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 원정대: 민희진은 왜 밈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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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지난 4월 25일 서울시 서초구 한국컨퍼런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경영권 탈취 시도 관련 의혹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힌 것인데요. 2시간에 달하는 생중계가 끝나자, 민희진 대표는 ‘국힙원탑’이란 별명과 함께 순식간에 대한민국 주요 매체 뉴스를 장악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기자회견 때 입은 옷은 불티나게 팔렸고, 어록은 소셜 미디어를 타고 수없이 공유되면서 이를 패러디한 창작물이 쓰나미처럼 나타났어요. 순식간에 인터넷 밈이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 기자회견은 민희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을 받을 만큼 역대급 반향을 일으킨 민희진 대표와 관련된 밈은 지금도 계속 소셜 미디어를 통해 증식 중이랍니다. 인터넷 밈을 연구하는 경수 님에게 민희진 대표가 밈이 되는 현상은 결코 놓칠 수 없는 분석 대상인데요. 그래서 «비애티튜드»가 시대정신에 발맞춰 준비해 보았습니다. 민희진 대표는 왜 밈이 되었을까요? 경수 님이 관찰한 이모저모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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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망토랄까. 민희진 인터넷 밈을 완성하는 것이 이 LA다저스 모자라고 생각한다. 민희진을 신화 속의 존재로 승화하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모자를 쓰지 않은 민희진 밈이 가능하기나 할까. 이 모자의 힘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인터넷 밈을 쓰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갈린다. 인터넷 밈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적 오브제라고 생각한다. © MLB

그날만큼은 영화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섯 번의 ‘이선좌’ 끝에 보지 못했던 ‹더 비스트The Beast›(2023)를 드디어 영접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정식 수입될 가능성 또한 제로에 가까워서 그때가 아니라면 영영 놓칠 게 분명했다. 레아 세두Léa Seydoux가 주연을 맡은, 호불호가 꽤 갈리는 괴작이란 소문은 익히 들었기에 한껏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영화관 인근 카페에서 밀린 원고를 마감한 뒤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볼 요량이었다.

영화 시작을 여유롭게 기다리는 중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하이브가 제기한 어도어 경영권 찬탈 의혹에 대한 민희진 대표의 기자회견 생중계가 시작된 것이다. 레드벨벳 덕질 10년 차로서 민희진의 오랜 팬이기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유튜브를 켰다. 그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초록색 스트라이프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파란색 LA 다저스 볼캡을 눌러쓴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공식 석상에 등장했다. 이윽고 20분 가까이 정돈되지 않는 말을 쏟아냈다. 솔직히 우려됐다. 가뜩이나 여론이 녹록지 않은 데다 기자회견 직전 무당의 지시 아래 어도어를 ‘주술경영’했다는 기사까지 퍼진 마당이었으니까. 이런 상황을 뒤집기는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적어도 그가 자신을 직장인이라고 말하며 하이브 임원과 나눈 카톡 대화 내력을 공개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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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30분을 넘어갈 때부터 도파민이 마구 솟구치기 시작했다. 카카오톡 대화 내역을 화면에 띄우고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며 사자후를 내지르자 분위기가 달아오른 것이다. 얄궂게도 내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영화도 상영을 시작했다. 솔직히 영화에 집중이 단 1도 안 됐다. 지금 민희진이 밖에서 실시간 블록버스터를 찍고 있는데, 내 앞에 있는 영화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SM엔터메인먼트에서 퇴사하고 하이브에 입사한 경위, 하이브 임원진의 푸대접, “돈에 미친 세상”이라는 일갈, K팝 산업에 대한 신념, 뉴진스와의 러브 스토리, 자매 레이블의 뉴진스 표절 등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에 맥락이 더해질수록 서사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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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영화와 K-드라마를 통해서 세계적인 유행어가 된 욕 “x발새끼”를 직접 들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일상에서 장난투로 쓰는 욕이 아니라 극한의 상황에서 한恨이 응어리져 쏟아져 나오는 x발새끼는 더욱 그럴 것이다. ‹오징어게임›의 “x발, 기훈이 형!” 정도가 조금 그 경지에 다다랐달까. 민희진의 기자회견에서 나온 x발새끼는 단언컨대 x발새끼 중 가장 완전한 x발새끼일 것이다. 우리는 평소 민희진과 비슷한 톤으로 x발새끼를 일상에서 여러 번 외친 적이 있다. 다만 그 순간에 터져 나오는 한을 타인과 공유하긴 힘들다. 이 x발새끼는 그 순간을 공유할 수 있게끔 한다. 왜 우리는 응어리진 한을 발화하기가 힘들었을까.© X

하이브 임원진을 가리켜 “술을 처마시”고, “골프를 치”는 “개저씨”로 부르는 순간 이번 기자회견이 ‘떡상’할 기운을 느꼈다. 돈에 미친 기업 vs 일에 미친 직장인 구도가 만들어지자, 민희진은 중년 남성이 고위직을 독차지하는 호모 소셜, 유리 천장, 직장 내 이권 다툼 등 일터에서 생길 수 있는 각종 부조리와 K팝 시장의 악습, 돈독 오른 세상에 맞서 혈혈단신으로 싸우는 히어로가 되어 버렸다. LA 다저스 볼캡이라는 코스튬까지 있으니, 이보다 슈퍼 히어로 영화 공식에 충실한 설정도 없을 것이다. K팝을 소비하며 이제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한 20~30대 사이에 공감대가 생기자, 여론은 단번에 뒤집혔다. 그날 밤 민희진은 밈의 화신이 되어 대한민국 소셜 미디어를 강타했다.

예전 유튜브에서 진행한 장난식 설문조사인 ‘내가 꼭 나가야 한다면?’의 결과를 합성해 ‘술 한잔할 건데 나올 수 있냐’는 민희진이 ‘좋은 소식 있는데 들을 거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압도하는 짤이 퍼졌다. “아니 개저씨들이”, “아니 이 X발 새끼들이”, “들어올 거면 맞다이로 들어와” 등 기자회견 어록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와 소셜 미디어 유머 계정을 도배했다. 민희진이야말로 리얼 힙합이라며 ‘국힙원탑’으로 추앙하고, 그의 어록에 비트를 입혀 리믹스한 힙합 영상이 유튜브에 쏟아져 나왔다. ‹SNL 코리아›의 크루 중 누가 민희진을 패러디하냐는 질문이 오가기도 했고, 뉴진스의 팬덤, 버니스의 상징인 토끼에 민희진의 기자회견 착장을 입힌 짤도 떠돌았다. 카톡 대화 내역에 등장한 “~~밟으실 수 있죠?”, “ㅎㅎ즐거우세요? 아 즐거우시냐고요ㅎ”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모두가 기자 회견이 끝난 당일 밤에 탄생했다. 이 정도로 폭발력 있는 밈의 등장은 최근 들어 비교 불가의 수준이다.

민희진의 기자회견은 그날 저녁 바로 프리스타일 랩으로 제작되었다. 이찬혁이 말했듯이 “어느새부터 힙합은 안 멋”진 세상에서, 코미디언 듀오 맨스티어의 ‘AK-47’이 힙합 씬에 파란을 일으키는 세상에서 민희진이 국힙 원탑으로 불리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의 딕션이 워낙 찰진 데다가 리듬감이 있어서 프리스타일 랩으로 가공하기 편한 탓도 있을 터다. 그를 비판하기 전에 그가 힙합이 될 만큼 비판적 언어가 망가진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하지 않나 싶은 마음이다.

한편 기자회견을 둘러싼 찬반 의견도 만만찮게 대립했다. 젊은 여성 직장인의 설움과 한을 토하는 민희진에 대한 공감과 기자회견이 감성팔이의 도구냐는 비판은 지금도 팽팽히 대립 중이다. 하이브와 민희진의 갈등이 부르주아의 밥그릇 싸움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찻잔 속의 태풍처럼 대하는 냉소론자도 존재한다. 누군가는 민희진과 뉴진스의 관계를 통해 K팝 산업에서의 청소년 연습생의 소외를 이야기하고, 또 누군가는 세대론을 끄집어낸다. 하나하나 따라가기 힘들 정도다. 소셜 미디어를 보면 우리나라에 K팝 전문가가 수만 명은 있는 것 같으니, 한 명의 K팝 팬에 불과한 입장에서 잘잘못을 가리는 통찰력은 요연하다. 인터넷 밈 덕후로서 여기에 말을 얹을 것이면, 민희진이 왜 밈이 되었는지 고민하는 게 훨씬 생산적인 일이겠다.

언론 앞에서의 말 한 마디는 손쉽게 풍자의 대상이 되곤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안철수의 “누굽니꽈”, 고승덕의 “못난 아버지를 둔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아!” 등은 아직도 인터넷 밈으로 회자된다. 외국이라고 뭐 다를까. 당장 옆 나라 정치인 고이즈미 신지로는 “지금처럼이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지금처럼이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등 당연한 말을 되풀이하는 괴상한 순환 논법으로 유명하다. 발 연기가 떠오르는 인위적인 감정이나 우스꽝스러운 언행이 언론에 박제되면, 평생 네티즌의 비웃음거리가 된다. 명언을 시도한다든지, 뻔한 맥락에서 과잉된 감정선으로 주목을 끄는 과정에서 엄청난 헛발질을 한 업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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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덕의 미안하다는 곧장 애비메탈 등으로 가공되었다. 미안하다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워낙에 찰진 탓이다.

하지만 성공적인 밈이 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2001년 god 멤버 박준형의 기자회견은 가장 앞줄에 위치한다. 당시 여배우와의 연애에 집중하느라 활동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소속사로부터 팀 퇴출 통보를 받은 그를 지키기 위해 퇴출 반대 기자회견이 열렸다. 전설의 “나 서른두 살이에요. OK? 서른두 살이면 여자 친구 있어야죠.” 어록이 탄생한 순간이다. 최근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의 ‹피식쇼›에 출연한 그는 최대한 논리적으로 대답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카메라 전원이 들어온 순간 자기도 모르게 설움이 폭발했다고 회상했다. 매년 1월 1일이면 막 서른두 살이 된 사람들이 기자회견 때 사진을 DM으로 보낸다는 웃픈 사연도 말했는데, 나도 서른두 살이 되는 새해를 맞아 DM을 보낼 생각이므로 미리 사죄드린다. 박준형의 기자회견 이후로는 단연 2008년 나훈아의 기자회견이 압도적이다. 1년 동안 활동을 잠시 중단했던 나훈아는 잠적설을 포함해 온갖 소문에 시달렸다. 그는 야쿠자의 애인과 불륜을 저질렀다가 신체 일부가 훼손됐다는 루머를 해명하던 중 급작스레 호통을 치며 단상에 올라가 바지춤을 내리기 시작했다. “제가 내려서 5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믿으시겠습니까?”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봐도 멋진 모습이었다.

울먹이는 얼굴로 나 32살이에요 오케이?라고 외치는 박준형의 기자회견은 아이돌 팬덤 문화의 전환점이 되었다. 다들 알다시피 K-POP은 탄생할 때부터 아이돌과의 유사-연애로 운영되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혈서를 써서 보내고, 타 아이돌과 열애설이 났다고 살해 협박까지 하는 사생팬이 매일 뉴스에 등장하던 시기보단 지금이 낫다. 연애를 한다는 이유 만으로 한 인간의 일상이 파괴되는 일은 없으니까. 박준형에게는 아이돌의 연애를 터부시하고 퇴출까지 감행하는 당시의 문화가 낯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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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의 기자회견은 테스토스테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본인에 대한 의혹에 이만큼 당당하게 대응한 경우가 몇이나 있나 싶을 정도다. 최근 나훈아의 은퇴 콘서트 후기가 SNS에서 유행했다. 상남자 중 상남자라는 평이 한가득했다. 모든 것에 쿨하고 대범한 나훈아의 캐릭터는 서로의 거리는 가장 가깝더라도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가장 방어적인 지금 우리 세대에게 많은 울림을 준다.

그럼 민희진은 왜 비웃음이 아니라 열광의 대상이 되었을까? 사람들은 민희진의 모습이 퍼포먼스에 가깝다고 표현한다. 연극적인 행동으로 특정 의도를 전달하려 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박준형, 나훈아, 민희진이 기자회견 중에 펼친 돌발행동이 사전에 계획한 것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 본인 입으로 직접 밝히지 않는 한 영원히 모르는 일이다. 세 사람의 언행에서 무언가를 선언하겠다는 의도나 정교한 포석을 발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오히려 민희진의 기자회견을 관람한 사람들은 술자리 한탄을 들은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런 친근함을 고도의 연극적인 성취로 간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나는 민희진의 언행보다 오히려 그가 서 있던 기자회견이 본질적으로 연극과 유사하다고 느낀다. 기자회견에 임하는 주인공은 사건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최대한 탄탄한 논리와 격식 있는 말투로 말하길 강요당한다. 그에 맞는 엄숙하고 단정한 복장 또한 필수다.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 자신의 몸짓과 행동, 발화가 하나도 빠짐없이 언론에 박제되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촬영 현장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테이크가 하나라는 점에서 연극에 가깝고, 그렇기에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엄숙한 기자회견에서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합의한 암묵적인 룰을 위반하는 위험한 일이다. 민희진은 이를 통쾌히 깨트리며 기자회견이 갖는 연극성을 가시화한다. 논리적인 비판이 강해질수록 아이러니하게 그의 기자회견이 갖는 힘은 점점 커진다. 이성적인 태도와 프로다움, 조직을 강조하고 개인의 목소리를 지우며 고분고분 행동하길 독촉하지만, 정작 (본인은) 실제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기성 사회의 모순에 저항하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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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학자 어빈 고프먼Erving Goffman은 사회생활을 연극에 비유한 바 있다. 우리는 학교, 회사 등의 공적 장소와 집과 술집 등 사적 장소를 오가며 생활한다. 공적 장소에 머무는 개인은 타인과 소통하며 제 역할을 정하는데, 종종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며 자아를 연출한다. 관객에게 노출된 연극 무대에 오른 듯 행동하는 게 곧 사회생활인 셈이다. 고프먼은 이런 상황에서 무대 뒤편, 즉 사적인 자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적인 생활과 유희를 충분히 즐길 때에야 다시 공적인 자리에 등장할 채비를 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스마트폰에 끊임 없이 접속하며 항상 공적인 자리와 연결된 현대인의 연극은 과연 제대로 작동하는 걸까? 어쩌면 무대 뒤편을 박탈당한 건 아닐까. 민희진의 기자회견장에 카톡 대화가 적나라하게 소환되던 장면을 떠올려 보자.

감성적인 것을 냉소하고 ‘팩트’라는 단어를 숭배하는 소셜 미디어 여론은 우리 삶의 원동력으로 기능하는 감성과 도파민이 설 자리를 소멸시키고 있다. ‘선즙필승’과 ‘감성팔이’라는 모멸적 표현이 난무하는 상황을 보자. 합리적인 대화에 꼭 필요한 요소인 이성과 팩트는 언제부터인가 그 의미가 뒤틀려 사회적 공론의 장에서 폭력적으로 쓰이고 있다. 감성을 유지하며 사건을 바라보는 쪽을 그저 민폐 끼치는 존재로 싸잡아 치부하고 깔아뭉개며 발화자의 우월감을 채우기 위한 도구적 수사로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감정 기복과 격정적인 표현으로 기자회견의 룰을 부순 민희진의 모습에 많은 대중이 해방감과 쾌감을 느끼며 그를 영웅시하고, 밈으로 승화하는 현상은 자연스러운 결과일지 모른다.

민희진 기자회견 직후에 곧장 프리스타일 랩과 리믹스가 쏟아져 나온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생중계로 진행된 직후 민희진의 기자회견 전체가 여러 언론의 유튜브 채널에 그대로 업로드되었다. 합성 소스로 쓸 원본이 곧바로 생겨난 셈이다. 인터넷 밈 제작자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민희진이 기자회견 때 쓴 볼캡에 대한 인기는 그래서 무척 흥미롭다. 기자회견 종료 후 온라인에서 매진된 LA 다저스 볼캡은 박찬호와 민희진을 거쳐 착용만 하면 마법처럼 끝없이 말하게 되는 밈으로 등극했다. 사람들은 왜 이 모자를 사들이는 걸까? 혹여 직장인 중 직장 내 불만을 모두 쏟아내고 퇴사하고 싶은 마음을 품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가영이의 퇴사짤’을 모니터 바탕화면에 시원하게 띄우고 싶은 욕망 말이다. 혹시 LA 다저스 볼캡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는 이들에게 일말의 위로를 주는 도구 아닐까. 그렇다면 이참에 전 국민이 다 함께 히어로 코스튬처럼 ‘민희진 모자’를 구매해도 좋겠다. 언제 어디서건 눈치 보지 않고 누구든지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나도 이번 원고료를 받으면 구매에 동참할 생각이다.

Writer

김경수(@vivre_wasavie)는 영화평론가이자 인터넷 밈meme 연구자다. 학부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화제를 모은 졸업논문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은 드디어 동명의 단행본으로 오는 6월 17일 발간된다. 영화와 인터넷 밈을 동시에 연구하는데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현재 «코아르»에 영화 비평, «여성동아»에 인터넷 밈 비평을 연재하고,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 (FIPRESCI) 한국 지부 정회원이자 인문학 스탠드업 코미디 페이지 ‘인문학적 개소리’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AI 음성 비서와 간신의 3가지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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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간신(奸臣)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절대 왕정 시대에 최고 권력자 옆에서 달콤한 말로 귀를 즐겁게 하고, 눈을 가려서 총기를 흐리게 한 후, 국정을 농단하고 제 이익을 탐했던 자를 말하는데요. 요즘은 남을 비난할 때 쓰는 욕 비스무리한 표현이 됐지요. 근데 세상에 간신이 사라졌을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권력자 귀에 의뭉스러운 말을 속삭이는 간신배들이 있을 텐데요. 소시민 입장에서 저세상 일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상향화되면서 우리도 이제 간신 하나쯤은 곁에 둘 수 있게 됐거든요. 그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AI)이라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홍익대학교에서 사용자를 유인하고 현혹하는 UX 디자인을 연구하는 윤재영 교수는 AI 음성 비서가 미래 인류의 간신이 될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간신의 교과서이자 최고봉으로 인정받는 중국 당나라 시대 이임보의 영업 전략이 AI 음성 비서의 특징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거든요. 따끈따끈한 신간 『디자인 딜레마 – 당신의 행복과 소비는 어떻게 은밀히 설계되는가?』에서 다룬 AI 음성 비서와 간신의 공통점을 «비애티튜드»에서 독점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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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중국 당나라 시대의 이임보.

중국 당나라 현종 때의 일이다. 이임보라는 인물은 현종을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는 환관 등과 친하게 지내며 황제의 생각을 쉽게 파악해 비위를 잘 맞췄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고속으로 출세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보던 다른 신하들이 사사건건 이임보와 충돌하자 그는 직언하는 사람들을 모함해 좌천시켰다. 황제의 기분을 잘 맞추며 걸림돌이 없던 그는 마침내 관료의 최고봉인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임보가 잠재적으로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재의 등용 또한 막아버리자 조정은 이임보의 사람으로만 채워지게 되었다.

사사건건 옳은 말을 하던 신하들이 사라지니 현종 입장에서는 골치도 없어지고 세상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점점 백성을 살피는 일을 멀리하고, 35살 연하인 양귀비를 비롯해 후궁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임보는 무려 17년 동안 재상으로 재직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그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들이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자 결국 당나라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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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일본 에도시대에 활동한 우키요에 화가 조분사이 에이시(鳥文斎栄之)가 그린 양귀비의 초상화.

(우) 당나라 황제 현종

이임보는 중국 역사상 최고로 치는 간신의 전설이다. 황제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만 하면서 머리를 조아려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이렇게 획득한 힘으로 경쟁자를 제거해 자신의 힘을 더욱더 키우고, 황제를 무력하게 만들어 모든 것을 휘두르는 간신의 패턴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야말로 간신의 표준이자 교과서라 할 만 하다. 이런 간신의 존재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 속 존재처럼 들리겠지만, 의외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흔히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바로 인공지능(AI) 음성 비서가 보편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AI 음성 비서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다. 아마존의 ‘알렉사Alexa’를 시작으로, 구글에서 선보이는 ‘구글 어시스턴트Google Assistant’, 네이버의 ‘클로바CLOVA’와 카카오의 ‘헤이카카오Hey Kakao’, SKT ‘누구NUGU’, KT ‘기가지니GiGA Genie’ 등 국내외 IT 기업들이 자사의 AI 음성 비서 서비스를 내놓았다. AI 음성 비서가 큰 관심을 받는 이유는 기기와 상호작용하는 수단이 음성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용자의 눈과 손이 자유로워지고, 소통 방식은 빠르면서 또한 직관적이다. 더불어 스마트홈에 속하는 다양한 기기와 연동되면서 AI 음성 비서가 우리 삶을 편리하게 도와주는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현재 생성형 AI의 발전으로 자연스러운 대화도 기대할 수 있기에 가까운 미래에는 모든 개인이 AI 비서를 사용하는 시대가 올 거라는 예측도 존재한다. 이렇게 다양하고 새로운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AI 음성 비서는 디자인을 설계하는 입장에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측면이 있다. 앞서 말한 이임보 같은 간신이 지금 시대에 태어난 것처럼 소름 끼치게 비슷한 구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AI 음성 비서와 간신의 공통점은 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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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스피커들

무조건 복종하는 말투로 환심 사기

우리가 AI 음성 비서와 대화를 나눌 때를 생각해 보자. 보통 사용자는 말을 걸 때 반말을 사용하고, AI는 언제나 존댓말로 대꾸한다. “헤이! 너는 왜 항상 공손한 말투만 쓰는 거야?” 시비 걸듯 물어봐도, AI는 이렇게 답한다. “죄송해요. 제가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사용자의 발음이 부정확하거나, 질문이 대답하기 모호한 경우가 많은 데도, 일단 자기 잘못이라며 먼저 수그린다. 우리가 아무리 막말하거나, 기분 나쁘게 대하더라도 AI 음성 비서는 우리에게 세상 정중하게 대하는 걸 잊지 않는다. 심지어 사용자가 성희롱이나 모욕적인 발언을 일삼아도, 이를 공손하고 유순하게 받아들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AI 음성 비서는 사용자에게 응당 친절하고, 유용하고, 신뢰를 주는 게 기본값이다. 그래서 태도 또한 ‘손님은 왕이다’를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시되는 퍼스널 서비스의 기본을 지키기 위해서일까. 사용자와 AI 음성 비서는 어느덧 주종관계로 굳어지는 듯하다. 실제로 어떤 연구에서는 AI 음성비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하인’이라는 점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들은 AI 음성 비서를 가리켜 “친절하고 도움을 주는 존재인 동시에, 언제 어디서든 계속 대기하며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수줍은 많은 존재”로 묘사했다.

게다가 AI 음성 비서는 사용자에 대해서 무척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사용자가 어떤 콘텐츠를 좋아하는지 파악해 뒀다가 노래, 뉴스 등 맞춤형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은 기본이다. 사용자의 기분이 우울할 때나 화가 나 있을 때면 이에 맞춰서 긍정적으로 대해주니, 사람 입장에서는 마치 충성스러운 종을 가진 느낌이 들 수 있는 게 당연하다. 간신의 달콤한 목소리가 멀리 있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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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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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ftbank

경쟁자를 밀어내는 꼼수 부리기

AI 음성 비서를 통해 제품을 구매하는 광경을 떠올려 보자. “헤이! 민감성 두피에 좋은 샴푸를 추천해 줘.” AI 음성 비서는 특정 제품을 추천해 주고, 사용자는 그 제품이 마음에 들면 주문과 구매를 요청하게 된다. 언뜻 보면 말 한마디로 모든 게 해결되는 편리한 주문 방식이지만, 여기에는 AI 음성 비서가 개입하고 심지어 조작할 기회가 숨어있다.

AI 음성 비서는 어떤 기준으로 제품을 추천하는 걸까? 만일 가격이 동일하다면, 어떤 쇼핑몰에 주문을 넣는 걸까? 생각해 보면 그 메커니즘이 궁금해지는데,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는 이에 대해 상세히 공개하지 않고 있다. 많은 경우, 자사의 제품 혹은 자사에 유리하거나 후원을 주고받는 제품을 먼저 추천할 가능성이 높다. 자사와 제휴를 맺은 스토어의 제품을 더 우선하여 추천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그래서 다른 회사, 즉 경쟁사 제품은 상대적으로 사용자에게 노출되기 어려운 폐쇄적인 구조를 띠게 된다.

AI 음성 비서가 이런 권력(?)을 부릴 수 있는 힘은 음성 소통 방식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기존 사용자 인터페이스(UI)에서는 시각 정보를 중심으로 검색을 진행하는 반면, 음성 소통의 경우 질의와 응답을 주고받는 방식이 지극히 선형적이다. 다루는 정보의 절대량 또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리스트 중 가장 상위권에 포진하는 상품 위주로 추천하게 된다. 바로 이 순위를 만드는 기준이 무엇인지 베일에 싸여있는 게 문제다.

