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구멍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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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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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호프›에 관한 언쟁이 시작될 무렵 편집부가 애정하는 필자 김도훈 님께 원고 청탁 메시지를 보냈어요. 원고를 기다리는 3주간 매일 메일함을 새로고침하고, 그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살피며 시답잖은 메시지로 은근하게 독촉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드디어 ‘호프 원고 갑니다.’라는 메일을 받았죠. ‘역시, 김도훈이네.’ 


김도훈 님이라면 영화의 속도만큼 거침없이 달려가면서도, 집요할 만큼 면밀하게 들여다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토록 쓰기 싫다고 하더니 결국 이 원고를 마친 이유. 후속편이 나오지 않는 데 원고료 절반을 걸겠다는 그에게 반대쪽에 걸겠다고 읊조려 봅니다. 나홍진의 팬으로서. 


자! 그럼 기다리고 기다리던 김도훈의 ‹호프›를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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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호프› 스틸컷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글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무슨 소리냐고? 일단 이미 ‹호프›의 극장 상영은 마무리되고 있다. 아마도 나홍진 감독의 전작 ‹곡성›을 넘어서지 못한 채 끝날 것이다. 말 그대로 실망스러운 결과다. 예상했던 결과다. 나는 ‹호프›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당황했다. 그렇다. 황당했다. 영화를 이렇게 끝낸다고? 아니다. 3부작으로 설계됐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다. 나에게는 이미 충분한 정보가 있었다. 3부작으로 설계됐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영화가 갑자기 툭 끊기듯 끝나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황했다. 알고 있는데 왜 당황했냐고?

때로는 정보가 지나치게 많은 게 사람을 더 당황하게 만든다. 이건 3부작으로 설계된 영화가 아니었다. 3부작으로 설정됐을 수는 있다. 설계는 아니다. 설계는 꼼꼼하게 하는 것이다. 설정은 그냥 대충 하는 것이다. 만들면 좋고 아니면 됐고, 그게 설정이다. 설계는 관객에게 믿음을 주어야 한다. 속편에 거는 기대를 남겨야 한다. 당연히 만들어질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스타워즈› 한 편이 망했다고 다음 편이 나오지 않을 리는 없다. 트릴로지는 트릴로지다. 뭐가 됐든 후속편에 거는 기대는 남는다. 떡밥을 회수할 것이라는 믿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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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호프› 샌디에이고 코믹콘 포스터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만약 당신이 ‹호프› 2편과 3편을 내심 기다리는 독자라면 망했다고 본다. 아니, 망한 건 아니다. 영화 한 편 망했다고 여러분의 삶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나는 ‹스타워즈›의 새 트릴로지가 그냥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2017)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분노가 있다. ‹매트릭스›(1999)가 ‹매트릭스: 리로디드›(2003)와 ‹매트릭스: 레볼루션›(2003)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냥 단독 영화로 끝나버렸다면 세상은 더 아름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트릭스: 레저렉션›(2021)을 보면서는 극장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거기서 불타 죽으면 네오처럼 어항에서 깨어나 온몸에 연결된 호스를 뽑으며 ‘아, 결국 이거였구나’라고 깨닫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헛소리다.

내가 보기에 이제는 자매가 된 당시 워쇼스키 형제는 속편에 관한 어떤 설계도 없었다. 실제로 없었다. ‹매트릭스›가 떡밥과 떡밥, 떡밥으로 이어지는 방만한 속편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다. 흥행에 지나칠 정도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호프›는 흥행에 지나칠 정도로 성공하지 않았다. 사실 성공했더라도 답은 없었을 것이다. ‹호프› 제작비는 약 700억 원이다. 시골을 무대로 했는데도 700억 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홍진은 갑자기 떡밥을 마구 밀어 넣는다. 괴물은 알고 보니 외계인이었다. 심지어 우주적 전쟁에 휘말린 듯한 고지능 외계인이었다. 고지능인데 육체적 능력은 초인적이다. 변신도 한다. 그런 와중에 지구인들이 죽인 건 외계인들의 세자다. 아마도 도망친 세자일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숨이 차는데 나홍진은 마지막 장면에서 거의 도시 하나 크기의 외계인 모선을 추락시킨다. 오페라이다. 스페이스 오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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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 300만 돌파 기념 외계인 인물 관계도 및 소개 이미지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 ‹호프›의 첫 촬영 비하인드 에피소드를 다룬 유튜브 ‘호프 촬영썰’ 패러디 영상. 출처: 유튜브 채널 @Hone5204

나홍진이 ‹호프› 속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편의 다섯 배 정도의 제작비를 털어 넣어야 할 것이다. 왜 다섯 배냐고? 그냥 대충 때려잡은 수치다. 열 배일지도 모르겠다. 만들 수 없다는 소리다. 나홍진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호프› 마케팅은 몇 가지 실수를 했다. 마치 ‹스타워즈›나 ‹듄› 시리즈처럼 설정집을 만들어 배포한 것이다. 어떤 외계인이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상세하게 일러스트로 그린 설정집이다. 나홍진은 인터뷰에서 그게 실수였다고 이미 밝혔다. 나가서는 안 되는 자료였다는 것이다. 그게 나가는 걸 아예 몰랐을 리는 없다. 어차피 그 설정도 나홍진이 다 한 것이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감독이라 마케팅팀과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았을 리도 없다. 감독의 허락 없이 그런 게 나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나갔다. 나가자 나홍진은 부정했다. 아니, 어쩌라고요?

어쩌면 우리는 나홍진에게 그냥 속고 있는 걸 수도 있다. ‹호프›는 괴상한 영화가 맞다. 영화는 딱 세 스테이지로 이어지는 활극이다.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 주인공들은 시골 마을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지나칠 정도로 잔인하게 사람들을 학살하는 괴물과 싸운다. 두 번째 스테이지에서 우리는 괴물이 외계인 종족이며, 인간이 죽인 외계인 세자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 번째 스테이지에서 주인공들은 이유를 알면서도 살기 위해 싸운다. 나홍진은 진짜 별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는 이야기를 위해 액션을 설계한 것이 아니다. 액션을 위해 이야기를 설계했다. 아니, 여기에는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아무것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오해가 증폭되어 폭주하는 인간들과 외계인들의 액션밖에 없다. 맞다. 이건 ‹곡성 2›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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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곡성› 스틸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나는 ‹곡성›(2016)을 매우 좋아한다. 사람들은 ‹곡성›을 보고 나서 불평했다. 이제 와서 여러분이 나홍진을 거장으로 여기기 때문에 당시 불평을 조금 잊었을 뿐이다. 영화를 하도 드물게 만드는 감독이라 시간이 불평을 잊어버리게 했을 뿐이다. ‹곡성›도 사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는 대사로 설명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중하게 여기는 것은 중한 게 아니라고 말이다. 뭣이 중하냐고 말이다. 아니, 이야기는 중하다. 중해야 한다. 나홍진은 이야기를 흐트러뜨린다. 설명해야 할 구간을 다 빼먹는다. 나는 그것이 나홍진의 의도라고 생각했다. 매력적인 구멍으로 가득한 치즈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최초 편집본을 본 사람들에 따르면, ‹곡성›은 그렇게 구멍이 난 영화가 아니었다. 많은 것이 대체로 설명되는 명확한 장르영화였다. 역시 그들에 따르면, 나홍진은 최종 편집본에서 설명하는 장면들을 모조리 삭제했다. 그들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걸 나홍진이 들으면 부정할 것이다. 베드로처럼 세 번 아니라고 부정할 것이다.

상관없다. 나는 그 논리적 구멍이, 의도한 구멍이 ‹곡성›을 정말 무시무시한 영화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구멍이 숭숭 뚫린 무서운 영화를 좋아한다. 뭔가를 설명하려 들지 않는 장르영화에는 비뚤어진 애정이 좀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이 그런 영화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1997)나 ‹회로›(2001)가 그런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21세기에 만들어진 최고의 호러영화라고 여기는 ‹팔로우›(2014)가 그런 영화다. 곧 리메이크되는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포제션›(1981)이 그런 영화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가 그런 영화다. 코엔 형제 영화는 호러가 아니지 않으냐고? 나는 안톤 시거만큼 무서운 호러영화 주인공을 본 적이 별로 없다. 우리는 그런 영화를 보며 머릿속으로 빈칸을 채워 나가야 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목적이 무엇인가? 존재가 무엇인가? ‹곡성›이 그런 영화다. ‹호프›가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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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샤이닝› 중 웬디(셸리 듀발)를 찾아간 호텔 지배인, 이미지 제공: 타셴 © 워너 브라더스

나홍진은 논리적으로 장면을 연결하는 부분을 모조리 없앰으로써 관객을 헷갈리게 한다. 그런 장면을 빼는 순간 정보는 충돌한다. 영화가 관객에게 듬성듬성 준 정보는 전혀 연결되지 않거나 서로 마구 부딪친다. 여기서 관객은 두 가지 결정을 해야 한다. 계속 궁금해할 것인가 아니면 궁금증을 버리고 모호함이 주는 스릴에 몸을 맡길 것인가. 다 만들어 놓고도 설명하는 부분을 삭제해 버린 유명한 사례가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이다. 최초 극장 개봉판에서는 주인공 잭(잭 니콜슨)이 죽는 것으로 영화가 끝나지 않는다. 살아남은 부인 웬디(셸리 듀발)는 병원에 입원한 상태다. 호텔 지배인이 병문안을 온다. 지배인은 잭의 시체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분명히 얼어 죽었다. 시체는 없다. 어쩌면 모든 것은 웬디의 상상이었을 수도 있다. 웬디가 미친 것인가?

거기서 ‹샤이닝›은 또 하나의 암시를 남긴다. 웬디가 입원한 병실을 나서던 지배인은 웬디의 아들인 대니에게 노란 테니스공을 하나 건넨다. 그 테니스공은 영화의 초반에서 호텔의 영혼(?)이 대니를 그 무시무시한 237호실로 유인할 때 굴러오던 것이다. 웬디가 미친 게 아니라 지배인은 호텔에서 벌어진 악몽 같은 사건을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거나 사건을 지휘한 인물일 수도 있다. 큐브릭은 상영 일주일 만에 이 장면을 삭제해 버렸다. 미국 모든 극장주에게 마지막 부분 필름을 잘라서 자신에게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 엔딩을 본 사람은 최초 개봉 일주일 안에 북미의 어떤 극장에 앉아 있었던 몇 안 되는 관객밖에 없다. 독자 여러분은 어떤 엔딩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압도적으로 스탠리 큐브릭이 옳았다고 확신한다. 에필로그 장면은 쓸모없었다. 그걸 삭제함으로써 ‹샤이닝›은 설명과 설정 없이 불안으로 가득한 걸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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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샤이닝› 중 대니(대니 로이드)를 유인하는 테니스공과 대니, 이미지 제공: 타셴 © 워너 브라더스

많은 독자가 여기서 조금 뿔날지도 모르겠다. 나홍진의 ‹호프›가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같은 걸작이냐고 불평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아직은 모르겠다. 나는 ‹호프›가 쾌작이라고 생각한다. 걸작이라는 말은 너무 이르게 붙이는 게 아니다. 영화는 시간을 통과해 살아남아야 한다. 첫 개봉 시 졸작으로 평가받던 수많은 영화가 시대를 뛰어넘어 마침내 걸작으로 불리게 된 사례가 지나치게 많다. 반대의 경우도 지나치게 많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홍진은 ‹곡성›을 다시 편집한 방식으로 아예 ‹호프›를 찍은 것 같다. 전자가 이미 촬영한 논리적 연결 지점들을 모조리 삭제하는 것으로 완성됐다면, 후자는 아예 그런 지점들을 촬영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나는 이것이 마침내 나홍진이 스스로 발견한 작가로서 자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한다는 문장이 너무 많긴 하다만, 나홍진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너무 확신만 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호프›는 엄청난 규모의 블록버스터 상업영화인 동시에 나홍진이라는 작가의 예술영화다. 이런 게 가능하냐고? 할리우드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한국 영화의 희한한 특징이 하나 있다.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찬욱, 봉준호는 상업영화 감독이다. 그와 동시에 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예술영화 감독이다. 나는 2004년 칸영화제에 취재 갔던 일을 기억한다. 박찬욱의 ‹올드보이›가 경쟁 부문에 올랐다. 시사를 마치고 나오는 기자들에게 코멘트를 받았다. 절반 정도는 치를 떨었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B급 액션영화가 왜 칸영화제 경쟁 부문이냐며 닦달하는 외국인 기자들과 마주했다. 하도 불평을 해대서 모조리 신림동 고시원에 가둬 놓고 CJ 만두만 먹이고 싶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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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올드보이› 스틸컷 © CJ엔터테인먼트

그리고 20년 후,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가 없는 한국 영화는 한국 영화만의 독창적인 특징이 됐다. 나는 이 부분에서 오히려 한국 영화가 세계 영화에 끼친 어떤 중요한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역시 지난 20년간 두 분야의 경계를 흐트러뜨려 왔다. 잘 생각해 보시라. 크리스토퍼 놀런과 드니 빌뇌브 같은 21세기 블록버스터 상업영화 감독들은 전 세대와는 다르다. 예술영화를 만드는 방식으로 상업영화를, 그것도 대자본 블록버스터를 만든다. 두 분야를, 두 분야를 연출할 감독군을 철저하게 나누던 시대는 끝이 났다. 잘 생각해 보라. 전형적인 상업영화를 만드는 J.J. 에이브럼스나 루소 형제는 결코 예술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상업영화는 예술영화의 영역에서 평가받지 않을 것이다. 놀런과 빌뇌브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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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호프› 스틸컷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올해 ‹호프›가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된 것은 정말 정말 정말 이상한 일이다. 칸영화제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액션 스테이지 위주로 달려가는 거대 예산의 장르영화를 경쟁 부문에 초대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없다. 봉준호의 ‹괴물›(2006)도 비평가주간이라는 작은 부문에서 상영됐을 뿐이다. 나는 그게 큰 실수였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도리 없었다. 어쨌거나 ‹괴물›은 괴물이 나오는 블록버스터 액션영화였다. 칸은 그런 영화를 미드나이트 상영 같은 부문에 그냥 몰아넣기 마련이다. ‹호프›는 어떤 면에서 ‹괴물›보다도 더 순수한 장르영화다. ‹괴물›이 장르 속에 봉준호다운 계급과 사회적 콘텍스트를 담아냈다면, 나홍진의 ‹호프›는 딱히 그렇게 읽을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호프›는 경쟁 부문 영화 중 최상급의 별점을 얻어냈다. 칸 현지 평론가들이 열광했다. 아니 왜?

왜는 왜인가. 구멍 때문이다. 구멍 덕분이다. 나홍진이 지워 버린, 아니다. 애초에 찍을 생각도 없었던 논리적 연결 장면의 부재 덕분이다. 칸영화제가 애초에 이 영화를 경쟁 부문에 데려왔던 이유도 그놈의 구멍 덕분이다. 만약 ‹호프›가 전형적인 상업영화다운 논리적 구성으로 완성된 영화라면 칸영화제가 초대했을 리가 없다. 초대했더라도 개막작이나 미드나이트 상영 부문에나 들어갔을 것이다. 공개 이후 쏟아진 다소 놀라울 정도의 호평도 그렇다. 칸영화제 현지에 출장 가는 전 세계 기자와 평론가들은 예술영화의 경계에서만은 고집이 완강한 양반들이다. 그런데도 ‹호프›를 경쟁 부문 상영작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 예술영화의 경계 속에서 포옹했다. 나홍진은 지금까지 어떤 감독도 해 내지 못한 짓을 해 내버린 양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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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9회 칸국제영화제에서의 ‹호프› 기자회견. 왼쪽부터 배우 마이클 패스벤더, 알리시아 비칸데르, 황정민, 나홍진 감독, 배우 조인성, 정호연, 테일러 러셀. © EPA 연합뉴스

물론이다. 이 글을 읽으며, 아이고 어지간히 거대한 담론으로 나홍진 감싸고 있다며 불평하는 분이 절반 정도는 될 거라 생각한다. 믿는다. 확신한다. 여전히 속편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나홍진이 아니지만 속편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예측에 이 글을 쓰고 받을 원고료의 절반을 걸 수 있다. 속편이 나온다면 ‹호프›는 생명을 오히려 잃어버릴 것이다. 속편은 이 영화의 논리적 구멍을 메우는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나홍진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할 수는 있는 사람이지만 절대 그러지 않을 사람이다. 그러니 여러분이 공유한 그놈의 설정집은 그냥 떡밥이다. 해결할 생각 없는 떡밥이다. 설명할 생각조차 없는 꿈이다.

올해 초 나는 데이미언 허스트 회고전에 갔다. 벽에 쓰인 모든 데이미언 허스트의 말과 국현의 글을 페인트로 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 쓸모없는 말들은 안 그래도 낡을 대로 낡아서 예전 같은 충격을 주지 못하는 데이미언 허스트의 작품들을 더 고루하고 지루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냥 죽은 상어 시체만 우리 눈앞에 내밀어도 된다. 거기에 삶이 어쩌니, 죽음이 어쩌니 하는 허스트의 말이 붙는 순간, 논리적으로 작품을 설명하려 드는 전형적인 미술관의 언어가 붙는 순간, 어쨌든 한때는 뒤통수를 치기는 했던 허스트의 박력은 휘발된다. ‹호프› 역시 논리적 이치가 붙는 순간 나홍진 세계는 오히려 와해된다. 아니 지금 ‹호프›를 데이미언 허스트의 현대미술에 비유하는 거냐고? 아니다. 나는 나홍진이 데이미언 허스트보다 나은 예술가라고 믿는다. 그러니 ‹호프›에 가장 실망한 독자 여러분이야말로 나중에 OTT로 출시될 ‹호프›를 다시 보아야 할 최적의 관객일 것이다.

이 글의 첫 문장에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고 썼다. 아직도 그렇다. 이미 논쟁과 논박, 논란이 사그라든 영화를 두고 한마디 더하는 건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도 쓰고 말았다. 왜냐면 이 마지막 문장을 쓰고 싶어서였다. 나는 믿는다. 데이비드 린치가 살아 있었다면 ‹호프›를 정말 좋아했을 것이라 믿는다. 어떤 논리도 없이 관객을 (로스트) 하이웨이에서 (멀홀랜드) 드라이브시키는 영화를 린치가 싫어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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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김도훈(@closer21)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다. 영화주간지 «씨네21» 기자, 남성지 «GEEK» 피처 디렉터,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으로 일했다.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에스콰이어»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하며 유튜브 영화 채널 ‹무비건조›에 출연 중이다. 낯설고 비범한 인물들을 탐구한 『낯선 사람』(2023)과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2019)를 썼다. 『패션 만드는 사람』(2024) 공저자로 참여했다.

