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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밀면을 먹어라!

Writer: 김도훈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영혼을 적시는 소울푸드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김치찌개, 통닭 등이 꼽히는데요. 김도훈 님의 소울푸드는 바로 아구찜과 밀면입니다. 마산에서 태어나 정통 아구찜을 즐기던 그는 부산으로 옮겨가 밀면의 세계에 푹 빠졌는데요. 서울에서 활동하며 평양냉면에도 도통해지고 그 힘든 ‘성조’ 사투리도 표준어로 고쳤지만, 밀면을 좋아하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았답니다. 왜냐하면, 소울푸드니까요! 다양성의 마음으로 ‘밀면 먹기’를 권하는 그의 솔직한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나에게도 ‘소울푸드’가 있다. 아,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문화적 전유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이라면 ‘너는 아프리카계 미국 흑인이 아닌데, 어떻게 소울푸드가 있느냐?’라며 이미 불평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소울푸드는 미국 남부 흑인의 전통 음식을 의미하는 게 맞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소울푸드라는 단어는 누군가의 영혼을 울리는 어린 시절의 음식, 혹은 고향의 음식을 뜻하는 의미로 넓게 통용됐다. 그러니 여기서 소울푸드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허락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그렇다.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네이버에 한 번 검색해 보시라. 이미 ‘엄마가 끓여주던 김치찌개’나 아빠가 퇴근길에 사 온 ‘통닭’은 한국인의 소울푸드가 된 지 오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소울푸드 치킨&와플

그래서 나의 소울푸드는 무엇인가. 나는 마산에서 태어났다. 마산은 고유의 대표적인 음식 몇 가지를 가진 도시다. 가장 유명한 건, 역시 아구찜이다. 마산은 아구찜의 고향과도 같은 도시다. 서울에도 ‘마산 아구찜’이라는 이름으로 영업하는 가게가 한두 곳이 아니다. 그런데 마산 아구찜은 지금 서울에서 파는 마산 아구찜과는 다르다. 내 어린 시절, 그러니까 1980년대에 먹었던 아구찜은 말린 아구로 만든 것이 기본이었다. 지금처럼 통통한 생아구 살을 발라 먹을 수 있게 된 건 신선 유통이 발전한 이후다. 마산 오동동 아구찜 골목에 있는 오랜 가게들은 다 말린 아구로 찜을 했다. 전분을 넣지 않아 국물은 더 빨갛고, 덜 걸죽했다.

나는 쿠팡이츠로 굳이 아구찜을 시킨 다음 불평하는 버릇이 있다. ‘말려서 꼬들꼬들하고 감칠맛이 나는 아구로 만들지 않은 아구찜이 무슨 아구찜인가!’ 짜증을 내며 생아구살을 맛있게 발라 먹는다. 들어보니 요즘은 마산에서도 생아구로 만든 아구찜이 더 인기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말린 아구는 특유의 감칠맛이 지나치게 진한 나머지, 꼬릿한 맛이 난다. 젊은 세대는 그 맛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단다. 하지만 당신이 마산에 갈 일이 있다면 꼭 오동동 아구찜 골목에서 말린 아구로 만든 찜을 먹어야 한다. 아구로 만든 코다리찜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좀 더 잘 이해가 갈 것이다.

아구찜은 확실히 나의 소울푸드였다. 1980년대에는 외식이라는 것이 그리 발전하지는 않았다. 당시 막 생기기 시작한 ‘가든’ 스타일의 고깃집을 제외하면, 밖에서 음식을 사 먹는 일이 아주 익숙하지는 않던 시절이다. 그래서 주말이면 내 가족은 아구찜을 먹으러 갔다. 벌건 국물에 밥을 비벼 마른 아구 한 점을 올리면 그렇게 밥이 맛이 났다. 부산으로 이사를 가자 오동동의 아구찜을 먹을 수 없게 됐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마산 사람 눈으로는 영 거칠고 투박했다. 부산으로 간 이후에도 오랫동안 마산이 그리웠다. 하지만 거기에도 지금 나의 소울을 건드리는 푸드는 있었다. 밀면이다. 서울 사람인 당신이 부산에 내려가서 한 젓가락을 먹은 후 ‘빨갛고 달달한 맛이 그냥 분식집 냉면이랑 비슷해서 도저히 고고한 평양냉면과 비교할 수 있는 음식은 아니군’이라고 주변 부산 사람들 귀에는 들리지 않게 불평하는 바로 그 음식 말이다.