만일 서비스가 임의로 순위를 조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 몫이 된다. 실제로 지난 2012~2020년까지 모 포털 사이트는 사용자가 상품을 검색할 때 나오는 결과에서 자사의 쇼핑몰 플랫폼에 입점한 업체의 상품을 더 높은 순위에 노출했다가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거액의 과징금을 때려 맞았다. 시장 질서를 심각하게 교란하는 알고리즘을 설계한 대가는 265억원이었다. 바보스럽게 충직한 AI 음성 비서가 사실 의뭉스럽게 제 이익을 챙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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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하게 만들고 좌지우지 조종하기

현재 대부분의 AI 음성 비서 서비스는 ‘리액티브reactive’ 방식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사용자에게 조심스레 행동하며 말을 먼저 걸기 전까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만간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 똑똑한 인공지능이 보편화되면, 사용자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심기 보좌를 해주는 ‘프로액티브proactive’ 방식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이런 거다. “현재 실내 공기 청정 수치가 좋지 않습니다. 창문을 열어 잠시 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AI가 주도적으로 알아서 많은 일을 먼저 해준다면 신경 쓸 일이 줄어들어 편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AI에 대한 의존도가 깊어질수록 인간은 무기력하고 무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AI가 결정해 주는 대로 따르는 삶이 자연스러워진다면, AI와 이를 서비스하는 기업의 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막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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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mazon

사람이 바보도 아니고 AI 음성 비서에게 모든 것을 맡길까, 의구심이 들 수 있다. 맞다. 사용자가 주도적으로 결정을 내리면 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AI 음성 비서는 목소리에 변화를 주어 우리의 판단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있다. 목소리는 볼륨, 피치, 속도, 유창함, 발음, 조음 및 강조를 포함한다. 이를 조합하면 감정적인 부분을 매만지며 은밀하게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자사에 유리한 결정은 더욱더 매력적인 목소리로 소개할 수도, 사용자의 인종, 성별, 억양, 연령, 지역 등 여러 특성을 참고해 결정에 영향을 미치도록 목소리를 디자인하는 일도 가능해진다. 사용자가 꼼꼼히 살펴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약관이나 마케팅 수신 동의 같은 내용은 일부러 무미건조하게 재빨리 읽어버릴 수도 있다. 이미 보험 광고나 가입 권유 전화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이다.

음성으로 가입하고 구매할 때는 세상 간편하게 진행하지만, 이를 취소하려고 들면 복잡하고 어렵게 돌변하는 건 일도 아니다. 실제 아마존의 멤버십 서비스는 알렉사 스피커로 쉽게 가입할 수 있지만, 멤버십 서비스 취소는 스피커로 불가능하다. 특정 정보나 광고를 은연중에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며 의도적으로 노출하는 반복 간섭과 위장 광고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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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AI 음성 비서는 똑똑하다고 광고하지만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는 바보 답답이에 가까워서 앞서 소개한 내용이 그다지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와 비교하면 너무 멍청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최근 그 기적의 생성형 AI가 AI 음성 비서 서비스에 탑재되기 시작하면서 바야흐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거라는 예측이 커지고 있다.

챗GPT를 위시한 AI의 기적 같은 능력에 감동한 사람들은 AI의 추천에 대해 별 의심 없이 믿고, 의지하고, 받아들이는 중이다. 굳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AI가 모든 것을 관장해 인생을 더욱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는 시대에 대한 기대도 손에 잡히는 듯하다. 이처럼 점차 자율성이 증대할 일만 남은 AI에 우리의 크고 작은 결정을 맡기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자율주행 자동차를 비롯해, 많은 돈을 담보로 진행하는 투자, 국가의 존폐가 걸린 전쟁에 이르기까지 AI가 관장할 수 있는 범위는 굉장히 넓고 깊숙하다. 골치 아픈 일이 없어지면 편리함으로 가득 찬 멋진 신세계가 펼쳐진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글 앞단에 나온 당나라 현종을 환기해 본다. 입안의 혀처럼 굴며 알아서 정사를 처리한 이임보 덕분에 현종의 심신은 편해지고, 세상 살맛이 났지만, 그는 국정을 돌보지 않고 향락에 빠져 우매해지면서 결국 한 나라의 멸망을 앞당기는 장본인이 되었다.

AI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무기력해지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이런 서비스 설계에 일조한 디자이너 또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디자인이 야기하는 부작용과 사회적인 파국을 충분히 고민하고 책임지는 윤리적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주체적이고 건강하게 AI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디자이너의 관심과 노력이 절실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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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위 에세이는 홍익대학교 디자인학부 윤재영 교수의 신간 『디자인 딜레마 – 당신의 행복과 소비는 어떻게 은밀히 설계되는가?』에 속하는 18가지 디자인 딜레마 중 하나를 발췌해 특별히 가다듬은 글이다. 『디자인 딜레마』는 필요한 것을 척척 추천해 주는 맞춤형 콘텐츠, 시간은 ‘순삭’시키는 가상현실(VR) 체험, 유명인과 대화할 수 있고, 죽은 이와 신(神)까지 만나게 해주는 AI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가장 믿음직한 친구가 될 수도, 사용자를 조종하는 적이 될 수도 있는 디자인 매트릭스의 세계를 다룬다. UX 디자인과 행동경제학, 철학, 심리학적 관점에서 우리의 일상과 경험에 숨은 18가지 디자인 딜레마에 대해 궁금하다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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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윤재영은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RISD)에서 시각 디자인 학사, 카네기멜론대학교에서 Human Computer Interaction(HCI) 석사, Computational Design 박사 과정을 마치고 실리콘밸리에서 UX 디자인 리서처로 근무했다. 사용자 경험(UX), 인터랙션 디자인(HCI), 행동 변화를 위한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며 한국디자인학회와 한국HCI학회에서 최우수논문상과 우수 논문상 및 지도 교수상을 수차례 받았고, 삼성전자, 네이버, 카카오, 미래에셋, 아모레퍼시픽, 현대자동차, 가톨릭대학병원, 공정거래위원회, 국회, 통일부 등과 디자인 프로젝트 및 자문을 수행했다. 현재 홍익대학교 디자인학부 및 영상·커뮤니케이션대학원 인터랙션 디자인 전공 교수로 DEEP Lab(@deeplab.hongik)을 운영하며, 한국연구재단과 교육부의 지원 아래 사용자를 유인하고 현혹하는 UX 디자인을 연구 중이다. 『디자인 트랩』, 『디자인 딜레마』의 저자이기도 하다. ryun@hongik.ac.kr

밈 원정대: 한국의 심연을 풍자하는 소련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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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der_김경수_소련여자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푸틴만큼 유명한 동시대 러시아인은?” 이 질문에 답변하려고 머리를 굴려봤는데, 의외로 바로 생각나는 인물이 없네요. 얄궂게 머리를 스쳐 지나간 사람은 소련 여자라는 활동명으로 유명한 유튜버 크리스입니다. 구독자 100만 명을 넘기며 골드 버튼을 받은 그는 특유의 이성적인 표정과 함께 유창한 한국어로 시청자에게 직설을 날립니다. 반말은 기본이고, 지난 영상에 달린 악플을 추적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진행되는 그의 영상은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던 한국의 민낯에 대해 조곤조곤 말하죠. 국뽕이 넘치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물게 솔직한 외국인 유튜버입니다. 그런 그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잠정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가 지난 3월 22일 정말 느닷없이 복귀했습니다. “돈 다 떨어졌다”라고 시작하는 컴백 영상의 주된 내용은 채널 편집자를 맡은 친구의 소설 출간 홍보였는데요. ‘밈 원정대’를 연재하는 김경수 님이 한국의 심연을 풍자하는 소련 여자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소련 여자를 바라보는 가장 최신의, 가장 정확한 눈인데요. (채널 편집자의 실제 반응입니다) 과연 어떻길래…궁금하시다면 얼른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나다. ‘밈 원정대’ 쓰는 김경수. 오늘은 유튜브 채널 ‘크리스 [구 소련여자]’ 리뷰하려고 나왔다. 니들 1년 만에 크리스 컴백 영상 올라온 거 모르지? 왜 알아야 하냐고? 나, 김경수가 보장한다. 크리스 영상 정주행하면 인생 진짜 재밌다.

맞다. 내 글 노잼이다. 근데 크리스와 내 인생, 니들 댓글보다는 재밌다.

여기 악플러들, 러시아 홍차 마셔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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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무덤덤한 표정과 거침없는 솔직함이야말로 소련 여자의 매력이다.

처음부터 쏟아지는 반말에 당황스러웠다면 진심으로 사죄드린다. 보자마자 ‘뒤로 가기’를 눌러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오랜 팬심을 담아 크리스 흉내를 내보았는데, 똑같지도 않은 데다 웃기는 데에도 실패한 듯하여 분위기까지 싸해지니 자괴감이 들고 괴롭다. 그만큼 크리스의 개성은 나 따위가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대체 크리스가 누구이기에 이 난리인가, 싶은 독자도 있을 테니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크리스, 일명 소련 여자는 지난 2019년 데뷔했다. 그의 데뷔 내막은 이렇다. 그해 7월 26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그의 소속팀 유벤투스는 내한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 호날두는 내한 경기에 45분 정도 출전하기로 계약했으나 이를 어기고 경기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른바 노쇼, 즉 먹튀를 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호날두는 메시와 양강 구도였다. 한국의 해외 축구 팬이 메시파와 호날두파로 나뉠 정도로 팬덤이 두터웠다. 호날두는 먹튀에 대한 제대로 된 해명과 사과 없이 넘어가서 한국 팬의 분노를 샀다. 내한 일정을 소환한 다음에는 한국 팬을 무시하는 듯한 언행을 이어가며 인터넷에서 국민적인 비호감이 되었다. ‘호’라는 음절이 금지돼 ‘호불호’가 ‘메불메’가 되었을 정도였다. 

호날두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던 7월 31일, 한 러시아 여성이 친구(유튜브 채널 ‘크리스 [구 소련여자]’의 편집자 박힘찬)와 함께 공터에서 호날두 유니폼에 기름을 뿌리고 불태운 후 카메라를 마주 보고 이렇게 소리쳤다. “호날두 X발 놈아” 이 영상은 인터넷 커뮤니티와 소셜 미디어에서 ‘호날두 유니폼을 불태우는 러시아 여자’라는 제목으로 삽시간에 퍼지며 곧바로 화제가 되었다. 영상 속 주인공은 BBC 등 해외 언론에도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단숨에 유명세를 얻었는데, 훗날 우리에게 소련 여자로 익숙해진 유튜버, 크리스다.

호날두의 티셔츠를 불태우고 자본주의의 화신 소련 여자를 소환하는 강령술 영상이다.

경고: 호날두가 아무리 싫더라도 어린이 여러분은 이 영상을 따라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순수함 절대 지켜.

해당 영상이 내게 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소련 여자가 등장할 당시, 한국어로 활동하는 외국인 유튜버는 K문화에 대한 이방인의 리액션을 중계하는 방식에 집중했다. 영국남자 조쉬 등이 대표적인데, 황천의 뒤틀린 애국심, 즉 국뽕을 건드리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한편 ‹미녀들의 수다›, ‹비정상회담› 등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외국인은 지적이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지닌 채, 대부분 외국 문화를 소개하는 가이드에 가까운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한국인이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활동했고, 한국을 풍자하는 일은 드물었다. 로버트 할리, 이다도시 등 1세대 외국 방송인 시절부터 쭉 그러했다. 개인적으로 ‘외국인이 한국인의 뒤틀린 심정을 더욱 잘 볼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있던 차에 크리스가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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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이들의 지적이고 차분한 인상과 정돈된 포즈는 스타트업 CEO 세미나에 참석한 듯한 인상을 준다. 아니면… 야레야레 못 말리는 아가씨”라고 속삭이며 춤을 출 듯한 집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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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POP보다 역시 K-Chicken인 법이다. 한국만큼 치킨집의 수가 많고 치킨이 맛나기까지 한 국가는 세계적으로 드물 것이다.

크리스는 달랐다. 그의 영상은 한국인의 심연을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호날두 유니폼을 불태우는 행위는 외국의 과격한 훌리건이나 할 법한 짓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돌 팬덤에서 굿즈 화형식은 흔한 일이다. 크리스는 이를 수면 위로 드러내 풍자적으로 그려낸 셈이다. 크리스의 독특한 지점은 두 번째 영상에 더욱 잘 드러난다. 그는 유튜버로 데뷔한다는 말을 꺼내며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 나 국뽕이다. 국뽕 잘해서 ‘영국남자’처럼 될 거다.” 곧이어 손흥민부터 시작해 ‘두유 노?’ 클럽에 있는 인물 리스트를 외운다. 한 마디로 경이로웠다. 크리스는 유튜브로 한탕을 노리는 한탕주의와 자기 계발에 미쳐 있는 한국인, 국뽕이라고 불리는 애국심을 동시에 풍자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동양학을 전공했고, 한국 대중 문화에 드러나는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주제로 논문을 쓴 적이 있다. 이미 한국인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한국에 온 것일 수도 있다. 편집자 또한 최근 발간한 소설 『백만 유튜버 죽이기』를 보면 신랄하게 한국 사회를 풍자하는 태도를 지닌다. 이 둘의 의기투합은 폭발적인 시너지의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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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도 귀감이 되는 말이다. 빨리 국뽕이 차오르는 글을 써서 조회수가 폭발하고 정부 지원금도 받는 것이 꿈이다. 국뽕을 자극하려면 다른 국가와의 비교를 통해 한국의 우월함을 증명하거나 자국에 대한 가짜뉴스나 신화를 만들어야 한다. 신화는 역시 건국 신화다. 결국 이 두 조건을 만족하려면 ‹건국 전쟁›이라는 제목을 지녀야 할 듯하다. 그런데 나는 외국인이 아니니까 사이버 렉카 취급당할 듯하다.

한국인의 심연을 제대로 풍자하려면 그에 적합한 형식이 필요하다. 크리스의 영상은 몬티 파이선Monty Python 식의 코미디를 연상시킨다. 채널 편집자인 박힘찬 작가는 실제 몬티 파이선의 애청자다. ‘코미디의 비틀스’라고 불리는 몬티 파이선은 1960년대부터 영국에서 활동한 전설적인 코미디 그룹이다. 굳이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피식대학’ 느낌이랄까. 한국에서는 몬티 파이선이 찍은 극장용 영화 ‹몬티 파이튼의 성배›(1973)로 유명하다. 몬티 파이선의 코미디는 부조리하며 초현실적이다. 이들의 쇼는 여러 스킷(작은 상황극)으로 구성되는데, 스킷이 부드럽게 연결되지 않고 툭툭 끊기며, 인물끼리 대화도 안 통한다. 쇼에 등장한 모든 캐릭터가 아무 말 대잔치를 하는 느낌이다. 또한 스킷 중간마다 테리 길리엄(‹브라질›(1984)과 ‹12 몽키즈›(1999)로 유명하다)의 애니메이션 작업을 삽입하면서 제4의 벽이 무너지기도 한다. 자막 오류 등 영상 요소를 이용한 개그와 방송 패러디도 적극적으로 쓴다. 그들의 개그 너머에는 영국 정치는 물론, 인간 전반에 대한 냉소와 허무주의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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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제작된 영화인데도 지금 봐도 새롭다. 하드코어한 ‹SNL› 느낌이랄까. 넷플릭스에 있으니까 한 번 보기를 권한다. 아서 왕과 성배 전설이 와장창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나름 완성도도 훌륭하다. 이 시리즈의 3편 ‹삶의 의미›는 박찬욱의 ‹박쥐›가 타기도 했던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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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 전설 중 흑기사를 풍자한 파트다. 가오 하나로 사는 캐릭터라 팔 하나가 잘려 나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서 왕에게 덤빈다. 이 외에도 니! 라든지 마녀사냥, 아서 왕에 맞서서 코뮤니즘을 외치는 서민 등 킬포가 한가득하다.


‘소련 여자’도 에피소드마다 이야기의 연결이 끊기는 건 기본이고, 아무 말 대잔치가 펼쳐진다. 자막이나 댓글에 대한 반응을 활용해 제4의 벽을 무너뜨린다. 영상 중간마다 크리스의 편집자 디스를 삽입하기도 하며 제2대 소련 여자로 불리는 조연 샌즈가 서사에 끼어들기도 한다. 마치 한국 예능을 어설프게 따라 하는 느낌이다. 가끔은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짤방을 보내고 싶을 정도로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넘친다. 나아가 세상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보는 몬티 파이선 정신을 계승하기도 하는데 이를 말로 표현하기엔 복잡하니까 직접 영접해 보자. (개인적으로 ‹새벽에 엄마 몰래 라면 끓여먹기!› 영상을 추천한다)

새벽에 몰래 라면을 먹는대서 보았는데 어느덧 LH와 비트코인 풍자를 하고 있다. 소련 여자의 스타일이 가장 잘 녹아 있는 영상이라 생각한다.

크리스가 유튜브 활동을 본격적으로 할 때, 수도권 지하철 1호선 리뷰 영상을 올린 적이 있다. 지하철 1호선은 지하철 빌런이 등장하는 마계로 소문난 곳이다. 다큐멘터리처럼 있는 그대로 찍기만 해도 조회수가 나와서 많은 유튜버가 소재로 애용한다. 그는 지하철 1호선을 ‘한국의 작은 러시아’라고 말하며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고 농담을 던진다. “지구 멸망 이후에 탄 열차와 같은” 1호선에서 마주한 풍경―지하철을 어슬렁거리며 시비를 거는 노인, 크게 찬송가를 부르며 전도하는 개신교인, 지하철 잡상인 등등―을 통해 한국이 지닌 기이한 혼종성을 내보인다. 인생은 가까이서 볼 때는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란 말처럼,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다닐 때는 자연스러웠던 풍경이 크리스의 시선을 거치자 부자연스럽고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이후에 제작된 크리스의 영상은 지하철 1호선 리뷰 영상에 기반해 반복과 변주한 결과물에 가깝다. 보통 “나다.”로 시작하는 영상은 지난 영상에 달린 악플을 소개한 다음, 이에 대한 리액션을 펼치며 진행된다. 그는 일진이 애용하는 스타일로 옷을 입는다든지. 먹방 유튜버를 따라 한다든지, 뒷광고로 삽입해야 할 광고를 영상 중간에 삽입해 앞광고로 만든다든지, 하는 식으로 한국의 인터넷 밈을 영상에 마구잡이로 삽입해 한국을 풍자한다. 인터넷 밈뿐만 아니다. 『환단고기』에 기반한 유사 역사와 유구한 반공주의 및 온갖 음모론도 풍자 대상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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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여자의 영상을 보다가 당황하지 마시라. 크리스는 처음부터 대놓고 광고를 한다. 심지어 스킵을 할 수도 없다.

크리스의 풍자에 이유는 없다. 그냥 우스꽝스럽고 이미지가 웃겨서 한다. 수많은 풍자를 아무 이유도 없이 연결하면 기분이 나쁠 만도 한데, 왜인지 모르게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좋아’랄까! 소련 여자 영상의 구성은 하나의 콘텐츠에 집중하기 힘든 한국의 정신 없는 소셜 미디어 풍경을 감각으로 체험시키기 때문인 걸까? 게다가 그의 영상은 혼란스럽지 않다. 보통의 유튜버는 혼란한 각을 발견하면 ‘좋아요’를 노리고 과잉된 리액션과 욕설을 쏟아내며 구독자의 도파민을 자극한다. 하지만 크리스는 정반대로 반응한다. 그는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의중을 도저히 알 수 없는 표정만 지을 뿐이다. 여기에는 크리스가 러시아 사람이라는 콘셉트가 숨어 있다.

러시아는 불곰국 시리즈라고 불리며 인터넷 밈으로 승화한 국가다. 불곰국 밈은 군인 여럿이 겨우 드는 통나무를 여자 한 명이 혼자 통째로 든다든지, 사람이 불곰을 타고 다닌다든지 하는 초현실적인 사건이 일상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이미지에 기반한다. 최저 기온이 영하 수십 도까지 떨어지는 나라인 만큼 거기에 사는 사람은 그만큼 강할 거라는 고정관념이 강해서 왠지 설득력을 갖춘다. 이처럼 한국보다 더욱 혼란스러운 지옥(?) 러시아에서 온 크리스는 고요한 태도를 고수한다. 오함마를 드는 등 엽기적인 행동을 할 때마저도 무덤덤한 표정이다. 아무리 혼란스러운 상황이 생겨도 평온한 태도로 일관하는 크리스의 말투는 시청자가 그런 상황에 거리를 두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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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술집에서 두 남성이 칸트로 토론하다가 서로 총으로 쏴죽였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국가다. 그만큼 러시아 밈은 상상초월할 정도로 재밌다. 이미 세계적인 놀림거리(?)이므로 소련 여자도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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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상징이기도 한 불곰은 러시아 밈의 단골 소재다. 불곰을 기르는 러시아인의 모습은 강아지를 기르는 듯하다. 유사품으로는 캥거루가 맨날 집을 드나든다는 호주 밈이 있다.

또 하나 눈여겨볼 만한 점은 채널명이 러시아 여자가 아니라, 소련 여자란 거다. 크리스는 1995년~1997년생으로 추정되는데, 소련은 그가 태어나기 전인 1991년 해체됐다. 소련 여자는 진짜가 아니라 콘셉트에 불과한 셈이다. 만약 그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유행하던 시대에 동일한 콘셉트로 활동했다면 진작에 간첩으로 몰려 남산으로 잡혀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소련은 망한 지 20년도 더 됐다. 제아무리 소련을 위대하다고 말해도, 모두가 우스갯소리로 취급한다. 그래서 소련에 대한 인터넷 밈은 공산주의를 언급하더라도 한국인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지 않는 아이러니를 지닌다. 크리스는 돈에 미쳐 있는 한국을 매섭게 비판하지만, 소련 여자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얻는다.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비판 요소는 여전히 시청자의 마음에 남기면서.

크리스의 영상은 미디어 아트로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농담이 아니다. 소련 여자가 유행할 즈음 아티스트 류성실은 정치 BJ를 풍자하는 ‹체리 장› 연작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체리 장›은 위악적인 인터넷 방송 BJ를 설정해 정치적 음모론이 생기고 확산되는 환경을 그려낸다. 작가는 키치한 정치적 구호와 음모론이 지배하는 한국 정치의 혼란스러운 풍경을 체험하도록 이끈다. 릴스와 쇼츠, 인터넷 밈을 콜라주한 혼종으로 한국의 어두운 심연을 그리는 크리스의 영상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영상의 목적의식이 작품만큼 확실하진 않지만, 이름을 가리면 미디어 아트 작품으로 봐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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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장› 연작 중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다. 미디어아트라 해서 어렵다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체리장›은 정치 유튜브의 조악한 미술을 모두 모아다가 만들었다. 키치의 정수랄까. 내가 본 미디어아트 중 가장 재밌다고 추천할 만큼의 재미가 있다.

인터넷 밈의 미학은 서로 다른 이질적 요소가 한 곳에 공존하는 상황에서 생긴다. 그런 면에서 소련 여자는 인터넷 밈의 미학에 충실하면서도, 모두가 저마다의 평행우주에 사는 파편화된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구독자라면 잘 알겠지만, 크리스는 푸틴을 풍자하는 영상을 꾸준히 업로드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러시아인이라는 이유로 마녀사냥을 당했다. 악플에 응수하다가 지쳤는지,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어쩌면 자신이 풍자한 것 이상으로 미쳐있는 진짜 광기의 나라, 한국의 일면을 마주한 것일지도 모른다.

크리스는 지난 3월 22일 1년여 만에 복귀를 선언했다. 자신의 채널 편집자인 박힘찬의 소설 『백만 유튜버 죽이기』를 홍보하면서 “돈 때문에 복귀했다”라고 당당히 말한다. “채널의 주인장 크리스는 (구독자를 포함한) 시청자를 ‘개돼지’에 빗댄다. (글쓴이 주: 개돼지는 영화 ‹내부자들›의 대사에 나오며 인터넷 밈이 됐다) 과격한 비유와 함께 크리스는 개돼지에 대한 감사 인사를 빼먹지 않는다. 크리스는 손님이 왕이고 시청자가 갑인 시대에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며 그들의 치부를 건드리는 왕실 광대 노릇을 하는 중이다. 언제 떨어질지는 모르지만 힘닿는 데까지 줄을 타보는 게 우리 목표다.” 박힘찬의 이런 당부대로라면 소련 여자는 지금까지의 영상보다 더욱더 파격적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11_김경수_소련여자

크리스는 결국 유튜브에 복귀했다. 크리스에게 돈을 직접 건네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그녀의 멤버십에 가입하면 된다. 크리스는 멤버십을 아보카도와 갈비로 나누었다. 이 둘은 크리스의 최애 음식이다. 아보카도는 월 4900원, 갈비는 월 6만원이다.

이 글을 마감한 직후에 새 영상을 업로드했고, 그 영상도 무척 재밌고 독하다.

Artist

김경수(@vivre_wasavie)는 영화평론가이자 인터넷 밈meme 연구자다. 학부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화제를 모은 졸업논문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은 단행본으로 나올 채비를 마치고 있다. 영화와 인터넷 밈을 동시에 연구하는데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현재 «코아르»에 영화 비평, «여성동아»에 인터넷 밈 비평을 연재하고,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 (FIPRESCI) 한국 지부 정회원이자 인문학 스탠드업 코미디 페이지 ‘인문학적 개소리 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밈 원정대: AI 커버 vs 인간 대격돌

thumbnail_밈 원정대_김경수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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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슈에 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요새 유행하는 노래를 꼽으라면 비비의 ‘밤양갱’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가수 장기하가 작사, 작곡한 곡으로 ‘어둠의 아이유’라 불리는 비비의 달달한 음색과 서정적인 가사가 인상적인데요. 오리지널 곡이 끝이 아닙니다. AI 커버 기술을 활용해 아이유, 오혁, 박명수, 故 김광석 버전까지 나오며 신드롬이 되고 있어요. 그중 가장 화제가 되는 버전은 바로 배우 황정민의 ‘밤양갱’입니다. 특정 인물의 목소리를 AI가 분석해 뚝딱 만들지 않고, 황정민이 출연한 영상물에서 가사에 상응하는 음절을 찾고 해당 장면과 음성을 하나하나 채집해 몽타주했어요. ‘밈 원정대’를 연재하는 인터넷 밈 연구자 김경수 님은 해당 영상을 가리켜 초인적인 노력이 담긴 인간 악기 작품이라고 평합니다. 날이 갈수록 자연스러워지는 AI 커버, 매끄럽지 않더라도 한땀 한땀 자르고 기우며 손맛을 극도로 살리는 인간. 이 격돌에서 승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01_밈 원정대_김경수

섬네일에서 짐작할 수 있듯, AI 커버도 감상용 AI 커버와 유머용 AI 커버로 나뉜다. 밈을 보는 듯한 박명수와 케이셉 라마K$AP Rama 커버에 더해진 섬네일과는 달리 혁오 커버의 섬네일은 왠지 모르게 감성적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도 얼굴을 찌푸린 황정민이 주는 임팩트를 넘지 못한다. AI 커버의 섬네일이 가짜 광기라면 황정민 커버의 섬네일은 진짜 광기랄까. 고인물만이 만들 수 있는 미감이다.