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3-‹샤크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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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미 해군이 생물병기를 개발했는데 어딘가 이상합니다. 상체는 늠름한 상어인데, 하체가 문어 다리라고요? 그 괴랄한 생명체가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도 활개 치고 다닌다면요? 상어와 문어가 합쳐진 괴생명체가 해변을 어기적어기적 걸어 다니며 피서를 즐기러 온 누군가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고, 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 머리통을 비치발리볼처럼 토스합니다. 맥락도 없이 튀어나온 이 장면이 자꾸 머릿속을 맴도는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박동수가 이번에 소개하는 쿠소영화는 ‹샤크토퍼스›(2010)입니다. ‹죠스›가 만들어 놓은 공포의 템플릿은 반세기 가까운 시간에 숱한 아류작을 거치며 우스꽝스러워졌고, 끝내 상어는 문어와 뒤섞이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 변주의 한가운데에는 ‘한 푼도 잃지 않는 영화’를 원칙으로 삼았던 로저 코먼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이던 상어가 어쩌다 바다를 벗어나 밈이 되어버렸는지, 그 이상하고도 즐거운 계보를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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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크토퍼스 포스터

상어+x vs. y: ‹샤크토퍼스›와 개조된 상어들

8년 전쯤 국내 넷플릭스에 전설적인 쿠소영화가 업로드되어 있었다. 무수한 아류작과 짝퉁 블록버스터인 목버스터(mockbuster)를 만들어 온 영화제작사 어사일럼(The Asylum)과 쿠소영화 전문 케이블 채널 싸이파이(SyFy)의 합작 ‹샤크네이도› 시리즈(Sharknado, 2013~2018)였다. 토네이도를 타고 날아온 상어가 LA를 습격한다는 이야기는 6편의 영화에 걸쳐 우주와 시간여행, 공룡과 사이보그가 등장하는 괴상망측한 세계관으로 변모해 있었다. 며칠에 걸쳐 시리즈를 정주행한 뒤 더 많은 쿠소 상어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왓챠피디아나 IMDb 등에 ‘Shark’, ‘Jaws’ 등의 키워드를 검색하며 다양한 영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알게 된 영화 중 하나가 ‹샤크토퍼스›(Sharktopus, 2010)이다. GIF 움짤로 먼저 접한 ‹샤크토퍼스›는 매혹적인 쿠소영화였다. 제목이 곧장 알려주는 것처럼 상어와 문어가 합체된 괴생명체가 등장한다. 문어 다리가 달린 샤크토퍼스의 활동 영역은 바다를 벗어난다. 해변의 바위 사이를 걸어 다니고 관광객이 몰린 계곡까지 침범한다. 어기적어기적 화면 위를 기어다니는 CGI 괴생명체가 풍겨오는 쿠소함은 쿠소 상어 영화를 찾던 나에게 강력한 매력 포인트였다.

샤크토퍼스 GIF
샤크네이도 GIF

‹샤크토퍼스› 속 샤크토퍼스의 본격적인 등장 장면(위). 어딘가 사람 옆얼굴을 닮아 언캐니밸리를 자극한다. ‹샤크 스톰 2: 샤크네이도›(Sharknado 2 : The Second One, 2014)에서 날아오는 상어를 상대하는 아이코닉한 장면(아래).

사실 상어만 한 쿠소영화의 단골 소재도 없다. 블록버스터의 효시가 된 ‹죠스›(Jaws, 1975) 이래로 상어는 호러의 아이콘이 되었고, 무수한 아류작으로 이어졌으며, 질 떨어지는 속편과 아류작 사이에서 변형되기 시작한다. 이들 아류작은 엇비슷한 이야기를 공유한다. 휴양지나 관광지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곳에 나타난 상어가 누군가를 공격한다. 지역 정치인이나 사업가는 상어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사람들을 설득한다. 하지만 결국 식인 상어의 학살극이 벌어지고, 비극에 대응하기 위해 주인공 일행은 상어 사냥에 나선다. ‹죠스›가 만들어 놓은 이야기의 템플릿은 완벽했다. 거대한 흥행 성적과 평단의 열광은 상어 영화를 매력적인 여름 상품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수영장이나 호수, 해변의 물에 몸을 담그고 ‹죠스›를 보는 이벤트를 기획하기도 했다. 이렇게 상품이 되어버린 상어는 점차 해변을 습격하던 ‘공포’의 이미지를 잃어 갔다. 백상아리의 아가리(jaw)가 물 밑에서 사람들을 노릴 것이란 공포의 아이디어는 수십 년이 흘러 즐길 법한 어트랙션이 된 것이다.

2018년 개최된 ‹죠스›의 해변 상영회. 미국의 극장 알라모 드래프트하우스의 이동상영 이벤트인 ‘롤링 로드쇼’의 일환으로 메사추세츠의 섬 마서스비니어드 개최되었고, 13일의 금요일에 맞춰서 상영되었다.

흥미롭게도 상어의 생명력은 쿠소한 방식으로 이어진다. 시작은 ‹딥 블루 씨›(Deep Blue Sea, 1999) 같은 또 다른 히트 상어 영화였다. 하지만 비공식 속편과 아류작이 판치고, ‹샤크 어택›(Shark Attack, 1999)처럼 실소가 터져 나오는 CGI 상어가 등장하는 영화에 이르게 된다. 물론 쿠소한 CGI가 등장하기 이전에도 상어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었다. 상어는 범고래나 피라냐, 악어처럼 다른 동물로 변주된다. 정글의 무법자 아나콘다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리즐리 베어나 사막의 지하를 헤엄치듯 다니는 괴생명체처럼 물가 바깥의 생명체로 변모한다. CGI 상어의 본격적인 등장을 기점으로 쿠소 상어 영화의 르네상스가 열린다. 2010년대의 상어는 바다뿐 아니라 호수와 연못, 온천, 욕조에도 등장하게 되었다. 물이 담겨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어가 등장할 조건이 마련된 셈이다. 나아가 상어는 모래사장과 사막, 산맥에서도 튀어나오고, 눈사태를 타고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영화에서는 상어가 악귀나 좀비가 되기도 한다. 포켓몬처럼 속성이 부여된 상어는 방사능을 얻거나 질병을 퍼트리는 슈퍼 전파자가 되기도 한다. 상어 인간은 ‹모아나›(Moana, 2016) 같은 애니메이션이나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The Suicide Squad, 2021)의 슈퍼 빌런으로도 등장하는 ‘메이저’ 캐릭터가 되었다. 상어는 인간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괴생명체와 거인, 로봇, 좀비, 심지어 외계인과도 혈투를 벌인다. ‹어비스: 메가 샤크›(Mega Shark VS Mecha Shark, 2014)라는 영화에선 거대 식인 상어가 인공지능 상어 로봇인 메카 샤크와 사투를 벌이기에 이른다. 이런 변형의 역사 속에서 상어는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전 세계 아동이 따라 부르는 아기상어가 되거나 초등학생들의 인기를 끌어모은 ‘트랄랄레로 트랄랄라’가 되기까지 했다. 상어가 어원 그대로의 밈이 된 것은 쿠소 상어 영화 덕분이다. 쿠소영화계의 걸작인 ‹샤크네이도› 시리즈를 필두로, 상어는 여기저기서 사람을 잡아먹고 뭉개지만 동시에 전기톱에 썰리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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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대로 ‹죠스›의 포스터를 패러디한 모래괴수 영화 ‹불가사리›(Tremors, 1990), 모래사장을 헤엄치는 상어가 등장하는 ‹샌드 샤크›(Sand Shark, 2011), 상어에 물리면 악령이 들린다는 설정의 ‹샤크 엑소시스트›(Shark Exorcist, 2014), 러시아가 만든 상어인간이 달에 숨어 있었다는 설정의 ‹47샤크›(Shark Side of the Moon, 2022), 메가 샤크와 메카 샤크의 대결을 그려낸 ‹어비스: 메가 샤크›(Mega Shark VS Mecha Shark, 2014)의 포스터

그런 맥락에서 쿠소 상어 영화의 출발점 중 하나인 ‹샤크토퍼스›는 각별하다. ‘컬트의 제왕’이자 ‘뉴 할리우드의 아버지’인 로저 코먼이 만 85세에 제작한 ‹샤크토퍼스›는 같은 해 공개된 (역시 로저 코먼 제작인)‹다이노샤크›(Dinoshark, 2010)와 함께 혼종 상어 영화의 출발점이 된다. 제목 그대로 상어(shark)와 문어(octopus)의 혼합체인 ‘샤크토퍼스’가 미군의 실험을 통해 만들어지고, 주인공들이 먹이를 찾아 육지에 상륙한 괴수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내용이다. 속편은 한술 더 뜬다. ‹샤크토퍼스 vs. 프레라쿠다›(Sharktopus vs. Pteracuda, 2014)에선 프테라노돈과 바라쿠다의 혼합체인 프테라쿠다(Pteracuda)가 등장한다. ‹샤크토퍼스 vs. 웨일울프›(Sharktopus vs. Whalewolf, 2015)는 범고래와 늑대의 혼합체인 웨일울프(Whalewolf)와 샤크토퍼스 사이의 대결을 다룬다. 아참! 그리고 로저 코먼은 공룡급 크로코다일(Dinocroc)과 슈퍼급 엘리게이터(Supergator)가 대결하는 ‹다이노 슈퍼게이터›(Dinocroc vs. Supergator, 2010)라든지, 피라냐와 아나콘다가 합쳐진 ‹피라냐콘다›(Piranhaconda, 2012)의 제작자이기도 했다. 아나콘다의 몸통에 피라냐의 머리통이 달린 기묘한 생명체의 모습을 본 적 있는가? 상어는 이제 바다를 벗어나거나 속성을 부여받는 대신 다른 동물과 직접 뒤섞이기 시작한다.

‹샤크토퍼스›의 제작자 로저 코먼은 영화 경력의 출발점부터 쿠소영화의 조상격인 영화를 만들어 온 인물이다. ‹크랩 몬스터의 공격›(Attack of the Crab Monsters, 1957)을 통해 유니버셜 몬스터 영화를 제멋대로 재해석하고, 각각 5일과 2일 만에 촬영을 끝내버린 ‹버켓 오브 블러드›(A Bucket of Blood, 1959)와 ‹흡혈 식물 대소동›(The Little Shop of Horror, 1960)를 통해서는 고딕 호러에 블랙코미디를 가미했다. 그는 ‹죠스›의 개봉 이후 곧장 아류작을 만들어 낸다. 예고편 편집자로 고용했던 조 단테에게 상어 대신 피라냐가 등장하는 아류작을 만들게 한 것이다. 한여름의 악몽을 그려냈던 ‹죠스›와 달리 베트남전부터 폐수 방류에 이르는 사회적 이슈를 각본에 욱여넣은 ‹피라냐›(Piranha, 1978)는 그렇게 탄생했다. ‹피라냐›는 상어를 다른 동물이나 괴생명체로 대체한 여러 영화의 효시가 된다. 어쩌면 로저 코먼의 필모그래피는 이 시점부터 ‹샤크토퍼스›(그리고 ‹피라냐콘다›)로 이어지는 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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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코먼이 직접 연출한 괴수영화 ‹크랩 몬스터의 습격›(위)와 제작으로 참여한 ‹피라냐›(아래)

IMDb를 기준으로 56편의 연출작이 있고, 무려 489편의 영화에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린 로저 코먼의 스타일을 손쉽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가 1990년 출간한 자서전의 제목은 그가 평생 지켜온 영화 제작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100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 푼도 잃지 않았는가, 이 책에서는

300편의 영화를 제작했고 280편에서 수익을 남겼다고 정정되는 이 제목에서 중요한 것은 ‘돈을 벌었다’가 아니라 ‘한 푼도 잃지 않았다’라는 말이다. 그의 초기작은 동시상영관에서 상영되었고, 이후엔 비디오와 DVD 시장을 거쳐 케이블 채널과 VOD까지 다양한 경로로 영화를 선보여 왔다. ‹샤크토퍼스›와 속편들도 상어 영화는 물론 다양한 쿠소영화나 목버스터를 방영하는 것으로 유명한 싸이파이 채널을 위해 제작된 영화였다. 비슷한 시기 제작한 ‹다이노샤크›, ‹다이노 슈퍼게이터›, ‹피라냐콘다›도 마찬가지다. 영화로 돈을 벌 수 있는 곳을 찾는 데 눈이 밝은 사람이랄까. 물론 로저 코먼이 손댄 모든 영화가 좋은 영화거나 즐길 만한 쿠소영화라 할 수는 없다. 다만 그는 큰 흥행을 바란 게 아니다. 제작비를 회수하고 다음 영화를 준비할 수 있는 시장의 규모를 계속 발견해 나갈 뿐이었다. 다시 말해, 쿠소 상어 영화 ‹샤크토퍼스›는 ‘잃지 않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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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울프와 광장에서 대치 중인 샤크토퍼스(위), 해변 위 남자의 머리통을 물어뜯어 날려버리는 샤크토퍼스(아래)

다양한 장소에 등장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는 상어는 매력적인 소재다. 다만 그 모든 아이디어가 ‹죠스›나 ‹딥 블루 씨› 같은 블록버스터일 필요는 없다. 어떤 아이디어는 그저 만들어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샤크토퍼스›는 그것을 증명하는 사례다. 수천만 달러에서 수억 달러의 제작비가 우습게 돌아다니는 할리우드에서 100만 달러 수준의 저예산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괴상망측한 상어 괴수가 등장하는 케이블 채널 시청자를 매혹하고, VOD를 결제하게끔 한다. 지느러미 대신 문어 다리를 정말 ‘다리’로 사용하는 샤크토퍼스가 등장하는 순간, 해변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괴생명체의 꾸물거림을 구현하는 조악한 CGI는 실소와 감탄을 동시에 부르는 이미지로 변모한다. 샤크토퍼스가 해변에 서 있던 남자의 머리통을 날리자, 옆에서 비치발리볼하던 이들이 공 대신 머리를 토스하는 ‹샤크토퍼스 vs. 프테라쿠다›의 한 장면은 아무런 맥락이 없지만 강력한 잔상을 남긴다. 보름달 뜨는 날 전직 야구선수에게 가해진 생체실험이 그를 웨일울프로 만들었다는 ‹샤크토퍼스 vs. 웨일울프›의 아득한 설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적지만, 그것을 보고 웃을 수 있는 사람만으로도 제작비는 충분히 회수할 수 있다.

중국에서 리메이크된 ‹샤크토퍼스›의 트레일러

‹샤크토퍼스›는 2023년 중국에서 ‹章鲨›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었다. 조금 큰 상어 정도였던 샤크토퍼스는 이 영화에서 거대한 선박을 뒤흔드는 거대 괴수가 되었다. 사실 쿠소 상어 영화의 열풍 이후 제작된 ‹메가로돈›(The Meg, 2018)이 중국에서 대히트를 기록한 이래, 중국에서도 다양한 상어 영화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다. 쿠소 상어 영화가 발견한 새로운 금맥이다. 로저 코먼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와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 가는 이들은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쿠소 상어 영화는 그가 뿌린 씨앗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살펴볼 수 있는 토양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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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박동수 평론가(@dsp9596)는 제3회 한국독립영화협회 독립영화비평상과 제1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에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학부에서 예술학을, 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했다. 영화와 게임을 주로 다루지만 종종 미술이나 방송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동료 평론가들과 함께 영화비평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크리틱›을 진행하고 있으며, 동명의 비평집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첫 단독 에세이 『쿠소필리아』(2026)를 펴냈다.

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2-‹데드 스시›

[BA]섬네일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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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초밥이 사람을 잡아먹고, 심지어 나무에 매달려 짝짓기한 뒤 새끼까지 칩니다. 말도 안 되는 한 줄이지만 누군가에겐 바로 이 문장이 극장으로 향할 이유가 되죠.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에 이어 박동수 영화평론가가 두 번째로 소개하는 쿠소영화는 ‹데드 스시›(2012)입니다. 모형 초밥이 저렴한 CGI의 힘을 빌려 두 시간 내내 화면을 날아다니는데, 그 조악함에 화가 나기보다 이상하게 웃음이 먼저 터집니다. 이 황당하고도 유쾌한 에너지는 1990년대 일본 특유의 ‘V시네마’와 ‘특촬물’의 생태계에서 비롯됐죠. 쇠퇴해 가던 장르를 떠받치던 몇몇 영화인이 저예산의 한계를 고어와 스플래터로 돌파하며,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맘껏 펼쳐 낸 결과물인 셈입니다. 팔에 머신건을 장착한 여고생, 엉덩이에서 가타나를 뽑는 로봇 게이샤처럼 황당한 조합을 줄곧 선보여 온 감독 이구치 노보루 역시 이 생태계가 길러 낸 인물이기에 ‹데드 스시›가 탄생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날아다니는 식인 초밥 한 접시를 박동수가 어떻게 맛봤는지, 그 이야기를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스틸컷

영화 ‹데드 스시› 스틸컷

사람도 먹고 새끼도 치는 초밥들

시외버스로 기숙사와 본가를 오가던 중고등학교 시절, 버스터미널에서 『씨네21』을 사서 읽는 게 하나의 루틴이었다. 『씨네21』은 주요 국제영화제 시즌마다 기자나 평론가들의 추천작을 소개해 준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도 그중 하나였고, 높은 수위 탓에 쿠소영화가 돼버린 장르영화를 찾던 내게 질 좋은 가이드가 되었다. 2012년 부천에서 상영된 ‹데드 스시デッド寿司›(2012)는 그렇게 접하게 된 작품이었다. 물론 그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기에 청소년 관람 불가인 이 영화를 영화제에서 볼 수는 없었다. 나중에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 관람한 ‹데드 스시›는 그야말로 정신 나간 영화였다. 줄거리부터 범상치 않다. 초밥 장인의 딸 케이코는 여자라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초밥 요리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에 가출해 어느 료칸에 취직하지만, 그곳의 요리사는 손님을 봐 가면서 대충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다. 한 제약회사 직원들이 료칸을 찾은 날, 케이코는 요리사가 대충 만든 초밥에 분노한다. 그와 동시에 회사에서 배신당한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탄생시킨 식인 초밥이 료칸의 사람들을 잡아먹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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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데드 스시›가 상영된 2012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포스터(좌)와 ‹데드 스시› 포스터(우)

알고 보니 감독인 이구치 노보루는 이미 일본 장르영화나 쿠소한 영화를 찾아다니던 이들에겐 익숙한 이름이었다. 이미 부천에서 상영되었던 히트작들이 있었다. 야쿠자에게 가족을 잃고 팔도 잃은 여고생이 머신 건 팔을 장착하고 복수한다는 ‹머신 걸片腕マシンガール›(2007), 1970년대 방영된 특촬 변신 로봇물에 관한 리메이크이자 애정의 표현인 ‹가라테 로봇電人ザボーガー›(2011) 등이 대표적이다. 두 작품만 봐도 독특하지만, 그의 커리어 전체를 바라보면 더욱 기상천외하다. 그는 나가이 고, 이토 준지, 우메즈 카즈오, 오시미 슈조 등 다양한 만화가의 작품을 영화로 옮겼고, 종종 비주류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삼은 아이돌 영화를 찍었다. 마스무라 야스조가 이미 걸작으로 만들어 낸 다니자키 준이치로 소설 원작의 영화 ‹만지卍›(2006)를 만들었으며, 그 당시 전 세계 호러 신예 감독을 끌어모아 만든 초단편 옴니버스 영화 ‹ABC 오브 데스The ABCs of Death›(2012)에 참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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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이의 첫 V시네마 작품인 영화 ‹크라임 헌터 – 불릿 오브 레이지›의 VHS 커버(좌)와 도에이 V시네마 브랜드의 로고 이미지(우)

