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오브서울: 실리카겔 ‹POWER ANDRE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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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for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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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nterview

다채로운 대화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피스오브서울Piece of Seoul’은 대중음악평론가 김윤하 님이 최근 새롭게 발매한 한국 대중음악 앨범 중 가장 인상 깊은 피스를 꼽고, 해당 뮤지션과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입니다. 피스오브서울에서 피스는 조각(piece)이면서 동시에 평화(peace)를 뜻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태어난 새로운 음악의 조각과 여기에서 길어 올린 마음의 평화를 뮤지션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보세요. 여섯 번째 피스의 주인공은 지금 ‘한국 록의 분명한 미래’라고 불리는 밴드 실리카겔입니다. 얼마 전 ‘2024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악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는데요. 그들이 7년 2개월 만에 2CD로 발표한 정규 2집 ‹POWER ANDRE 99›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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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춘추, 김한주, 김건재, 최웅희

2022년 8월, ‘NO PAIN’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지자, 아무도 ‘실리카겔Silica Gel’을 막을 수 없었다. 싱글 커버 이미지처럼 힘껏 공중으로 뛰어오른 이들은 자신에게 불어온 바람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계속 가속도를 붙였다. 다행히 10년여간 다져놓은 체급이 기꺼이 감당할 만한 속도였다. 2023년 3월 싱글 ‘Mercurial’, 4월 EP ‹Machine Boy›, 8월 다시 한번 싱글 ‘Tik Tak Tok’을 발표했고, 한국 땅에 존재하는 페스티벌을 모조리 도장 깨기 하겠다는 기세로 무대에 서고 또 섰다. 일 년을 꽉 채워 각종 무대를 섭렵한 이들은 11월 단독공연 ‘POWER ANDRE 99’를 열었다. 아직 발표되지도 않은 새 앨범의 신곡들을 수록 순서대로 부르는 과감한 구성이었다. 티켓은 순식간에 매진됐고, 사흘간 이어진 공연에 다녀온 이들은 온통 호평을 쏟아냈다. 그 긴 여정의 마지막에 정규 2집 ‹POWER ANDRE 99›가 탄생했다. 첫 정규 앨범 ‹실리카겔› 이후 7년 2개월 만이었다.

CD 2장에 18곡을 넣은 방대한 앨범 볼륨은 어쩌면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들이 겪어온 유무형의 경험 전부를 아우른 결과일지도 모른다. 멤버 전원이 병역의 의무를 마치자 곧이어 팬데믹이 터졌다. 그 사이 이들의 영상 아래 달리던 ‘귀 썩는 음악’이라는 댓글은 어느새 마치 마법처럼 ‘밴드 붐이 왔다’로 바뀌었다. 이 모두가 정말 마법일 리 없다. 그렇다고 단지 버티기만으로 이루어질 리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규 2집 ‹POWER ANDRE 99›는 단순히 앨범이라기보다 그러한 변화에도 한결같이 음악과 동료를 진지하게 대하던 ‘실리카겔 정신’이 음악으로 승화한 결과물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이들의 음악은 여전히 현란하고 광폭하며, 동시에 소박하고 따뜻하다. 호사가들이 말하는 장르를 떠나서, 밴드라는 형태와 음악이라는 매체로 시도할 만한 각종 실험체가 앨범 안에 꿈틀거렸다. 앨범의 방대한 서사를 이끄는 미지의 존재 ‘머신 보이Machine Boy’, 브레인스토밍 페이지를 통해 그를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재창조하는 팬들과의 상호작용까지, ‹POWER ANDRE 99›는 우리가 음악으로 경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선사했다. 말만 번지르르한 세계관이나 콘셉트가 아닌, 단단한 현실과 상상 사이 어딘가 ‹POWER ANDRE 99›가 위치한다. 누구보다 열린 자세로, 누구보다 견고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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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카겔 정규 2집 ‹POWER ANDRE 99› 커버

‹POWER ANDRE 99›를 발매한 지 두 달이 조금 넘었어요. 앨범이 발매되기 전 2023년 내내 EP, 싱글 발매에서 공연까지 전력 질주하는 기간이 있었고요. 앨범 발매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이나 느낌에 대해서 기억나는 대로 알려주실 수 있나요?

