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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현대미술 설명서: 필립 파레노 전시가 어려운 뉴비라면

Writer: 박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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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요즘 미술 애호가뿐 아니라 전시에 관심 있는 사람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필립 파레노의 개인전입니다. ‘전시가 너무 어렵다, 이해할 수 없다, 이게 대체 뭐냐’라는 볼멘소리와 ‘전시가 너무 좋다, 진짜 재미있다, 이런 전시가 우리나라에서 가능하다니!’라는 탄성이 교차하는 상황을 접하는 뉴비들은 갈까 말까 갈까 말까 결정장애를 겪고 있는데요. ‘현대미술 설명서’를 연재하는 박재용 님이 동아줄을 내려봅니다. 참고로 재용 님은 필립 파레노 전시의 기자 간담회에서 동시통역을 맡느라 여러모로 스터디를 열심히 하셨는데요. 그가 추천하는 친절한 월텍스트 요약본으로 왠지 가기 싫은 느낌을 한풀 낮추는 건 어떨까요? 전시가 막을 내리면 다시 경험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한남동 언덕에 자리한 리움미술관까지 도보로 올라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구릉으로 올라가는 2차선 도로 옆에 난 보도는 한 사람이 넉넉히 지나갈 만한 너비다. 미술관 주차장이나 입구까지 자동차로 이동하지 않는 이상 약간의 등산(?)이 필요하다. 이처럼 접근성이 마냥 좋지만은 않은 미술관에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기대하며 들르는 것이든) 분명 강력한 의지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 없다. 그런데 작년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개인전을 찾은 관람객이 25만 명에 달한 걸 보면 강렬한 의지 아래 한남동 언덕길을 등반할 준비를 마친 사람이 한둘은 아닌 듯하다.

요즈음 이 언덕을 올라 정문으로 향하는 입구 옆, 한남동을 내려다보는 넓은 야외 데크에는 난생처음 보는 물체가 있다. 2012년 10월부터 이곳을 지키던 수호신이 사라지고 이상하고도 거대한 타워처럼 생긴 구조물이 우뚝 서 있다. ‘아니쉬 카푸어의 조각이 어디 간 거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선을 훔치는 이 구조물은 웬만한 2~3층 건물과 맞먹는 높이에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굵은 케이블이 연결돼 있어 산업적인 느낌이 확 난다. 어딘가 스피커를 심어둔 건지,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를 언어로 나지막이 읊조리는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SF 영화 세트장 출신인가 싶지만 이것도 역시 작품이다. 프랑스 출신의 작가 필립 파레노Phillipe Parreno가 리움미술관 개관 20주년을 맞아 진행하는 개인전 «VOICES, 보이스»에 내놓은 신작 ‹막(膜)›(2024)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구조물은 미술관 외부의 환경을 감지하는 센서들의 모음으로, 데이터를 수집해 계속 미술관 내부로 전송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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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작품이 센서 역할을 한다니, 이건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한 생각은 잠시 미뤄두고 일단 진입로를 따라 미술관 로비에 들어서 보자. 이제 로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스크린에서 무작위로 출력하는 듯한 디지털 노이즈 이미지가 보인다. 디지털 신호를 시각화하는 알고리즘에 랜덤 함수를 적용한 모습인데, 바로 아까 미술관 입구에서 조우한 구조물을 통해 채집한 데이터를 시각화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본 전시가 시작한 건지,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며 본격적으로 펼쳐지는지 아리송한 상태로 관람 동선을 따라가면 벽에 붙은 간략한 설명문 형태의 ‘월텍스트wall text’를 발견할 수 있다.

필립 파레노 «VOICES, 보이스»
리움미술관은 전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프랑스 작가 필립 파레노의 국내 첫 개인전 «VOICES, 보이스»를 개최… 아시아 최대 규모의 서베이 전시… 필립 파레노는 전통적 작가 개념에 도전하며 오브제 생산자로서 작가의 역할을 거부… 전시와 작품과의 역동적 관계를 탐구하고 ‘시간의 경험’을 제안하며 90년대 현대미술 형태의 혁신적 전환을 이끌었다…

