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 피드 속 잘 정돈된 공간과 북유럽 디자인의 값비싼 가구들. ‘좋아요’와 ‘저장’을 누르며 감탄하지만, 내 일상과는 조금 멀게 느껴질 때가 있죠. 하지만 덴마크의 모던 가구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아르네 야콥센의 세븐 체어, 한스 베그너의 Y체어, 파울 헤닝센의 PH 조명처럼 모두 ‘좋은 디자인은 모두의 삶을 더 좋게 만든다’는 사회민주주의적 철학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결국 덴마크의 디자인과 공원, 도시의 일상은 하나의 철학으로 이어져요. 좋은 디자인이란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삶을 조금 더 반짝이게 만드는 것이라는 믿음이죠. 그 열린 관계의 감각은 홍보라 디렉터가 코펜하겐의 거리를 걸으며 느꼈던 ‘괜찮다’와 ‘안전하다’는 감각과 맞닿아 있어요. 홍보라 디렉터는 덴마크의 예술가들과 도시를 여행하고,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며 화려함보다 일상의 감각을, 소유보다 공유를 중시하는 태도를 배워왔다고 해요. 그는 어쩌면 이런 ‘공유의 미학’이야말로 ‘스칸디나비안 쿨’의 본질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합니다. 닫힌 울타리 안의 안락함이 아니라 서로에게 열려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평온, 안전한 감각을 찾는 두 번째 단서를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Safe Space는 예술을 매개로 도시와 일상 속에서 자유로운 사고와 대화를 열어주고, 사변적 단상과 사회적 질문을 탐색하며 나누는 안전 공간입니다.
코펜하겐에서 발견한 ‘나대로 그냥 괜찮다’는 감각
세계 곳곳에서 누군가의 하늘 위로 포탄이 떨어지는 지금, 따뜻한 이불 속에서도 안전하다는 감각을 느끼기 어렵다. 한강을 물들인 불꽃놀이조차 순간적으로 전쟁의 포탄과 겹쳐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문득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묘한 불편함이 밀려온다. 우리만 괜찮으면 되는 걸까. 언제부터 우리는 배타성 위에서 안전을 찾기 시작했을까. 서울이라는 도시 속에서 점점 짙어지는 폐쇄적인 게이티드 커뮤니티의 풍경을 보면, ‘나’와 ‘내 것’, ‘우리끼리’의 울타리가 커질수록 정말 안전해지는 걸까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혹시 높은 벽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건 아닐까.
시선을 달리하면, 닫힌 익스클루시브보다 열린 인클루시브 속에서 더 큰 평온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코펜하겐에서 마주한 장면을 떠올린다. 그곳에서 경험한 ‘나대로 그냥 괜찮다’는 감각의 단서를 덴마크의 퍼블릭 아트와 디자인 문화 속에서 찾아보려 한다.
2005년 서울에 리서치차 온 두 명의 덴마크 예술가 아슐락 비벡(Aslak Vibæk)과 피터 도싱(Peter Døssing)을 만났다. 이름의 첫 글자를 딴 AVPD는 삼청동 시절의 팩토리에서 처음 만난 뒤 서촌으로 옮겨 그다음 해 개인전을 열었다. 그 후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의뢰로 북유럽 디자인 전시 ‹노르딕데이›(2012)를 기획하게 되면서 2011년 전시 리서치를 위해 헬싱키와 코펜하겐을 처음 방문했다. 그때부터 거의 매년 두 도시를 찾았다. 북유럽의 예술과 문화가 사람과 관계를 맺고 도시의 변화를 만들어 가는 방식을 지켜보며, 내 퍼블릭 아트 기획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란디와 카트린의 2009년 개인전 «House in Your Head»에서 선보인 후 팩토리2의 얼굴로 영구 설치된 파사드
하나의 문이 열리자 마치 우드와이드웹(Wood Wide Web)처럼 서로 얽힌 세계가 펼쳐졌다. 예술가와 디자이너, 예술 정책, 지원 기관, 도시 계획이 하나의 유기적 네트워크로 이어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팩토리2의 외관을 설계한 아티스트 듀오 란디와 카틀린(Randi og Katrine)의 장난기 가득한 아날로그 감성의작업, 그 정반대의 미니멀리즘으로 건축적 실험을 이어온 AVPD의 세계가 특히 인상 깊었다.
두 팀은 미감과 접근 방식은 상이하지만, 둘 모두 갤러리 내부를 넘어 도시와 건축, 지역 개발 단계까지 예술가의 역할을 확장하고 있었다. 덴마크에서는 이런 확장이 낯설지 않다. 예술가와 제작자인 페브리케이터, 조경가, 건축가, 과학자, 시민이 함께 공공 공간을 예술 실험의 무대로 삼는다. 그들의 협업은 벽이 아니라 열린 경계 위에서 이루어진다.
AVPD, ‹Vertical Time›, 2018, customised mirror-polished stainless steel fixtures, daylight neon tubes, control system, 3610 × 200 × 100 mm
AVPD, ‹Jitter›, 2021, Kvadrat curtain fabrics, rail systems, 4725 × 4725 × 5750 mm
스칸디나비안 쿨, AVPD의 공간 실험
내게 스칸디나비안 쿨을 가장 생생히 체화해 준 이들이 바로 AVPD다. 한창 쿨한 것에 경도되어 있던 시절에 만나 그들과 함께 전시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일과 놂, 계획과 우연이 겹치는 순간들을 경험했다. 덴마크를 방문할 때면 그들의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과 함께 그들의 작업이 퍼블릭 아트와 메타 건축 중심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덴마크 오덴세의 야외 수영장에서 본 AVPD의 작품 Light Sphere는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바람에 따라 우아하게 움직이는 구조물은 공간 전체를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변화시켰다. 그 경험은 2021년 내가 진행한 〈오늘의 날씨〉 프로젝트로 이어져, Light Sphere를 광명 버전으로 재해석해 영구 설치했다. 그 앞에 선 사람들에게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순간’을 선물하고 싶었다.
올해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서 AVPD와 함께 구현한 참여형 설치작품 지터(Jitter) II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빨강, 노랑, 하양의 반투명 천이 레일을 따라 유영하듯 움직이며, 벽이 되고 다시 길이 되며 공간의 층위를 바꾼다. 관객은 그 안을 걸으며 서로를 반투명으로 마주하고, 천 너머로 스치는 시선 속에서 미묘한 관계성을 체험한다. 그 경험은 단순한 시각적 사건이 아니라 공간과 타인, 나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시간이다(전시는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서 11월 17일까지 계속된다).
이 작업의 흥미로운 점은 견고한 재료 대신 부드러운 직물만으로 건축적 공간을 구현했다는 데 있다. 덴마크 텍스타일 브랜드 KVADRAT와 협력으로 전시장의 11미터 높이의 천장에 맞는 작품 설치가 가능했던 이번 협업은 단순한 기업 후원이 아니라 창작자의 예술적 비전을 함께 짓는 동반자 관계였다. 예술가와 기업이 수직적 권위 없이 서로의 지혜를 나누는 과정 그 자체가 하나의 고유한 협업이자 창작이었다.
그 열린 관계의 감각은 내가 코펜하겐 거리를 걸으며 느낀 ‘괜찮다’와 ‘안전하다’는 감각과 닿아 있다. 그것은 타인을 배제한 안락함이 아니라 서로에게 열려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평온함이다.
북유럽의 미학은 언제나 이중적이다. 따뜻하고 동화적인 정서와 시크한 미니멀리즘이 공존한다. 그 상반된 감각이 만들어 내는 섬세한 균형이 바로 덴마크 디자인의 본질이다. 그 안에는 화려함보다 일상의 감각, 소유보다 공유를 중시하는 태도가 깃들어 있다. 어쩌면 이런 공유의 미학이야말로 스칸디나비안 쿨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덴마크의 모던 가구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도서관이나 학교, 시청, 병원 등 누구나 드나드는 공공 공간에 놓이도록 설계됐다. 아르네 야콥센의 세븐 체어, 한스 베그너의 Y체어, 파울 헤닝센의 PH 조명, 그리고 야콥센의 시청 벽시계까지 모두 ‘좋은 디자인은 모두의 삶을 더 좋게 만든다’는 사회민주주의적 철학에서 태어났다.
덴마크 모던 디자인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소유와 배타가 아니라 공유와 접근성에 있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일부 시장에서는 이들 가구가 고급 문화로 포장되어 소비되곤 한다. 덴마크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들 가구는 지위를 과시하는 장치가 아니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공공의 미학이다. 코펜하겐의 거리를 걷다 보면, 같은 의자와 조명이 집과 학교, 카페, 관공서에 반복적으로 놓여 있다. 위계 없이 일상과 공공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디자인의 풍경이다.
티볼리 공원 전경, 코펜하겐, 사진: Michelle Berg, 출처: www.tivoli.dk
이런 철학은 코펜하겐 중앙역 옆의 티볼리공원에서도 이어진다. 1843년 국왕의 인가로 세워진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원지다. 설립자 게오르크 카르스텐센은 “국민에게 즐거움을 주면 정치에 신경 쓰지 않는다”라는 다소 기묘하고 불순한 논리로 왕을 설득했다지만, 결과적으로는 정원·건축·음악·예술이 어우러진 가장 사랑받는 시민 문화 공간이 되었다. 도심 한가운데 있어 누구나 걸어서 접근할 수 있는 구조로, 접근성 자체가 덴마크식 공공디자인의 핵심이다.
지금도 운영 중인 1914년의 목재 롤러코스터 Rutschebanen (룻쉐베엔)은 손의 감각과 나무의 질감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기계적 완벽함보다 인간적인 스릴을 품은 그 구조물은 덴마크 디자인이 지향하는 ‘인간 중심의 미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덴마크의 디자인과 공원, 도시의 일상은 하나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좋은 디자인이란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삶을 조금 더 반짝이게 만드는 것, 그렇기에 덴마크의 공공디자인은 단순한 기물이 아니라 도시를 안전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느슨하지만 단단하게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인프라다.
티볼리 공원 여름 전경, 2022, 코펜하겐, 사진: Nicolas Tobias, 출처: www.tivoli.dk
티볼리 공원 목재 롤러코스터 ‹Rutschebanen› 전경, 2022, 코펜하겐
사진: Nicolas Tobias, 출처: www.tivoli.dk
‘괜찮다’는 감각
그래서일까. 나는 코펜하겐의 도심을 걸을 때마다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외국인이자 키가 작은 동양인이고, 중년의 여성이지만 이 도시 속에서 내 존재가 배제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마치 도시가 조용히 “너, 그대로 괜찮다”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높은 물가에 매번 놀라고, 가는 길이 멀고 복잡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 어딘가에는 여전히 ‘괜찮다’는 감각이 살아 있음을 믿고 싶다. 전시와 프로젝트, 연구라는 여러 가지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나는 자꾸 그쪽으로 마음과 몸을 이끈다. ‘안전하다’는 감각에는 어쩌면 다시 그곳을 향하게 만드는 은근한 중독성이 있다.
Writer
홍보라(@borabola5)는 경복궁 서쪽에서 작고 뾰족한 예술 공간이자 기획 사무소인 팩토리2를 운영하는 디렉터이자 예술기획자로, 도시·사람·예술의 역동적 관계를 기반으로 퍼블릭 아트와 국내외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장르 간 경계를 선이 아니라 넓은 지대로 확장하고자 연구, 기획, 제작, 교육 등 예술과 문화 전반에 걸쳐 경계 없이 활동하고 있다.
서촌을 걷다 보면 괜히 발걸음이 느려집니다. 천천히 걸을수록 풍경 하나, 공기 한 줄기에도 의미가 스며 있는 것 같거든요. 그 무드의 근원지를 찾는다면 아마 ‘팩토리2’를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2002년 문을 연 갤러리 팩토리는 2018년, 두 번째 시즌을 맞아 이름을 팩토리2로 바꾸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아티스트와 함께 전시·출판·퍼포먼스·워크숍을 실험하며 공간의 안과 밖을 유연하게 확장해 왔죠. 이곳을 20년 넘게 이끌어온 홍보라 디렉터가 이번엔 ‘안전하다’는 감각을 붙잡아 글로 풀어냈습니다. 서울의 끈적한 여름부터 헬싱키 도서관의 서늘한 바람까지. 도서관, 광장, 케이팝 댄스 현장에서 포착한 순간들이 모여 ‘Safe Space’라는 시리즈가 시작됩니다. 도시와 예술을 새롭게 읽어내는 시도이자,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작은 안식의 기록입니다. 모두의 안전한 감각을 위해, 첫 번째 이야기를 지금 함께 열어봅니다. 그 특별한 풍경을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올해 7월, 전시를 위해 꼬박 한 달을 헬싱키에서 머물렀다. 인구 밀도가 낮고, 특별히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볼거리가 없는 도시의 느슨함. 밤 열두 시가 되어서야 겨우 어두워지는 북유럽의 긴 여름, 해가 지면 서늘하다 못해 쌀쌀해지는 공기. 그 심심하고 선선한 기운이 나를 천천히 걷게 하고, 발걸음을 멈춰 관찰하며 짧은 단상들을 모을 마음의 여유를 주었다. 한 달 살기이자 한 달 일하기였지만, 리듬은 느리고 머리는 맑았다.
서울로 돌아오니, 공기는 여전히 잔인하게 뜨겁고 끈적했다. 사고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글 한 줄 읽고 쓰기조차 어려운 날들. 거리 위로 쏟아져 나온 도시의 욕망이 이글거리는 풍경 속에서 나는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고, 지난 헬싱키에서의 시간을 하나씩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그중 유독 선명하게 남은 장면들을 글로 옮겨본다.
‘안전공간(Safe Space)’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패닉룸 같은 물리적 은신처나, 편견과 위협 없이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공론장을 떠올리기 쉽다. 올 한 해 이 개념은 내게 중요한 의제이자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나는 그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도시 안에서 예술을 매개로 마음껏 상상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심리적 공간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한쪽에서는 다양성을 신앙처럼 외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문화·종교·관습·정치적 입장·젠더 인식 차이로 인해 갈등과 혐오가 오히려 커져만 가는 시대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의제들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가운데, 도서관은 여전히 드물게 다양한 사람들이 편견 없이 머물 수 있는 장소다. 이제 도서관은 단순히 책의 집을 넘어 시민들의 활동과 예술적 경험이 교차하고, 오프라인으로 여러 신체가 나란히 놓이며 각자의 방식대로 존재할 수 있는 ‘안전 공간’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헬싱키 중앙도서관 오오디(Oodi)는 그 좋은 예다. 창작 스튜디오와 모임 공간, 어린이와 부모를 위한 쉼터, 퍼블릭 아트까지 품으며 미술관 못지않은 예술적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설계 초기 단계부터 함께 기획된 퍼블릭 아트 오미스투스키리요이투스(Omistuskirjoitus, ‘헌정’, 작가: Otto Karvonen)는 “도서관을 누구에게 헌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시민 381명의 응답을 모아 만든 텍스트 설치 작품이다. 중앙의 나선형 계단실 벽을 가득 채운 단어와 문장은 위계 없이 무작위로 배열되어, 누구나 자기만의 연결과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이 작품은 오프라인의 계단실 벽에만 머물지 않는다. 10개 언어와 음성 낭독 기능을 갖춘 애드온(*작품을 온라인에서도 다국어·음성으로 체험할 수 있는 보조 확장 기능)을 통해, 시각과 언어, 움직임과 참여의 차원에서 누구든 자기 속도로 작품과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 덕분에 휠체어 이용자, 어린이, 비핀란드어 사용자 등 다양한 신체 조건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방문객 모두가 도서관과 예술을 함께 누린다.이는 오오디가 지향하는 접근성과 포용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또한 젠더리스 화장실과 스트리트 레벨에서 입구까지 단차 없이 이어지는 세심한 건축적 설계는 물리적 편의성을 넘어 방문객에게 심리적 안도감까지 제공한다. 덕분에 오오디는 단순한 도서관을 넘어, 확실한 ‘안전공간’으로 기능한다.
매번 갈 때마다 오오디와 그 주변 도심 광장은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책을 읽는 사람들, 갓난아기와 부모, 3층 한쪽에 가지런히 세워진 유아차들. 낮은 책장 사이 자연스럽게 놓인 벽 없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 사람들. 책의 집이자 커뮤니티 센터, 음악 감상실이자 미술관, 창작 스튜디오와 모임 공간을 오가는 발걸음, 방문객의 움직임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사운드 설치, 그리고 입구와 연결된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낯선 음악과 몸짓까지. 오오디는 특정한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는다. 방문객의 필요와 상상력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품는다. 그 모든 장면은 누구나 각자의 방식과 속도대로 머물 수 있도록 허용하는 공간이다. 헬싱키 시민들이 오오디를 자랑스러운 공공재로 여기는 이유가 충분히 이해된다.
지난 7월의 주말 이른 오후, 오오디 앞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장면이 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케이팝 음악에 맞춰 저마다의 칼군무를 추고 있었다. 서로 다른 문화와 배경, 성별과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아이들이 뒤섞여 있었고, 그중 유난히 어색해 보이는 소년도 눈에 띄었다. 그는 케이팝 랜덤 플레이에 맞춰 가장 많은 안무를 따라 추며 자신만의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냈고, 함께 춤을 추는 무리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서 어색한 몸과 마음이 조금씩 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그 순간, 오래된 내 음악적 선입견과 케이팝 팬문화에 대한 편견이 무너졌다. 케이팝이라는 울타리 안에는 사회·종교·정치적 갈등과는 무관한 그들만의 평행우주, “광야(KWANGYA)”가 펼쳐지고 있었다.
왠지 나는 오오디 입구 광장에서 펼쳐진 케이팝 랜덤 플레이 댄스 현장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오랜만에 예상치 못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마치 버튼이 눌린 듯 그 자리에 서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온갖 케이팝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 곡은 무엇일지, 또 이 어색하고 조금은 서툰, 다양한 신체와 머리색의 청소년들 가운데 누가 광장 중앙의 동심원으로 나와 자신의 춤사위를 뽐낼지 홀린 듯 지켜보았다. 아슬아슬해 보이던 그들이 그 순간만큼은 더없이 안전해 보였다.
지금, 여기에 속한다는 감각. 누구의 편견이나 평가로부터 자유로운, 보이지 않는 투명한 무지개 지붕이 잠시 그들 위에 드리워진 듯했다. 반짝반짝.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졌다. 안전공간이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다. 그저 나 자신으로서, 마음껏 속하거나 속하지 않을 자유를 스스로 허락한 심리적 공간,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여백이 있는 곳. 그날 오후, 오오디 앞 광장은 내게 바로 그런 자리였다.
Writer
홍보라(@borabola5)는 경복궁 서쪽에서 작고 뾰족한 예술 공간이자 기획 사무소인 팩토리2의 운영하는 디렉터이자 예술기획자로, 도시·사람·예술의 역동적 관계를 기반으로 퍼블릭 아트와 국내외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장르 간 경계를 선이 아닌 넓은 지대로 확장하고자 연구, 기획, 제작, 교육 등 예술과 문화 전반에 걸쳐 경계 없이 활동하고 있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늘 이변이 일어납니다. 올해도 그냥 넘어가질 않네요. 45년 경력의 배우가 신기 들린 연기로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꼽혔는데, 처음 장편영화 주연을 맡은 1999년생 배우가 오스카 트로피를 쏙 가져갔어요. ‹서브스턴스›의 데미 무어Demi Moore와 ‹아노라›의 마이키 매디슨Mikey Madison 이야기입니다. 특히 무어는 올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뮤지컬·코미디 영화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더욱더 화제가 됐는데요. 데뷔 45년 만에 처음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에요. 과거 자신이 흥행에는 도움이 되지만 연기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배우를 비하하는 ‘팝콘 여배우(Popcorn Actress)’로 불렸다고 고백하며 그동안 쌓은 한을 모두 풀어버릴 것 같던 62세 여배우의 재기를 다들 응원할 정도였죠. «비애티튜드»에 언제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고하는 칼럼니스트 김도훈 님이 배우론에 가까울 정도로 무어를 파고들었습니다. 그의 글을 읽고 나니, 이름과 외모만 익숙했던 무어의 진면목을 발견한 느낌이에요. 이 떨림을 여러분과 얼른 공유하고 싶네요. «비애티튜드» 웹사이트에서 아티클을 확인해 보세요.
데미 무어를 배우로 기사회생시킨 영화 ‹서브스턴스› 포스터
여러분은 데미 무어Demi Moore를 좋아했던 적이 없다. 이 첫 문장부터 ‹서브스턴스The Substance›(2024)의 격렬한 팬들을 화나게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겠는가. 사실은 사실이다. 여러분은 무어를 좋아했던 적이 없다. 무어는 흘러간 배우다. 아니, 모든 나이든 배우는 사실 어느 정도는 흘러간 배우다. 한때 유명했으나 지금은 그리 주목할 만한 활동을 하지 못하는 배우를 우리는 흘러간 배우라고 부른다. 가만 생각해 보면 흘러간다는 건 꽤 시적인 표현이다. 우리 눈앞에 흐르는 할리우드의 격렬한 강물 위에서 무거운 바위처럼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하류로 또 하류로 흘러간 배우들은 많다. 바위 같은 배우도 사실 몇 없다. 대부분의 배우는 어떻게든 흘러가지 않으려 상류를 향해 끊임없이 헤엄을 치는 존재들이다. ‘메릴 스트리프Meryl Streep’라는 바위 근처에서 오늘도 배우들은 격렬하게 헤엄을 치고 있다.
‹서브스턴스› 스틸컷
다시 문장을 시작해 보자. 여러분은 아마 무어를 좋아했던 과거의 기억을 갖고 있을 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이 40대와 50대라면 무어를 한때 잠깐 좋아했을 것이다. 여러분의 사랑은 오로지 한 편의 영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1990년 할리우드와 한국 영화계를 뒤흔든 ‹사랑과 영혼(Ghost)›이다. 사실 ‹사랑과 영혼›은 할리우드 직접 배급(직배)을 반대하며 극장에 뱀을 풀고 불을 질렀던 과거 한국 영화 운동가에게 완벽한 패배를 안겨준 ‘미제(美帝)의 첨병’이었다. 이전까지 모든 할리우드 영화는 할리우드 배급사가 직접 배급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직배가 시작되면 안 그래도 볼품없던 한국 영화 산업은 일시에 망할 거라는 예언이 가득했다.
‹사랑과 영혼›의 명장면
‹사랑과 영혼›이 전국 개봉관에서 350만 관객을 기록하자, 직배 반대 운동은 한 순간에 끝이 났다. 극장 숫자도 적고 관객 수 집계 전산화도 되지 않은 그 시절의 350만은 지금의 1000만에 가깝다. 뭐, 그렇다고 한국 영화 산업이 망한 건 아니다. 오히려 할리우드 영화에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한국 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글은 한국 영화 산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니, 이쯤에서 구석기 시대 이야기는 마무리해야 할 것이다. 이런 소리를 자꾸 하다 보면 네안데르탈인이 된 기분이 든다.