밀면은 주말의 음식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선포했다. “주말에는 밥을 하지 말고 사 먹기로 한다.” 아버지는 외국 생활을 오래 한 덕에 여전히 꼿꼿하기 그지없는 경상도 남자임에도 조금 세련된 구석이 있었다. 그건 ‘주말에는 가사 노동을 하지 말자’는 일종의 선언이었을 것이다. 주말의 모든 식사를 주문해서 먹은 건 아니었다만, 그래도 큰 압력밥솥에 매끼 밥을 하는 일은 사라졌다. 특히 토요일 점심은 거의 무조건 밀면이었다. 토요일도 학교를 가는 시절이었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면 어머니는 만 원짜리 지폐를 하나 들려주며, “요 앞 밀면집 가서 포장 좀 해온나”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살던 지역은 부산에서도 가장 내륙에 위치한 동래였다. 당시 동래에서 꽤 유명하던 ‘동래밀면’이 집 근처에 있었다. 방탄소년단 정국과 RM이 다녀간 이후 요즘은 아미들이 부산에 가면 꼭 찾는 맛집이 되었다고 들었다. 설마 그걸 가게 간판에 걸어놓았을까 싶었는데 구글로 사진을 찾아보니 정국과 RM의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있다. 하이브 직원이 이 글을 읽고 동래밀면을 초상권 위반으로 고발하지 않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부산 동래밀면 내 BTS RM이 다녀간 자리

하여간 토요일 점심마다 먹던 밀면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맛있었다. 한약재를 넣어 함께 우린 돼지고기 육수에 빨간 다대기를 넣고 슥슥 휘저은 뒤 국물을 들이키는 순간, ‘캬, 이게 부산의 맛이지’ 싶었다. 아니면 경상도의 맛이지 싶었다. 나도 알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서울 독자들, 특히 평양냉면이야말로 차가운 면 요리의 진수라고 생각하는 식도락가라면 이미 고개를 젓고 있을 것이다. 그래. 인정한다. 밀면은 평양냉면의 부산식 카피다. 그렇게 시작했다. 함경남도 흥남시에서 동춘면옥이라는 냉면집을 하던 주인장이 한국전쟁 시절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가 차린 ‘내호냉면’이 밀면의 시작이다. 전쟁통에 메밀을 구할 수 없자 미군이 원조한 밀가루로 면을 만들고 함흥냉면처럼 다대기를 올렸다.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의 아름다운 만남이 전쟁 시절 부산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밀면은 부산 지역의 전통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필동면옥 전경

나는 서울서 처음으로 평양냉면을 먹었던 날을 기억한다. 2004년 여름이었다. 직장 선배가 데려간 ‘필동면옥’에서 육수를 마시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서울 사람에게 말했다. “행주 빤 물 같은데요?” 나는 아직도 그때 보았던 경멸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남쪽 바닷가에서 올라온 ‘상놈’은 진짜 서울의 맛을 모른다는 듯한 눈빛. 물론 그 경멸의 눈빛을 되갚고자 나는 열심히 서울 사람이 되기로 했다. 사투리도 표준말로 바꾸었다. 경상도 사람이 사투리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경상도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정치과몰입자 중에서는 ‘경상도 사람들은 경상도 권력을 누리기 위해 사투리를 고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무슨 소리냐. 경상도 사투리(그리고 함경도 사투리)는 한국에서 거의 유일한 성조어다. ‘부산러’들은 성조로 말을 하고 성조로 알아듣는다. 우리는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2의 2승, 2의 e승, e의 2승, e의 e승을 구별하여 발음할 줄 안다. 그냥 좀 다른 언어인 것이다. 고치기가 정말이지 힘들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경상도 출신 서울인들이 ‘워료일’을 ‘월료일’이라고 전혀 다른 지점에 강세를 두고 발음하며 ‘나는 완벽한 서울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을밀대

우래옥

을지면옥

서울 생활 20년 만에 나는 거의 완벽한 서울 사람이 됐다. 평양냉면 애호가가 됐다. 필동면옥과 을지면옥과 을밀대와 우래옥의 맛을 구분할 수 있는 서울 사람이 됐다. 하지만 나는 밀면 앞에서 코를 드는 서울 사람들에게 아직 굴복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평양냉면 애호가들은 밀면은 다 비슷비슷한 맛이라며, 어차피 강렬한 다대기를 넣어 매운맛에 먹는 냉면 유사품이라며 코웃음을 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부산 유명 밀면집의 밀면 맛을 구분할 수 있다. 화끈하고 거친 가야밀면, 소담하고 차분한 개금밀면, 부드럽고 가정적인 동래밀면과 국제밀면, 한약재 맛이 강한 춘하추동 밀면. 그 모든 밀면집의 맛은 다 다르고 개성이 있다. 모든 것을 서울 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해석하는 한국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건 로컬리티, 그러니까 지역성이다.

모든 것이 전주비빔밥은 아니다. 전주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어떤 비빔밥집이 최고의 비빔밥집인가를 두고 격렬하게 논쟁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의 소울푸드인 밀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부산에 놀러 간다면 밀면 투어를 강하게 권하고 싶다. 다대기에 숨은 개성을 발견하기를 권한다. 삼시세끼 밀가루 음식만 어떻게 먹냐고? 탄수화물 중독인 당신은 어차피 어제도, 오늘도 배민으로 밀가루 음식을 시켜 먹었다. 괜히 빡빡하게 굴지 말라. 글루텐 프리 밀가루로 만드는 밀면은 없나요? 맙소사. 인정한다. 이 질문을 던지는 당신은 100% 서울 사람이다. 당신은 그냥 서울을 떠나지 말라. 아니, 서울도 글루텐으로부터 자유로운 도시는 아니다. 당신은 캘리포니아로 가야만 한다.

Writer

김도훈(@closer21)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 평론가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고, 『낯선 사람: 뒤흔들거나 균열을 내거나』를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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