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ual Portfolio
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빈번히 사용되던 매체가 이제는 표준 미달 딱지를 달고 전성기를 이탈했을 때, 그 틈에서 발생하는 기묘한 감각을 느껴본 적 있나요? 박선호는 제철이 지나버린 아마추어 같은 매체로 미래를 담아내며 어긋난 시차를 그려냅니다. 작업실 간이 거치대에 걸린 다채로운 재료들과 프로젝터 불빛이 팔레트 위 물감처럼 뒤섞이는 순간, 개인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그의 긴 호흡은 사회의 거대한 흐름과 맞물리기 시작합니다. 연결과 어긋남이 저마다 자리를 지키며 빚어내는 이 비동시적인 감각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출발합니다. 타인의 욕망을 쉽게 욕망하는 시대에서 그의 작품은 과거의 유행이나 빈티지한 멋스러움보다 늘 앞서 있습니다. 자신만의 단단한 원칙과 고유한 세계관에 뿌리를 둔 박선호의 작업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고고학 테이블›, 2022, 싱글 채널 비디오 ‹AB사이드›(2021) 마운트, 아스텔과 아크릴로 제작한 다섯 개의 판, OHP 필름에 출력, 100 × 45 × 89cm, 사진 전명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박선호입니다. 주로 영상과 설치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주로 개인적인 기억과 동기로부터 출발해, 사회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긴 호흡으로 바라봐야 할 것들을 위해 작업하고 있습니다. 작업 과정에서 슈퍼 8(super 8) 필름 등 동시대가 아닌 시차를 가지고 존재하는 옛 매체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현재는 다양한 스크린이나 상영 환경을 고려하면서 작업을 잘 담아내고 보여주는 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경험한 것을 관객들에게 잘 전달하는 방식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학생 때부터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전시와 작품을 보러 다녔고, 이 과정에서 어떤 것들이 나에게 강한 체험으로 남게 되는지 생각해 왔어요. 학부 전공은 조형예술, 대학원 전공은 서양화였지만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따라 사진, 영상, 설치, 텍스트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처음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영상을 주로 제작하게 될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난 몇 년간 말하고자 한 주제들이 주로 영상 매체로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주로 영상과 설치 작업을 제작했습니다. 지난 3~4년은 작가 스튜디오, 미술관 등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며 작업을 병행했는데, 덕분에 학교 밖에서도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조직하고, 책을 엮는 등 예술(미술)이라는 일에 마음을 많이 쓰는 미술계 구성원들로부터 인사이트를 얻고 있습니다.
‹6fps만큼 부족한: Super 8mm 필름을 활용한 잡동사니 영상 제작을 위한 리서치› 쇼케이스 설치 전경
‹6fps만큼 부족한: Super 8mm 필름을 활용한 잡동사니 영상 제작을 위한 리서치› 쇼케이스 설치 전경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영상 작가와 미술비평가 그리고 저까지 3명이 함께 회현역 인근 작업실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은 함께하지 않지만, 이전에 이 작업실을 쓰던 친구들 덕분에 2019년부터 쾌적하고 안전한 공간에 정착할 수 있었어요. 자기만의 안전한 공간이 창작에 꼭 필요하다는 걸 작업실 생활을 통해 느끼고 있어요.
요새는 다양한 크기와 재료의 스크린을 제작하고 있어서 작업대 한편은 온갖 부자재들이 쌓여 있습니다. 영상 스크린을 걸어둘 수 있는 간이 거치대 같은 걸 만들어서 천장에 설치해 뒀어요. 낮에는 다양한 크기와 질감을 가진 재료들을 거치대에 걸어 보고 깜깜한 시간에는 프로젝터로 영사해 보며 각 재료가 가진 느낌이 어떤지 살펴보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시간이 빨리 가요. 이외의 시간에는 책상이나 소파에서 이런저런 다른 업무를 하고요. 최근에 작업실 근처에 더북소사이어티 회현점이 생겨서 산책 겸 구경을 다녔어요. 답답할 때는 남산 아래 백범광장에 올라서 서울을 내려다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음악과 글, 친구들, 누군가의 거대한 희생과 헌신하는 마음······ 그리고 만화책입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아주 어릴 때는 책을 읽거나 참조하며 이론이나 미술사 등과 작업이 어떻게 연결될지 많이 고려했습니다. 지금은 살면서 계속 신경 쓰이는 것들을 리서치하고, 제가 고민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과 작업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자신에게 그것들을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하고 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말보다 과하게 어렵거나 복잡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말하기를 연습해 보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 내용이나 감각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어떤 매체를 선택하면 좋을지 고민해요. 작품이 어느 정도 전개가 되면 설치 방식 등을 동시에 생각해 보려고 하고요. 이전 작업과 이후 작업, 한 전시에 놓일 작업 간의 관계 등을 신경 쓰고 있어요.