춘추: ‘휴! 나왔다!’ 사실 발매할 때까지 엄청 힘들었어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시기고, 음반이었기 때문에. 성숙한 모습은 아니지만 ‘잘해야 해!’라는 생각이 너무 커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은 후련해요. 다음 활동에 대한 기대감과 열정이 점점 커지고 있는 시기입니다.

웅희: 저는 사실 앨범 나오고 뮤직비디오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 더욱더 긴장 상태였어요. 좋은 기분은 아니었던 기억이…

건재: ‘아- 나왔다!’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좀 더 촘촘히, 좀 더 잘, 좀 더 신경 쓸 수 있는 부분을 더 챙길 수 있었다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한주: 한차례 종업식을 치러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Machine Boy’ 및 ‘POWER ANDRE 99’ 캠페인을 주파하는 감각에 드디어 제동이 걸리는구나. 그리고 자연스레 다음 작업에 대한 생각이 들었죠. ‹POWER ANDRE 99› 후에 어떤 도약을 할 수 있을지 각력(脚力)을 비축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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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정말 쉴 틈 없이 달린 것 같아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요. 힘든 순간은 없었나요?

춘추: 정말 힘들었죠. 공연하는 건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다만 음반 일정이 조금 타이트해서 그 안에 모든 걸 넣는 데에 감정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게 조금 힘들었던 것 같네요.

웅희: 물론 힘들긴 했지만, 저는 빠르게 달려 나가다 보니 음미하면서 가지 못했던 순간들이 아쉽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고속 열차를 타면 풍경이 안 보이죠.

건재: 의외로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은 많지 않았고요, 음악가가 음악을 만들고 공연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굉장히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반면에 많은 자리와 기회들을 습관적으로 건조하게 행하지 않고 싶어서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했거든요. 그런 거에 스트레스를 좀 받았던 것 같아요.

한주: 거짓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멤버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곡을 써내면서 프로젝트의 초반 기획에 힘을 싣고자 노력하는 포지션이다 보니 그 후의 과정을 떠넘기는 듯한 부채감도 상당하고요. 멤버들의 능력을 신뢰하는 만큼 의지하는 바도 크기에 작업 과정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엿볼 때마다 정말 괴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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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수많은 무대 가운데 제일 기억에 남는 무대가 뭐였는지 궁금해요.

춘추: 단독 공연 ‘POWER ANDRE 99’의 첫날이었던 거 같아요. 거의 대부분이 신곡들로 이루어진 공연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반응들이 기억에 남았어요. ‘거봐. 좋잖아’라는 생각이 딱 들면서, 공연 당시에도 진행하고 있던 앨범 후반 작업에 대한 걱정들이 많이 사라졌죠.

웅희: 뮤직비디오 촬영이 생각나네요. ‘Realize’ 뮤직비디오 촬영 날 섭외된 관객분들과 슬램도 하고 크라우드 서핑도 하고 내가 무슨 짓을 벌인 건가 생각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즐거웠다는 생각이 들어요.

건재: 이게 무대라고 하기엔 조금 다를 수도 있을 텐데요. 수많은 무대도 좋았지만, 그 무대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가져온 곡을 쓰는 시간, 회의와 제작… 그렇게 지나간 숱한 밤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아요.