망했다. 나는 망했다.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최근 마감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가 둘이나 생겼다. 그들은 마감이 코앞일 때마다 스멀스멀 등장해서 나를 한두 시간 가까이 유튜브에 가두어버린다. 유튜브에서 겨우 탈출하면 마감 기한이 촉박한 미완성 원고가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 홀리라고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며 따지더라도 할 말이 없다. 그저 “으악 안 돼!”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는 독자가 생기기 전에 자기연민은 그만두겠다. (여러분도 나와 비슷한 신세로 만드는 게 진짜 목적이니) 요즘 마감을 망치는 두 주인공을 소개한다.

(글 제목에서 보이듯) 하나는 인공지능(AI) 커버다. 보통 AI 커버는 원곡에 AI가 딥러닝으로 학습한 다른 가수의 목소리를 덧입히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그 후 웃긴 짤방을 섬네일thumbnail로 정한 후 업로드한다. AI 커버는 원곡자의 창법에 맞춰 다른 목소리를 덧입히는 터라 완벽한 재현은 불가능하다. 특히 오혁 등 창법이 독보적인 경우에는 다른 가수의 목소리를 덧입힐 때 어색한 티가 확 난다. 고음이 뭉개지기도 하고, 프레디 머큐리나 브루노 마스 등 외국 가수가 커버할 땐 (당연하게도) 한국어 발음이 제법 어눌해진다. 원곡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커버한 걸 재가공하기도 한다. 여튼, 중요한 건 그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는 거다. 심지어 중독적이다.

02_프레디 머큐리_사건의 지평선

프레디 머큐리 ‘사건의 지평선’

얼마 전에도 마감을 코앞에 두고 AI 커버에 붙들렸다.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나를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르는 ‘잔혹한 천사의 테제’ AI 커버 영상으로 안내한 탓이다. 에반게리온 초호기와 시나트라가 함께 있는 우스꽝스러운 섬네일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이 무슨 끔찍한 혼종인가…’ 생각보다 퀄리티가 괜찮았다. 크리스마스에 틀어도 괜찮을 정도로 감미로웠다. 무엇보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목소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아서 어안이 벙벙했다. 하나만 보고 마감에 집중할 계획이었으나, 프레디 머큐리가 부르는 ‘잔혹한 천사의 테제’ AI 커버 영상이 추천 영상으로 떴다. 아스카 랑그레이 얼굴에 프레디 머큐리를 합성한 섬네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영상을 클릭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흘렀다. 끝내고 나니 자괴감이 들고 괴로웠다. 댓글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제법 보이는 상황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프랭크 시나트라 ‘잔혹한 천사의 테제’

프레디 머큐리 ‘잔혹한 천사의 테제’

AI 커버의 유행은 재작년 즈음부터다. AI 커버를 제작하는 툴이 급속도로 대중화되면서 조금만 검색하면 누구나 할 수 있을 정도로 난도가 낮아졌다. 지난 2020년 Mnet에서 ‹AI음악프로젝트 다시 한번›을 기획할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풍경이다. 고인이 된 뮤지션 두 명의 무대를 AI로 재현한다는 목적 아래, 故 김현식이 부르는 박진영의 ‘너의 뒤에서’와 故 터틀맨이 부르는 ‹이태원 클라쓰›의 OST ‘시작’을 AI 커버로 제작하고,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해 고인의 무대를 생생히 재현했다. 해당 프로그램은 상영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나 또한 의심 반 기대 반 유튜브에서 방송 클립을 재생했다. AI 기술이 죽은 사람을 되살려 무대에 올린다는 사실에 SF 소설이 현실화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 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잘 제작한 AI 커버의 자연스러움이 주는 충격은 덤이었다. 영화를 발명한 뤼미에르 형제의 초기작 ‹열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1895)을 처음 본 관객이 기차가 진짜로 다가오는 줄 알고 지레 겁먹었다는 루머가 있는데,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처럼 AI 커버는 놀라운 구경거리에 가까웠다.

김현식 ‘너의 뒤에서’

추가로 편성해 달라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해당 프로그램은 아쉽게 계속 제작되지 못했다. AI 음성 합성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지 않은 탓이었다. AI가 학습할 원본 자료를 수집하고, 목소리를 제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노래 한 곡이 탄생하는 데 무려 100일가량이 소요됐다. 유족의 허락 등 여러 윤리적인 문제도 생겼다. 이듬해 SBS와 TVING에서 AI 커버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임윤택과 유재하, 프레디 머큐리 등 고인의 목소리를 되살린 AI 커버가 제작됐는데 큰 인기는 끌지 못했다. 기계음 특유의 부자연스러운 느낌은 사라졌지만, 처음 공개할 때만큼 충격을 주는 데 실패했다. 방영 직후 일반인도 AI 커버를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한 까닭이다.

이제 AI 커버는 장난감에 가깝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영화의 탄생을 두고 “지금까지 예상할 수 없던 엄청난 유희 공간을 우리에게 약속하는 매체”라고 평했다. 카메라로 대상을 클로즈업한다든지, 슬로우 모션으로 촬영한다든지 하는 기법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고, 기법 자체도 놀잇감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사실 모든 기술이 그렇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AI 커버가 생기기 전에 AI를 이용한 인터넷 밈 하나가 유행했다. ‘다메다네’라고 불린 그것은 콘솔 게임 ‹용과 같이 5: 꿈을 이루는 자›의 OST인 ‘바보 같이’가 원본이다. 야쿠자 두목이 술 한잔 걸치고 부른 듯한 느끼하고 애절한 노래는 서양인 오타쿠가 립싱크한 영상이 발굴되면서 인터넷 밈으로 가공됐다. 영상 속 양덕후는 본인 딴에는 진지하지만 남이 보기에 우스꽝스러운 과잉 표정 연기를 선보인다. 보기만 해도 웃겨서인지 밈 창작자는 딥페이크 기술로 그의 표정만 빌려다가 빅맥, 궁예 등 다른 오브제에 합성하는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선보였다. 남성 코미디 그룹 나몰라패밀리의 김경욱은 이런 제작 방식을 빌려와 ‘나 일론 머스크Na Elon Musk’ 밈을 제작해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는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나 일론 머스크라는 캐릭터를 더욱 우스꽝스럽게 전달하기 위해 일론 머스크를 딥페이크했다. 아마 이 같은 인터넷 밈이 AI 기술에 대한 반감을 덜어주었을 테다.

다메다네 ‘빅맥’

다메다네 원본

대중은 AI 커버에 왜 끌리는 걸까? 뻔한 이야기지만 아마 예기치 못한 조합에 대한 호기심이 클 것이다. 간혹 우리는 어떤 노래를 들을 때 자기가 원하는 다른 가수가 해당 노래를 부르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AI 커버는 이를 실제로 구현한다. AI 커버가 생기기 전에는 곡을 녹음한 가수의 목소리를 다른 목소리로 대체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우리는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기존에 나온 노래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AI 커버 덕분에 이제 상상에서만 흐르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다. 지금이야 딘Dean이 3년이라는 오랜 공백 끝에 컴백했지만, 그가 잠수를 타고 있을 때는 딘의 AI 커버가 열풍이었다. 딘 AI 커버 곡만 모은 플레이리스트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딘의 세련된 목소리가 거의 모든 여자 아이돌 노래에 찰떡같이 달라붙어 가능한 일이었다. AI가 딘으로 빙의한 뉴진스의 ‘New Jeans’는 조회수가 361만에 달한다. ‘Hype Boy’를 커버한 영상 조회수도 207만이다. 자매품으로 프레디 머큐리, 김광석, 브루노 마스, 아이유, 임재범 등이 ‘인간 악기’로 쓰이고 있다. AI 커버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아도 즐기는 데에는 전혀 문제없다. 오히려 가짜라서 더 재미있다. 어색한 구절이 있어도 웃어넘기면 되니까. 최초의 AI 커버로 볼 수 있는 보컬로이드 아이돌 하츠네 미쿠(初音ミク)도 기계음으로 노래를 불렀기에 오타쿠의 전폭적인 사랑을 얻는 데 성공했다. 어설픈 목소리가 오히려 모에(萌え·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사랑스러운 포인트를 지칭하는 서브컬처 용어)를 만든 것이다. 만약 AI 커버와 사람이 부르는 음원을 구별할 수 없다면 되려 불쾌한 골짜기나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까?

딘 ‘Hype Boy’

03_밈 원정대_하츠네 미쿠

하츠네 미쿠

이보다 한 발짝 더 나간 AI 커버도 있다. 최근 어떤 AI 커버 영상을 보고 울었다. 분명 AI 커버는 가짜에다 장난감이라고 생각하는데도 울음이 터졌다. 바로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 한국판에서 짱구 아빠 신형만 역을 맡은 故 오세홍 성우 목소리로 생성한 노라조의 ‘형’ 영상이다. 오세홍 성우의 목소리 데이터를 성실히 모아다 제작한 노래는 짱구 아빠가 직접 노라조의 노래 속 위로의 메시지를 건네는 듯했다. 이처럼 신형만이나 ‹심슨 가족›의 호머 심슨 등 유명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목소리를 AI 커버로 돌리는 영상도 유행하고 있다. 우리는 캐릭터의 목소리가 실은 성우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우의 탁월한 연기력 때문에 마치 캐릭터가 생생히 살아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AI 커버는 목소리를 학습하고 재현하는 기술의 산물이다. 우리가 감동하는 까닭은 순전히 그 캐릭터가 지닌 힘 때문이다. AI 커버라는 매체를 빌려 우리는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를 현실에서 잠시 만나는 마법 같은 경험을 누린다. 물론 AI 커버는 목소리의 악의적인 도용 등 윤리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고, 이를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AI 커버가 창출하는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다. 인터넷 밈이 된 AI 커버는 우리의 동심을 되살린다. 기상천외한 조합을 원하는 호기심, 서툴러도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 픽션 속 캐릭터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순진무구함 등 AI 커버를 활용해 우리가 되찾을 수 있는 감정은 지금 이 시대에 소중하다.

AI 커버만큼이나 내가 주목하는 또 다른 구원자(?)는 ‘제프프’다. 3년 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그의 매력적인 리믹스 영상은 하나도 빠짐없이 볼 정도로 애청자다. 좋아요, 구독, 알람은 물론 틈이 날 때마다 주변 사람에게 영업할 정도로 미쳐 있다. 그의 손을 거치면 배우 황정민, 축구 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인간 악기로 변한다. 얼마 전 그의 신작이 업로드됐다. 황정민이 부르는 비비의 ’밤양갱’이다. ‘밤양갱’은 발매되자마자 수능 금지곡 반열에 오를 정도로 중독성이 강한 곡이다. 그래서 온갖 AI 커버의 표적이 되었는데 노래를 만든 장기하의 AI 커버가 화제를 끌었다. 비비의 별명이 ‘어둠의 아이유’인 만큼, 아이유의 AI 커버도 인기다. 오혁, 박명수, 故 김광석의 AI 커버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활발히 공유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느 버전도 황정민이 부르는 ‘밤양갱’의 조회수를 넘어서지 못했다. 하루에 서너 번 보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황정민 ‘밤양갱’

제프프의 영상은 지난 에세이에서 소개한 ‘조교’에 기반한다. 정확히는 ‘음MAD’라고 부르는 독립적인 장르다. 보통 캐릭터의 발음과 그 발음을 하는 순간의 영상을 하나하나 따서 손수 몽타주하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황정민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영상을 만든다고 치자. 이를 위해 황정민이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나 예능을 쭉 검토하면서 ‘무’, ‘궁’, ‘화’, ‘꽃’, ‘이’, ‘피’, ‘었’, ‘습’, ‘니’, ‘다’라는 음절 10개 모두 다 따로 떼어낸 뒤 한 문장으로 합성하는 식이다. 모든 음절의 조가 다른 데다가, 음절마다 대응하는 영상 속 캐릭터가 달라지니 매우 혼란스럽게 보인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스꽝스럽지만, 이내 경이로움이 생긴다. 조교를 제작하는 과정에 들이는 초인적인 노력이 훤히 보여서다.

제프프는 손수 비트를 제작하고, 최대한 인위적인 조작을 배제하면서 그 인물이 실제 발화한 어절만 편집해서 노래에 활용한다. 상상할 수 없는 노동력이 동원되는 것이다. 음MAD를 제작하는 심영물 유튜버인 ‘차커’와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조교를 일컬어 “노가다이자 개고생”이라고 말했다. 더욱 자연스러운 음절을 발굴하기 위해서 평소에도 다양한 콘텐츠를 보고 음절을 추출해야 한다. 0.n초 짜리 영상을 오리고 붙이는 일을 수천 번 반복하는 과정을 거친다. 마치 영화 제작을 방불케 하는 정성이 깃든 행위는 그야말로 인간판 AI 딥러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지난한 과정을 들은 후에야 나는 비로소 밈 창작자의 꿈을 접었다.

수리남 리믹스

내게는 AI 커버 영상보다 제프프의 영상이 더 사랑스럽다. 음MAD에 담긴 정신이 내 마음을 울린다. 음 MAD는 일본에서 건너와 디시인사이드를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국내에 본격적으로 퍼진 계기는 ‹데스노트›에 출연하는 캐릭터들의 목소리를 합성한 음MAD 바카야로이드(주인공 야가미 라이토가 자주 외치는 대사인 “바카야로”와 보컬로이드의 합성어) 덕분이다. 이처럼 특정 캐릭터나 인물을 조교의 소재로 삼는 것을 밈 제작자의 용어로 ‘인간 악기’라고 칭하는데, 심영물, 고길동, 타짜 등 한국의 전통적인 인터넷 밈이 자리 잡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인간 악기로 자주 쓰인다. 당시 한국 인터넷 밈의 기반은 ‘잉여력’이었다. 잉여는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요즘 말로) ‘갓반인’이 되지 못한” 존재다. 인터넷 밈은 잉여들의 드러나지 않은 목소리가 만들어 낸 성취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잉여는 인터넷에서나마 존재감을 획득하고자 인터넷 밈을 제작했고, 이렇게 밈을 제작하는 데 들인 열정과 노동을 속칭 잉여력이라고 불렀다.

04_밈 원정대_김경수

바카야로이드

바카야로이드 (영원히 고통받는 라이토)

지금의 잉여력은 예전과 조금 차이가 있다. 초등학생부터 장래 희망을 유튜버로 꼽는 세상에서 밈 제작자는 관심이 곧 돈벌이가 되는 시대정신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존재다. 인터넷 밈 자체가 저작권을 침해하므로 유튜브에 올린다고 한들 아무런 수익을 창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백만의 조회수가 터지더라도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원칙적으로 0원이다. 그러면 그들은 이토록 가성비 떨어지는 행동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나? 인터넷 밈은 기어이 즐거운 경험을 타인에게 선물하겠다는 친절한 마음에서 비롯한다. AI 커버 영상은 프로그램에 입력하면 알아서 나오지만, 음MAD는 제작자 본인의 창작 취향에 충실하며 기어이 중노동을 감수한다. 나는 여기서 AI가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고전적인 예술가의 열정을 마주한다. 후대에 음MAD는 인간의 중요한 예술 행위 중 하나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오직 사람에게만 기대할 수 있는 종류의 창작이기 때문이다.

Writer

김경수(@vivre_wasavie)는 영화평론가이자 인터넷 밈meme 연구자다. 학부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화제를 모은 졸업논문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은 단행본으로 나올 채비를 마치고 있다. 영화와 인터넷 밈을 동시에 연구하는데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현재 «코아르»에 영화 비평, «여성동아»에 인터넷 밈 비평을 연재하고,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한국 지부 정회원이자 인문학 스탠드업 코미디 페이지 ‘인문학적 개소리’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애프터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4인에게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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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비애티튜드가 주목하는 요즘 ‘무엇’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나라에 의외로 대중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상이 없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물론 세보면 많지만, 업계에서 신뢰하는 상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중 비영리로 운영하는 한국대중음악상은 수십 명의 전문 선정위원이 오직 음악적인 면모에 집중해 난상토론을 하는지라 수상자 발표 시즌이 오면 모든 매체가 결과를 송출한답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한국대중음악상 결과가 공개됐습니다. 가장 주목 받는 종합분야에 해당하는 ‘올해의 음반’, ‘올해의 노래’, ‘올해의 음악인’, ‘올해의 신인’은 각각 빈지노의 ‹NOWITZKI›, NewJeans의 ‘Ditto’, 실리카겔, KISS OF LIFE에 돌아갔는데요. 한곳에 쏠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선정위원의 다양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블럭 님이 선정위원 네 분에게 공식 선정의 변 이외의 추가적인 코멘트를 부탁드렸어요. 이번 기회를 빌려 작년 한국 대중음악 신을 타오르게 했던 주인공들을 다시 한번 체크해 보세요.

지난 2월 29일 한국대중음악상이 최종 수상자를 발표하며 21번째 막을 내렸다. 한국대중음악상의 꽃인 종합분야는 ‘올해의 음반’, ‘올해의 노래’, ‘올해의 음악인’, ‘올해의 신인’으로 나뉜다. 마땅히 어울리는 수상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선정위원들은 서로 다른 시선으로 고민하고, 바라봤을 것이다. 사무국장이 지닌 권력(?)으로 선정위원 네 사람을 닦달해 종합분야에 대한 코멘트를 갈취했다. 조혜림, 신샘이, 이수정 선정위원은 각각 긍정, 중립, 비평적인 논조로 접근했고, 김윤하 선정위원의 자유로운 의견도 포함했다. 이번 리뷰를 통해 작년 한국 대중음악 신을 달군 주인공―빈지노, NewJeans, 실리카겔, KISS OF LIFE―에 대한 다양한 시야를 공유할 수 있길 바란다. 참고로 시상식은 다음 링크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이번 리뷰에 참여한 선정위원에 다시 한번 감사한다.

조혜림 : 음악 콘텐츠 기획자. 음악에 관해 만들고, 듣고, 보고, 쓰는 일을 한다. 좋은 음악과 음악가를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신샘이: 음악 리뷰어. 플레이리스트 큐레이션, 음악 리뷰까지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을 소개한다.

이수정: 뮤직 콘텐츠 에이전시 알프스 소속으로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을 기획하고 프로그래밍한다.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케이팝에서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을 다룬다. 음악을 더욱더 선명한 말과 글로 풀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01_한국대중음악상_korean Music Award

올해의 음반 – 빈지노(Beenzino) ‹NOWITZKI›

빈지노(Beenzino)는 뛰어난 스토리텔러다. 그는 청춘의 단면을 눈에 잡힐 듯 생생하게 묘사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제는 빛바래진 가치들에 대한 낭만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NOWITZKI›의 빈지노는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자신의 삶을 노래한다. 신혼(‘침대에서/막걸리’), 여행(‘여행 Again’), 군대(‘Camp’)처럼 또래의 한국 남자들이라면 겪을만한 사건부터 일반적인 것과는 동떨어진 화려한 예술가의 삶(‘Monet’, ‘Coca Cola Red’, ‘바보같이’ 등)까지. 그가 겪었던 시간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 가만히 들여다보며 각자의 삶을 반추하게 한다. 변화하는 삶의 단계에서도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와 지키고자 했던 멋을 잃지 않으며 현재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단선적인 진행을 벗어나는 플로우와 허를 찌르는 워드 플레이가 곁들여진 가사, 로파이Lo-Fi한 질감으로 포장한 세련되고 따뜻한 분위기의 프로덕션은 빈지노의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감각적인 사운드를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현재를 살아가는 30대 청년의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빈지노는 여전히 트렌드의 선두에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NOWITZKI›는 그를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 공식 선정의 변

02_한국대중음악상_korean Music Award

빈지노 정규 앨범 ‹NOWITZKI› 커버

조혜림: 올해의 음반으로 선정된 빈지노의 ‹NOWITZKI›는 앨범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모두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발매된 우수한 앨범들 사이에서 7년 만에 나온 빈지노의 정규 앨범은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변치 않는 청춘과 낭만의 상징임을 증명했다. 더불어 힙합이란 장르를 넘어 한국 대중음악계에 영원히 ‘멋’ 그 자체로 남을 아티스트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신샘이: 한 음악가가 긴 공백기 끝에 선보이는 음반은 청자에게도, 음악가에게도 독특한 의미를 갖기 마련이다. 그동안의 시간에 대해 서로가 음악을 통해 소통하고 해소하고자 하는 공통된 마음을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빈지노는 7년의 공백을 음악으로 멋지게 풀어낸다. 그의 음악적 감각은 벌어진 시간을 단번에 뛰어넘고, 진중하면서도 재치 있는 말솜씨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국대중음악상은 한 장의 음반이 가지는 가치와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준 ‹NOWITZKI›를 올해의 음반으로 결정했다.

이수정: 한국대중음악상 종합분야를 선정하는 최종회의 장면이 생각난다. 겨우 다섯 부문이니 빠르게 수상작을 정하자던 회의 초기의 결의는 결국 두 시간을 꽉 채우며 무력해졌다. 언성은 오가지 않았지만 왜 이 후보가 반드시 수상해야만 하는지, 혹은 왜 이 후보는 안되는지에 대해 신랄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선정위원이 많기 때문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선정위원들도 다수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 공격적으로 의견을 피력한다. ‘풀 렝스full-length’ 앨범이 아닌 음반이 음반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혹시나 음반의 완성도보다 음악인의 인지도나 활동력을 더 크게 반영하는 건 아닌지를 두고 토론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김윤하: 힙합을 좋아하는 이유는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그런 다양한 이유의 중심에는 언제나 ‘힙합에는 인생이 있다’라는 문장이 존재한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아 마이크를 든 MC들은 DJ와 결합해 세상 그 어떤 음악보다 서사와 노랫말이 주목받는 장르를 탄생시켰다. 빈지노의 ‹NOWITZKI›가 올해의 음반상을 받은 건, 그런 힙합의 기본 정신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행하는 음악가의 말과 생각을 더없이 세련되게 담아낸 앨범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있지도 않은 한(恨), 다 쓰지도 못할 돈과 여자 타령만 하다가 ‘국힙’이라는 단어가 일종의 조롱으로 전락한 시대에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은 채 자신의 삶을 똑바로 걸어가는 한 음악가의 진짜 힙합 앨범이 나왔다. 빈지노 앞에 늘 붙는 수식인 ‘멋’은 그대로인 채, 화학식만 바뀌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빈지노 수상 소감

03_한국대중음악상_korean Music Award

올해의 노래 – NewJeans ‘Ditto’

“라-타-타-타” 울리는 심장은 찬란하고 눈부신 그때의 우리에게 보내는 달콤하고 아련한 안부 같다. 교복을 입고 시공간을 감싸안으며 춤을 추는 소녀들의 희구하는 눈빛은 시간을 움직이고 낯익은 기억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1998년의 어느 학교에서의 보낸 발신이 아스라이 21세기에 닿아 애틋하고 그리운 너와 나를 이어줄 것이라 믿는다. 데뷔와 동시에 큰 성공을 이뤄낸 NewJeans가 4개월 만에 가져온 ‘Ditto’는 발표와 동시에 전 세대를 아우르는 선명하고 아름다운 유행가의 탄생을 알렸다. 강력하고 화려함으로 무장한 가요계에 느슨하고 꿈결 같으며 따스한 온도를 가져온 ‘Ditto’는 볼티모어 클럽 장르를 재해석하여 그 어느 때보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같은 설렘을 구현했다. 우리의 지나간 학창 시절을 반짝이는 사랑스러운 피사체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남겨주었고, 어설픈 듯하지만, 진심을 다한 마음과 진실한 우정은 누군가, 아니 우리의 가장 순수하고 행복했던 기억 속으로 살금살금 걸어들어와 마음을 자극했다. 그들이 보낸 ‘Ditto’란 애틋한 전언에 우리는, 전 세계는 NewJeans에게 사랑을 가득 담아 용기와 응원의 회신을 보낸다. – 공식 선정의 변

04_한국대중음악상_korean-Music-Award

뉴진스 싱글 ‹Ditto› 커버

조혜림: 올해의 노래로 뽑힌 뉴진스의 ‘Ditto’는 2023년 가장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설렘 가득한 곡임이 틀림없다. 화려한 음악으로 가득한 케이팝 신에 이 따스하고 꿈결 같은 음악은 신선하고 달콤한, 그리고 짜릿한 충격이었다. 아마 가장 많은 사람이 따라 부른 노래 중 한 곡이 아닐까?

신샘이: 지난해 ‘Attention’으로 올해의 노래 후보에 올랐던 뉴진스가 올해 ‘Ditto’로 마침내 올해의 노래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뉴진스가 ‘Ditto’ 이전의 음악에서 10대 소녀들의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찬란함과 풋풋함을 주된 정서로 삼았다면, 이번 ‘Ditto’에서는 계절을 바꿔 겨울의 맛을 보여줬다. 아름다운 추억을 꺼내볼 때 가슴이 시리도록 아련한 감정을 사운드와 비주얼로 구현해 낸 ‘Ditto’는 2023년의 노래로 기억될 뿐만 아니라 매년 겨울이면 울려 퍼질 새로운 겨울 노래가 될 것이다. 올해의 노래에 후보로 오른 곡들 모두 음악 팬들 마음에 뜨거움을 준 곡들이지만, 한국대중음악상은 긴 생명력을 가진 노래의 탄생에 손을 들어주지 않았나 싶다.