‹신품 빈티지›, 2024, FHD로 출력한 Super 8 영상을 iphone으로 재생, 3분 30초, 40 × 20 × 18cm, 사진 스튜디오 오실로스코프
‹6fps만큼 부족한: Super 8mm 필름을 활용한 잡동사니 영상 제작을 위한 리서치› 쇼케이스 설치 전경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작년까지의 작업은 저와 가까운 한 사람—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사회에서 그 속도에 발맞추지 못하고 멈춰버린 사람—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로부터 출발합니다. 그 시기를 지나며 보고 느꼈던 다양한 감정들과 사회현상을 들여다봤어요. 이 여정을 잘 드러내기 위해 최근 몇 년간 슈퍼 8(Super 8) 필름으로 35롤 분량의 영상을 찍었어요. 아직 현상하지 않은 걸 포함하면 50롤 분량 정도를 찍었네요······
슈퍼 8 필름은 과거 홈비디오에 사용된 카메라로, 아마추어적이고 표준에 미달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기술 발전의 속도에서 멈춘 한 사람에 대한 관심처럼, 매체가 빈번하게 사용되던 시기에서 이탈했을 때의 감각을 구현해 보려고 했어요.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감각적이고 미적인 전략을 함께 찾아보려 한 것 같아요.
작년 더 윌로와 제 개인전에서 선보인‹조율된 입자›는 2025년 오사카 엑스포를 촬영한 영상들을 이어서 편집한 작업입니다. 엑스포(expo)라는 오래된 형식이 보여줘 온 전형적인 미래의 모습을 1970~1980년대에 많이 사용된 슈퍼 8 비디오카메라를 통해 담아내 보고 싶었고, 중간중간 1980년대 여성 프로그래머로 활동해 온 어머니에 대한 제 개인적인 기억을 교차시켰어요. 미래적인 상황과 첨단의 직업, 저의 현실, 매체의 특성에 관한 이야기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보는 분마다 감상이 다 달랐어요.
‹조율된 입자›, 2025, 4K 비디오로 변환된 슈퍼 8 필름, 컬러, 사운드, 12분 40초, 120 × 160cm, 사진 박선호
«패치워크!» 전시 전경, 더 윌로, 2025
‹야생의 입자›, 2025, 2K 비디오로 변환된 슈퍼 8 필름, 컬러, 사운드, 6분 25초, 사진 박선호
이어서 만든 ‹야생의 입자›(2025)는 1967년 몬트리올 엑스포에서 촬영한 스톡 필름을 활용해 만들었어요. 그 필름을 eBay에서 구매하고 스캔하는 과정에서 보았던 풍경이 제가 2025년에 본 오사카 엑스포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두 엑스포가 다루는 미래와 기술, 그것을 바라보는 현재의 시점에 관한 생각을 담았습니다. 이러한 시도를 ‘매체를 비동시적으로 사용한다’, ‘비동시적인 매체를 사용한다’라는 말로 정리해 보려고 해요. 최근에는 필름 자체가 또 다른 유행이나 빈티지한 멋스러움을 가진 어떤 것이 되어버려서 계속 이 매체를 사용해야 할지는 고민이 됩니다.
작년 12월에 마친 개인전 «힘(Wild Wisdom)»이 지난 몇 년간 탐구해 온 작업의 한 챕터를 마무리하는 중요한 전시였던 터라 새 작업의 소재와 주제를 구상하고 선택하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지금은 돌아오는 8월 페리지 갤러리에서 열릴 기획전에 선보일 영상 설치 작품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1800년대부터 하버드대학교 천문대(Harvard College Observatory)에서 일한 여성들(여성 계산원)이 생산한 천체 유리 건판 사진 아카이브를 탐험하면서 기술 발전을 여성주의적으로 상상해 보는 리서치를 진행하고 있어요. 아직 리서치가 한창인데 워낙 자료의 양이 방대해서 좀 헤매고 있습니다.