‹사랑과 영혼›은 지긋지긋했다. 아니다. 나는 그 영화를 너무 사랑했다. 쇼트커트를 한 무어의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큰 눈동자가 클로즈업될 때마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역시, 지긋지긋했다. 영화가 개봉한 이후로 라이처스 브라더스Righteous Brothers의 ‘Unchained Melody’는 세상 어디서나 흘러나왔다. 음악 저작권 따위는 없던 시대다. 길거리 불법 레코드를 파는 리어카에서도 흘러나왔다. 쇼핑몰에서도 흘러나왔다. 라디오에서는 매일매일 흘러나왔다. 전국의 라디오 DJ는 “오늘도 이 지긋지긋한 노래를 틀어야 하냐”며 PD에게 짜증을 부렸을 것이다. 2025년의 여러분은 정말이지 청각이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로제ROSÉ의 ‘APT.’를 하루에 삼십 번 이상 들어야 할 의무가 없으니까.
‹사랑과 영혼› OST로 쓰인 라이처스 브라더스의 ‘Unchained Melody’
‹사랑과 영혼›이 개봉하기 전, 무어는 한국에서 그리 알려진 배우는 아니었다. 다만 «로드쇼»나 «스크린» 같은 당대 영화 잡지들을 모으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브랫팩Brat Pack’의 일원으로 약간 인기가 있었다. 브랫팩은 80년대 초중반 할리우드에서 인기를 끈 청춘스타들을 묶어 말하던 별칭이다. 그 시절 하이틴 영화의 대부였던 존 휴즈John Hughes가 제작하거나 감독한 영화들에 출연한 배우들은 다 브랫팩의 일원이었다. 내 세대는 뭘 그렇게 꼭 묶어서 이야기하길 좋아했다. 90년대 홍콩 가요계를 지배하던 네 명의 가수 겸 배우, 장학우(張學友), 유덕화(劉德華), 여명(黎明), 곽부성(郭富城)을 사대천왕이라 불렀던 것도 비슷한 결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나는 곽부성을 제일 좋아했다. 여러분은?
브랫팩 시절 가장 중심에 있던 배우들은 롭 로Rob Lowe, 에밀리오 에스테베즈Emilio Estevez, 앤드루 매카시Andrew McCarthy, 몰리 링월드Molly Ringwald, 앨리 시디Ally Sheedy, 랠프 마치오Ralph Macchio, 맷 딜런Matt Dillon이었다. 이 이름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면 당신 나이는 적어도 마흔다섯 이상일 것이다. 브랫팩 시절 약간 변두리에 있던 배우들이 톰 크루즈Tom Cruise,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obert Downey Jr., 제임스 스페이더James Spader, 숀 펜Sean Penn, 그리고 무어였고. 사람 인생이라는 게 이렇다. 젊은 시절 절정을 찍는 사람이 있고, 나이가 들어서 절정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다. 인생은 공정하지 못한 데다 참 변칙적이다.
‹사랑과 영혼› 이전에도 무어의 격정적인 팬이었다고 고백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말하는 누군가는 기억 조작으로 거짓말을 하는 거다. ‹사랑과 영혼›이 개봉하기 전 국내 극장에 걸렸던 무어의 영화는 오컬트 호러영화 ‹세븐 싸인(The Seventh Sign)›(1988)이 ‘거의’ 유일하다. 거의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도대체 그 시절 영화들의 제대로 된 개봉 정보가 한국에 남아있질 않는 탓이다. 우리는 정말이지 아카이빙에 인색한 민족이었다. 나는 극장에서 ‹세븐 싸인›을 봤다. 오컬트 호러영화광이었던터라 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세븐 싸인› 포스터
연소자(청소년) 관람불가 영화 아니었냐고? 여러분은 80년대를 모른다. 그 시절 연소자가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 들어가는 건 지나치게 쉬웠다. 사실 나는 국민학교, 아니 초등학교 시절 첫 데이트 영화로 ‘블랙·후라이데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13일의 금요일: 더 파이널 챕터›(Friday the 13th Part IV: The Final Chapter)를 골랐다. 머리에 꽃핀을 꽂고 내 옆자리에 앉아 사색이 되어 떨던 그 친구에게 뒤늦은 사과를 보낸다.
‹세븐 싸인›은 형편없는 영화였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파멸의 일곱 가지 예언이 하나씩 실현되는데, 알고 보니 미국의 한 젊은 배우가 낳는 신생아가 마지막 파국의 주인공이라는 이야기다. 왜 맨날 지구 종말은 미국에서 시작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 영화가 미국과 한국에서 화제를 모은 가장 큰 이유는 하나였다. 당시 무어는 TV 드라마 ‹블루문 특급(Moonlighting)›과 영화 ‹다이하드Die Hard›로 스타가 된 브루스 윌리스Bruce Willis의 아내였다. 무어가 뱃속에 그의 아이를 가진 상태로 출연했다는 사실은 영화의 주요 마케팅 수단이 됐다.
‹세븐 싸인› 스틸컷
‹세븐 싸인› 스틸컷
그 이전에도 무어가 스타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건 불가능하다. 80년대 브랫팩의 일원이었던 무어는 꽤 인기가 치솟던 젊은 배우였다. ‹세인트 엘모의 열정(St. Elmo’s Fire)›(1985)은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무어 영화 중 하나다. 배우 마틴 신Martin Sheen의 아들이자 찰리 신Charlie Sheen의 형으로, 당대 브랫팩 최고 인기 스타였던 에스테베즈가 감독하고 주연한 ‹위즈덤Wisdom›(1986)도 악명만큼 형편없지는 않다. 문제는 무어의 초기작들이 한국에 소개된 시점이 ‹세븐 싸인› 이후라는 것이다. ‹사랑과 영혼›이 한국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자 뒤늦게 무어의 출연작이 비디오로 출시되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나는 그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요즘처럼 배우 출연작을 커리어 순서대로 보는 시대가 오기 전이었다. 한국인은 ‹에이리언Alien›도 순서대로 보지 못한 민족이다. ‹에이리언 2(Aliens)›가 1986년 국내 개봉해 인기를 끌자, ‹에이리언Alien›(1979)이 이듬해 개봉했다. 영화 속 주인공, 리플리는 80년대 한국에서 ‘시간을 달리는 소녀’였다.
‹사랑과 영혼›은 모든 걸 바꾸어 놓았다. 무어는 슈퍼스타가 됐다. ‹사랑과 영혼›은 남편 윌리스의 ‹다이 하드 2 (Die Hard 2: Die Harder)›(1990)와 동일한 해에 개봉했다. 그해 미국 언론은 아내의 작은 슬리퍼 히트sleeper hit 영화가 남편의 블록버스터를 박스오피스에서 압살했다는 헤드라인을 서로 베끼듯 남발했다. 모두가 무어의 커리어는 이제 탄탄대로만 남았다고 예상했다. 한동안 이는 맞아떨어졌다. ‹위험한 상상(Mortal Thoughts)›(1991), ‹어 퓨 굿 맨A Few Good Men›(1992), ‹은밀한 유혹(Indecent Proposal)›(1993), ‹폭로(Disclosure)›(1994)의 흥행이 이어졌다.
‹위험한 상상› 포스터
‹위험한 상상› 포스터
‹은밀한 유혹› 포스터
‹어 퓨 굿 맨› 스틸컷
‹어 퓨 굿 맨›에서의 무어.
‹폭로› 스틸컷
무어는 줄리아 로버츠Julia Roberts와 함께 당대 여배우 최고 출연료를 경신하던 존재였다. 배우가 그 정도 지위에 오르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모두가 말리는 인생 프로젝트를 하나쯤 하고 싶어진다. 배우의 인생 프로젝트는 종종 배우의 경력을 끝장내거나 흔드는 실패작이 된다. 무어의 남편, 윌리스의 ‹허드슨 호크Hudson Hawk›(1991), 아놀드 슈워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의 ‹라스트 액션 히어로Last Action Hero›(1993), 케빈 코스트너Kevin Costner의 ‹워터월드Waterworld›(1995), 지나 데이비스Geena Davis의 ‹컷스로트 아일랜드Cutthroat Island›(1996)가 그 슬픈 사례들이다.
요즘 시절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1990년대는 할리우드 스타 파워가 마지막 절정기를 구사하던 시대다. 스타 한 명의 이름만으로도 1억 달러를 벌어들였기에, 최고의 스타들은 자신이 염원하는 대형 블록버스터를 스튜디오의 큰 간섭 없는 지원으로 만들 수 있었다. 무어가 이 시기에 선택한 영화는, 그렇다. 그 악명 높은 ‹스트립티즈Striptease›(1996)다. 전직 FBI 요원이 여섯 살 난 딸의 양육권을 되찾고 양육비도 벌 겸 플로리다 소도시에서 스트립 댄서로 일하다가 주요 고객인 부패한 상원의원이 연관된 살인사건에 휘말린다는 이야기다.
‹스트립티즈› 포스터
‹스트립티즈› 스틸컷
‹스트립티즈› 속 스트립 댄스 장면은 지금 봐도 선정적이다.
누구도 영화 내용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버트 레이놀즈Burt Reynolds나 로버트 패트릭Robert Hammond Patrick 같은 남자 배우들이 나온다는 사실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스트립티즈›는 무어의 영화였다. 무어에 의한 영화였다. 무어를 위한 영화였다. 총제작비 5000만 달러 중 1250만 달러를 출연료로 받은 무어는 할리우드 역사상 처음으로 출연료 1000만 달러를 돌파한 여배우가 됐다. 그는 이 영화에 모든 것을 걸었다. 영화 홍보를 위해 데이비드 레터맨David Letterman이 진행하는 심야 토크쇼 ‹Late Show with David Letterman›에 나와 브라와 팬티만 입고 춤췄다. 지금 시대에는 모두가 소스라칠 일이지만, 무어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영화고 자시고 ‘나를 보러 극장에 오라’는 거였다.
‹Late Show with David Letterman›에 출연해 브라와 팬티만 입고 영화 홍보를 하는 무어
누구도 보러 가지 않았다. ‹스트립티즈› 박스오피스 최종 성적은 3000만 달러였다. 무어는 이듬해 최악의 영화와 배우에게 선사하는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Golden Raspberry Awards)에서 ‘최악의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할리우드의 웃음거리가 됐다. 절치부심한 그는 리들리 스콧Ridley Scott과 손잡았다. 여성 참여를 금지한 해군 특전단 ‘네이비실Navy SEALs’ 훈련에 처음 투입된 여성 대원으로 분한 ‹지.아이. 제인G.I. Jane›(1997)이다. 이건 사실 거의 서커스 같은 전환이었다. 당시 리뷰의 표현에 따르면 “수술한 가슴을 볼링공처럼 흔드는” 스트리퍼를 연기한 배우가 이듬해에는 머리를 삭발하고 완벽한 근육질 몸매를 만든 뒤 네이비실 훈련을 연기하다니. 사람들은 말했다. 경력을 건 도박이라고.
전년도에 개봉한 ‹스트립티즈›와 정 반대로 파격적인 삭발과 거친 액션을 보여주는 ‹지.아이. 제인›
도박은 실패했다. 역시 누구도 보러 가지 않았다. 여성 관객의 반응도 별로였다. 남성도 반 이상 탈락하는 네이비실 훈련에서 여성이 근성으로 살아남는 게 무슨 여권 신장이냐, 라는 소리가 나왔다. 영화는 스콧의 수많은 실패작 중 하나로 남았다. 스콧은 하도 영화를 많이 찍어서, 성공한 영화와 실패한 영화 또한 지나치게 많은 양반이다. 그러니 ‹지.아이. 제인›의 비평적·흥행적 실패가 딱히 그의 경력을 발목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무어는 달랐다. 그는 반드시 영화를 성공시켜야 했다. 요즘은 좀 덜하지만, 1990년대에는 배우라는 직업이 그리 안전하지 않았다. 영화 몇 편이 연이어 실패하면, 경력은 멈추어 버렸다. ‘여배우’는 더욱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직업이었다. 무어는 ‹지.아이. 제인›으로 또다시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최악의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경력은 거기서 끝이 났다. 무어는 ‘팝콘 여배우(popcorn actress)’였다. 세상은 갓 튀긴 팝콘 여배우만 원했다. 무어는 갓 튀긴 팝콘 여배우가 더는 아니었다. 역시, 1990년대의 일이다.
무어가 마지막으로 타올랐던 순간은 2003년이다. 그는 ‹미녀 삼총사 2: 맥시멈 스피드›(Charlie’s Angels: Full Throttle)에 악역으로 출연했다. 악역은 배우의 경력에서 무엇을 의미할까. 전성기가 지났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지만, 요즘 할리우드는 좀 다르다. 악역이 젊은 배우의 경력을 치솟아 오르게 만드는 로켓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달랐다. 상업 영화의 악역은 노장 배우들 차지였다. ‹슈퍼맨(Superman: The Movie)›(1978)의 진 핵크먼Gene Hackman, ‹배트맨Batman›(1989)의 잭 니콜슨Jack Nicholson, 그 이후 ‹배트맨 3: 포에버(Batman Forever)›(1995)의 토미 리 존스Tommy Lee Jones와 짐 캐리Jim Carrey, ‹배트맨 4: 배트맨과 로빈(Batman & Robin)›의 아놀드 슈워제네거 등, 프랜차이즈 블록버스터에서 악역은 항상 중견·중년 배우의 몫이었다. ‹미녀 삼총사 2: 맥시멈 스피드›에서 무어가 악역을 맡았을 때, 사람들은 잊히는 배우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도 그랬다.
‹미녀 삼총사 2: 맥시멈 스피드› 스틸컷
데미 무어는 다시 팝콘을 튀겼다. 당시 나온 기사들을 한 번 검색해 보시라. 키워드는 하나다. 전신 성형. 데미 무어가 50만 달러를 들여 전신 성형을 했다는 소문이 전 세계로 퍼졌다. 영화 스틸컷이 공개되자 사람들은 감탄했다. 낙담했다. 조롱했다. 아예 성형수술 견적서가 풍문으로 나돌았다. ‹스트립티즈›에서 확대한 가슴을 다시 매만졌다고 했다. 심지어 무릎 주름 수술까지 했다는 소문이 났다. 아니다. 완벽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무어는 확실히 젊음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배우였다. 브루스 윌리스와의 이혼 후 세대가 다른 젊은 배우 애시튼 커처Ashton Kutcher와 2005년 결혼하면서 젊음에 대한 강박은 점점 심해졌다.
50만 달러를 들인 전신 성형으로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미녀 삼총사 2: 맥시멈 스피드› 속 무어의 비키니 신. 2021년 무어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무어의 성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알 수 있다.
당시 영화평론가 듀나는 이렇게 썼다. “하여간 세상엔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조카뻘 되는 젊은 남자 스타를 성공적으로 데리고 노는 무어를 보면서 통쾌해하고 시원해하고 영감을 얻는 수많은 아줌마들이 있습니다. 그것만 해도 이 불장난의 가치는 상당하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최근 몇 년 간의 어정쩡한 경력보다는 훨씬 값어치 있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무어는 배우라기보다, 젊은 남자를 데리고 파티를 벌이는 ‘쿠거cougar’의 아이콘이었다.
애시튼 커처와의 오붓한 한때. 무어는 ‘쿠거’였다.
‹미녀 삼총사 2: 맥시멈 스피드›는 무어의 경력을 되살리지 못했다. 그 이후 출연작 제목을 한 번 열거 해 보자. ‹하프 라이트Half Light›(2006), ‹바비Bobby›(2006), ‹미스터 브룩스Mr. Brooks›(2007)까지는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플로리스Flawless›(2008), ‹어나더 해피 데이Another Happy Day›(2011), ‹포세이큰Forsaken›(2015), ‹와일드 오츠Wild Oats›(2016), ‹레이디스 나잇(Rough Night)›(2017), ‹러브 소니아Love Sonia›(2018), ‹플리즈 베이비 플리즈Please Baby Please›(2022). 나는 무슨 영화인지 기억하지 못한다. 당신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무어의 커리어는 이미 2000년대에 끝났다. 완전히 끝났다. 더는 끝날 수 없을 정도로 끝났다.
자, 당신은 그와 비슷한 시대에 인기를 누렸던 미셸 파이퍼Michelle Pfeiffer나 줄리아 로버츠 같은 배우들도 비슷한 처지 아니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그들 역시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계속 활동하고 있지 않느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무어는 그들과 처지가 달랐다. 다르다. 파이퍼는 80년대에 이미 “섹스 심벌의 육체를 가진 연기파 배우”라는 별명으로 불린 배우다. 젊은 시절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 후보에도 여러 번 올랐다. 1989년 ‹위험한 관계(Dangerous Liaisons)›(1988)로 여우조연상, 1990년 ‹사랑의 행로(The Fabulous Baker Boys)›(1989)로 여우주연상, 1993년 ‹러브 필드Love Field›(1992)로 여우주연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그에게 달린 별명이 너무 여성 비하적이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예쁘고 섹시한 배우는 연기를 잘할 수 없다’는 당대 편견이 가득한 별명이다. 어쩌겠는가. 그런 별명이 존재하는 시대였다는 걸 아예 잊어 버린 척할 수는 없는 일이다.
줄리아 로버츠? ‹귀여운 여인(Pretty Woman)›(1990)으로 1991년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 전인 1990년, 그 누구도 이름을 알지 못하던 신인 시절에 ‹철목련(Steel Magnolias)›(1989)으로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미 시작부터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다. 2001년 ‹에린 브로코비치Erin Brockovich›(2000)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건 ‘인정받지 못하던 인기 배우의 오스카 수상’이 아니었다는 소리다. 미셸 파이퍼와 줄리아 로버츠와 달리, 무어는 단 한 번도 연기력으로 인정받은 적이 없었다. 물론 나는 그가 ‹어 퓨 굿 맨›으로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라야 마땅했다고 생각한다. ‹지.아이. 제인›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라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거야 오랜 팬인 나의 희망일 뿐이다. 누구도 무어를 진지한 배우로 여긴 적이 없다.
대신 무어는 단 한 번도 할리우드의 스포트라이트에서 사라진 적은 없다. 그는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배우들과 끊임없이 연애하고 결혼했다. 에스테베즈, 윌리스, 그리고 커처. 그렇다. 무어는 스캔들의 여왕이었다. 동시에 미디어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았다. 1991년 8월 «베니티 페어Vanity Fair» 표지는 그 절정이었다. 윌리스의 아이를 가진 임산부는 누드 상태로 커버에 스스로를 내밀었다. 요즘에야 모든 셀러브리티들이 임신 누드 화보를 찍는 시대라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여러분. 1991년이었다. 당대 최고의 배우가 누드로 화보를 찍는 일도 드물었던 시절에, 만삭의 누드 화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어가 만삭 누드로 촬영에 임한 1991년 8월 «베니티 페어Vanity Fair» 표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잡지 표지 중 하나로 꼽힌다.
바로 직전 해인 1990년, 무어는 ‹사랑과 영혼›으로 (아주 90년대적으로 구린 표현을 쓰자면) 모든 남자가 바라는 ‘순정파 여배우’의 반열에 오른 참이었다. 물론 나는 웃었다. 이미 80년대 브랫팩 시절부터 그는 할리우드에서 알아주는 파티 걸로 유명했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걸 보며 무어가 얼마나 즐거워했을지 상상이 갔다. 무어는 그런 배우였다. 섹슈얼한 매력을 마음껏 이용하는 걸 즐겼다. 임신한 몸, 가슴 수술을 한 몸, 전신 성형을 한 몸을 잡지 화보와 스크린에 집어 던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게 자신의 셀링 포인트라는 것도 너무 잘 알았다.
무어는 모든 걸 억지로 하지 않았다. ‹은밀한 유혹›(1993), ‹폭로›(1994), ‹스트립티즈›(1996), ‹지.아이. 제인›(1997)으로 이어지는 선택을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은밀한 유혹›에서 그는 백만장자의 제안으로 하룻밤을 보내는 유부녀를 연기했다. ‹폭로›에서는 권력을 이용해 남성 부하 직원을 성폭행하는 여성 상사로 나왔다. ‹스트립티즈›에서는 몸을 이용해 남성들을 무릎 꿇리는 스트리퍼이자 전직 FBI 요원이었다. ‹지.아이. 제인›에서는 아예 머리를 밀고 네이비실 역사상 첫 번째 여성 훈련병이 됐다. 지금 이 영화들을 다시 볼 Z세대 팬이라면 조금 헷갈리는 심경이 될지도 모르겠다. ‹서브스턴스›로 무어를 처음 접한 관객이라면, 이 모든 것이 대단히 이율배반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를 질문은 이것이다. ‘데미 무어의 경력은 여성주의적인가, 아닌가?’
그러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떤가. 바로 그 이율배반적인 경력이 ‹서브스턴스›의 출발점이고, 결말이며, 모든 것이다. 나는 ‹서브스턴스›를 보고 확신했다. 이 영화는 무어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영화다. 젊은 시절, 아름다움으로 승부했던 여배우는 많다. 그런 배우 중 절반은 약간만 나이를 먹어도 할리우드의 성전에서 타의로 퇴출당했다. 절반은 어떻게든 얼굴 분장을 해가면서까지 아름다운 여배우가 맡지 못할 법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오스카상을 받아냈다. 샤를리즈 테론Charlize Theron과 니콜 키드먼Nicole Kidman을 생각해 보시라. 그들은 특수분장의 힘으로 얼굴을 흉측하게 만들거나 가짜 코를 불이며 오스카 트로피를 얻어냈다. 육체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배우들이 자신을 스타로 만든 장점을 없애자, 그들의 품에 황금의 남성상이 주어졌다. 놀라운 아이러니다.
무어는 그러지 않았다. 끝까지 출발점의 무어로 남았다. 끝없이 성형하고, 끝없이 몸을 유지하고, 때로는 젊은 남자를 쟁취하고, 파파라치 앞에 서는 존재로 남았다. 카메론 디아즈Cameron Diaz처럼 더는 좋은 역할이 들어오지 않자 할리우드로부터 잠시 벗어나 휴식을 취하지도 않았다. 사실 디아즈도 ‹서브스턴스›에 적절한 캐스팅이었을 것이다. 모델 출신인 그 역시 언제나 남성들이 바라는 섹시한 여성만 연기하다가 몇 번의 다른 시도를 했다.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1999)와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2002)은 디아즈의 경력을 전환할 만한 기회였다. 나는 아직도 ‹존 말코비치 되기›로 디아즈가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분통이 터진다. 그런 시대였다. 오스카는 젊고 아름다운 배우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나이 든 노장을 존중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기도 하다.
무어는 휴식도 취하지 않았다. 어떤 역할이든 끊임없이 연기해 왔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영화에도 출연해 왔다. 그는 존경받는 배우가 아니라 여전히 시끌벅적한 스타로 늙었다. 여전히 육체의 매력으로 승부를 거는 셀러브리티로 남았다. ‹서브스턴스›의 캐스팅은 바로 그 덕분에 완벽했다. 무어는 남성이 원하는 섹슈얼함으로 인기를 얻은 여배우가 맞다. 다만 돌이켜보면, 그가 맡았던 역할들은 남성이 원하는 바를 자신의 무기로 삼은 무어의 선택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억지로 무언가를 하는 배우였던 적이 없었다.
