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비건 아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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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제공 © 윤미원, 매거진F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최근 들어 채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에도 비건이란 말이 널리 쓰이고 있는데요. 에세이스트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양다솔 작가는 비건에 대한 여러 가지 편견을 친절하게 설명하며, 비건으로 사는 소회를 에세이에 담았답니다. 지속가능한 비건을 위해 매일 노력하는 작가가 밝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어느 날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야, 너 선볼래?” 깜짝 놀랐다. 서른 문턱을 앞두고 알람이라도 울린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됐어.” 허공에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엄마가 말했다. “이제 갈 때 됐잖아.” “됐다니까.” “한번 만나나봐.” 나는 말했다. “나 집에서 놀고먹게 해줄 수 있대?” 그러자 엄마가 코웃음을 치더니 전화를 끊었다.

얼마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야, 너 선볼래? 너 집에서 놀고먹게 해준대.” 나는 말했다. “됐어.” 엄마는 말했다. “애비도 없는 게, 시집가야지.” “혼자 잘 살 건데.” “애가 진짜 괜찮대.” 나는 말했다. “잘생겼어?” 정적이 흘렀다. “키는? 몸매는? 성대는? 집에서 놀고먹으면서 그 사람 얼굴만 볼 텐데 재미없으면 안 되지.” 그러자 엄마가 콧방귀를 뀌더니 전화를 끊었다.

얼마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야, 이번엔 진짜야. 잘생기고 능력도 좋대.” 나는 말했다. “포기를 모르는 아줌마네.” 엄마는 말했다. “야,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있냐?” “내가 알아서 하면 안될까?” “유학파래 유학파.” 내가 말했다. “그래 좋아, 근데 있잖아.” 엄마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어.” “평생 밥상에서 달걀, 우유, 고기, 생선 구경 못 할텐데 괜찮대?” 그러자 다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기 가장 쉬운 방법 알고 있다. 만나자마자 “비건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대의 얼굴에 작은 폭탄이 터지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비건이 뭔지 모른다고? 이때 “모르면 검색창에 쳐보시죠.” 같은 말을 했다가는 풀떼기만 먹어서 신경질적이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으니 유난히 상냥하게 말해야 한다. “고기, 해산물, 유제품 등 동물성 식품 일체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 입니다.” 그때부터는 신나게 헛발질을 하는 상대를 구경하면 된다(특권이다). 대부분의 경우 어떡하냐면서 갑자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알겠지만 나한테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 경우, 그냥 고기를 먹는 착한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또 많은 경우 느닷없이 자신이 왜 고기를 먹는지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한다. “고기 없이 어떻게 살아요.” “맛있는 걸 어떡해요…” ”저는 고기가 좋아요!(안 물어봤다)” 그렇다. 사람들은 비건을 어려워한다. 정확히는 불편해한다. 어떻게 잘 지낼 수 있는지 모른다. 눈빛이 흔들리고, 말을 가다듬는다. “저는 게이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저는 여자를 좋아해요,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완벽히 동문서답이다. 한 사람의 식습관이나 성적 취향이 서로에게 전혀 상관이 없는 일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는 양다솔입니다.”라고 했을 때 “저는 양다솔이 아닙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완벽히 틀린 답이듯이 말이다. 어떤 이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전 세계 비건 대표로 만들어버린다. 세상 진지한 얼굴을 하고 동물권부터 기후변화, 환경, 공장식 축산, 페미니즘, 채식이 가진 모순점, 공격적 시위 그리고 플랜테이션까지 온갖 카테고리에서 무작위적 질의를 던진다. 나는 어떤 문제 제기에도 당황하지 않고 과학적이고 빈틈없고 설득력 있는 논지를 펼치는 대신 “그냥 제가 먹는 건데요.” 하고 웃는다.

희귀종을 발견한 것처럼 눈을 부릅뜨며 묻기도 한다. “그럼 대체 뭘 먹어요?” 편의점에서 사온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잔뜩 안고서 말한다. “풀만 먹으면 단백질이나 철분 섭취가 굉장히 부족해진다던데.” 질병관리본부야 뭐야. 나는 말없이 웃으며 거대한 비건 도시락을 꺼낸다. 정성스럽게 만든 유부초밥과 두부조림을 조금씩 덜어 나눠준다. 그들이 걱정하는 게 진정으로 나의 건강일까 궁금해하며. 대부분의 이들은 이후로도 눈을 똑똑히 뜨고 내가 뭘 먹는지 지켜본다. 그리고 혼란과 기쁨이 뒤섞인 얼굴로 숨 가쁘게 달려와 이렇게 묻는다. “지금 티라미수 먹는 거예요? 티라미수는 유제품인데.” 그런 질문을 받는 순간에는 약간의 전율마저 느낀다. 먹는다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 누구에게나 침범 가능한 영역으로 변모하는 장면을 목격했으므로. ‘The personal is political(사적인 것이 곧 정치적이다)’라는 표어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하는 순간이 있을까.