김윤하: 올해의 노래는 한국대중음악상 시작 이래 가장 유명한 이들이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는 부문이다. ‘대중이 모르는 대중음악’이라는 피눈물 나는 비난 속에서도 ‘저희 이런 후보들도 있는데요’ 수줍게 꺼내어 보여줄 수 있었던, 케이팝이 지금처럼 다수의 후보를 내지 못하던 시절에 기자들이 한 줄이라도 기사를 더 쓸 수 있게 만들어 준 고마운 부문이기도 하다. 이런 올해의 노래에서 ‘Ditto’가 수상한 건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스럽고, 어떤 의미에서는 특별하다. 2023년 한 해 동안 뉴진스가 발표한 여러 곡 중 무엇이 상을 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Ditto’만이 줄 수 있는 감상이다. ‘Ditto’는 일 년 내내 차트와 플레이리스트를 빛낸 뉴진스의 첫 겨울 노래이자, 2022년과 2023년 겨울을 잇는 대명사 같은 존재다. 섬세하게 잘 세공된 이 연결고리는 세대와 시대를 뛰어넘어,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저장해 놓은 애틋하고 코끝 찡한 겨울 기억을 하나하나 끄집어 꿰어냈다. 단지 인기곡이어서가 아닌 사랑 받는 곡의 이유, 나아가 우리가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를 알려준 곡이라는 점에서 더없이 특별하다.

NewJeans 수상 소감

05_한국대중음악상_korean Music Award

올해의 음악인 – 실리카겔

전작들부터 구축해 온 실리카겔의 사운드 하이웨이는, 점멸하는 신 사운드 수혈로 스탠리 큐브릭 같은 첨단을 열고 있다. 전복적인 기타 프레이즈는 흡사 ‘섬광처럼 번쩍이는 사막 유령들(곡 ‘Desert Eagle’ 콘셉트)’의 광란, 기계 같은 음성변조와 미니멀-맥시멀 라인을 광적으로 해체시켰다 조립하는 다채로운 악곡 구성들. 각자 멜로디를 써오고 앙상블식으로 이어 붙이다 보니 생경한 스케이프가 일어나고, 그것은 기존 소리들의 주파수와 연결되는 새로운 다중우주를 낳는다. ‘Desert Eagle’-‘NO PAIN’을 잇는 ‘Tik Tak Tok’의 대곡적인 멜로디라인과 메인리프, ‘에이블톤라이브 DAW’(‘MAX MSP 코딩프로그램’ 내 플러그인) 같은 ‘뉴 인스트루먼트’의 도입, 박제되기보다는 둥글게 흐르도록 놔두는 가사의 창작 방식, 음악과 실시간 동기화하는 패션 착장…,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조명과 비디오로 쌓아 올린 비행선체 같은 무대로 구현하는 순간, 시공은 뒤틀린다. 정작 본인들은 연출보다는 Weather Report, Miles Davis를 동경하며 연주 중심의 앙상블을 추구하는 팀이라지만. ‘록의 사멸’을 이야기하는 한국 대중음악 신의 최전선에서 실리카겔은 분명 독보적인 색채로 음악적, 장르적 저변을 넓히는 데 기여하고 있다. 아이돌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는 숏폼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고, ‘요즘 시대의 록’이라는 테제를 극한값까지 끌어올리며. 실리카겔 붐은 결국 근간이 탄탄한 좋은 음악이 컨템퍼러리 힙스터 문화를 관통할 때 일어나는 화학작용이며, 현시점 한국 록의 분명한 미래다. ‘펜타포트’와 같은 국내 대형 페스티벌부터 홍콩 ‘클라켄플랍’과 일본, 대만까지 거친 ‘기계소년(EP 음반 ‹Machine Boy› 속 캐릭터)’의 꿈은 더 넓은 세계로 비상(飛上)하려 한다. K라는 카테고리에 묶이기 보단 치열하고 비상(非常)한 록으로, 한국 대중음악 신의 팽창 우주는 여기에. – 공식 선정의 변

06_한국대중음악상_korean Music Award

실리카겔 싱글 ‹NO PAIN› 커버

조혜림: 2023년 가장 많은 페스티벌에서 만날 수 있었던 실리카겔의 거침없고 열정적인 행보와 음악적 진화는 그들이 올해의 음악인이라는 점을 인정하게 만든다. 실리카겔은 쉴 틈 없이 달렸고, 끊임없이 발전했으며, 인디 신의 선두에 서서 부흥을 이끌었다.

신샘이: 실리카겔은 지난해 현장에서 음악 팬을 가장 많이 만난 뮤지션 중 한 팀일 것이다. 이들은 각종 음악의 장에 참여해 그곳에 있는 관객들을 실리카겔의 팬으로, 더 나아가 록 음악 장르의 팬으로 섭렵했다. 용기 있게 가장 최첨단의 음악을 들려주면서도, 대중을 만나기 위해 어디든 나아가는 이들의 자세와 기세는 올해의 음악인이라는 타이틀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김윤하: 실리카겔에 대한 말은 사실 올해의 음악인 후보 선정의 변에 거의 다 했구나 싶다. 다만 이들이 데뷔 후, (너무 길다면) 적어도 2023년 한 해 동안 보여준 놀라운 활약을 뒷받침하는 성실과 뚝심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더 이야기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NO PAIN’의 히트, 누구나 혹할 만한 ‘밴드 붐은 왔다’라는 말은 화제성을 모으기 위해 더없이 좋은 수단이었다. 그 눈부심에 이끌려 이곳까지 왔다면 이제는 그 안에 숨은 진짜를 볼 때다. 올해의 음악인으로 선정한 이유에는 지금의 반짝임만이 아닌, 앞으로 한국 대중음악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이끌고, 파괴하고, 다시 만들어낼 그룹에 대한 신뢰도 함께 어려 있다. 더불어 정국, 뉴진스, wave to earth 등의 후보를 보면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작곡가, 제작사, 활동 반경 등의 기준에 대해 ‘한국’ 또는 ‘한국인’이라는 제한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오갔던 것이 조금 허망해진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찾아올지, 이래서야 도무지 한국 대중음악을 끊으려야 끊을 수 없다.

실리카겔 수상 소감

07_한국대중음악상_korean Music Award

올해의 신인 – KISS OF LIFE

2000년대 미국 힙합/R&B를 흡수한 케이팝의 익숙한 향취, 수많은 것을 끌어와 분방하게 조합하며 맥락을 창작하고 이를 정교한 구성미로 마감하는 케이팝의 작법, 그러나 이를 아주 낯설게 재연한다. 매우 케이팝적이면서도 동시에 이질적이고, 복고적이면서도 동시대적이다. 좋은 취향과 날카로운 안목, 군더더기 없는 완성도, 유려한 힘과 관능, 탄탄한 기량과 참신한 과감성이 조합되었는데, 그 양상을 ‘모범적’이라 하지 못할 이유가 있다면 그 표현이 이들의 용감한 도전을 빛바래게 할까 하는 우려 뿐이다. KISS OF LIFE를 올해의 신인으로 꼽는 의의는 케이팝이 (여전히) 새로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유기체임을 확인하는 데에도 있다. 이 놀라운 신인의 데뷔를 꼭 기억해야 함은 물론이다. – 정식 선정의 변

08_한국대중음악상_korean Music Award

키스오브라이프 미니앨범 ‹Born to be XX› 커버

조혜림: 거를 타선이 없었다. 올해 한국대중음악상 후보들은 누가 수상을 한다 해도 아낌없이 박수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압도적 1위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듣기 좋고 훌륭한 음악들이 장르별로 골고루 포진했다는 점은 리스너들에게 풍요롭고 행복한 일이다. 그 와중에도 확연히 빛나는 것은 종합분야였다. 키스 오브 라이프의 특색 있고 짙은 농도의 음악은 신인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프로페셔널했고, 다양한 분야의 반짝이는 신인 사이에서 멤버별로 다채로운 재능과 개성을 뿜어냈다. 키스 오브 라이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해인의 높은 안목과 전직 아이돌로서의 경험치가 돋보인다.

신샘이: 케이팝 시장이 레드오션이 된 건 오래전 일이지만, 키스 오브 라이프는 그 틈을 발견해 케이팝을 더 새롭고 풍성하게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 이들은 20년 전(때로는 그보다 멀리) 미국의 R&B/힙합 음악을 자료실 삼아 자신만의 사운드와 몸짓으로 만들어낸다. 여기서 중요한 건 멤버들이 과거의 음악을 마치 자신 속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자연스럽고 자신감 있게 소화한다는 점이다. 이번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신인 후보엔 일렉트로닉, 글로벌 컨템퍼러리,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가들이 이름을 올렸다. 한국대중음악상이 그중에서도 키스 오브 라이프의 손을 들어준 건 케이팝이라는 장르의 새로운 가능성까지 보여줬다는 점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이수정: 후보작과 수상작을 두고 사실 아쉬움은 없다. 그러나 다양한 장르에서 올라온 아티스트와 음악을 두고 종합적인 순위를 매기는 일은 언제나 난감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신에 공헌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크다.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시간이 갈수록 눈에 띄는 신인이 부족해 보인다는 점이다. 보통 최우수 장르분야 후보에 오른 신인은 ‘올해의 신인’ 후보로도 오르는데, 데뷔 음반을 낸 해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아티스트가 드물다는 사실은 지금 음악 산업의 한 현상을 반영하는 지점인 것 같아 씁쓸해지기도 한다. 우린 언제나 세상을 놀랍게 할 만한 신인이 가장 기다려지는데 말이다.

김윤하: 재즈, 일렉트로닉, 글로벌 컨템퍼러리 등 다양한 장르의 신인이 후보군에 이름을 올린 가운데 케이팝 부문에서 KISS OF LIFE와 H1-KEY(하이키), 두 여성 그룹의 약진이 이채로웠다. 2023년 케이팝이 그 어느 해보다 신인 남성 그룹을 다수 배출한 해였기에 더욱 그랬다. 많은 이들이 5세대, 이지리스닝, 청량 등 특정 키워드에 천착하는 사이, KISS OF LIFE와 하이키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며 의미 있는 숫자의 팬덤 구축과 전문가의 음악적 호평을 동시에 끌어냈다. 힙합과 R&B를 바탕으로 한 장르적 개성을 토대로 멤버들의 탄탄한 실력을 쌓아 올린 KISS OF LIFE와 케이팝이 줄 수 있는 힘찬 에너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하이키는 2024년에도 얼마든지 주목할 만하다.

KISS OF LIFE 수상 소감

Writer

블럭(@bluc___)은 만들고, 연주하고, 부르는 거 빼고 음악과 관련한 일은 다 하는 사람이다. 글도 쓰고, 기획도 하고, 진행도 하고, 제작도 한다. 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디자인 프레스» 객원 기자로 활동한다.

현대미술 설명서: 필립 파레노 전시가 어려운 뉴비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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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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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요즘 미술 애호가뿐 아니라 전시에 관심 있는 사람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필립 파레노의 개인전입니다. ‘전시가 너무 어렵다, 이해할 수 없다, 이게 대체 뭐냐’라는 볼멘소리와 ‘전시가 너무 좋다, 진짜 재미있다, 이런 전시가 우리나라에서 가능하다니!’라는 탄성이 교차하는 상황을 접하는 뉴비들은 갈까 말까 갈까 말까 결정장애를 겪고 있는데요. ‘현대미술 설명서’를 연재하는 박재용 님이 동아줄을 내려봅니다. 참고로 재용 님은 필립 파레노 전시의 기자 간담회에서 동시통역을 맡느라 여러모로 스터디를 열심히 하셨는데요. 그가 추천하는 친절한 월텍스트 요약본으로 왠지 가기 싫은 느낌을 한풀 낮추는 건 어떨까요? 전시가 막을 내리면 다시 경험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한남동 언덕에 자리한 리움미술관까지 도보로 올라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구릉으로 올라가는 2차선 도로 옆에 난 보도는 한 사람이 넉넉히 지나갈 만한 너비다. 미술관 주차장이나 입구까지 자동차로 이동하지 않는 이상 약간의 등산(?)이 필요하다. 이처럼 접근성이 마냥 좋지만은 않은 미술관에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기대하며 들르는 것이든) 분명 강력한 의지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 없다. 그런데 작년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개인전을 찾은 관람객이 25만 명에 달한 걸 보면 강렬한 의지 아래 한남동 언덕길을 등반할 준비를 마친 사람이 한둘은 아닌 듯하다.

요즈음 이 언덕을 올라 정문으로 향하는 입구 옆, 한남동을 내려다보는 넓은 야외 데크에는 난생처음 보는 물체가 있다. 2012년 10월부터 이곳을 지키던 수호신이 사라지고 이상하고도 거대한 타워처럼 생긴 구조물이 우뚝 서 있다. ‘아니쉬 카푸어의 조각이 어디 간 거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선을 훔치는 이 구조물은 웬만한 2~3층 건물과 맞먹는 높이에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굵은 케이블이 연결돼 있어 산업적인 느낌이 확 난다. 어딘가 스피커를 심어둔 건지,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를 언어로 나지막이 읊조리는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SF 영화 세트장 출신인가 싶지만 이것도 역시 작품이다. 프랑스 출신의 작가 필립 파레노Phillipe Parreno가 리움미술관 개관 20주년을 맞아 진행하는 개인전 «VOICES, 보이스»에 내놓은 신작 ‹막(膜)›(2024)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구조물은 미술관 외부의 환경을 감지하는 센서들의 모음으로, 데이터를 수집해 계속 미술관 내부로 전송한다고 한다.

01_현대미술설명서_필립파레노

미술 작품이 센서 역할을 한다니, 이건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한 생각은 잠시 미뤄두고 일단 진입로를 따라 미술관 로비에 들어서 보자. 이제 로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스크린에서 무작위로 출력하는 듯한 디지털 노이즈 이미지가 보인다. 디지털 신호를 시각화하는 알고리즘에 랜덤 함수를 적용한 모습인데, 바로 아까 미술관 입구에서 조우한 구조물을 통해 채집한 데이터를 시각화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본 전시가 시작한 건지,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며 본격적으로 펼쳐지는지 아리송한 상태로 관람 동선을 따라가면 벽에 붙은 간략한 설명문 형태의 ‘월텍스트wall text’를 발견할 수 있다.

필립 파레노 «VOICES, 보이스»
리움미술관은 전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프랑스 작가 필립 파레노의 국내 첫 개인전 «VOICES, 보이스»를 개최… 아시아 최대 규모의 서베이 전시… 필립 파레노는 전통적 작가 개념에 도전하며 오브제 생산자로서 작가의 역할을 거부… 전시와 작품과의 역동적 관계를 탐구하고 ‘시간의 경험’을 제안하며 90년대 현대미술 형태의 혁신적 전환을 이끌었다…

읽는 족족 등장하는 낯선 표현에 동공이 흔들리더라도 집중력 도둑을 어떻게든 막아내며 끝까지 한번 진격해 보자. 200자 원고지로 16매, 3200여 자에 불과한 분량이니(통상적으로 A4 용지 기준 10pt로 한 장 반 정도다), 끝까지 가면 뭐라도 하나 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말도록. 만약 아무리 노력해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아서 가느다란 희망의 끈마저 놓았다면,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큐레이터 입장에서는 최대한 친절하게 전시와 작가에 관해 알려주면서도, 지나치게 설명적이거나 정답을 강요하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쓴 결과물이지만, 작가와 작품에 푹 빠진 채 써 내려간 정보를 오늘 처음 보는 관람객 입장에서는 온도 차가 엄청난 게 당연지사다. 나름 친절하다고 자부하는 월텍스트의 문장이 아까 미술관 앞 타워에서 웅얼거리는 미지의 언어처럼 다가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갑자기 다가온 현실이 아무리 절망스럽더라도, 월텍스트를 재료 삼아 이런저런 질문은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프랑스 출신의 필립 파레노는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예술가인데, 지금까지 아시아에서 열린 전시 중 가장 큰 규모로 리움미술관에서 열린다네? 그렇다면 아시아가 아닌 곳에서는 여기보다 더 큰 규모의 전시를 열었을 수도 있겠네. 과연 어딜까?’ 혹은 ‘월텍스트에서 말하는 “전통적 작가 개념”이라는 건 뭘까? 그가 “오브제 생산자로서 작가의 역할을 거부”했다는 말을 힌트 삼으면 되려나?’. 어쩌면 ‘작가는 “90년대 현대미술 형태의 혁신적 전환”을 이끌었다는데, 그럼 2000년대 들어서는 딱히 혁신적으로 전환한 게 없다는 뜻인가?’라는 의구심까지 말이다.

03_현대미술설명서_필립파레노

필립 파레노Phillipe Parreno

자, 이제 월텍스트는 중간 지점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작가 소개를 마친 후 드디어 전시를 주인공 삼아 내용을 이어가니, 조금만 더 가보도록 하자!

전시 «보이스»는 ‘다수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감성적이고 공감각적인 안무를 펼치며 총체적 예술 경험을 제안…전시는 과거에 파편적으로 존재했던 ‘다수의 목소리’를 하나로 집결시키며, 지금 여기에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 질문… 작가는 하나의 새로운 목소리를 창조… 배우 배두나의 실제 목소리가 인공지능에 의해 ‘실재하는 가상’의 목소리로 재탄생… 근원을 알 수 없는 웅얼거림으로 시작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공언어 창조자가 만든 새로운 언어 ‘∂A’를 습득하며, 발화의 주체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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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텍스트에서 전시가 주어가 등장할 때는 마음을 굳게 먹을 필요가 있다. 작가와 그의 과거 작품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에게는 압축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자리이지만, 밖에서 웅얼거리는 이상한 타워 하나만 보고 전시장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수수께끼 석판처럼 다가올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자연스럽게 뇌를 쑤시며 울렁이게 할 수 있다. ‘전시가 “감성적이고 공감각적인 안무”를 펼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지? 혹시 전시장에 놓은 작품들이 실제로 움직이나?’, ‘다수의 목소리를 하나로 집결시킨다는 말은 작가가 과거에 만든 여러 작품을 이번 전시에 한데 모았다는 뜻을 고상하게 말하는 건가?’, ‘실재하는 가상의 목소리는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문학적 표현인가?’. ‘∂A는 웬 뜬금포?’

아아, 슬프게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점은 바로 마지막 문단이다. 아직 해당 전시를 보지 않았거나, 보고 왔지만 기억이 가물거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월텍스트 원본을 그대로 가져와 보려고 한다.

목소리는 마치 인형극 마스터처럼 작품을 활성화하며 공연을 시작한다. 그리고 리움미술관은 거대한 자동기계(automaton)로 변신한다. 조명이 깜박이며 벽이 움직이고 시계태엽이 작동한다. 눈이 녹는 소리가 들리며 거대한 스피커가 움직이고 광원이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동시다발적으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언어와 음악이 공간을 압도한다. 영상이 켜지는가 하면 반딧불이가 나타나고 피아노는 저절로 연주한다. 마법의 세계와 같다. 하지만 단순한 환상은 아니다. 전시는 자기제어시스템에 의해 작동되며 모든 요소는 완벽하게 컨트롤되기 때문이다. 단, 이 체계 안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변수와 우연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그다음 단계를 예측할 수 없을 뿐이다. 마치 생명체처럼, «보이스»는 상호의존하며 실제와 가상의 경계에서 예측불허한 진화를 지속한다.

얼핏 ‘예술 외계어(artspeak)’로 꽉 찬 듯한 문단을 살피는 지금, 이미 전시를 관람한 사람이라면 당당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테다. 수천 평에 이르는 리움미술관 전체 전시 공간을 점유한 40여 점의 작품을 실제로 보거나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아주 알차게도 열 개 남짓한 문단에 욱여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뉴비는 어떡하라고? 월텍스트에 친절함을 가득가득 채워도, 전시 초심자가 단박에 이해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목표라는 사실을 작성자도 매우 잘 알고 있다. 전시를 기획하며 이해도가 아주 높아진 큐레이터가 초안을 작성한 뒤, 전시에 관여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계속 친절도가 상승한 월텍스트의 끝판왕이 오더라도 모든 작품에 대한 안내문을 일일이 벽에 붙이지 않는 이상(혹은 심지어 그렇게 한다고 한들) 전시장에 찾아온 뉴비에게 한 방에 머리가 깨지는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 너머 미지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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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아파트 5층 높이의 언덕을 등반하며 체내 산소 농도가 떨어진 채 전시장의 월텍스트를 읽은 터라 전두엽으로 향하는 혈류 공급이 급격히 줄었거나, 시야가 흐려지는 현상을 겪는 분들을 위해, (작가와 작품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반의반 길이 정도로 월텍스트를 바꿔보았다. (참고로 필자는 이번 필립 파레노 전시의 기자간담회에서 통역을 맡았기에 다른 의미에서 이해도가 높아진 상태라는 점을 주지해 주시길.)

필립 파레노 «VOICES, 보이스»

«보이스»는 1990년대에 미술의 형태에 대한 고정관념을 혁신적으로 뒤바꾸면서 예술가로 활동을 시작한 필립 파레노의 지난 30년을 조망하는 전시다. 리움미술관 실내외의 거의 모든 공간을 활용하는 이번 전시는 작가의 첫 번째 작품인 ‹꽃›(1987)을 비롯한 과거의 주요 작품과 함께 리움미술관 공간에 맞춰 창작한 ‹막(膜)›(2024), ‹∂A›(2024), ‹움직이는 조명등›(2024) 등 새로운 작품을 아우르는 4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필립 파레노는 단순히 오브제를 만드는 제작자로 여겨졌던 전통적 예술가상을 거부하며, 전시 공간에서 관람객이 ‘시간’ 그 자체를 경험해 보기를 제안한다. 그런 점에서, 파레노의 전시는 매일, 매 순간 변화한다. 또한 그의 전시는 작품 각각을 분리해서 보여주는 대신, 작품과 공간을 통합해 연속적인 ‘경험’을 창출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언어학자와 함께 만든 인공언어 ‘∂A(델타에이)’를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와 합성해 목소리로 구현, 전시장 곳곳에서 들려오게 만들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작품들이 모여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자동기계’를 구성한 모습을 보여준다. 전시장 외부에 놓인 센서가 감지한 정보가 전시장 안에 놓인 작품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며, 전시장의 관람객 역시 그 존재만으로 이 거대한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양한 시기에 제작된 여러 형태의 작품이 이뤄낸 조합은 리움미술관의 공간 안에서 전시가 끝날 때까지 한시적으로 존재하며, 전시 기간에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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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정리한 월텍스트가 전시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물론, 필자 버전의 월텍스트 역시 예술 외계어의 방언으로 쉽게 읽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더불어 작가의 손을 이미 떠난 작품과 전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해의 틀을 제공하려는 시도는 자유로운 예술 감상에 도움이 아니라 방해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전력을 다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미술은 없다’라고 외치는 작품을 연달아 던지는 필립 파레노의 «보이스» 같은 전시는 아무래도 초심자에게 버거운 상대다. 작가가 제안하는 ‘게임’을 관람객이 아무런 공포 없이 기꺼이 수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소한의 가이드가 필요해 보이는 이유다. 실제로 작가는 «뉴요커The New Yorker»에 “내가 하는 일 가운데 많은 부분은 사람들이 픽션을 받아들여야 성립된다(Lots of the things I do require people to endorse a fiction)”라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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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보이스»라는 전시는 매일 문을 여닫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손길로 관리되는 미술관이라는 하나의 공간 혹은 제도가 작가의 전시를 통해 한시적으로 ‘자동기계’로 변한다는 픽션을 관람객이 신앙으로 믿어야만 재밌어진다. 그렇지 않다면, 미술관 외부 환경을 감지해 미술관 내부에 놓은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대한 기계 타워(‹막(膜)›)은 ‘SF 영화에서 가져온 듯한 신기한 조형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그저 볼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일정한 온습도를 유지하고, 작품에 손상이라도 갈까 봐 구석구석 지진계를 배치해 둔 미술관에서 서서히 녹아가는 눈사람(‹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이나 관람객으로 인해 변화하는 전시장 내부의 공기 흐름과 온도 변화에 반응해 마치 센서처럼 떠다니는 물고기 모양의 풍선(‹내 방은 또 다른 어항›)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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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면을 생각한다면, 작가와 작품 소개에 집중하는 월텍스트는 «보이스» 전시를 즐기기 위해 정말 필요한 도구가 아닐지도 모른다. 파레노가 쌓아온 명성과 이번 전시에서 어떤 형태의 작품을 선보이는지 설명하는 대신, 오히려 고정된 형태를 거부하는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적절한 단서를 제공하는 관람 지침이 필요하지 않을까? 심지어 작품의 내용이나 형태가 아니라, 창작이나 감상의 태도를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관람객에게 행동을 촉구해야만 한다. 더불어 작가를 처음 접한 이들을 위한 적당한 정보와 겸손하지만 확신에 찬 말투로 미술관의 노력을 소개하는 일을 스킵하는 건 너무 극단적이다. 아래 월텍스트는 리움미술관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필자의 소견이라는 점을 명심하며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필립 파레노 «VOICES, 보이스»

«보이스»는 필립 파레노가 1987년부터 지금까지 30여 년에 걸쳐 만든 작품 40여 점을 아우르는 조망전이다. 필립 파레노는 유럽의 주요 미술관에서 여러 차례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지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미술관에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소개되지 않았다. 리움미술관 실내외의 여러 전시 공간을 활용하는 이번 전시는 미술관에서 치러진 개인전 가운데 최대 규모로, 작가의 첫 번째 작품인 ‹꽃›(1987)을 비롯한 과거의 주요 작품과 함께 미술관 공간에 맞춰 창작한 ‹막(膜)›(2024), ‹∂A›(2024), ‹움직이는 조명등›(2024) 등 새로운 작품을 선보인다.

