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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주광문을 찾습니다

Writer: 김도훈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김도훈 작가가 이번에 보내온 에세이 주제는 바로 축구입니다. 이번 2023 카타르 월드컵에서 펼쳐진 명장면에 대한 찬사일까요. 아쉽게도 땡! 대한민국에서 조심해야 할 대화 주제인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입니다. 벌써부터 진저리가 난다고요? 잠시만 진정하고 숨을 고르게 들이쉬고 내뱉으며 글에 살짝 발을 담가 보세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빨려들 듯 읽다 보면 나중에 자발적인 사람 찾기를 시작할지도 몰라요. 그게 누구냐고요?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시죠!

이 글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다. 그러니 평소 예비역이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에 진력난 분이라면 지금 빠져나와도 좋다. 누구도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따위를 듣기 위해 태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 이 페이지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분이라면 안심하셔도 좋다. 이 글은 축구를 정말이지 증오한 남자가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다. 예비역들이 전역 후 첫 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할 때만큼 의미가 없진 않을 것이다. 아니, 요즘도 전역 후 후배들과 술자리를 하는 예비역 선배라는 존재가 존재하는가? 그건 나도 나이 든 엑스세대라 잘 모르겠다.

그 사람의 이름은 주광문이었다. 나는 1996년에 남들보다 일 년 정도 늦게 군대에 갔다. 당시 대학생은 2학년을 마치면 군대에 가는 것이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나는 그들과 맞춰 가지 못했다. 군대에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너 같은 애는 훈련소에서 죽는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은 탓에 1년 정도 수영장을 다녔다. 하지만 습득 속도가 늦어서 수영보다는 수다에 집중하는 어머니뻘 선생님들과 항상 같은 클래스에 머물렀다. “좋은 데로 못 빠지면 운전병이라도 해야지”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은 탓에 몇 번이나 떨어진 코스 주행 테스트에서도 반드시 성공을 거두어야 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군대에 가서 정말로 필요한 건 수영도, 운전면허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그건 축구였다. 나는 축구를 공부하고 군대에 갔어야만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 사람 때문이었다. 주광문이다. 아까부터 계속 튀어나오는 주광문이라는 이름은 누구냐. 나의 군대 선임이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미리 드린다.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듣느라 여기까지 참은 것도 모자라서 당신은 내 군대 선임의 이름까지 알게 됐다. 인터넷에는 참 알 필요 없는 헛된 정보가 많다.

한국 군대의 현실을 극사실주의로 표현한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중 행정병의 모습

나는 행정병이었다. 지원과라는 곳에서 일했다. 뭐든 지원하기 위한 서류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내가 담당한 서류들은 대개 ‘군사보안’이라는 글귀가 찍혀 있었다. 군대에서 절대 유출되면 안 되는 것이 군사비밀이다. 3급 비밀은 누설되는 경우 국가 안전 보장에 손해를 끼칠 수 있는 비밀이다. 2급 비밀은 국가 안전 보장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는 비밀이다. 1급 비밀은 국가 간의 외교 관계를 단절시키고 전쟁을 유발할 수 있는 비밀이다. 내가 다루었던 비밀 서류 중 국가 안전 보장에 손톱만큼도 생채기를 낼 수 있는 비밀은 없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주광문이 있었다. 그는 지원과 선임이었다. 180cm가 훌쩍 넘는 키에 살 반 근육 반으로 만들어진 군사 기계였다. 군사 기계가 왜 행정병이 근무하는 지원과에 있는가? 행정병은 나 같은 최약체 남자가 후방에서 서류 작업이나 하라고 생긴 보직이다. 군사 기계로 태어난 사람은 해병대나 전방으로 보내야 한다. 그런데 왜 주광문은 행정반에 있을까? 다른 선임들 말을 들어보니 지나치게 오랫동안 인력이 공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는 아예 지원과가 굴러가지 않을 지경에 이르자 그들은 일단 누구라도 신병이 들어오면 행정병으로 받겠다고 선언한 모양이다. 그게 주광문이었다. 컴퓨터 자판에 손가락 한 번 올려본 적 없는 군사 기계.