나는 지치고 피곤할 때 가끔 케이크와 빵을 허용한다. 설탕을 한 숟가락 입에 퍼먹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순간이 삶에는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비건을 하면서 기쁘고 싶기 때문이다. 결코 먹지 못해서 화가 나거나 억울한 순간을 맞닥뜨리고 싶은 생각이 없다. 오랫동안 하고 싶다. 너무 좋아서 매일 하는 산책처럼 하고 싶다. 비건을 꾸준히 하고 싶은 마음과 가끔 케이크를 먹고 싶은 마음은 완벽히 모순적으로 서로를 도우며 공존한다. 인간은 복합적인 존재다. 누군가 내가 비건임을 잊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케이크를 선물한다면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받아야 하는 존재이며, 케이크 몇 번을 못 먹어서 어느 날 잔뜩 화가 나 비건을 관둘 수 있을 만큼 약한 존재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나의 권리다. 내가 앞으로 삼시 세끼를 티라미수만 먹으며 이름을 티라미수 공주로 개명해도 어느 누구도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현재 비건이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동물성 식품의 소비량 또한 획기적으로 줄었다. 비건의 지향점은 완벽함이 아니다. 자신을 이루는 신념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나는 비건 함량 미달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 비건을 하려면 건강해야 하고, 부지런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하며, 상냥하고 친절해야 하고 심지어 똑똑해야 한다. 그야말로 완벽해야 한다. 앞으로는 만나자마자 “저는 비건이 아닙니다.”라고 밝혀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누군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좋은 건 알겠는데, 귀찮지 않아요?” 순간 무릎 힘이 탁하고 풀리는 것 같았다. 아득해졌다. 비건이 귀찮은 일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삶에서 가장 귀찮은 일 중 하나일 것이다. 얼마 전에 제주도에 며칠 동안 방송 촬영 일정이 잡힌 적이 있다. 방송 출연이라니 기쁨과 설렘은 잠시였고 바로 문제가 등장했다. ‘나 뭐 먹지?’ 제주도는 잘 알려진 비건 불모지다. 간단한 국수 한 그릇에도 고기 조각이 둥둥 떠 있다. 혼자 여행을 가면 직접 해 먹거나 시간이 걸려도 식당을 찾아갈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단체 일정에서 나만을 고려한 선택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정확히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 귀찮군.’ 그리고 곧이어 이렇게 생각했다. ‘아주 재밌겠군.’ 답은 아주 간단하다. 나는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 제주도에서 먹을 도시락을 준비했다. 잘 상하지 않으면서 바로 덥혀 먹을 수 있고 간단하면서도 배부르고 심지어 맛까지 있는 메뉴를 열나게 고민했다. 그렇게 무려 다섯 개의 메뉴를 엄선하여 도시락을 만들었다. 안 그래도 힘든 일정이 될 텐데 내가 한두 가지 메뉴로 질릴까봐서다. 가방이 천근만근이었다. (이게 재미가 없을 리가 있나?) 밤에 졸려 죽겠는 와중에 요리를 하는 나 스스로가 너무 웃겨서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알아준다고 이렇게까지 할까. 비건이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까. 방송 스태프들은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내가 준비해온 도시락을 보고 안심과 경악이 공존하는 표정을 내비췄다. 나는 촬영 내내 기분 좋게 배때기가 부른 해피 비건이었다. 정말이지 비건은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매일 새롭게 귀찮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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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 © 양다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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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 © 양다솔

그 와중에 세상은 전에 없이 편리하고 효율적이다. 하루가 다르게 개편된다. 빨라진다. 낡은 것은 부서지고 새로운 게 들어선다. 빽빽해진다. 그런 세상에서 귀찮음은 아주 짧은 순간일지라도 장애가 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불 보듯 뻔하다. 편리와 효율이라는 강력한 등대가 비추고 있는, 가장 환한 길이다. 가장 높은 효율을 위해서 우리는 몸을 전혀 움직일 필요도 없다. 손가락 하나로 충분하다. 우선 집 밖으로 나가는 것부터 그만두자. 신발을 신는 것도 비효율적이다. 모든 것을 새벽 배송으로 시키자. 내가 움직이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가 새벽부터 온몸을 죽도록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눈 깜빡 하면 집 앞에 원하는 것이 대령해 있는 마법에 집중하자. 뭘 먹을지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 가장 잘 팔리는 순으로 정렬해 상단에 있는 걸 사면 된다. 그것이 허위 광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 먹기만 하면 되니까. 책도 사라져야 한다. 유튜브를 보면 되니까. 인도도 없애자. 고속도로를 타면 되니까. 걸을 필요가 없어졌으니 다리도 없애자. 삶의 고민도 없애자. 학교에 갔다가 학원에 갔다가 대학교에 갔다가 결혼을 하고 대기업에 갔다가 자영업을 하면 되니까. 시장은 사라지고, 산책하는 사람들도 사라지고, 붕어빵 포장마차나 가망 없는 꿈을 좇는 사람들, 미끄럼틀이나 그네도 사라져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보니까. 그리고 깨닫게 된다. 내가 스스로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마법처럼 저절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의 파도 속에 잠겨 내 몸이 함께 쓸려가고 있다는 것을. 그 거대한 컨베이어벨트에서 이탈하려면 감내해야 하는 어마무시하고 유일한 것이 있다. 바로 귀찮음이다. 세상이 원하지 않는 길은 모두 귀찮다. 다른 길을 상상하는 것은 귀찮다. 찾기 어렵고 복잡하고 어둡고 지난하고 낯설다. 그리고 너무도 값지다. 누구도 대신하지 않는, 나 스스로 옮기는 걸음이기에.