이 필모그래피가 보여주는 기묘한 궤적은 그의 뿌리인 일본 V시네마에서 기인한다. 1989년 도에이에서 ‹크라임 헌터 – 불릿 오브 레이지クライムハンター 怒りの銃弾›를 출시하며 함께 선보인 비디오용 영화 라인의 이름이었던 V시네마는 빠르게 히트상품이 되었다. 극장용 영화보다 훨씬 저렴한 제작비로 3만 개의 비디오를 판매할 수 있었다. 이후 도호, 다이에이, 닛카쓰, 쇼치쿠 등의 대형 영화사와 여러 소규모·독립 제작사도 비디오용 영화 시장에 뛰어들며, V시네마는 이들 전체를 통칭하는 용어로 여겨진다. V시네마의 주된 관객은 20~30대 남성이었고, 1980~90년대 쇠퇴기를 맞이한 일본 영화는 이들이 필요했다. V시네마의 주된 장르가 야쿠자, 도박물, 찬바라, 섹스, 고어, 스플래터, 특촬물, 학원물 등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1970~80년대의 닛카쓰 로망 포르노가 그랬던 것처럼 V시네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신예나 일거리가 없던 이들에게 하나의 기회로 다가왔다. 제작비가 저렴했기에 최소한의 요구사항, 이를테면 액션이나 노출 장면 유무, 야쿠자·도박물 등 특정 장르로 연출하기 같은 요구만 충족한다면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기회가 제공되는 셈이었다. 세계적인 거장으로 자리 잡은 구로사와 기요시나 아오야마 신지도 V시네마로 출시된 싸구려 장르영화를 통해 초기 경력을 쌓았다. 미이케 다카시, 나카타 히데오, 시미즈 다카시 등 J호러를 이끌었으며 현재도 활발히 활동하는 장르영화 거장 또한 V시네마로 경력을 시작했다. ‹주온呪怨›(2000) 같은 히트작도 V시네마로 먼저 출시된 뒤 극장판으로 다시 제작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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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방향대로 ‹고지라›, ‹울트라맨›, ‹가면라이더› 그리고 ‹슈퍼전대› 시리즈의 첫 작품 ‹비밀전대 고레인저秘密戦隊ゴレンジャー›(1975). 초창기 특촬물은 거대 괴수나 인간 크기의 괴인, 국내에선 ‘전대물’이라고 잘못 통칭하는 일본식 슈퍼히어로물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전대물은 슈퍼전대 시리즈와 그 아류작을 일컫는다. 가면라이더와 슈퍼전대 시리즈는 도에이 제작인 만큼 V시네마로 외전작을 내놓기도 했는데, 이는 OTT 시대인 지금에도 ‘V-시넥스트V-Cinext’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런 V시네마에서 ‘특촬’은 중요한 장르이자 비주얼 요소다. 특촬물이라는 용어가 알려주듯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기도 했다. 혼다 이시로와 츠부라야 에이지의 ‹고지라ゴジラ›(1954)에서 출발한 특촬물은 ‹울트라맨ウルトラマン›(1966~), ‹가면라이더仮面ライダー›(1971~), ‹가메라ガメラ›(1965~), ‹슈퍼전대スーパー戦隊›(1975~2026) 같은 시리즈와 캐릭터로 이어졌다. 물론 일본에서 특촬물이 항상 인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지라›는 점차 어린이 영화에 가까워지며 힘을 잃었고, ‹울트라맨›이나 ‹슈퍼전대›의 인기도 항상 일정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고지라› 시리즈를 주도했던 도호에서 점차 특촬물 제작을 줄여 나가자 일거리가 필요한 사람들은 V시네마로 향했다. 귀신이나 요괴가 등장하는 호러영화는 물론이고 ‹기니어피그ギニーピッグ› 시리즈(1985~1990) 같은 고어·스플래터 영화가 V시네마로 대거 제작되며 특촬물 제작 노하우가 필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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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터 아래로 영화 ‹머신 걸›, ‹로보게이샤›, ‹누이구루마 Z›의 스틸컷. 이구치 노보루의 다른 영화나 언급한 영화 속 다른 장면 스틸컷도 가져오고 싶었지만······ 심히 부적절한 이미지가 대다수라 고르고 골라 가져왔다.

이구치 노보루는 V시네마와 특촬물이라는 자신의 두 뿌리에 기울인 애정을 영화에 담아낸다. 대표작 ‹머신 걸›은 V시네마에서 종종 제작되던 여성액션물과 스플래터의 결합이었고, ‹로보게이샤ロボゲイシャ›(2009)는 거기에 찬바라까지 더한다. 찬바라ちゃんばら는 칼이 부딪히고 피가 흩뿌려지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를 어원으로 삼는 용어로, 사무라이나 자객이 등장해 칼싸움을 벌이는 작품 전반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서 훈련받은 로봇 게이샤 자객은 엉덩이에서 나온 가타나로 짱구의 엉덩이춤 같은 움직임을 선보이며 칼싸움을 벌인다. 게다가 이 로봇 게이샤는 하반신을 탱크의 무한궤도로 바꿔 도로를 달린다. ‹가라테 로봇›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젖(!)을 먹고 자라며 가라테를 수련해 오토바이와 합체한 로봇이 된다. 미소녀가 곰인형과 합체해 좀비를 찢고 다니는 ‹누이구루마 ZヌイグルマーZ›(2013)는 특촬을 기반으로 한 장르적 잡탕찌개 같은 면모를 확연히 드러낸다. 나름 정통(?) 호러영화인 ‹토미에: 언리미티드富江アンリミテッド›(2011)에선 이토 준지 만화의 기괴한 이미지를 스플래터스러운 특촬로 풀어 낸다. 이구치 노보루의 필모그래피에는 이 밖에도 괴기스러운 영화가 즐비하다. 다만 그것을 풀어 설명하는 일은 과하게 음지스럽기에 굳이 설명하진 않겠다. 궁금한 분은 직접 위키피디아를 찾아보길 권한다.

이런 필모그래피를 지닌 감독이기 때문에 이구치 노보루는 부천영화제의 단골손님이었다. 최근에는 고어·스플래터 영화를 덜 만들기에 초청되지는 않지만, 그는 2010년을 전후로 거의 매년 부천을 방문하는 V시네마 출신 일본 감독 중 하나였다. 그의 여러 작품 중 ‹데드 스시›는 비교적 점잖은(!) 영화에 속한다. 깔깔 웃으며 다음 장면을 기대하기엔 과하게 더럽지 않고, 불필요한 노출이 가득하지 않으며, 특촬물을 비롯한 V시네마 장르에 관한 나름의 지식이 필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담뽀뽀タンポポ›(1985)를 따라 한 날계란 키스나 ‹가면라이더›의 어느 에피소드에서 가져온 듯한 생선 괴인이 등장하지만, 이런 오마주는 몰라도 그만이다. 물론 ‹데드 스시›에도 잔혹한 장면이 즐비하다. 초밥이 료칸 손님들의 혓바닥을 물어뜯고, 아직 초밥으로 손질되지 않은 원물 오징어가 등장인물의 얼굴 가죽을 잡아당기며, 초밥에 목이 잘리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장면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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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데드 스시›의 한 장면. 참치 초밥과 새우 초밥이 새끼를 대량으로 낳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런 장면은 대체로 유쾌하다. 물론 고어 자체를 불쾌해하는 관객에겐 어렵겠지만, 식인 초밥이라는 당황스러운 소재와 어딘가 조악해 보이는 특촬물 특유의 비주얼은 잔혹함을 유쾌함으로 탈바꿈시킨다. 초밥집 앞 모형 음식 같은 질감의 초밥이 숨겨둔 송곳니를 꺼내 보이며 료칸 곳곳을 날아다니는 풍경을 보며 웃지 않을 수 있을까? 이처럼 ‹데드 스시›의 백미는 이런 잔혹한 장면이 아니다. 매미처럼 나무에 매달린 두 초밥이 짝짓기해 수백 마리의 (저렴한 CGI로 표현된) 새끼 초밥을 까는 순간, 군함초밥이 연어알을 대포처럼 발사하는 순간, 해산물이 아니기에 이지메를 당하던 계란초밥이 “케이코······ 간바레······!”라고 속삭이며 (식인 초밥들은 낄낄거리며 웃기도 하고 말도 한다) 다른 식인 초밥을 무찌르라고 응원하는 순간이 ‹데드 스시›의 핵심이다. 게다가 이 응원은 식인 초밥의 등장에 뒷전으로 밀렸던 영화의 진짜 이야기, 쿵후 영화를 방불케 하는 수련을 견뎠음에도 “역시 여자의 냄새가 생선 비린내에 섞이고 있어 초밥을 쥘 수 없다”라는 말을 아버지에게 듣고 가출한 초밥 장인 지망생 케이코의 이야기와 이어진다. 케이코가 료칸의 엉터리 요리사에게 분노했던 것도, 생선회와 초밥을 식인 괴물로 변형시킨 이에게 분노하는 것도, 모두 결국 초밥에 관한 모욕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욕을 참지 못했다기엔 죽은 식인 초밥을 엮어 초밥 쌍절곤을 만들어 싸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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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데드 스시› 스틸컷

영화 ‹데드 스시› 스틸컷

‹데드 스시›의 엔딩 크레딧에선 짧은 비하인드 영상이 등장한다. 낚싯줄이나 얇은 와이어에 생선회나 초밥 모형을 연결해 펄떡거리게끔 한 연출과 성룡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NG 장면 모음은 이런 영화를 만들 때의 즐거움과 볼 때의 즐거움을 동시에 드러낸다. “촬영에 사용한 음식은 촬영 후 스태프가 모두 맛있게 먹었습니다”라는 일본어 자막과 “이 영화 제작 중에는 어떤 스시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라는 영어 자막은 덤이다. ‘무슨 생각으로 식인 초밥 영화를 만든 거지?’가 아니라 ‘이렇게 영화를 만들어도 즐겁고 재밌네!’라는 발상의 전환이랄까. 『미스터 초밥왕』과 특촬물의 괴인을 스플래터 장르로 비벼 낸 ‹데드 스시›는 쿠소영화의 어처구니없는 조합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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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데드 스시›의 엔딩 크레딧 이후 나타나는 문구. “촬영에 사용한 음식은 촬영 후 스태프가 모두 맛있게 먹었습니다”라는 내용의 일본어 자막과 “이 영화 제작 중에는 어떤 스시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라는 내용의 영어 자막이다.

지난 십여 년 사이 장르영화의 트렌드도 변했다. 일본 특촬물의 질감이나 V시네마의 저렴한 스펙터클 수요 자체가 줄었다는 생각도 든다. 부천영화제가 가져오는 영화나 관객이 찾는 영화의 성격도 많이 변했기에 ‹데드 스시› 같은 영화를 발견하긴 어려울지도 모른다. ‹데드 스시›를 비롯한 이구치 노보루의 영화들은 쿠소한 즐거움을 주지만, 속된 말로 ‘빻은’ 영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를 수십 명의 관객과 함께 만날 때의 즐거움은 배가된다. 나는 올해도 부천에 ‹데드 스시› 같은 영화를 찾으러 간다. 마침 이 글이 올라오는 날은 부천영화제가 한창 진행 중일 때다. 올해도 폭염과 폭우를 뚫고 부천에 올 관객이 각자의 쿠소영화를 찾길 바라며······.

[essay]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2_21

Writer

박동수 평론가(@dsp9596)는 제3회 한국독립영화협회 독립영화비평상과 제1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에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학부에서 예술학을, 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했다. 영화와 게임을 주로 다루지만 종종 미술이나 방송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동료 평론가들과 함께 영화비평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크리틱›을 진행하고 있으며, 동명의 비평집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첫 단독 에세이 『쿠소필리아』(2026)를 펴냈다.

여성-작가-다큐멘터리-영화-삶-예술

섬네일
Film

[essay]백지숙_1

2027년 개봉을 목표로 마지막 작업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김윤신 다큐멘터리 중 일부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백지숙이 여성작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은 걱정 섞인 반응을 보였죠. 일리가 없는 우려는 아니었습니다. OTT와 스트리밍 서비스 강세에 따라 사람들은 영화관을 점점 더 찾지 않고 있는데다 영화는 그에게 익숙한 영역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그가 모험을 택한 건 어떤 부재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여성작가 140여 명이 참여한 «팥쥐들의 행진»은 분명 무척 뜻깊은 전시였지만, 아쉽게도 전시가 끝난 후 어디에서도 참여한 여성작가의 이야기를 담은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마주한 부재를 직접 채우기 위해 시작한 것이 주식회사 모은 발 프로덕션, 그 첫 프로젝트로 여성작가 다큐멘터리 시리즈 ‹오래오래 살아남을 그들›입니다. 모은 발이라는 이름은 프랑스 공원에서 두 발을 모아 쇠구슬을 던지는 놀이 ‘페탕크’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페탕크는 얼핏 보면 쉽고 재밌는 놀이 같지만, 발을 모은다는 건 그만큼 섬세함과 집중력을 요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모은 발 프로덕션이 준비하고 있는 다큐멘터리도 그렇습니다. 그 미학적 의미에 비해 너무 쉽게 잊어지는 국내 여성작가를 흥미로우면서도 섬세한 방식으로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죠. 김윤신, 김명희, 노원희, 윤석남···. 백지숙이 담아내고자 하는 이야기의 서막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오래오래 살아남을 그들을 만나며.

[essay]백지숙_2

김윤신 다큐멘터리 촬영 모니터링. 화면에는 김윤신 작가의 예술적 동반자이자 수양딸이 된 김란 관장의 모습이 담겼다.

어디서 시작해도 좋겠다.

2022년 서울시립미술관 재직 당시 조각가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기획할 때 전시와 함께 영화가 제작되었으면 했다. 이중섭과 박수근 외 그 시대 다른 작가의 생애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특히 권진규는 조각가로서 더욱 입체적인 영화적 접근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접촉해 본 영화감독 등 영화계 인사는 영화화 가능성에 한결같이 부정적이었다. 명필름의 이은 대표는 극영화를 제작하려면 아카이브와 평전, 다큐멘터리 영화가 먼저라는 실행 경로를 제안했고, 이에 권진규기념사업회 허경회 대표가 평전 집필과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후원으로 응답했다. 곧이어 책이 출간됐고, 다큐멘터리는 현재 제작 마무리 단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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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 노실의 천사» 전시 홍보 사진.

권진규, 자소상, 1968, 테라코타, 20 × 14 × 19cm, (사)권진규기념사업회 기증,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서울시립미술관

혹은 이런 경험도 주효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2000년대 중후반까지 대안공간 네트워크의 핵심에 있었던 인사미술공간이 2007년 광화문의 미로스페이스에서 싱글 채널 비디오 작품 30여 점을 단 사흘 동안 상영한 적이 있었다. 미술관 화이트큐브의 영상 스크리닝이나 모니터 상영과 달리 블랙박스 영화관의 온전한 극장적 경험은 짧지만 강렬했고, 지금까지도 내 몸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한참 오래전인 20세기 말, 여성 큐레이터 다섯 명이 장기간 준비 끝에 예술의전당에서 «팥쥐들의 행진»을 개최했다. 미술관 1, 2관과 로비에 역사전과 기획전 형태로 조성한 이 전시는 김경란과 풍물패 쟁이의 열림굿으로 시작됐고, 이희호 여사가 개막식에 참석하는가 하면, 팥쥐를 위한 쌈지락파티로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같은 장소에서 여성영화제의 일환으로 여성영화 다시 보기 프로그램이 기획됐지만, 정작 참여 여성작가 140여 명의 목소리나 얼굴이 담긴 영화나 영상, 평전이 나왔다는 기억은 없다.

[essay]백지숙_4

2025년 6월, 마지막 기획전과 함께 25년간 활동을 마치며 폐관한 인사미술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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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슬기와 민에게 의뢰한 인사미술공간 웹사이트. 출처: 슬기와 민

[essay]백지숙_6

여성미술제 관련 자료를 살펴볼 수 있는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의 디지털 아카이브

[essay]백지숙_7

1992년부터 2018년까지의 글 40편을 시간순으로 담았다.

『본 것을 걸어가듯이』, 백지숙, 미디어버스, 2018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지나 미술관 관장 임기를 마감한 후 2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여성작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몇 가지 우려 섞인 반응을 보였다. 미술계 주요 현역은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일 텐데, 그다지 생산적인 효과가 없을 거라고 경고했다. 누군가는 영화 한 편 제작하는 예산이면 전시 몇 개를 열 수 있을 텐데 하며 오히려 전시 기획을 독려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작가는 엉뚱하게도(?) 내 허영심을 탓하기도 했다. 마침 한국의 미술관에는 본격적으로 관객이 몰리는 반면에 온라인 스트리밍 강세 속에서 영화는 거의 사양 사업으로 전락하고, 영화에 관한 공적 지원이나 인프라도 나날이 쇠약해 가고 있던 터라 실제로 일을 얼마나 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 시각도 컸다. 무엇보다 미술 기관 작업에 더 할 일이 많을 텐데 왜 아무것도 모르는 영화 제작에 시간을 낭비하려 하느냐는 진심 어린 조언이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이라는 게 지금까지의 활동과 그렇게 다른 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동료는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 시절 리서치했던 아트엔젤Artangel을 소환하며, 원래 프로덕션에 관심이 많았다며 나 대신 변 아닌 변을 해 주기도 했다. 대안공간에서 비엔날레, 미술관으로 연결되는 여러 기관을 세팅할 때도 매번 예상치 못한 도전과 난관 못지않게 보람도 컸던 만큼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며 자신을 독려해 본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우선은 작명부터 하기로 했다. 당시 서로 존대하는 친구에게 쓴 이메일의 내용은 이렇다.

새벽에 잠이 깨서 회사 이름을 다시 생각해보다 프랑스 여행할 때 동네 공원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쇠구슬치기 하는 장면이 떠올랐어요. 아시겠지만 페탕크라고, 컬링과 유사한 놀이입니다. 거기서 연상되는 여러 지점이 있어서 찾아보니 어원이 우리말로 번역하면 ‘모은발’이라고 합니다. 두 발을 모으고 무거운 쇠 구슬을 치는 게임이라서. 실은 나이 들면 남편과 이 놀이하고 살자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사 오려니 너무 무거워서 못 사 옴.

[essay]백지숙_8

페탕크Pétanque 놀이의 축이 되는 쇠공

이렇게 시작한 모은 발을 위해 인미공에서 같이 일했고, 공연계 핵심 인사지만 미술인을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정순민 전 아르코 극장장을 모은 발 프로덕션 공동 대표로 끌어들였다. 구립합창단과 봉사활동에 전념하던 그였지만, 월정사 템플스테이 숙고를 거쳐 모은 발 참여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고, 2024년 말 주식회사 모은 발 프로덕션은 자본도 직원도 없이 법인 등록을 마쳤다. 그러곤 곧바로 여성작가 다큐멘터리 시리즈 ‹오래오래 살아남을 그들› 기획안을 작성해서 작가와 프로듀서, 감독, 후원자, 투자자를 찾아 나섰다. 

