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래퍼는 거리의 시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랩이 시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인데요. 실제 랩이 지닌 라임은 영미권의 시문학에서 비롯했답니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랩으로 표현하는 래퍼가 있을 정도죠. 힙합 저널리스트 김봉현 작가는 랩이 새로운 세대의 음악인 동시에 고전적인 시라고 믿습니다. 그런 면에서 박노해 시인을 가리켜 ‘랩이 곧 시의 친구이자 동료임을 알아본 시인’이라고 말하죠. 박노해 시인의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에서 김봉현 작가의 시선을 사로잡은 랩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 아티클에서 함께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힙합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말이 있다. 바로 ‘래퍼는 거리의 시인’이다. 나 역시 그랬다. 즐겨 들은 힙합에는 꼭 이런 가사가 있었다. ‘내 랩은 한 편의 시/ 나는 거리의 시인이지/ 내 시는 깊고 난 절대 쓰러지지 않아.’ 그럴 때마다 궁금했다. 이건 그냥 비유일 뿐일까, 아니면 정말로 랩이 시라는 뜻일까?
랩은 시와 관련 있다. 아니, 사실 랩은 시로부터 나왔다. 예를 들어, 랩이 지닌 ‘라임rhyme’은 영미권 시문학에서 비롯한 것이다. 영시에는 예전부터 라임이란 개념이 존재했고, 오래된 영시는 모두 라임을 맞추고 있다. 물론 동시대 음악 장르로 한정한다면 라임은 랩의 전유물에 가깝지만, 그 범위를 ‘과거’로 넓히고 ‘언어예술’로 확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랩이 지닌 라임은 랩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Sonnet는 오늘날로 치면 랩 가사나 다름없다. 그의 「소네트 18」을 비트에 맞춰 낭독해보자. 깜짝 놀랄 정도로 완벽한 랩으로 다가온다. 노파심에 말하면, 소네트를 랩 가사의 모양에 맞게 수정하고 다듬는 작업을 거친다는 말이 아니다. 소네트를 훼손하지 않고 원본 그대로 리듬에 맞춰 퍼포먼스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현재 영국에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랩으로 표현하는 ‘아칼라Akala’라는 래퍼가 있다. 그는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기를 맞아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대담을 나누고, 그의 공연에 참여하기도 했다.
래퍼 나스Nas (오른쪽 첫 번째) © Danny Clinch
‘할렘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던 미국의 시인 랭스턴 휴스Langston Hughes 또한 마찬가지다. 만약 ‘시인’ 랭스턴 휴스의 시와 ‘갱스터 래퍼’ 아이스-티Ice-T의 랩 가사를 나란히 적어놓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무엇이 시고, 무엇이 랩인지 온전히 구별해내는 사람이 과연 많을까?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둘 다 라임을 가졌고, 자유롭게 줄을 바꾸는 ‘구절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즉 시와 랩은 서술적 산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함축적·운율적 언어를 공통으로 지니고 있다.
물론 현대 자유시에 관해 논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다. ‘자유’라는 단어에서 알아챌 수 있듯 현대 자유시는 정형화된 운율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장(?)만 바뀌었을 뿐 현대 자유시 역시 다양하고 섬세한 시적 형태를 활용해 완성된다. 이는 랩 또한 마찬가지다. 오히려 과거의 시가 지닌 정형성을 여전히 보존하는 쪽은 랩이기 때문이다.
랩이 시가 아니라는 편견에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작용하는 것 같다. 하나는 랩은 ‘직설’이라는 단정이다. 물론 직설과 솔직함이 랩의 주요한 매력 중 하나로 작용한 점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랩은 거기에 머무르거나 그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니다. 랩은 직설인 동시에 수많은 비유적 언어를 활용한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리포트할 때도 있지만 그럴듯하게 지어진 스토리텔링인 경우도 많다. 랩이 시가 아니라는 편견에 기여하는 다른 하나는, 랩이 다루는 몇몇 주제에 관한 윤리적 거부감과 부당한 폄하다. 예를 들어 ‘돈’에 관한 랩 가사가 있다고 치자. 실제로 힙합의 역사에는 돈을 지칭하는 수많은 슬랭(은어)이 존재한다. 이미 수많은 비유적 언어를 창조한 랩은 그 자체로 새로운 사전을 보유한 존재가 된다.
래퍼 나스 © Danny Clinch
사람들은 왜 시를 좋아하는 걸까. 아마도 시가 ‘시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의 시적인 면모가 사람에게 감흥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랩이야말로 시적인 면모를 가장 강하게 지닌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랩 가사가 한 편의 시라면 랩은 입으로 표현하는 시다. 랩은 새로운 세대의 음악인 동시에 고전적인 시인 것이다.