한주: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바뀌곤 하는데요. 요즘엔 산산기어가 주최한 헨즈 클럽 파티에서 공연했던 때나 신도시에서 카운트다운 공연을 했을 때가 떠올라요. 연주자인 실리카겔과 관객인 분들이 서로 엄청난 기운을 부딪쳤던 게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인가 봐요. 서울 어딘가 클럽에서 게릴라 공연을 열면 다시 그런 상황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많이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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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카겔 라이브를 떠올리다 보니 갑자기 궁금해지는데요, 춘추 님은 ‘Tik Tak Tok’ 후반부 기타 솔로 연주할 때 보통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거의 접신 수준이잖아요. (웃음)

춘추: 실리카겔 곡 중에 기타 솔로라고 할만한 구간이 있는 곡들이 몇 곡 있어요. 대표적으로 ‘Desert Eagle’의 후주라던가, ‘9’의 기타 솔로처럼요. ‘Tik Tak Tok’은 그 곡들과는 다르게 즉흥적으로 녹음했고, 처음부터 즉흥적인 구간으로 의도적으로 계획했던 만큼 라이브 때마다 자유롭게 연주하곤 합니다. 저도 즉흥연주를 정말 좋아하고, 많이 공부한 분야이기도 해서 항상 즐겁고 기대되는 부분이에요. ‘Tik Tak Tok’이 있는 날이면 무대에 오르기 전에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합니다. ‘어떤 라인으로 시작할까? 저음부터 밀어낼까? 고음부터 연주할까? 단선율로 시작할까? 코드로 시작할까? 노트를 처음부터 많이 뿌릴까? 길고 적은 음으로 시작할까?’ 등등요. 연주 중에는 코드와 음, 음정과 물밀듯이 밀려오는 강력한 음의 방향성에 집중하게 돼요. 그러다 솔로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멜로디로 나설 때 그제야 멤버들을 보죠. 기다리고 있었다는 그 표정에 매번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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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햇수로 결성 10년 차가 되었습니다. 요즘 드물게 긴 시간, 단계별로 성장한 밴드라고 생각하는데요. 밴드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터닝포인트라고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춘추: 다른 뮤지션들의 음반 작업이나 개인 작업에 참여하며 기타리스트에서 프로듀서의 위치가 되어 가던 순간이 결국 실리카겔에서 제가 한 단계 성숙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한 명의 뮤지션으로서의 기량을 높인 과정이었습니다.

웅희: 저는 역시 베이시스트로 파트가 바뀐 시점이 터닝포인트였습니다. 그때부터 밴드에서 맡아야 할 음역대도 달라졌지만 흔들리지 말아야 할 역할을 맡다 보니 저의 인격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의 다짐이 지금의 실리카겔에 영향을 많이 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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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재: 저는 분명히 이들에게 영향을 받았고, 또 계속해서 받고 있어요. 그만큼 저도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을 테고요. 터닝포인트라고 콕 집어 이야기해 드리기는 어렵지만 좋은 영향을 기다리는 사람보다는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계속 든다는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제부터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러나 그 마음이 큰 터닝포인트였을 거라는 확신이 드네요.

한주: 개인적으로는 수적 지표가 늘어나고 밖에서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많아지면서 ‘뭔가 바뀌었구나’ 바로 체감하지만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성공적인 모델에 안착했다는 감각은 전혀 없어요. 그에 대한 욕심도 없고요. 그래서인지 터닝포인트라 여길 지점을 떠올리면 흐릿한 느낌뿐이에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무대에 오르고 스튜디오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상황이 달라졌다 싶은 거죠. 다만 ‘NO PAIN’ 발매쯤부터 주변 시선의 변화가 빨라진다는 느낌은 받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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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성장한 만큼 위기도 많았을 것 같아요. 한주 님은 ‘NO PAIN’을 개인적으로 굉장히 어려웠던 시절 작업한 곡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요.

한주: 사실 지금을 포함하여 쉬운 상황은 없지만, ‘NO PAIN’은 확실히 그런 것들을 밀어내고자 만든 곡이란 느낌이 크죠. 어찌 보면 신화 속 이카로스Icarus 같은 느낌도 있어요. 태양에 닿고자 ‘NO PAIN’을 외치지만 날개가 녹으면 ‘Mercurial’에 어울린달까요. 하지만 ‘NO PAIN’은 날개가 녹아도 우리의 의지는 어느 지점에서 하나가 된다는 이야기에 가깝다고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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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PAIN› 커버

‘피스오브서울’은 앨범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인터뷰인데요. 이번에는 사전 정보를 찾을수록 오히려 어려워지는 지점이 있어요. 멤버들 모두 앨범 관련 인터뷰나 방송에서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기도 했고요. 생각해 보면 이 기조는 실리카겔의 활동 전반을 둘러싼 어떤 ‘정신’이기도 한 것 같아요. 자신들의 결과물에 대한 해석을 ‘열어 놓는다’라는 건 밴드 실리카겔이 음악이나 창작물을 대하는 태도일까요?