Writer

양다솔은 글쓰기 소상공인, 비건 지향인이다 . 에세이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2021)을 썼고, 유료 뉴스레터 [격일간 다솔]을 발행하고 있다.

@kakmsic

일러스트레이션 제공 © 윤미원, 매거진F

디지털 노스탤지아도 노스탤지아다

Report

메이플스토리

사이버 공간에서도 추억은 쌓인다

추억의 사전적 정의,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 보통 개인이 체험한 가장 좋은 경험이 뇌에 녹진히 남아서 추억이 된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추억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자신이 겪었던 개인적인 과거의 사건들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어릴 적 일을 소환한다. 물론 추억이 최근의 일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시점은 과거형이다. 그런데 그 추억이 디지털 공간에 기반한 것이라면 어떨까. 예를 들어 코로나19 시기에 대학 시절을 보냈다면? 게임이나 가상의 공간에서 과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면? 어릴 때부터 게임이나 소셜네트워크의 매력에 빠져 온라인에서만 추억을 만들고 그것을 간직하고 지낸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의 디지털 추억도 추억이라고 긍정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온라인이나 가상 공간에서 한 경험이 어떻게 추억이 될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무릇 추억이라 하면 아직도 어렸을 때 하던 공기 놀이와 고무줄 놀이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흥행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여러 게임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생들의 어린시절을 되돌아보자. 싸이월드 방명록에 비밀글을 남겼던 추억으로만 남은 썸, 누군가가 우리의 연애를 알아채 주길 바라며 애인과 똑같이 깔아두었던 배경음악,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처음 간 오티에서 친해진 친구와 맺은 일촌명까지. 싸이월드라는 온라인 공간에서 쌓은 이 같은 추억들은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경험이었지 않은가.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매일매일 수많은 소통을 한다. 그중에는 간혹 기억에 남는 즐거운 대화가 있다. 나와 같은 세대를 공유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우리의 청소년청년기에 메신저 사용은 그 자체로 추억이었다. 버디버디부터 세이클럽, 네이트온, MSN 메신저까지. 그 메신저들을 썼던 시기를 떠올리면 누군가와 나눴던 대화가 자동적으로 떠오르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것을 추억이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싸이월드

© 싸이월드

버디버디

© 버디버디

© 버디버디

그래도 진짜 추억이라면 함께 눈을 마주치며 나눈 경험에 달려 있다고 말할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들로어릴 때에는 뛰어 놀아야 한다’, ‘그래도 친구들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서 만드는 추억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다같은 말들이 있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온라인에서의 추억이 모두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이나 스마트TV을 끼고 산다. 그들에게 있어 뽀로로나 아기상어는 가족보다도 더 친근한 존재이다. 이들처럼 아주 어릴 적부터 디지털 콘텐츠를 접하고 기기와 서비스를 사용한 세대들에게 온라인에서 쌓는 경험들은 무시하기 어려운 존재다. 온라인에서 쌓이는 추억을 추억이라 부르지 못한다면, 추억이라고 할 만한 것이 거의 없는 세대들인 것이다. 이런 시대에 디지털 공간에서 생긴 추억을 과연 온전히 부정하는 게 타당할까?

우리가 디지털에서 함께 나눴던 추억은

아쉽게도 디지털상에서 경험한 추억에 관한 진지한 분석이나 연구 사례는 찾기가 어렵다. 추억을 디지털로 데이터화하는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는 했다. 그러나 디지털 공간에서의 추억이 어떤 식으로 공유가 되거나 재생산되는지, 또 각각의 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관한 논의는 아직 부족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온라인에서 한 경험이 어느 개인에게는 더없이 소중할 수도 있다. 친구가 남긴 방명록 하나, 일촌평 하나, 어느 시간 동시에 접속해 애인과 나눴던 대화, 함께했던 모든 것들이 좋은 추억일 수 있다. 이처럼 누군가와 함께 나눈 추억은 실제 경험과 마찬가지로 훗날 같이 소회할 수 있으며, 쉽게 대화 주제에 올라 추억거리로 떠들 수 있다. 나 역시 짧은 경험이긴 하지만 디지털 공간에서 만들어진 추억이 있다. 과거에 방영했던 CF나 내가 플레이했던 게임도 모두 추억의 영역에 남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도비 플래시 플레이어의 기술 지원이 종료되며 기존에 플래시로 제작된 컨텐츠가 사라지던 때 온라인상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는 추억이었다(플래시 외에 잠시 잠깐 디지털 공간에 존재했다가 추억으로만 남게 된 또다른 예로 뿌까, 마시마로, 졸라맨이 있다). 어느 유튜브의 05학번에 의해 소환된, 일면식도 없는 반윤희라는 인물이 모두에게 웃음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디지털로 박제된 05학번의 패션 영상 덕분이었다.