읽는 족족 등장하는 낯선 표현에 동공이 흔들리더라도 집중력 도둑을 어떻게든 막아내며 끝까지 한번 진격해 보자. 200자 원고지로 16매, 3200여 자에 불과한 분량이니(통상적으로 A4 용지 기준 10pt로 한 장 반 정도다), 끝까지 가면 뭐라도 하나 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말도록. 만약 아무리 노력해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아서 가느다란 희망의 끈마저 놓았다면,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큐레이터 입장에서는 최대한 친절하게 전시와 작가에 관해 알려주면서도, 지나치게 설명적이거나 정답을 강요하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쓴 결과물이지만, 작가와 작품에 푹 빠진 채 써 내려간 정보를 오늘 처음 보는 관람객 입장에서는 온도 차가 엄청난 게 당연지사다. 나름 친절하다고 자부하는 월텍스트의 문장이 아까 미술관 앞 타워에서 웅얼거리는 미지의 언어처럼 다가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갑자기 다가온 현실이 아무리 절망스럽더라도, 월텍스트를 재료 삼아 이런저런 질문은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프랑스 출신의 필립 파레노는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예술가인데, 지금까지 아시아에서 열린 전시 중 가장 큰 규모로 리움미술관에서 열린다네? 그렇다면 아시아가 아닌 곳에서는 여기보다 더 큰 규모의 전시를 열었을 수도 있겠네. 과연 어딜까?’ 혹은 ‘월텍스트에서 말하는 “전통적 작가 개념”이라는 건 뭘까? 그가 “오브제 생산자로서 작가의 역할을 거부”했다는 말을 힌트 삼으면 되려나?’. 어쩌면 ‘작가는 “90년대 현대미술 형태의 혁신적 전환”을 이끌었다는데, 그럼 2000년대 들어서는 딱히 혁신적으로 전환한 게 없다는 뜻인가?’라는 의구심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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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파레노Phillipe Parreno

자, 이제 월텍스트는 중간 지점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작가 소개를 마친 후 드디어 전시를 주인공 삼아 내용을 이어가니, 조금만 더 가보도록 하자!

전시 «보이스»는 ‘다수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감성적이고 공감각적인 안무를 펼치며 총체적 예술 경험을 제안…전시는 과거에 파편적으로 존재했던 ‘다수의 목소리’를 하나로 집결시키며, 지금 여기에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 질문… 작가는 하나의 새로운 목소리를 창조… 배우 배두나의 실제 목소리가 인공지능에 의해 ‘실재하는 가상’의 목소리로 재탄생… 근원을 알 수 없는 웅얼거림으로 시작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공언어 창조자가 만든 새로운 언어 ‘∂A’를 습득하며, 발화의 주체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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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텍스트에서 전시가 주어가 등장할 때는 마음을 굳게 먹을 필요가 있다. 작가와 그의 과거 작품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에게는 압축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자리이지만, 밖에서 웅얼거리는 이상한 타워 하나만 보고 전시장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수수께끼 석판처럼 다가올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자연스럽게 뇌를 쑤시며 울렁이게 할 수 있다. ‘전시가 “감성적이고 공감각적인 안무”를 펼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지? 혹시 전시장에 놓은 작품들이 실제로 움직이나?’, ‘다수의 목소리를 하나로 집결시킨다는 말은 작가가 과거에 만든 여러 작품을 이번 전시에 한데 모았다는 뜻을 고상하게 말하는 건가?’, ‘실재하는 가상의 목소리는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문학적 표현인가?’. ‘∂A는 웬 뜬금포?’

아아, 슬프게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점은 바로 마지막 문단이다. 아직 해당 전시를 보지 않았거나, 보고 왔지만 기억이 가물거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월텍스트 원본을 그대로 가져와 보려고 한다.

목소리는 마치 인형극 마스터처럼 작품을 활성화하며 공연을 시작한다. 그리고 리움미술관은 거대한 자동기계(automaton)로 변신한다. 조명이 깜박이며 벽이 움직이고 시계태엽이 작동한다. 눈이 녹는 소리가 들리며 거대한 스피커가 움직이고 광원이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동시다발적으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언어와 음악이 공간을 압도한다. 영상이 켜지는가 하면 반딧불이가 나타나고 피아노는 저절로 연주한다. 마법의 세계와 같다. 하지만 단순한 환상은 아니다. 전시는 자기제어시스템에 의해 작동되며 모든 요소는 완벽하게 컨트롤되기 때문이다. 단, 이 체계 안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변수와 우연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그다음 단계를 예측할 수 없을 뿐이다. 마치 생명체처럼, «보이스»는 상호의존하며 실제와 가상의 경계에서 예측불허한 진화를 지속한다.