군사 기계는 나를 내심 좋아했다. 잘 굴려 먹을 수 있을 것도 같은, 대충 눈치 빠른 듯한 졸개가 하나 생겼으니까 싫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군사 기계는 츤데레였다. 매우 육체적으로 강력한 츤데레였다. 친근함을 주먹으로 풀었다. 본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대화를 하다가 재미가 있으면 주먹으로 내 어깨를 쳤다. 재미있어도, 재미없어도 주먹으로 쳤다. 풀 스윙으로 쳤다. 나는 경쾌하게 날아갔다. 아니다. 나는 지금 군대 내부의 폭력성을 고발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1996년이었다. 폭력이 지금보다 훨씬 일상화된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도구였던 시절의 이야기다.

츤데레는 참을 수 있었다. 큰 문제가 발생했다. 군사 기계는 심지어 축구 기계였다. 그는 축구를 좋아했다. 사랑했다. 무엇보다도 토요일 정오의 평온함을 즐기려는 후임들을 깨워서 자외선이 위험 농도로 작렬하는 연병장에 불러모아 해가 질 때까지 축구를 시키는 행위 자체를 사랑했다. 군대 축구에는 규칙이 없다. 옐로카드도 없다. 레드카드도 없다. 그래서 그걸 군대에서는 ‘전투 축구’라고 부른다. 나는 그걸 ‘축구 학살’이라고 부르겠다.

전투 축구의 모습, 사진 출처: 가츠의 군대 이야기

전투 축구의 모습, 사진 출처: 가츠의 군대 이야기

군대 축구를 지칭하는 군대스리가 밈, 명칭의 유래는 독일의 프로축구 리그인 분데스리가와 군대의 합성어이다.

주광문은 나를 몇 번 경기에 집어넣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도 스탠드에 앉아 책을 보는 척하며 축구하는 남자아이들을 지켜보던 사람이다. 심지어 나는 한국을 완전히 들었다 놨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도 보지 않았다. 내 기억에 멕시코 월드컵은 한국에 월드컵 붐을 일으킨 첫 번째 행사였다.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이후 32년 만에 동아시아 1위로 본선에 진출한 상태였다. 발전한 기술 덕분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생중계를 볼 수 있던 월드컵이기도 했다. 당연히 모든 국민이 잠을 설치고 월드컵을 지켜봤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신났다. 장벽은 거대했다. 하필 16강을 두고 붙어야 하는 상대가 디에고 마라도나가 있던 아르헨티나와 전 대회 우승국인 이탈리아였다. 불가리아는 좀 해볼 만한 상대였다. 아니다. 역시 만만찮았다.

마라도나는 정말이지 위대했다. 그는 거의 혼자서 필드를 질주하며 한국을 3:1로 짓밟았다. 그럼에도 감격스러운 경기였다. 대표팀 주장 박창선이 넣은 골은 한국 월드컵 역사상 첫 골로 기록됐다. 다음 경기인 불가리아전에서 한국은 1:1로 비겼다. 김종부가 넣은 동점 골은 한국 월드컵 역사상 첫 승점 1점으로 기록됐다. 다음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누구도 한국에게 돈을 거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한국은 기억할 만한 경기를 펼치며 3:2로 아깝게 졌다. 최순호와 허정무의 골이 들어가던 순간 한국 아래 지각판이 분명 흔들렸을 것이다. 아니 잠깐, 멕시코 월드컵을 보지도 않았다면서 경기 내용은 어떻게 이렇게 잘 아냐고? 다 새로 공부한 것이다. 글쟁이가 쓰는 것이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라고 믿지는 마시라.