졸라맨

© 졸라맨

아빠와 나

© 졸라맨

© 아빠와 나

Fruit Ninja

나의 개인적인 디지털 추억 이야기를 해볼까. 나는 1990년대에 PC통신 유행의 끝자락을 아주 짧게 경험했다. 그러곤 200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인터넷을 시작했다. 지금은 없어진 mphiphop.com이라는 곳의 게시판에서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 커뮤니티 활동을 했다. 이 사이트는 당시 한국 힙합 신(scene)의 주류였던 마스터플랜의 홈페이지였다. 그곳은 어린 나에게 아저씨들이 힙합에 관하여 진지하게 가르쳐주는 논의의 장이었다. 래퍼들 간의 디스전이 공식석상에 나오기만 하면 게시판이 들끓었다. 열정 가득한 힙합 팬들은 그들의 팬심을 온라인 게시판에서 숨기지 않았다. 그외에도 밀림닷컴이라는 사이트도 종종 찾았는데, 이곳은 아마추어들이 만든 곡을 업로드하고 공유하는 곳이었다. 그 후 내 기억에 남는 인터넷상의 추억은 트위터로 옮겨갔다. 지금은 트위터를 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때 트위터에서 만났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낸다. 그러한 경험은 밤섬해적단과 같은, 그 당시 트위터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던 존재들에 관한 기억으로도 이어진다.

요즘의 친구들은 아마 나보다 좀 더 디지털에 특화된 세대인 만큼, 인터넷에서 보고 즐기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오프라인상에서 즐기는 것보다 온라인상에서 즐기는 것이 더 많아진 만큼, 그리고 디지털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만큼 추억에 있어 디지털 혹은 온라인이 차지하는 부분이 훨씬 늘어났다. 아마 에브리타임이나 블라인드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에피소드 같은 건 추억만큼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경우도 제법 있을 것이다.

과거의 온라인 또한 추억이다

보통 인터넷 용어나 줄임말을 접하면 사람들은 지레 과민반응한다. 야민정음처럼 되지 않을까 우리말의 변형을 우려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유행어들은 수명이 짧다. 지금 이 시대에이나우왕굳같은 예전의 언어를 썼다가는 라떼 취급 받기 일쑤다. 야민정음 역시 요즘은 몇 가지만 남아있고, 지금 유행하는 몇 단어들 역시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사라진 언어 역시 모두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게 내 지론이다. 예컨대이란 단어를 공유했던 세대끼리는 그 한 글자만으로 2000년도로 바로 추억여행이 가능하다. 이는 단어뿐만이 아니다. CF나 노래로 추억을 되새기듯 인터넷 밈, , 유행어 모두 추억의 대상이다. 물론 밈이 제작되고 사라지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보니 흥행에 성공한 것만 남지만, 그래도 과거의 것들을 다시 만나면 반갑고 즐겁다. 인터넷상에서 데이터가 사라질지라도 즐겼던 추억은 남는 셈이다. 앞서 언급한 사라진 수많은 플래시 게임이 그렇고 아이러브스쿨, 프리챌과 같은 공간은 종료되어 사라진 서비스인 동시에 추억의 공간이다. 나아가면 PC통신이나 과거의 인터넷 커뮤니티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도 유저에게 남아 있는, 같은 세대가 공유하는 기억만큼은 사라지지 않는다.

Annoying Orange – Rolling in the Dough

Annoying Orange – Rolling in the Dough

물론 철지난 유행을 추억으로 미화한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추억이라고 부를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에 의문을 표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라고라떼는 이런 게 유행이었어‘, 하며 분위기를 차갑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이미 밈이나 짤 하나로 충분히 향수과 그리움, 아련함을 느낄 수 있다! 과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추억의 밈을 보는 순간 당신 역시 그 당시의 자신, 밈과 얽힌 개인의 경험이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흑역사도 역사다, 문제는 흑역사의 빈도다

다만 무분별한 환경 속에서 좋지 못한 추억을 만드는 상황이 언제나 누구에게나 있다는 사실이 문제다. 돌이켜보니 인터넷 짤 중에 폭력적이거나 무지성에 가까웠던 콘텐츠도 많았다.무엇보다 온라인상에서 있는 것들 중 좋은 것만 있다는 것이 아닌 점도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각종 악플이나 미움이 가득한 글, 어릴 때 아무 생각 없이 쓴 글이나 인터넷에서의 싸움 등 좋지 못한 기억도 많다. 특히나 범죄에 해당하는 불법 촬영 같은 것들이 인터넷에 남아 있다면그런 것은 추억이라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하다 못해 네이버 지식인이나 SNS에 개인이 남긴 어리석은 글이 영원히 박제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기록을 삭제해주는 업체도 생기지 않았는가!

흑역사를 그리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엄연히 말해 디지털 공간은 하나의 공간이지 추억의 공간만은 아니다. 물론 그 가운데 앞서 말했듯 디지털상에서도 삭제되어 찾을 수 없는 것도 있고, 추억의 영역이 아닌 것도 모두 혼재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추억을 찾고 그리워할 수도 있다. 기성 세대처럼 특정한 물리적 공간을 향유하고 몸소 느꼈던 것만이 추억인 세대는 지났다. 동시에 디지털 추억이라고 해서 디지털 공간에서 겪은 절대 다수의 경험이 모두 추억인 것도 아니다.