얼핏 ‘예술 외계어(artspeak)’로 꽉 찬 듯한 문단을 살피는 지금, 이미 전시를 관람한 사람이라면 당당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테다. 수천 평에 이르는 리움미술관 전체 전시 공간을 점유한 40여 점의 작품을 실제로 보거나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아주 알차게도 열 개 남짓한 문단에 욱여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뉴비는 어떡하라고? 월텍스트에 친절함을 가득가득 채워도, 전시 초심자가 단박에 이해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목표라는 사실을 작성자도 매우 잘 알고 있다. 전시를 기획하며 이해도가 아주 높아진 큐레이터가 초안을 작성한 뒤, 전시에 관여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계속 친절도가 상승한 월텍스트의 끝판왕이 오더라도 모든 작품에 대한 안내문을 일일이 벽에 붙이지 않는 이상(혹은 심지어 그렇게 한다고 한들) 전시장에 찾아온 뉴비에게 한 방에 머리가 깨지는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 너머 미지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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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아파트 5층 높이의 언덕을 등반하며 체내 산소 농도가 떨어진 채 전시장의 월텍스트를 읽은 터라 전두엽으로 향하는 혈류 공급이 급격히 줄었거나, 시야가 흐려지는 현상을 겪는 분들을 위해, (작가와 작품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반의반 길이 정도로 월텍스트를 바꿔보았다. (참고로 필자는 이번 필립 파레노 전시의 기자간담회에서 통역을 맡았기에 다른 의미에서 이해도가 높아진 상태라는 점을 주지해 주시길.)

필립 파레노 «VOICES, 보이스»

«보이스»는 1990년대에 미술의 형태에 대한 고정관념을 혁신적으로 뒤바꾸면서 예술가로 활동을 시작한 필립 파레노의 지난 30년을 조망하는 전시다. 리움미술관 실내외의 거의 모든 공간을 활용하는 이번 전시는 작가의 첫 번째 작품인 ‹꽃›(1987)을 비롯한 과거의 주요 작품과 함께 리움미술관 공간에 맞춰 창작한 ‹막(膜)›(2024), ‹∂A›(2024), ‹움직이는 조명등›(2024) 등 새로운 작품을 아우르는 4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필립 파레노는 단순히 오브제를 만드는 제작자로 여겨졌던 전통적 예술가상을 거부하며, 전시 공간에서 관람객이 ‘시간’ 그 자체를 경험해 보기를 제안한다. 그런 점에서, 파레노의 전시는 매일, 매 순간 변화한다. 또한 그의 전시는 작품 각각을 분리해서 보여주는 대신, 작품과 공간을 통합해 연속적인 ‘경험’을 창출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언어학자와 함께 만든 인공언어 ‘∂A(델타에이)’를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와 합성해 목소리로 구현, 전시장 곳곳에서 들려오게 만들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작품들이 모여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자동기계’를 구성한 모습을 보여준다. 전시장 외부에 놓인 센서가 감지한 정보가 전시장 안에 놓인 작품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며, 전시장의 관람객 역시 그 존재만으로 이 거대한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양한 시기에 제작된 여러 형태의 작품이 이뤄낸 조합은 리움미술관의 공간 안에서 전시가 끝날 때까지 한시적으로 존재하며, 전시 기간에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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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정리한 월텍스트가 전시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물론, 필자 버전의 월텍스트 역시 예술 외계어의 방언으로 쉽게 읽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더불어 작가의 손을 이미 떠난 작품과 전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해의 틀을 제공하려는 시도는 자유로운 예술 감상에 도움이 아니라 방해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전력을 다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미술은 없다’라고 외치는 작품을 연달아 던지는 필립 파레노의 «보이스» 같은 전시는 아무래도 초심자에게 버거운 상대다. 작가가 제안하는 ‘게임’을 관람객이 아무런 공포 없이 기꺼이 수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소한의 가이드가 필요해 보이는 이유다. 실제로 작가는 «뉴요커The New Yorker»에 “내가 하는 일 가운데 많은 부분은 사람들이 픽션을 받아들여야 성립된다(Lots of the things I do require people to endorse a fiction)”라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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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보이스»라는 전시는 매일 문을 여닫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손길로 관리되는 미술관이라는 하나의 공간 혹은 제도가 작가의 전시를 통해 한시적으로 ‘자동기계’로 변한다는 픽션을 관람객이 신앙으로 믿어야만 재밌어진다. 그렇지 않다면, 미술관 외부 환경을 감지해 미술관 내부에 놓은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대한 기계 타워(‹막(膜)›)은 ‘SF 영화에서 가져온 듯한 신기한 조형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그저 볼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일정한 온습도를 유지하고, 작품에 손상이라도 갈까 봐 구석구석 지진계를 배치해 둔 미술관에서 서서히 녹아가는 눈사람(‹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이나 관람객으로 인해 변화하는 전시장 내부의 공기 흐름과 온도 변화에 반응해 마치 센서처럼 떠다니는 물고기 모양의 풍선(‹내 방은 또 다른 어항›)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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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면을 생각한다면, 작가와 작품 소개에 집중하는 월텍스트는 «보이스» 전시를 즐기기 위해 정말 필요한 도구가 아닐지도 모른다. 파레노가 쌓아온 명성과 이번 전시에서 어떤 형태의 작품을 선보이는지 설명하는 대신, 오히려 고정된 형태를 거부하는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적절한 단서를 제공하는 관람 지침이 필요하지 않을까? 심지어 작품의 내용이나 형태가 아니라, 창작이나 감상의 태도를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관람객에게 행동을 촉구해야만 한다. 더불어 작가를 처음 접한 이들을 위한 적당한 정보와 겸손하지만 확신에 찬 말투로 미술관의 노력을 소개하는 일을 스킵하는 건 너무 극단적이다. 아래 월텍스트는 리움미술관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필자의 소견이라는 점을 명심하며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필립 파레노 «VOICES, 보이스»