‹서브스턴스› 스틸컷
‹서브스턴스› 스틸컷
‹서브스턴스› 스틸컷
무어는 그냥 팝콘 여배우가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팝콘 여배우였다. 스스로 제작하고 프로젝트를 이끄는 팝콘 여배우였다. 그는 선택했다. 남성들이 갈망하는 섹슈얼함을 선택적인 무기로 삼았다. 동시에 남성들이 바라는 지점에서 항상 약간은 빗겨나간 역할을 선택했다. 최전성기에 그가 선택한 ‹폭로›, ‹스트립티즈›, ‹지.아이. 제인›이 증거일 것이다. 남성을 짓밟고, 남성을 홀리고, 남성에게 도전하는 그 영화들은 남성의 시선 안에 존재하면서도, 그걸 벗어나 여성적이기도 하고, 또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니기도 한 동시에,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무어적이다. 누구도 무어처럼 살아남지 못했다. 누구도 무어처럼 돌아오지 못했다. 누구도 그렇게 생존하지 못했다.
처음 이 글을 시작한 문장을 다시 소환해 보자. 여러분은 데미 무어를 좋아했던 적이 없다. 솔직히 없다. 나는 계속 좋아했다만, 누군가는 비겁한 변명이라 말할 것이다. 맞다. 변명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비겁한 변명을 이다지도 길게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무어의 예전 영화들을 다시 찾아보시길 간절히 원한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어가 ‹아노라Anora›(2024)의 마이키 매디슨Mikey Madison에게 여우주연상을 양보한(혹은 강탈당한) 것은 그의 패배가 아니다. 배우의 승리다. 여배우의 승리다. 모든 살아남은, 그리고 시작하는 여배우들의 승리다. 여러분은 이제 ‹서브스턴스›의 무어뿐 아니라 지난 반세기를 어떤 배우와도 다른, 꼬이고 뒤틀리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경력으로 관통하며 살아남은 데미 무어를 좋아하고 사랑할 준비가 마침내 됐다.
Artist
김도훈(@closer21)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다. 영화주간지 «씨네21» 기자, 남성지 «GEEK» 피처 디렉터,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으로 일했다.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에스콰이어»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하며 유튜브 영화 채널 ‹무비건조›에 출연 중이다. 낯설고 비범한 인물들을 탐구한 『낯선 사람』(2023)과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2019)를 썼다. 최근 『패션 만드는 사람』(공저)에 참여했다.
홍익대학교 정문 앞에서 피카소 골목으로 향하는 왁자지껄한 골목 한가운데, 24시간 내내 K-팝이 울려 퍼지는 활기찬 코인노래방 건물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도달하면 갑자기 에어팟의 노이즈 캔슬링이 켜진 마냥 조용해지며 ‘AABB OS’라고 적힌 새하얀 문이 나타납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세요. 초소형 복합문화공간 ‘OS’가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과연 OS는 무엇일까요? 그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해 OS의 운영진 중 한 명인 석재원 님에게 연락드렸어요. 처음에 부탁한 형식은 분명 OS에 대한 ‘에세이’였는데요. 어쩌다 보니 ‘인터뷰’가 되었습니다…?! 자, 이제 OS 운영진이 정성껏 작성한 ‘셀프-인터뷰’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홍대앞에 나타난 도서관이자, 서점이자, 미술관이자, 강연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OS의 정체를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OS 도서 컬렉션의 일부
그렇다면 OS는 무엇인가요?
OS는 디자인 스튜디오 AABB의 구성원들이 기획한 이런저런 문화 행사를 여는 공간입니다. 2023년 말, 이태원에 있던 사무실을 홍대앞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공간이 넓더라고요. 과감하게 사무실 공간의 절반을 투자해서, 이제껏 하고 싶던 일들을 한 번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은 도서관부터 시작했어요.
그렇다면 OS는 도서관인가요?
『표준대국어사전』에 따르면 도서관은 ‘온갖 종류의 도서, 문서, 기록, 출판물 따위의 자료를 모아 두고 일반이 볼 수 있도록 한 시설’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책들도 존재해요. 애초부터 매우 소량으로 출판하면서 도서관은커녕 서점에서 유통도 되지 않는 경우인데요. OS는 이 중 창작의 한 방편으로 출판을 택한 책, 말하자면 소량 출판된 독립 출판물을 수집하고 소개하는 도서관을 지향합니다. 디자이너가 출판한 책에 특히 관심이 많고요. 더불어 이미 잘 알려진 기성 디자이너보다는 젊은 디자이너의 새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책을 소장하려 노력하고 있어요.
OS 도서 컬렉션. 사진: 박도현
저희는 ‘책’이 단순히 원고에 물성을 부여한 결과물에 머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책의 내용과 형식은 불가분이기 때문에, 이런 관계를 이용하여 색다른 책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OS는 디자이너가 저자이자 편집자 역할을 맡은 책에 주목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시도로 탄생한 책 가운데는 내용과 형식 면에서 기성의 문법을 훌쩍 뛰어넘어 반짝이는 성취를 거둔 책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반 서점에서 유통될 만큼의 대중성을 갖추지는 않았기에 보통은 매우 소량으로 제작하고, 북페어나 전시를 통해 잠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후 금세 사라져 버리고는 하죠. 저희는 이런 점이 무척 아쉬웠어요. 물론 ‘더북소사이어티The Book Society’처럼 독립 출판물을 취급하는 좋은 서점이 존재하고 있지만, 여기에도 입점하기 어려울 만큼 소량만 만들거나, 유통하기 어려운 특이한 형태도 적지 않아요. 이러한 책을 하나의 도서관에 모아, 보다 많은 이에게 오랫동안 소개하는 방식으로 독립 출판 혹은 소규모 출판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이 OS의 목표입니다. 동시에 이들을 시각 예술의 한 갈래로 잘 아카이빙하겠다는 목적도 있고요.
OS 도서 컬렉션. 사진: 박도현
OS 도서 컬렉션. 사진: 박도현
OS 도서 컬렉션. 사진: 박도현
OS가 도서관의 정체성을 지닐 때는 ‘OS 라이브러리Library’라고도 부릅니다. OS 라이브러리는 현재 100여 권의 책을 수집해 컬렉션으로 소장 중이고 그 수는 앞으로 계속 늘릴 예정입니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나흘 동안 누구나 오후에 방문해서 책을 열람할 수 있도록 공간을 개방하고 있어요. 입장료는 없습니다. 완전 무료이고요! 주말과 공휴일, 그리고 월요일은 휴관입니다. 색다른 재미와 감동을 주는 책에 관심 있는 분은 오가는 길에 마음 편히 OS에 들러주세요. (웃음)
AABB 홈페이지(aabb.kr)에 정리된 OS 도서 컬렉션 목록.
OS 라이브러리는 올해 처음 열린 ‘군산북페어’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도서 컬렉션을 모두 차에 싣고 군산으로 떠나 8월 31일, 9월 1일 이틀 동안 ‘이동 도서관’을 운영했습니다. 가을에는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의 ‘디자인스팟’으로 선정된 망원동 ‘XXPRESS’의 초청에 응해 이동 도서관을 열었고, 지난 11월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제16회 언리미티드 에디션’에도 참여했죠. 이런저런 행사를 통해 저희가 소장한 책을 소개하는 동시에 아직 많지는 않지만 소장 도서 중 일부를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망원동 XXPRESS에서 열린 OS 이동 도서관. 사진: XXPRESS
2024년 AABB가 출판한 도서들. 위에서부터 『감정일기』 『허상감각』 『자유로운 문서 포맷』 『CC1』 『Figure in the Carpet』. 사진: 박도현
그렇다면 OS는 서점인가요?
뉴욕의 ‘프린티드 매터Printed Matter’만 하더라도, 출판을 매개로 한 예술 공간을 표방하며 이미 1970년대에 문을 열었어요. OS는 프린티드 매터의 활동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결국 책을 사고파는 관계, 즉 유통이 이루어져야 독립(혹은 소규모) 출판이 더욱 활성화된다고 믿어요. 프린티드 매터는 강연, 전시, 워크숍 등 출판과 관련된 여러 가지 공공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곳이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뼈대는 독립 출판물을 유통하는 서점과 북페어 운영이라고 생각합니다. OS는 아직 제대로 된 서점의 역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널리 소개하고 싶은 책을 아예 사입해서 판매하기도 해요. AABB를 통해 출판을 지원할 때도 있고요. 언젠가는 독립 출판물을 다루는 제대로 된 도서관이자 서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말이죠.
한때 경복궁 옆에 ‘가가린’이란 서점이 있었어요. 헌책방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리는 곳이었는데, 회비만 내면 누구든 자기가 만든 책을 위탁해서 판매할 수 있었답니다. 보편적인 서점은커녕 독립 출판물에 특화된 서점에도 입점하기 어려운 책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어요. 하지만 결국 지난 2015년 문을 닫았죠. 너무나 아쉽게도. (웃음) 예전 가가린이 했던 역할을 OS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이런 연유로 얼마 전부터 ‘삼삼(33fotopress)’이 만드는 무가지의 배포를 돕기도 해요.
그나저나 가가린에 들릴 때마다 매대를 지키던 분이 연주하던 기타 소리가 참 인상 깊었습니다. 그저 기타를 연습하던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아름다운 소리가 여태 뇌리에 남아 있어요. 그래서인지 OS도 책과 함께 음악이나 미술까지 감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가꿔보려 생각 중입니다.
OS 도서 컬렉션의 일부
그렇다면 OS는 미술관인가요?
OS의 외부에는 이전 임차인이 사용하던 플렉스 간판이 그대로 붙어 있어요. AABB나 OS 모두 그다지 간판이 필요하지도 않고 떼기도 번거로워서 한동안 그대로 두고 있었는데, 차라리 간판을 전시 공간으로 사용해 보자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홍대앞 번화가로 진입하는 곳에 자리한 커다란 간판이니까, 여기에 작품을 설치하면 이만한 공공예술이 없겠다고 여긴 것이죠. 저희는 이를 ‘간판 프로젝트’라고 부릅니다.
안상수, ‹알파에서 히읗까지›, 2024. 사진: 박도현
안상수, ‹알파에서 히읗까지›, 2024. 사진: 박도현
안상수, ‹알파에서 히읗까지›, 2024. 사진: 박도현
안상수, ‹알파에서 히읗까지›, 2024. 사진: 박도현
‘간판 프로젝트’의 첫 작품은 파주타이포그라피배곳의 날개 안상수 디자이너가 제작한 ‹알파에서 히읗까지›예요. 첫 번째 초청인데도 흔쾌히 응해 주셨어요. 감사한 일이죠. ‘α’가 가로와 세로 간판을 가로지르며 ‘ㅎ’까지 도달하는 연출이 굉장히 멋져요. ‹알파에서 히읗까지›는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의 상설 전시관에 설치된 작품인데요. 미술관에서나 볼 법한 작품이 빼곡한 상업 간판 사이에서 뜬금없이 존재감을 뽐내는 모습에 왠지 모를 묘한 통쾌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OS는 간판을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는 미술관이라고도 볼 수 있죠.
다양한 방식으로 배치가 가능한 책 진열대. 디자인: 황철호, 김지성, 사진: 박도현
다양한 방식으로 배치가 가능한 책 진열대. 디자인: 황철호, 김지성, 사진: 박도현
다양한 방식으로 배치가 가능한 책 진열대. 디자인: 황철호, 김지성, 사진: 박도현
이병학 디자이너의 ‹Long Table›. 현재 회의 테이블로 사용 중이다. 사진: 박도현
OS 내부 또한 전시 공간으로 활용 중이에요. 도서관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시각적인 자극을 받고 갔으면 해서요. 책을 비치하는 진열대는 OS 라이브러리를 위해 황철호, 김지성 디자이너가 함께 디자인했어요. 책의 재단선을 형상화한 홈이 진열대 상판에 파여 있고 여기서 진열대 다리가 압출되는 듯한 모양새를 띠고 있죠. OS에는 이병학 디자이너의 목조 작품 ‹Long Table›도 있습니다. 그리드가 만드는 반복 구성을 시각적으로 재현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저희는 그 위에 유리를 놓고 회의 테이블로 쓰고 있습니다. (웃음) 아직 준비 중이지만, 전시를 기획하고 개최하려고 해요. 이번에 AABB가 출간한 『허상감각』의 주인공인 나준흠 디자이너의 일러스트레이션 전시가 곧 열릴 예정입니다. 아, 그리고 보니 한 달에 한 번 ‘OS 세미나Seminar’라는 이름의 강연도 진행하고 있네요.
OS 도서 컬렉션의 일부
그렇다면 OS는 강연장인가요?
OS 세미나는 시각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연사 한 분(혹은 한 팀)을 모시고 15명의 참가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에요. 올해 3월에 시작해 이제까지 박고은, 정다혜, 황석원, 이유진, y!(강채원, 이승현), 오혜진, 이민희, 최기웅, 김현진, formless twins(신상아, 이재진)가 멋진 강연을 해주셨어요. 온라인 비대면 교육이나 대형 강연 행사가 많아지다 보니, 오히려 동그랗게 둘러앉아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저희에게는 더 귀하게 다가와요.
OS Seminar 포스터. 사진: 박도현
OS Seminar 모습. 초청 연사: 김현진, 사진: 박도현
OS Seminar 모습. 초청 연사: y!(강채원, 이승현), 사진: 박도현
OS Seminar 모습. 초청 연사: formless twins(신상아, 이재진), 사진: 박도현
formless twins의 OS Seminar를 위한 다과. 일부러 비정형으로 만들었다. 쿠키 제작: 황세미, 사진: 박도현
오혜진 디자이너의 OS Seminar를 위한 조형물. 조각: 백준열, 사진: 석재원
워낙 적은 수의 참가자만 모시다 보니, 이제 참가 모집 공지를 올리면 ‘피케팅’ 못지않은 반응이 나오기도 해요. 참가 신청에 실패한 분들이 강연을 온라인으로 중계하거나 유튜브를 통해 녹화본을 공유해 달라는 요청을 꾸준히 보내고 계시는데요. 당분간은 소규모 모임이 주는 따뜻함을 조금 더 누려 보려고 합니다. 대신 강연 내용을 책으로 엮어 기록화하는 작업을 진행했어요.
OS Seminar의 첫 번째 기록집 『CC1』, 사진: 박도현
OS Seminar의 첫 번째 기록집 『CC1』, 사진: 박도현
OS Seminar의 첫 번째 기록집 『CC1』, 사진: 박도현
그렇다면 OS는 도서관이자 서점이자 미술관이자 강연장, 그 전부인가요?
네. 지나친 욕심으로 보일 수 있지만, 아직 시작한 지 1년도 안 된 신생 공간의 패기를 무기 삼아 OS 운영진의 취향이 묻어나는 다양한 문화 활동을 두루 시도해 보려 해요. 문화공간이 점점 사라져가는 홍대앞에서 독립 출판물을 중심으로 의미 있는 역할을 맡은 공간이 되고 싶습니다.
OS의 운영진 포트레이트. 왼쪽부터 이소림, 석재원, 백준열. 사진: 박도현
About
웹사이트 www.aabb.kr/library
인스타그램 @aabb.os.library
화~금요일 14시~19시 (수 21시까지), 월요일·주말·공휴일 휴관
무료입장
Place
OS: 서울시 마포구 와우산로21길 10, 5층
Writer
석재원(@jaewonseok.kr)은 홍익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예일대학교 대학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고, 인쇄·출판 분야의 최우수 학생에게 주어지는 ‘William Pardee Prize’를 받으며 졸업했다. 2×4, 예일대학교 미술관, 스튜디오 헤이데이, 나이키, 바이널 등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2015년부터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로 재직하며 디자인 스튜디오 AABB를 운영 중이다. Graphis, Tokyo TDC 등에서 수상했고, 국립한글박물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플랫폼엘, 타이포잔치: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런던디자인비엔날레, 시카고국제포스터비엔날레, 브루노비엔날레, 베이징디자인위크, 주LA 한국문화원, 주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문화원, 주UAE 한국문화원 등을 통해 작품을 선보였다. 2020~2021년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디지털 시대의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현황과 전망을 살펴보는 교육 프로그램 ‘T/School’을 기획하고 개최했다. 2022년 문화체육관광부와 KCDF가 주최한 공공디자인페스티벌의 주제전 «길몸삶터»의 책임 큐레이터를 맡았다. 2024년 3월, 독립 출판물을 수집하고 소개하는 OS를 열고 백준열, 이소림과 함께 운영 중이다.
지난 12월 3일 밤 10시 28분은 대한민국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그때 친구와 노는 중이라 집에 갈 시간이 되어도 계속 뭉그적거리고 있었는데요. 갑자기 엄마한테 전화가 오더군요. “지금 계엄령이 내렸어. 얼른 집에 와!” 저는 대체 무슨 소리냐면서 택시를 탔습니다. 그런데 휴대전화로 찾아보니 정말 비상계엄이 선포됐더군요. 택시 기사님도 모르는 눈치였어요. 집에 안전히 온 다음,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는 장면까지 유튜브 라이브로 계속 지켜보면서, 생애 처음으로 국가적 난리라는 것을 체감했답니다. «비애티튜드»에 ‘밈 원정대’를 연재하는 경수 님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니, 온 국민이 똑같을 겁니다. 탄핵소추안이 부결된 후 계속 습관적으로 뉴스를 확인하고 있으니까요. 경수 님은 원래 로제의 ‘APT.’ 열풍에 대한 글을 쓰려다, 비상계엄으로 주제를 급선회했습니다. ‘6시간 계엄’을 풍자하는 밈을 다루려는 게 아니에요. 대선 후보 시절부터 싹수가 보이던 윤석열의 밈적 사고에 대해 일종의 확신이 들었기에,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적 밈, 음모론과 연계되는 방식에 대해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밈 전문가, 경수 님이 바라보는 윤석열의 밈적 사고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덧. 에세이 발행 예정일인 12월 12일 아침을 기습한 담화문에 대응해 결말부를 추가했습니다.
12.3 비상계엄은 한국 역사 교과서에 길이 남을 중대한 사안이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이후 45년 만에 선포된 비상계엄이고, 대한민국 민주화 이후로는 처음이다. 게다가 3시간 만에 실질적으로 저지당해 실패한 계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이런 대형 사고가 터질 때마다 고생하는 사람은 한국사를 공부하는 입시생과 취업 준비생이다. 네티즌은 밈으로 유명한 공무원 한국사 1타 강사 전한길의 목소리를 빌려, 12.3 비상계엄령을 어떻게 암기해야 하는지 빠르게 정리해 두었다. 역시 ‘드립의 민족’이다.
“상상의 악은 낭만적이고 다채롭다. 실재하는 악은 음산하고 단조롭고 삭막하고 지루하다. 상상의 선은 지루하지만, 실재하는 선은 언제나 새롭고 경이롭고 도취시킨다.”
–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p. 97
수치스럽다. 불안하고 공포스럽다. 어떤 형용사를 쓰더라도 지난 12월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이하 윤석열)이 선포한 비상계엄 이후의 감정을 모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에 불참한 국회의원 수대로 105개의 형용사를 나열해도 턱없이 모자란다. 나는 비상계엄이 선포된 순간, 분노보다 충격이 앞섰다. ‘계엄사령부 포고령(제1호)’에 적힌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라는 문장을 실시간으로 접할 땐 어안이 벙벙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현장을 보는 와중에,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오르면서도 매 순간이 초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계엄이 해제된 후에는 일상이 빠르게 무너졌다. 분 단위로 쏟아지는 속보를 확인하느라 그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6시간 계엄’의 무능함, 내란에 동조한 국회의원을 풍자하는 인터넷 밈을 보면서 편하게 웃기 힘들었다. 자다가도 계속 악몽을 꾸었고, 깨어나면 뉴스를 확인했다. 하룻밤 사이에 국민의 자유가 박탈당하고 사회가 45년 전으로 후퇴할 수 있다는 불안과 초조를 과연 하나의 감정으로, 형용사로 담을 수 있을까.
지난 11월 7일 열린 대국민 담화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영혼 없는 사과를 이어가더니 약속했던 무제한 질의를 파기하고 20분 만에 퇴장했다. 한숨만 푹푹 나왔다. 그래서 12월 3일 긴급 회견을 한다길래 별 기대도 안 했다. 또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내뱉거니 했다. 그러나 잠에 들려던 찰나, 카톡 알림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비상계엄이었다. 처음에는 개소리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초현실적이었다. 앞으로는 대통령 담화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생각이다. 그리고 오늘 12월 12일 아침부터 또 다른 개소리를 들었다.
소셜미디어에 의견을 올리든, 네이버 뉴스에 댓글을 달든, 한국에서 정치적 의견을 당당히 밝히는 건 상당히 성가시고 피곤한 일이다. 정치적 의견이 다른 지인과 껄끄러운 사이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차단하기’를 당하는 건 흔하고, 소모적인 키보드 배틀도 빈번히 일어난다. 그다음에는 정체 모를 익명 계정들의 트집 잡기와 조롱성 악플 달기가 시작된다. 협박성 DM이 오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여성은 자칭 정치를 잘 안다는 깨시민 남성에게 맨스플레인을 당하기 십상이며, 스토킹 혹은 성희롱의 위험에 처한다. (마녀사냥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는 페미사냥이 이루어진다.) 한편 어떤 이에게는 “너는 왜 정치에 관심이 없냐?”라며 손가락질이 이어진다. 탄핵소추안 표결이 이루어지는 동안, 차은우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화보가 올라오니 온갖 댓글 세례가 쏟아졌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속담이 있다. “내가 너보다 정치를 잘 안다”라고 생각하는 소셜미디어 속 나르시시스트를 상대할 때 올라오는 짜증이 참기 힘들 뿐이다.
차은우는 «보그» 한국판 화보를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렸다는 이유로 댓글 테러를 당했다. 이 위중한 시국에 무관심하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대한 마음은 사실 복잡하다. 비상계엄 이후 여러 지인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살펴보았다. 글을 쓰거나 예술가로 활동하는 사람 중에는 밤마다 시위에 나가는 이도, 글쓰기에 집중할 수가 없어 마구 화를 분출하는 이도 있었다. 나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나머지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에게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다. 하지만 ‘내 삶은 나만이 주도할 수 있다’라는 그들의 꼿꼿한 심지에 마음이 달라졌다. 어떻게든 일상을 꾸려나가는 그들이 있기에, 이런 엉망진창 이후에도 사회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 같은 놈팽이 백수가 그들 대신 시위를 몇 번 나가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나도 그런 성가심이 싫었다. 안 그래도 정신없고 바쁜 일상에서 쓸데없는 댓글을 상대하는 일은 얼마나 피곤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밈 원정대’에 굳이 윤석열에 관한 글을 써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대선 주자일 때부터 그의 언어가 빈곤하고 앙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비상계엄을 내릴 때 그가 사용한 언어를 살펴보면 정치적 밈의 소굴이나 다름없다. 12월 3일 밤 10시 23분경 시작한 긴급 브리핑에서의 비상계엄 담화문을 살펴보자. “입법 독재”, “예산 폭거” “내란을 획책하는 반국가행위”,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 “범죄자 집단의 소굴”, “체제 전복”, “패악질”, “척결” 등 혐오와 적대의 언어로 가득하다. 의사를 “처단”한다는 계엄사령부 포고령도 마찬가지다. 비상계엄에 쓰인 언어는 서로를 적대시하고 가르는 인터넷 속 정치적 밈의 언어와 판박이다.