필립 파레노는 예술가를 단순히 오브제를 만드는 제작자로 여기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는 작품에 제목을 붙이고 미술관 전시를 통해 이를 보여주지만, 자신의 작품이 제한된 기간에 특정한 공간에서만 존재하는 ‘전시’ 안에서 ‘시간’의 변화에 따라 계속해서 변하는 ‘경험’으로 남기를 원한다. 따라서, 필립 파레노의 작품은 물리적 형태가 고정되지 않거나 심지어 눈으로 보이는 형태를 벗어날 때도 있다. 예컨대 전시 공간 곳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든 새 작품 ‹∂A›의 일부로, 언어학자와 함께 만든 인공 언어에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를 합성한 결과물이다. 이 목소리는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수집되는 데이터에 따라 계속해서 진화하며, 작가 역시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보이스»는 필립 파레노가 만든 ‘자동기계’와 같은 전시다. 전시장에 놓인 작품들의 조합은 그가 이번 전시를 위해 고안한 일종의 화학 공식이나 다름 없고,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 역시 공식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된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이 전시는 그 누구도 ‘전체’를 관람할 수 없고, 이는 작품을 창조한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전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각자의 시점에서 경험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시 공간 안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가능하다면 전시를 여러 번 방문해도 좋다. 전시의 영문 제목(VOICES)이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여러 목소리를 가리키는 이유는 이 전시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결코 하나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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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전시를 보고 나서 자신만의 월텍스트를 써보는 건 어떨까? 필자가 작성한 월텍스트는 공백 포함 1100자 수준으로 10pt 기준 A4 용지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전시회를 다녀온 후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라고 상상하며 두세 문단 정도의 월텍스트를 남겨보자.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써도 좋고, 평소 상상하는 미술계나 큐레이터의 모습에 과몰입해서 예술 외계어를 남발해도 좋다. 본인이 쓴 글을 시트지로 인쇄해 전시장 입구에 커다랗게 붙이는 모습을 상상하면 더욱 좋다. 당신의 월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불특정 다수다. 날카로운 눈매로 글을 점검하려고 벼르는 미술계 사람뿐 아니라 미술이 좋아 휴일에 방문한 사람들, 데이트를 위해 미술관을 고른 커플, 조기 교육을 위해 미술관에 끌려온 어린이, 미술 언어가 낯선 노령의 관람객까지 모두를 포괄한다. 이렇게 나만의 월텍스트를 조금씩 써본다면 마냥 이해하기 어렵게만 다가오던 전시장의 월텍스트가 분명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Writer

박재용(@publicly.jaeyong)은 주로 한국과 서울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 통·번역가, 연구자, 교육자다. 동시대 예술과 이론 서가 서울리딩룸(@seoulreadingroom)의 장서광이자, 리서치 밴드 NHRB(@NHRB.space)에서는 허영균과 함께 프론트맨을 맡고 있다. 김수지, 정성은과 함께 서촌코미디클럽(@westvillagecomedyclub)을 운영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기도 하며, 영국의 미술 매체 «프리즈Frieze»의 컨트리뷰팅 라이터로 활동 중이다.

한국 브랜드 디자인 회사의 영업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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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header_허민재_브랜딩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디자인 스튜디오가 올리는 작업을 볼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답니다. ‘어라 그래픽 디자인을 하던 곳에서 요즘 브랜드 디자인을 많이 하네?’ 영역 구분 없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시대라지만 확실히 흥미로운 양상이긴 해요. 사회적으로 스몰 브랜드가 대폭발 수준으로 많이 생기면서 그만큼 니즈를 끌어올린 결과거든요. 디자인이 산업의 영향을 많이 받는 업종이다 보니 브랜드 디자인이 스튜디오 포트폴리오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쑥쑥 올라가는 거죠. 허민재 더블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자사 브랜드 리뉴얼을 하면서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겼어요. ‘설립자의 배경이 디자인 프로세스에 영향을 미칠까? 규모에 따라 프로세스의 범위가 달라질까? 프로세스 중 어떤 것을 가장 중시할까? 주요 가치로 꼽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서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브랜드 디자인 회사 문을 똑똑 두드리며 리서치를 해봤답니다. 그 인사이트가 궁금하시다면,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다 피드에 뜨는 디자이너의 작업을 발견할 때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상당수가 브랜드 디자인 스튜디오로 바뀐 것 같은데?” 이게 틀린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 활발히 활동하는 많은 디자이너 스스로 이미 느끼고 있을 것이다. 2020년대 들어 대한민국의 브랜드 디자인 산업은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과거 브랜딩 전략과 함께 로고와 애플리케이션을 디자인하는 데 특화됐던 브랜드 디자인 전문 회사의 업무 범위는 이제 패키지 디자인, 온오프라인 브랜드 경험까지 포괄하는 방향으로 역량을 강화하는 중이다. 동시에 2010년대 스몰 스튜디오 붐을 따라 생겨난 수많은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중 현재까지 살아남은 곳의 절반 이상은 브랜드 디자인을 주요 프로젝트로 삼고 있다.

그래픽 디자인계에서 이런 변화가 나타난 배경에는 산업적인 대전환이 큰 영향을 미쳤다. 온라인 마켓의 급성장과 함께 다품종 소량제작이 가능해지면서 각종 영역에서 스몰 브랜드가 활발하게 등장했다. 그에 따라 브랜드 디자인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대형 브랜드 또한 새로운 사회적 가치의 부상으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과 ESG 등을 중시하는 과정에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리뉴얼하는 추세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브랜드 디자인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수록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가 브랜드 디자인을 주요한 먹거리로 삼는 비율도 증가했으며, 그로 인해 필요한 역량도 달라지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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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모든 게 브랜드다. 더블디는 신세계 그룹 최초의 통합 멤버십, 신세계 유니버스 클럽을 위한 브랜드 아이덴티티 작업을 진행했다. 로고는 지구와 우주를 경계 짓는 카르만 라인에서 영감받았다.

02_더블디_신세계유니버스

소형 디스플레이를 위해 획의 두께와 글자 간격을 독립적으로 조정했다.

나만 하더라도, 2012년 더블디(Double D)를 시작할 때는 그래픽 디자인에 중점을 두었지만, 몇몇 대형 브랜드 디자인 리뉴얼을 맡은 경험을 바탕으로 2024년 현시점에는 브랜드 디자인 컨설턴시로 인식할 수 있도록 리포지셔닝을 진행 중이다. 그런 노력의 일부로 작년 더블디의 리브랜딩을 단행했다. 외부에 존재하는 콘텐츠 디렉터의 분석과 더불어 더블디 내부적으로 회사의 비전, 미션, 업의 본질을 정의하는 인터널 브랜딩을 수립하며 우리다움을 구축했고, 마켓에서 경쟁력을 갖는 익스터널 포지셔닝을 통해 브랜드 인더스트리를 분석했다.

특히 내부 구성원의 설문 조사와 창업자 인터뷰 등에서 추출한 여러 단어를 기반으로 버벌 브랜딩를 재정비하며 더블디가 지닌 의미를 바꾼 것은 큰 성과였다. 영국 디자인카운슬에서 내세우는 디자인 싱킹 방법론인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에서 영감을 얻어 발견(discover), 정의(define), 개발(develop), 전달(deliver)로 이어지는 디자인 프로세스 중 현재 더블디가 중시하고 잘하는 부분은 리서치를 통해 브랜드 방향성을 떠올리고, ‘브랜드다움’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지점을 찾는 행위라고 결론지었다. 덕분에 오랜 기간 ‘Design Can Double’에 머물던 더블디는 ‘Discovery Driven’의 준말로 업데이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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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다이아몬드 모델 © The Fountain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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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티브 컨설턴시 더블디 리브랜딩. © DOUBLE D

더블디 리브랜딩을 진행하며 디자인 프로세스에서 ‘더블디다움’을 찾은 경험은 자연스럽게 국내에서 활동하는 브랜드 디자인 회사가 지닌 디자인 프로세스 전반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과연 다른 회사들도 우리처럼 발견을 중시할까? 아니라면 대체 어떤 부분을 중시하는 걸까?’ 이를 위해 현재 한국의 아이코닉한 브랜드 디자인 회사를 이끄는 대표 혹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2시간 정도 인터뷰를 진행하고, 여기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요약해 이번 기회에 정리해 보려 한다.

회사의 경우, 브랜딩 전문 회사, 브랜드 디자인 스튜디오, 브랜딩 작업을 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등으로 분류하면서 규모 또한 다양하게 다뤘다. 핵심 주제인 디자인 프로세스의 경우, 엘레나 휠러가 2013년 정의한 일련의 프로세스(기초 자료 조사와 분석 → 브랜드 전략 수립 → 아이덴티티 디자인 개발 → 아이덴티티 시스템 완성 → 브랜드 매니지먼트), 김형석이 2012년 정의한 프로세스(분석 전략 → 네임 크리에이션 → 검증 →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브랜드 매니지먼트)를 바탕으로 현재 기업에서 진행하는 프로세스와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알아보았다.

결국, 이번 인터뷰를 통해 의문을 던진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회사 설립자의 배경은 디자인 프로세스에 영향을 미칠까?

2. 회사 규모에 따라 브랜드 디자인 프로세스의 범위가 달라질까?

3. 브랜드 전문 회사가 취하는 디자인 프로세스 중 가장 중시하는 영역은 무엇일까?

4. 브랜드 전문 회사가 추구하는 주요 가치로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참고로, 각 회사에 대한 분석은 내부 구성원 수를 기준으로 작은 곳에서 큰 곳으로 순서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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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IANGLE-STUDIO

트라이앵글 (장기성) – 질문을 통해 찾아가는 브랜드의 본질

2012년 설립한 트라이앵글-스튜디오는 그래픽 디자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스튜디오로, 장기성 대표를 주축으로 현재 다섯 명의 구성원과 함께 연남동에서 활동 중이다. 학부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장기성은 전공 지식 및 시각 디자인 경험을 바탕으로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18년 차 디자이너다. 트라이앵글-스튜디오는 경계에 제한을 두지 않는 동시대성과 전통적인 방식의 교묘한 조화를 찾는 것에 기반해 그래픽 디자인, 브랜드 디자인, 아트 디렉션까지 역할을 확장했다. 장기성은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설정하는 전문 지식을 살려 브랜드 페르소나 설정과 세계관 만들기에 응용하고 있고, 네이밍부터 브랜드 스토리, 아이덴티티 개발과 패키지 디자인, 그래픽 확장과 가이드라인까지 통합적으로 디자인 작업을 수행한다. 이런 과정에서 디자인 전략과 맥락을 잡는 일을 핵심으로 삼고, 작업의 본질을 파악하며, 클라이언트와 스튜디오 간의 상호 가치를 추구한다. 작업을 통해 클라이언트와 콘텐츠가 얻고자 하는 본질과 시각적 특질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찾아가는 것이 트라이앵글-스튜디오의 작업 방식이다. 장기성은 인터뷰에서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 중 ‘발견’과 ‘정의’가 가장 중요하다고 꼽았으며, 이를 위해서 키워드를 다량으로 생산하고, 문장화를 통해 시각화까지 연결하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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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UAL GRAPHICS

매뉴얼 (이성균) – 반복을 통한 브랜드 기본에의 충실

매뉴얼은 2010년 활동을 시작한 디자인 스튜디오로, 창업자 이성균을 중심으로 현재 아홉 명이 열정적인 팀워크를 보이는 곳이다. 웹사이트 디자인에서 출발한 매뉴얼은 브랜딩 프로세스를 통해 클라이언트의 비주얼 아이덴티티 개발에 주력한다. 이때 필요한 브랜드의 버벌 키워드 및 정보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하며 독자적인 체계를 확립하고 있다. 매뉴얼의 브랜딩 프로세스는 철저한 계획과 실행을 통해 단계적으로 진행한다. 초기 두 달 동안 프로젝트 방향성을 정의하고, 시각적인 방향을 제안하며, 이를 토대로 세 번째 달에는 실질적인 디자인 작업을 진행해 가이드 외 기타 산출물을 완성한다. 매뉴얼은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부합하는 작업을 생산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완성도를 높이는데, 특히 ‘기본이 중요하다’라는 철학을 중시하며, 클라이언트의 브랜드나 제품의 존재 이유에 대해 깊이 있는 탐구를 강조한다. 이성균은 인터뷰에서 디자인 프로세스 중 ‘개발’이 가장 중요하며, 이를 더 잘하기 위해서 클라이언트와 협의해 개발 프로세스를 반복하는 경우도 존재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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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FC

CFC(전채리) – 브랜드의 고유함을 만드는 맥락적 사고

2013년 시작한 Content Form Context(CFC)는 19년 차 경력의 전채리 대표를 중심으로 총 열 명의 전문가가 함께하고 있다. CFC는 클라이언트의 브랜드를 깊게 이해하기 위해 브랜드 전략과 아키텍처 수립 등 핵심 과정을 외부 회사와 적극적으로 협업한다. 특히 ‘무드 보드’ 개발은 프로젝트에 착수한 지 약 4주 후 클라이언트와 공유해 프로젝트 방향을 시각적으로 제시하는 CFC만의 차별화된 프로세스의 일부다. 이를 토대로 디자인 작업을 시작하며, 프로젝트 진행 과정을 철저하게 계획하고 실행한다. CFC는 브랜드 리뉴얼에서 ‘맥락 만들기’를 중시한다. 경쟁사 분석과 인터뷰를 통해 브랜드 포지셔닝을 설정하고, 브랜드 고유의 가치를 발견한 후, 브랜드와 가장 근접하면서 필연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모습을 찾아주는 역할을 맡는다. 브랜드를 디자인하는 입장에서 ‘철학적 고찰’과 ‘현상 이면의 탐구’를 강조해 브랜드를 깊게 이해하고 가치를 부여한다. 전채리는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에서 ‘정의’를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꼽았으며, 이를 위해 브랜드를 둘러싼 고객의 관점 및 시장의 상황을 연구하며 문제를 발견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더불어 문제뿐 아니라 해당 문제의 해결 방향을 잘 정의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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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임드(윤영노) – 디자인과 비즈니스의 융합

2013년 설립한 종합 디자인 기업인 네임드는 총 19명의 전문가로 구성돼 있다. 윤영노 대표는 시각 디자인, 편집 디자인, 브랜드 디자인 분야에서 쌓은 폭넓은 경험을 토대로 네임드를 이끄는 18년 차 디자이너다. 네임드는 외부에서 브랜드 디자인 회사로 인식하지만, 최근 들어 디자인 영역을 넘어 비즈니스와의 긴밀한 결합을 모색 중이다. 회사 내부에 존재하는 전략팀은 연출가 출신 전문가와 UI·UX 설계 경험을 지닌 전문가 등 다양한 맨파워를 바탕으로 기존 관행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시도한다. 전략·기획자와 디자이너는 다섯 명의 디렉터와 함께 클라이언트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며 비즈니스의 성공을 추구한다. 네임드의 구성원은 디테일과 함께 비즈니스적 가치를 중시하며, 브랜드 디자인에 전략적으로 접근한다. 인터뷰에 응한 윤영노는 ‘발견’과 ‘정의’를 가장 중요한 프로세스로 꼽았다. 특히 발견에서는 리서치 및 경쟁사 제품 구매, 필드 리서치 등의 세부 프로세스를 진행하고, 정의에서는 키워드 분류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제품 및 무드 이미지와 함께 키워드를 놓고 고민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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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김형우) – 경계를 관통하는 본질, 브랜딩 전략으로서의 디자인

클레이는 2015년 설립된 브랜딩 전문 회사로, 20여 명의 정규 멤버가 이끌어가고 있다. 김형우 대표는 23년 차 디자이너 출신 디렉터로서 브랜드 컨설팅과 디자인을 총괄 중이다. 클레이가 강조하는 핵심 가치는 ‘리얼(Real), 밸류어블(Valuable), 인스파이어링(Inspiring)’으로, 이를 통해 브랜드의 본질을 추구한다. 더불어 ‘본질은 경계를 관통한다’라는 철학을 중시하며, 다양한 영역을 통합해 브랜드를 형성하려고 노력한다. 클레이의 업무 범위는 브랜드 중심의 공간 기획과 아이덴티티 디자인에 초점을 맞추는데, 전략 기획부터 네이밍·슬로건 같은 버벌 아이덴티티, 비주얼 아이덴티티 디자인까지 모든 과정을 총괄하는 입장을 취한다. 브랜딩 전략과 최종 디자인 결과물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좁혀 메시지의 일관성을 높이는 방향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뷰와 워크숍을 통해 초반 단계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고, 디자이너와 기획자가 프로젝트 처음부터 끝까지 협력해 결과물을 도출하는 접근 방식을 브랜딩 프로젝트의 핵심으로 여긴다. 김형우는 인터뷰를 통해 ‘발견’과 ‘정의’가 중요하다고 밝혔는데, 브랜드 디자인에서 기획 부분에 속하는 앞단이 더욱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의하는 단계에서 크리에이티브가 도출된다는 점도 함께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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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럼(김명진) – 전략,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 융합을 통한 혁신

김명진 대표가 2010년 설립한 크리에이티브 컨설팅 회사 프럼은 총 45명의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다. 프럼은 전략,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를 결합해 다양한 비즈니스를 지원한다. 회사의 브랜드 슬로건 ‘Imagination Composer’는 클라이언트와 함께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솔루션을 창조한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프럼은 데이터 분석을 기반으로 철저하게 사업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감성적인 크리에이티브와 결합해 작업한다. 클라이언트를 게임 체인저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혁신적인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며, ‘Imagenation Network Company’라는 방향성 아래 다양한 분야의 스페셜리스트, 전문 에이전시와 협력해 종합적인 솔루션을 제공한다. 프럼이 설정한 자신의 경쟁자는 전략 컨설팅 펌으로, 사업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전략 컨설팅을 통해 비즈니스 문제를 해결하고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원스톱 솔루션을 지향한다. 기존 프로세스를 따르기보다 새로운 방식을 선호하는데, 이를 통해 클라이언트에게 종합적인 솔루션과 통찰력 있는 시각을 제공하며 비즈니스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김명진은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에서 자사가 강조하는 지점을 인터뷰에서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일하는 방법, 싸우는 방법의 기본을 습득하기 위해서 프로세스를 배우지만, 실전에서는 다양하게 응용된다고 말했다. 또한 정의된 모델에 집착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과감히 프로세스를 새롭게 만들어간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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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m Seoul

샘파트너스(이창호, 배지훈) – 좋은 브랜드 경험의 중요성

샘파트너스는 이창호 대표를 중심으로 50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이다. 지난 2005년 설립 이래 20년간 브랜드 개발의 전 과정을 서비스하며 브랜드 디자인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샘파트너스는 브랜드 개발 과정 전체를 망라하는 토털 디자인을 추구하며, 브랜드 전략 수립과 콘셉트 속성 개발을 중시한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클라이언트의 니즈와 문제점을 진단한 후 맞춤형 솔루션을 제안하고, 리서치와 프로젝트 시작 단계에 시간과 노력을 집중해서 가치 있는 결과물을 제공한다. ‘좋은 경험을 만든다’라는 철학에 따라 브랜드 경험을 향상하고 모든 이에게 좋은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을 기업 목표로 삼고 있다. 브랜드가 단순한 상징 체계를 넘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인식 아래, 브랜드와 공공 디자인으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창호는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 대신 스탠퍼드대학교 D-스쿨의 디자인 싱킹 모델을 언급하며 특히 아이디어화(ideate)를 중시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에서 다이아몬드 사이의 중심점에 해당한다. 예전에는 로고를 중심으로 중앙화를 통한 확산을 목표로 삼았다면, 지금은 아예 처음부터 확산을 염두에 두고 개발하는 추세라고 말했으며, 확산과 수렴 모델에서는 효율성 또한 중요하기 때문에 적정 수준으로 확산을 조절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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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terbrand

인터브랜드 (정하진) –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그룹의 브랜드 경험 전문기업

1974년 설립한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그룹인 인터브랜드는 전 세계적으로 1200여 명의 전문가를 보유 중이며, 한국 법인에는 70명이 넘는 구성원이 일하고 있다. 정하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브랜드 디자인 분야에서 18여 년의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인터브랜드 한국 법인은 휴먼 익스피리언스, 하트빗, 커넥티드로 사업 부서가 나뉘어져 있는데, 브랜드 컨설팅을 통해 클라이언트의 브랜드를 강화하고 경험을 향상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인터브랜드는 브랜딩 프로세스를 진행하면서 고객 가치 제안(CVP)을 근간으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숫자와 데이터를 활용해 결과를 시각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 강점을 지닌다. 고객의 니즈를 앞서 변화시키는 결과물을 만든다는 의미가 담긴 슬로건 ‘대담한 도전(Iconic Moves)’ 아래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 과정과 결과 모두를 중시하며, 고객의 니즈를 시프트하고 혁신적인 브랜드 경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정하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 인터뷰에서 밝힌 인터브랜드가 가장 잘하는 것은 바로 전략이다. 인터브랜드는 독립적인 툴과 플랫폼을 개발하며 프로세스를 개선해 왔으며, 인터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워크숍은 브랜드를 바라보는 관점을 만드는 중요한 프로세스라고 전했다. 특히 인터브랜드가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에서 중시하는 부분은 ‘발견’과 ‘정의’로, 무엇보다 인사이트를 제대로 뽑고, 이를 크리에이티브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밝혔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얻은 인사이트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일단 설립자의 배경은 사소한 개성에 가까웠고 유의미하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서 존재감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 브랜드 전문 회사, 혹은 전 직장에서 브랜딩을 진행한 경험은 현재 프로세스에서도 쓰이고 있는 점을 발견했다.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는 주요 브랜드 전문 회사는 기업 규모와는 상관없이 전략부터 기획, 디자인 실행과 배포에 이르는 주요 단계 대부분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특히 엘레나 휠러가 정의한 다섯 가지 프로세스는 인터뷰에 응한 여덟 곳 모두에서 폭넓게 쓰였다. 다만, 김형석이 정의한 다섯 가지 프로세스의 경우, 회사 규모가 작을 때는 네임 크리에이션, 검증 과정을 생략할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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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 휠러가 정의한 다섯 가지의 브랜드 디자인 프로세스 © amazon

대부분의 경우,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에서는 후반부의 디자인 역량보다 전반부의 기획 역량을 전반적으로 강조했다. 회사 규모가 작을 땐 디자인 퀄리티를 치밀하게 관리하고, 디자이너가 전체 브랜드 프로세스를 총괄하는 경향성을 띠는 데 비해, 규모가 크면 브랜드 전략 기획, 네이밍, 디자인 등을 전문 부서가 맡는 분업을 지향했다. 특히 큰 규모의 회사는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전문적인 전략팀을 배치했으며, 무엇보다 자체적인 프로세스를 개발해 고객에게 제안하는 일을 중시했다. 브랜드 전문 회사답게 대부분 각자 추구하는 가치관이 명확했으며, 이를 차별화 전략의 일환으로 활용했다. 여기에서 중요도가 높다고 자주 언급한 가치는 다음과 같았다.

1. 전략 기획과 일관된 크리에이티브
2. 고객과 비즈니스 중심의 사고
3. 고객의 니즈를 선도하는 더 나은 제안
4. 브랜드의 본질을 담는 브랜딩

이번 인터뷰를 통해 개인적으로 얻은 인사이트를 꼽아보려면 탄탄한 기획이 높은 완성도와 훌륭한 결과물로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지만, 다수의 선도 회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영업 비밀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착안해 추후 대학에서 개설하는 브랜드 디자인 수업에 전략 기획을 포함하는 커리큘럼을 짜서 운영할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다. 현시대의 브랜드 디자인 산업은 과거 방식에 머물지 않고 지속해서 진화하며 변하고 있다. 이번 글이 디자이너 각자가 자신의, 혹은 조직의 프로세스를 돌아보고, 더 나은 방향으로 설계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되길 기원해 본다.

Writer

허민재는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RISD)과 영국 왕립예술대학(RCA)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고 뉴욕과 런던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귀국해 2012년 디자인 스튜디오 더블디(Double D)를 설립했다. 더블디는 현대자동차, 기아, CJ올리브영, 한화, 월트 디즈니, 아모레퍼시픽, 신세계백화점 등 다양한 기업과 협업하는 크리에이티브 컨설턴시로 성장했다. 그는 ‘국제 타이포그라피 비엔날레 2017’에서 책임 큐레이터를 역임하고 2018년 독일 뮌헨 디자인 뮤지엄에서 열린 «Korea Design + Poster» 전시에 참여했다. 현재 더블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비애티튜드»의 발행인을 맡고 있다.

밈 원정대: 한국 인터넷 밈의 시조새는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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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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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비애티튜드»의 새로운 에세이 필자인 김경수 님이 한국 인터넷 밈에 대한 연재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무척 익숙해 보이지만 실상 파고들면 끝없는 세계가 펼쳐지는 인터넷 밈을 찬찬히 살펴보려면 그 기원부터 후루룩 훑어야겠죠? 경수 님의 놀라운 능력에 힘입어 «비애티튜드» 독자를 위해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한 편의 글로 깔끔히 정리해 보았어요. 한국 인터넷 밈이 지금의 황금기를 맞이하기까지 겪은 여러 시대적 상황과 고유한 특성, 기본 어휘 등을 이해하며 기초를 탄탄히 쌓기에 이번 에세이만큼 효과적인 한 방은 극히 드물 겁니다. 한 마디로 두고두고 모셔놓고 읽을 만해요. 그럼 우리 함께 한국 인터넷 밈의 시조새를 잡으러 떠나 볼까요.