춘추: 명확한 의미나 사상이나 뜻을 전달하고 싶지 않아요. 멤버들끼리도 취향이 너무나 달라서 뭘 정하든 지금도 만장일치가 나오는 경우가 잘 없어요. 저희끼리도 좋아하는 게 이리 다른데 어떻게 우리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뜻과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까 싶어요. 그래서 저는 해석의 여지를 열어 놓고 싶다는 표현보다, 추상적이어도 좋으니 어떤 느낌을 즐겼으면 해요. 뭔가를 보거나 듣거나 맛보았을 때 ‘!’ 하는 그 찰나의 순간이 있잖아요. 그 느낌을 즐기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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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희: 저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때 처음 접하고 펼쳐지는 다양한 세계,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상을 너무나도 즐겨요. 그래서 그런 기분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게 커요. 근데 최근엔 조금씩 의도를 설명드리는 것도 재미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건재: 분명히 기초, 근원에는 정확한 생각이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걸 규정하면 아무래도 재미있는 상상력이나 펑션이 나올 가능성을 좁히는 행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느끼는 건, 저희는 활짝 열려있지만, 또 분명히 닫혀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는 점이에요. 그런 양면성 덕분에 저희도 아마 똑바로 규정하거나 재단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해요

한주: 이런 질문에조차 열린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네요. 실리카겔은 꽤나 다자적인 그룹이에요. 결성 때부터 명백한 리더 체제로 운영되기보단, 구성원 각각의 기능이 원활하게 작동하며 자연스레 형성되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방식이었고요. 그만큼 각 모듈의 해석을 방임적으로 두고, 합쳐질 때의 임의적인 결과물을 즐겁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만드는 음악이나 세계관적 내용 또한 느슨하게만 합의하고 각자의 해석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어요. 작품을 공개한 후에도 감상하는 분들을 저희의 다자주의적 평행선에 두면 좋겠다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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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치열할 만큼 꼼꼼한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게 실리카겔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음악도 음악이지만 외적인 면도 그렇죠. 그렇게 모든 게 열린 ‹POWER ANDRE 99›의 첫 곡 ‘On Black’을 1집의 ‘비경’과 같은 코드로 흡사하게 작업한다거나, 오랜만에 금의환향한 ‘헬로루키’ 축하 무대에서 수상 당시 마지막 곡으로 불렀던 ‘9’를 다시 부른다거나 하는 것들요. 실리카겔이 다양한 결과물을 만들면서 가장 ‘대충 하는’, 즉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부분과 가장 ‘꼼꼼하게 작업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춘추: ‘대충’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 명확한 의미나 내용을 전달하는 것보다 더 쉽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일은 듣는 사람에게 확실한 무언가를 넣는 게 아니라, 다양한 감상이나 인상의 느낌을 떠올리도록 더욱더 치밀하고 디테일한 요소를 넣는 작업으로 연계돼요. 의도적으로 우리가 전달할 내용을 빼는 게 아니랍니다. 저희는 ‘이 정도는 비워놓자’라고 작업하는 부분은 단 한 군데도 없어요. 모든 것에 의도가 있고, 그것이 해석적인 공백이 되도록 만드는 것 또한 실질적인 작업 과정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웅희: 이번 ‹POWER ANDRE 99›의 꼼꼼한 부분은 역시 사운드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운드는 해석의 여지가 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반면 제가 만든 ‘Ryudejakeiru’의 뮤직비디오는 해석이 여러 갈래로 파생되더군요.