여기서 잠깐. 정치적 밈은 무엇일까? 지금껏 ‘밈 원정대’에서 말했듯, 인터넷 밈은 원본에서 잘라낸 소스를 기반으로 유저가 특정 규칙에 따라 합성하는 놀이다. 곧 정치적 밈은―말 그대로―정치적인 운동을 인터넷 밈의 틀에 담은 것이다. 미국의 ‘월가 점령 시위(Occupy Wall Street)’, ‘개구리 페페(Pepe the Frog)’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월가 점령 시위의 구호인 ‘우리는 99%다’ 등은 인터넷 밈을 통해 퍼졌다고 알려졌고, 익명 커뮤니티 4chan에서 애용되던 개구리 페페는 도널드 트럼프와 폭스 뉴스Fox News의 입김을 타고 미국판 ‘일베’라 불리는 배타적 백인 민족주의, 대안 우파(alt-right)를 상징하는 밈이 되었다. 나중에는 혐오 표현으로 등록되며 캐릭터 원작자가 곤란을 겪기도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밈 전쟁:개구리 페페 구하기›(2020)에서 확인하길 추천한다.)
월가 점령 시위에서 흔히 쓰인 짤이다. ‹세서미 스트리트›에 등장하는 손 인형 쿠키로 ‘1%가 99%를 움직인다’라는 사회적 불평등을 단번에 압축했다.
월가 점령 시위에서 흔히 쓰인 짤이다. ‹세서미 스트리트›에 등장하는 손 인형 쿠키로 ‘1%가 99%를 움직인다’라는 사회적 불평등을 단번에 압축했다.
개구리 페페는 4chan에서 루저 남성의 상징이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페페와 본인을 합성한 사진을 트위터에 공유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하겠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무척 영리한 정치적 밈 활용이다.
‹밈 전쟁:개구리 페페 구하기›는 정치적 밈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다큐멘터리다. 정보량이 한 권의 단행본에 필적할 정도이고,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을 정도로 작품성 또한 훌륭하다. 중간중간 개구리 페페를 애니메이션으로 그려내며 여러 정치 세력에 이용당한 페페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연출도 탁월하다. 다만 인터넷 밈은 통제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인터넷 밈을 올바르게 쓸 수 있다는 영화 속 희망 섞인 기원은 현실을 시궁창이라고 판단하는 냉소주의자에게 비판점으로 다가간다.
한편 국내에서는 일베를 중심으로 생성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독하는 정치적 밈 이후로, ‘MB’, ‘박그네’, ‘간철수’, ‘찢재명’, ‘문크예거’, ‘굥’, ‘김거니’ 등 인물에 대한 멸칭을 포함한 수많은 정치적 밈이 연달아 쏟아져나왔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한국의 정치적 밈은 확실히 유치한 면이 있다. 적을 가정하고, 그에게 우스꽝스러운 프레임을 씌우는 별명놀이가 본질이기 때문일까. 정치적 밈의 디자인을 살펴봐도, 옛날 풍자화나 선전물에 가까운 느낌이라 맨정신으로 바라보기 힘들다. 이런 정치적 밈은 한술 더 떠서 정치적 이슈의 심각함을 제거하며 시민들이 함께 대화할 기회마저 박탈하기도 한다. (일베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희화화한 ‘민주화’를 ‘비추’ 버튼으로 사용하는 광경을 보라.) 결국 우스꽝스러움과 자극적인 표현이 논리적 언어를 대신하는 것이다. 현재 정치적 밈은 호불호와 좌우 진영을 넘어 정치를 설명하는 하나의 언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석열은 대선 후보일 때부터 밈이 되기를 바란 듯하다. 2021년 8월 그는 뜬금없이 반려견 ‘토리’와 함께 침대에 비스듬하게 누워 있는 사진을 본인의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당시 한참 유행하던 ‘남친 짤(남자친구를 가까이서 보는 듯한 구도로 찍은 사진과 함께 감상적인 멘트를 날리는 짤방)’의 구도를 따라 한 것이다. 댓글에는 “여러분 이사진을 짤로 쓰셔도 좋습니다”라는 멘트를 유쾌한 척 올렸다. 본인이 인터넷 밈이 될 수 있다는 만용의 정체는 무엇일까. “자기들 잘 잤어?” 등의 느끼한 코멘트를 뻔뻔하게 다는 게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당시 정세균 전 국무총리나 박용진 전 국회의원 등 여러 정치인은 틱톡을 찍거나 인터넷 밈을 적극 활용해 젊은 세대에게 자신을 어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긴 했다. 하지만 보통 본인의 유쾌함을 어필하려고 했지, 본인이 인터넷 밈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윤석열 남친 짤은 당시에도 비난의 대상이었다. 정치적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시기에 저런 사진을 올리니 정치 고관심층이라면 당연히 분노할 수밖에 없다. 일반 시민에게도 마찬가지다. 남친 짤, 인스타 갬성 글 등의 유행이 소셜미디어에서 끝나가던 참이었다. 그에게 유행을 잘 포착하는 기민함이 있지 않다는 증거라 할 만하다. 차라리 틱톡을 찍은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귀여워 보인달까.
2022년 1월 7일 윤석열은 페이스북에 어떤 맥락과 설명 없이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7글자 포스팅을 올렸다.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표현도 논란이지만, 결국은 꼴이 문제다. 배경색을 덧입힌 7글자짜리 포스팅은 캡처 후 인터넷 밈으로 돌아다니기에 수월하다. (이는 특정 글자 수를 넘겨야만 글자 크기가 작아지는 페이스북의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다.) 여성가족부에 대한 조롱과 여성가족부 폐지는 오래전부터 남초 사이트의 정치적 밈이었다. 2010년대부터 여성가족부가 “죠리퐁을 금지했고, 곰돌이 푸에게 바지를 입혔으며 셧다운제를 실행했다”라는 인터넷 낭설에 근거해, 남성의 자유를 제한하는 부처를 폐지해야 한다는 말이 돌았다. 이에 대해 정치권은 정책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대안을 제시하거나 폐지에 대한 구체적 맥락을 언급하곤 했다. 그러나 윤석열은 달랐다. 그는 자극적 언어만 존재하고 맥락은 없는 정치적 밈의 형식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바라는 지지층은 이에 동조해 포스팅을 밈으로 퍼 나르기 시작했다. 해당 포스팅의 여파로 여성혐오 관련 댓글이 6.5% 늘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후로도 그는 연달아 “병사 봉급 월 200만원” 등의 공약을 아무런 맥락 없이 올리며 계속 노이즈를 일으키는 데 집중했다.
여성가족부 폐지는 2017년 대선에서도 정치적 쟁점이었다. 유승민 당시 바른정당 대선 후보 등이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여성가족부를 마녀사냥하려는 이의 표심을 잡으려 한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형식적으로나마 국가양성평등위원회같은 이상한 대안을 만들기라도 했다.(물론 이마저 여성가족부가 맡아 진행하는 수많은 일을 외면하고, 여성가족부와 페미니즘에 대한 마녀사냥과 밈적인 사고에 편승한 셈이긴 하다. ‘이퀄리즘’이라는, 사전에 등재되지 않고, 학술적으로도 쓰이지 않는 단어를 정책으로 내세우다니. 꼴이 있다고 한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러나 윤석열은 7글자만 딱 던지며 민심에 편승하는 인기 효과만 얻고 그 어떤 의견도 더하지 않았다. 꼴이라도 지니려는 노력조차 없는 무책임한 언사다. 병사 봉급 월 200만원은 한국 남성이 군대에 지닌 원한을 건드린 신의 한 수였다.
어쩌다가 정치적 밈은 한국 정치를 설명하는 언어가 되었을까. 인터넷 밈은 가성비 중심의 시대에서 탄생한 놀이다. 딱 꼬집어 이야기하기 어려운 감정을 절묘한 사진 하나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런데 밈이 정치의 영역으로 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어떤 사안을 두고 정치적 토론을 거치는 일은 너무도 많은 수고와 시간이 든다. 셀 수 없이 복잡한 맥락과 상황을 모두 고려해야 하기 때문인데, 과로와 빨리빨리의 나라 한국에서는 정책을 숙고할 만한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없다. 대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내가 할 말을 대신 해주길 바란다. 동시에 이는 내가 정치적인 말을 했을 경우에 짊어져야 할 불편함과 책임을 덜어주기도 한다. 문화 연구자 김내훈은 이를 두고 “사유의 외주화”라고 정의한다. 여기서부터 주객전도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내 생각을 드러내는 언어로 밈을 선택하였지만, 나중에는 도파민이 마구 터져 나오는 우스꽝스러운 사진이나 자극적인 캐치프레이즈에만 몰두하게 된다. ‘밈적인 사고’의 탄생이다.
정치적 밈은 자기 혼자만 쓰면 차라리 다행이다. 문제는 이를 보고 함께 즐기는 사람들의 커뮤니티―태생적으로 매우 폐쇄적일 수밖에 없는―를 만든다는 데 있다. 정치적 밈은 자극적이다. 자극은 나날이 무뎌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된다. 적과 동지를 가르는 정치적 밈의 특성상, 상대방(적)을 더 자극적인 언어로 비방하는 욕구에 몰두하게 된다. 비방을 통해 적을 이겼다는 우월감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상대를 ‘바보’라고 부를 때와 ‘악마’라고 부를 때의 무게감은 다르다. 상대를 보수나 진보라 부를 때와 수구꼴통이나 빨갱이로 부를 때의 무게감 또한 다르다. 결국 자극적인 언어에는 혐오가 담길 수밖에 없다. 인터넷 밈을 빌리면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의 판이 펼쳐지는 셈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제제나 자정 작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깡짤’은 짤툰이라는 사이트에 올라온 ‹TV 요리 프로그램 보고 요리 도전하는 만화›에서 비롯됐다.주로 디시인사이드 야갤(국내야구갤러리) 등에서 정치인을 모욕하는 목적으로 쓰인다. 보기에 거북한 게 사실이고, 딱히 좋아하지 않는 짤이다. 이처럼 정치적 밈은 비위가 상한다. 사실 모든 대통령에게는 깡짤이 있다. 상대방을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목적으로 활용된다.
‘깡 짤’은 짤툰이라는 사이트에 올라온 ‹TV 요리 프로그램 보고 요리 도전하는 만화›에서 비롯됐다.주로 디시인사이드 야갤(국내야구갤러리) 등에서 정치인을 모욕하는 목적으로 쓰인다. 보기에 거북한 게 사실이고, 딱히 좋아하지 않는 짤이다. 이처럼 정치적 밈은 비위가 상한다. 사실 모든 대통령에게는 깡 짤이 있다. 상대방을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목적으로 활용된다.
이재명을 둘러싼 짤방은 그야말로 그를 악마의 재림처럼 그려낸다. 과연 이런 짤이 효과가 있는 걸까? 2022년 대선 당시에는 인스타그램에 커플 관련 글이 올라올 때마다 ‘차라리 찢재명 찍는다’는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지금은 ‘락스를 마신다’로 바뀌었다) 정치적 밈은 이처럼 일상적 영역에까지 파고들 수 있다.
정치적 밈이 아군과 적군, 진보와 보수를 가르고 상대를 비난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쓰인다면, 윤석열의 비상계엄과 관련한 밈은 경우가 조금 다르다. 그가 공공의 적으로 올라섰기도 했거니와, 특정 정당이 아니라 한 개인의 우스꽝스러움을 풍자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계엄을 오래 준비했다는 문건이 터지기 전에는 영화 ‹서울의 봄›과 엮여 3시간 만에 끝난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의 허술함을 집중적으로 풍자했다.
정치적 밈이 아군과 적군, 진보와 보수를 가르고 상대를 비난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쓰인다면, 윤석열의 비상계엄과 관련한 밈은 경우가 조금 다르다. 그가 공공의 적으로 올라섰기도 했거니와, 특정 정당이 아니라 한 개인의 우스꽝스러움을 풍자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계엄을 오래 준비했다는 문건이 터지기 전에는 영화 ‹서울의 봄›과 엮여 3시간 만에 끝난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의 허술함을 집중적으로 풍자했다.
윤석열이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이를 비판하는 짤은 비상계엄 전까지만 해도 정치적 밈에 가까웠다. 알코올 중독자라 비난하며 국정 운영을 제대로 못 한다고 말하기 위해 쓰였기 때문이다. 윤석열의 행보가 초현실적인 경지에 이르면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쩌면 비상계엄도 술김에 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계엄령을 술김에 한 것이 아니냐는 조롱도 잇따랐다. 알고 보니 작디작은 행운에 힘입어 비상계엄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차츰 드러나면서, 이 짤의 호소력 또한 줄어들었다.
전부터 윤석열과 부인 김건희 여사의 부정행위는 정치계에서 심판의 대상으로 불려 왔다. 부인의 잘못을 덮으려고 비상계엄을 터뜨린 게 아니냐는 음모론적 의심이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다.
정치적 밈에 혐오감이 깊어질수록 정밀함은 사라져 간다. “입법 독재”, “예산 폭거”, “내란을 획책하는 반국가행위”,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 “범죄자 집단의 소굴”, “체제 전복”, “패악질”, “척결” 등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담화문 속 언어만 보더라도 구체적인 대상과 행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게 어렵다. 이런 언어에 물들다 보면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를 지적받아도, “지금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이 문재인 전 대통령의 민주당보다 더하면 더할 것”이라며 적에게 탓을 돌리고 그 책임을 무마하려는 반응까지 나오는 것이다.
이에 병행되는 현상은 바로 정치적 음모론이다. 적을 악마라 생각했는데 진짜로 악마로 부를 만한 정도가 아닐 때 특히 그러하다. 적이 악마가 아니면 본인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하므로, 적이 악마일 수 있는 온갖 가짜 근거를 동원하게 된다. 사죄하고 나가는 것보다 본인이 만든 가상 세계에 머무르는 게 편하니까. 인간의 스토리텔링 본능을 연구하는 조너선 갓셜Jonathan Gottschall은 저서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원제: The Story Paradox)에서 이런 음모론(conspiracy theory)을 음모담(conspiracy story)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음모는 무한히 이어지는 이야기일 뿐이지, 어떤 체계적인 이론을 더할 만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음모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온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적과 홀로 싸운다는 영웅적 망상에 빠뜨린다. 영웅적 망상 속에 일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정치적 음모와 이어진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이를 잘 설명한 영화가 올해 개봉한 안국진 감독의 ‹댓글부대›다. 국가정보원 댓글부대 개입 사건을 소재로 다룬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이 영화는 음모론이 “1%의 진실과 99%의 거짓”이라는 대사를 두 번 반복하며, 음모론에 속지 않을 수 있냐고 관객을 시험한다. 그 사례로 영화 초반부에 2016년 촛불 시위의 기원을 1992년 PC통신 유료화 반대 시위로 보고, 그 중심에 운영자 ‘앙마’가 있다고 말한다. 2016년 촛불 시위 때의 영상과 거짓 제작된 영상을 교차하며 이 모든 ‘썰’을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1992년 시위와 2016년 촛불 시위는 모두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이 두 시위를 이끈 앙마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 둘을 잇고, “이 이야기는 실화이다. 1992년부터 2023년까지의 이야기를 제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라고 자막을 띄운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인 임상진(손석구 분)은 엔딩에서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전직 기자가 직접 쓴 취재썰”이라는 게시물로 갈무리한다. 이윽고 엔딩 크레딧에는 “이 영화는 허구다”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흩뜨리는 혼란을 통해 감독은 영화 자체를 음모론으로 보이게 한다.
계급 문제를 블랙 코미디 문법으로 그려낸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로 주목받은 안국진 감독이 소설가 장강명의 작품을 원작으로 만들었다. 진실과 거짓을 계속 흩뜨리는 전개와 모호한 결말 등 대중의 취향을 전면으로 비껴나가 흥행에 실패한 아쉬운 경우다. 개인적으로 올해 과소평가된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댓글부대›는 원작 소설과 달리 음모론에 몰입하는 사회부 기자 임상진의 역할이 눈에 띈다. 기자가 정의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저널리즘 영화와는 달리, 그는 진실을 알아내 특종을 터뜨리고 말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혀 있다. 본인 기사가 우연히 터진 연예인 기사에 묻히고, 사실 확인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에 절망하던 그는 1%의 물증과 99%의 심증으로 거대 기업 만전이 해당 사건의 배후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때 만전을 위한 댓글 부대로 일했다는 ‘찻탓캇’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임상진은 만전이 모든 사건의 배후라는 심증 아래 취재를 계속하며 어느덧 세상의 악과 싸우고 있다는 정의감에 사로잡힌다. 이후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모르겠다는 절망감을 느낀 그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전직 기자가 직접 쓴 취재썰’이라는 음모론을 퍼뜨린다. 인터넷에 썰을 푸는 행위가 그가 정의를 말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어서다. 우리 사회에 ‘문재인이 금괴 200t을 숨겼다’, ‘닥터 드레와 이희호 여사가 결혼했다’ 등의 황당무계한 낭설이 나오는 이유를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세상이 모르는 진실을 바로 나만 알고 있다는 나르시시즘의 발현이다. 자신만의 진실로 세상과 싸우고 혼란을 막으려는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을 중심으로 모든 정보를 왜곡한다. 오염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뇌를 막아 더 이상의 배움을 멈추고, 나아가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지키는 데 유리한 정보만 선별적으로 취득한다.
안국진 감독은 영화를 제작하는 동안 수많은 밈을 조사하며 연출부와 함께 온갖 밈을 자체 제작했다. 다만 정치적 밈이 대부분이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밈이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어쩌면 ‹댓글부대›는 정치적 밈의 세계가 일상적 밈의 세계를 압도한다는 음모론자의 태도를 자신도 모르게 표방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문재인 금괴 200t 썰은 그 유래가 깊다. 1999년 일제가 보물을 숨겨둔 곳을 안다며 2억을 투자받아 땅을 팠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사기죄로 징역형을 받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금괴를 숨겼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변질돼 문재인 전 대통령이 금괴 200t을 숨겼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금괴 200t의 소유자라면 굳이 힘들게 대통령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문재인 금괴 200t 썰은 그 유래가 깊다. 1999년 일제가 보물을 숨겨둔 곳을 안다며 2억을 투자받아 땅을 팠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사기죄로 징역형을 받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금괴를 숨겼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변질돼 문재인 전 대통령이 금괴 200t을 숨겼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금괴 200t의 소유자라면 굳이 힘들게 대통령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음모론도 이 정도면 예술이다. 닥터 드레와 이희호라는 전혀 상관없는 인물을 연결하는 상상력의 근원이 놀랍다. 그 시작은 일베였다. 2017년 1월 1일 한 일베 회원은 이희호 여사를 조롱하려는 목적으로 닥터 드레와 이희호 여사가 결혼한다는 루머를 뿌렸다. 이를 본 70대 노인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세탁하려는 목적으로 이희호 여사가 닥터 드레와 결혼했다는 허위 사실을 퍼뜨리며 결국 뉴스에까지 퍼졌다.
그런 면에서 윤석열은 자신의 정치적 의사에 반사하는 사람을 “범죄자의 소굴”로 몰아세우고 세상을 음모론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세계에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 편향과 나르시시즘, 원한, 영웅으로 거듭나고 싶은 억하심정이 깃들어 있다. 계엄군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 보낸 행동에는 4.10 부정선거 음모론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는데, 부정선거에 대한 정보를 발견하면 세상을 이긴다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이번 비상계엄 선포가 대통령으로서의 절박함에서 비롯되었다는 담화와 비상계엄이 경고성 조치라는 발언을 분석해 보면, 중심에 있는 것은 결국 비상계엄이라는 사건보다, 세상에 맞서는 권위적인 ‘윤석열’ 그 자신이다. 스스로 밈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에서부터 이미 그는 문제적 인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면서 수많은 속보가 지나갔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즉흥적으로 벌인 ‘구국의 결단’이 아니라, 밈적 사고와 이와 연계된 음모론에 깊게 빠진 결과라는 상황이 명확해졌다. 그래서 이 글의 결론을 다시 쓰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원한에 기반한 마음에 홀리지 않고, 헛된 정보를 차단한 채 자신의 정치적인 지향을 숙고하는 여유를 갖는 태도로 밈적인 사고를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결론이 지극히 낙관적이고 개인적인 것은 아닐까? 과연 음모론을 자기 계발로 이길 수 있을까? 이제는 음모론자를 논리와 팩트로 선도하자는 생각에 이유 모를 거부감까지 생긴다. 적과 나 사이에 우위를 두는 정치적 밈의 공식을 반복하는 듯해서다.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려면 최소한 타인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겸허함이 필요하다. 이제는 이를 위한 사회적 움직임 또한 수반되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 길게 정치와 관련된 글을 썼지만, 나는 여전히 정치를 잘 모른다. 나부터 시작하겠다.
덧.
에세이가 발행되는 12월 12일 아침, 윤석열은 예고 없이 기습적으로 담화문을 발표했다. 내용을 확인하고 지금까지 쓴 글이 헛수고라는 생각 때문에 절망감이 들었다. 혹시 내란 수괴 재판에서 정신 감정을 받아 망상 장애로 감형을 받으려는 속셈인가, 음모론적인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다. 인간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 낙관주의자 입장에서, 곧 죽어도 갱생이 불가능한 인간이 있다는 사례를 목도한 기분이다. 그는 자신만의 메타버스에 사는 게 분명하다. 당장 촛불을, 응원봉을, 아니면 뭐라도 들어야겠다. 그와 그를 감싸는 이익 집단을 그들의 메타버스에 영영 가두어야만 하는 시간이 왔다.
Writer
김경수(@vivre_wasavie)는 영화평론가이자 인터넷 밈meme 연구자다. 학부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화제를 모은 졸업논문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은 동명의 단행본으로 발행됐다. 영화와 인터넷 밈을 동시에 연구하는데 커다란 매력을 느낀다. 현재 «코아르»에 영화 비평을 연재하고,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 (FIPRESCI) 한국 지부 정회원이자 인문학 스탠드업 코미디 페이지 ‘인문학적 개소리’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제목만 보면 ‘주접 밈’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뒤로 여러 말이 붙으면 주접 밈에 대한 끝없는 찬가가 시작된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소셜미디어 댓글 창에 우르르 출몰하는 주접 밈의 오묘한 세계에 대해 ‘밈 원정대’를 연재하는 김경수 님이 일타로 정리했습니다. 인터넷 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르를 그냥 지나치기엔, 밈 원정대를 이끄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일까요. (후후) 오타쿠에서 탄생한 ‘덕’ 개념이 K-팝 아이돌 팬덤과 결합해, 덕질하는 마음을 유머러스하게 승화시킨 주접 밈은 이제 생태계를 가리지 않고 소셜미디어를 뒤덮고 있습니다. 덕질이 위기에 처하는 시대일수록 그 가치가 더욱더 빛나는 주접 밈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나의 사랑, 나의 빛, 나의 어둠, 나의 삶, 나의 기쁨, 나의 슬픔, 나의 안식, 나의 영혼, «비애티튜드»…의 아티클에서 지금 바로 확인해 보세요!