모은 발 프로덕션 웹 페이지. 디자인과 개발은 민구홍이 함께했다.

예술가로서 진실하게 사는 삶이 어떻게 자신을

그리고 우리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가?

해외 여성작가를 다룬 레퍼런스 영화와 다큐멘터리, 평전을 찾아보니 예상보다 많기도 했지만 예상보다 적기도 했다. 한국 상황에 비하면 많았고, 백인 남성 ‘마에스트로’에 견주면 턱없이 적었다는 뜻이다. 힐마 아브 클린트Hilma af Klint의 경우, 평전이 잘 나와서인지 평전을 기점으로 소설과 극영화, 그래픽 노블, 다큐멘터리가 일종의 콘텐츠 파이프라인으로 연결되어 있어 두루 살펴보기 좋았다. 힐마 아브 클린트의 한두 작품을 그룹전에서 본 적은 있지만, 대규모 회고전은 클린트의 생애에 관한 텍스트를 먼저 본 후에야 관람했다. 만약 전시를 먼저 봤다면 클린트의 인생에 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초의 추상화가로 미술사에 기록되는 칸딘스키에 비해 작품의 재료나 밀도 혹은 화면의 완성도에서 차이가 있었고, 그런 차이 자체가 당시 작가의 삶과 무관하게 진행된 것이 아니라는 각성이 선행되었기 때문에 작품을 미술사 정전대로 바라보지 않을 수 있었던 셈이다. 이끼바위쿠르르의 30대, 50대 여성 작가들이 70대 노원희 작가와 나누었다는 대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림 재료로 언제나 ‘최소한’을 사용하는 작가적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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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7일 정순민 대표가 구글챗으로 이끼바위쿠르르의 전시에 노원희 선생님과 동행했다며 전시 초청장을 보내왔다. 뉴욕과 제주, 서울 등 이동이 많은 모은 발의 구성원은 구글챗 덕분에(?) 서로의 여정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게 되었다.

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의 극영화를 처음 본 곳은 독일 함부르크에서 40년 이상 살며 작업을 하고 있는 송현숙 작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이었다. 송현숙은 앞서 말한 «팥쥐들의 행진»에 초대되었던 작가다. 학고재에서 여러 차례 열린 개인전과 스푸뤼스 마거스Sprüth Magers 뉴욕 갤러리 개인전 등을 여러 해 따라다녔지만, 작가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은 함부르크에서가 처음이었다. 높은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고, 마당 한쪽에는 양봉하는 벌통이 놓여 있던 그의 작업실을 조만간 한 번 더 방문할 예정이다. 다음에는 그가 제작한 템페라 회화나 영화 말고 꿀단지처럼 숨겨져 있는 자전적 드로잉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오래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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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송현숙 작가 작업실에 걸려 있는 사진, 송현숙 작가와 어머니, 2026년 4월 8일 필자 촬영

비행기 안에서 본 ‹Leonora In The Morning Light›(2025)에는 레오노라 캐링턴이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와 함께한 에피소드가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전쟁과 피란을 거쳐 스페인 정신병원에 오랜 기간 입원하는 등 고난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작가가 94세로 타계하기 직전까지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지속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레오노라 캐링턴의 그림은 최근 국내에서는 2025년 프리즈 기간에 일부 소개되었고, 소설 『나팔귀』(2022)가 번역 출간된 바 있다. 잘 알려진 제59회 베니스비엔날레의 주제 “꿈의 우유(The Milk of Dreams)”가 그의 책 제목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서 본 다큐멘터리 영화에는 백발의 할머니가 담배에 관한 열정을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었다. 가로로 긴 그림이 유독 많았던 것도 그의 정신세계와 맞물린 환상적 서술 방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잠시 상상했다.

룩셈부르크 뮤지엄 레오노라 캐링턴 전시 영상

비비언 수터Vivian Suter와 그의 어머니이자 화가인 엘리자베스 윌드Elisabeth Wild의 과테말라 작업실과 거주지를 배경으로 한 영화 ‹Vivian’s Garden›(2017), 카셀 도큐멘타가 커미션한 이 작품을 나는 2023년 빈에서 열린 엘리자베스 윌드 회고전에서 볼 수 있었다. 식민과 자연, 모녀 관계, 동식물과 인간의 여러 관계를 밝은 빛과 깊은 어둠으로 조망한 이 작품은 전시와는 다른 결로 작가들과 감독의 일견 평화롭지만 복잡한 속내를 헤아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미술 전시에서 작가의 삶은 보도자료 속의 짧은 이력이나 전시장 한쪽의 보조적인 영상으로 혹은 관련 강연이나 심포지엄에서 미술사적 맥락으로 따로 제시되어 왔다. 작가의 삶과 작품에 관한 평가는 별개로 이루어졌고, 작품 독해를 방해하지 않도록 작가의 정보를 조심스럽게 다루어 왔다. 작가의 성격이나 태도, 취미, 가족사는 좋건 나쁘건 이름이 지워진 채 극적 소재로 은밀히 거론되어 오거나 기껏해야 뒷담화 소재에 그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페미니즘과 정치적 행동주의의 파고에서도 살아남은 이런 관점이 최근 몇 년 사이 크게 바뀌었다. 작가가 작품 못지않게 중요해졌고, 그렇기 때문에라도 작가에 관한 다각도의 아카이빙 작업이 더 중대한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공공기관에서 주도하고 있는 작가 아카이브 프로젝트가 제대로 안착하면 이를 기반으로 하는 2차 저작물 생산이 더욱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유럽 지역의 몇몇 전시에서는 이미 작가 다큐멘터리 영상이 칸막이 없이 ‘동등한’ 작품으로 전시되기 시작했다는 조짐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어디서 시작할 수 있나?

탄탄한 스토리텔링을 내장한 작가 천경자를 우선 타진했으나 이미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테레사 학경 차(차학경)는 서울에서 조만간 아카이브 전시를 계획 중이라 들었으나 영화화에는 몇 가지 선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예술경영지원센터 원로 작가 디지털 아카이브 사업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의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이 생존 작가를 주체로 하듯이 살아 있는 작가의 목소리를 더 늦기 전에 담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할 듯싶었다. 이에 출판사 안그라픽스가 여성작가 평전 시리즈 출간을 결심하며 큰 힘을 실어 주었다. 마침 혜성같이 등장한 (것처럼 보이는) 김윤신 작가가 있었다. 2023년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김윤신 개인전 «더하고 나누며» 개최 직후 세계가 화답한 결과였다. 김차섭 작가와 부부이자 동료 화가로 활동해 온 김명희 작가는 남편의 작고 이후 기념사업회를 조직하는 등 김차섭의 유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의 작업을 되돌아보고 전진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2021년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에 기증한 이 부부 작가 아카이브는 깊이 묵혀 두는 대신 다양하게 발효할 것이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대표 그룹 ‘현실과 발언’의 유일한 여성작가 노원희는 뜻밖에 아들 박재경이 기록한 사진 작업을 발견하면서 모성의 신화와 함께 사회 진보를 감아 넣는 시선을 확보한다. 당대의 페미니스트 윤석남 작가는 점차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가운데 1,025마리 개의 이야기를 생태의 곁으로 확장하며 질문을 던진다. 이제 개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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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신 다큐멘터리를 기록하는 전명은 작가의 기록 사진(2025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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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26일 뉴멕시코 현지 촬영 중 강사라 피디가 보내온 사진, 뉴멕시코 풍격을 담고 있는 김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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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희, ‹자화상›, 1995, 캔버스에 콜라주·아크릴릭, 65.5×91cm, 학고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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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 «1025: 사람과 사람없이(1,025: With or Without Person)»(2009) 일부,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 2025

그리고 또 누가 있나?

사실 너무나 많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아직 너무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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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7일, 갤러리현대 김명희 개인전 오프닝에서 장우진 감독과 김명희 작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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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백지숙은 평론과 기획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방송국 구성작가,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며 전시기획과 미술, 문화평론 활동을 했다. 2000년대에는 인사미술공간과 아르코미술관에서 일했으며,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를 맡기도 했다. 2010년부터 2023년까지는 아뜰리에 에르메스,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의 예술감독과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모은 발 프로덕션(pieds-joints.kr) 공동대표이다. 저서로는 『본 것을 걸어가듯이-어느 큐레이터의 글쓰기』(미디어버스, 2018)가 있다.

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1-아프리칸 쿵푸 나치스

[BA]섬네일
Film

[essay]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_1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결과적으로는 최악일지라도 때론 최선을 다한 것일 수 있죠. ‘쿠소(くそ)영화’에 관한 이야기예요. ‘똥’에 해당하는 일본어 욕설 ‘쿠소(くそ)’와 ‘영화’를 합친 이 표현은 쓰레기 같은 영화를 가리킵니다. 박동수 영화평론가는 쿠소영화를 ‘실패의 산물’로 규정합니다. 연기, 편집, 촬영, 기술, 각본… 다양한 구성 요소가 갖가지 이유로 실패하며 탄생한 조악한 영화라는 것이죠. 그 실패 위에서, 우리가 영화에 기대하는 익숙함을 벗어난 상상력을 재료 삼아 말도 안 되는 설정과 열악한 자원 속에서 어떻게든 착즙해 낸 최악이자 최고의 결과물이 탄생합니다.

박동수가 첫 번째로 꺼내든 쿠소영화는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2019)입니다. 아프리카, 쿵푸, 나치가 한데 뒤섞인 이 가나산 괴작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는 쿵푸영화의 간략한 계보와 브루스플로이테이션부터 산업이 부재함에도 영화를 만드는 아프리카의 창작 생태계까지 쿠소영화를 둘러싼 다양한 배경을 살펴봅니다. 자본과 산업의 논리가 닿지 않는 곳에서 태어나 조악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낭만적인 쿠소영화에 관해 박동수가 전하는 이야기를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essay]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_2

영화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 스틸컷

아프리카의 쿵푸영화, 그런데 나치를 곁들인…

3년 전엔가, 여느 날처럼 트위터 타임라인을 뒤적이던 중 이 영화의 포스터를 발견했다.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African Kung-Fu Nazis›(2019). 눈에 흉터가 난 히틀러가 포스터 중앙에 있고, 쿵푸 마스터의 도복 비스름한 옷을 입은 아프리카인이 주인공 자리에 서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전범 아돌프 히틀러와 도조 히데키가 사실 살아남았고, 이들은 아프리카로 도망쳤다. 가라테 수련을 통해 히틀러는 타인을 세뇌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갖게 되고, 가나 국민을 가나-아리아인Ghan-Arian으로 만들어 제국의 부활을 시도한다. 어느 쿵푸 도장의 제자인 주인공 아대는 나치에 반발한 사부가 죽임을 당하자 외딴곳에 숨어 수련을 거듭한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 히틀러가 개최한 무술대회에 참가한다.

영화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 예고편

이 황당한 줄거리는 나름의 ‘근본력’을 갖추고 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쿵푸영화에 관한 애정과 오마주가 영화 전체에 빼곡히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쿵푸 도장을 습격한 나치 일당이 현판을 부수는 모습은 이소룡의 ‹정무문精武門›(1972)을 고스란히 차용한다. 일본군이 가라테를 배운 나치로, 이소룡이 주인공 아대로 바뀌었을 뿐이다. 다만 아대는 수련이 부족한 인물이다. 그래서 ‹취권醉拳›(1978)의 성룡처럼 은둔 고수를 사부 삼아 수련을 이어간다. 이때 등장하는 사부의 의상은 ‹취권›의 원소전과 거의 비슷하다. 물론 술도 마신다. 히틀러 주최의 무술대회는 자연스럽게 이소룡의 마지막 걸작 ‹용쟁호투龍爭虎鬪›(1973)에서 따온 것이다. 이소룡이 범죄조직을 격파하기 위해 무술대회에 참가했듯이 아대는 나치와 히틀러를 박살 내기 위해 참가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대체 왜 쿵푸일까?

[essay]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_4
[essay]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_5

영화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의 은둔 고수와 영화 ‹취권›의 원소전. 두 인물은 비슷한 모자와 헤어스타일을 공유하고, 비슷하게 생긴 술병을 사용한다.

[essay]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_4
[essay]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_5

영화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의 은둔 고수와 영화 ‹취권›의 원소전. 두 인물은 비슷한 모자와 헤어스타일을 공유하고, 비슷하게 생긴 술병을 사용한다.

[essay]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_6

대표적인 브루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인 ‹브루스 리의 클론들The Clones of Bruce Lee›(1977) 포스터. 이소룡의 사망에서 출발하는 이 영화는 어느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이소룡을 복제해 두었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한국의 거룡Dragon Lee과 장일도Bruce Lai, 홍콩의 여소룡Bruce Le, 태국의 브루스 타이Bruce Thai 등이 동시에 출연한다.

[essay]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_7

영화 ‹브루스 리의 클론들› 스틸컷

1970년대 이래로 전 세계 액션영화는 쿵푸영화의 영향 아래 있다. 이소룡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이후로 쿵푸영화계는 넥스트 이소룡을 찾는 데 혈안이 된다. 성룡도 그렇게 등장한 배우 중 하나였다. 다만 성룡은 쿵푸와 슬랩스틱을 결합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내며 다양성을 더한다. 이후 홍금보, 원표, 이연걸, 견자단 등의 스타와 함께 쿵푸영화의 전성기가 이어진다. 그와 동시에 신화가 된 이소룡의 이름을 따라 무수한 아류작과 짜깁기 영화가 등장한다. 브루스플로이테이션Bruceploitation이라는 명칭으로 유통된 일련의 짝퉁 이소룡 영화에서는 홍콩뿐 아니라 대만과 한국, 일본, 중국, 태국 등 아시아 각국의 무술가가 “브루스 어쩌고”나 “저쩌고 룡”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등장했다. 브루스플로이테이션은 홍콩 무협영화, 한국의 권격영화, 일본의 찬바라 영화 등과 뒤섞여 ‘아시안 마샬아츠 필름’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유통된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정식으로 유통되지 못했다. 그 대신 브루스플로이테이션은 해적판 필름의 형태로 낡아빠진 동시상영관에 유통되거나, 돈냄새를 맡은 사업가가 짜깁기한 판본이나 오역으로 가득한 더빙판으로 비디오 대여점에 유통되었다.

[essay]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_9

다큐멘터리 ‹영화의 사도들Apostles of Cinema›(2022) 스틸컷. 탄자니아의 영화향유 문화를 다룬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DJ로 불리는 일종의 변사가 간이 상영관에서 라이브 더빙을 선보이는 장면(위)과 해적판 DVD 판매점의 모습(아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가 다루는 것은 탄자니아지만, 우간다나 소말리아 등 동아프리카 지역뿐 아니라 나이지리아, 가나 등 서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이와 거의 유사한 방식으로 영화가 향유되었다.

공식적인 배급망을 탄 것은 아니지만 필름보단 비디오로 유통되던 이 영화들은 가난한 노동자나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주된 유흥거리가 되어주었다. 제작부터 상영에 이르는 영화산업이 없다시피 한 아프리카에서는 지금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영화를 본다. (국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비공식 상영관에서 해적판 영화가 상영되고, VJ나 DJ로 불리는 일종의 변사가 라이브 더빙을 선보이거나 해적판 DVD에 자체 더빙을 입혀 배포한다. 쿵푸영화뿐 아니라 발리우드 영화, 한국 드라마, 대만 청춘영화, 심지어 EPL이나 챔피언스리그 중계영상까지 같은 방식으로 유통되고 상영된다. 그 토양에서 아프리카의 비디오 키즈는 다양한 혼종 영화를 만들어냈다. 지금은 어느덧 ‘놀리우드’라는 이름을 갖게 된 나이지리아와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적 스타가 된 우간다의 ‘와칼리우드’가 그렇다.

사무엘 K. 응칸사의 첫 영화 ‹2016›(2010) 예고편. 에일리언과 터미네이터의 대결을 다룬 이 영화는 당황스러운 CGI와 VFX로 점철되어 있다. 예고편의 화질이 좋지 못한 것은 원본 영화의 화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제목부터 당황스러운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가 제작된 가나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80년대 제작된 몇 편의 장편영화를 제외하면 거의 비디오 영화만 제작되어 영화산업이랄 게 부재한 나라다. 실제로 (유럽의 직간접적 지원을 받는 북아프리카 국가를 제외하면) 아프리카 전체에서 ‘영화산업’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나라는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세네갈 정도니까 말이다. 산업이 없는 곳에서는 종종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제작된 영화가 등장하곤 한다.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를 만든 사무엘 K. 응칸사Samuel K. Nkansah도 척박한 환경에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어 내는 인물이다. 닌자맨Ninjaman이라는 예명으로 제작사 ‘닌자 무비 프로덕션’을 운영하는 그는 2010년작 ‹2016›의 예고편이 유튜브를 통해 바이럴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외계인 침공을 다룬 이 영화는 터미네이터나 에일리언의 이미지를 가까스로 움직이는 열화판 CGI로 가져온 뒤 엉망진창의 폭발과 액션을 곁들인 괴작이다.

[essay]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_11

스키장에 여행 온 의대생과 나치 좀비의 대결을 담은 호러 코미디 영화 ‹데드 스노우›의 스틸컷

[essay]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_12

달의 뒷면에 숨겨진 나치 기지가 있다는 설정의 영화 ‹아이언 스카이› 스틸컷. 영화 속 나치 기지는 놀랍게도 하켄크로이츠 모양이다.

지구를 식민지화하려는 외계인의 침공을 소재로 삼았던 감독이 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소재가 나치의 부활이었던 걸까? 장르영화의 팬으로서 무수한 영화의 소재였던 나치가 다시 소환되는 것이 새삼스럽지는 않다. 나치는 그 이름만으로 혐오 대상인 만큼 무수한 SF, 호러, 코미디 영화에서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했다(어떤 면에선 지금의 좀비가 지닌 위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데드 스노우Dead Snow›(2009) 속 나치 좀비나, ‹아이언 스카이Iron Sky›(2012) 속 달 뒷면의 나치 기지 음모론 혹은 마블 유니버스의 ‘하이드라’ 같은 설정이 가능했다. 나치는 분명한 적이자 퇴치해야 할 해충으로 묘사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쿵푸로 마음껏 패고, 다방면으로 조롱해도 상관없는 대상이랄까. 영화의 공동연출자이자 히틀러 역을 맡기도 한 독일인 세바스티안 스타인Sebastian Stein은 ‘아프리카+쿵푸+나치’라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두고 “히틀러를 비웃는 게 나치즘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응칸사 감독에게 익숙한 코드인 쿵푸와 나치를 빌런으로 설정한 액션영화를 결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것이다.

[essay]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_13

영화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의 무술대회 장면. 어설프게 쓰인 한자와 깃발의 만(卍)자, 화이트페이스 분장을 한 가나-아리아인의 모습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어처구니없지만 단순한 반전의 묘미가 영화 곳곳에 담겨 있달까.