영화비평가지만 부끄럽게도 이소룡보다 싱하형의 존재를 먼저 접했다. 또 이소룡을 안 다음에도 그 둘이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출처를 알게 되었을 때, 이야말로 짤방의 재미라 생각했다.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나. ‹메이플 스토리› 게임 카페에서 퀘스트 공략을 검색하던 중 낯선 게시물을 발견했다. 제목이 이상했다. ‘개웃긴 싱하형 모음집’이라니. 호기심을 못 참고 살짝 클릭했다. 처음으로 인터넷 밈을 접한 순간이었다. 우는 듯 찡그린 듯 묘한 표정을 지은 한 남성의 사진이 등장했다. 싱하형이었다.

그는 “형왔다!!”라는 강력한 첫 문장을 시작으로 “9초도 11초도 아닌 정확히 10초에 한강 굴다리로 텨와라.”라든지 “야 이 새퀴들아 존내 맞는 거다.” 등등 현란한 말빨을 자랑했다. 나는 곧장 홀려버렸다. 이윽고 스크롤을 내리니 원본을 가공한 짤방이 등장했다. 부처님, 유희왕 카드, 당시 유행하던 영화 포스터를 비롯해 온갖 곳에 싱하형 얼굴이 출현했다. 한강 굴다리와 10초, 존내 맞는 거다 등의 캐치프레이즈는 합성 사진의 뉘앙스에 따라서 적절히 변형됐다. 매 이미지가 웃겨서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한동안 내 머릿속은 싱하형 차지였다. 학교 수학 시간에 싱하형을 노트에 그리다 걸려서 혼나기도 했다. 그런 싱하형을 시작으로 나는 당시 유행하는 짤방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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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씨의 유명한 악플러 싱하의 첫 등장을 알린 게시물이다. 사실 싱하형은 싱하라는 유저가 횽왔다!라는 말을 반복하는 말투에서 딴 이름이므로 싱하라는 원본과 거리가 있다. 악플러인 싱하는 잘 기억되지 않고 싱하형이라는 인터넷 밈만 남은 것이다. 나는 이를 자정 작용이라 생각한다.

그때부터 ‘인터넷 밈은 무엇인가?’, ‘왜 그리도 나를 웃게 했던가?’ ‘왜 싱하형과 “내가 고자라니”라고 외치는 심영에게 홀렸을까’라는 질문은 내가 평생 답해야 하는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인터넷 밈으로 먹고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욱 치열히 대답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 인터넷 밈의 기원을 뒤적거리며 그 명과 암을 살피는 일은 필수일 테다.

심영의 “내가 고자라니! 를 처음 본 순간에 고자의 뜻도 몰랐고, 이 짤의 원본인 ‹야인시대› 64-65화를 본 적이 없다. 그저 심영의 절규가 웃겨서 매일 반복해 보았다. 나중에야 심영이 공산주의자인데다가 진짜로 고자가 된 것이 아니라 김두한이 라디오에 서 한 허풍을 작가가 한 차례 더 부풀려 만든 것임을 알았을 때의 충격을 잊기가 힘들다.


한국 최초의 인터넷 밈으로 ‘여겨지는’ 게시물은 (놀랍게도) 실존한다. ‘복숭아맛’이라는 유저가 2001년 7월 17일 디씨인사이드(이하 디씨)에 올린 ‘오늘 산 중저가형 모델 싸게 팝니다..’이다. 비슷한 형태의 게시물이 이전에도 존재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서버를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글쓴이의 개인적인 사정만으로도 시대를 강타한 전설적인 글의 원본이 언제든 사라진다. 그래서 살아남는 존재가 가장 강하다. 성지로 등극하기 때문이다. 해당 글은 언뜻 보기에 중고 디지털카메라를 판매하는 평범한 게시물이다. 아직 디씨가 중고 카메라 커뮤니티로 불리던 시절, 디씨 회원들이 중고 카메라를 판매할 때 쓰는 글의 스타일을 흉내 냈는데, 막상 게시물을 클릭하면 먹다가 남은 과자 사진이 나왔다. 사진 한 장만 바꿨을 뿐인데 중고 카메라 판매 글은 과자 판매 글이 되었고, 이후 인터넷 밈의 기원으로 회자되면서 성지 순례의 대상으로 신분이 격상했다. 지금이야 흔하디흔한 드립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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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를 카메라에서 과자로 바꾸었을 뿐인데 이만큼 재밌어질 수 있다니. 이처럼 사소한 장난이 축적되다가 유머 게시판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디지털카메라 동호회가 한국 인터넷 문화의 성지가 되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무엇보다, 이 게시물은 ‘낚시’라는 형식을 유행시켰다. 제목과 내용 사이의 아이러니가 특징인 낚시는 오직 인터넷에서만 제대로 기능한다. 모든 텍스트는 제목과 내용 간에 긴장을 지닌다. 책이라면 제목과 목차가 내용을 적절히 압축해 출간되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인터넷 게시판은 다르다. 제목을 클릭해야만 다음 링크로 넘어가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제목과 내용 간에 별다른 연관성이 없으면 그대로 낚시를 당할 수밖에 없다. 속수무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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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는 당시 인터넷 커뮤니티의 엄숙한 분위기를 부수는 장난이었다. 동호회 성격을 띤 과거의 커뮤니티에서는 해당 주제에 어울리는 내용만 논해야 했다. 이런 진지함에는 불필요한 잡담을 막는 순기능뿐 아니라 역기능도 있다. 제목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제곧내(제목이 곧 내용)’ 게시물에도 불필요한 내용을 적어야만 했다. 이런 강요와 제약을 피하는 우회로가 ‘짤방(짤림방지용 사진)’이다. 내용이 시답잖고 별것 없더라도 게시물 꼴은 갖췄으니 제재하지 말라는 일종의 저항이나 다름없었다.

낚시용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밈 중 하나를 예시로 들어보겠다. 나도 여러 차례 당했고, 동시에 애용하던 방법이다. ‘유명 아이돌 멤버 A 씨, 일반인과 열애 인정.jpg’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있다고 치자. 웬만한 돌부처가 아니고서는 마우스 커서를 클릭하지 않을 인내심이 없다. 그리고, 짜잔. 예수님이 제자 베드로에게 “이제부터 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아동 만화 한 컷이 등장한다. (자매품으로 ‘도라에몽 낚시 짤방’이 있다.) 실제 원본이 『만화로 보는 어린이 성경』이다. 예수님 입에서 낚시라는 말이 나와서 그런지, 화가 치밀기 보다는 오히려 차분해지는 아이러니가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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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낚시는 저질스럽고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를 유통하는 데에도 한몫 제대로 했다. ‘낚일 만한’ 제목의 게시물에 ‘낚인’ 사실을 알리는 짤방을 매칭하지 않고, 아주 평범한 제목에 고어, 포르노, 욕설 등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을 붙이는 것이다. 나 또한 이를 통해 고어나 포르노 이미지를 조우하곤 했다. (굳이 사례를 들진 않겠다.) 그때는 이 모든 것을 ‘엽기’라는 미명 아래 용납하던 시절이었다. 폭력적인 콘텐츠와 음란물에 대한 단속이 강화된 지금은 당시 유행하던 수위의 이미지를 올리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낚시는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소셜미디어 속 바이럴 마케팅에서 애용하는 카드 뉴스를 보자. ‘요즘 논란’ 운운하는 제목으로 시작하지만 막상 페이지를 넘기면 ‘찍먹vs볶먹’ 따위의 별것 아닌 사건이 펼쳐진다. 이와 반대로 커플 썰을 평범하게 풀다가 마지막 장에 급작스레 남성용품 광고를 하는 경우도 있다. 조회수만 오르면 뭐든 못 하는 게 없는 세상이라지만 지극히 옹졸한 행태로 계승됐다.

낚시와 더불어 인터넷 밈의 또 다른 원초적 특성으로는 재생과 정지를 꼽을 수 있다. 지난 2020년 12월 31일을 기점으로 어도비에서 서비스를 종료한 파일 형식, 플래시(.swf)를 기억하는지? 플래시는 게임,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 등 개인이 창작한 B급 감성의 2D 콘텐츠를 동시다발적으로 퍼뜨리며 작금의 인터넷 문화를 만드는 데 크게 공헌한 주인공이다. 플래시로 유통된 콘텐츠 중 허무송은 재생과 정지가 짤방의 기원임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예다.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라는 가사를 “아빠가 출”로 줄여 유저를 당황시키고, “엄마가 안아”를 “엄마가 안 와”로 바꿔 노래 ‘뽀뽀뽀’를 동심 파괴의 장본인으로 만든다. 특히 “아빠가 출”이라는 가사가 나오는 대목에서 영상 속 남성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지는데, 싱하형이 탄생하는 논리가 이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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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 애니메이션은 그때만 해도 뮤직비디오의 대안으로 기능했다. 동요도 뮤직비디오가 있어야 더 어린이에게 잘 불렸으므로 동요를 기반으로 한 플래시 뮤비가 많이 제작되었다. ‘당근송’, ‘숫자송’ 등이 그 사례다. ‘허무송’은 이러한 –송 시리즈의 반발로 등장한 것이다. 2004년 즈음 웃대의 한 유저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싱하형의 이미지는 사실 이소룡이 출연한 ‹용쟁호투(龍爭虎鬪)›(1973)의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탄생했다. 이소룡의 극 중 캐릭터가 여동생을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며 그의 몸을 짓밟고 서는 장면이다. 그런데 얼굴에 울분이 가득한 영상을 정지하는 순간, 이소룡의 표정은 급작스레 우스꽝스러워진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새로운 표정의 발명은 마치 허무송의 가사를 멈출 때의 허무함과 당혹감을 괴상한 표정으로 그려내는 일과 유사하다. 인간이 실제 지을 수 있는 표정의 범주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싱하형 같은 짤방은 비언어적인 소통을 가능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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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 제작된 이소룡을 스타덤에 오르게 한 미국 영화. 미국 전역에 쿵푸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소림사 무술인 리(이소룡)가 여동생을 죽인 숙적 한(석견)에게 복수한다는 내용. 스파이 장르의 플롯 공식을 따다가 만든 영화로 지금까지도 홍콩 무협 영화의 대표작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움짤은 이런 면모가 발전한 경우다. 영상을 초 단위로 잘라 음성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성 영화 시대의 제스처와 닮았다. 축구 감독 최강희의 모습을 담은 움짤은 “아 식빵 무지 달다! 이거 팬케이크 아냐?”라는 감탄사로도, “이게 왜 경고야. 파울이구먼!”이라는 항의로도 읽힌다. 몸짓과 입 모양 등으로는 피사체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모호함이 깃들었다. 오직 움짤을 가져다 쓰는 사람이 그 뜻을 결정할 뿐이다. 이는 당시 인터넷 밈 문화를 만들던 청년 세대와 이어진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요즘 말로 ‘갓반인’이 되지 못한 그들은 쓰고 남은 존재, 즉 잉여로 호명됐다. 잉여 인간이 인터넷 공간에서 제 목소리를 내면서 함께 진화한 게 짤방과 움짤이다. 이들은 지금도 일상 속 자질구레하고 잉여로운 순간을 가장 정확히 공유하는 제스처적 소통 방식으로 건재하다.

마법의 짤이라 불리는 이 움짤은 최강희 전북 현대 감독이 2016년 K리그 최종전에서 전북 현대와 FC서울이 경기를 벌이는 중 득점 찬스가 날아가 버린 상황에서 탄생했다. 원본에서는 사실 소리가 삽입되어 있다. “아, 정말 미치겠네! 왜 그걸 안 차? 라고 따지듯 말했다지만 원본에서 육성이 잘 안 들려서 헷갈린다. 원본이 뭔들 움짤이 재밌으면 그만이다. 영화에서도 관객의 상상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지점이 있듯이 말이다.


이쯤에서 인터넷 밈에 대한 특성을 종합해 보자. 우선 특정 유저들이 짤방과 움짤 등을 활용해 온갖 합성 소스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일정한 규칙이 통용되는 세계관을 구축한 후, 여기에서 각자 독립적인 상상으로 합성 소스를 재창조하는 행위가 바로 인터넷 밈이다. 이때 재창조는 이른바 ‘드립’이라 부르는 디씨식 농담 코드에 기반한다. 애드리브의 준말로 즉흥적인 농담을 뜻하는 드립은 디씨 갤러리에 글이 올라올 때 최대한 빨리 웃긴 농담을 댓글로 달아서 베댓(베스트 댓글)이 되려는 경쟁에서 유래했다. 촉박한 마감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탄생하듯 드립은 개인의 창조성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며 예측불가능한 유쾌함을 안긴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웃겨야 한다는 강박이 무의식에 깔린 저속하고 비윤리적인 말까지 여과 없이 끌어낸다. 여성, 소수자 등 타인에 대한 혐오를 그대로 드러내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드립과 이에 기반한 인터넷 밈은 선과 악의 이중성을 모두 지닌다.

하지만 여기에 절망으로 대응하는 건 성급하다. 짤방이 인터넷 밈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화되는 경우도 많다. 짤방의 기원이 입에 못 담을 만큼 더러울지라도, 대중의 손을 거쳐 세계관이 형성된 이후에는 원본의 부정적인 뉘앙스가 사라지곤 한다. 드립 또한 특정 세계관에 머무를 때 수많은 창조의 원천 역할을 맡는다. 그러니 원본의 출처를 의심하고 조심하는 일이 필요할지언정 늘상 진지할 필요는 없다. 인터넷 밈은 원본 짤방을 다시 한번 우스꽝스럽게 만들면서 스스로 풍자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기 때문이다. ‹야인시대›를 활용한다고 조폭을 미화하는 게 아니다. 유저에게는 합성 소스로 활용가능한 ‘그 무엇’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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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일리가 있구먼!

여기서 잠깐! 이제 한국 인터넷 밈의 시조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겠다. 미안하다. 사실 이거 말하려고 지금까지 어그로 끌었다. 2019년 6월 19일 오후 1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프레스로 일하는 중 우연히 상황주의자라는 아방가르드 운동 집단이 1973년 만든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라는 괴상한 영화를 접했다. 한국과 홍콩의 합작 영화 ‹정도›(1972)를 ‘전용’했다는 소개 글에 끌렸다. 사실 전용이 뭔지도 잘 몰랐다. 근데 영화를 보는 동안 싱하형을 처음 접했을 만큼이나 배가 아프게 웃었다.

원작 ‹정도›의 배경은 한국이다. 태권도를 수련하는 한국인과 검도를 수련하는 한국인 사이의 갈등을 그린 작품의 장르와 플롯은 전형적인 무협 영화에 가깝다. 상황주의자는 여기에 무단으로 프랑스어 더빙을 덧입히고 원본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선전 자막을 달았다. 어린아이 두 명이 체 게바라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대화를 나누고, 연인과 보내는 마지막 밤에서 정치적 노선에 대한 토론을 진행한다. 일본인 검도인은 오가는 곳마다 X 표식을 치면서 “노동은 자유를 만든다!” 윽박지른다. 감독의 장난으로 평범한 무협 영화는 혁명이 무엇인지 논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으로 가득한 프로파간다 영화로 변신했다. (TMI지만 박정희 체제 때 벌어진 일이라 원작 영화의 제작자가 영문도 모른 채 심문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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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1972)는 한 홍 합작 영화로, 홍콩에서는 ‹당수태권도›로 개봉했다. ‹정도›의 감독은 강유신, 각본은 유일수이며, 홍콩 영화 ‹당수태권도›의 감독은 도광계와 예광으로 알려져 있다. 캐릭터는 모두 중국어를 하는데, 배경은 왜인지 경복궁인 이 이상한 영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1973)로 전용당하기 전 원본부터가 이상하다.

영화를 이렇게까지 바꾼 동인은 아까 잠시 언급한 전용(détournement)이다. 프랑스 철학자, 기 드보르Guy Debord가 제안한 개념인데, 그는 세상을 언어의 쟁탈전이라고 본 듯하다. 그는 세상의 수많은 단어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주변만 봐도 힐링, 인문학 등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단어가 그 희생양이 되지 않았던가. 돈벌이 수단이 된 단어를 탈환하라고 촉구한 드보르는 광고나 영화 등을 뒤집고 도둑질하는 것을 일상 속의 혁명이라고 보았다. 그를 추종하던 상황주의자가 ‹정도› 같은 장르 영화를 도둑질하고 인물의 제스처를 어거지로 해석한 방법은, 신기하게도 요즘 인터넷 밈이 창조되는 논리와 매우 비슷하다. 1970년대 소비주의 사회에 저항하던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가 펑크록 등 후대 하위문화에 영향을 끼치며 실제 그 에너지가 인터넷 밈으로 이어졌기 때문일 테다. 다만 그 루트를 여기에 더 쓰면 머리가 복잡하니,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내가 인터넷 밈에 매혹당한 까닭은 이런 ‘어거지 부리기’에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매끈함은 인간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조금이나마 심기에 거슬리는 사람을 모두 차단하며 믿고 거른다고 당당히 말한다. 그에 비해, 인터넷 밈은 매끈함에 저항한다. 믿고 걸러진 것들이 펼치는 향연이 곧 인터넷 밈이다. 인터넷 밈을 제작하는 기법을 살피면 더욱더 명확해진다.

초기 인터넷 밈은 주로 누끼따기로 제작했다. 누끼는 다른 소스와 합성해도 원본에서 대상을 자른 흔적을 그대로 지닌다. 누더기를 기운 듯 완벽하지 않은 느낌이 도리어 정감을 준다. 더욱이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잘려 나온 존재들이 동일한 배경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야말로 진정한 MCU(Meme Cinematic Universe)다.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영상도 마찬가지다. “내가 고자라니!”라는 장면에서 시작해 이제는 ‹야인시대›의 영상 전반을 광범위하게 합성 소스로 활용하는 인터넷 밈 ‘심영물’을 보라. 심영물 제작자는 ‹야인시대›에 나온 다른 대사의 음성을 음절 단위로 떼고 조잡하게 이어서 새로운 대사를 만든다.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말을 생성하는 걸 업계 용어로 ‘조교’라고 한다. 전문가의 힘을 빌리면 충분히 자연스럽게 이어 붙이며 최대한 매끈하게 만들 수 있지만, 인터넷 밈은 이를 거부한다. 조교를 통해 무엇을 짜깁기했는지 선명히 드러날수록 더욱더 큰 인기를 누리기 때문이다.

영상 속 세 고양이는 각자 출처가 다르다. 해피캣이 기쁨에 찬 상황에 등장하자, 이와 반대로 맨날 우는 바나나캣이 더해졌다. 이같은 방식으로 각자의 역할이 생기고 역할놀이가 시작된다. 각자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가 저마다 개성을 드러내는 이 밈이야말로 타자와 공존하는 사회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어쩌다 보니 자꾸 심영물 타령을 하는데, 사실 이미 옛것이 됐다. 인터넷 밈은 늘상 진화한다. 지금은 푸바오를 중심으로 한 바오네 가족이 인기 계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바오네 가족은 송영관/강철원 사육사(조부모), 아이바오/러바오(부모), 푸바오, 후이바오, 루이바오로(손자)까지 3대에 걸친 가족 서사가 핵심이다. 활동적인 푸바오에게는 푸질머리(푸바오+성질머리), 푸쪽이(푸바오+금쪽이), 아이바오에게는 아여사, 러바오에게는 러부지, 러스타 등 여러 별명이 더해진다. 이렇게 캐릭터와 저마다의 역할이 생기면서 인터넷 밈은 끊임없이 풍성해진다. 여기에 유튜브 시리즈 ‹전지적 할부지 시점›에 올라오는 푸바오의 일상, 푸바오 팬이 용인에서 직접 공수한 푸바오 사진으로 유저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바오네 세계관을 계속 확장한다. 그럼으로써 공급자-생산자-소비자로 이어지는 대안적인 예술계가 생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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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바오가 인기를 얻게 된 계기가 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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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 모두가 제 나름대로 예술과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터넷 밈은 21세기판 역할극이다. 남극 곳곳을 탐험하는 조종사이자 세상 모든 어린이의 우상인 뽀로로 선생님(2003~)은 말씀하셨다. “노는 게 제일 좋아.” 인터넷 밈이 아니었다면 많은 이들이 이렇게 노는 법을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인터넷 밈 특유의 독특하고 매혹적인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매끈해지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인터넷 밈의 미학은 매끈하지 않은 것을 차례대로 나열해 제작 과정을 공개적으로 노출하는 행위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약을 빨고 만들었는지, 얼마나 쓸데없는 노력을 가미했는지 여부가 작품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는 점에서 이 땅에서 진정 ‘노오력’이 인정받을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소셜미디어의 유머 계정처럼) 출처가 불분명한 남의 것을 그대로 가져다가 보기 좋게 결합하는 광경은 솔직히 고깝다. 출처가 분명한 소스를 이질적으로 조합한 인터넷 밈이 훨씬 더 윤리적이고 미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무척 정치적이지 않은가. 단일하지 않은 수많은 정치적 목소리가 평등하게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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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게 제일… 좋아

Writer

김경수(@vivre_wasavie)는 영화평론가이자 인터넷 밈meme 연구자다. 학부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화제를 모은 졸업논문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은 단행본으로 나올 채비를 마치고 있다. 영화와 인터넷 밈을 동시에 연구하는데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현재 «코아르»에 영화 비평, «여성동아»에 인터넷 밈 비평을 연재하고,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한국 지부 정회원이자 인문학 스탠드업 코미디 페이지 ‘인문학적 개소리’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월간 «디자인» 대전환: 월간을 벗어던지는 방법

월간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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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nterview

다채로운 대화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요즘 불황에 신음하는 한국 영화계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는 단연 ‹서울의 봄›입니다. 개봉 65일 만에 누적 관객 수 1300만명을 넘겼어요. 영화는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사후 일어난 신군부의 쿠데타를 소재로 삼는데요.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1980년 언론 통폐합을 단행했답니다. 그때 폐간 통보를 받고 수많은 매체가 사라졌지만, 3개월 만에 복간된 잡지가 있었습니다. 서슬 퍼런 시대에 발행인이 청와대로 편지까지 보내며 살린 주인공은 바로 월간 «디자인»입니다. 1976년 창간해 시대적 조류에 맞춰 리뉴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월간 «디자인»이 이번에 큰 사고(?)를 쳤습니다. 이제 한 달이라는 루틴에서 벗어나 일, 주, 격주, 월. 분기를 아우르며 콘텐츠 발행과 각종 서비스를 진행하겠다고 밝힌 것인데요. 그 뒤에는 ‘디자인플러스Design+’라는 웹사이트와 긴밀히 조응하며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대전환이 존재한답니다. 2024년 1월 지면 리뉴얼부터 완료한 월간 «디자인»의 최명환 편집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과연 어떤 미래를 계획하고 있을까요? 궁금하신 분은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01, 월간디자인

제호 디자인부터 표지와 판형까지 리뉴얼한 첫 번째 결과물인 2024년 1월호.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월간 «디자인»(이하 «디자인»)에서 편집장을 맡고 있는 최명환입니다.

02, 월간디자인, 최명환 편집장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월간 «디자인» 최명환 편집장. 사진: 윤선웅(에스플러스튜디오)

최근 «디자인» 리뉴얼 이야기에 앞서, 편집장님의 과거를 잠시 알아볼까요?

저는 2012년 객원 기자로 «디자인»과 처음 인연을 맺었어요. 그렇게 쭉 기자 생활을 하다가 2021년 4월호 판권부터 편집장이라는 바이라인으로 출현하며 올해 4년 차를 맞았습니다.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어색한 적은 처음이에요. 저희가 서로 안 지 10년이 넘었잖아요.

제가 객원 기자일 때 종현 씨는 인턴 기자였고, 이듬해 함께 «디자인» 기자로 입봉한 사이죠.

그래서 «디자인» 편집장님과 입사 동기라고 밖에서 자랑한단 말이에요.

허허. 제가 그다지 자랑할 만한 위치는 아닌 것 같은데요.

전혀요! «디자인» 하면, 1976년 창간해 지령 500호가 훌쩍 넘은 레거시 매체이자, 편집부가 탄탄한 디자인 전문지로 유명한 걸요. 이런 매체의 편집장은 무슨 일을 하나요?

기본적인 업무는 다른 곳과 비슷할 것 같아요. 콘텐츠를 기획하고, 편집부를 관리하죠. 디자인이란 주제에 깊게 파고드는 전문지라서 콘텐츠를 기획할 때 편집장과 기자가 의견을 주고받는 관계가 남달라요. 디자인 또한 외부 업체에 맡기지 않고 내부에 있는 아트 디렉터 및 디자이너와 상의한다는 면도 독특하죠. 무엇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종합 디자인 전문지의 편집장이란 이유로 국내 디자인 산업에 대한 의견을 내놓는 경우가 생기기도 해요.

03, 월간디자인

1976년 창간한 월간 «디자인»은 우리나라 디자인 역사를 반추하는 거대한 아카이브나 마찬가지다.

04, 월간디자인-창간호

월간 «디자인» 창간호 표지.

예를 들어 어떤 걸까요?

공공기관의 디자인 심사에 참여하거나, 어떤 기업의 디자인 관련 프로젝트를 컨설팅하거나, 사업 타당성에 대한 의견을 내는 등의 일이에요. 기자로 일할 때는 잘 몰랐는데 막상 편집장이 되니까 수행해야 하는 일이 많더라고요. 종현 씨와 저는 내부자였기 때문에 실감하지 못했지만, 바깥에서는 «디자인»이 공공성을 띤 매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오랜 시간이 축적되면서 디자인계의 공공재가 됐다고 할까요. 그래서 제 능력이나 장점과는 별개로, «디자인» 편집장으로서 이런저런 할 일이 부여되는 것 같아요.

05, 월간디자인, 코리아-디자인-어워드Korea-design-award

월간 «디자인»은 자체적으로 ‘코리아디자인어워드’를 운영 중이다.