덕통사고의 순간이다. 첫눈에 반한 아이돌이라든지, 아이돌의 심쿵 모먼트를 발견할 때 흔히 저러하다. 솔직히 우리는 예쁘거나 아름다운 상대를 만났을 때 과장된 표현을 잘 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예쁘다’ 혹은 ‘아름답다’ 이상의 말은 느끼하다는 인상만 남긴다. 영화 ‹카사블랑카›의 명대사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는 할리우드 스타나 이탈리아 사람에게 어울리지, 한국 사람에게는 영 부담스럽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한 게 주접 밈이 아닐까 싶다.
생각지도 못했다. 이세계물도 아니고, 클래식 애호가이던 내가 ‘레드벨벳Red Velvet’ 덕후가 되다니. 2016년쯤이었나. 레드벨벳 덕후인 친구가 한 번만 ‘러시안 룰렛’과 ‘Dumb Dumb’의 뮤직비디오를 봐달라고 졸라서 못 이기는 척 보았다. 키치하고도 발랄한 색감의 미장센, 반항과 놀이를 넘나드는 전위적 서사, 각 멤버의 매력까지. 모든 것이 ‘문화컬쳐’였다. 그다음 날부터 레드벨벳 노래가 내 플레이리스트를 점령했다. 얼마 뒤에는 하루라도 레드벨벳 MV를 안 보면 기분이 싱숭생숭해 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 몰아치는 감정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마땅한 단어나 표현, 속담이 없었다. (이제는 흔하디흔한 말이 되었지만) 소셜미디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던 ‘덕통사고(덕질+교통사고)’라는 주접 밈을 본 다음에야 체증이 풀렸다. 속을 쓸어내리는 개비스콘 아저씨처럼 말이다. 내가 느낀 충격을 그만큼 잘 표현해 주는 밈을 보지 못했다.
‘러시안 룰렛’ MV의 명장면. ‘러시안 룰렛’은 레드벨벳 MV 중에서도 해석의 여지가 분분하다. ‹The Itchy & Scratchy Show› 등 미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오마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마주 등 온갖 시각적인 요소와 의식의 흐름에 가까운 난해한 진행 등이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는 다섯 소녀가 예측불가능한 행동을 통해 여성이 타인에게 해석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는 게 흥미롭다. 체코 뉴웨이브 영화 거장, 베라 히틸로바Věra Chytilová의 ‹데이지즈Daisies›(1966)와 결이 비슷하다.
주접 밈은 이제 일상적으로 쓰인다. 아이돌과 관련된 게시물을 볼 때마다 “○○○에 대한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든지, “나 ○○ 좋아했네”, “나 몇 살인데 동년배들 다 ○○ 좋아한다.” 등의 댓글이 달려 있다. 이 외에도 “○○ 인기 거품 아냐? 언빌리버블” 식의 웃긴 말장난도 가득하다. 지금껏 다룬 ‘음MAD’나 ‘리믹스 밈’,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의 ‘상황극 밈’ 등을 생각해 보자. 이러한 밈은 제작자가 합성 소스를 가지고 독보적인 콘텐츠를 만들어 공유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 반면, 주접 밈은 아이돌 음방 등 특정 콘텐츠에 대한 반응에 그치고, 보통 정형화된 문장을 되풀이한다. 최근에는 ‘기습숭배’라는 주접 밈의 변형이 등장하기도 했다. 뭔가 웃기지 않거나 뻘글이라 여겨지는 게시물에 급작스럽게 “새삼 페이커가 대단하다고 느껴진다”라며 프로게이머 페이커Faker를 찬양하는 댓글을 다는 식이다.
온종일 페이커 생각만 한다는 것을 이토록 어지럽고 의식의 흐름에 가깝게 이야기할 수 있다니… 아무 말 대잔치와 주접의 만남은 주접 밈의 위력을 한껏 드높인다.
내가 아는 한, 주접 밈의 역사는 2014~15년쯤부터 시작됐다. 주접 밈의 탄생에는 여러 복잡한 배경이 있다. 우선 덕후라는 말이 당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덕후의 어원은 일본어 오타쿠オタク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오타쿠는 비웃음거리였다. 2010년 1월 27일 방영한 ‹화성인 바이러스› ‘십덕후’ 편에 나온 ‘오덕페이트’를 기억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는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에 나온 페이트 테스타로사 전신 베개를 들고 2D 캐릭터와 결혼하겠다고 만천하에 외쳤다. 이는 일파만파를 일으켰고, 이후 오타쿠에게는 사회성이 부족하고, 뚱뚱하고, 안경을 쓰고 있다는 낙인이 덧씌워졌다. 오타쿠가 실은 아니메アニメ나 특촬물 등 일본 서브컬처를 전문적으로 파고드는 애호가에 더욱 가까운데도 말이다.
전설의 오덕페이트. 오타쿠 이미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며 오타쿠 사이에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베개와 결혼한 남자라고 외국에까지 기인으로 소문났으니 오죽할까. 지금은 인간 여성과 결혼해 잘 사는 중이라고.
2010년대 중반 이후, 대중은 프랑스를 음역해 불란서(佛蘭西)라 부르듯, 오타쿠를 ‘오덕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파생한 ‘덕’은 대상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어미가 되었고, 이를 활용한 신조어가 계속 탄생했다. 연극과 뮤지컬 팬은 ‘연뮤덕’, 클래식 팬은 ‘클덕’, 역사 애호가는 ‘역덕’이라 불렸다. 더불어 어떤 대상을 덕질하기 시작한 순간을 ‘입덕’, ‘덕통사고’라고 호칭했다. 덕질하는 대상을 통해 한 사람의 취향이 드러날 수 있다면, 덕질은 타인이 그를 파악하는 정체성 중 일부인 셈이다. 마치 소개팅에서 인생 영화로 서로의 취향을 어렴풋이 가늠하듯이 말이다.
연뮤덕 친구를 볼 때마다 존경심이 든다. 오로지 연극과 뮤지컬을 보기 위해서 그 나머지 시간을 갓생으로 보내고 있어서다. 또 한 달에 공연은 몇 번이나 가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덕후라는 단어를 적극적으로 흡수한 주체는 아이돌 팬덤이다. 2015년은 K-팝의 최전성기를 이끌게 되는 BTS, 블랙핑크, 트와이스, 레드벨벳 등 3세대 아이돌이 데뷔하거나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시기다. 그때 일상화된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아이돌 덕후가 태어났다. 특정 집단이 단단하게 뭉친 팬카페와 다르게, 개인이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소셜미디어에서는 유사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뭉치고, 정체성을 형성하려면 적당한 키워드가 있어야 한다. 덕후는 연대감을 생성하고 팬덤의 언어를 구축하는데 더없이 적절한 단어였다. ‘찍덕’과 ‘홈마’ 등 팬덤 내 역할을 나누거나 머글과 덕후 등 일반인과 팬을 나누기도 했다. 즉, 팬덤 내부의 은어를 친근하게 포장해 준 것이다. 아이돌 팬덤이 빠순이, 빠돌이로 불리며 과거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사실을 생각해 보자. 오타쿠의 이미지를 중화한 덕후는 팬덤의 이미지를 중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대학생 시절에 대학 축제를 많이 다녔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대학 축제 공연의 맨 앞 열은 대부분 찍덕의 몫이었다. 공연 시작 5시간 전부터 대포 카메라를 들고 모이는 집념에 새삼 놀랐다. 과연 저 에너지와 돈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저 카메라는 얼마짜리일까, 생각하다 보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다만 팬으로 열렬히 마음을 고백하는 것보단 선을 지키면서 앨범을 한 장이라도 더 사고, 스트리밍을 더욱더 빡세게 돌리는 게 자기가 덕질하는 아이돌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돈쭐낸다’라는 유행어에서 드러나듯, 우리 사회는 이제 타인을 감정적으로 지지할 때 응원보다는 소비를 권장한다. 응원은 한때뿐이지만 매출은 통장에 영원히 남는 법이다. 더불어 열렬한 애정은 자칫 사생팬 등 아이돌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팬들 입장에서는 서로의 덕질을 존중하는 선에서 암묵적인 룰을 지키는 게 상식이 됐다. 아이돌은 생산자로, 팬은 소비자로 머물러야만 하는 현실은 유사 연애 감정을 상업화한 아이돌 시장의 역설 중 하나다. 팬의 열정적인 감정은 억눌리기 마련이다.
미국의 SF 블랙 코미디 애니메이션 ‹퓨처라마Futurama›에서 비롯한 밈으로 “어머 저건 사야 해~” 격의 밈이다. 살 만한 가치의 물건이 있을 때 무조건 사야 한다는 용례로 쓰인다. 한국에서는 “돈쭐내자”로 발전했다. 돈쭐내자는 선행을 베푼 가게에서 구매를 많이 하며 그곳이 망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소비자 운동이다. 보통 이런 가게 사장님들은 겸손한 탓에 선행이 밖으로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에 대한 지지를 드러내고 싶을 때, 겸손 따위는 필요 없으니 내 돈을 가져가라고 말한다. 이러한 퉁명한 감정 표현과 이미지의 과격함이 맞아떨어져 계속 밈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때 덕질하는 마음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창구는 댓글 창뿐이었다. 2015년쯤부터 ‘씹덕사’와 ‘심쿵사’라는 짤방이 유행했다. 씹덕사 짤을 처음 본 순간이 기억난다. 전형적인 병맛 만화 그림체로 말풍선에 주저리주저리 대사를 적은 짤 말이다, “아예, 거기 관 짜주는 곳이죠. 제가 방금 씹덕사를 당했으니까 관하나만 짜주세요.” 덕질하는 아이돌의 실물을 보았을 때 아우라에 압도당해 잠깐 숨이 멎는 경우가 있다. 나도 레드벨벳을 실제로 보았을 때, 영화 언론 시사회에서 덕질하는 배우를 처음 마주쳤을 때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런데 죽는 건 아무리 봐도 허무맹랑한 과장 아니던가. 그렇기에 더욱더 정확하고 웃긴 밈이 되었다.
2015년쯤 페이스북에서 유행한 씹덕사 짤방이다.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방식으로 초기 씹덕사는 귀엽고 깜찍한 캐릭터로 그려졌다. 나중에는 ‹무한도전› 짤방 등과 결합해 ‘주접스럽게’ 바뀐다.
씹덕사와 심쿵사를 영화 대사로 번역하면 “널 죽을 만큼 사랑해!!” 정도일 테다. 격정이 휘몰아치는 멜로극에서 주인공의 광적인 집착을 상징하는 이 말은 아무리 연인 사이라도 섬뜩하게 들린다. 반면, 씹덕사는 비슷한 뜻이지만 왠지 모르게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고 무해하게 들린다. 아이돌에 대한 사랑, 숭배에 깃든 비장함을 없애고 우스꽝스러움을 과장한 채로 드러내서다. 나아가 씹덕사나 심쿵사하는 상황이 여러 짤방으로 제작되면서, 덕질은 서서히 하나의 밈이 됐다. 아이돌을 사랑하는 마음을 누가 더 창의적인 방식으로 고백하는지 여부가 밈의 핵심이 된 것이다.
드라마 ‹마스크걸›에서 “아이시떼루”를 외치는 주오남은 오타쿠의 스테레오타입을 한데 모은 존재다. 안재홍의 인생 연기(?)라고도 불리는 이 캐릭터는 거북한 리얼함 때문인지 인터넷 밈으로 잠깐 쓰이다가 사라졌다.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유행한 덕질 밈은 어느덧 X(옛 트위터)에 퍼졌다. 정치적 공론장으로 쓰이던 트위터는 2017년 이후로 서브컬처와 아이돌 팬덤의 성지로 승격됐다. 그런 과정에서 주접 밈이 탄생했다. 주접은 ‘음식 따위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다. 심을 부리며 추하고 염치없게 행동하다’라는 뜻의 ‘주접떨다’에서 파생한 말이다. 이때 주접이란 단어가 지닌 추하고 지저분한 뉘앙스를 살리는 게 중요하다. 아이돌과 팬 사이에 그어진 선을 넘어 추한 방식으로라도 자기 마음을 드러내겠다는 의지가 담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난스럽고 웃긴 댓글을 다는 게 주접 밈의 규칙이다.
한자 음차를 따서 짓는 밈은 오래전부터 유행했다. 음차를 따더라도 제법 뜻이 맞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주접 멘트는 그야말로 발음만 남아 있다. 의미와 상관없이 “내가 사랑한다”만 외치면 되기 때문이다.
주접 밈은 대부분 언어유희에 기반한다. 280자라는 글자 수 제한 때문에 그 안에서 최대한 웃기게 적어야 하는 X의 개성과도 이어진다. X는 텍스트로 작성한 게시물을 캡처해 공유하면서 밈이 되는 플랫폼이라 굳이 웃긴 짤방이 필요치 않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텍스트를 웃기게 적으면 그만이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팬 계정은 익명으로 운영되기에 싸이월드식 문체부터 시작해 정말 갖가지 문체가 나타난다. X뿐만 아니라 디씨의 ‘해외축구 갤러리’를 중심으로 축구선수 손흥민에 대한 주접 밈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손흥민이 득점할 때마다 “손흥민은 공놀이 좀 하는 수준 아님?” “주인공놀이” 식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 갤러리에서는 프로게이머 페이커를 숭배하는 “젠장, 또 대상혁이야”, “새삼 페이커가 대단하다고 느껴지네” 등의 주접 밈이 활개를 쳤다. 이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생긴 주접 밈이 소셜미디어에 한데 뭉치게 되면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해축갤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밈이라 볼 수 있다. 손흥민 드립 모음집이 나오기만을 기다린 순간이 있을 정도로 모든 드립이 레전드다.
해축갤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밈이라 볼 수 있다. 손흥민 드립 모음집이 나오기만을 기다린 순간이 있을 정도로 모든 드립이 레전드다.
개인적으로 주접 밈 중 가장 흥미로운 예시는 “○○○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다. 사실 이 밈은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글이었다. 원게시물은 다음과 같다.
제목: 인사문제로 오늘부로 문재인 지지를 철회한다
오늘부터 지지관계에서 벗어나
문재인과 나는 한몸으로 일체가된다
문재인에 대한 공격은 나에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그야말로 한국 정치의 오랜 고질병인 진영 논리와 팬덤 정치를 함축한 글인데, 지금은 정치적 지지와 덕질의 경계가 사라진 시대다. 정당이 다른 정당을 공격하며 지지 기반을 다지듯, 팬덤도 서로를 견제하고 적대시한다. 이는 서로를 혐오하는 극단주의를 불러올 수 있다. 덕질의 대상과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는 현상은 더욱더 심해질 것이다.
‘극우보수’라는 닉네임 때문에 어그로용 게시물인 게 티 난다. 처음부터 엄청나게 흥한 글은 아니었기에 왜 발굴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극우보수’라는 닉네임 때문에 어그로용 게시물인 게 티 난다. 처음부터 엄청나게 흥한 글은 아니었기에 왜 발굴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흥미롭고도 독창적인 지점은 “○○○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를 K-팝 팬덤에서 차용하는 방식이다. ○○○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는 정치적 메시지 뒤에 “세상의 70억 명의 팬이 있다면 나는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라는 이상한 문장을 더한다. 거기에 소설 『롤리타Lolita』의 유명한 도입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을 패러디한 “○○○, 나의 사랑. ○○○, 나의 빛. ○○○, 나의 어둠. ○○○, 나의 삶. ○○○, 나의 기쁨. ○○○, 나의 슬픔. ○○○, 나의 안식. ○○○, 나의 영혼. ○○○, 나” 등의 문구가 뇌절로 더해져 완전한 꼴을 지니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위험할 수 있는 문장을 일부러 다른 문장과 뒤섞어, 위험을 차단한 것이다. 이런 식의 주접 밈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타인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기보다,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는 자정 작용의 일부라고 생각해 본다. 팬덤화된 정치적 언어를 팬덤의 언어로 뒤틀어 팬덤 정치에 대한 가장 적합한 풍자이자 비판 효과를 만들었다고나 할까. (비슷한 맥락에서 ‘동년배’ 드립은 네이버 뉴스 정치란에 달린 노인층의 젊은 층 사칭(?) 댓글을 뒤튼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동년배는 네이버 뉴스에서 자주 보이는 댓글이다. “나 20대인데 동년배들 다 문재인 싫어한다” 식으로 노년층이 다른 나이대로 속여 댓글을 다는 식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집단을 사칭하는 허무맹랑함이 인터넷 밈이 되기에 딱이었나 보다. “우리 모두가 ○○○를 좋아한다”보다 “내 동년배들 ○○○ 좋아한다”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주접 밈의 미덕은 덕후가 덕심을 드러낼 수 있는 언어로 기능하는 데 있다. 오로지 대상을 숭배하겠다는 마음을 굳건히 지키려는 덕후의 진심을 드러내는 목적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덕질이 위기에 처하는 시대일수록 주접 밈의 가치는 빛난다. 지금 덕질은 점점 힘겨운 일이 되고 있다. 아이돌은 콘텐츠의 주체이자 동시에 K-팝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는 산물이며, 사람들의 관심으로 지탱하는 관심 경제 시대의 상품이기도 하다. 덕후는 연예기획사가 유도하는 소비 패턴과 그들이 만드는 아이돌의 세계관을 기어이 따라야 한다. 연예기획사의 잘못으로 아이돌이 고생하는 경우도 많으며, 심지어 급작스레 해체하기도 한다. 최애 아이돌이 나락으로 떨어진 후 탈덕하는 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바닥에선 드물지 않다.
덕질은 우리 주변의 누군가에게 쉬이 마음을 내줄 수 없는 시대의 필수적인 마음으로 보인다. 우리는 인플루언서부터 시작해 누구든 덕질할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덕질은 아무리 사랑해도 내 목소리가 닿을 수 없는, 결국 실패에 수렴하는 열정적인 짝사랑이다. 주접 밈은 이런 숙명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타인에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드러내는 도구다. 주접이라는 추한 가면을 쓰고 짝사랑의 언어를 노래하는 아이러니를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밈 연구자로서 그 필연적 속성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요즘 아이돌 팬덤 이전에는 빠순이가 존재했다. 사생활 침해, 협박 편지, 숙소 침입 등 스타를 향한 온갖 범죄를 저지르던 시기라 낭만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티켓팅도 없던 시절, 저렇게 앉아 있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
Writer
김경수(@vivre_wasavie)는 영화평론가이자 인터넷 밈meme 연구자다. 학부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화제를 모은 졸업논문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은 지난 6월 동명의 단행본으로 발행됐다. 영화와 인터넷 밈을 동시에 연구하는데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현재 «코아르»에 영화 비평, «여성동아»에 인터넷 밈 비평을 연재하고,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 (FIPRESCI) 한국 지부 정회원이자 인문학 스탠드업 코미디 페이지 ‘인문학적 개소리’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비애티튜드» 편집부에는 가끔 깜짝선물이 도착하곤 합니다. 바로 책입니다. 크리에이티브 업계에서 일하는 분들이 흔쾌히 보내주시는 신간은 굉장히 뜻깊어요. 본업 하기에도 하루하루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 명징한 문자 언어로 생각을 정리하는 행위가 마법처럼 다가오거든요. 아모레퍼시픽에서 크리에이티브센터를 이끄는 허정원 님의 『생각의 공간–창의성이라는 욕구를 다루는 법』이 얼마 전 책상에 도착해서 상큼한 라임색 커버를 넘기며 스르륵 읽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군요. 그리고 생각했어요. ‘아, 이걸 나만 읽는 건 좀 반칙 아닌가?’ «비애티튜드»를 찾는 독자들과 인사이트를 나누고 싶은 욕망이 샘솟더군요. 저자와 상의한 끝에, 몇 번이고 곱씹고 싶은 에세이 세 편을 골라 소개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요즈음 가장 만족스러운 탈취(?) 중 하나인데요. 정원 님의 ‘생각의 공간’에서 뛰어놀던 친구들을 아티클에서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생각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아주 큰 공간으로 말이다. 자그마한 머릿속에 제멋대로 들어와 버린 생각들이 이리저리 날뛰다 뒤엉키고 벽과 천장에 부딪히며 게이지를 소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종일 머릿속이 복잡한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을까. ‘생각의 공간’은 상상가능한 가장 넓은 공간으로 하자. 애당초 그 공간을 정리 정돈 할 마음은 없다. 어차피 생각의 공간은 어질러질 수밖에 없고, 한없이 어질러져도 괜찮은 유일한 공간이니까. 이렇게 상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어떤 생각이든 눈치 보지 않고 들어와서 마음껏 휘저으며 뛰놀고 에너지를 발산해도 된다.
Homo Ludens by Katrin Korfmann
모든 생각은 자신을 ‘생각’이라 소개하지만, 대부분은 언어라는 탈을 쓰고 나타나는 ‘욕구’다. 생각이라 여기면 어렵고 머릿속이 복잡해지다가도, 욕구는 어쩔 수 없으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욕구는 심플하다. 발생한 크기만큼 에너지를 발산해야 한다.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창의성 또한 호기심과 상상력이 의기투합하여 만들어진 욕구가 아닐까 한다. 그 욕구가 생겨나면 자연스럽게 에너지를 발하게 된다. 그러니 창의성을 키우기 위해 배우고 갈고닦으려 노력하기보다는, 자극받고 느끼면서 즐기고 상상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발상 역시 생각의 공간에서 일어난다. 인간이 생각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서 ‘생각의 공간’에서 ‘창의성이라는 욕구를 다루는 법’은 이야기 나눠볼 거리가 된다.
스마트와 크리에이티브
“요즘 스마트한 사람은 많은데, 크리에이티브가 약하지? 크리에이티브를 더해주고 싶어.” 어느 날 친구가 물었다. 호기심이 생기는 물음이다. 그 친구에게 ‘크리에이티브’란 단어의 이미지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스마트하다’는 표현을 짚고 넘어가자. 이는 칭찬임에 틀림없다. 누군가로부터 “스마트하다”는 말을 듣는다면 정말 기분이 좋을 듯하다. 뭐랄까, 상당히 복합적인 의미가 담긴 칭찬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하다’는 똑똑하다, 깔끔하다, 단정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세련되다, 활기차다, 자신감이 넘친다 등과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줄줄이 끌어들인다. 친구는 이토록 듣기 좋은 ‘스마트하다’는 칭찬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요즘 많다고 한다. 그런데 뭔가가 아쉽다면서, 크리에이티브를 더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흘려들을 수도 있었지만, 언어를 다루는 일을 하는 친구가 내뱉은 말인 데다, 크리에이티브 관련 일을 하는 나로서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스마트와 비교해서 떠올릴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의 속성은 발상과 시도에 대한 용기가 아닐까 한다.
‘스마트하다’는 똑똑하다, 깔끔하다, 단정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세련되다, 활기차다, 자신감이 넘친다 등과 같은 긍정적인 이미지들을 줄줄이 끌어들인다.