노스탤지아, 환경을 그리워하는 이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디지털 공간에서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이들도 있을까? PC통신 시절, 혹은 SNS가 지금처럼 발전되지 않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디지털 노스탤지아는 충분히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싸이월드가 사라졌을 때 많은 사람이 그리워했고, 여전히 PC통신 당시의 추억을 떠드는 이들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동물의숲은 그때가 좋았지하는 이들도 생기고, 어쩌면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포트나이트는 그때가 좋았지라고 하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그것 또한 경험이고 기억이며 그리움의 대상이다. 아마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메타버스에서 쌓은 추억이 몸으로 겪었던 추억을 밀어낼 수도 있다. 다만 노스탤지아가 형성되고 공감대를 얻기 위해서는 그러한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이 많아야 하는데, 지금의 디지털 환경은 굉장히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래서 불과 찰나의 시간만 지나도 과거가 되어버려서 그리워하는 대상이 되고 만다. 물론 혼자만의 추억이라는 것도 충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추억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공감대를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조건이 필요한 법이다. 문제는, 디지털 환경에 접어들수록 서로가 이해하고 함께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의 크기는 작아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향수라고 있을까

당연히 디지털 환경에 생기는 향수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 같지만, 디지털 노스탤지아는 이미 어느 정도는 존재하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실을 무작정 비판하거나 수용하고 말 것이 아니라 디지털 노스탤지아가 어떻게 발생하고 있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요즘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통 놀 수가 없다고 말하고는 혀를 쯧쯧 차는 것보다, 메타버스가 실제로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장난감보다 유튜브를 즐기는 아이들에게 장난감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디지털 노스탤지아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경과를 관찰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디지털 노스탤지아의 예시는 무엇인지 일별해보고 파악하는 것이 의미 있을 것이다. 무작정 디지털 환경을 비판하는 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디지털 노스탤지아라는 말이 시기상조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향수라는 것이 그리워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만큼, 그리고 그 단어가 가진 어감이 분명한 만큼 충분히 역사가 쌓이고과거가 된 다음이라야 그러한 평가가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다가온 현실이자 우리가 매일매일 마주하고 있는 순간이다. 이 단어의 의미를 부정하는 이들에게도 하나쯤은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온라인 세계에서의 경험과 기억이 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세대가 다르면 공감대를 찾기 어려울 수는 있지만, 대상은 달라도 그 대상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비슷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메이플스토리

Writer

블럭(박준우)은 2011년 힙합엘이에 글을 쓰기 시작해 웹진의 시대 속 지금은 사라진 여러 매체에 글을 써왔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표본창고” 음악감독부터 청룡영화상 단편영화상 수상작 “신기록”의 번역까지 가리지 않고 여러 일을 해왔고, 월간 국립극장부터 월간 재즈피플까지 몇 음악 매체에 아직 글을 쓰는 중이다. 빌보드 본사부터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의 영포스트까지 해외 매체에도 기고했다. 스타트업 미디어 비석세스부터 디자인프레스까지, EBS국제다큐영화제부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램노트까지 영역을 가리지 않고 글을 쓰지만 가장 오래 일해온 것은 음악 쪽이다. 11년차 전업 프리랜서이고 먹고 살아야 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는 편이다 보니 이렇게 되었고, 그냥 쭉 이렇게 사는 중이다.

엽편소설 ‹화면대혁명›

Report

창문을 여는 손

곽재식 작가는 입담으로 시청자들과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는 SF 소설가입니다. 이번에 세 페이지 남짓의 엽편소설 「화면대혁명」을 비애티튜드에 소개해주셨는데요. 혁명적인 디스플레이를 만들기 위해 실장을 중심으로 여러 직원들이 회의실에서 벌이는 이야기, 뭔가 진짜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일이지 않나요?

오늘도 시립화면기술개발원의 회의실에서는 농담하는 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 있잖아요. 여자들이 싫어하는 남자들 이야기…… 3위는 축구 이야기, 2위 군대 이야기, 1위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알지. 그런데 이제 그 이야기가 옛날 농담으로 누구에게나 다 퍼져 있어서 그 이야기 자체를 남자건 여자건 지긋지긋해 하고 싫어하는 거 알아? 회식자리 같은 데 갔을 때 부장님께서 재치 있는 이야기랍시고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웃긴 이야기라고 말하면 부하 직원들은 그 이야기가 웃기다고 막 웃어줘야 되고 그렇거든.”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면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때 기획실장이 회의실에 나타났다. 다들 농담을 멈추고 일어나 기획실장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실장이 말했다.

“이번에 우리 원에서 제안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전자 화면을 이용하는 혁명적인 기술의 활용 사례야. 정말 혁명적인 기술을 이야기하는 거니까, 뭐든지 개성적인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면 된다고. 이를테면, 화면이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 같은 데만 붙어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지.”

“화면이 스마트폰에 안 붙어 있다면?”

“아예 집의 베란다 창문을 통째로 다 화면으로 바꾼다고 생각해봐. 그러면 TV를 둘 공간이 그만큼 절약되잖아.”

“정말 그렇네요!”

“이야, 정말 그 생각은 못했습니다.”

“정말 의외의 발상입니다.”

