의 가격을 올려붙인 제품을 구입할 수밖에 없다.

8월 12일 명동에 나이키 서울이 재오픈하는 기념으로 나이키에서 진행했던 드로우. 보통의 경우엔 드로우가 열리는 시간에 맞춰서 사이즈 선택하고 응모하는 방식이었다면, 해당 드로우는 색다른 참여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나이키와 미국에서 가장 핫한 랩퍼 트래비스 스캇이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여 2021년 8월 13일에 발매했던 프라그먼트 레트로 로우 모델은 발매가가 18만 9천원이었다. 현재는 크림(Kream)에서 200만 원에 가까운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나는 리셀러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물론 리셀러가 패션 산업에 이바지하는 부분이 전혀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나는 해외 빈티지 사이트에서 활약하는 수많은 라프 시몬스Raf Simons 리셀러에게 경의를 갖고 있다. 그들은 세상 구석구석을 다 뒤져서 라프 시몬스의 초창기 걸작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일종의 큐레이터이자 갤러리스트다. 나는 십여 년 전 베를린의 한 빈티지 컬렉터에게 라프 시몬스의 전설적인 2002년 ‘버지니아 크리퍼Virginia Creeper’ 시즌 후디Hoody를 70만 원 정도에 구입했다. 지금 이 후디는 상태에 따라 500만 원대에 팔린다. 물론 나는 팔 생각이 없다. 살이 쪄서 소매가 잘 들어가지 않지만 죽을 때까지 그 후디는 내 옷장에 있을 것이다. 그건 패션인 동시에 아트다. 그러니 나는 패션에 대한 사랑으로 옛 컬렉션을 수집하고 나누는 리셀러를 꽤 아끼는 편이다.

김도훈 작가가 빈티지 컬렉터로부터 구매한 라프 시몬스의 전설적인 2002년 버지니아 크리퍼(Virginia Creeper) 시즌 후디. © archived.co

문제는 메뚜기 같은 한철 리셀러다. 샤넬 매장 앞에 밤새 도사리고 있다가 매장 문이 열리는 순간 칼 루이스Carl Lewis처럼 뛰어서, 아 잠깐. 표현을 정정하겠다. 1988 서울올림픽 육상 남자 100m 금메달리스트인 칼 루이스는 나처럼 나이 든 X세대의 우상이라 누군지 모르는 독자도 있을 것이니, 문장을 다시 쓰자. 샤넬 매장 앞에 밤새 도사리고 있다가 매장 문이 열리는 순간 우사인 볼트Usain Bolt처럼 뛰어 들어가 되팔만한 물건을 모조리 사서 나오는 리셀러는 패션을 좋아하고 공유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냥 되팔이다. 리셀러라는 다소 근사하게 들릴 수 있는 영어 단어를 붙이기에는 좀 아깝다. 어쨌든 그들 역시 이 글에서는 리셀러라고 부르겠다. 

덩크 로우는 리셀러가 아니면 이제 거의 살 수 없는 운동화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대체 왜 조던도 아니고 에어 포스Air Force도 아닌 덩크 로우인가? 덩크 로우는 사실 농구 선수보다 스케이트 보더에게 인기 있는 운동화였다. 이미 농구 선수들은 더욱 진화한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나이키 농구화를 신었다. 덩크 로우는 이를테면 보급형 농구화였다. 딱히 놀라운 테크놀로지가 숨은 것도 아니다. 가격은 기본적으로 10만 원대 초반에 불과하다. 밑창이 딱딱해서 착화감이 그리 좋은 편도 아니다. 덩크 로우는 오히려 튼튼하고 저렴한 신발을 선호하는 스케이트 보더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스케이트 보딩이 올림픽 공식 종목으로 선정되자 나이키는 그걸 엄청난 상업적 기회라고 생각했다. 대대적인 마케팅이 시작됐다. 나이키는 당대의 힙합 스타에게 덩크 로우를 신겼다. 오프화이트Off-White와의 컬래버레이션은 특히 효과가 좋았다. 일부러 생산량을 제한해 ‘드로우’ 형태로 발매하는 마케팅도 그즈음 시작됐다. 중저가 운동화였던 덩크 로우는 갑자기 모두가 원하는 힙한 상품이 됐다. 