건재: 아마 저희가 가장 대충 하는 부분은 본인의 건강 아닐까 해요. 적어도 무언가를 만들면서 ‘대충’을 겨냥하고 행했던 적은 제 기억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대충 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이 자리를 빌려 사과를 드립니다. 저 단어를 떠나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부분에 주안점을 둔다면 짧게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을 장황하게 늘려서 전달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저게 또 대충 하는 느낌은 아니거든요. 엄청 꼼꼼하게 이것저것 연결해 본다는 말이죠. 이 답변이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웃음)

한주: 해석의 여지를 남긴 듯한(대충 혹은 느슨하게 보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업들은 대체로 ‹POWER ANDRE 99›처럼 거시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프로젝트에서 더욱 그렇지 않나 싶네요. 그 안에 미시적으로 구성된 모든 요소는 가장 꼼꼼하게 작업하는 부분이라 답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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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의 여지를 열다 열다 ‹POWER ANDRE 99›의 브레인스토밍 페이지까지 만들었어요. 이 아이디어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한주: 앨범에 있어 여러모로 감상하신 분들의 해석이 열려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걸 실천할 장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에 채무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러다 발견한 서비스예요. 실리카겔이 작업적으로 실천하는 탈중심화를 그대로 열어둘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겨 오픈하게 됐어요. 아이디어는 멤버들이 제출했지만, 준비하는 데는 저희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크루가 힘을 많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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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ANDRE 99› 브레인스토밍 페이지 © 실리카겔 공식 인스타그램

뇌가 어마어마하게 커져 있더라고요. (웃음) 혹시 직접 확인한 브레인스토밍 결과 중에서 가장 기발하거나, ‘우리 생각을 간파했다!’ 싶은 내용이 있었다면 알려주세요.

춘추: 재미있던 것 중 하나가 있어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뭔가 갑자기 곡의 내용을 설명하는 글에(무슨 곡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Mercurial’이었나?) 개구리가 등장해서 뭐 ‘○○○은 개구리였다’ 이런 글이 있었거든요. 거기에 그 개구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웅희: 간파한 부분도 많다고 생각하지만, 저희가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감상평 혹은 해석이 정말 많고 재밌어요. 저는 ‘PH-1004의 신체 개조라는 트렌드와 자폭 시스템’이라는 파트가 너무 재밌었습니다. 하염없이 읽게 돼요.

건재: 직접적인 내용 한 줄을 꼽기보다는, 살아가면서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꼭 해줄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 멋대로 힘내자고 하지 않는다든가, 상상을 만들어 대입해 해소해 본다든가, 응원이나 위로하는 그런 것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것들요. 우리가 그 안에서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한 ‘한 덩어리’라는 느낌이 되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 보니 서로를 빌어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것 같은 풍광이 기억에 남습니다. 본인이 스스로에게 말해줄 때는 무엇보다 본인의 속도와 본인의 시간으로 하게 되고, 또 듣게 되잖아요. 많은 예시나 우화들을 만들어 이야기하던 게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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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ANDRE 99› 브레인스토밍 페이지 중 일부 © 실리카겔 공식 인스타그램

한주: 앞서 이야기했듯이 ‘저희의 생각’이라는 부분은 꽤나 느슨한 영역이라서 어떤 내용이 그에 부합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애초에 해당 프로젝트 오픈 때부터 서비스가 허락하는 한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었기에 그런 면에서는 정점(APEX)을 갱신했다고 생각합니다.

‘출마를 선언합니다’라는 말이 멤버와 스태프 사이에서 유행이라고 들었어요. 요즘도 계속 유행 중인지, 혹시 2024년 새롭게 생긴 유행어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건재: 조금씩 변화구가 있긴 하지만 아직 애용 중인 문구입니다. 연초라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공통적으로 제일 많이 한 말은 아무래도 어떤 일정이 끝나면 ‘수고하셨습니다’와 같은 말인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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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앨범 얘기를 해 볼게요. 우선 18곡이라는 수록곡 숫자부터 압도적인 앨범이 아닌가 싶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면 거의 광기 아닌가요?! 처음부터 이렇게 큰 볼륨이 될 걸 예상하고 작업했는지, 어쩌다 이런 볼륨이 됐는지 궁금합니다.