박선호 개인전 «힘(Wild Wisdom)»(2025) 전시 전경
‹정물들›, 2025, 4K 비디오로 변환된 슈퍼 8 필름, 컬러, 무음, 50피트, 루프 비디오 스틸 이미지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리듬과 몰입, 관객들이 느끼는 신체의 느낌과 영상이 다루는 이야기와의 연관성을 만들어내기.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을 여쭤봐도 될까요?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고 작업실로 출근해 작업 걱정을 조금 하다가 급한 업무를 처리하고, 집 근처 5분 거리에 있는 요가 수업에 주에 이틀 정도 나가기. 요새는 전시가 임박해서 이 루틴을 못 지키고 있네요.
요즘 작가님이 관심을 가장 많이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내 마음에 괜찮은 선택을 해보기. 작업 과정에서 타협하지 않기. 민폐를 걱정해 여러 가지 선택지를 닫지 않기. 이것들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결국 좋은 작업을 제작하기 어렵게 되더라고요.
«어떤 사물 그리고 몸짓들» 설치 전경, 우민아트센터, 2022
‹AB 사이드›, 2021, 싱글 채널 비디오, UHD, 컬러, 사운드, 8분 5초, 비디오 스틸 이미지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복잡한 문제들을 충분히 고민해 보려고 해요. 그래서 작업이 이야기하는 내용들이 다소 우회적인 말하기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지난 몇 년간 회사 생활을 하면서 퇴근하고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루틴을 지켜 왔는데, 작년 이맘때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어요. 현재도 프리랜서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는데, 뭐든지 가볍고 산뜻하게 처리하는 게 어려운 성향이라 뭔가를 할 때 너무 몰입하게 돼요. 작은 선택에도 기진맥진하거나 불안이 높아지는 것 같아요. 완벽주의를 조금 내려놓고 빠르게 결정할 수 있는 걸 빠르게 해결하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내가 어떤 일을 하면 무리하게 되는지 냉정하게 생각해서 거절도 빠르게 해 보려고 하고요.
‹넝마 엄마 비디오〉, 2025,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2분 15초, 300 × 168cm
〈넝마 드로잉›, 2025, 트레이싱지에 레진, 잉크젯 출력 이미지, 셀로판 테이프, 유리 시트, 천, 92.5 × 78.5cm, 사진 스튜디오 오실로스코프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만들어진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역량을 지속적으로 키울 것. 타인의 삶을 착취하지 않을 것. 다만 원하는 것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경우에는 그 선택이 가져올 영향을 정확히 인지할 것. 어영부영 넘어가는 일이 상처로 남게 된다는 걸 늘 기억할 것.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어떤 선택을 할 때 내가 정말 좋아해서 하는 건지, 아니면 사람들이 보았을 때 좋아 보이고 멋지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인지 잘 분별해야 하는 것 같아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타인의 기준에 맞추고자 하는 경우 내가 선택하고자 한 것들에 대한 만족도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특히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기 쉬워진 시대라서,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 이러한 자기 점검이 늘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쉽지 않지만 저도 노력하고 있어요.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제 마음에 꼭 드는 것들이 좀 더 많이 곁에 남으면 좋겠어요. 오늘 아침에 생각했어요.
Artist
Sunho Park 박선호(@sonnevak)는 개인의 기억과 수집한 정보, 시각 이미지로 이루어진 꾸러미를 구성한다. 효율과 매끄러움의 논리가 삭제해 온 시간과 이야기를 우회하고 그 과정에서 감지한 윤곽을 비동시적인 매체를 통해 드러낸다.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던 이야기, 은밀하지만 알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형상화하는 방법을 탐구하고, 관람 행위를 설계하여 환대와 몰입 사이의 경험을 실험한다.
개인전 «힘(Wild Wisdom)»(LDK DT, 2025)을 열었고 2022년 서울시립미술관 난지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로 활동했으며, 두산아트센터 두산갤러리(2019), 주캐나다한국문화원(2019), 대림미술관(2020), 대안공간 LOOP(2022), 우민아트센터(2022), 우란문화재단(2025), 더 윌로(2025)등에서 작업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