랩을 반기는 시인들이 있다. 랩이 곧 시의 친구이자 동료임을 알아본 시인들이 있다. 박노해 시인도 그중 한 명이다. 박노해 시인은 아무래도 일단 『노동의 새벽』으로 기억된다. 그가 27살에 쓴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은 금서였음에도 100만 부가 발간됐다. 아마 한국에서 가장 상징적인 시집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는 군사정권 아래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기도 했다.
전쟁의 레바논에서 박노해 시인의 모습, 2007년 © 느린걸음
물론 박노해 시인에게 『노동의 새벽』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를 통해 그는 꾸준히 세상에 목소리를 내왔고 많은 이에게 영향력을 끼쳐왔다. 래퍼 송민호의 인터뷰가 그 흥미로운 예다. «에스콰이어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평소에 시집을 많이 읽는다며 “박노해 선생님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정말 감명 깊게 읽기도 했죠”라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송민호는 V LIVE에서 이 시집을 “내가 본 시집 중 최고”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놀랄 일은 아니다. 어쩌면 시인과 래퍼는 배다른 형제나 다름없으니까.
작년 박노해 시인은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이후 12년 만에 새로운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를 출간했다. 이 시집은 내게 조금 특별한 흥미로움을 안겨주었다. 박노해 시인을 가리켜 ‘랩이 곧 시의 친구이자 동료임을 알아본 시인’이라고 말하게 된 이유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그는 노동 시인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다른 누군가에게 그는 아마 랩에서 자기의 얼굴을 발견한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시인으로 기억될 것 같다.
시집에 수록된 「비움의 사랑」을 보자.
없네
네가 없네
해는 뜨고 별이 떠도
네가 있던 그 자리엔
네가 없네
나 그렇게 살아가네
비움으로 살아가네
사랑이 많아서
비움이 커져가네
너와 함께한 말들도 비워지고
너와 함께한 색감도 비워지고
너와 함께한 공기도 비워지고
나 홀로 있는
비움의 시간이 많아지네
여기 이 자리에 네가 없어도
난 네가 차지했던 그만큼의 공간을
그대로 비워두려 하네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어
나는 결여된 사람이 되어가네
나는 비움의 파수꾼
나는 빈 사랑의 수호자
비움으로 너를 지키려 하네
이제 그 자리에 네가 없네
그 비움의 자리에 내가 사네
살아남은 사람은 어쨌든
다시 살아야 한다는 걸
나도 모르는 바 아니나
이 가득한 세계 한가운데서
나는 점점 제외되어가네
사랑이 많아서
비움이 커져가네
슬픔이 많아서
비움이 푸르르네
비움이 깊어서
가득한 사랑이네
– 박노해, 「비움의 사랑」, 『너의 하늘을 보아』, 느린걸음, 25~27쪽
이 시는 박노해 시인이 미국의 래퍼 ‘투팍2Pac’의 어머니인 아페니 샤커Afeni Shakur의 글에서 일부를 따온 작품이다. “여기 이 자리에 네가 없어도 / 난 네가 차지했던 그만큼의 공간을 / 그대로 비워두려 하네”라는 부분에 영감을 받았다. 아마 투팍은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래퍼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는 서부 힙합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가족, 흑인 공동체, 친구 등에 관한 인간적이고 문학적인 가사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당시 힙합 진영 간의 대립에 휘말려 2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투팍의 어머니인 아페니 샤커가 단지 투팍의 생물학적 어머니만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오히려 아들인 투팍이 어머니인 아페니 샤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한 해석이 아니다. 아페니 샤커는 흑인투쟁단체 ‘블랙팬서Black Panther’의 일원이었다. 그녀가 감옥에 있을 때 투팍을 임신 중이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참고로 투팍은 예술고등학교를 나왔고 시를 즐겨 쓰던 청년이기도 했다. 그의 자작시를 모은 시집 『콘크리트에서 핀 장미(The Rose That Grew from Concrete)』도 체크해두자.
투팍과 그의 어머니 아페니 샤커의 모습
박노해 시인은 자신의 새로운 시집에 래퍼 ‘나스Nas’의 영향을 받은 시를 싣기도 했다. 사실 이 시야말로 나를 잡아 멈춰 세운 주인공이다.