직원들의 맞장구가 좀 더 이어졌다. 실장이 말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올 때, 잠에서 깨면 그 창문이 화면 역할을 해서 창문에 오늘의 할 일하고 날씨 같은 게 착착착 출력되는 거야. 얼마나 편리하겠어. 삶을 스마트하게 해주잖아. 여러분은 굳이 내가 말한 거에 휘둘리지 말고, 여러분 각자가 완전히 자유로운 관점에서 화면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시해서 연출 모델을 만들어보자고. ‘화면은 어떤 것이다’라는 기존 발상에서 벗어나서 혁명적인 생각을 모형으로 만들어서 보여달라는 거야.”

그 후 실장은 혁신과 혁명, 아이디어와 발상의 가치에 대해 지난 번 회의와 그보다 한 번 더 지난 번 회의에서도 했던 이야기를 한 번 더 하고서야 물러났다.

직원들의 회의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화면을 혁명적으로 바꾼다고? 뭘 만들어야 되는 거지?”

“저는 요즘 애들이 맨날 스마트폰 너무 들여다보고 있는 게 걱정이거든요. 게임 한다고 공부 안 하고 그런 거는 이미 벌써 포기했고요. 애들 눈 나빠지는 게 걱정이에요. 눈 안 나빠지는 화면, 그런 거 없을까요? 그런 게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확실히 그런 제품이 있다면 값이 좀 더 비싸도 살 것 같고.”

“그런데 그게 실장님이 원하시는 방향은 아닌 것 같잖아.”

“실장님 말씀은 반영이 된 게 없지.”

“통과되려면 실장님 마음에 드는 걸 어떻게든 상상해서 만들어야 되는데.”

“말씀하신 대로 유리창에 날씨랑 일정 표시해주는 거 만들어보면 어때요?”

“실장님께서 자기 생각에 갇히지 말고 자유롭게 생각해 보라고 했잖아요. 딱 실장님 말씀대로 만들면 분명히 싫어하시면서 짜증내실 거라고요.”

“실장님 마음에 쏙 들면서 실장님 자기가 말해준 것은 아닌, 그런 게 필요한데.”

“그런데 수백만 원, 수천만 원짜리 화면을 창문에 달아 놓으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날씨가 창문에 나온다고 해서 더 스마트해지고 삶이 막 즐거워질까?”

2차 회의는 3주 후에 열렸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직원들은 새 아이디어를 표현한 모형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실장이 회의실에 들어오자, 이 대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모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희는 투명한 화면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기술의 혁명적인 응용 분야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화면이 달린 기계가 투명하다면 창문 대신에 화면을 달 수 있겠죠.”

“그렇지. 화면이 창문으로 될 수도 있다는 생각, 신선하네.”

실장은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저희는 보통 때는 창문이지만 필요하면 창문이 있는 자리에 휴양지나 관광지 풍경이 커다랗게 출력되는 장치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반지하 방이나 매연이 가득한 공장 지대에 있는 집에 이걸 달면 창문에 제주도 바닷가 풍경이 화면으로 나오는 거죠. 가뜩이나 요즘 청년 빈곤 문제, 청년 주거 문제가 심각한데, 그걸 해결할 수 있다는 사회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청년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다들 행복해 하겠죠.”

실장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은데, 혁명이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해. 어떤 제품을 개발한다는 틀에 갇혀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거 말고 화면에 대한 새로운 기술의 발전으로 세상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해 자유로운 생각을 해보라고. 정말 자유롭게.”

실장은 처음부터 다시 하라고 지시했다. 그렇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아직 시간은 있어. 정말 틀에서 벗어나서 생각해 보라고”라는 말을 남기고 실장은 물러났다.

“너무 실망하지 말자고. 어차피 실장님이 한 번에 뭘 통과시켜 주지는 않잖아. 이 정도면 욕도 안 먹었고 괜찮아.”

“그런데 뭘 만들죠? 새로운 화면 기술로?”

“저는 이런 거 생각해봤어요. 차세대 자동화 초고속 증착 리소그래피 공정이 실용화되면 저가형 화면은 정말 싸게 생산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되면, CPU 싼 거 달고 화면 싼 거 달아서 대당 3만원짜리 태블릿PC를 매년 이백만 대 쯤 만들어서, 전국 모든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학교에서 나눠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부유한 학생이건 가난한 학생이건 다들 그냥 학교에 오면 태블릿PC 하나씩은 가질 수 있게 해주고, 교과서 대신 그거만 들고 다니라고 하고, 그걸로 숙제도 하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교육 현장을 바꿀 수 있고, 교육 내용도 바꿀 수 있고, 학생들을 바꿀 수 있고, 미래 세대의 정신을 바꿀 수 있을 테니까 세상의 미래를 바꾸는 거 아닐까요? 학생들이 전부 학교에서 지급한 태블릿PC를 갖고 있고 항상 사용한다고 치면, 그걸로 학생들을 추적하거나 빅데이터 분석을 돌려서 학생들 사이에 학교폭력이라든가 가정학대라든가 하는 문제가 일어나는지 추적하는 식의 응용도 가능할 것이고요.”

김 대리, 이 대리, 박 과장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공정 기술이 개선되어서 비용이 어떻게 절약된다, 그런 건 멋진 신제품 느낌이 아니잖아. 실장님이나 원장님도 와닿지가 않으니 재미 없어 하실 거라고. 그리고 방금 말한 거는 교육부나 교육청 쪽하고 연결되어야 할 수 있는 일 아냐? 우리는 시청 소속 기관인데 다른 기관으로 공이 돌아가는 아이디어를 내 놓으면 무조건 욕 먹어.”