«보이스»는 필립 파레노가 1987년부터 지금까지 30여 년에 걸쳐 만든 작품 40여 점을 아우르는 조망전이다. 필립 파레노는 유럽의 주요 미술관에서 여러 차례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지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미술관에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소개되지 않았다. 리움미술관 실내외의 여러 전시 공간을 활용하는 이번 전시는 미술관에서 치러진 개인전 가운데 최대 규모로, 작가의 첫 번째 작품인 ‹꽃›(1987)을 비롯한 과거의 주요 작품과 함께 미술관 공간에 맞춰 창작한 ‹막(膜)›(2024), ‹∂A›(2024), ‹움직이는 조명등›(2024) 등 새로운 작품을 선보인다.

필립 파레노는 예술가를 단순히 오브제를 만드는 제작자로 여기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는 작품에 제목을 붙이고 미술관 전시를 통해 이를 보여주지만, 자신의 작품이 제한된 기간에 특정한 공간에서만 존재하는 ‘전시’ 안에서 ‘시간’의 변화에 따라 계속해서 변하는 ‘경험’으로 남기를 원한다. 따라서, 필립 파레노의 작품은 물리적 형태가 고정되지 않거나 심지어 눈으로 보이는 형태를 벗어날 때도 있다. 예컨대 전시 공간 곳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든 새 작품 ‹∂A›의 일부로, 언어학자와 함께 만든 인공 언어에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를 합성한 결과물이다. 이 목소리는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수집되는 데이터에 따라 계속해서 진화하며, 작가 역시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보이스»는 필립 파레노가 만든 ‘자동기계’와 같은 전시다. 전시장에 놓인 작품들의 조합은 그가 이번 전시를 위해 고안한 일종의 화학 공식이나 다름 없고,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 역시 공식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된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이 전시는 그 누구도 ‘전체’를 관람할 수 없고, 이는 작품을 창조한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전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각자의 시점에서 경험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시 공간 안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가능하다면 전시를 여러 번 방문해도 좋다. 전시의 영문 제목(VOICES)이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여러 목소리를 가리키는 이유는 이 전시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결코 하나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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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전시를 보고 나서 자신만의 월텍스트를 써보는 건 어떨까? 필자가 작성한 월텍스트는 공백 포함 1100자 수준으로 10pt 기준 A4 용지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전시회를 다녀온 후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라고 상상하며 두세 문단 정도의 월텍스트를 남겨보자.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써도 좋고, 평소 상상하는 미술계나 큐레이터의 모습에 과몰입해서 예술 외계어를 남발해도 좋다. 본인이 쓴 글을 시트지로 인쇄해 전시장 입구에 커다랗게 붙이는 모습을 상상하면 더욱 좋다. 당신의 월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불특정 다수다. 날카로운 눈매로 글을 점검하려고 벼르는 미술계 사람뿐 아니라 미술이 좋아 휴일에 방문한 사람들, 데이트를 위해 미술관을 고른 커플, 조기 교육을 위해 미술관에 끌려온 어린이, 미술 언어가 낯선 노령의 관람객까지 모두를 포괄한다. 이렇게 나만의 월텍스트를 조금씩 써본다면 마냥 이해하기 어렵게만 다가오던 전시장의 월텍스트가 분명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Writer

박재용(@publicly.jaeyong)은 주로 한국과 서울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 통·번역가, 연구자, 교육자다. 동시대 예술과 이론 서가 서울리딩룸(@seoulreadingroom)의 장서광이자, 리서치 밴드 NHRB(@NHRB.space)에서는 허영균과 함께 프론트맨을 맡고 있다. 김수지, 정성은과 함께 서촌코미디클럽(@westvillagecomedyclub)을 운영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기도 하며, 영국의 미술 매체 «프리즈Frieze»의 컨트리뷰팅 라이터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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