‘크리에이티브하다’라는 말은 먼저 감각적이다, 호기심이 풍부하다, 사고가 자유롭다 등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데, 그에 못지않게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에이티브는 결과에 대한 언어가 아니다. 무언가를 새롭게 또는 다르게 떠올려보는 딱 그 ‘과정’에 대한 언어이다. 그리고 떠오른 그 무언가를 드러내고 표현했을 때 비로소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느낌’이다. 그런데 어떡하지.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르기는 했는데, 상당히 별로일 수 있다.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봐도 좋다. 생각은 기억과 자극을 매개로 제멋대로 흘러왔다 흘러갈 뿐,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을지는, 떠오른 생각에게는 관심사가 아니다. 그 생각을 표현할지 여부는 결국 자기 검열로 결정된다. 검열 과정에서 수많은 아이디어와 생각이 탈락한다. 검열 능력이 뛰어나 떠오르는 생각들을 요리조리 잘 정제해서 내보내면 스마트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크리에이티브하다’라는 말은 먼저 감각적이다, 호기심이 풍부하다, 사고가 자유롭다 등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데, 그에 못지않게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스마트한 사람은 운 좋게도 뇌 용량이 크고 처리 속도가 빠른 게 아닐까 싶다. 이들은 맥락 없고 허무맹랑하다는 판단, 제대로 전달되지도 이해되지도 않을 가능성, 논리의 부적합성과 불충분성에 대해 공격받을 확률, 자신의 이미지가 입을 타격 등을 이유로 많은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다. 자기방어 기제가 펼치는 순기능인 셈이다. 대단한 능력이다. 그에 반해, 자기 검열의 확고한 기능에 기대기보다, 불확실성을 안고서라도 표현하고 드러내는 용기를 발휘하는 것이 크리에이티브가 아닐까 싶다. 스마트한 의견을 말하면 상대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빈틈없이 명료하게 전달되기 때문에, 감정적 동의와는 별개로(궁극의 스마트함은 감정 케어까지 담고 있겠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반면 크리에이티브한 의견에는 자기 생각을 덧붙이고 싶어 한다. 상상력을 자극받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과학자도 충분히 크리에이티브하다. 기본 원리를 새로운 분야에 적용하거나 실용성을 높이는 응용 과학 분야는 물론, 기본 원리 자체를 탐구하는 이론 과학 분야의 과학자 모두 크리에이티브한 태도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론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 제시된다. 우연한 발견에서 번뜩이는 통찰이 불현듯 떠올랐다는 유명한 사례들도 있지만, 대체로는 오랜 시간 수많은 과학자의 추가 검증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결과로, 과학자가 처음 주장했던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새로운 가설은 기존의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관찰 결과를 놓고, 이런 원리이지 않을까, 저런 개념을 도입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다양한 생각이 연결되며 세워진다(고 생각한다). 자체 실험을 통해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획득했다 하더라도, 하나의 실험일 뿐이다. 새롭게 발표된 이론은 수많은 과학자의 또 다른 실험에서 검증 대상이 되며, 언제든 부정될 수 있다.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이론일수록 많은 과학자의 관심과 의심을 사고, 더 많은 검증과 반대 이론에 맞닥뜨릴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이런 과정에 익숙한 과학자들이라도 여전히 새로운 이론을 제시할 때는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지금까지 없었던 발상과 함께 용기를 발휘하는 순간이 수반된다. 그 과정이 크리에이티브하다고 생각한다.
천동설이 과학적 진실로 받아들여지던 시대, 그래도 지구는 돈다’며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당연한 명제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진정한 크리에이티브가 아닐까?
앞서 크리에이티브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대한 언어라고 했지만, 그 언어가 가진 뜻에는 ‘창의적’이라는 상태뿐만 아니라 ‘창의적 결과물’도 포함된다. ‘생각 끊기 연습’과 같은 발상 또한 이에 해당할 것이다. 충북 단양에서 농부로 지내고 계신 분이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기 위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제시한 생각 끊기 연습의 원리는 간단하다. 2초간 생각을 끊어보는 것이다. ‘에계계~’ 할 수도 있지만, 에너지가 거의 소모되지 않는 심플한 방식으로도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되는 경험을 했다. 그 개념을 (내가 이해한 대로) 간략히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해라, 저런 생각을 되도록 하지 말라’는 말들이 있지만, 가만 보면 생각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니 나로서는 생각을 할지 안 할지 결정할 수 없고, 그저 아주 잠깐인 2초간 생각을 퍼즈pause, 즉 일시 정지해볼 뿐이다. (stop은 아니다. 이는 불가능하니까.) 그러면 과열된 엔진이 잠시 멈춘 뒤 정상적으로 작동하듯, 생각이 살짝 정리된다. 물론 깊은 감정을 수반한 생각은 2초 만에 정리되거나 사라질 리 없다. 그래도 괜찮다. 생각은 원래 그런 거니까.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생각이 잠시 끊기는 찰나에 느끼는 안도와 안심이 쌓이면서 뇌가 그 효용성에 반응한다. 즉 과열될 즈음에 잠시 멈추는 패턴을 가지게 된다.
2초간 생각을 끊어본다는 발상을 처음 접했을 때, 반신반의하면서도 크리에이티브하다고 여겼다. 생각의 흐름에 관여해 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무아(無我)와 연기(緣起)라는 불교 사상에 기반한 수행법이지만, 종교적 믿음과 무관하게 생활 습관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나도 거리를 걷거나, 앉아 있거나, 심지어 회의를 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실행해 보면서 효용성을 경험했다. (2초간 생각을 끊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그러니 머릿속이 복잡해 어지럼증을 느끼는 분에게 추천한다. 물론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창의성은 디자이너의 전유물이 아니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뛰어난 감각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 감각 자체를 창의성이라고 오해하지 않으면 좋겠다. 창의성은 사고와 태도에 대한 영역이기에 모두에게 열려 있다. 창의성은 디자인이라는 영역에서 멋지고 매력적인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하지만, 감각의 영역에 갇히지 않는 훨씬 방대한 개념이다.
창의성은 디자인이라는 영역에서 멋지고 매력적인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하지만, 감각의 영역에 갇히지 않는 훨씬 방대한 개념이다.
소비자, 사용자, 고객, 타깃
디자이너들에게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니, 적확한 단어를 잘 써야 한다는 긴장감에 놓이곤 한다. 누군가 작심하고 “당신은 얼마나 언어를 올바르게 쓰길래요?”라고 질책하면 “저도 더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정말 ‘중요’하고, 능력이 부족하다면 노력해야 한다. 일하면서 자주 사용하는 언어 중 하나는 디자인의 대상을 지칭하는 용어다. 디자인이라는 일의 특성상 대상을 항상 떠올리게 되는데, 사용하는 용어에 따라 사고의 흐름이 무의식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대상을 뜻하는 용어로는 소비자, 사용자, 고객, 타깃을 꼽을 수 있다. 내 나름대로 구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비자’(consumer)는 소비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재화나 용역을 소모하는 사람’이라고 풀어 말하면, 혹 부정적으로 들리는지? 낭비가 심하고 무분별한 소비가 자행되는 전 지구적 위기 상황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사람을 폄하하는 용어라고 발끈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소비를 통해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드러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속가능성, DEI(Diversity, Equity, Inclusion. 즉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와 같은 시대적 가치를 소비 행위로 실천하면서, ‘가치 소비’처럼 긍정적인 의미와 결합되기도 한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DEI(Diversity, Equity, Inclusion. 즉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와 같은 가치 역시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소비 기준이 되었다.
다만, 디자인 업무를 할 때 떠올리기 적합한 단어인지는 고민해 보자. 대상을 ‘소비자’로 인식하면, 디자인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소비가 일어나는 시점’에 집중하게 된다. 물건은 ‘쓰려고’ 산다. 당연히 ‘쓰는’ 과정에 대한 고려와 배려가 중요한데, 소비자라는 단어를 곱씹다 보면 ‘사는’ 순간에 무게중심이 실릴 수 있다.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누군가가 “더 많이 사고 싶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디자인의 역할이야”라고 주장하더라도, 굳이 부정하지는 말자. 잘 팔리면 좋으니까. 매력적으로 디자인해서 그런 소리가 안 나오게 하되, 사용하는 상황과 사용성을 충실히 고려하면 좋겠다. 어쨌든, 소비자라는 용어가 소비 행위의 순간에 집중하게 만드는 만큼, 디자인이 창출하는 가치를 폭넓게 풀어내기 위해 개인적으로 그 사용 빈도를 현격히 줄였다.
‘사용자’(user)는 사용하는 사람이다. 이 용어는 구매 시점보다는 구매 후의 사용 행위에 집중하게끔 한다. 사용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비교적 ‘무엇’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무엇’에 해당하는 사물이나 서비스 자체를 중심으로 발상이 일어나고, 사용하는 사람의 상황과 사용 방식, 사용의 편의성에 대한 생각이 펼쳐진다. 인간의 인지 원리나 어포던스affordance, 즉 행동유도성을 고려한 아이디어를 끌어내기에 적합하다. 디자인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디자인 원칙은 대부분 ‘사용자’ 관점으로 정리돼 있다. 복잡한 사용성을 가지거나 복합적인 서비스와 관련한 디자인 영역이라면 사용자라는 단어가 적합하다고 본다.
어포던스(Affordance)는 어떤 행동을 유도한다는 뜻으로 행동유도성이라고도 한다. 어포던스가 잘 되어 있다면 사용자는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물의 쓰임새를 추론하여 디자인의 의도에 맞게 사물을 이용할 수 있다.
‘고객’(customer)은 말 그대로 고객이다. “고객님”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공손해진다.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든다. 이 용어는 ‘소비’나 ‘사용’ 같은 특정 행위의 순간보다, 대상 자체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나와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대상에 대한 나의 애티튜드에까지 생각이 미친다. 디자인의 영역이 상품을 넘어 서비스, 공간 등 어디로 확장하든 별 무리 없이 쓸 수 있다.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연결하기도 수월하다. 애티튜드를 자아낸다는 측면에서 긴장감까지 불러일으키는 단어다.
‘타깃’(target)은 표적이다. 단호하다. 적중시켜야 한다. ‘타깃 고객’, ‘타깃 유저’처럼 앞서 말한 세 가지 용어와 짝을 이루기도 한다. 타깃이라는 말의 울림은 다분히 전략적이고 사업적이다. ‘잘 맞춰야 한다’라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따라온다. 무엇보다 적중시켜야 하는 만큼, 타깃을 잘 정해야 한다. 과녁을 잘 그려서 10점 영역의 위치를 명확하게 제시할수록, 궁수가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그런데 타깃 같은 단어를 계속 떠올리며 ‘적중하기 위한 디자인’에 골몰하다 보면, 디자인하는 행위가 다분히 도구적이고 소모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디자인을 상업적 성과로 평가하는 일은 피할 수 없지만, 사람과 세상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실 또한 자명하다. 디자인은 개인을 넘어 다수를 위해 창의성과 재능을 펼치는 행위이다. 디자인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느끼고 행동하는 바도 달라진다. 정보를 쉽게 이해하거나, 행위가 수월해질 수 있고, 기분이 좋아지거나 마음이 따뜻해질 수도 있다. 어떤 행위가 촉발되기도, 같은 행위가 반복되기도 한다. 디자인은 그렇게 우리 삶에 기여한다. 디자인의 매력이다.
용어 이야기, 하나 더. 언제부턴가 ‘브랜드 매장’이라는 표현보다 ‘브랜드 공간’이라는 표현을 선호하게 되었다. ‘매장’이라고 말하는 순간, 팔기 위한 장소라는 의미가 먼저 읽힌다. “매장에서 쑥쑥 매출을 올리는 게 당연하지, 무슨 소리야?”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맞는 말이다. 필요한 압박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매몰되어 공간 경험을 풍부하게 만드는 발상이 위축될까, 살짝 걱정된다. 브랜드 공간의 역할은 매출이면서 동시에 브랜딩이기도 하다. 브랜딩이란 고객과의 관계 형성이다. 브랜드 공간에 들어온 고객의 마음은 한층 열려 있다. 지금 이 공간에 자신의 천금 같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만큼, 그 시간 이상으로 가치를 끌어올려 소중한 기억과 경험을 얻고자 한다. 자연스러운 사람 마음이다.
패션 브랜드 JACQUEMUS자크뮈스 성수동 팝업 현장. 동시대의 브랜드들은 물리적인 공간을 통해 비물질적인 정신을 표현한다. 브랜드 공간의 역할은 매출이면서 동시에 브랜딩 그 자체이기도 하다.
브랜드에게는 절호의 찬스다. 공간의 인테리어와 소품, 향기와 소리, 응대하는 애티튜드에 이르기까지 공간의 모든 요소를 고객이 브랜드에 감정 이입하는 장치로 활용할 수 있다. 오감과 이성을 총동원해 즐거운 경험을 마친 고객은 이제 소셜미디어로 자기 경험을 전파한다. 그 전파력은 강력하다. 온라인에 해당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다. 이런 인식을 충실히 하고 있다면 매장이라 부르든, 공간이라 부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뉴트럴한 단어인 ‘공간’이 더 좋다. 새로운 발상이 더욱더 자유롭게 떠오를 듯하다. 그뿐이다.
생각의 공간은 언어로 이루어진 만큼,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창의성이 더 잘 싹틀 수 있고 그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다. 창의적인 발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씨앗은 누구에게나 이미 충분히 뿌려져 있다. 단지, 어디서 어떻게 싹틀지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래서 시선을 한 방향으로 고정시키는 단어보다, 여기저기 둘러보게 만드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더 좋다.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생각들이 연결되며 창의성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Why의 뒷면
우리는 ‘Why’의 시대에 살고 있다. Why가 모든 활동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널리 확산되고 있다. 기후변화와 환경문제, 전염병과 보건, 인종차별과 성차별, 기술 발전과 그 영향, 국제정치와 안보 문제 등 인류의 미래와 지속가능한 발전이 위협받는 전 지구적 상황은 불안감과 불만족을 증대시키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가치 추구의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우리는 Why의 시대에 살고 있다.
브랜드도 시대적 화두에 기반해 존재 이유와 가치를 밝히며 고객에게 말을 건다. 브랜드가 선언하는 메시지가 고객의 공감과 호응을 이끌어내고, 브랜드에 대한 관심도와 호감도를 상승시키는 사례도 점점 늘고 있다. 브랜드마다 Why를 대하는 진지함의 정도, 쏟는 에너지와 시간은 다르겠지만, 이 시대에 존재하는 브랜드에게 이는 필수적인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나면, 브랜드의 취향에 대한 화두를 꺼내기가 멋쩍어진다. 가치와 의미는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옳은 것’을 추구하면서도 ‘좋아하는 것’을 즐기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동전의 양면처럼 Why의 뒷면에는 취향이 존재한다. Why가 브랜드의 가치를 선언한다면, 취향은 브랜드가 가진 욕구의 결과 감도를 드러낸다. Why가 옳은 길로 가고 있는지를 일깨워주는 지도라면, 취향은 실제로 그 길을 걸어가면서 주위를 둘러보고 탐험하고 즐기는 과정에서 느끼고 발견하는 것들이다. Why가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는 한, 취향은 반드시 Why와 연결될 수 있다.
브랜드에게도, 소비자에게도 취향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브랜드는 커질수록 고민거리가 많아진다. 어른이 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과 유사하다. 지금의 모습을 좋아해 주는 고객과 새로움을 기대하는 잠재 고객 사이에서 고민한다.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면, 국가마다 상이한 니즈와 감성을 가진 고객 사이에서 고민한다. 온오프라인 채널이 다각화되면, 채널마다의 각기 다른 요구사항 앞에서 고민한다. 브랜드 내부 상황도 달라진다. 브랜드에 관여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만큼 다양한 생각이 펼쳐지기에, 일사불란하고 가벼운 몸놀림이 쉽지 않다. 그러다 보면 취향처럼 설명이나 설득이 어려운 논의 사항은 조금씩 뒤로 밀려난다. 취향처럼 말랑말랑한 이야기가 들어서기 어려워진다. 그나마 Why는 뚜렷하게 자기 자리를 잡고 그 역할을 하겠지만, 취향은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 점점 딱딱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신생 브랜드가 나타나 자신감 있고 자유롭게 ‘취향’을 펼쳐내는 걸 보게 되면, 위기감을 느낀다. (위기감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그게 출발점이니까.)
주목받는 신생 브랜드들이 취향을 소화하는 방식에서는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브랜드를 상징하는 시각 요소를 착실하게 규정하고 일관성 있게 꾸준히 지켜나가려는 다짐보다, 각종 요소를 감각적으로 큐레이팅하고 싶다는 욕구가 먼저 느껴진다. 뚜렷한 브랜드의 취향이 있다고 느껴진다. 때로는 일관성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더 넓은 범위의 취향으로 흡수된다. 이런 자신감 넘치는 활동력의 중심에는 디자인을 넘어서서 브랜드의 모든 행위를 진두지휘하는 개성이 있다. 능수능란하다. 이는 실제 사람이 종합적인 영향력을 펼칠 때 가능한데, 신생 브랜드의 경우 대개 창업자가 이런 역할을 맡고 있다.
아이돌 그룹 뉴진스의 로고. 30개가 넘는 로고 플레이를 통해 구축한 멀티 페르소나는 브랜드의 유연함과 다채로움을 그대로 드러낸다.
공간을 대하는 방식도 다르다. 전통적으로 브랜드 공간은 브랜드의 본질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브랜드의 핵심 가치를 상징할 수 있는 시각적인 요소로 파사드, 오브제, 집기, 조명, 의자 등이 창작되고, 이들이 공간 무드의 중심이 된다. 이 개념은 지금도 유효하고, 부정할 근거도 없다. 단, 브랜드의 본질을 담으려는 의무감으로 공간의 요소들을 재단하다 보면, 공간은 조금씩 딱딱하고 지루해진다. 주목받는 신생 브랜드의 공간은 (편차가 있긴 하지만) 본질을 보여주고 말겠다는 각오보다는, 내 집을 꾸미듯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낸 듯한 인상을 준다.
취향이 담긴 공간은 풍성하게 다가온다. 모든 것이 고유하게 만들어질 필요도 없고, 새것일 필요도 없다.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수집한 물건들도 취향이고, 그 정성도 소중하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창작한 것과 수집한 것이 어우러진다. 그렇게 꾸며진 공간은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고객들은 그 공간을 즐겁게 탐색하면서 브랜드의 센스를 느낀다. 고객 스스로 공간을 구성하는 갖가지 요소를 연관 지으며, 호기심 어린 의미를 부여하고, 브랜드 스토리텔링의 퍼즐을 맞추어간다. 신생 브랜드들의 플레이를 보다 보면, “저는 고객이 원하는 최고의 제품,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합니다”가 아니라, “저는 이렇게 태어났고 이런 사람이거든요.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당신께 선사할게요”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매력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브랜드들이 잉태되고 태어나고 있다.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요건들은 과거나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각 요건을 충실히 구비하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의 장벽은 예전과 비할 수 없이 낮아졌다. 기존의 브랜드들과 유사한 퀄리티의 제품을 만드는 ODM, OEM 업체가 즐비하다. 유무형의 어떤 재화이든 알리고 싶은 게 있다면, 온라인에서 무(無)비용으로 홍보도 가능하다.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면 상품으로 만들어 소비를 창출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얼마나 많은 창의적 시도가 펼쳐지고 있을까. 개성과 다름이 중시되는 시대적 흐름을 타고, 자신만의 취향을 선보이며 젊은 세대를 사로잡는 브랜드들이 늘고 있다. 그들이 보여주는 또렷함과 신선한 에너지, 활기가 나를 고무시킨다.
덧.
위 에세이는 아모레퍼시픽 크리에이티브센터 허정원 센터장의 신간 『생각의 공간–창의성이라는 욕구를 다루는 법』에 실린 서른다섯 편의 글 중 세 편을 발췌 및 편집한 결과물이다. 저자는 가장 창의적인 작업마저 AI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어떻게 펼쳐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어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창의성이 감각이나 스킬이 아닌 누구나 가진 욕구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창의성은 일하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태도이며 결과가 아닌 과정에 가까운 행위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발상하고 공명하는 디자이너의 ‘생각 기록’을 이번 책에 켜켜이 쌓아 놓았다. “기억에 남을 만한 생각을 하고 있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아둔 듯한 책 『생각의 공간』이 독자 내면의 생각을 깨우는 대화 상대가 되길 기원해 본다.
Writer
허정원(@wonjheo)은 연세대학교 생활디자인학과 및 주거환경학과에서 학사 과정을 마치고, 이탈리아 도무스 아카데미에서 디자인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일본 치바대학교에서 디자인 경영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에 10년간 재직하며 제품 디자인, 디자인 전략, 통합 선행 디자인 등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일본디자인분소장을 지냈다. 현재 아모레퍼시픽 크리에이티브센터를 이끄는 센터장으로서 30여 개 브랜드의 상품과 공간 크리에이티브, 코퍼레이트corporate 레벨의 고객 경험 크리에이티브, 아모레 성수 등의 플래그십 사업을 총괄 중이다.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등 장편 소설로 워낙 유명하지만 단편 소설도 그에 못지않은데요. 특히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아마 어렸을 적 읽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입니다. 작가는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을 사랑이라고 해석해요. 너무나도 맞는 말이고 아름다운 교훈입니다. 하지만 창조론적 관점이 아니라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유인원(類人猿)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등의 원인(猿人)으로, 그리고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불의 발견과 도구의 사용을 빼놓을 수 없을 거예요. 디자인의 탄생에 대한 개념은 학술적으로 명확한 편이지만, 무엇인가 만들고 해결하는 능력으로 광의적인 해석을 한다면 결국 인간이 이룩한 진화 중심부에 디자인이 놓이게 됩니다. 유랑하는 삶에서 정주하는 삶으로 탈바꿈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농경 사회에서 집과 건물을 짓는 건축 또한 문명의 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죠. 과연 디자인과 건축 없이 인간은 살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소소한 의견을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디자인과 건축은 인간에게 필수 불가결한 존재입니다. 왜 그럴까요? 동물에게 가장 필요한 3가지 요소를 의, 식, 주라고 하죠. 입는 일, 먹는 일, 머무르는 일은 생존하기 위한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각각의 특성에 알맞게 의, 식, 주는 약육강식이라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원래부터 타고났습니다. 육식 동물은 초식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발달했습니다. 초식 동물은 지천으로 널려있는 식물들을 먹으며 생을 이어갈 수 있었죠. 날씨에 따라 더운 지역에서는 얇은 털이, 추운 지역에서는 두꺼운 털이 이미 몸에 붙어있었습니다. 잠은 커다란 나무 위나 수풀에서 청했습니다.
자연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동물들
인간은 어땠을까요? 고릴라, 오랑우탄, 침팬지 등 사람과에 속하지만 사람이 아닌 동물을 칭하는 유인원(類人猿)에서 진화해,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조상인 원인(猿人) 중 하나로 300만 년 전에 살았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를 볼까요. 아프리카 세렝게티 초원의 숲속에 살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유인원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긴 팔은 거추장스러웠고, 나무 위에 잠자리를 마련한 것도 마찬가지였죠. 먹는 것 또한 맹수가 사냥해 먹고 남긴 고기를 다른 동물들과 다투며 쟁취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직립 보행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세렝게티 초원 근처에서 큰 화산 폭발이 일어났을 때 두 발로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다른 미지의 세계로 이동할 수 있었죠.