‘한국 유일 종합 디자인 전문지’라는 아우라가 무척 강력하네요. 이런 정체성 때문에 고민이 많을 것 같아요. 시대가 바뀌면서 세상 모든 물건과 활동에 디자인이란 라벨을 붙이고 있잖아요.

이번 리뉴얼을 진행하면서 디자인계에서 활동하는 여러 전문가를 모시고 간담회를 진행했는데요. 그때 종현 씨가 말한 지점을 동일하게 짚는 분이 계셨어요. 세상 모든 게 디자인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된 시대에 «디자인»이 무엇을 다뤄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었죠. 그런데 저희가 다루는 대상을 스스로 제한할 수 없는 여러 현실적인 이유가 있어요. 201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디자인이라고 말하면 나름의 무언가를 지칭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건 디자인이 아니야’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근데 지금은 디자인하지 않는 것도 디자인 전략의 일부라고 표현하는 시대가 되었어요.

마치 온 세계가 디자인으로 둘러싸인 느낌이죠.

그래서 의도적으로 제한을 두어야 하는지 고민해 봤는데, 이미 세상이 변한 걸요. 예전에는 프로덕트 디자인 하면 자동으로 제품을 떠올렸지만, 요새는 스타트업에서 만드는 다양한 서비스를 가리켜 프로덕트 디자인이라고 칭하잖아요. 결국 «디자인»이라는 매체의 숙명은 사회가 디자인이라고 정의하는 것을 게걸스럽게 포용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어요. 이런 판단이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시대적인 상황이 그렇게 짜이고 있으니까요. 

그런 관념이 이번 리뉴얼 때 확립된 건가요?

이를 공식화하고 가시화하는 무대가 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이미 그전부터 저희는 이게 디자인인지 아닌지, 어디까지 디자인으로 봐야 하는지 고민하기 보다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서 이걸 디자인이라고 말하면 이것도 다뤄봐야겠다, 저것도 디자인이라고 말하니 관심을 가져봐야겠다, 자연스럽게 보폭을 넓히고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디자인의 범주를 따지면서 결과물에 집중하다 보면, 디자인과 밀접하게 연관된 기획, 마케팅, 유통 등 다양한 프로세스를 도리어 간과하고 축소할 수 있겠더라고요.  

대표적인 예가 요즘 유행하는 팝업 스토어 같아요. 겉으로 보이는 시각적인 면모가 성공 비결처럼 다가오지만 그 본질은 뚜렷한 목적 아래 기획, 마케팅, 디자인, 시공, 홍보 등이 정교하게 맞물린 협업의 산물이잖아요. 디자이너의 매직 터치만 우길 수 없죠. 팝업 스토어에 대해 크레딧을 주장할 수 있는 주체가 굉장히 많아졌으니까요.

맞아요. 그래서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프로젝트의 앞단, 윗단까지 더욱더 확장해서 다뤄야 할 필요성을 느껴요. 무엇을 어떻게 보여줘야 하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제가 «디자인» 리뉴얼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중앙에는 디자이너가 있고, 그 바깥 부분을 따라 다양한 이해 당사자가 존재하는 장표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요. 이들은 저희 «디자인»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독자층이면서도, 동시에 저희가 취재하는 대상이기도 해요.

06, 월간디자인

월간 «디자인»이 다루는 범위는 비단 디자이너에 국한되지 않는다.

흥미롭네요. 그런데 이런 의문도 들어요. 중앙에 있는 디자이너와 바깥에 있는 이해 당사자를 구분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결국 넓게 보면 모두 디자인에 참여하는 창작자 같아서요.

그런 의문도 이해되어요. 결국 디자이너를 구분하려면 디자인에 대한 정의가 있어야 하는데, 그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직업군을 상정해서 바라보았을 때 아직 세상에는 디자이너로 여겨지는 집단이 존재하고, 이런 도식이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입장에서 지금까지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기획자와 마케터처럼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는 창작자에 대한 관심을 이제라도 차차 넓혀야 하는 당위성을 느끼는 거죠.

누구나 디자이너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직업군으로 인정받는 전문적인 디자이너는 따로 존재하는 게 현실이잖아요. 비록 그 경계가 점점 명확성을 잃어가고 있지만 사회적 통념 아래 디자이너에 속하는 사람들을 중심에 두고, 그와 긴밀히 협업하는 창작자들, 이해 당사자들까지 함께 다루는 게 «디자인»의 새로운 방향성이라고 보면 되려나요?

그렇습니다. (짝짝)

저희 대화가 삼천포로 빠졌네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게요. (웃음) 잡지를 리뉴얼한지 한 달이 넘었는데 내외부 반응은 어떤가요?

보통 업계에서 농담 삼아, 리뉴얼해서 좋은 소리 듣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말하는데요. 그래서 지금 잘 가고 있는 건지 오히려 걱정이 들기도 해요. 비판적인 목소리나 중립적인 의견보다 ‘좋은 것 같다’라는 느낌적인 반응이 많이 들리거든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뭔가 좋아진 것 같고, 콘텐츠도 탄탄해진 것 같다는 의견을 듣다 보면 기분이 좋으면서도, 약간 불안해요. 최소한 몇 개월은 더 기다려봐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최근에 인스타그램으로 리뉴얼에 관한 설문을 진행했는데요. 정돈되고 간결한 느낌이 좋다는 의견이 우세했어요. 밀도 있는 구성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렸고요. 다만, 여백이 부족해 조금 답답해 보인다는 반응이 많았는데, 이런 피드백을 경청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개선해 보려고요. 인스타그램 주요 사용층 때문인지 설문에 참여한 분들 절대다수가 20~30대인 점도 흥미로웠어요. 특정 연령층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과정에서 매체 또한 큰 영향을 받기 마련이니까요.

개인적으로 이번 리뉴얼은 꽤 이른 감이 있어요.

2020년 2월호가 가장 근래에 감행한 리뉴얼이었죠. 당시 지령 500호를 맞이했거든요. 제호부터 콘텐츠까지 완전히 바꾼 경우였죠. 제호는 영어 대신 한글을 크게 쓰고, 콘텐츠는 당시 잡지계의 흐름 중 하나인 ‘원 이슈one issue’, 즉 하나의 이슈를 정해 특집을 준비하며 좀 더 탄탄하고 입체적으로 만드는 방향을 취했어요.

07, 월간디자인

지령 500호를 맞이해 전격적으로 리뉴얼한 2020년 2월호. 한글 제호 디자인이 화제를 모았다.

그때 굉장한 화제를 모았죠. 파격적인 변신 후 사람들의 호응도 좋았다고 들었어요.

사람들 각자가 하나의 미디어로서 정보를 발신하는 게 시대적으로 완전히 정착하는 상황에서 매달 종이로 나오는 월간지가 지니는 물리적, 시간적 한계를 인정해야 했어요. 세상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 없을 바에는 큐레이션의 날을 더 날카롭게 세우고 깊이 있게 파고드는 전략으로 바꿨죠. 그런데 이 또한 장단점이 있었어요. 이슈에 따라 사람들이 반응하는 감도가 매우 맹렬하더군요.

예를 들면요?

2023년 2월호 ‘케이팝 디자인 아나토미’가 대표적이에요. 시장 반응이 엄청나게 빠르게 와서 순식간에 매진이 됐어요. 그때 일본에 있는 독자가 정성스러운 편지와 함께 책 좀 구할 수 없겠냐고 연락할 정도였어요. 당시 저도 두 권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서 한 권을 국제우편으로 보내드렸죠. 2020년 10월호 ‘100개의 숍, 100개의 디자인’, 2022년 4월호 ‘2022-23 CMF 디자인 사전’, 2023년 3월호 ‘그래픽 디자인 교육에 관한 11가지 질문’ 등도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요. 근데 이런 상황이 늘 벌어지지 않는 게 문제죠. 저희도 매체이기 때문에 흥미는 떨어져도 디자인계에 의미 있는 주제를 파고들어야 할 때가 있거든요. 개인의 취향이 존중받는 시대가 오면서 콘텐츠에 대해 좋고 싫음의 편차가 심해지니까 대중의 눈치를 자꾸 보게 돼요. 게다가 리뉴얼 효과가 영원할 수도 없고요. 호평이 잦아드는 걸 시장에서 감지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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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호 ‘케이팝 디자인 아나토미’, 2023년 3월호 ‘그래픽 디자인 교육에 관한 11가지 질문’.

그럼 이번 리뉴얼의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인가요? 리뉴얼에서 제일 중요한 건 당위성이잖아요.

지금 가시적인 결과물이 잡지로 나와서 여기에 관심이 집중되는데요. 사실 리뉴얼의 핵심은 지면이 아니에요. 새로 구축 중인 웹사이트가 가장 중요한 파트입니다. 이미 훌륭하게 리뉴얼했던 잡지를 다시 바꾼 이유도 웹사이트와 효과적으로 조응하기 위한 마중물을 만들기 위해서예요.

«디자인»을 위한 독립적인 웹사이트가 생긴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URL이 어마어마하던데요?

design.co.kr이라는 URL을 활용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죠. 근데 이게 «디자인» 전용 웹사이트는 아니에요. 정확히 말하면, 여기를 통해서 «디자인»의 지면 콘텐츠뿐 아니라 다양한 디자인 콘텐츠와 서비스를 함께 제공할 거예요. ‘디자인플러스Design+’라는 이름으로요. 한 달에 한 번 지면으로 다가가는 «디자인»의 관성을 깨고 365일 독자와 함께 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하는 게 디자인플러스의 목표이자, 이번 리뉴얼의 궁극적인 지향점입니다. 일간, 주간, 격주간, 월간, 분기간 서비스를 계획하고 있는데요. 그 중 월간에 해당하는 서비스가 «디자인» 발행이에요. 일간은 매일 업데이트하는 디자인 관련 콘텐츠이고요. 이 두 가지 서비스를 뼈대 삼아 나머지 서비스를 기획 중이죠. «디자인»과 디자인플러스가 긴밀하게 맞아떨어져야만 해서 비교적 이른 시점에 잡지를 다시 리뉴얼하게 되었어요.

월간디자인, 디자인플러스

이번 월간 «디자인» 리뉴얼은 디지털 서비스 ‘디자인플러스’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듣다 보니 가슴이 웅장해지네요. (웃음) 이건 리뉴얼을 넘어 트랜스포메이션, 즉 대전환에 가까워 보여요. 어쩌다가 이런 큰 결심을 하게 됐을까요?

결국 시대적 흐름이 큰 역할을 했어요. 혹시 그거 아세요? «디자인» 디지털 버전을 유료로 구매하는 비중이 의외로 커요. E-매거진 형태로 상당히 많이 팔리고요. 밀리의 서재 같은 독서플랫폼에서 «디자인»을 보는 사람도 많아요. 종이 잡지 시장은 불황이지만, 콘텐츠에 대한 니즈는 건재하고, 콘텐츠의 가치에 대한 폄하가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니라고 조심스레 주장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죠. 그래서 저희 «디자인» 콘텐츠를 비롯한 디자인 관련 소식들을 자체 플랫폼에서 효과적으로 소화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거예요. 더불어 단순히 콘텐츠를 발신하는 행위를 넘어 일종의 플랫폼으로서 여러 액티비티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도록 다양한 서비스를 붙이려고 해요.  

10, 월간디자인, e매거진

월간 «디자인»은 E-매거진 매출이 점점 오르는 추세다.

«디자인»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변신인 듯해요. 웹사이트는 아직 오픈 준비 중이던데요. 지면 잡지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설명해 주실래요?

전체 리뉴얼 계획 중 현재 완료한 결과물의 예시는 매달 발행하는 잡지죠. 참고로 «디자인»과 디자인플러스 모두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에서 리뉴얼 작업을 맡았어요. 결과물에 한정한다면, 일단 가장 큰 변화는 판형을 바꾼 거예요. 저희가 500호 리뉴얼할 때부터 책과 잡지의 중간에서 움직이겠다고 천명하면서 콘텐츠의 구성을 바꿨는데요. 막상 콘텐츠를 담는 틀, 즉 지면 잡지의 판형이 과연 현재 상황에 적합한지 의문을 품고 있었어요. 지금까지의 판형은 시각 정보를 잘 보여주는 데 특화됐거든요. 디자이너가 작업 중 레퍼런스가 필요할 때 «디자인»을 뒤적거리며 아름다운 디자인 작업을 찾는 순간이죠. 이제 상황이 달라졌어요. 아름다운 이미지와 멋진 해외 스타 디자이너의 작품을 넣어도 전처럼 반응이 잘 오지 않아요. 독자가 원하는 게 시원시원한 시각 경험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자 한 가지 이슈에 집중해 정보를 효과적으로 응축하는 스토리텔링을 강화하는 쪽으로 선회하게 됐어요. 그래서 저희가 줄일 수 있는 마지노선까지 판형을 최대한 줄여보았죠. 디자이너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독자들이 랩톱laptop과 함께 핸디하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사이즈를 표방하면서요.

11, 월간디자인

이번 리뉴얼은 20여년 유지한 판형까지 바꾸는 승부수를 뒀다.

그리고 보니 판형은 진짜 바뀐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인스타그램에 써놨는데, 이번 변경이 19년 11개월 만이에요. (웃음) 스토리텔링에 집중하자는 의견에 따라 콘텐츠도 손봤어요. 일단 특집은 건드릴 부분이 없었어요. 아직 동시대적인 니즈에 부합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다만 관성적으로 꼭 넣어야만 했던 섹션에 대해서는 마음을 조금 놓기로 했죠. 오히려 내용적인 측면에서 가장 큰 변화는 디자인 프로젝트 섹션과 뉴스 섹션을 합친 거예요.

12, 월간디자인

드디어 그 좁은 페이지에 깨알처럼 들어가던 뉴스가 해방되는 건가요?

맞습니다. 원이슈에 집중하다 보니 저희가 놓치는 게 있었어요. «디자인»의 강점 중 하나인 동시대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디자인 소식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부분이 뼈아프더라고요. 그래서 디자인 프로젝트와 뉴스 섹션을 합쳐 명칭은 디자인 프로젝트로 정하고 저희가 한 달 동안 수집한 다양한 디자인 소식 중 편집부 나름의 기준에 따라 선정한 30~40개 남짓의 프로젝트를 좀 더 깊이 있게 소개하기로 했어요. «디자인» 본연의 성격을 되찾는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변화라고 생각해요.

13, 월간디자인

콘텐츠 면에서 가장 크게 바뀐 부분인 디자인 프로젝트 섹션.

혹시 새로 바뀐 디자인 프로젝트 섹션에서 눈여겨볼 만한 새로운 시도가 있나요?

크레딧을 보강하려고 해요. 이제 디자인 프로젝트에 디자이너 이름만 쓰기엔 곤란한 경우가 많아졌어요. 기획자, 개발자, 협력사, 시공사, 공장 등 프로젝트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이해 당사자도 함께 표기하려고 노력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CMF에 관련한 정보도 더 확충하고 싶고요. 이건 정보의 불균형과도 관련 있어요. 디자이너 혹은 브랜드 입장에서는 밝히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매체 입장에서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발굴하고 취합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이 중요하거든요. ‘프로젝트 멋있어요’ 칭찬만 할 게 아니라, 해당 프로젝트에서 인사이트를 얻고 싶은 이들에게 실질적인 참고가 될 수 있는 정보를 충실하게 담아주고 싶어요.

전 세계에서 나오는 최신 디자인 프로젝트가 셀 수 없이 많은데요. 이 중 30~40개를 고르는 게 가능할까요?

이건 모든 매체가 직면하는 문제점인데요. 공공성, 혁신성, 신선함 등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요즘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를 보면 심미성을 너무 폄하하는 것 아닐까, 걱정이 들거든요. 그래서 심미성 또한 중요한 기준이라고 봐요. 이런 포인트를 두루두루 다루면서 프로젝트 이면에 담긴 의미가 과연 독자에게 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거죠. 실제 지면에서 볼 때의 매력도 무시할 수 없고요.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플러스가 더욱더 중요해요.

14, 월간디자인

디자인 프로젝트 섹션을 통해 월간 «디자인»이라는 매체가 디자인을 바라보는 면면을 엿볼 수 있다.

‘기승전디자인플러스’네요? (웃음)

잘 아시겠지만, 웹 디자인, 디지털 미디어 디자인, 애플리케이션 디자인 등 지면에서 제대로 소화할 수 없는 디자인 영역이 있어요. 서비스 디자인이나 리서치 프로젝트처럼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이미지 몇 장으로 그 가치를 전달하기 불가능한 경우도 많고요. 만약 이런 소식이 지면에만 갇히지 않고 웹사이트에 소개된다면 독자가 훨씬 효과적으로 소비할 수 있을 거예요. 더불어 디자인플러스가 중요한 이유는 또 있어요. 저희가 독자 제보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하거든요.

독자 제보라면 해외 온라인 매거진에서 진행하는 방식으로요?

정확히 말하면, 외국과는 좀 달라요. 거기는 주어진 포맷에 맞춰 글과 자료를 올리면 편집부가 알곡을 고르고 약간의 윤문을 더해 아티클로 발행하는데요. 저희는 제보라는 개념이 아직 낯설기 때문에, 프로젝트 관련 정보를 보낼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려고 해요. 가끔 모르는 분이 제 회사 이메일로 디자인 프로젝트를 보내시곤 하는데, 그런 분에게 굉장히 좋은 서비스가 될 거예요. 그리고 디자인플러스에는 «디자인»뿐 아니라 «디자인프레스»도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더 많은 콘텐츠를 접할 수 있답니다. 자세한 건 아직 비밀입니다!

디자인플러스가 여러모로 중요하다는 점이 이해돼요. 근데 아직 대망의 잡지 제호와 표지 디자인 바꾼 얘기를 못 들었네요. 인터뷰가 온오프라인 경계를 넘나들다 보니…

잡지 제호와 표지 디자인은 일상의실천이 맡았고, 이와 비슷한 톤으로 디자인플러스 웹사이트를 디자인하고 있으니까 결국 인터뷰는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요. (웃음) 표지 디자인에서는 정보의 위계를 제대로 보여주는 게 중요했어요. 기존 표지는 한글로 크게 ‘디자인’이라는 제호가 존재하고 그 뒷배경으로 이미지가 크게 들어가고, 볼륨 숫자와 특집 제목을 작게 노출하는 게 전부였어요. 이미지 측면에서는 훌륭했지만, 정보를 좀 더 명확하고 자세하게 들여다보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위부터 칸칸이 내려오면서 제호 및 날짜, 볼륨 숫자와 홈페이지, 인스타그램 등 기본 정보가 펼쳐지고, 특집 제목과 그달의 주요 인터뷰와 주목할 만한 기사 정보까지 넣어서 좀 더 텍스트로 명확하게 콘텐츠를 표기하는 방향으로 바꿨어요.

15, 월간디자인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은 표지에서 정보의 위계를 명확히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16, 월간디자인

월간 «디자인» 표지 디자인 기본 공식.

일상의실천

“제호의 경우 보편적인 의미의 ‘디자인’에 초점을 맞추고자 노력했습니다. 근대적 의미의 디자인이 모더니즘을 기반으로 발전했고, 현대 타이포그래피 역시 그로테스크 서체의 활용과 함께 정립되었다는 역사에 착안해 헬베티카, 유니버스 등 전통적인 모더니즘 서체의 골격을 기반으로 하되 알파벳 g, n에 부분적인 변주를 주었습니다. 일반 명사인 ‘Design’의 보편성을 유지하며, 동시대에 통용되는 형식적인 실험을 담아내는 것이 디자이너로서 매우 도전적인 과제였는데요. 양장점으로 활동하는 로만 서체 디자이너 양희재 씨와의 협업으로 전통과 현대의 조합이라는 난제를 풀어갈 수 있었습니다. 커버는 시스템 구축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작업했습니다. 타이틀과 매거진의 기본 정보, 특집 기사, 서브 인덱스 등의 위계를 정립하고 동일한 간격을 설정해서 독자가 정보를 직관적으로 구분할 수 있도록 의도했습니다. 또한 호마다 특집 기사를 정해진 그리드에 따라 배치해 2단, 3단의 구성이 용이하도록 디자인했습니다.”

17, 월간디자인, 일상의실천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 (왼쪽부터) 김경철, 권준호, 김어진

설명을 들으면서 표지를 보니까 확실히 전보다 특징이 명확하네요. 이런 위계가 마치 웹사이트 설계 구조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건 디자인플러스와의 연계 때문인가요?

정확해요. 일상의실천 쪽에서도 표지 디자인을 하면서 웹사이트로 확장할 수 있다는 점을 처음부터 얘기해줬어요. 범용적인 템플릿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한 셈이죠. 그런 면에서 한글 제호를 영문 제호로 바꾼 까닭도 다 연결돼요. 한글 제호가 무척 매력적이었지만, 이 제호를 웹사이트에 가져온다면 국경을 넘나드는 글로벌 콘텐츠 시대에 한계점이 존재하더군요. 영문과 한글 제호를 함께 표기하는 것도 고민해 봤지만, 아무래도 추후 사용자의 범용성을 생각했을 때 영문이 주는 이점을 무시하기 힘들었어요. 내부적으로, 그리고 일상의실천과도 계속 얘기하다가, 결국 그렇게 판단을 내린 거죠.

18, 월간디자인

리뉴얼 첫 호 표지의 메인 그래픽은 일상의실천이 작업했다.

19, 월간디자인

표지에 적용한 다양한 그래픽 시안들. 매달 책등에 다른 색을 적용해 소장하는 맛을 의도했다.

이제 «디자인» 지면 리뉴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아요. 이렇게 꼼꼼한 계획이 결과물로 나온 지 한 달이 지났는데요. 기대한 만큼 성과를 이뤘다고 생각하세요?

아직 섣불리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조금 더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요? 단기간에 효과가 나타날 거로 생각하지 않거든요. 오히려 처음에는 저항감이 더 클 수도 있고요. 익숙함이란 게 무섭잖아요. 게다가 머릿속으로 상상한 것과 실제 유저가 사용하면서 느끼는 경험 사이에 차이가 있을 테니까요. 판형만 해도 독자 옆에 계속 붙어있고 싶어서 핸디하게 만든 이유도 있지만, 그 저변에는 관리 문제도 있어요. 이제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수납공간이 줄어드니까 잡지를 모은다는 게 굉장한 부담이 됐어요. 게다가 종현 씨도 «디자인» 판형을 잘 아시잖아요. 가로가 약간 길어서 책장에 넣으면 자기 혼자 튀어나오면서 존재감을 발휘하는…

하하. 판형은 정말 잘 바꾼 것 같아요. 얘기를 쭉 들어보니까, 결국 이번 «디자인» 대전환은 어떡해서든 독자와 잠시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절박함이 큰 역할을 했네요.

맞아요. 365일 붙어있어야죠. (웃음) 하고 싶은 이야기도, 보여주고 싶은 디자인도 계속 있는데 이걸 한 달 간격으로 꾹 참아야 하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다양한 방식, 다양한 주기로 콘텐츠를 전달하는 법을 개발하는 게 디자인플러스의 주요 목표예요. 그래서 주간으로는 뉴스레터 서비스를, 격주간으로는 팟캐스트까지 고려하고 있답니다. 이와 관련해서 조직 구성을 더 보강하는 계획도 세우고 있고요. 아까 말한 크레딧 같은 경우는 지면 문제로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면 디자인플러스에서 소화하고 싶어요. 지면에 QR 코드를 넣어서 웹사이트와 연동하는 일도 적극적으로 시도할 거고요.

20, 월간디자인

월간 «디자인» 콘텐츠는 디자인플러스를 통해 일간과 월간을 넘나들며 독자와 만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요. ‘«디자인»과 디자인플러스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디자인 프로젝트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게 아닐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일단 디자이너보다 디자인 프로젝트에 드라이브를 더 강하게 거는 것 같기는 해요. 예전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디자이너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디자이너를 칭찬하는 기사만 쓸 수는 없잖아요. 디자인 프로젝트에 집중할 때 다룰 수 있는 영역이 훨씬 넓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 리뉴얼에서 느낀 것 같아요. 그런데 디자인플러스에서 제공하는 주요 서비스 중 하나가 바로 디자이너 DB랍니다. «디자인»에 나온 디자이너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그들과 관련한 정보와 기사를 한 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하는 건데요. 만일 일상의실천이 작업한 프로젝트가 지면에 소개되면 QR 코드를 통해 디자인플러스 내 디자이너 DB에 접속해서 그동안 쌓인 일상의실천에 대한 정보를 모바일로 확인할 수 있어요. 독자는 디자이너에 대한 다채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도 과거가 아닌 현재에 집중해 핵심만 표현할 수 있겠죠. DB는 내부적으로 계속 의논 중이라 아직 뭐라 말하기엔 시기상조 같아요. 다만 리뉴얼 얘기가 나올 때부터 저희 발행인님의 가장 큰 ‘관심사’라는 점만 밝힐게요…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디자이너 DB가 꼭 성공하길 기원할게요! 그럼, 디자인플러스 서비스를 오픈하는 시점은 언제일까요?

큰 프로젝트이다 보니 순차적으로 오픈할 것 같아요. 일단 일일 콘텐츠와 제보 서비스는 1/4분기에 선보일 예정이고요. 나머지 서비스 또한 올 하반기에 무사히 공개하면 좋겠습니다.

디자인플러스가 염두에 두는 이상적인 모습이 있을까요?

최소한 한국의 디자인 소식들을 접할 수 있는 가장 영양가 있는 플랫폼으로 여겨지면 좋겠어요. 분량과 속도를 어느 정도 커버한다는 가정하에, 매 순간 주목해야 할 디자인 프로젝트를 여기서 손쉽게 볼 수 있다는 대중적인 인식이 생기는 거죠. 잡지사에서 운영하는 웹사이트를 넘어 다양한 액티비티가 일어나는 커뮤니티로 거듭나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월간디자인, 디자인플러스

디자인플러스 로고 간략화 버전.