“거기다가 실장님이 처음 말했던 아이디어도 안 담겨 있잖아.”

“실장님은 화면이 유리창이 된다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그 비슷한 거 뭐 없을까?”

일주일 후, 3차 회의에는 직원들이 모두 대단히 피곤한 모습이었다. 서둘러 모형을 완성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실장이 들어오자 다들 웃는 표정을 지었다.

“화면 기술에 대한 저희의 혁명적인 아이디어는 바로 화장실에 있는 거울 대신에 그 자리에 커다란 화면을 설치한다는 겁니다. 카메라로 내 모습을 찍어서 화면에 표시해주면 거울처럼 쓸 수 있지요. 멀티카메라 영상 재구축 알고리듬을 이용하면 진짜 거울하고 느낌이 거의 같아지고요.”

“좋아. 좋아. 일상 속에서 흔히 보는 거울 대신에 화면을 쓴다니, 일상에서 잡아낸 아이디어구만. 좋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게 사람의 삶에 어떤 가치를 줄 수 있지?”

“아침에 세수를 하거나 양치를 할 때, 화면 한쪽에 그날의 날씨나 그날의 일정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창문에 자기 개인 일정이 표시된다면 사생활 때문에 약간 꺼려질 수도 있는데, 화장실 거울에 자기가 서 있을 때 일정이 표시되면 그런 점에서도 자유롭죠.”

회의는 부드럽게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다들 지쳐 있었지만, 점차 안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실장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잠깐만. 여기에 어떤 새로운 기술이 들어가 있지? 기술적인 혁명성이 없는 것 아닌가?”

다들 겁에 질렸다. 설마, 또 처음부터 새로 일을 해야 할까? 다행히 박 과장의 멋진 대답으로 회의는 깨끗하게 마무리되었다.

“화장실 거울이지 않습니까? 화면을 방수처리하는 기술을 사용할 겁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하얀 공간에 빛이 들어오는 창문

Artist

곽재식은 공학 박사이자 작가다. KAIST에서 원자력 및 양자 공학 학사 학위와 화학 석사 학위를, 연세대학교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화학업계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과학 소설, 과학 교양서 등 과학과 관련된 다채로운 책을 썼다. 2006년에 쓴 단편 소설 「토끼의 아리아」가 MBC에서 단막극으로 영상화된 이후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유머러스하면서도 반전이 있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선보여서 많은 독자의 찬사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지상 최대의 내기』 『신라 공주 해적전』 『가장 무서운 예언 사건』 『ㅁㅇㅇㅅ』 등의 소설과, 『우리가 과학을 사랑하는 법』 『괴물 과학 안내서』 『곽재식의 미래를 파는 상점』 등의 과학 교양서가 있다.

주력 상품의 유통 방식 변화에 대응하기 — 플래시 플레이어 지원 종료 이후의 장영혜중공업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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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예술계의 현재를 살펴봅니다

웹을 기반으로 관람객과 소통하는 아티스트인 장영혜중공업이 제 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에 참여했습니다. 장영혜중공업은 플래시를 이용한 시그너처 작업으로 잘 알려져있는데요. 이제 플래시를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작가는 어떻게 자신의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을까요? 윤충근 님의 전시 리뷰와 손수 찍은 사진이 담긴 리포트는 장영혜중공업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어요. 아티클에서 자세히 살펴보세요!

코로나19로 인해 3년 만에 열린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하루하루 탈출한다»는 본 전시에 앞서 일부 프로젝트를 온라인으로 선공개했다. 그중 첫 번째는 장영혜중공업의 플래시 애니메이션 작업 삼성의 뜻은 재탄생(Samsung Means Rebirth)이다. 총 일곱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작품은 2021년 5월 27일부터 7월 8일까지, 매주 목요일마다 전시 웹사이트를 통해 공개했고 지난 9월 8일 문을 연 오프라인 전시에서도 2021년 11월 21일까지 만날 수 있다.

장영혜중공업은 장영혜 최고경영자(CEO)와 마크 보주Marc Voge 지식총괄책임자(CIO)가 1999년 결성한 그룹이다. 육중한 이름과는 다르게 이들은 글과 음악만으로 이루어진 플래시 작업을 ‘웹(World Wide Web)’을 통해 선보여오고 있다. 삼성의 뜻은 재탄생 역시 흰 배경에 검은 글자가 등장하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플래시 작업이다. 내용을 전달하는 데 오로지 글자만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웹 아트는 인터넷의 정수를 표현하고자 한다. 상호성, 그래픽, 사진, 디자인, 배너. 색상, 폰트, 그리고 그 나머지를 벗겨봐라. 무엇이 남는가? 바로 텍스트다.” 실제로 웹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문서, 즉 텍스트를 효율적으로 공유하기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 그들의 웹사이트(https://www.yhchang.com)에서도 이러한 기조를 살펴볼 수 있다. 낱장의 페이지로 구성된 웹사이트에는 그들의 작업 이름이 가지런히 나열되어 있고 각 작업에 하이퍼링크가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최소한의 HTML 언어로만 구성한 방식은 세계 최초의 웹사이트(http://info.cern.ch)를 연상시킨다.