인류의 진화 과정
직립 보행이 가능했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직립 보행 이후 원인에게 다가온 축복은 바로 불의 발견입니다. 불을 이용해 음식을 익히면 질긴 음식이 더 먹기 좋은 상태로 변합니다. 으깨지는 것이죠. 썩은 고기와는 다르게 더 신선하고 안전해져 소화가 잘되고 얻을 수 있는 에너지양도 늘어나서 생존에 훨씬 유리해집니다. 직립 보행, 불의 활용과 더불어 이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축복은 도구의 사용입니다.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라고 칭하는 원인에게서 발견되는 도구 사용의 흔적은 무척 특별합니다. 단순히 도구를 이용한 게 아니라, 만들어 썼다는 거죠. 실제 인류 문명이 생기기 전 가장 오래된 시대를 구석기 시대라고 칭하는 바탕에는 석기를 만들어 생활에 사용한 먼 옛날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바꾼 불의 발견
얀 코시에르, ‹불을 나르는 프로메테우스›, 1636~38, 캔버스에 유채, 프라도 미술관 소장: 그리스 신화에서는 인류가 처음 불을 사용하게 된 역사적 사건을 ‘프로메테우스’라는 신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불을 선물한 덕분에 인류는 거대한 문명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호모 에렉투스가 사용한 좌우 대칭 아슐리안 석기(Acheulean stone tools)
석기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원인이 유인원과 완전히 구별되어 향후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기능했습니다. 돌과 돌을 접촉해 강하게 내리치며 날카로운 면을 만드는 행위를 반복한 끝에 탄생한 석기는 사실 엄청난 노력이 듭니다. 그까짓 돌로 무언가 뾰족하게 만드는 게 뭐가 어렵냐고요? 보기에는 쉽지만, 실제 행동으로 실천하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어렵고 지난한 일이랍니다. 미국 에모리대에서 구석기기술실험실을 운영하는 인류학자 디트리히 스타우트Dietrich Stout 교수가 산 증인이죠. 그는 일반인을 상대로 구석기 만들기 체험 클래스를 운영하는데요. 손도끼라고 부를 만한 수준으로 돌을 내려치며 만들려면 20시간짜리 클래스 5번을 들어야 겨우 하나를 완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좀 더 정교하게 하려면 100시간이 아니라, 300시간이 걸린다고 해요.
인류학자 디트리히 스타우트Dietrich Stout
디트리히 스타우트의 구석기 만들기 워크숍
이렇게 만든 돌도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전문적인 사냥이 가능해집니다. 맹수가 남기고 간 고기나 길거리에 내팽겨쳐진 사체의 썩은 고기가 아니라 인간이 직접 만든 도구로 생존을 능동적으로 이어갈 수 있죠. 게다가 단단한 힘줄로 가득한 고기를 살살 자르거나 두드려서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덤입니다. 죽은 동물에서 가죽을 벗겨낼 수도 있습니다.
직접 만든 도구를 활용해 사냥을 시작한 인류
불을 이용해 고기를 익혀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식생활과 의생활이 자급자족하는 상태가 되는 데에는 도구의 힘이 엄청났습니다. 스타우트 교수는 이토록 경이롭게 진화한 호모 에렉투스에게 별명을 선사합니다. 바로 ‘호모 아티펙스Homo artifex’입니다. 라틴어로 아티펙스는 기교, 창의성, 장인정신을 뜻하는데요. 이 말에서 단박에 떠오르는 단어가 없나요. 맞습니다. 이건 디자인입니다. 무언가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안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겨 실제 물건으로 만드는 행위를 디자인의 일부라고 보지 않으면 무엇이 디자인에 속할 수 있을까요? 즉 인간은 디자인을 통해 구석기 시대를 열었습니다. 디자인이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만일 디자인적 사고가 없었다면? 아마 우리는 지금 존재하지 않았겠죠.
수렵하며 떠돌아다니던 호모 사피엔스는 이제 한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인류에게 문명을 선사한 농업 혁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구석기보다 더 진화된 신석기를 쓰는 이 시대에는 하천이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먹거리를 기르며 자급자족으로 살았습니다. 여기서 예전과 가장 달라진 게 무엇일까요.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게 디자인이라면, 현생 인류의 직계인 호모 사피엔스가 살던 신석기를 대표하는 행위는 바로 건축입니다. 전에는 동굴 등지에 숨어 자연이 만든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살았다면, 이제는 도구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뉠 곳을 창작했습니다. 도구를 만드는 것과 집을 짓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도구는 움직이는 작은 물체이지요. 하지만 집은 오랜 기간 그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여기에는 공간에 대한 인식과 함께 암묵적으로 습득한 중력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집은 무너지지 않게 짓는 게 제1원칙이니까요. 즉 무언가를 ‘구축’한다는 것은 ‘만드는 것’ 그 이상의 행위입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이미 입는 것과 먹는 것을 충족하고, 남은 걸 저장하기 위해 토기까지 만들었던 존재였습니다. 이들에게 남은 건 이제 동굴을 대신한 삶의 거처였고, 이를 스스로 생산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로써 인류의 문명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영국 스톤헨지 인근에 재연한 신석기 시대 주택의 모습.
키프로스 섬의 신석기 시대 원형 주택
신석기 시대 토기
디자인과 건축은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행위이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도와주는 고도의 세련된 행위이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서 디자인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하는지. 300시간의 시간을 들여 돌을 깎는 시절로 되돌아가야 인간의 삶이 최소한으로 보장될 수 있습니다. 비와 바람을 피하고 어딘가에 정착하려면 건축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건축 없는 세상은 수평선의 세계입니다. 높이와 넓이를 지닌 채 볼록 솟아오른 삶의 거처가 존재하지 않는 수평선의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걷고 또 걷는 이동이 필수였지요. 하지만 우리는 가족을 이뤄 어딘가에 정착하고, 이웃과 함께 마을을 이루고, 더 커진 사회와 국가를 이루며 엄청난 속도로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발전은 곧 투자하는 것입니다. 투자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앞으로 내달리는 용기는 바로 기존의 것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존재의 유무에서 결정됩니다. 집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결국 디자인과 건축이 없는 인간의 삶은 엉망진창의 악몽입니다. 아주 아주 오래전으로 후퇴하는 멸망의 전조이지요.
정주하지 않는 수평선의 세계
디자인과 건축이 이룩한 문명
지금은 너무나 흔해서 귀한지 모르는 디자인과 건축은 인류의 진화 속에 늘 함께했던 핵심적인 행위였습니다. 온몸으로 체화되어 공기처럼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으니 늘 당연하고 상식적으로 언제나 존재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디자인과 건축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우리의 삶, 나아가 현생 인류의 삶은 어찌 될는지. 생명의 본질은 생존이고, 생존의 근원은 번식입니다. 이 ‘동물’의 습성을 인간의 말과 사상으로 덮은 건 아마 디자인과 건축이 획득한 가장 큰 성과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재케 하는 뼈대와도 같으니까요.
덧. 이글은 경기문화재단 특강 ‘디자인 탐험을 위한 오디오 가이드’를 위해 작성한 내레이션을 처음으로 지면화한 일부입니다.
Writer
전종현(@harry.jun)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하며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등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 편집위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고, 2021년부터 2023년까지 기아글로벌디자인센터와 함께 «기아 디자인 매거진» 창간 작업과 콘텐츠를 총괄했다. 현재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로 «조선일보» «디에디트»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기고 중이다.
요즘 ‘두바이 초콜릿’의 인기가 상한가를 치고 있습니다. 오직 현지에서만 구할 수 있는 두바이 초콜릿을 대체하는 각종 홈 레서피recipe가 소셜미디어를 장악하고, 심지어 어떤 편의점에서 내놓은 야매 두바이 초콜릿은 지금까지 80만 개 이상 팔렸다고 해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언제부턴가 특정 음식이 뉴스를 도배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음식이 우리의 혼을 쏙 빼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던가요. «비애티튜드»에 ‘밈 원정대’를 연재하는 밈 연구자 김경수 님은 이런 현상이 단순한 식도락 열풍이 아니라, 인터넷 밈이 만들어지고 유행하고 사라지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해요. 특정 제품의 품절이 초래하는 사람들의 욕구, 웨이팅, 대체 레서피 발명, 그리고 온갖 것과 결합한 혼종의 탄생까지 말이죠.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인터넷 밈을 먹는 사회를 살고 있다고요. 허니버터칩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와그작와그작 밈 먹는 사회에 대한 경수 님의 날카로운 분석을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이제야 먹었다. 사실 ‘이제야’보다 ‘드디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석 달 가까이 맹위를 떨치는 ‘두바이 초콜릿’ 열풍에 드디어 합류했다. 이왕 먹는 김에 소셜미디어를 뒤져 유명한 곳을 찾아 세 시간을 기다린 끝에 입수에 성공했다. 과연 두바이 초콜릿의 맛은 달디달고 달디달고 달았다. 초콜릿 단맛이 입에서 채 가시기 전에 찐득한 피스타치오와 카다이프Kadayif가 혀로 밀려들며 고소함이 더해졌다.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었다. 식감 또한 소셜미디어 속 먹방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바사삭 소리가 날 만큼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맛에 대한 평가는 전문가의 몫으로 남겨두고, 두바이 초콜릿을 시식한 이유는 따로 있다. 두바이 초콜릿은 내게 음식이라기보다, 먹을 수 있는 인터넷 밈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두바이 초콜릿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의 소셜미디어에서 유행하는 온갖 음식은 확실히 인터넷 밈과 결을 함께한다. 바야흐로 우리는 인터넷 밈을 먹는 사회를 살고 있다.
소셜미디어를 뒤적거린 곳에서 세 시간 가까이 줄 서서 구한 두바이 초콜릿. 팝업스토어에서 팔았는데 워낙 웨이팅이 길어서 뉴스에까지 떴다. 대기 번호표를 받는 과정부터 세세히 기록하고 싶을 정도로 먹기가 고되었다.
작년 12월부터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두바이 초콜릿의 원본은 두바이 신생 초콜릿 회사 ‘픽스 디저트 쇼콜라티에FIX Dessert Chocolatier’에서 출시한 ‘픽스 히어로즈FIX Heroes’ 시리즈 중 하나인 ‘Cant Get Knafeh of It’이다. 쿠나파Knafeh는 밀가루를 미세한 면 형태로 뽑아내어 기름에 볶은 바삭하고 고소한 식감의 카다이프에 크림이나 꿀을 함께 버무려 팬케이크 형태로 담거나, 취향에 따라 치즈와 견과류를 뿌려 먹는 아랍 전통 음식이다. 특유의 흐물거림 때문에 접시와 숟가락이 없으면 먹기 불편하지만 픽스 디저트 쇼콜라티에는 피스타치오 크림과 범벅이 된 카다이프를 녹색 필링으로 구현하며 그야말로 킬링 포인트를 만들었다.
몇 주 사이 당근에 평균 가격 7만원 상당으로 올라오는 소문의 찐 두바이 초콜릿. 높은 가격에 입이 벌어지지만, 매번 팔리는 게 신기할 따름. ‘장인, 더’에서 파는 한과가 하나에 2만원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양반인가 싶기도 하다. 탐스러운 비주얼이 가히 일품이다.
아랍 전통 디저트 쿠나파는 국가에 따라 다르게 요리한다. 두바이 초콜릿에 응용한 쿠나파는 튀르키예식으로, 쿠나파에 피스타치오를 넣어 요리하는 게 특징이다.
제조사는 틱톡에서 활동하는 유명 디저트 리뷰 인플루언서들과 초콜릿 먹방 영상을 만드는 바이럴 마케팅을 진행했는데, 그중 마리아 베헤라Maria Vehera의 쿠나파 초콜릿 먹방이 수천만 뷰를 달성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자극적인 리액션, ASMR이 연상되는 카다이프 부서지는 아사삭 소리가 틱톡 유저의 눈과 귀를 자극하자 이윽고 쿠나파 초콜릿을 먹는 챌린지가 광풍처럼 불었다. 해당 초콜릿은 두바이 초콜릿이라 불리며 물량이 나올 때마다 두바이 현지에서 1분 만에 동나는 대란이 일어났다. 해외에 판매하지 않는 내수 전용 상품이라 애가 타버린 유튜버 중에는 이 초콜릿 하나 먹으려고 두바이로 날아가는 경우까지 생겼다. 만수르가 도와줘도 구하기 힘든 몸이 된 원조 초콜릿 대신, 집에서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야매 두바이 초콜릿 레서피recipe가 전 세계에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mariavehera257 @fixdessertchocolatier WOW, JUST WOW!!! Can’t explain how good these are! When a chocolate, a dessert and a piece of art meet this is what you get! 🍫 "Can't Get Knafeh of it," "Mind Your Own Busicoff," and "Crazy Over Caramel." Order on Instagram Chatfood or Deliveroo and let me know what’s your FIX? Instagram : fixdessertchocolatier #asmr#foodsounds#dubai#dubaidessert♬ оригинальный звук - mariavehera257
평소 틱톡을 무시(?)하던 내게 제대로 한 방 먹인 먹방의 주인공. 마리아 베헤라가 두바이 초콜릿을 먹는 리액션은 사운드와 표정까지 모든 게 영화적이다. 음식을 준비하고 먹는 과정까지 먹방이라고 생각하던 내게 틱톡 먹방은 먹는 그 순간에만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기승전결이 사라진 방송인 먹방 중에서도 틱톡 먹방의 원초적인 감각은 굉장하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에도 두바이 초콜릿 열풍이 불었다. 석 달 전 즈음부터 카다이프와 피스타치오 스프레드로 두바이 초콜릿을 직접 만드는 쿡방이 온갖 소셜미디어를 도배했다. 얼마 뒤 여러 카페에서 너도나도 수제 두바이 초콜릿을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바이 초콜릿에서 파생한 디저트가 쏟아져 나왔다. 먼저 쿠키에다 피스타치오 스프레드를 바른 카다이프를 올려 구운 두바이 초콜릿 쿠키가 출현했다. 여기에 푸딩, 까넬레Canelé, 피낭시에Financier, 슈 등 온갖 디저트 이름 앞에 두바이 초콜릿이 더해졌다. 피스타치오와 카다이프만 들어가면 어떤 음식이든 두바이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혼종이라 부를 만한 괴상한 조합도 쏟아졌다. 지난주 우연히 들린 카페에서는 두바이 초콜릿 전에 유행한 크루키Crookie에 두바이 초콜릿을 더한 ‘두바이 초콜릿 크루키’를 보았다. 빠른 품절 탓에 먹어보진 못했지만, 존재감만으로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뇌절도 예술’이란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과연 뚱카롱, 마라탕처럼 쭉 인기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흥미롭기는 매한가지다.
이번 글을 쓰는 과정에서 발견한 유튜브 채널. 두바이 초콜릿으로 찹쌀떡을 만들어 먹는 것까지는 이해할 만한데, 김밥까지 만드는 모습에서 계정주의 아득한 창조 정신을 느꼈다. 이외에도 대왕 감자튀김 등 온갖 이상한 군것질거리를 만드는 게 솔직히 마음에 든다. 이 정도는 되어야 ‘이상한’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자매품으로, 불닭볶음면으로 위스키를 담그는 ‘술 익는 집’도 있다.
먹어보고 싶지만, 아직 용기가 안 나는 품목. 집 근처에 있다는 데 눈 감고 한번 시도할지 고민 중이다.
(좌) 모 편의점에서 나온 두바이 초콜릿 유사품에 혹평이 쏟아지며 수많은 네티즌이 이 제품을 마구잡이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편의점에는 재고가 있다는데, 가보면 항상 동나있다.
(우) 이번 글을 쓰면서 온갖 두바이 초콜릿 음식을 시도해 본 입장에서, 좀 괜찮았던 품목. 찹쌀떡의 쫀득함과 카다이프의 바삭함이 한데 어우러져 잊을 수 없는 맛을 낸다.
(상) 두바이 초콜릿 쿠키
(하) 두바이 찹쌀떡
지금까지 나타난 두바이 초콜릿의 유행 패턴은 인터넷 밈이 탄생하고 유행하다가 사라지는 패턴과 매우 비슷하다. 나는 이를 두고 음식이 인터넷 밈으로 진화하는 모습이라고 본다. ‘어떻게 0과 1로 구성된 비트에 불과한 인터넷 밈과 보고, 먹고, 만질 수 있는 음식이 똑같냐?’라고 의문을 던지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우선 인터넷 밈이 생기는 과정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예능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만화든 기존 콘텐츠를 가지고 특정 유저가 이전에 없던 새로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짤방과 움짤로 가져다 쓰는 합성 소스로 가공한다. 합성 소스가 널리 퍼지면 이를 기반으로 일정한 규칙이 통용되는 세계관이 생긴다. 여기에서 다양한 유저가 각자의 풍부한 상상력을 가미해 합성 소스를 재창조하는 행위가 바로 인터넷 밈이다.
이 MV만 보면 마음이 복잡하다. 마라탕과 탕후루를 사달라다가 왜 갑자기 총을 쏘는지 모르겠다. 아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냥 느낌적인 느낌으로 즐기는 콘텐츠라는 생각. 아무말대잔치와 의식의 흐름의 도착지가 여기일까, 싶은 마음도 든다. “잠에 들지 않으면 우리는 춤을 춘다”던 다나카도 힘들었는데…
두바이 초콜릿을 비롯해 약과, 탕후루, 마카롱, 마라탕 등 한국의 소셜미디어를 한바탕 휩쓴 음식은 어떨까? 급격하게 유행하기 전에는 누구나 아주 여유롭게 먹을 수 있었지만, 한번 화제가 되자 수많은 사람이 궁금증을 못 이겨 이를 사 먹기 위해 몰리기 시작했다. 품귀 현상이 생기면 우후죽순 그 빈틈을 노려 레서피를 모방하는 사례가 생겼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원조를 대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레서피에 다양한 조합을 시도하는 괴식(怪食)이 탄생했다. 이쯤이면 대세 맛집과의 유사성은 더 이상 큰 흥미를 주지 못한다. 어떤 음식과 결합해 얼마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지, 얼마나 탐스러운 비주얼을 지니는지, 얼마나 미친 맛인지 여부가 판단 기준으로 떠오른다. 이를 요약하는 ‘자극성’은 바로 밈의 척도이기도 하다.
이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퍼졌을 때 모두가 손사래를 친 기억이 있다. 한국식 디저트인 뚱카롱에 탕후루까지 끼우면 이야말로 진정한 한과가 아닐까?
여러 개의 탕후루를 세트로 묶어 판다고 하면 말이 되는데, 오마카세라니! 오마카세라는 단어가 인터넷 밈에 가깝다고 종종 생각하는데, 이 사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처럼 소셜미디어에서 유행하며 음식이 인터넷 밈으로 진화하는 물꼬를 튼 선례를 꼽는다면 단연 허니버터칩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그전에도 대왕 카스텔라, 벌집 아이스크림, 꼬꼬면, 커피번 등 특정 시기마다 유행하는 음식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허니버터칩 같은 방식은 아니었다. 가령 대왕 카스텔라가 유행할 때는 뉴스에 나오고, 체인점이 늘어나는 정도였다. 대왕 카스텔라를 다른 디저트와 창의적으로 뒤섞는 괴식은 보기 드물었다. 벌집 아이스크림, 커피번도 마찬가지다. 대왕 카스텔라에 피스타치오 페이스트리를 더한 ‘두바이 카스텔라’ 같은 괴식 만들기는 그때만 하더라도 “음식으로 장난치지 말랬지!” 잔소리와 함께 등짝을 후드려 맞아도 싼 일이었다. 요즘처럼 하다 하다 이런 것까지 만드냐고 웃어넘기지 않았다. 탕후루로 오마카세를 차리는 일이란 당최 상상하기 힘들었다.
개인적으로 솔직히 그리운 음식. 벌집을 씹어먹을 때의 끈적함 때문에 충치가 생기기도 했다.
그런데 허니버터칩을 기점으로 한국 식문화의 패러다임이 뒤집혔다. 2014년 8월에 출시해 그해 10월부터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킨 허니버터칩은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한국에 소셜미디어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는 시기와 딱 맞아떨어진다. 인터넷 밈이 디씨인사이드의 하위문화가 아니라, 대중문화의 일부로 편입되는 전환점의 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여튼 허니버터칩은 사실상 홍보를 거의 안 했는데도 소셜미디어에서 화제를 모으며 품귀 현상을 일으켰다. 허니버터칩을 파는 인근 편의점의 재고 현황이 인터넷에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겨우 구해서 먹었다는 인증샷이 쉴 새 없이 올라오다 결국 제조사의 공장 라인이 멈추는 대란까지 발생했다. 생산 중단이 두 달 가까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허니버터칩 대신 허니버터 소스를 바른 온갖 음식을 만들어냈다. 허니버터 닭강정, 허니버터 아몬드 등이 빈자리를 채우면서 허니버터 소스를 바르면 무엇이든 허니버터스러운 것이 되었다. 심지어 음식이 아니라도 부드러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허니버터를 더했다. 허니버터빌이라는 분양 광고와 허니버터팝이라는 앨범까지 나왔으니, 이쯤이면 허니버터의 맛보다 허니버터를 먹었다는 인증샷을 남기려는 욕망으로 허니버터를 그토록 찾은 것 같다. 과감히 말하면, 우리는 허니버터칩 유행 이후로 허니버터칩이 아닌 허니버터라는 기호와 여기서 탄생한 인터넷 밈을 먹은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이 과자가 유행하기 전날에 먹었다. 함께 과자를 맛본 어머니가 그다음 날 다시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킬 정도였는데, 그날로 끝이었다. 이후 반년 가까이 먹을 수 없었다.
밈-푸드 중 처음으로 브랜드로 자리 잡은 경우가 아닐까 싶다. 허니버터아몬드도 평범한 아몬드에 어떤 소스를 얹는다는 레서피를 기반으로 온갖 음식을 만든다는 점에서 밈을 모방하고 있다.
도시 괴담 같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두바이 초콜릿 쿠키를 당근했더니 편의점 직원이 등장했다는 썰이 가끔 올라온다. 이런 비양심적인 행동이 음식을 인터넷 밈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보자마자 한숨이 푹 나왔다. 마치 MZ 유행어를 따라 쓴 광고 카피나 칼럼을 보는 듯하달까. 누군가 한 번쯤 허니버터칩을 정치판에 가져다 쓰지 않았을까 싶어 검색해 보니 정말 정치적 선언에 허니버터칩을 인용한 이가 있었다.
이후 소셜미디어가 고도화되면서 음식은 간편하게 인터넷 밈으로 전환됐다. 작년 약과의 유행을 보라. 약과 좋아하는 사람에게 일찍부터 유명했던 의정부 ‘장인, 더’(舊 장인한과)의 파지 약과에 갑작스레 관심이 쏠리면서 생각지도 못한 품절 대란이 터지고, 약과 입고일을 기다리는 일명 ‘약켓팅’이 일상화되면서, 중고 거래 사이트에 몇 배에 달하는 가격으로 매물이 올라오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여러 언론 보도도 이런 현상에 동조했다. 당시 유행하던 흑임자 맛과 더불어 약과에 대한 관심이 MZ 세대의 문화 현상이라는 뉴스를 찍어냈기 때문이다. 점점 ‘장인, 더’의 약과를 사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득해지자, 아쉬운 마음을 달래려고 다른 약과를 먹거나 대체품을 발견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됐고, 결국 온갖 약과 디저트가 난립하고, 개성주악이라는 비슷한 디저트까지 소환됐다. 소문의 파지 약과를 먹지 못한 헛헛함이 되려 약과 시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유행의 중심에 선 제품을 먹지 못해 온갖 파생품이 생겼다는 점에서 허니버터칩, 약과, 그리고 두바이 초콜릿은 동일 선상에 있다.