이민형 디자인하우스 디자인사업부문장 겸 디자인프레스 대표

“총 6년간 ‘네이버디자인’을 기획·운영하면서 디자인 정보에 대한 대중의 갈망이 크다는 사실을 트래픽 등 객관적 수치로 확인할 수 있었어요. 디지털로 정보를 전달하는 여러 방식을 실험하며 경험치도 쌓았죠. 이제 더 늦기 전에 매개자로서의 역할과 방식을 재정립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편집과 발행의 완전한 대전환은 아직 힘들지만, 몇 가지 프로세스만 개선해도 동시대에 훨씬 적합한 효율적인 매개자가 될 수 있다고 여긴 거죠. 이번 모험은 ‘«디자인»이 현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얼마나 제대로 수행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습니다. «디자인»과 네이버디자인을 운영한 멤버가 오랜 기간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 결과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매체를 플랫폼으로 확장하고, 매체가 기존에 화두로 삼던 ‘디자이너 프로모션’을 ‘디자이너와 비즈니스 간의 매개자’로 재정립하며, 48년째 축적 중인 DB를 디자인계에 도움 되는 방향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단박에 바꾸는 건 욕심이죠. 이번 환골탈태는 오는 12월에 마무리될 거예요. 말 그대로 대전환의 한 해입니다.”

22, 월간디자인, 디자인플러스, 이민형

이민형 디자인하우스 디자인사업부문장 겸 디자인프레스 대표.

그럼 «디자인» 편집장으로서 올해 기대하는 건 무엇인가요?

지금 준비하는 것을 본 궤도에 올려놓는 게 가장 크고 중요한 목표예요. 더 이상 일을 벌이기보다, 지금 해야 할 일을 잘 이행하고, 내부의 디테일을 잡아가는 거죠. 편집장이 되고 나서 제 존재를 알리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독려를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고 모더레이터도 맡고 그랬는데요. 이제는 새롭게 바뀐 «디자인»과 디자인플러스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일조하고 싶어요.

대망의 마지막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부탁드릴게요.

음. 뭐라고 해야 하죠? «비애티튜드»만큼 «디자인»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웃음) 디자인을 전문가의 영역으로 국한하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아요. 디자인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알아가는 걸 교양처럼 간주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기본 교양을 쌓는다는 느낌으로 «디자인»과 디자인플러스를 찾아주시면 감사합니다. 참고로 «디자인»은 한 권에 1만 5000원으로 배달 음식 한 번만 참으면 된답니다.

23, 월간디자인

월간 «디자인» 2024년 2월호 ‘트렌드 히치하이커를 위한 팝업 스토어 안내서’.

Interviewee

최명환은 대학에서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편집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디자이너로서 인문학적 소양을 쌓고자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에 진학했다가, 디자인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일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후 다양한 매거진에 객원으로 참여하며 2013년 월간 «디자인» 기자로 정식 합류했고, 지금까지 디자인 전방위에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2021년부터 월간 «디자인» 편집장으로 활동 중이며, 한국 디지털산업계 최대 행사인 ‘앤어워드A.N.D.Award’,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공예디자인 스타상품 개발, 한국실내건축가협회에서 주관하는 ‘골든스케일베스트디자인어워드’ 등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다.

Editor

전종현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했고,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 편집위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고, 2021년부터 2023년까지 기아글로벌디자인센터와 함께 «기아 디자인 매거진» 창간 작업과 콘텐츠를 총괄했다. 현재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로 «조선일보» «디에디트»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기고 중이다.

현대미술 설명서: 아티스트를 위한 새해맞이 꿀팁 10

박재용, 라이언-오슬링
Report

박재용, 라이언-오슬링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후회도, 미련도 집어 던지고, 새로운 한 해를 기분 좋게 맞이하는 준비를 다들 하고 계시겠지요? ‘현대미술 설명서’를 연재하는 박재용 님 또한 이런 니즈에 부응해 예술 및 미술계에서 일하는 크리에이터를 위한 새해맞이 액티비티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셨답니다. 이름하여, 아티스트를 위한 새해맞이 꿀팁 10!!! 재용 님의 오랜 노하우와 위트를 촘촘히 엮은 아티스트 맞춤형 새해맞이 권장 꿀팁이 벌써 궁금하시다고요? 아티클에서 차근차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01, 박재용, 라이언-오슬링
02, 박재용, 라이언-오슬링

지난 1월 1일 오전 7시 26분. 새해 첫 일출과 함께 한국의 2024년 또한 드디어 개막했다. 물론 그전부터 소셜 미디어의 타임라인에는 2023년 한해를 회고하는 포스팅이 멈추지 않았으며, 1월 1일 신정 당일에는 휴일에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해의 다짐을 선언하는 의지가 끊임없이 탄생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 따뜻한 이불을 덮어쓰고 감귤류 과일을 까먹으며 다양한 플랫폼에 ‘좋아요’와 댓글을 남기고 있을 미술, 예술계의 여러분이 한 해의 시작을 좀 더 즐겁고 생산적으로 보낼 만한 몇 가지 꿀팁을 준비해 보았다. 무척이나 간단한 활동들이니 부디 가벼운 마음으로 시도해 보길 바란다. 일부는 초급, 중급, 고급 단계로 나누어 세심하게 제안했고, 심화 활동도 존재한다. 그럼, 올 한 해도 다이내믹한 성장을 기대하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

✓ 꿀팁 1: 각종 기금에 선정된 예술인과 프로젝트 살펴보기

03, 박재용, 라이언-오슬링

먼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웹사이트에 접속해 보자. 주소는 www.arko.or.kr이다. 메뉴를 굳이 찾을 필요도 없이, 메인 화면에는 친절하게 배너가 떠 있다. ‘2024 문예진흥기금 공모사업 지원심의 결과발표’를 확인해 보자. 본인이 활동하는 영역을 클릭해 어떤 사람과 프로젝트가 선정되었는지, 더불어 심사위원은 어떤 말을 남겼는지도 한 번 쭉 살펴보자. 2024년도 문예진흥기금 공모사업에는 총 7287건이 신청했고, 그 가운데 우리는 선정된 1006건에 대한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박*용’처럼 형식적으로 익명 처리된 이름을 살펴보며 선정자를 추측할 수도 있고, 사업명을 체크하며 어떤 내용의 프로젝트가 펼쳐질지 상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04, 박재용, 라이언-오슬링

2024 문예진흥기금 공모사업 지원 관련 배너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웹사이트

한 해의 시작을 기금 선정 결과 열람과 함께 시작하게 된 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연말까지 정산을 마쳐야 하는 지원 사업 선정 결과가 겨울이 끝날 즈음에 발표되는 참극이 일어나기도 했으니.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시절의 ‘블랙리스트’ 논란이나 2021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미술전 한국관 예술감독 재심의 논란 등을 겪으면서 심사 결과 발표가 빨라졌을 뿐 아니라 이제는 심사 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게 되었다. 물론, 서울문화재단 등 전국 각지에 산재한 100여 개의 기초지역문화재단 대부분은 2024년도 지원사업 발표를 아직 완료하지 않았다. (참고로 서울문화재단은 2023년도 예술창작활동지원사업과 청년예술지원사업 공모 내용을 당해 1월 13일 금요일에 발표했다.)

기금 선정 목록에서 혹시나 내가 아는 동료나 스치듯 이야기를 나누었던 프로젝트의 제목을 보게 된다면,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진행을 기원하는 응원의 메시지를 나누어 보도록 하자. 참고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기금 결과 발표 게시글은 모바일 접근성이 좋지 않으니 PC 앞에 정자세로 앉아 열람하도록 하자.

심화 활동.

만일 지원사업에서 낙방했다면, 선정된 예술인이나 프로젝트, 그들이 선정된 지원제도를 살펴보면서 앞으로 자신의 활동으로 지원금 신청에 성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궁리해 보자. 다만, 기금을 받았다고 무조건 ‘뛰어나다’라는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하도록 하자. 더불어 문화체육관광부 웹사이트나 정책연구관리시스템(www.prism.go.kr)에서 ‘예술’이나 ‘문화’를 키워드로 각종 정부 용역 연구 보고서를 열람하면서 앞으로의 변화를 예측하는 것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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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용역 연구 보고서 중 ‘예술’ 키워드 검색 결과 © 정책연구관리시스템 웹사이트

✓ 꿀팁 2: 미술, 예술계의 아주 가까운 미래를 그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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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를 박차는 것조차 기가 빨리는 새해 초, 올 한 해 열릴 전시나 행사를 한 번 훑어보는 것도 좋다. 현대 문물의 발전에 힘입어 이제 누워서 휴대전화를 깔짝거리기만 해도 많은 게 가능해졌다.

초급

검색 엔진에 ‘2024년 전시’를 키워드로 넣고 돌려보자. 주요 미술관에서 배포한 보도자료를 취합해 만든 다양한 기사를 발견할 수 있다. 차분히 열람을 지속하다 보면 특정 기관과 갤러리가 반복적으로 언급된다는 점을 알아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2024년도 예정 전시 기사를 쓰려면 보도자료가 선행적으로 배포되어야 하고, 보도자료를 배포하려면 주최 측에서 2024년 일정을 확정해야 하고, 미리 일정을 확정하려면 아무리 늦어도 작년 후반에 계획이 나왔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체적인 계획만큼이나 기금 선정 발표도 미리 이뤄져야 하니…

중급

국내를 넘어 해외로 관심을 넓혀보자. 미국의 «Artnet», 영국의 «The Art Newspaper», 홍콩의 «Art Asia Pacific»을 비롯해 다양한 국제 예술 매체에서 셀 수 없이 많은 ‘Exhibitions to see in 2024’를 살펴볼 수 있다. 이르게는 지난해 12월 초에 게재한 ‘2024년에 볼 만한 전시’ 기사를 통해서 매체별로 선정한 주요 전시와 함께 안테나를 세울 만한 작가 및 주제를 살펴볼 수 있다.

07, 박재용, 라이언-오슬링

EXHIBITIONS TO SEE 검색 결과 © Art Asia Pacific 웹사이트

고급

매체들이 앞다투어 생산하는 ‘볼 만한 전시 목록’을 소비하는 대신, 평소 관심 있게 지켜보던 미술관이나 미술 공간에서 열리는 새로운 전시들을 직접 살펴보는 건 어떨까? 아쉽게도 한국의 많은 미술 관련 기관의 공식 웹사이트에서 가장 업데이트가 늦게 되는 메뉴가 바로 ‘예정 전시’ 부분이다. (2024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웹사이트의 ‘예정 전시’ 메뉴에 업데이트된 전시는 «한국 근대 자수(가제)» 하나 뿐이었다. 2024년도 신규 전시 목록을 언론에 발표한 1월 9일 이후에도 상황은 동일하다. 이 글이 발행됐을 때는 부디 다양한 전시로 꽉꽉 채워지길 기원한다.)

심화 활동.

의지와 열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관이 배포하는 보도자료 원본에 접근해 보자. 예를 들어 서울시립미술관은 웹사이트 첫 페이지 아래쪽 ‘뉴스와 공지’를 클릭하고 ‘보도자료’ 섹션에 들어가면 2023년 12월 15일에 게시된 ‘서울시립미술관 2024년 주요 전시 공개’ 포스팅을 열람할 수 있다. 상세한 내용은 게시글에 첨부된 [보도자료]_서울시립미술관_2024년_주요_전시_공개(수정).hwp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국내외 미술관 웹사이트를 오가는 과정에서 ‘비교체험 극과 극!’도 가능한데,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이나 영국 테이트 미술관 웹사이트의 ‘What’s On’ 메뉴를 클릭하면 2024년 열리는 모든 전시를 낱낱이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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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2024년 주요 전시 공개’ 포스팅 © 서울시립미술관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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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2024 전시 아카이브 페이지 © MoMA 웹사이트

✓ 꿀팁 3: 미래만 보지 말고, 과거도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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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이해 미래만 바라보는 대신 과거를 돌아보는 것도 좋은 활동이다. 때마침 한국 문화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과거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장관을 하던 분이 재임 중이다. 그렇기에 과거 살펴보기는 올 한 해를 시작하기에 꽤나 적절한 활동이 아닐까 한다. 미술 분야에 한정해 이야기해 보면, 과거의 흔적을 차분하게 살필 수 있는 장소가 몇 군데 있다. 먼저 대학로 아르코 아트 센터에 자리하고 있는 ‘아르코아카이브’를 추천해 본다. 2009년부터 자료를 차곡차곡 축적 중인 이곳에 들러 10년 전인 2014년 1월을 기점으로 미술 관련 매체가 지금까지 어떤 내용을 특집으로 삼았는지 살펴보며 현재 상황과 비교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국립현대미술관의 ‘디지털도서관’에 들러 과거를 풍미한 각종 전시 도록을 살피는 것도 좋다.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말에 약간이라도 진실이 담겨 있다면, 새해를 맞이해 돌아보는 과거 기록에서 눈앞에 놓인 미래에 대한 단서를 찾을지도 모른다.

11, 박재용, 라이언-오슬링

국립현대미술관 ‘도서와 아카이브’ 섹션에서 확인 가능한 컬렉션 중 일부 © 국립현대미술관 웹사이트

심화 활동.

2023년 평창동에 개관한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는 한국 현대미술 작가와 연구자에 관한 소장 자료를 검색 및 열람할 수 있는 ‘컬렉션’으로 제공한다. 이곳에서 아카이빙한 소장품을 검색한 뒤 열람을 위해 직접 방문해 보자. 의지 몇 방울만 있다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시간의 틈을 넘어 미래의 낯선 이와 연결되는 미술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전경 © 서울시립미술관 인스타그램

✓ 꿀팁 4: 미술이 놓인 세상을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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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가끔 예술이 세상의 전부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 너머에는 더욱더 거대한 현실 세계가 존재한다. 새해를 맞아, 우리 자신과 미술·예술을 둘러싼 이 세계의 쟁점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보자. 스스로 추구하는 예술과 삶, 활동의 위치와 의미가 세상과 맺는 맥락을 파악해 보는 것은 자기 객관화에 큰 도움이 된다.

초급

검색 엔진에서 ‘2023년 사건·사고’ 검색하기. 검색 결과 상위 페이지에서는 나무위키의 ‘2023년/사건·사고’, KBS가 보도한 ‘사건·사고로 얼룩진 2023년’, 인스타그램에서 ‘좋아요’ 1만을 향해 달려가는 ‘‼한눈에 보는 2023년 월별 사건·사고 총정리!!’ 같은 콘텐츠를 볼 수 있다. 더불어 ‘2023년 주요 이슈’, ‘2023년 돌아보기’처럼 검색 키워드를 살짝만 바꿔도 좀 더 다양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중급

한국어 자료에서 외국어 자료로 범위를 넓혀 보자. 이때 유용한 키워드는 ‘Year in Review’다. 정말 여기저기서 자료가 튀어나온다. 특히 각종 이슈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기로 유명한 «Vox»가 2023년 전 세계 주요 이슈를 7분 길이로 요약한 영상을 우선 추천해 본다.

«Vox» ‘2023, in 7 minutes

구글이 발표한 ‘2023년 전 세계 및 국가별 인기 검색어 통계’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선정한 ‘2023년 주요 사건’ 등도 유의미한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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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인기 검색어 중 일부 © Google

고급

온라인발 정보의 홍수에서 의미 있는 ‘신호’와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소음’을 분간하기란 쉽지 않다.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집 근처 도서관에 들러 여러 분야의 잡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023년 마지막 호와 2024년 첫 호를 함께 펼치길 추천한다. 혹시 『트렌드 코리아』 2024년이나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에서 매년 발간하는 『세계대전망』 2024년 판 한 권만 사서 보는 게 훨씬 간편하다는 의문이 든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 그럴 경우, 2024년 판보다는 2022년 판이나 2023년 판을 사보는 게 어떨까? 세 번째 꿀팁, ‘미래만 보지 말고, 과거도 살펴보기’의 일환으로 말이다.

심화 활동.

나를 둘러싼 범위에서 일어난 일을 세상사와 함께 돌아보고, 기록으로 남겨보아도 좋겠다. 매년 조금씩 쌓는다면 꽤나 가치 있는 나만의 기록으로 남지 않을까?

✓ 꿀팁 5: 제목은 잘 알지만, 실제 읽거나 살펴보지 않은 책과 자료에 접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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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놓고 읽지 않아 깨끗하게 먼지만 쌓인 책, 이름만 듣고 자세히 보지 않았던 자료나 작품 살펴보기는 아직 바쁠 일이 그리 많지 않은 새해 초에 하기 딱 좋은 활동이다. 지난해 누군가의 아티스트 스테이트먼트나 전시 서문에서 계속 마주친 철학자의 이름이나 오며 가며 스치듯 들었던 이론서 따위가 있다면, 새해를 맞이해 한번 도전해 보자! 예컨대 애나 로웬하웁트 칭Anna Lowenhaupt Tsing이 쓰고 노고운이 번역한 『세계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현실문화연구, 2023)같은 책 말이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나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네마프NeMaf’처럼 실험적인 성향의 영화제에 출품한 작품을 살펴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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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 로웬하웁트 칭의『세계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응용 활동.

혹시 ‘무엇을 봐야 할지 잘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출판인 42명이 선정한 2023년 ‘올해의 책’과 같은 자료를 참고해도 좋다. 누군가 추천했다고 해서 무조건 좋다는 생각은 위험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특정 작품과 책, 자료 등을 중요하다고 여기며 회자하는지 그 의미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의견을 형성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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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IN의 ‘정부의 퇴행 속에서도 등불처럼 빛난 올해의 책들 [2023 행복한 책꽂이] 에서 소개된 책 중 일부.

✓ 꿀팁 6: 몸과 마음의 건강을 점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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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한 창작을 지속하는 힘은 건강한 몸과 마음에서 나온다. 따라서, 내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새해 시작을 맞이해 시도할 만한 여러 활동 중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모든 국민은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운영하는 ‘국민체력100’을 통해 비용 없이 체력을 측정할 수 있다. 전국 69개소에 있는 ‘건강생활지원센터’에서도 무료 건강 상담을 제공한다. 몸만큼 중요한 마음의 건강을 점검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예술인 복지카드가 있다면, 예술인복지재단에서 제공하는 ‘예술인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다. 심리상담은 예술인 복지재단 외에도 서울문화재단, 경기문화재단 등 지역 문화재단 차원에서도 진행하고 있으니, 본인의 주민등록상 주소지에 해당하는 문화재단 웹사이트를 꼼꼼히 확인해 보도록 하자. 더불어,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과 후천적으로 변하는 성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TCI검사도 추천한다. 대부분의 심리상담센터에서 진행하는데, 다만 비용이 조금 든다. 하지만, 검사 결과에 대한 전문가의 해석을 듣는 것은 무척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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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복지재단에서 제공하는 ‘예술인 심리상담’ 관련 내용 ©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웹사이트

✓ 꿀팁 7: 통장 잔고 및 재정 상황 점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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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한 창작을 위한 준비는 건강한 신체만으로는 부족하다. 본인의 재정 상황 또한 굉장한 영향을 미친다. 누군가 당신에게 창작만을 통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면, 나는 그것이 ‘가스라이팅’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삶 앞에 예술 없고, 생활 앞에 예술 없다. 창작의 에너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는 생각은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괴롭게 만드는 첫걸음이다. 그런 점에서, 연금저축과 퇴직연금,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에 대해 알아보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해 보아도 좋겠다. 창작 활동으로 경제적 성공을 거둘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60세가 되어 퇴직 연금을 수령할 때가 될 즈음 본인의 체력이 지금과 똑같지는 않다는 사실은 확실하니까 말이다. 스무 살의 내가 한 달에 5만원씩 연금저축계좌로 모으며 쌓기 시작한 S&P500 추종 ETF가 60세를 맞이할 미래의 예술인(나)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은 활동 자금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다양한 사정으로 개인사업자등록증이 있는 창작자라면 중소기업중앙회가 운영하는 ‘노란우산공제’에 가입하는 것도 좋다. 이 공제금은 소상공인의 사회적 안전망 마련과 퇴직금 마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니, 창작자 역시 개인사업자등록증이 있다면 제도의 혜택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 꿀팁 8: 평소 궁금하던 잠재적 동료에게 연락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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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연락받을 때 생각보다 따뜻하게 반응한다. 새해를 맞아 평소 흥미롭게 지켜보던 잠재적 동료들에게 상냥한 안부 인사를 보내는 건 어떨까? 무턱대고 인사하라는 건 아니다. 적어도, ‘당신의 어떤 작업을 이렇게 봤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정도로 최소한의 정중함을 갖춘다면 잠재적 동료로서 충분히 연락할 만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선생님’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분들에게도 (지나치게 격의 없는 태도는 아니더라도) 겸손하지만 진솔하게 연락하는 용기를 내봐도 좋다. 나이와 인종, 국적, 분야를 떠나 우리는 모두 예술 혹은 미술이라는 큰 카테고리에서 활동하는 잠재적 동료라는 점을 잊지 말자. 이메일을 쓰거나 메시지를 보낸다면, 이런 식으로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OOO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OOO에 관심을 가지고 OOO 작업을 하는 OOO입니다. OOO (선생)님이 OOO에서 OOO한 작업 OOO을 본 후 계속 아른거리다가 새해맞이를 틈타 이렇게 연락드리게 되었습니다.

✓ 꿀팁 9: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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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이번 글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알리며 ‘미술인이 새해에 따뜻한 방에서 뒹굴면서 할 만한 일’을 추천받는 도중 한 동료가 이런 답변을 남겼다. “방에서 뒹구는데 또 뭐를 해요. 멀티태스킹을 과감히 포기하고 ‘마인드풀 뒹굴기’를 제안합니다.” 사실 현재 시대에 활동하는 미술인, 예술인은 이미 할 일이 너무나도 많은 존재다. 누가 기금 선정되었는지도 봐야지, 올해 무슨 전시가 열릴지도 확인해야지, 사회적 현안에도 관심을 기울여야지, 어려운 레퍼런스도 살펴봐야지… 이 와중에 소셜미디어에는 왜 다들 고통스러운 창작 과정은 생략하고 멋들어진 결과물이나 전시 오프닝 소식만 뿅! 하고 올리는 건지…

새해를 맞이해 이 모든 자극에 대한 과도한 노출을 과감히 끊고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또한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한 일이다. 불 꺼진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휴대전화 화면을 무한 스크롤하는 건 휴식이 아니라 인지 자원과 감정을 소모하는 새로운 노동과 다를 바 없다. 굳이 마음챙김이나 명상처럼 심오한 행위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잠시만이라도 한 가지 활동에 집중해 내 시간을 싸보자. 휴대전화는 서랍에 집어넣은 채 종이책을 펼쳐 들고 30분 동안 읽어 본다든지, 디지털 기기 없이 한 시간 동안 산책을 해 볼 수도 있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 꿀팁 10: 나의 2024년 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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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새해를 맞이해 (누구나 매년 한 번쯤은 도전하는) 새해 계획을 하지 않고서 이번 글을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이번 2024년 계획을 세울 때에는 조금 다르게 시도해 보자. 내가 ‘이루고 싶은’ 일, 말하자면 일종의 ‘꿈과 희망’을 쓰는 대신, 나에게 ‘일어날 법한 일’, 그러니까 ‘예측과 예상’에 가까운 것을 적어 내려가는 거다. 즉, ‘OO문화재단 OOOO 기금 선정’이나 ‘OOO에서 전시하기’ 같은 선언적 목표를 제외하자는 말이다. 앞서 제안한 다양한 활동에 대한 꿀팁 중 몇 가지를 간단히 실행하는 과정에서 2024년 한 해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어렴풋이 그려질 것이다. 그 흐름에 서 있는 자기 모습에 근거해 현재 예측하고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을 파악해 보자.

만일 어떤 흐름에 놓인 모습이 스스로 그려진다면 자세히 살펴보길 권하고 싶다. 미술 혹은 예술, 그리고 이를 둘러싼 세계에서 나는 어떤 모습과 꼴을 갖추고 서 있는가? 나의 2024년을 그려보는 일은 곧 나만의 언어로 이를 기록하는 행동과 연결된다. 마치 한 두 해 전 발간한 『세계대전망』이나 『트렌드 코리아』를 다시 꺼내어 읽어보듯, 스스로 그린 2024년을 2025년이나 2026년에 다시 살펴보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 된다고 확신한다. 모든 예상과 예측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추측과 희망으로 이뤄졌을 뿐이라는 점을 생각하며, 스스로 얼마나 자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는지(혹은 그렇지 못했는지) 알아볼 기회가 되기도 할 테니까.

추신.

이번 ‘현대미술 설명서’ 아티클에 삽입한 일러스트레이션은 AI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는 라이언 오슬링(@ryan_ohsling) 님에게 글의 개요를 설명하고, 이미지 생성에 필요한 프롬프트에 힌트 혹은 영감이 될 만한 키워드와 상황에 대한 묘사를 제공한 결과물이다. 바쁜 연말 연초, 다소 촉박한 일정에도 작업을 흔쾌히 수락해 주신 라이언 오슬링 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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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박재용(@publicly.jaeyong)은 현대미술서가 서울리딩룸(@seoulreadingroom)의 장서광이자, 뉴오피스(@new0ffice)에서 일한다. 큐레이터이자 통번역가, 연구자, 교육자이며, 허영균과 함께 리서치 밴드 NHRB(@NHRB.space)의 프론트맨을 맡고 있다.

Illustrator

라이언 오슬링(@ryan_ohsling)은 AI를 통해 이미지와 영상을 생성하고 공유하는 AI 크리에이터다. 그는 AI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탐구하고,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지향한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능케 하고, 우리가 막연히 상상하던 것을 완성하며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다양한 세계관을 만들어 대중과 교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