웅희: 다들 정규 2집에선 오랜 기간을 투자해서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는 쪽으로 합의했던 것 같아요. ‹POWER ANDRE 99› 이전에 보여줬던 ‹Machine Boy›와 그 앞에 발매한 싱글들도 ‹POWER ANDRE 99›의 서사를 염두에 두고 작업하며 발매했거든요. 그런 이유로 2CD의 정규 앨범이 나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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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curial›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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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ine Boy›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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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k Tak Tok› 커버

‹POWER ANDRE 99›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웅희: ‘Mercurial’을 발매하기 전부터 거대한 정규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쌓아 올리자는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 그 당시 인간의 형태를 한 기계의 이미지를 필두로 한주가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때 한주가 썼던 짧은 글이 있었는데요. 빌드업 과정에서 해당 글과는 멀어졌지만, 그게 최초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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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곡을 1차로 배치하고 조금씩 다듬어 갔다고 들었어요. 혹시 처음부터 절대 위치가 바뀌지 않았던 곡이나 최종 단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추가된 노래가 있을까요?

춘추: 처음부터 가장 강력한 위치를 고수했던 것은 아무래도 ‘On Black’과 ‘Eres Tu’였어요. ‘시작은 무조건 이렇게 가져가야 해!’라는 느낌이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지라 이것만큼은 그대로 보여주자고 다들 생각했어요. 작업 후반에 ‘PH-1004’라는 곡을 추가하기로 했죠. 아무래도 수록곡 간의 다이내믹을 최대한 크게 가져가고 싶었어요. 이번 앨범에서 어쩌면 가장 극단적인 수록곡이죠.

확실히 그런 느낌이에요. 앨범 첫 곡 ‘On Black’을 듣자마자 ‘나는 지금 ‘POWER ANDRE 99’가 주인공인 이야기에 초대되었구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거든요.

한주: 맞아요. 애초에 1번 트랙으로 사용할 곡이 필요해 만들었습니다. ‹POWER ANDRE 99›라는 앨범의 부팅 이미지를 선사하는데 집중했어요.

앨범의 마지막 곡 ‘PH-1004’도 그래요. 자연스럽게 긴 이야기가 마무리된 뒤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춘추: ‘PH-1004’는 머신 보이의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싶어서 나오게 된 곡이에요. 사랑 노래처럼 보이지만, 사실 엄청 불안정하죠. ‹POWER ANDRE 99›에 수록된 강렬한 곡들과 강하게 대비시켜 이런 모습도 잊지 말아 달라는 목적이었달까요? 저희가 ‘Machin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고, 비주얼적으로도 기계, 금속을 느끼게끔 했지만, 결국 머신 보이의 이야기는 저희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앨범에는 ‘Realize’, ‘Budland’, ‘Mercurial’, ‘NO PAIN’처럼 이미 발표한 곡과 신곡이 새롭게 조합돼 있어요. 저는 글을 새로 쓰는 것보다 수정하는 게 더 어렵던데요. 기발표 곡을 새로 줄 세우는 게 어렵지는 않았나요?

건재: 사실 저희가 묵혀놨다가 다시 꺼내 후닥닥 재편해 사용하는 경우도 왕왕 있고, 지속적으로 계속 편곡해서 재생하는 곡과 소리도 있어요. 많이 어려운 접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니라서 딱히 어렵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수정이라는 주제는 늘 어려워요. 그렇지만 잦은 수정은 결국 곡의 퀄리티를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곡을 쓰는 단계에서 앞뒤 순서를 상정하고 만들어놓은 것도 있다 보니 ‘으악! 어려워서 못 하겠다!’라는 느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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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앨범에 새로 들어간 곡들 위주로 여쭤볼게요. 첫 곡이 끝난 뒤 ‘Eres Tu’와 ‘Juxtaposition’이 바로 이어집니다. 연주나 편곡, 구성적 측면에서 각각 실리카겔 ‘초기’와 ‘지금’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곡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두 곡은 어떤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나요?