아직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당근에는 꾸준히 올라오고 금방 팔리는 품목. 혹여나 독자 중에 이번 에세이가 마음에 든 사람이 있다면 파지 약과를 선물해 주시길. 저는 약과를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현상이 마냥 긍정할 만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영화 ‹기생충›(2019) 속 기택(송광호 분)과 근세(박명훈 분) 가족이 대왕 카스텔라 가게를 차렸다가 쫄딱 망해서, 한쪽은 쿰쿰한 반지하로, 다른 한쪽은 비밀의 지하실로 숨어든 경우를 보라. 유행이 끝난 후의 후폭풍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누가 칼 들고 가게 차리라고 협박했음?”이라는 반응이 대다수니까. 진짜 문제는 허니버터칩부터 시작해 불닭볶음면, 뚱카롱, 마라탕, 탕후루, 흑당, 크로키, 두바이 초콜릿까지 소셜미디어에서 유행하는 음식이 죄다 달짝지근하거나 맵거나 열량이 높다는 점이다. 도파민이 올라가듯, 혈당 지수도 폭발하는 것이다. 농담이 아니라, 불닭볶음면, 엽기떡볶이, 마라탕을 먹다가 위염에 걸린 경험담이 인터넷에 수두룩하다. 탕후루와 관련한 게시물마다 당뇨가 걱정된다는 댓글도 흔히 볼 수 있다.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이런 음식은 대체 왜 미친 듯이 유행하는 걸까? 아마도 인스타그램을 위시한 소셜미디어가 혈당지수와 열량을 매력적으로 시각화하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기생충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대왕 카스텔라 하나로 한국의 유행 패턴과 그 희생자를 포착할 수 있는 감독은 봉준호뿐일 것이다.
그립다. 먹고 싶어도 이제는 파는 곳도 없고, 같이 먹을 사람도 없다.
실제 인스타그램에 리뷰 계정을 자처하는 곳의 피드를 보면 음식점 홍보를 위해 찍은 바이럴 영상이 가득하다. (모두 다른 식당을 리뷰하는 듯하지만, 천편일률적인 취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를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 영상에 등장하는 음식은 항상 서너 명이 먹을 분량에 그릇이 모자랄 만큼 산더미 같은 비주얼을 선보인다. 소고기든, 마라탕이든 음식에 잘잘 흐르는 윤기도 빼놓을 수 없다. 디저트라고 다를까. 온갖 달디단 것이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른 느낌이다. ‘푸드 포르노’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자극적이다. 내가 두바이 초콜릿 영상을 처음 보았을 때 애써 못 본 척하려고 노력했던 까닭도 실은 감각적인 자극이 극한에 달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소셜미디어에 퍼졌던 음식이 시각적인 자극에 집중했다면, 두바이 초콜릿은 청각까지 자극하며 온몸을 휘어잡는다. 두바이 초콜릿을 한입 깨무는 순간은 영화적 효과를 자아낸다. 과장이 아니다. 바사삭 소리가 들리는 순간, 탕후루보다 위험하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두바이 초콜릿에 중독되는 순간, 빠르게 망가지는 내 몸이 떠올랐다.
최근 가장 즐겨 보는 뉴미디어 방송이다. PD가 온갖 먹거리를 소재로 탐사보도와 먹방을 결합했는데, 보고 있으면 시간이 훅 간다. 아니나 다를까 두바이 초콜릿을 먼저 다룬 곳 중 하나다.
음식이 인터넷 밈으로 승화되는 모습을 보면 항상 마음이 복잡하다. 한국인 특유의 피로감과 이어져 있어서다. 한국은 과로와 번아웃의 나라다. 밖에서 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순간, 다른 무엇을 할 만한 여유가 사라진다. 여행과 자기 계발, 다양한 취미를 통해 적당한 자극과 보람을 누리고 싶어도 체력과 심적 여유가 부족하고, 실질적으로 느끼는 보상 또한 기대치를 채우지 못할 때가 많으며 심지어 곧바로 충족되지도 않는다. 이런 세상의 빈틈을 노리는 게 바로 음식이다. 수천 칼로리에 달하는 달달하고 기름진 음식은 감각적인 쾌락을 즉시 제공한다. 이런 관점에서 온갖 이색적인 음식에 대한 탐닉은 도파민이 곧장 차오르는 인터넷 밈과 별 다를 바 없다. 인스타그램에 올려 ‘좋아요’를 받으며 만족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최근에 출간한 책 제목을 빌리면 ‘한국은 혼종의 나라’이다.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 등장한 인면조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인간의 얼굴을 지닌 새 같은 괴상망측한 것을 상징으로 내세울 수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라고. 그러나 2024 파리올림픽 개회식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깨졌다. 프랑스가 혼종의 미학을 끝까지 드러내고야 말았다.
노동으로 가득한 일상을 힘겹게 견디는 사람 중 원하는 대로 삶을 사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렇다고 완고한 사회적 틀에서 벗어나려면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두바이 초콜릿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상술에 속았다고 비난하는 건 번지수를 잘못 찾은 듯싶다. 인간은 음식을 먹을 때만큼은 잠시나마 모든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는 일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고, 이를 증명하는 의식의 발로라면, 두바이 초콜릿처럼 소셜미디어를 휘젓고 다니는 음식은 권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가 선택한 수단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Writer
김경수(@vivre_wasavie)는 영화평론가이자 인터넷 밈meme 연구자다. 학부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화제를 모은 졸업논문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은 지난 6월 동명의 단행본으로 발행됐다. 영화와 인터넷 밈을 동시에 연구하는데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현재 «코아르»에 영화 비평, «여성동아»에 인터넷 밈 비평을 연재하고,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 (FIPRESCI) 한국 지부 정회원이자 인문학 스탠드업 코미디 페이지 ‘인문학적 개소리’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요즘 화제가 되는 인터넷 밈 중에 이걸 빼놓을 수는 없을 거예요. 바로 ‘원영적 사고’입니다. K팝 아티스트 IVE의 멤버로 인기를 구가하는 장원영의 초긍정적 멘털에 대해 놀라움과 존경을 담아 세상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원영적 사고는 마음가짐에 대한 챌린지 성격을 띠며 사회적 현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맞춰 각종 유명인의 어록에 기인한 ‘A적 사고’도 함께 증식 중입니다. 요즘은 펠리컨까지 가세했어요. 재미있는 게임처럼 사고 과정을 다르게 바꿔보는 A적 사고의 인기에서 «비애티튜드»에 ‘밈 원정대’를 연재하는 우리의 밈 전문가, 김경수 님은 우리 사회에 내재된 롤모델의 변화를 포착합니다. 성공한 기성세대가 롤모델 리스트에서 증발하고 우리 삶에 맞는 새로운 롤모델, 냉소와 이익 관계에서 벗어난 롤모델의 부상을 응원하는 건데요. 원영적 사고와 롤모델이라니, 이 엄청난 이야기가 어떻게 엮일 수 있을까요? 이번 아티클에서 꼭 확인해 보세요.
설렜다. 인터넷 밈에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는 기분은 오랜만이다. 별 5개짜리 만점 영화를 마주한 기분이랄까. 최근 소셜 미디어를 강타한, (여러분도 너무나도 잘 아는) ‘원영적 사고’의 인기가 심상찮다. 뉴스는 물론 광고와 예능, 신문, 칼럼에 이르기까지 온갖 곳에 출몰 중이다. 인기가 시들 법도 한데, ‘희진적 사고’, ‘동원적 사고’, ‘우희적 사고’, ‘펠리컨적 사고’ 등 ‘~적 사고’라는 표현으로 진화해 2차 유행이 시작되는 중이다. 이 에세이가 발행될 즈음이면 원영적 사고는 국민 인터넷 밈이 되어있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분들을 위해 원영적 사고를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원영적 사고는 어떠한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초긍정적 사고(Super Positive Thinking)를 뜻한다. K팝 아티스트 IVE의 멤버, 장원영이 스페인의 한 빵집에 들른 모습을 찍은 영상에 뿌리를 둔다. 그는 먹으려던 빵이 눈앞에서 동났는데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면 가게를 나갔을 상황인데도 오히려 빵이 품절된 덕에 갓 구운 빵을 먹게 되어서 행운이라고 말한다. “행운의 여신은 나의 편”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해당 영상은 소셜 미디어 채널에 공유되며 소소하게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알아두어야 할 사실 하나. 이미 오래전부터 아이돌 팬 사이에서 장원영은 긍정적인 마인드로 유명했다. 딸기를 두 손에 쥐고 먹는 모습을 포함한 다수의 영상에 상상 이상의 악플이 달렸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나는 나고, 너는 너고” 하는 식인데, 솔직히 존경스럽다.
단언컨대 장원영은 천상 아이돌이다. 이 영상 하나만 보더라도 그 이유를 몸소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어디를 가든지 산뜻한 분위기를 만들며 주위를 사랑스러움으로 물들인다. 인공적으로 제작된 사랑스러움이 아니다. 그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서 생기는 힘이다.
장원영에게 쏟아지는 악플이 심하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악플로 인한 소중한 아이돌의 죽음을 여러 번 본 적 있기에 걱정되었다. 장원영은 다행히 잘 대처하고 있는 듯하다. 쇼펜하우어는 타인에게 화내는 것은 돌에다 대고 화내는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 “나는 나고, 너는 너야”라는 태도가 그 느낌이 아닐까.
영상 원본이 인터넷 밈으로 가공되기 시작한 건 한참 뒤의 일이다. K팝 엔터테인먼트 플랫폼 ‘유니버스UNIVERSE’에서 운영하는 실시간 채팅 서비스 ‘프라이빗 메시지’에서 어떤 일이 생기든 긍정적인 결과에 집중하는 장원영의 멘털 넘치는 대화를 두고, 한 X(舊 트위터) 유저가 이를 유쾌하게 정리한 게시물이 트리거 역할을 했다. 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긍정적 사고와 부정적 사고를 쓴 다음, 이 둘을 넘어서는 원영적 사고를 적어 내려갔다. 만약 물 반 컵이 남았다고 가정하자. 긍정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물이 반 컵이나 남았다고 생각하고, 부정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물이 반 컵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한다. 근데 원영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다 먹기엔 너무 많고 덜 먹기엔 너무 적고 그래서 딱 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완전 행운이라고 반응하는 것이다.
전설의 원영적 사고 원본이다. 본문에 밝히지 않았지만, 원영적 사고가 유행하기 전 비슷한 밈이 유행한 적 있다. 침착맨의 ‘오히려 좋아’다. 어떤 상황에 닥치든 ‘오히려 좋아’라는 마음으로 뒤집어 생각하면 잘 살아진다는 것이다. 침착맨의 밈이 고도로 발달한 것이 원영적 사고라 생각한다. 침착맨의 ‘오히려 좋아’는 긍정적, 부정적 사고라는 대비되는 사고를 이야기하지 않은 탓에 금방 잊혔다. X(트위터) 발 인터넷 밈이 그러하듯 이러한 구술적인 밈은 텍스트로 새겨져야 더욱 파급력이 생긴다.
여기서 인터넷 밈은 일종의 놀이라는 사실을 되새겨보자. 원영적 사고 짤방을 만든 익명의 유저 덕분에 우리에게는 A라는 특정 상황을 긍정적 사고, 부정적 사고, 원영적 사고라는 틀에 따라 가공할 수 있는 규칙이 생겼다. 문장 마지막에 유저가 더한 ‘럭키비키잔앙’는 후렴구 역할을 하며 중독성을 더한다. 이 놀라울 만큼 단순한 규칙은 원영적 사고에서 가장 감탄스러운 점이다. 규칙을 공유하는 사람 누구라도 특정 상황을 원영적 사고로 가공할 수 있다. 단점이나 문제를 장점으로 승화하는 발상의 전환만으로 충분하다. 원영적 사고를 쓰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불행하더라도 부담 없이 놀이로 승화시킨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습관이라도 되면 성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어쩌면 원영적 사고 밈이 초긍정적 사고를 기르는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기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원영적 사고에 대해 정신 승리라고 비아냥거리는 반응은 솔직히 동의하기 힘들다. 최악의 상황을 외면하는 게 아니라, 그마저 긍정하자는 태도가 원영적 사고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인터넷 밈은 어른이 쓸 때 어색해진다. 인터넷 밈의 룰이 복잡해서다. 어른이 인터넷 밈을 따라잡으려면 “세상엔 저런 것도 있구나”하는 개방된 태도와 세련된 감각이 필수다. 원영적 사고는 그 장벽마저 무너뜨린다. 원영적 사고는 교수가 써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쉬운 인터넷 밈이다.
우리는 무한 경쟁이 일상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중이다. 뒤처지는 순간 낙오자가 된다는 개인의 불안감을 동력 삼아 사회가 굴러간다. 자기 계발은 그 불안감을 파고든다. 업무 외 휴식 시간까지 최대한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나아가 시간뿐 아니라 인간관계까지 손해와 이익을 중심으로 판단하며 관리 대상으로 삼는다. 원영적 사고는 손해와 이익의 관점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모든 상황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즉, 손해와 이익, 슬픔에서 벗어나 긍정적인 사고를 연습하는 기회가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원영적 사고와 비교할 만한 명언이 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아포리즘aphorism이다. 장원영이 니체 같은 위대한 철학자와 동격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장도연이 진행하는 ‹살롱드립 2›에서 그는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와 『논어』를 읽는 등 독서를 즐긴다고 말한 바 있다. 장원영의 마음가짐을 따라가다 보면 철학적 사유에 우연히 다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이번 에세이를 쓰는 동안 즐거웠다. 장원영이라는 인간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흥미진진한 모험이었다. 장원영과 나 사이의 접점을 하나씩 발견할수록 언젠가 그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생각이 솟아올랐다. 장원영이 인용한 구절도 내가 사랑하는 구절 중 하나다. 냉소와 걱정, 근심에 사로잡히느니 그마저 긍정하자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중이라 더욱 그러하다. 살아갈수록 타인을 미워하는 마음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중이다.
원영적 사고는 변주 방식마저 흥미롭다. 희진적 사고와 동원적 사고가 대표적이다. 희진적 사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악착같이 살자는 마음이다. 어도어의 민희진 대표가 얼마 전 기자회견에서 말한 “아니, 죽긴 내가 왜 죽어? 억울해서 누구 좋으라고 죽어?”라는 발언을 모티브로 삼는다. 부당함에 맞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인상적이다. 동원적 사고는 배우 강동원이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해 “20~30대 때는 ‘이게 왜 안 되는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40대가 되니까 여유가 생겨서 ‘그치 원래 안 되는 거지, 내가 좀 더 열심히 해볼까?’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것을 가공했다. 원영적 사고가 활기 넘치는 느낌의 초긍정적 사고라면, 동원적 사고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책임과 여유를 지닌 긍정적 사고다. 비슷한 예로 우희적 사고도 있다. 배우 천우희가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어우, 나는 나중에 얼마나 잘되려고 이럴까?”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에서 기인한다. 최근 유행하는 A적 사고의 주인공은 펠리컨이다. 대상이 뭐가 됐든 간에 일단 부리부터 쫙 벌리고 카피바라부터 기린까지 온갖 것을 삼키려 하는 펠리컨 사진에 ‘펠리컨적 사고: 일단 시도함’이라고 적어둔 것이다. A적 사고는 이제 원영적 사고를 벗어나 그 스펙트럼을 확장하는 중이다.
완벽주의 성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깜냥이 안 되는 일까지 억지로 하다가 혹 실패라도 하면 나를 책망했다. 이제는 안다. 세상엔 내 깜냥으로 안 되는 것이 한가득하다. 강동원처럼 잘 생겨지는 것이 그중 하나다.
옛날에 우희적 사고로 살던 지인과 대화한 적 있다. 내 인생 최악의 시기를 보내는 중이었다. 나는 그 말이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니까 씁쓸하다. 그 말을 조금이라도 일찍 마음에 새길 걸 후회가 밀려온다.
펠리컨적 사고는 진짜 유쾌하다. 이 밈이 청소년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것이 인상 깊다. 한국의 청소년은 입시지옥에서 자유롭지 않은 존재니까. 미디어 속 청소년은 문해력이 부족한 스마트폰 중독자로 그려진다. 유행하는 인터넷 밈 속의 청소년은 정반대다. 그 어떤 세대보다 자유분방하다. 부딪히고 실패하는 것이 성장의 과정이라면 나는 그들이 잘 성장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A적 사고가 유행할 때마다 A가 네티즌의 롤모델로 부상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A적 사고의 주인공은 보통 연예인이거나 동물이다. 기업가, 정치인, 작가, 교수 등 고전적인 롤모델은 철저히 외면받는다. 나는 민희진의 ‘개저씨’ 발언에 대한 강력한 사회적 호응과 A적 사고 밈의 유행이 결을 같이한다고 생각한다. 개저씨라는 표현은 이해관계와 조직을 빙자해 본인의 사적 욕망에 충실한 기성세대 남성 전반에 날리는 일침이다. A적 사고는 이보다 더 급진적이다.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섭다’라는 말이 있지 않나. 개저씨가 비난이라면, A적 사고는 기성세대에 대한 무시에 가깝다. A적 사고에 열광하는 사람들에게 롤모델로 간주할 만한 참어른은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아이돌과 배우, 동물을 롤모델 삼아 거기서 삶의 좌우명을 발견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사실 아이돌과 배우를 롤모델로 삼는 경우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펠리컨 등의 동물까지 롤모델의 범위에 들어오는 건 차원이 다르다. ‘나무늘보적 사고’ 등 예상치 못한 온갖 A적 사고가 쏟아져 나올수록, 고전적 롤모델의 위상은 현저히 떨어진다. 펠리컨과 나무늘보보다 본받을 점이 없는 존재라는 뜻이니까. 결국 A적 사고는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욱더 은밀하고 강력한 저항이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A적 사고의 유행은 희망적이다. 우리 삶에 더욱 가까이 있고,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롤모델을 물색하려는 동경심의 발호이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진심 어린 동경이야말로 분노와 냉소로 가득한 요즘 사회에 해독제로 기여할 수 있다. 최근 주기적으로 거론되는 자기계발서를 살펴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분노로 가득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000억 원대 자산가라고 알려진 익명의 작가 세이노는 자신의 글을 모은 『세이노의 가르침』에서 분노를 추진력으로 삼아 세상에 ‘Say No!’라고 말하라고 가르친다. 매일 알약 14개를 먹는 정신질환자이자 월 3500만 원을 번다는 30대 자산가 손수현이 쓴 『악인전』은 자신의 모자란 처지에 분노하는 분노 일지를 쓰라고 권유한다. 분노와 열등감이야말로 성장의 동력이라는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냉소 또한 보편적인 정서가 되고 있다. 자기계발서 작가 박세니가 미는 광고 카피 ‘가난은 정신병입니다’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유튜브를 휘젓고 다녔다. 차라리 이 광고는 솔직하기라도 하다. 더욱더 심각한 것은 다정한 척하는 냉소다. 인스타그램에서 바이럴되는 책 광고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하는 사람은 걸러라’, ‘~하는 남자를 만나라’ 따위의 문장이 그러하다. 가난하거나 학교폭력과 가정폭력 등 정신적 트라우마를 입는 등 ‘갓반인’의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에 대해서 인간관계에서 제거할 대상으로 삼고 손절을 권하기도 한다. 이때의 손절은 ‘손해를 끊는다’라는 뜻이다. 사람을 이해관계의 일부로 보기 때문에 타인을 존중하며 무언가를 배우려는 태도가 결여돼 있다.
인스타그램 책 바이럴 광고의 전형적인 문구다. 분명 다른 책을 광고하는데 카드 뉴스 내용은 전부 거기서 거기다. 잘 배운 사람은 자기 객관화가 되어 있으며 인간관계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등 그럴듯한 말로 가득하다. 솔직히 사람이 모두 그리 깔끔하게 살지는 않는다. 가끔은 자의식 과잉에 사로잡히기도 해서 흑역사를 만들고, 소중한 사람을 보려고 비행기에 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손해와 이익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자아와 정체성이 복잡한 만큼 둘 혹은 그 이상이 만나는 인간관계는 더욱 복잡하다. 피해와 가해, 사랑과 증오가 오가며 생기는 정(情)이 사라져가고 있는 세상에 일조하는 요소가 저런 입에 발린 말이라 생각한다.
호구라는 단어를 더는 쓰지 않는다. 호구는 인간관계를 손해와 이익이자 교환 관계로 보는 단어 중 가장 부정적이다. 호구라는 단어에는 진심으로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손해와 이익으로나마 그 불안을 수치화하려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예찬』에서 사랑의 개성 가운데 하나를 공산주의라 보았다. 사랑하는 이가 모두 좌파로 전향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본주의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순간, 사랑에 진입한다는 말이다. 사랑은 거리를 걷다가도 사랑하는 사람이 애정하는 캐릭터 인형을 급작스레 사고 싶은 사소한 마음으로 유지된다. 무조건 손해인 짓이다. 호구는 사랑의 기본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A적 사고는 다르다. 타인은 물론, 펠리컨 같은 대상으로부터까지 삶의 태도를 발견하고 배우려 한다. 더불어 이해관계에 충실한 기성세대의 삶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나만의 삶을 발견하려 노력한다. A적 사고에 담긴 겸손함과 긍정적인 사고에 더 나은 나로 살아가려는 이 시대의 진정한 자기 계발이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이유다. 긍정적인 생각을 할수록 뇌에서 나오는 주파수가 긍정적인 물질을 끌어온다고 주장하는 사이비 종교적 자기 계발이 아니라, 한층 더 성숙한 나를 위해서 인생을 마주하는 마음가짐을 수련하는 자기 계발 말이다. 세상이 고통과 무의미로 가득 찼다고 말하는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와 세상을 초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원영적 사고가 동시에 유행하는 혼란스러운 시대. 이런 방황이 더 나은 롤모델을 물색하는 과정이라면 오히려 괜찮을 듯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쨌든 각자의 현재를 되돌아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A적 사고가 지금보다 훨씬 많이, 다양하게 쏟아지기를 바란다. 그만큼 우리에게 성장의 기회가 더욱더 활짝 열릴 테니까.
덧. 김경수 님의 단행본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발행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 김경수 지음, 필로소픽
Writer
김경수(@vivre_wasavie)는 영화평론가이자 인터넷 밈meme 연구자다. 학부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화제를 모은 졸업논문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은 지난 6월 17일 동명의 단행본으로 발행됐다. 영화와 인터넷 밈을 동시에 연구하는데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현재 «코아르»에 영화 비평, «여성동아»에 인터넷 밈 비평을 연재하고,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 (FIPRESCI) 한국 지부 정회원이자 인문학 스탠드업 코미디 페이지 ‘인문학적 개소리’의 운영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