[essay]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_14

영화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 속 도조 히데키가 세뇌된 가나-아리아인과 행군하는 장면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는 ‘히틀러와 나치에 관한 조롱과 그에 관한 격파’라는 주제에 한없이 충실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깃발은 욱일기에 하켄크로이츠를 박아 넣은 파격적인 디자인 같지만, 사실 영화 안의 모든 문양은 ‘한자 만(卍)’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초기 할리우드 영화에서 문제가 되었던 블랙페이스는 가나-아리아인의 하얗게 칠한 얼굴로 반전된다. 히틀러의 아프리카 정복 목적은 단순히 술과 여자를 얻기 위한 것이다. 트워킹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디제잉하는 히틀러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전체주의적 악당을 묘사하기 위해 나치의 방식을 모사했던 몇몇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속 웅장함과 달리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 속 히틀러는 일관되게 한심하고 음흉하며 바보 같다. 이소룡이자 성룡이 된 아대는 식민지의 무술로 우스꽝스러운 제국을 무찌르는 쿵푸전사가 된 셈이다.

[essay]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_15

영화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 스틸컷

영화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 2African Kung Fu Nazis II›(2025) 공식 트레일러. 섬네일의 로봇은 거대화된 히틀러인 ‘아돌프 로보틀러’다.

제목에서 풍겨오는 강력한 쿠소함의 정체는 이 모든 것이 한 편의 영화에 뒤섞여 있다는 점일 것이다.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라는 정직한 제목은 영화의 모든 것이다. 다만 영화의 마무리는 쿵푸가 아니다. 아대가 대회에서 도조 히데키를 격파하자 가나-아리아인의 세뇌가 풀려버린다. 이에 히틀러는 폭주를 시작한다. 아대는 세뇌에서 풀려난 군인에게 건네받은 권총을 들고 소총을 난사하며 도망친 히틀러를 추격한다. 총격전 끝에 아대는 히틀러가 엄폐물로 쓰던 도요타 자동차의 연료 탱크를 명중시키고 히틀러는 폭사한다. 그림판으로 어설프게 누끼를 딴 것 같은 히틀러의 머리가 바닥에 굴러다니며 사태는 끝난다. 어쩌면 이는 속편을 위한 발판일지도 모른다. 2025년 시체스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속편에서 히틀러는 로봇이 되어 짝퉁 괴벨스와 함께 되돌아온다. 새로운 주인공으로 무협영화 걸작 ‹외팔이獨臂刀›(1967)의 영향을 받은 외팔이 쿵푸전사이자 아대의 동생 아도가 등장한다. 스모 선수, 프로레슬러, 심지어 거대로봇 아돌프 로보틀러까지, 더욱 사이즈를 키운 속편은 쿵푸영화라는 카테고리를 벗어나 다양한 장르 간 이종교배를 실험한다.

영화산업이 없다는 것은 영화감독을 꿈꾸는 이들에게 악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말과도 같다. 1948년 파라마운트 판결로 제작부터 배급까지 수직계열화가 이루어진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 붕괴하자 저예산 장르영화와 아류작을 양산했던 로저 코먼Roger Corman이나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손꼽히는 에드 우드Ed Wood가 등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돈의 논리 바깥에서 혹은 우리가 상업영화에 기대하는 개연성의 바깥에서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 같은 영화는 가능해진다. 무엇이든 흡수하여 뒤섞을 수 있는 영화, ‘쿠소영화’는 그런 영화를 위한 이름이기도 하다.

[essay]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_17

영화 ‹아프리칸 쿵푸 나치스› 스틸컷

Writer

박동수 평론가(@dsp9596)는 제3회 한국독립영화협회 독립영화비평상과 제1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에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학부에서 예술학을, 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했다. 영화와 게임을 주로 다루지만 종종 미술이나 방송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동료 평론가들과 함께 영화비평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크리틱›을 진행하고 있으며, 동명의 비평집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첫 단독 저서인 에세이 『쿠소필리아』를 준비 중이다.

증상앤살리단길-순례자의 드라이브(Trieb)

[BA]섬네일
Film

[ESSAY]김지혜_1

영화 ‹살목지› © 쇼박스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스크린 속 공포가 스크린 밖 현실까지 점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괴담의 배경이 된 저수지 살목지는 어느새 “살리단길”이라는 별명이 붙은 핫플레이스가 되어 새벽마다 귀신도 놀랄 만큼 많은 사람의 방문 행렬을 맞이하고 있죠. 우리는 왜 굳이 으스스한 심령 스팟으로 드라이브를 떠나는 걸까요? 이번 아티클에서는 영화 로케이션 투어를 넘어 괴담을 능동적으로 생산하고 유통하는 현시대의 고스트 투어리즘 현상을 짚어 봅니다. 김지혜는 프로이트의 운하임리히 개념에 착안한 피셔의 ‘으스스함’에 대한 정의, 그리고 상상력이 쇠퇴한 시대를 꼬집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시선을 토대로 이 기묘한 열풍을 읽어 냅니다. 단순히 유령을 찾으러 가는 길(Drive)이 아니라, 결코 채워지지 않는 일상의 권태를 자본주의적 감각으로 소비하려는 우리 안의 기이한 충동(Trieb)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들여다보세요.

[ESSAY]김지혜_2

영화 ‹살목지› 포스터 © 쇼박스

증상앤더시티

증상앤더시티는 ‘도시’ 속 우리가 겪는 ‘증상’을 분석한다기보다 증상 속 우리의 향유가 얽혀 있는 틈새를 비추며, 나만의 예술, 나만의 삶의 방식으로 생을 직조해 내는 고유한 모습을 포착하고자 한다. 아티스트·아트세러피스트로 정체화하는 저자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증상을 예술, 정신분석, 심리학, 미술치료라는 반사경을 통해 비스듬히 바라본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집약된 공간으로서 도시가 개인의 증상을 형성하는 주체로 작동한다는 점 역시 내포한다.

“도시의 증상이면서, 도시가 증상이다.”

살목지가 살리단길이 되었다. 예산군의 저수지인 살목지는 예전부터 밤낚시꾼들 사이에서 괴담이 돌던 곳이었는데, «심야괴담회»에 소개된 이후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리단길” 작명이 따라붙는 핫플 심령 스팟이 되었다. 귀문이 열린다는 새벽 1~3시 사이 살목지로 가는 차량 190대의 행렬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지고, 살목지 드라이브 체험 블로그도 등장했다. 살목지에서 퍼 온 물 소분 나눔부터 반려동물 동반 가능 여부까지 생활 정보형으로 꼼꼼하게 챙긴 이 게시물의 댓글은 진짜 광기 혹은 양기라는 반응이 다수이지만, 몇몇 방문자는 댓글이 지워졌다거나 닉네임이 다르게 보인다는 제보로 괴담 확산에 동참하고 있다. 심지어 누군가는 살목지에 텐트를 치고 밤을 보낸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관람하고 정보를 찾으면서도 어딘가 으스스한 기운을 느끼는 저자와는 양기의 급이 다르다. 사람들의 출몰에 귀신도 질려 도망가겠다며 귀신의 주거권을 보장하라는 밈도 등장할 정도로 살목지는 유명해졌고 현대식 자본주의 퇴마가 이루어지는 듯하다. 결국 현시점 살목지의 야간 통행은 제한된 상태이다.

왜 사람들은 괴담에 몰입하고 심령 스팟에 찾아가는 것일까? 사실 공포물을 즐기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현실로 돌아왔을 때 안도하며 느끼게 되는 안전한 카타르시스이다. 일상적 권태에서 벗어나 강렬한 감각 경험을 원하면서도 불안을 통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안전하게 소비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살목지 순례 현상처럼 불안이 실제 장소로 옮아와 체험형 공포가 되면 현실에서의 안전함이라는 경계를 벗어나는 지점이 생긴다. 이에 상응하듯 최근의 괴담은 스크린을 벗어나 체험이 가능한 장소를 만드는 장치가 포함된 경우가 많다. 여기에 SNS 후기 등이 미디어에 노출되면 괴담은 확산되고 장소는 관광화되어 더 매력적인 것으로 소비된다. 심령 스팟은 공포 그 자체보다는 이러한 집단적 정동이 전염된 장소의 체험 가능성으로 핫플이 된다.

[ESSAY]김지혜_3

영월 장릉 전경 ©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

[ESSAY]김지혜_4

영월 청령포 포구 © 국가유산포털

살목지 순례를 단순히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인기가 단종 유배지인 청령포 관광 열기로 이어진 스크린 투어리즘의 사례로만 읽으면 현상은 납작해진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은 미적 체험과 휴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음이나 재난과 관련된 장소를 방문하여 역사적 비극을 애도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는 대안 관광의 형태이다. 이는 전쟁, 묘지, 식민지 역사, 홀로코스트, 재난, 감옥, 고스트 투어리즘 유형으로 분류된다. 살목지 순례는 이러한 분류 중 고스트 투어리즘으로 볼 수 있으며, 타 유형과 달리 즐거움 추구가 그 목적에 가깝다. 공포가 내부에서 안전하게 유통되는 감정 상품이 된 것이다.

[ESSAY]김지혜_5

Ground Zero 전경 © Axel Houmadi

다만 공포영화라는 장르 특성상 지역에 들러붙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민감한 문제이다. 아침 방송에 출연한 지역 주민은 살목지 성지순례로 아직은 지역 경제 활성화 같은 장점보다 밤중의 소음이나 공포 이미지 고착과 같은 부정적인 측면이 더 많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포영화 ‹곡성›의 사례처럼 지역 이미지 실추가 우려될 때 지역과의 관련성을 지우지 않고 역발상 홍보로 전환한 경우도 있는 만큼(군수는 브랜드상을 받았다), 예산군도 충주맨식 지역 홍보 문법으로 발 빠르게 지역 홍보에 동참하고 있다. 현재 예산군의 유튜브에는 살목지를 “살찐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패러디한 영상이 올라와 괴담은 농담으로 중화 혹은 진화 중이다.

살목지 순례는 언캐니uncanny한 장소 경험의 소비로 볼 수 있다. 언캐니는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말한 낯익은 것이 갑자기 낯설어지는 감각인 운하임리히Unheimlich의 영역이다. 영화 속 살목지의 공포가 시작되는 곳은 사실 실제 저수지라기보다는 로드뷰 화면이다. 심령 스팟으로 유명한 장소에 갔다가 괴이한 현상에 휘말린다는 내용은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말 그대로 발견된 영상 속에 무언가 있다는 공포영화의 형식에 충실하다. 카메라 화면 안에 있어서는 안 될 형체가 포착되고, 내비게이션 속 있어야 할 경로는 끊겨서 같은 곳으로 계속 돌아오게 한다. 땅과 물의 경계가 모호한 저수지, 있던 장소에서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돌탑,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없어야 할 것이 있는 풍경에서 오는 이 불편한 감각은 마크 피셔Mark Fisher가 정의한 으스스함일 것이다. 사실 영화 ‹살목지›에는 귀신이 갑자기 튀어나와 놀라게 하는 점프 스케어jump scare 장면이 많고, 귀신도 점점 늘어나서 후반부로 가면 긴장감을 떨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너무 많은 귀신이 가장 덜 으스스한 것일 수도 있다.

케인 픽셀즈, ‹백룸The Backrooms(Found Footage)›, 2022

피셔는 언캐니가 공포영화 문법의 해석에 미친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을 그 속에 구겨 넣지 않고 구분하는 시도를 한다. 둘 다 외부 세계를 지각함으로써 내부 세계를 인지하게 하지만, 그 방식이 다르다. 기이한 것은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의 출현, 으스스한 것은 풍경 속 존재와 비존재에 관한 질문, 즉 부재의 실패나 현존의 실패이다.

데이비드 린치,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 2001

피터 위어, ‹행잉록에서의 소풍Picnic at Hanging Rock›, 1975

또한 피셔는 자본주의를 “유일하게 가능한 현실”로 제시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 세계에서는 대안적 상상력이 쇠퇴하고 더 이상 새로운 미래가 없다는 확신이 팽배하면서, 모든 건(과거조차) 단순한 소비 상품이나 심미적 대상으로 전환된다고 했다. 자본주의가 정치·경제 체계뿐 아니라 개인의 무의식과 욕망, 현실 감각 자체를 지배해서 사람들이 냉소적이고 무기력해진다. 이런 관점에서 심령 스팟은 초자연적 현상의 증거라기보다 자본주의가 봉합하지 못한 감각의 틈새가 된다. 예측할 수 있는 상태로 반복되어 새로울 것 없는 일상 속 강렬한 감각은 점점 희소해지고, 심령 스팟은 강렬함을 소비 가능한 형태로 제공하는 장소가 된다. 즉, 희소해진 강렬함의 경험은 다시 자본주의의 소비로 귀결된다. (예컨대, 인터넷 커뮤니티의 살리단길 관련 게시글의 댓글 중 일부는 살리단길에서 핫도그나 떡볶이를 팔겠다는 농담을 담고 있다.) 영화 소비는 관광지 소비로 이어지고, 소비는 더 큰 소비를 낳는다.

헨리 젠킨스Henry Jenkins는 팬픽 등 2차 창작으로 대표되는 참여문화에서 관객은 수동적 소비자가 아닌 콘텐츠의 공동 생산자로서 역동적 주체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살리단길의 순례자도 이 능동적 모델에 부합하는 듯하다. 영화 관람 후 실제 장소를 찾아가 후기도 쓰며 원전을 확장하는 공동 저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리단길의 순례자에게 살목지 귀신의 존재를 믿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진지하게 귀신을 믿는다면 두려움 때문에 새벽 3시의 차량 행렬에 동참하긴 어려울 것이고, 완전히 불신한다면 굳이 서울에서 예산까지 차를 몰지도 않을 것이다. 이렇게 안 믿지도, 믿지도 않으면서도 가는 행위는 원작에 대한 애정과 몰입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냉소적 태도가 아닐까. (물론 사람들은 단순히 갈 곳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작품을 향한 애정과는 무관한 이동이 된다.) 순례는 믿음과 불신 사이 균열의 지점에서 작동하고 있으며, 고스트 투어리즘은 이 같은 이중 구조의 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가 된다.

[ESSAY]김지혜_9

루마니아 호이아-바치우 숲 © Pal Szilagyi Palko

드라큘라의 고향인 트란실바니아 지역에 있는 호이아-바치우Hoia-Baciu 숲은 세계에서 유령이 가장 많이 출몰하는 곳으로 알려진 초자연 현상의 순례지 중 하나이다. 자신의 두려움과 욕망을 투영하는 숲이라고 불리는 이곳에서도 개발업자가 아파트 단지 건설을 위해 벌목 허가를 요구하고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자본주의는 어디에서나 리얼하다. 이에 반대하는 운동을 겸하는 NGO의 친환경(?) 투어 프로젝트에서는 드라큘라의 창조자 브람 스토커Bram Stoker의 후손과 함께 숲의 신비를 밝히는 야간탐험을 기획하기도 한다.

[ESSAY]김지혜_10

브람 스토커, 『드라큘라Dracula』, 1897, Archibald Constable and Company

다시 살목지로 돌아오면, 앞선 순례자 블로거의 덤덤함 혹은 ‘아방함’은 믿음과 불신 사이에 놓여 있다. 순례길에서 고장 난 핸드폰 거치대나 꺼진 블랙박스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살목지의 물을 떠 와서 나눔을 위한 물품처럼 다루며 공포를 부정하듯 행동하면서도, 한편에서는 기이한 모양의 나무와 자고 일어나니 생겨있다는 방바닥의 물 자국을 사진으로 전시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살리단길의 순례자는 공포 콘텐츠를 소비하는 자기 체험을 드라이브 후기로, 인증샷으로, 지도 앱 별점으로, 댓글로 제작해 유통하고 확산시킨다. 영화로부터 인터넷 커뮤니티와 블로그 후기, 그리고 유튜브로 이어지는 순환 속에서 공포를 소비하는 행위가 공포의 생산에 가담하는 행위로 전환된다.

세스지의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는 이 같은 괴담에서 파생된 현상의 이중 구조를 소설의 형식 자체로 실험한 작품이다. 인터넷 게시글, 편지, 인터뷰 기록 등을 콜라주한 페이크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괴담을 소비하는 주체가 괴담을 만들어 간다는 순환 구조는 모큐멘터리 영화로도 제작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이야기 속 편집자는 파편화된 괴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실종되고, 소설을 쓰는 작가 자신 역시 저주에 가담하고 있다는 메타적 설정까지 덧붙였다. 괴담을 소비하려고 접근했다가 곧 괴담 전파와 생산에 참여하게 되는 구조로, 소설을 읽는 행위 자체가 괴담 현상에 가담하는 것이라는 또 다른 괴담이 만들어진다.

살리단길 드라이브 블로그 글은 이 문법의 현재 진행형이다. 살아 있냐는 댓글과 스크랩은 늘어 간다. 또 하나의 괴담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모두가 목격한다. 방바닥의 물 자국은 괴담의 증거라기보다, 어쩌면 이 괴담이 독자의 방으로 혹은 일상으로 옮겨가면서 만들어진 메타 서사의 기록이다. 귀신은 이제 영화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가상의 공포는 현실의 장소를 점유했다. 괴담의 장소는 발견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순례 체험과 그 기록의 디지털화를 통해 새롭게 발명되는 중이다.

[ESSAY]김지혜_11

세스지,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2025, 반타

영화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예고편

이렇게 사람들은 살목지에 귀신을 보러 가는 것이라기보다 귀신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러 간다. 살목지의 순례자는 드라이브 겸 살목지로 향했다. 드라이브(drive)는 독일어 “Trieb”의 번역으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인간의 충동이기도 하다. 충동은 만족을 완결하지 못한 채 반복되는 운동이며, 증상의 형태로 반복된다. 살리단길을 향한 드라이브는 괴담의 공동 저자가 되려는 주체들의 드라이브(Trieb)다. 그곳에서 소비되는 것은 유령 그 자체가 아닌 유령을 끊임없이 현존하게 만드는 참여 경험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령이 사는 곳은 이제 저수지라는 장소가 아니라 블로그와 스크린이라는 디지털 콘텐츠 속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솔라리스Solaris›, 1972

Writer

김지혜 박사는 아티스트이자 미술치료사로, ‘아트애즈테라피(artastherapy.kr)’를 운영하며 예술 치료 연구와 실천을 병행하고 있다. 예술, 정신분석, 심리학, 미술치료의 관점을 교차하고, 창작과 치유의 경계를 확장하려고 한다.

최근 연구 주제는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사회정의 미술치료와 반응작업 미술치료가 있다. 앞으로 미술과 음악, 문학, 무용 동작 등을 통합하는 예술치료를 시도하고, 사회적으로 연결하기 위한 공공미술, 전시, 교육 등으로 영역을 넓혀 가고자 한다. 저서로는 『치유로서의 미술』(글로벌콘텐츠, 2021)이 있다.