86년 멕시코 월드컵 아르헨티나전, 디에고 마라도나와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들의 모습

다시, 주광문이 있었다. 한국 축구의 역사적인 순간에도 딱히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현실에서 축구를 한다고 연병장으로 밀어내는 주광문이 있었다. 나는 몇 주를 뛰었다. 의미 없이 뛰었다. 공은 거의 내 근처에 오지 않았다. 공이 내 근처에 오면 내 발은 공을 찼다. 차기는 했다. 공은 항상 내가 생각하는 방향과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누구도 나에게 공을 패스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임병은 뛰어야 한다. 뛰는 모습을 선임에게 보여줘야만 한다. 가장 크나큰 죄악은 군대에서 축구를 하다가 짝다리를 짚고 쉬는 것이다.

주광문은 아예 클래스를 만들었다. 5시간 넘게 진행된 축구가 끝나고 나서도 한 시간 더 진행되는 클래스였다. 강사는 주광문, 학생은 김도훈. 둘만의 클래스였다. 그는 일부러 공을 뻥뻥 연병장 한가운데로 찼다. 그럼 나는 짧은 다리로 공을 찾아오기 위해 뛰었다. 찾아온 공은 다시 연병장으로 날아갔다. 그게 수십 번 반복됐다. 주광문은 “너는 체력이 문제야. 체력이”라고 외쳤다. 나는 이 문단을 쓰면서 약간의 PTSD를 느끼고 있다. PTSD를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법 중 하나는 트라우마를 안겨준 사건에 대해 글로 쓰는 것이라고 들었다.

다행히 주광문의 축구 교실은 두어 달 뒤 멈췄다. 포기한 것이다. 그는 나 같은 놈은 축구 따위 하지 말고 물 주전자에 차가운 물 떠 놓고 선수들 응원이나 하는 게 나을 거라고 했다. 정답이었다. 사실 내가 가장 되고 싶었던 건 언제나 치어리더였다. 말이 나온 김에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영화 중 하나는 커스틴 던스트Kirsten Dunst가 치어리더로 나오는 영화 〈브링 잇 온Bring It On〉이다. 이 영화가 나온 게 2000년이다. 그해 태어난 사람들도 벌써 22살이다.

치어리더 영화 ‹Bring it on›, 2000, 포스터

나는 얼른 이 글을 정리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이 글은 그토록 싫어했던 축구를 좋아하게 된 사람의 이야기다. 도대체 축구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이 글 어디에 나오냐고? 지금 할 생각이다. 나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축구를 좋아하게 됐다. 나는 월드컵이 열리기 한 달 전 사귀던 사람에게 차였다. INFP답게 롤러코스터의 ‘Last Scene’을 수백 번 반복해 들어도 도무지 슬픔(과 차인 것에 대한 자학)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 친구가 말했다. “내일 월드컵 보러 가자. 사직 구장에서 중계해 준단다.” 내가 축구만큼 견딜 수 없던 것이 붉은 악마 티셔츠였다. 붉은 악마 구호였다. 그런 집단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행위에는 가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나는 울고 있었다.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얼굴에 태극기 문양을 붙이고 친구와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안정환이 이탈리아전 연장 후반에 골든골을 넣는 순간이었다. 축구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월드컵은 위대한 것이었다. 이별(이 아니라 차인) 슬픔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휘발됐다. 나는 밤새 부산 시내를 돌아다니며 “대한민국!”을 외쳤다. 그러니 이 글은 결국 축구에 PTSD를 가진 남자가 어떻게 실패한 연애를 월드컵으로 극복하고 축구를 사랑하게 됐느냐에 대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아, 이 글을 쓴 목적이 하나 더 있다. 나는 주광문을 찾고 있다. 진심으로 찾고 있다.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다. 나이가 들면 그냥 별의별 사람이 다 보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전라도 남쪽 지방에서 온 1977년생 주광문을 아는 분은 꼭 연락을 부탁드린다. 쓰고 보니 이 자식은 나보다 나이도 어렸다.

2002 한일 월드컵 붉은 악마 모습, 사진 출처: 한국일보 자료사진

Writer

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lose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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