2016년 IOC에서 2020 도쿄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야구, 가라테, 클라이밍, 서핑과 함께 스케이트보딩을 추가했고, 스케이트보딩 경기는 일본 도쿄도 아리아케 어반 스포츠 파크에서 2021년 7월 25일부터 8월 5일까지 열렸다. © Hiroko Masuike/The New York Times

물론 그게 ‘왜 덩크 로우인가?’를 완벽하게 설명해주는 건 아니다. 나이키가 아무리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친다고 해도 제품 자체의 매력이 없다면 마케팅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덩크 로우의 가장 큰 매력은 간결하고 범용성이 높으며 무엇보다도 다양한 컬러웨이(같은 형태의 제품에 여러 종류의 색상을 배색하는 것)가 가능한 디자인이다. 덩크 로우는 레고에 가깝다. 조각조각 땃따따 맘에 들게 다시 조립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디자인이다. 당신이 만약 나이키 디자이너라면 죽을 때까지 새로운 덩크 로우를 끊임없이 디자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덩크 로우는 오프화이트뿐만 아니라 다양한 브랜드와 진행한 컬래버레이션 제품을 시즌마다 내놓는다. 가장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었던 건 미국 아이스크림 회사 벤앤제리스Ben & Jerry’s와 내놓은 컬래버레이션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그 제품을 보는 순간 “이건 반드시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이용하며 모든 이익의 7.5%를 성소수자 인권, 인종차별, 성차별 등을 다루는 자선 재단에 기부하는 밴앤제리스 아이스크림을 아주 아끼기 때문이다. 꼭 정치적 행동주의 때문에 이 회사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나는 다양한 재료를 아낌없이 투하한 밴앤제리스 아이스크림의 공격적인 단맛을 좋아한다. 그야말로 미국의 맛이다. 이 회사의 최고 걸작은 역시 ‘체리 가르시아Cherry Garcia’ 맛인데, 만약 편의점에 있다면 절대 지나치지 말길 당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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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 작가가 반드시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던 나이키 SB x 벤앤제리스 협업 덩크 로우 ‘청키 덩키’는 2020년 5월에 발매되었다. © hypebeast.kr

다시 신발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젖소를 모티브로 한 나이키와 밴앤제리스의 컬래버레이션 모델은 꽤 아름답다. 하지만 초기 드로우를 놓친 나는 더는 이 모델을 살 수 없다. 이미 리셀 가격에 150만 원이 넘어가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운동화에 미친 사람이라고 해도 150만 원? 무리다. 나의 신발 쇼핑 상한선은 50만 원이다. 그것도 비싸다고? 내 절반의 나이에 이미 발렌시아가 스니커즈를 샀다가 당근마켓에 올려놓고 팔리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들을 말은 아니다. 어쨌거나 나는 절대 덩크 로우를 리셀러가 원하는 가격으로 구매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퀄리티도 그리 좋지 않은 나이키 운동화를 거품을 끼얹은 가격으로 사는 건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유행하는 건 신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티던 친구는 결국 당근마켓으로 ‘범고래’를 샀다. 검은색과 흰색으로 심플하게 만든 덩크 로우 범고래 모델은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신어서 이제는 일종의 국민 운동화가 되어버렸다. 당신이 오늘 홍대에 놀러 나간다면 범고래를 신은 사람을 최소 30명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친구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다들 신고 다니니까 오히려 신기 편한 것도 있어.” 나 역시 굴복했다. 얼마 전 나는 “역시 이래서 리셀러는 양심이 없어”라고 칭얼거리며 크림 앱을 돌아보다 어쩔 도리 없이 덩크 로우 핼러윈 한정판 모델을 구입하고 말았다. 오렌지색과 검은색 갑피의 조화가 끝내주게 아름다운 그 모델의 가격은 25만 원 정도였다. 이건 시작이지 끝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제 리셀 앱과 중고 시장에 오가며 리셀러가 황당한 가격을 덧붙인 온갖 덩크 로우 모델을 찾아 헤매기 시작할 것이다. 

나이키와 점프맨(Jumpman)에서 비롯된 나이키 덩크에 대한 열기는 쉽사리 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핼러윈 덩크 로우를 배송받자마자 구매할 때는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됐다. 이 모델의 밑창은 야광이었다. 빛을 일정 시간 받으면 마치 “내가 가는 곳이 모두 핼러윈!”이라고 외치기라도 하듯이 밝게 빛나는 야광이었다. 만약 당신이 주말 이태원 소방서 근처에서 머리를 빡빡 민 나이 쉰에 가까운 남자가 염치도 모른 채 야광 발바닥을 빛내며 거리를 쓸고 다니는 꼴을 본다면 그건 분명히 나라고 생각해도 좋다. “여러분! 저 나이에 덩크 로우 한정판이나 모으는 저 철없는 중년을 보시오!”라고 외쳐도 좋다. 나는 당신의 즉결심판을 달게 수용할 것이다.

Writer

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loser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