보이지 않기에 분명한 사랑

[BA]김재원 섬네일
Film

[VP]김재원_1_오프닝

Visual Portfolio

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김재원이 전하는 이야기는 방향을 잃은 채 공기 중을 떠다닙니다. 어떠한 결말도 정해지지 않았기에, 그의 작업은 온갖 경계를 무심한 표정으로 가볍게 넘나들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 사이에서 그는 그 틈에 남은 온기의 잔상을 더듬습니다. 희미하게 쌓인 이미지들은 때로는 맑은 거울처럼 세상을 비추다가도, 어느새 누구나 겪는 평범한 순간이 되어 흩어지곤 하죠. 김재원은 그 불안정한 틈에서 생각이 모양을 갖추기 직전의 순간을 포착하려 해요. 의미를 가지기 전의 속삭임, 아직 이름 짓지 못한 감정들. 그렇게 시간과 감각이 희미해진 것들 사이에서 그는 자신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며, 다른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작가는 서로를 이어주는 미세한 체온과, 아직 언어로 다 닿지 못한 마음의 흔적으로 우리는 초대합니다. 스쳐 가는 장면을 헤아리다 마주치는 익명의 일상은 누군가에게는 뜻밖의 하루를 선사할지도 모르죠. 밑도 끝도 없이 끊임없이 번져가는 김재원의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그 여정을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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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멸망을 바랐을지도 몰라 Maybe I Longed for Collapse›, 2025.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서울에서 영상, 사진, 글을 매체로 작업하는 김재원입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릴 때부터 미술과 음악 등 여러 분야를 배우고 접했지만, 그게 지금까지 작업을 이어오게 만든 이유를 완전히 설명해주진 못할 것 같네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여전히 보여주고 싶은 것과 들려주고 싶은 것들이 있기에 계속 만들고 있는 것 같아요.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작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입주를 마친 뒤 현재는 거주 공간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어요. 사실 생활 공간과 작업 공간을 분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해 처음에는 지금의 환경이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지내다 보니 적응의 힘이 크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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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view, MMCA Residency Goyang, 2024.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MMCA Residency Goyang, 사진: 이미지줌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대체로 제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제가 겪은 사건, 마주한 사람, 그리고 신체가 놓였던 공간들이 그 바탕이 되었어요. 퀴어와 질병을 둘러싼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의 당사자성 역시 하나의 기반이 되었는데요. 하지만 경험이 곧장 영감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시간이 지난 뒤 그 기억을 다시 소환하는 과정에서 다른 이미지와 얽히며 생각이 구체화되곤 합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제 작업은 대부분 기록처럼 남긴 후, 그것들을 다시 모아 엮어보는 방식에서 출발했어요. 서술이라고 하기엔 장황하지 않고, 그렇다고 단순한 기록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그 중간 어딘가의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영상의 경우, 글(스크립트)을 먼저 쓰고 그다음 시각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흐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 과정이 저한테는 꽤 자연스러웠는데, 평소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떠오르거나 그때 그 순간에 남겨야 했던 단어나 문장 등을 수시로 기록하는 습관이 자리잡혀 있어 그랬던 것 같아요. 어쩌면 텍스트 자체도 쓴다는 것 이전에 수집과 기록하는 감각에 더 가깝게 느끼고 있어요.

다만 작업이 늘 텍스트만으로 시작되는 것은 아니에요. 이미지를 먼저 수집하거나 촬영한 뒤, 거기에서 파생되는 언어가 뒤따르는 경우도 있는데요. 사실 제 작업 전반에서 텍스트의 비중이 크다 보니, 최근에는 그것을 경계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도 하고 있어요. 이렇게 텍스트와 이미지가 서로 밀어내기도 끌어당기기도 하는 과정을 거치며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타이베이에 위치한 C-LAB에서 HIV 상태인 아시아 예술가들이 경험한 HIV/AIDS의 맥락을 해석한 전시 «Incurable Alliance»가 4월부터 6월까지 열렸어요. 본 전시에 선보인 영상 ‹유실물 Lost Belongings›(2025)을 소개하고자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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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실물 Lost Belongings›, 2025, single-channel 4K video, color, stereo sound, 10 min 57 sec, video st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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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실물 Lost Belongings›, 2025, installation view, «Incurable Alliance», Taiwan Contemporary Culture Lab (C-LAB), 2025.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Taiwan HIV Story Association, 사진: Anpis Foto.

영상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전통적인 정물화에서 볼 수 있는 사물들과, 게이 컬처에서 존재해 온 사물들을 조합해 화면 위에 구성했어요. 각 사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용되고, 훼손되거나 망가진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요. 특히 이 작업은 사회 바깥과 커뮤니티 안, 두 영역 모두에서 가시화되기 어려웠던 캠섹스(chemsex: 약물을 복용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를 경험한 게이 남성들의 풍경에 초점을 맞추기도 했어요. 구성원이 남긴, 혹은 사용한 물건들에 주목하여 기억과 질병, 나아가 특정 경험이 일상적인 사물 속에 감정과 시간이 머물러 있는 자취를 탐구했어요. 이런 흔적 속에는 절망, 상실, 수치뿐 아니라 욕망과 친밀함 같은 감정도 공존하며, 그것이 우리의 삶과 기억의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질문해 보고자 했어요. 그리고 저는 영상 속 펼쳐지는 테이블 위를 사람,  커뮤니티,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으로 여겼어요. 그렇기에 모든 사물을 하나의 출연자(Cast)로 간주했고, 실제로 크레딧에 각각의 사물 이름을 모두 표기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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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실물 Lost Belongings›, 2025, installation view, «Incurable Alliance», Taiwan Contemporary Culture Lab (C-LAB), 2025.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Taiwan HIV Story Association, 사진: Anpis Foto.

더하여 ‹유실물›은 언어적인 부분에서도 변화가 있었던 영상이에요. 이전의 작업들은 비교적 명확한 내러티브와 기승전결을 가진 형태를 취했다면, 이번에는 형식에 대한 고민 끝에 하나의 전환점으로서 다른 접근을 시도했어요. 이야기를 전개하는 대신 감정의 잔재를 중심으로 구성된 파편적인 시 구절들을 병치시켜 쌓아가는 방식을 선택했는데요. 어쩌면 명확한 ‘이야기’가 있는 형태는 아니지만, 오히려 비선형적인 언어와 이미지의 결합이 제가 붙들고자 했던 감정의 구조나 시간의 밀도에 대해 좀 더 많은 실험을 가능하게 했다고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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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없는 몸들 Trace-less Beings›, 2024, print on papers, multi-channel video, loop, dimensions variable, installation view, «어둠 아래 우리는 각자», YPC SPACE, 2024.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YPC SPACE, 사진: 이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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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없는 몸들 Trace-less Beings›, 2024, 디테일

게이 크루징(gay cruising: 게이 남성들이 성적 교류나 만남을 목적으로 공공장소나 온라인 공간을 탐색하는 행위)을 주제로 2024년 YPC SPACE에서 진행된 전시 «어둠 아래 우리는 각자»에서 선보인 두 작업도 이전의 형식과는 다르게 접근하기도 했어요. 3편의 영상과 6편의 시로 구성된 ‹흔적 없는 몸들 Trace-less Being›(2024)의 경우 텍스트와 이미지를 분리해 글과 무빙 이미지를 각각 하나의 독립적인 개체로 다루었어요. 게이 크루징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여러 시공간을 오가며 사라진 존재와 관계들을 이야기했다면, ‹남겨진 몸들 Echoing Beings›(2024)은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공간의 만남에 더 친숙한 세대의 사람들과 함께 크루징의 정의와 범주에 대해 나눈 대화들을 수집해 하나의 비공식적 장으로 만들기도 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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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몸들 Echoing Beings›, 2024, single-channel video, color, sound, 32 min 16 sec. video st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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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몸들 Echoing Beings›, 2024, single-channel video, color, sound, 32 min 16 sec, installation view, «어둠 아래 우리는 각자», YPC SPACE, 2024.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YPC SPACE, 사진: 이의록

두 사진 작업 ‹잔류 상태 Lingering State›(2025)와 ‹어쩌면 멸망을 바랐을지도 몰라 Maybe I Longed for Collapse›(2025)는 모두 식별 상태에 따른 심리적 변화를 탐구한 작업이에요. ‹잔류 상태 Lingering State›는 녹슬고 침식된 금속판의 표면을 클로즈업해 세포나 바이러스의 단면, 혹은 바다에 떠 있는 이름 모를 섬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를 만들었어요. 저는 그 흔적들을 단순한 부식이 아니라, 시간 속에 사라지지 않고 켜켜이 쌓인 감정의 결로 바라봤어요. 반면 ‹어쩌면 멸망을 바랐을지도 몰라 Maybe I Longed for Collapse›는 건물 옥상 위 말 조각상의 거대한 규모를 의도적으로 흐릿하고 불안정한 초점으로 포착해, 현실과 환상, 상징과 균열의 경계가 흔들리는 순간을 관찰하고자 했어요.

‹잔류 상태 Lingering State›, 2025, pigment print, aluminum frame, 37×55 cm (each), installation view, «Ballet with the Devil», PODIUM, 2025.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PODIUM, 사진: Lok Hang W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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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류 상태 Lingering State›, 2025, 디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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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류 상태 Lingering State›, 2025, 디테일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인가요?

사건과 장면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방식에 중점을 두고 있어요. 그 안에는 늘 시간이 얽혀 있다고 생각해요. 시간은 따로 나뉘어 있지 않고 기억의 레이어 속에서 서로 간섭하며 겹쳐지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감각은 개인의 것이면서 동시에 공동체 속에서 공유되고 확장되기도 해요. 그래서 작업을 하나의 의미로 규정하기보다 다양한 시공간 속에서 새롭게 읽히고 개입될 가능성을 지켜보려 해요.

최근 진행한 작업에서 만족하는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만들 때는 모르고 지나치거나 어쩌면 모른 척 지나쳤던 것이 비교적 일정 시간이 지나 다시 보았을 때, 그제야 만족과 불만족이 선명하게 드러나고는 해요. 그래서 사실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구분되는 부분이 있는 건 아니에요. 대신 시간이 지난 작업을 종종 다시 보며 그런 차이를 돌아보고는 해요. 다만 이런 평가는 어디까지나 제 스스로의 점검이고, 크게 연연하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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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특정 주인공 Protagonist, Undefined›, 2023, single-channel video, color, sound, 9 min 42 sec, video st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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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특정 주인공 Protagonist, Undefined›, 2023, single-channel video, color, sound, 9 min 42 sec, video still.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일상과 일이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하루의 루틴이 촘촘하게 짜여 있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엉망이 되기도 합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에 세 번은 반드시 산책을 나가야 하는 반려견 덕분에 그 구간을 중심으로 운동, 책, 영화, 여러 집안일 등을 이어가며 나름의 리듬을 지키려 하고 있어요. 특히 쉴 때는 집 안 곳곳을 청소하거나 정리를 하는데요. 머릿속이 맑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하루를 더 기분 좋게 열기도, 마무리할 수도 있더라고요.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1. 반려견 건강 관리, 어떻게 잘 돌볼 수 있을지?

2. 스트레스, 어떻게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지?

3. 몸에 근육은 대체 언제 붙는 건지?

4. 오늘 저녁은 뭐 먹지?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나요?

일상에서 마주하는 작은 균열이나 흔적, 그리고 감정을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려는 태도가 작업으로 이어져요. 그렇게 일상에서 경험한 것들이 이미지에 스며들고, 또 다른 언어나 장면으로 전환되기도 해요. 그래서 작업은 삶을 따로 재현하기보다는, 제가 살아가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결과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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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Hazy Scenes», 엘리펀트스페이스, 2023.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사진: 김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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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Hazy Scenes», 엘리펀트스페이스, 2023.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사진: 김진현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사실 뚜렷하게 겪었었는지, 또 극복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다만 뭔가 잘 안 풀릴 때는 하루나 며칠 정도 진행 중인 작업에서 살짝 거리를 두고 주변부에 집중하곤 합니다. 그 주변부라는 게 일상의 사소한 것이거나 제가 관심을 두는 다른 것들일 수도 있고, 돌고 돌아 결국 작업의 또 다른 부분일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작업 과정에서 힘듦은 항상 동반되는 것이기에 슬럼프를 떠나 그냥 하는 것이 아닐까요.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스튜디오 문제가 가장 커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재는 거주 공간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데, 곧 1년이 되어가다 보니 집인지 창고인지 헷갈리는 이곳에서 나와 이제는 안정된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작업 과정에 있어 항상 저 자신에게 많은 엄격함과 의심을 갖는 편이에요. 그러다 보니 결국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비워둘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데요. 때로는 부재와 공백이 어떤 것보다 강하게 발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작업에서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한 번의 작업으로 어떠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질문을 이어가며 다시 묻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기기도 해요. 작업이 언제나 완결이 아니라 시작점에 가깝다고 생각하면서 그 과정에서 언어와 이미지가 계속 새롭게 맞물리기를 바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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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ance›, 2022, screening view, «Day With(out) Art 2022: Being & Belongings»,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2022.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Visual AIDS, 사진; Filip Wolak

‹Nuance›, 2022, single-channel video, color, sound, 6 min 13 sec. Commissioned by Visual AIDS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좋아하는 것을 평생 마주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혹은 그러길 원한다면 그 대상과의 관계도 여러 얼굴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때로는 과한 애정을 쏟기도 하고, 가끔은 지독하게 다투어보기도 하면서요. 사람 간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느껴요. 저는 이런 과정을 통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그 이해가 결국 지속할 힘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아, 작업이랑 어떻게 다투냐고요?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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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HIV Science as Art», Metro Arts, 2023.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HIV Science as Art, 사진: Louis 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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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 작업) ‹어제 흐른 물은 내일 흐르지 않아›, 2019, installation view, «Flare», WESS, 2023, 사진: 심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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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작업) ‹침묵으로 생긴 여백 Blank Space Caused by Silence›, 2020, installation view, «After That Blue», Fragment Gallery, 2023.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Fragment Gallery.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솔직하고 맛있는 창작자. 혹은 사람?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해가 갈수록 미래를 꿈꾼다는 일이 점점 멀게만 느껴져요. 어쩌면 이상을 그려보는 대신 지금의 상황과 관계를 자주 돌아보게 되곤 하는데요. 몇 년 전, 한 친구가 “좋은 삶과 우정,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라고 본인을 소개했던 말이 가끔 떠오르곤 하는데요. 현재로서는 그저 건강하게, 좋은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작업을 이어가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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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김재원 (@etc.1)은 영상, 사진, 언어를 매체로 가시성과 기억, 그리고 시공간적 경험이 교차하는 지점을 탐구한다. 그의 작업은 퀴어와 HIV/AIDS를 둘러싼 사회적, 정서적 맥락 속에서 질병 이후 남겨진 잔재와 보이지 않는 관계를 매개로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이는 혼재된 시간성을 시각화한다.

개인전으로는 «Hazy Scenes»(엘리펀트스페이스, 2023), «로맨틱 판타지»(공간사일삼, 2021) 등을 열었고,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서울, 2024), 휘트니 미술관(뉴욕, 2022), 필라델피아 미술관(필라델피아, 2022), 서울국제프라이드영화제(서울, 2021) 등에서 작품이 상영되었다. 이외에도 C-LAB(타이베이, 2025), PODIUM(홍콩, 2025), YPC SPACE(서울, 2024), WESS(서울, 2023),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서울, 2023), Asian Arts Initiative (필라델피아, 2023), 울산시립미술관(울산, 2022) 등에서 열린 전시에 참여했으며, 2024년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풍문으로만 들었던: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BA]섬네일(0602)
Film

[리뷰]_전주국제영화제_1

Review

비애티튜드가 주목하는 요즘 ‘무엇’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난 2015년부터 관심의 더듬이가 파르르 떨렸지만 쉽게 인연을 맺지 못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매년 열리는 ‘전주국제영화제’입니다. 특히 그래픽 디자이너 100인이 참가하는 ‘100 Films 100 Posters’ 행사가 큰 역할을 했지요. 영화제가 열리는 시즌이 돌아오면 참여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린 포스터가 제 인스타그램을 도배했거든요. 그러던 중 올해는 기필코 직접 가봐야겠다, 마음을 굳게 먹고 지난 5월 드디어 그곳에 다녀왔습니다.

당일치기나 다름없는 1박 2일 일정이었는데요. 영화제의 특성을 미리 제대로 파악했다면 좀 더 길게 체류했을 텐데, 아쉬움이 마구 드네요. 영화제 뉴비로서 겪은 전주국제영화제의 첫인상, 돌아다니며 느낀 감상과 깨달음을 한 줌의 칭찬, 한 줌의 후회와 섞어 글로 버무려 보았습니다. 혹시 아나요, 제 실패를 양분 삼아 내년에는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질는지요. 평소 전주국제영화제를 눈여겨보신 분이라면 BE(ATTITUDE) 웹 아티클에서 눈물 어린 노하우를 습득해 보세요.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공식 무빙 포스터

드디어 가봤다. 지난 10년 동안 주기적으로 소셜미디어를 도배하던 ‘그곳’에. 이제는 조금만 움직여도 체력이 쭉쭉 증발하는 몸을 이끌고 마침내 방문에 성공했다. 서울에서 2시간 40분이 걸리는 곳, 머릿속으로는 이미 몇 번은 가본 듯한 소문 속 행사. 매년 전주에서 열리는 ‘전주국제영화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개인적으로 영화와는 통 인연이 없는 편이다. 주로 활동하는 영역이 시각 예술이다 보니 전시가 훨씬 편하기도 하거니와, 가만히 앉아서 무언가를 조용히 보면 잠 귀신이 찾아오는 탓에 평소보다 2~3배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20대 때는 교양을 키운다는 목적으로 찰리 채플린, 앨프리드 히치콕 등 클래식이라 불릴 만한 감독의 명작들을 틈나는 대로 찾아보곤 했지만, 내겐 언제나 모니터 속 ‘시작’과 ‘중지’라는 강력한 버튼이 있었다. 반면,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극장에서 유유히 흐르는 영화를 멀뚱멀뚱 바라볼 때는 잠의 여신이 굉장한 축복을 뿌려댔다. 서서히 퓨즈가 끊겼다가 정신을 다시 차리면 엔딩 크레딧이 장대하게 올라가는 마법 같은 시간 여행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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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제미나이가 친절히 만들어준 스폰지밥 스타일의 ‘잠의 여신’과 정신 못 차리는 ‘나’의 모습.

열정으로 똘똘 뭉친 시네필cinephile과 발권 경쟁을 벌이는 영화제는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왔다.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 프레스 배지를 신청하고 어영부영 다녀오긴 했지만, 기사를 작성하지 못했다. 영화제를 소개하기엔 이미 경험이 풍부한 애호가들이 가득했고, 프리미어 딱지가 붙은 영화 리뷰를 쓰기엔 전문성이 부족했다.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북돋우며 감독과의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모종의 사정으로 기사 발행이 취소되면서 되려 ‘마상’까지 입었다. 에디터로서 영화를 다룰 때 트라우마가 생긴 계기였다.