작품 이름에 등장하는 ‘삼성’은 실재하는 한국의 재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인간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보다 근원적인 권력을 상징한다. 2017년 발표한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Samsung Means to Die)에서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인간의 생애를 지배하는 ‘삼성’의 위력을 선보였다면, 이번 신작에서는 그 영향력이 사후에도 계속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과로사로 쓰러진 삼성전자의 임원(제1화: 임원)이 삼성 스마트폰으로 재탄생하고 이내 폭발해버린다(제2화: 스마트폰). 이어서 삼성 직원이 단골로 오는 목욕탕의 때수건으로 재탄생하지만, 그 쓰임을 다하고 버려진다(제3화: 때수건). 이런 식으로 주인공은 종이컵(제4화), 냅킨(제5화), 일간신문 기사(제6화), 마지막으로 종이 영수증(제7화)으로 연쇄적 재탄생을 거듭한다.

장영혜중공업의 플래시 작업은 본래 웹을 무대로 삼았다. 웹은개방·공유·참여를 핵심 가치로 두는 공간이다. 장영혜중공업의 웹사이트는 언제나열려있고 그들은 이곳에 작업을 올려 관객과나눈다.’ , 관객은 장영혜중공업의 플래시 작업과 상호작용할 수 없다. 한번 재생한 플래시 파일은 멈추지 않고 앞으로만 흐른다. 이 앞에서 관객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그저 재생 중인 영상을 바라보거나 창을 닫음으로써 보기를 멈추는 것뿐이다. 플래시는 1990년대 당시 정적인 매체였던 웹에 인터랙션을 구현하며 웹 2.0 시대를 연 기술이었다. 많은 이들이 당시 플래시에 환호하며 이를 적극 활용했지만 장영혜중공업은 플래시가 만드는 쌍방향성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들은 화려한 기능과 외관 대신에 웹의 기본 요소인 글자만을 사용해 내용 그 자체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러한 플래시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2020년 12월 31일부로 어도비사가 플래시 플레이어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며 웹에서 영영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에 장영혜중공업은 웹사이트의 플래시 파일을 동영상 파일로 대체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덕분에 웹사이트를 방문하는 관객은 이전과는 다른 자유를 갖게 되었다. 동영상 플레이어의 인터페이스를 이용하면 관객은 언제든 원하는 시점으로 이동할 수 있고, 이동하고자 하는 시점의 썸네일을 미리 살펴볼 수도 있다. 또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구간을 건너뛰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기존에 플래시가 일방적으로 전했던 강렬한 선언을 이제는 웹에서 경험할 수 없다.

장영혜중공업은 이번 비엔날레에서 전시실을 적극적으로 외면하는 것을 통해 이러한 상황에 대해 그들만의 방식으로 답한다. 일곱 개의 에피소드를 녹화한 각각의 영상은 관람객이 일반적으로 발길을 두지 않는 미술관 주변부 구석구석으로 흩어진다. 이를테면 지하 1층 물품 보관함, 1층 계단 밑, 2층 전면 발코니 따위의 공간이다. 또한, QR코드를 이용해 순차적으로 에피소드를 감상하도록 동선을 유도하지만 이어지는 에피소드를 같은 층에 두지 않음으로써 작품 감상의 불편함을 극적으로 가중한다. 1층 매표소 맞은편 벽에서 작품의 시작을 알리는 QR코드를 스캔하면 첫 번째 에피소드를 감상할 수 있는 2층으로 안내한다. 그곳에서도 역시 QR 코드를 통해 다음 장소인 지하 1층으로 안내한다. 이러한 여정을 따르다 보면 관람객은 지하 1층에서 2층으로, 다시 1층에서 3층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수고를 겪어야만 한다. 집에 편안히 누워 노트북으로도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굳이 미술관에 찾아와 이렇게 고된 방식으로 작품을 감상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이런 불친절한 배치를 통해 플래시를 기존의 방식대로 온전히 경험하는 방법은 플래시 지원이 중단된 웹, 그리고 웹을 벗어난 미술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 더욱더 명징해지는 것이다.

20년 넘도록 생산해온 주력 상품이 기술 지원 종료로 인해 제작에 차질이 생겼을 때, 기업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기존 기술을 대체할 새로운 기술을 찾아야 할까? 혹은 차세대 주력 상품을 개발해야 할까? 플래시의 죽음은 장영혜중공업에게 어쩌면 그리 큰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웹을 둘러싼 기술은 지금도 시시각각 업데이트 중이다. 플래시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기술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언젠가는 폐기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영혜중공업이 내용을 전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강력한 도구, ‘텍스트’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Exhibition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하루하루 탈출한다»

날짜 : 2021.09.08-2021.11.21

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별관,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서소문로11, @seoulmuseumofart

Writer & Photographer

윤충근은 스튜디오 ‘충근’을 운영하며 평면·공간·시간 위에 시각 요소를 적절하고 아름답게 배치하는 일을 한다. 실천적 공동체 ‘새로운 질서 그 후…’로 활동하며 오는 11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전시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1»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