어느 날인가
이 세상에 나를 위한 곳이 없다고 느낄 때
여기가 지옥이다
어느 날인가
이 세상에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없다고 느낄 때
여기가 지옥이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나를 바라봐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
여기가 나의 지옥이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내가 바라봐 주고 사랑해 준 사람이 없음을 알았을 때
내가 그 지옥이다
누구의 죄냐고,
누가 날 이렇게 만들었냐고,
예수를 패버리러 지옥으로 쫓아갔을 때
그는 이미 피투성이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를 끌어안고 누군가 울부짖고 있었다
몇 번인가 지옥을 들락거리던 내가 울고 있었다
– 박노해, 「예수를 패버리러 지옥으로 쫓아갔지」, 『너의 하늘을 보아』, 느린걸음, 223~224쪽
시집 이미지 ⓒ느린걸음
‘예수를 패버리러 지옥으로 쫓아갔을 때’라는 시구절은 래퍼 나스의 가사에서 따왔다. 원문인 ‘When I was twelve, I went to hell for snuffing Jesus’은 힙합 역사에서 세상을 놀라게 한 구절로 남아 있다. 당시 스무 살 남짓의 신인이었던 나스의 놀라운 랩 실력과 문학적이고도 과감한 가사가 더해진 덕분이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나 이 구절에 영감받아 한국의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완성했다.
나스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뉴욕의 험난한 뒷골목에 대한 랩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무작정 불만을 포악하게 토해낸다거나 사실만을 나열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거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성찰적으로 조명하며 문학적으로 승화했다. 다시 말해 ‘아름답지 않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이야기의 방식과 수준이 ‘아름다웠다’는 말이다. 나스에게 ‘거리의 시인(Street Poet)’이라는 칭호가 붙여진 이유이기도 하다. 아마 박노해 시인도 이런 점을 알아챈 것이 아닐까. 그리고 시인 역시도 이런 존재들이 아닐까. 사실 이 글의 서두에 인용한 ‘내 시는 깊고 난 절대 쓰러지지 않아’라는 랩 구절은 바로 나스의 것이다. ‘My poetry’s deep, I never fell.’
래퍼 나스의 앨범 ‹Illmatic› 표지
힙합에는 ‘킵잇리얼Keep It Real’이라는 태도가 있다. 랩 음악, 혹은 래퍼의 인터뷰에서 한 번쯤은 접해봤을 것이다. 대략 이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① 너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할 것
② 거짓말하지 말고 늘 진실할 것
힙합 세계에는 다른 음악 장르에 없는 전통이 있다. 곡의 가사는 뮤지션이 직접 써야 한다는 전통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곡의 가사는 자기가 직접 쓰는 것이 옳고, 그래야 떳떳하다는 생각이 있다. 다른 음악 장르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광경이다. 힙합의 이러한 전통은 우리가 랩 음악을 ‘자서전’처럼 느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힙합을 가리켜 가장 ‘자기 고백적’인 음악이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음악을 통해 래퍼가 종종 자신의 실제 삶을 털어놓기 때문에 우리는 래퍼 이름을 네이버에서 검색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의 음악을 들으면 된다. 그 안에 그의 실제 삶이 전부 담겨있기 때문이다.
나는 박노해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킵잇리얼 말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수많은 시에 투영하고 있었고, 자신이 실제로 목격한 것을 시에 담아 고발하고, 알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이건 힙합인데?”라고 중얼거렸다. 우리는 음악이 아닌 무언가를 보고 ‘이거 재즈인데?’ 혹은 ‘이거 클래식인데?’라고 말하진 않지만, ‘이건 완전 힙합인데?’라는 말은 자주 한다. 힙합은 음악이면서 동시에 태도이자 가치관으로서 강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박노해의 시를 읽고 힙합을 느꼈다.
진지하게 말하건대, 박노해 시인이 만약 30년 더 늦게 태어났다면 래퍼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래퍼가 되었을 확률이 아마 꽤 높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랩은 새로운 세대의 음악인 동시에 고전적인 시이고, 시가 했던 역할을 지금 랩이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에서 발견한, 랩 가사 같은 시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어쩌라고, 어쩔 거야
내가 태어났다니까
내가 등장했다니까
이런 세상에 너 어떻게 살 거냐고
날 겁주지 말라니까
이거 배우고 저거 잘하고
남을 밟고 싸워 이기라고
날 떠밀지 말라니까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인생
내가 찾아서 간다니까, 내 길
부딪히고 쓰러지고 일어서고
내가 해낸 게 진짜 나라니까
– 박노해, 「아이가 온다」, 『너의 하늘을 보아』, 느린걸음, 122쪽
Writer
김봉현(@youknowmysteez_)은 힙합 저널리스트다. 2003년부터 음악에 대한 글을 쓰며 책을 낸다. ‘서울힙합영화제’를 주최했고 엠씨메타, 김경주 시인과 ‘포에틱저스티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몇 년 전부터 한국 힙합 앨범을 바이닐로 제작/발매하고, 라이너 노트를 작성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한국힙합, 열정의 발자취』, 『힙합: 블랙은 어떻게 세계를 점령했는가』, 『한국힙합 에볼루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