 

그래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활약하는 ‘100 Films 100 Posters’ 관련 포스팅이 아무리 내 소셜미디어를 도배해도, 정작 그 현장인 전주국제영화제를 직접 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술 영화, 실험 영화, 독립 영화, 다큐멘터리 영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영화제의 강점은 인터뷰, 리뷰뿐 아니라 영화제 현장을 소개하는 일조차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전주국제영화제는 내게 일종의 ‘그림의 떡’이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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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제미나이에 의뢰한 ‘그림의 떡’ 일러스트레이션.

사실 지금 전주국제영화제에 대한 글을 쓰면서, 한 줌의 용기와 함께하고 있다. 그동안 외면하던 곳에 직접 발걸음하는 일도 낯선 도전이었기에, 영화제를 알뜰살뜰 잘 즐겼다고 당당히 말하기는 조금 곤란하다. 소문으로만 듣던 행사에 늦게나마 가봤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는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러니 5월 황금연휴에 맞춰 장중하게 펼쳐진 영화제 중 하루를 기록한 글이 혹여나 어수룩하게 보일지라도 이해와 양해를 슬쩍 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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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rry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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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관련 현수막 © Harry Jun

처음 겪은 전주국제영화제는 상상과 꽤나 다르게 전개됐다. 여러 이유를 꼽을 수 있겠으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무지에서 비롯한 오만이었다. 이번 방문은 4월 30일 밤 서울에서 시작해 5월 2일 새벽 서울에서 끝났다. 4월 30일이 개막식이었으니, 결국 개막 2일 차인 5월 1일만 겪은 셈이다. 지금도 뼈저리게 후회하는 부분이 바로 당일치기에 가까운 스케줄이다. 영화제가 성대하면 하루만 경험해도 에센스를 뽑을 수 있다고 여긴 게 오판이었다.

영화제는 정밀하게 짠 각본과도 같다. 전체 기간을 염두에 두고 완급조절을 하며 수많은 영화를 상영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즉 사무국에서 의도한 영화제의 참맛을 느끼려면 장기 체류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예상하건대 적어도 3일 정도 머물러야 만족스러움이 차오를 것 같다. 이건 개인의 성향과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혹시 전주국제영화제처럼 일주일 넘게 지속하는 장기 영화제를 경험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일을 망설이지 말자. 나 또한 출발 전에 주변에 있는 시네필에게 상의하지 않은 어리석음에 가슴을 쳤다. 허둥지둥거리며 시간이 어디로 어떻게 증발하는지 당최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유경험자의 지고지순한 충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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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공력이 들어간 상영 시간표.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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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공력이 들어간 상영 시간표.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이번 영화제에서는 총 57개국 224편의 영화를 상영했다. 이 정보를 처음 알았을 때, (정말 무식하게도) 하루에 수없이 많은 영화를 볼 수 있는, 말 그대로 시네마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상영 시간표를 분석해 보니, 하루에 영화를 상영하는 주요 시간대는 아침, 오후, 저녁, 심야 정도로 나뉘었고, 여러 앵커 극장과 그에 소속된 다양한 상영관에서 해당일에 배정된 영화를 사이좋게 나누어 상영하는 형태였다. 결국 분신술을 쓰지 않는 한, 이론적으로는 하루 최대 4편 정도를 볼 수 있는 셈인데, 자기가 원하는 영화로만 스케줄을 채우는 건 꿈결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아주 열린 마음으로 상영작을 예매한 나조차도 결과적으로 2편에 그쳤으니, 보수적으로 잡아 하루에 2편만 제대로 보아도 충분히 성공이라 말할 수 있을 듯싶다.

나는 프레스 배지에 기대어 리뷰에 필요한 영화를 온라인 스크리닝 서비스을 통해 간단하게나마 추후 감상할 수 있었다. 이는 일반 대중에게 해당하지 않는 매우 특수한 상황 아니던가. 그러니 영화제를 충분히 즐기고 싶은 사람은 겸허한 마음으로 철저한 사전 조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무슨 영화를 상영하는지, 시간은 언제인지 알아보며 자신만의 스케줄을 짜고, 예매까지 성공해야 기본적인 준비가 끝난다.

참고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는 현장 예매 없이 사전 예매로만 진행했는데, 최종 좌석 점유율이 81.6%를 찍었다. 총 586회 차 상영 중 448회 차가 매진됐으니, 그 열기가 엄청나다. 7만 명 이상이 찾는 영화제에서 패닉이 오지 않으려면, 자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인파로 넘치는 영화의거리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상영관에도 사람이 가득하다.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사진 찍으러 대기 중인 사람들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의외의 복병을 하나 더 꼽는다면 날씨랄까?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행사에서 날씨가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다가 된통 당한 주인공이 바로 여기 있다. 영화제는 영화에 관한 행사를 집약한 축제이고, 축제란 결코 날씨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보도 자료 속 방문객의 밝고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싱그럽고 쨍쨍한 날씨가 차지하는 지분은 막강하다. 실제 내가 들린 5월 1일은 아침부터 밤까지 비가 주룩주룩 내린 탓에 영화의거리를 가득 메운 현수막이 바람에 후루룩 날리며 비가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어둡고 침침한 디스토피아를 연상시켰다. 그동안 오매불망 고대했던 영화제의 첫인상치곤 고약했달까. 무엇보다 날씨가 과하게 좋지 않으면 자칫 영화제에서 준비한 각종 행사에 심각한 차질이 생긴다는 게 진짜 문제다.

개막 2일 차 비 오는 날의 흉흉한 영화의거리 © Harry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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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 2일 차 비 오는 날의 흉흉한 영화의거리 © Harry Jun

영화제에서는 순수하게 영화 상영만 하지 않는다. 여러 장소에서 다양한 행사를 주최하고, 야외무대 또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비, 돌풍, 황사 등 자연재해는 심술 궂은 불청객이다. 이번에는 다행히 폭우가 쏟아지지 않아서 홀딱 젖는 일은 없었지만, 축축한 분위기 때문인지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은 열정이 스르륵 사그라들었다. 미리 체크해놨던 야외 행사, 영화제의 중심부인 영화의거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움직일 동력이 증발했달까.

그런 와중에 전주국제영화제의 강점을 오히려 제대로 체감할 수 있었으니, 바로 최적화된 동선이었다. 앵커 시설이 영화의거리에 몰려있어 도보 이동이 무척 수월했고, 주변에 카페와 음식점 또한 많아서 사람들 사이에 당황한 기색이 크지 않았다. 만약 주요 극장 간 거리가 멀었다면 오가는 교통편을 이용하는 순간부터 악몽이 시작되었을지도? 가는 날이 장날이었는지, 나중에 올라온 보도 사진을 보니 날씨가 맑고 쨍쨍했다. 황금연휴 때 기획했던 각종 행사가 잘 이루어진 것 같아서, 내가 다 뿌듯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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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도로 보면 앵커 시설들이 정말 코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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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날씨가 좋아진 후의 전주국제영화제 풍경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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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 이벤트와 공연도 성공적이다.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앞서 말한 장기 체류에 대해 첨언하자면, 도시의 인프라 또한 큰 역할을 담당한다. 방문객이 머물만한 숙소가 많아야 하고, 도시에서 즐길 수 있는 먹거리, 볼거리 또한 충분해야 전체적인 만족도가 높은 건 상식이다. 그런 면에서 전주국제영화제는 태생부터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 영화의거리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이동하면, 그 유명한 ‘전주한옥마을’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호텔 말고도 머물 수 있는 적당한 숙소, 이색적인 숙소가 충분하고 다른 도시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경험과 먹부림이 제대로 발휘된다는 뜻이니, 장기 체류에 대한 심적 저항이 낮아지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말은 1박 2일이지만 실제로는 단 하루만 머물렀던 나는 영화 보고 전시 보고 여기저기 움직이느라 식사다운 식사를 단 한 끼도 즐기지 못해서 더욱더 아쉬웠다. 예전 «씨네21»에서 전주국제영화제 출장을 앞둔 기자들 눈이 반짝인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갸우뚱했는데, 이제는 온전히 통감한다. 먹다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전주에서 맛 탐험을 하지 않고 영화만 보는 건 아무리 씨네필이라도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을까. 맛집 조사까지 끝내야 전주국제영화제를 즐길 기본적인 준비를 마쳤다고 할 수 있겠다.

인스타그램에 끝없이 나오는 전주 먹거리 리스트… © Harry Jun

아, 맞다. 전주국제영화제에 관심을 두게 된 결정적 계기인 ‘100 Films 100 Posters’를 실견한 소감을 빠뜨릴 수 없지. 그해의 상영작 중 100편을 뽑아 그래픽 디자이너 100명이 영화에 대한 포스터를 제작해 전시하는 행사는 2015년 시작해 올해로 11년 차를 맞으며 전주국제영화제의 상징적인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작년 10주년을 기념해 1000점의 포스터를 공개할 만큼 아카이빙의 힘 또한 놀랄 정도인데, 올해부터 ‘100 Films 100 Posters’의 운영 주체가 바뀌면서 행사가 비단 전시뿐 아니라 토크, 포럼, 워크숍, 부대 전시까지 여러 갈래로 확장됐다.

즉 ‘행사 속 행사’처럼 자율적으로 돌아가는 부분이 강화된 셈인데, 다다익선이란 측면에서는 환영할 만하지만, 막상 당사자 입장에서는 꽤나 고민거리다. 영화 관람과 ‘100 Films 100 Posters’ 관람 중 무엇을 우선순위로 두느냐에 따라 다른 이보다 포기할 게 많아지고, 셈법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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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Films 100 Posters’ 공식 포스터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예를 들어, 나는 개막 2일 차에 방문한 터라 전시 이외엔 선택지가 없었지만, 영화제 중반에 방문하는 이들은 전시를 제외하고도 포럼과 토크, 워크숍 등의 선택지가 다양하게 존재했다. 만일 자기가 정말 보고 싶은 영화의 상영 시간과 디자인 관련 행사가 겹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개인이 부여하는 가치에 따라 선택하기 나름이지만, 풍요 속의 빈곤이 생길 수 있다.

전시만 하더라도, 시간 관계상 포스터 100장을 모아 놓은 메인 전시에만 집중한 나와 달리, 여유가 있다면 다른 전시에도 분명 관심이 갈 터. 총 네 곳의 전시장에서 산발적으로 열리는 5개의 전시는 그 거리가 꽤나 떨어져 있고, 그 규모 또한 관람 하나만을 위해 움직이기에는 애매한 느낌이었다. 전주시립인후도서관, 완판본문화관 등 해당 장소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겠지만, 작은 전시를 보기 위해 길게는 왕복 1시간 거리를 오가는 일은 영화제를 찾은 이에게 상영작보다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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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립인후도서관에서 열린 «포스터와 포스터» 전시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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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립인후도서관에서 열린 «포스터와 포스터» 전시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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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판본문화관에서 열린 «2026 미리보기: 극장 노스탤지어» 전시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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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판본문화관에서 열린 «2026 미리보기: 극장 노스탤지어» 전시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메인 전시를 소개하는 포스터의 불명확한 정보 표기가 혼란을 가중시키는 면도 존재했다. 전시 장소로 팔복예술공장, 영화의거리, 문화공판장 작당을 표기했는데, 실제 확인해 보니 영화의거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시 형태가 아니었다. 거대한 현수막에 포스터를 줄줄이 인쇄해 허공에서 이미지를 보여주는 방식은 거리의 분위기를 띄우는 데코레이션에 가까웠다.

100장의 포스터를 보여주는 행사의 근본 전시는 팔복예술공장과 문화공판장 작당, 두 곳에서 동시에 진행됐는데, 본진으로 추정되는 팔복예술공장 쪽이 궁금해서 택시까지 탔고 갔다가 다소 허무함을 느꼈다. 벽에 설치한 포스터가 시야에서 너무 벗어나 디테일을 확인하기 어려웠고, 종이가 들뜬 부분이 계속 눈에 거슬린 점이 주효했다. 예전부터 유지해 온 포맷이라 예상은 했지만, 직접 두 눈으로 경험할 때 느끼는 아쉬움이 존재하더라. 추후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사진 속 문화공판장 작당의 디스플레이는 훨씬 직관적이고 휴먼 스케일에 적합했는데, 영화의거리와도 거리 면에서 훨씬 가까웠다. 내년에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포스터 전시를 보러 간다면, 1순위로 문화공판장 작당을 추천하고 싶다.

팔복예술공장에서 열린 포스터 전시 전경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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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의 디테일을 제대로 보기 힘든 디스플레이였다.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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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포스터를 구매할 수 있는 게 메인 전시의 특징이다.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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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판장 작당의 디스플레이는 딱 보기에도 휴먼 스케일에 합당했다.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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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판장 작당에서의 포스터 전시 전경.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이번 여정을 준비하며 처음 안 사실 하나. 부산국제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더불어 전주국제영화제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영화제 중 하나로 꼽힌다는 것!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비주류 영화, 예술 영화, 독립 영화를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상대적으로 규모가 더 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화하지 못하는 작품 또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이기에 예술 영화를 좋아하는 시네필과 창작자, 평론가에게 큰 사랑을 받는다고. 그동안 ‘100 Films 100 Posters’라는 디자인 행사를 꾸리는 독특한 영화제로만 생각한 무지함에 살짝 부끄러웠는데, 실제 관람한 영화가 예상보다 무척 좋았기에 민망함이 더해졌다. 내가 선택한 영화는 ‹백현진쑈 문명의 끝›, ‹3670›, ‹핑크문›까지 총 3편으로, 이 중 ‹3670›은 티켓 매진 때문에 추후 온라인 스크리닝으로 접했고, 나머지 두 편은 현장에서 관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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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로 출력한 5월 1일 영화 티켓 © Harry Jun

음악가, 화가, 연기자, 시인 등 다재다능하기로 유명한 예술가 백현진이 연극 연출에 도전한 ‹백현진쑈: 공개방송›의 공연 기록을 감독이자 예술가인 박경근이 해체하고 추가로 촬영한 장면을 집어넣어 어디까지가 진짜 공연인지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던 ‹백현진쑈 문명의 끝›은 여러 낯익은 인물의 등장과 기묘한 장면의 영상만으로도 굉장히 흥미로웠다. ‹3670›은 극영화의 뼈대를 이루는 플롯이 매우 특별했다. 친형제 같은 탈북자 커뮤니티와 동갑내기 게이 커뮤니티 사이를 오가는 27살 탈북 게이 청년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상처를 입고 이를 극복하는 방식을 흡입력 있게 보여준다. 특히 오프라인과 온라인에 기반해 움직이는 각기 다른 소수자들의 이야기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번 영화제에서 과연 4관왕을 차지할 만했다. ‹핑크문›은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 불리는 윤석남 작가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제도권 교육을 받지 않고 마흔의 나이에 그림을 시작한 그가 40여 년간 쏟아냈던 에너지의 흔적을 반추하고, 지금도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작업에 몰두하는 열정에 매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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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진쑈 문명의 끝› 스틸컷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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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0› 스틸컷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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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문› 스틸컷 © 제공: 전주국제영화제

특히 ‹핑크문›은 예정에 없던 깜짝 GV를 진행하며 윤석남 작가와 그의 조카이자 이번 다큐멘터리 연출을 맡은 감독이 무대 중앙에 앉아 관객과 질문을 주고받았는데, 많은 여성이 창작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며 진지하게 상의하는 장면이 인상에 남았다. GV가 끝난 후에도 작가를 둘러싸고 사인을 받으며 옹기종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마치 록스타를 보는 듯했다. 80세가 훌쩍 넘은 나이에 순전한 웃음으로 대중을 대하는 작가의 모습을 마주하니 나도 모르게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픈 욕망이 생겼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제가 잠시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비록 스마트폰으로 급하게 찍었지만, 한평생 치열하게 작업하고 삶을 개척한 예술가의 모습이 완연했다. 어쩌면 전주국제영화제가 오늘 하루 고생했다며 내게 허락한 깜짝선물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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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문› 상영 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 © Harry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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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얻은 깜짝선물 1호, 윤석남 작가의 포트레이트 © Harry 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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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rry Jun

영화제가 더 많은 사람의 참여와 관심과 인기와 특색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일을 도모하더라도, 그 중심에는 결국 영화가 있다. 더 좋은 영화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 알려지지 않은 영화를 공유하고 싶은 마음, 일정한 주제로 엮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영화의 힘을 믿고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모이고 모여 옥석을 가리는 노력과 열정으로 영화제를 이끌어 간다. 그 집약체인 영화제 상영작 대부분이 실은 국내 극장이나 OTT를 통해 다시 서비스할 가능성이 희미하고, 그렇기에 지금 마주하는 기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은 매년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무르는 동기로 충분해 보인다.

‘인생을 바꾸는 예술’, ‘인생을 바꾸는 영화’라는 수식은 뻔하다. 그러나 조약돌을 호수에 던질 때 일어나는 파장처럼, 우리가 접한 무언가는 어떤 형태와 의미로든 결국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어두운 극장에서 영화를 통해 내면으로 침잠하며 조금씩 성장할 수 있다면, 일주일 넘게 이어지는 전주국제영화제야말로 편견의 껍질을 부수고, 감정의 파고를 넘나드는 여정의 한복판으로 제격이다. 마음속 고요한 호수를 흔드는 퐁-당 혹은 풍-덩의 장으로.

덧.
전라북도에 위치한 전주는 지리적 위치가 약간 애매하다. 광주처럼 먼 것도 아니고 대전처럼 가깝지도 않다. KTX가 다니지만, 매일 운행하는 직행 편이 5회에 불과하다. 환승 편을 포함하면 당연히 훨씬 많아지지만, 열차 환승을 꺼리는 이에겐 1시간 50분이라는 소요 시간이 그리 매력적으로 와닿지 않을 테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우리 기억에서 어느덧 사라진 고속버스를 이용하면 예상외의 만족을 얻을 수 있다.

고속버스는 차편이 훨씬 다양하고 시간대도 넓으며, 무엇보다 얼마 전 외국인 유튜버가 환호했던 전설의 프리미엄 버스가 존재한다. 소요 시간은 2시간 40분으로 KTX에 비해 50분이 더 길지만, 비행기의 비즈니스 클래스처럼 의자를 완전히 뒤로 젖힌 채 편하게 갈 수 있고, 개인별로 커튼을 칠 수 있어 사생활 보호도 가능하다. 요금마저 KTX보다 20% 저렴하다. 야밤에 움직이는 터라 할 수 없이 고속버스를 이용했던 나는 프리미엄 버스에서 꿀잠을 자며 그 매력에 흠뻑 빠져버렸다. 자차로 가지 않는 분은 KTX 말고 프리미엄 버스를 이용해 보시라. 서울에서 출발한다면 센트럴시티와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의 먹거리 인프라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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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전종현(@harry.jun)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하며,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등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과 편집위원을 지냈고, 2021년부터 2023년까지 기아글로벌디자인센터에서 발행한 «기아 디자인 매거진» 창간 작업과 콘텐츠를 총괄했다. 현재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 겸 아트 칼럼니스트로 «조선일보» «디에디트» 등 다양한 매체에 기고 중이다.

6면체 주사위를 던지며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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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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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멜트미러MELTMIRROR는 게임 개발과 영상 연출을 병행하는 작업자입니다. 아, 그런데 막상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하기 난감한 부분이 있네요. 이번 인터뷰에서 그는 TRPG 게임의 주사위🎲 굴림 형식을 빌려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응했거든요. 예컨대, 단순한 작업자가 아니라 ① 방황하는 ② 반복되는 ③ 1년을 기록하는 ④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⑤ 비교적 성실한 ⑥ 매일 1권의 만화책을 읽는 삶을 영위하는 작업자랍니다. 작년 에스파aespa의 ‘WHIPLASH’ MV를 연출한 주인공이자, 밴드 실리카겔SILICA GEL의 오랜 친구로서 오랜 친구로서 MV 작업을 도맡은 이로 잘 알려진 그는 좋은 영상이란 ① 내러티브 없이 나열된 이미지 자체로 ② 강박적인 편집과 성실한 수면으로 ③ 주기적으로 모니터를 멀리서 쳐다보며 ④ 나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행운과 함께 ⑤ 절묘한 순간에 작업을 멈추며 ⑥ 바닥에 떨어진 고양이의 한 가닥 수염처럼 완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동시에 끝없는 강박과 집요함은 작업에만 쏟아내고, 철저한 계획만큼이나 변칙과 우연을 활용하는 것을 중시한답니다. 충분하고, 완벽하고, 후회 없는 수면은 필수고요. 특정 시기마다 자신의 재능과 속도를 잘 관찰했던 작업자로 기억되고 싶은 멜트미러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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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G frame›, 2024. 게임&그래픽 디자인: MELTMIRROR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작업자 ‘멜트미러MELTMIRROR’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답변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제가 주로 작업하는 TRPG 게임의 주사위 굴림 형식을 빌리기로 했어요. 6면체 주사위를 던지며 인터뷰를 확인해 주시면 감사합니다. 저는 현재 게임 개발과 영상 연출을 병행하며, (🎲) 삶을 살고 있습니다.

① 방황하는  ② 반복되는  ③ 1년을 기록하는  ④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⑤ 비교적 성실한  ⑥ 매일 1권의 만화책을 읽는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특별한 계기는 없어요. 동양화를 전공하던 대학생 시절부터 생각의 속도와 실행의 속도가 일치하는 작업을 지속하는 게 목표였는데요. 삶의 어떤 분기마다 생각과 실행의 속도가 어긋나는 순간이 찾아왔고, 그때마다 회화에서 영상으로, 그리고 최근엔 영상에서 게임으로 매체를 바꿔가며 작업을 이어가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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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G frame›, 2024. 게임&그래픽 디자인: MELTMI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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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G frame›, 2024. 게임&그래픽 디자인: MELTMI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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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G frame›, 2024. 게임&그래픽 디자인: MELTMIRROR

작업 공간에 대해서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삼청동 인근의 신혼집을 주거 겸 작업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답니다. 산책하기 좋은 평온하고 목가적인 동네에요. 교통은 꽤나 불편하지만, 한 번 터를 잡으면 좀처럼 떠나기 힘든 매력이 있어요. 특히, (🎲) 풍경을 자주 만날 수 있어서 좋습니다.

①② 길 고양이가 하품하는  ③④ 비 온 뒤의 인왕산  ⑤⑥ 수상한 단체의 명함이 흩뿌려진 골목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정해진 일상에서 살짝 다른 선택을 할 때 많은 영감을 얻는 편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영감이라기보다 시각적 파편의 수집에 가까워요. 이를 파일처럼 따로 저장해 두었다가 작업을 진행할 때 연결 지어 사용합니다. 얼마 전에 매일 오른쪽으로 둘러보던 길을 왼쪽부터 둘러보며 반대로 걸을 일이 있었는데요. 생각보다 굉장히 낯설고 새롭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머릿속 지도가 완전히 뒤바뀐 기분이 들어서 좋았죠. 가장 최근에는 (🎲) 보며 재미있는 영감을 얻었습니다.

① 포기가 빠른 아버지의 모습을  ② 인쇄가 잘못되었지만 되려 매력적인 룰북을  ③ 구로사와 기요시(黒沢清)가 과거에 만든 단편을  ④ 10년 전에 찍힌 나 자신의 사진을  ⑤ 욕을 배운 적이 없는 갓난아이의 분노 영상을  ⑥ 꽤 감동적인 문구가 쓰인 스팸 메시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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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G frame›, 2024. 게임&그래픽 디자인: MELTMI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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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G frame›, 2024. 게임&그래픽 디자인: MELTMIRROR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게임을 제작할 땐 조마조마하고 괴롭게 작업합니다. 게임에는 아직 알지 못하는 감각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결국 이번에도 조금 아쉬운 결과물을 완성하겠지…’ 하면서 조금 진 빠진 마음으로 작업에 임해요. 영상 작업도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하지만 컷을 이어 붙일 때 확신이 드는 순간이 조금 더 있을 뿐이죠. 그리고 영상을 다룰 때는 평소보다 조금 더 단호해질 수 있어서 좋답니다.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지난 2024년엔 꽤 다양한 영상 작업을 제작했어요. 그중 대표작으로는 뮤지션 ‘휘HWI’와 함께 공동으로 연출한 ‘너의 전생’ MV, 뮤지션 ‘리비자Leevisa’의 ‘Keystone’ MV, 그리고 K-팝 아티스트 ‘에스파aespa’의 ‘WHIPLASH’ MV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HWI ‘너의 전생’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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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I ‘너의 전생’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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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I ‘너의 전생’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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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I ‘너의 전생’ MV, 2024

Leevisa ‘Keystone’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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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visa ‘Keystone’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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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visa ‘Keystone’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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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visa ‘Keystone’ MV, 2024

‘너의 전생’은 저의 첫 공동 연출 작업이자 작업 전반의 프로세스를 만족스럽게 컨트롤할 수 있어서 흡족했고요. ‘Keystone’은 제 첫 해외 올 로케이션 작업이면서 제작의 모든 과정을 홀로 수행한 첫 번째 작업이라서 의미가 깊었어요. ‘WHIPLASH’는 ‘엑소EXO’의 ‘파워Power’ 이후 7년 만에 복귀한(?) 아이돌의 뮤직비디오라는 점에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다만, “제 본업은 게임 개발자입니다”라고 늘상 주장하는 자기소개가 무색하게, 2024년에는 게임 개발이 미흡했던 터라… 2025년에는 개발자로서 더 분발할 예정입니다.

aespa ‘WHIPLASH’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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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spa ‘WHIPLASH’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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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spa ‘WHIPLASH’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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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spa ‘WHIPLASH’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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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spa ‘WHIPLASH’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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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spa ‘WHIPLASH’ MV, 2024

최근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좋은 영상은 (🎲) 완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런 부분에 최선을 다하면서, 더불어 좋은 운동감의 연쇄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어요.

① 내러티브 없이 나열된 이미지 자체로  ② 강박적인 편집과 성실한 수면으로  ③ 주기적으로 모니터를 멀리서 쳐다보며  ④ 나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행운과 함께  ⑤ 절묘한 순간에 작업을 멈추며  ⑥ 바닥에 떨어진 고양이의 한 가닥 수염처럼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궁금합니다.

작업의 어느 지점을 갑자기 들춰내도 균일한 (🎲)이 유지될 때 만족을 느껴요. 반면 체력과 건강 관리를 소홀히 해 흐려진 집중력이 작업에 반영되면 매우 슬픕니다. 최근 작업에서 특정 부분을 콕 집어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을 이야기하긴 어려워요… 만족과 불만족의 위치는 매번 달라지거든요.

①②③④⑤⑥ 긴장감  ⑦ 슬픔

SILICA GEL ‘APEX’ MV,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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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ICA GEL ‘APEX’ MV,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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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ICA GEL ‘APEX’ MV,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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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ICA GEL ‘APEX’ MV,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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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ICA GEL ‘APEX’ MV, 2023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직장인인 바깥양반(와이프)의 기상 패턴과 동일하게 아침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정오 12시가 될 때까지 딱 세 가지 업무를 성취하기 위한 하루의 계획을 세워요. 이후 오후 7시까지 업무를 진행하는데요. 평균적으로 두 가지 업무를 성취하는 것 같습니다. 업무가 촘촘할 때는 집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느슨한 시기에는 가본 적 없는 (🎲)으로 이동해서 업무를 마치고 귀가해요.

①② 인기 없는 프랜차이즈 식당  ③④ 이름이 특이한 지하철역  ⑤⑥ 알라딘 중고서점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영상과 게임, 두 가지 경우로 나눠서 말해볼게요. 먼저 영상에서는 음악의 힘에 기댄 작업 구상을 멈추는 것, 단호함을 내려놓고 표현 방식의 폭을 넓히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영상 작업을 할 때 제 단호함은 분명 장점이지만, 요즘은 정체감으로 다가올 때가 많아요. 고민 없이 던지는 습관처럼 굳어버린 것 같아서 부끄럽습니다.

게임에서는 모든 플레이어가 자신만의 ‘컵cup’을 들고 와 컵의 역사에 관한 전 우주적 망상을 펼치는 TRPG를 개발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하지만 좀처럼 구상 단계를 넘어서기가 어렵네요.

아, 더불어 최근에 구매한 소니SONY의 신형 캠코더 PXW-Z200에 적응하기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다.

SILICA GEL ‘NO PAIN’ MV,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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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ICA GEL ‘NO PAIN’ MV,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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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ICA GEL ‘NO PAIN’ MV,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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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ICA GEL ‘NO PAIN’ MV, 2022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마음속에 간직한 문장은 ‘포차코Pochacco의 키는 바나나 아이스크림 라지 사이즈 컵 4개’인데 말이죠… 손끝은 늘 날카롭고 강박적입니다.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사실 2022년 이후 쭈욱 슬럼프 상태에 빠져 있어서 해답을 찾지 못했어요. 아직도 긴 터널의 (🎲)을 걷고 있는 것 같아요.

①② 시작점  ③④ 정중앙  ⑤⑥ 루프 속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나이와 함께 찾아온 건강 문제입니다. 작업을 진행할 때마다 건강이 깎여 나가는 걸 느껴요. 그리고 사고방식이 굳어져 가네요. 자꾸 표현의 해답을 내리려고 해요.

SILICA GEL ‘Mercurial’ MV,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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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ICA GEL ‘Mercurial’ MV,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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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ICA GEL ‘Mercurial’ MV,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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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ICA GEL ‘Mercurial’ MV,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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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ICA GEL ‘Mercurial’ MV,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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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ICA GEL ‘Mercurial’ MV, 2023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끝없는 강박과 집요함은 작업에만 쏟아낼 것, 철저한 계획만큼이나 변칙과 우연을 활용할 것, 결과를 책임질 것. 그리고 언제나 (🎲).

①② 충분한 수면  ③④ 완벽한 수면  ⑤⑥ 후회 없는 수면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제가 누군가에게 노하우를 주기엔 너무나 부족한 사람입니다…😭

League of Legends × SAN SAN GEAR ‘Pivotal Moment’ Campaign Teaser, 2024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특정 매체의 작업으로 한정되어 기억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특정 시기마다 자신의 재능과 속도를 잘 관찰했던 작업자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 되기 전에 게임 개발자로서 좋은 게임 하나를 발매하는 것입니다. 게임의 무수한 가능성을 시각적인 아름다움에만 묶어두지 않는 간결한 메커니즘을 개발하고 싶구요. 더불어… 바쁘지 않고, 밥을 꼭꼭 씹어먹고, 고양이 밥 주는 시간을 잘 챙기는 작업자로 살아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어요. 사랑은 이미 얻었습니다…!

①② 2027년이  ③ 초예술 토머슨이  ④ 멋쩍게 웃는 관객이  ⑤ 소멸된 영혼이  ⑥ 신체를 포기한 데이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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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멜트미러MELTMIRROR(@meltmirror)는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게임 개발자이자 틈틈이 영상을 연출하고 편집하는 작업자다. 요즘에는 같은 질문을 받아도 조금씩 다른 대답을 전하며 스스로의 모양을 알아가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일을 더 좋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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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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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애니청 작가는 사진과 영상을 기반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어요. 특히 여러 뮤지션들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MV는 그의 개성이 한껏 묻어나면서도 아티스트의 개성이 두드러지게 돕는답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인상 깊은 날이나 사람을 늘 간직하길 원하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찍게 된 사진인지라, 그는 작업에서 피사체와 쌓는 유대감과 친밀감을 중시해요. 결과물에 큰 차이가 없더라도 거리감이 만들어내는 애정의 온도가 다르기 때문인데요. 그는 말합니다. “그냥 해라. 해서 안 되더라도, 일단 해봐야 안 할 수 있다.” 제일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 다른 좋아하는 일을 조금씩 버리는 것도 괜찮다고 조언하는 애니청 작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그의 이모저모를 아티클에서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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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nny ‹Ours› Album Photography, 2024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사진, 영상 작업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애니청Annie chung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아주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수단과 상관없이 인상 깊은 날이나 사람을 늘 남기고 간직하길 원했던 것 같아요. 그런 기질로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게 되었고, 그러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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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oo of Silicagel,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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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집 『Life images 2』 중에서, 2020

작업 공간에 대해서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제 주거 공간은 연남동이고, 작업실은 연희동 홍제천 자락에 있어요. 두 곳 모두 산책로나 강이 가까이에 있고 주변에 나무들이 참 많아요. 특히 작업실은 내부만 보면 옛날 미국 시골집 같은 느낌이 많이 난답니다. 좋아하는 취향의 물건을 걸어놓고, 저희만의 안락한 공간으로 변해가는 걸 보면 더욱더 애정이 가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어린 시절, 인상 깊게 봤던 영화들을 되돌려 보는 편이에요. 옛날 영화를 보면 구도나 인물 감정에 대한 충실한 특징이 두드러질 때가 있거든요. 이 감정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고 많이 배웁니다.

CHUU ‹PINK CLOUD›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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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U ‹PINK CLOUD›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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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U ‹PINK CLOUD› MV, 2024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보통은 머릿속에 스치는 이미지를 프레임에 재현하려고 해요. 그 과정이 1초 만에 이루어질 때도 있고, 길게는 하루도 걸리죠. 어떨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때도 있어요. 일단 영감이 떠오르면 스케치하듯 머릿속에 빠르게 그려보는 것 같아요. 첫 단추는 ‘구도’에서 시작합니다.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2024년 여름은 The Volunteers의 앨범 L의 무드 필름부터 북미 투어 비하인드컷, 콘서트 라이브 영상까지 제작했어요.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음에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답니다. 그리고 JUE의 새로운 싱글 if U..›의 포토 및 MV도 제작했는데요. 저의 뼈대 같은 취향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The Volunteers ‹L› Concept Film (Yerin.ve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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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olunteers ‹L› Concept Film (Yerin.ver), 2024

The Volunteers의 North America Tour Special Video ‹PSYCHO›,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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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olunteers의 North America Tour Special Video ‹PSYCHO›, 2024

JUE ‹if U..›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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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E ‹if U..› MV, 2024

최근 작업을 통해 작가님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제 스타일대로 터치를 주면서 동시에 아티스트 고유의 개성이 두드러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제일 중요해요. 아티스트의 작업을 보고 다른 옷을 입었다는 느낌이 아니라, ‘이런 아이덴티티도 있었구나. 원래 이런 면도 가지고 있었네.’라고 느끼길 바랐습니다.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궁금합니다.

저는 작업을 진행할 때 아티스트와 쌓는 유대감과 친밀감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인지라 가끔은 성격이 맞지 않은 부분도 있는데요. 그 마음이 정말 잘 맞을 때 너무나도 만족스럽답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속상함을 느끼면서도 굳은살이 박이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근데 결과물에 큰 차이가 없더라도 그런 거리감이 만들어내는 제 애정의 온도는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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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olunteers의 North America Tou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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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olunteers의 North America Tour, 2024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침밥을 많이 먹어요. 하루 중 제일 신경 써서 차리는 식탁이 아침 밥상이랍니다. (건강에는 안 좋다는 말이 있지만요…) 어쨌든 노력해서 밥을 차리고 맛있게 먹으면 하루가 활기차져요. 그럼 자전거를 타고 작업실에 가서, 이제 다시 좀비가 됩니다.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원래부터 옷 입는 걸 좋아했는데, 요즘 들어 패션에 더욱더 관심이 커진 것 같아요. 화려하거나 예쁜 옷보다는, 실용적이면서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찾게 됩니다. 많은 걸 사고 또 버리는 대표주자였는데, 요즘은 주변을 정리하고 꼭 필요하면서 오래오래 함께할 수 있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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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S ‘One Summer Day’ (feat. Mei ehara) MV, 2024

CHS ‘One Summer Day’ (feat. Mei ehara)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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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S ‘One Summer Day’ (feat. Mei ehara)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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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S ‘One Summer Day’ (feat. Mei ehara) MV, 2024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모든 것에 대한 ’애정‘인 것 같아요. 결국 언젠가는 모든 게 눈앞에서 사라지고, 저도 다른 이들의 눈에서 사라지겠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작업에 임해요. 웃고 있지만 슬픈, 울고 있지만 웃는 듯한 모습이 전부잖아요. 항상 이미지의 양면성을 생각하며 작업 중입니다.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저는 슬럼프가 온다고 피하기보다, 온몸으로 직면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게 꼭 싸워서 이긴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마음의 커튼을 치고 그 안에 꽤나 오래 머물면서 고민하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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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nny ‹Ours› Album Photography,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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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nny ‹Ours› Album Photography, 2024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주거 공간의 크기를 늘리고 싶어요. 강아지와 고양이, 동거인 이렇게 넷이 살고 있는데요. 모두에게 독방이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그냥 해라! 해서 안 되더라도, 일단 해봐야 안 할 수 있다. 

CHS ‘Wet Market’ MV,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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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S ‘Wet Market’ MV, 2024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사실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크게 어렵지 않았어요. 꾸준히 좋았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좋아졌죠. 게다가 감사하게도 이를 지속할 수 있도록 주변 상황이 도와줬고요. 만약 현실적인 문제로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는 게 어렵다면, 조언을 얻기보다 먼저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계속해 나갈 건지 아닌지 결정부터 하는 게 제일 필요해 보여요.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 다른 좋아하는 일을 조금씩 버리는 것도 괜찮답니다. 가장 좋아하는 일을 더 좋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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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ko EP ‹말버릇› Album photography, 2024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좋은 사람.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오직 저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나이 때문에 자신감을 잃지 않고, 지금과 동등하게 꿈꾸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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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애니청(@anniechung_org)은 타인을 기록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다. 고려대학교에서 산업정보디자인을 전공하고 일본사진예술학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공부했다. 선우정아, 옥상달빛, 요조, 백예린, The volunteers, CHS, 죠지, Damons year, JUE 등 다양한 뮤지션의 MV를 만들고 촬영을 진행했다. 사진집 Life images 1』(2017), 『Life images 2』(2020), 『IMAGES』(2022), 『HOW CAN I FORGET YOU』(2023), 『IKINARI』(2023)를 출간했고, 개인전 «HOW CAN I FORGET YOU»(HOQICM, 2017)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