한주: 두 곡 모두 ‹POWER ANDRE 99› 프로젝트 콘셉트에 대한 기여를 의식했어요. ‘Eres Tu’에서는 실리카겔 멤버들이 지닌 컬러풀한 지점과 돌발적이지만 글리치한 느낌을 살리려고 했죠. 이어지는 ‘Juxtaposition’은 앨범이 어필해야 하는 질감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기계적이고 강압적인 뉘앙스를 강조하게 됐답니다.

‘APEX’와 ‘Ryudejakeiru’는 앨범의 더블 타이틀로 정해져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곡들이라는 느낌이었어요. 실리카겔이라는 요소를 이루는 불과 물을 극대화해 만든 작업이랄까요. 두 곡을 타이틀로 정하면서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궁금합니다.

춘추: 그런 의도를 가지고 발매했던 건 아니지만, ‘NO PAIN’의 집중도가 우리에게 어쩌면 선입견을 만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저희는 이때 더 이상한 걸 들려주자는 생각으로 곡을 쓰고 작업했어요. ‘APEX’를 필두로 우리가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다만 단순히 이상한 것만 던져놓는 실리카겔이라는 이미지도 저희가 원하는 건 아니었기에 이번 앨범이 우리의 단적인 모습에 집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PEX’가 ‘들어라!’라는 곡이라면, ‘Ryudejakeiru’는 ‘같이 듣자!’라는 곡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NO PAIN’을 기점으로 드디어 실리카겔의 노랫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라는 반응이 소소한 화제가 되기도 했죠. (웃음) 가사는 실리카겔 음악의 그 어떤 부분보다 열린 영역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혹시 이번 앨범에서 그렇게 ‘들리는 것’ 혹은 ‘함께 부르는 것’을 의식하고 쓴 가사나 단어가 있을까요?

춘추: 아무래도 ‘Ryudejakeiru’의 후반부 합창 부분이 아닐까 해요. 가사는 “나나나” 뿐이지만, 실제로 녹음하면서 다양한 보이스와 다양한 인격을 담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희 목소리로도 담고, 괴상하게 목소리를 내어서도 녹음을 받았죠. 단순히 다수의 사람이 노래하는 연출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노래하는 모습을 염두에 두고 소리를 담아 봤어요.

얼마 전 EBS에서 바로 그 ‘Ryudejakeiru’를 실버 합창단과 함께 부르는 색다른 연출을 보여주기도 했어요. 라이브 당시도 그렇고 이후 인터뷰에서도 멤버들 모두 상당히 몰입한 것 같더라고요.

웅희: 모두가 어울려 화합하고 싶다는 초기 아이디어가 있었어요. 그때 저는 뚝딱이와 번개맨, 뿡뿡이 등 EBS의 유명 캐릭터들을 한자리에 모아 어벤져스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덕분에 뚝딱이를 만날 수 있었네요. (웃음) 여하튼 이를 시작으로 어떻게 하면 소외받지 않고 모두가 모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어린이 합창단 혹은 실버 합창단과 ‘Ryudejakeiru’를 다 함께 부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감동적일 것 같다는 추측으로 시작했는데, 기대보다 더 감동적인 무대를 만들어주셔서 다시 한번 합창단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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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에 또 하나의 감동 포인트가 있던데요. 건재 님이 ‘Gosan’에서 처음으로 보컬을 담당했어요. (웃음) 상당히 목가적인 느낌이 드는 게 실리카겔 음악에서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묘한 감상을 자아내더라고요. 곡의 뼈대를 건재 님이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건재: 과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실리카겔에서 잘 느껴보지 못한 묘한 감상을 느끼셨다고 말씀해 주시니 무척 즐겁네요! 아무래도 들리는 목소리 중에 제가 전면에 있다 보니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어요. ‘Gosan’은 하나의 생각이나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곡은 아니에요. 당시에 저를 이루던 생각, 몸, 시각, 청각 등을 뭉쳐서 음악으로 표현해 봤습니다. 일본 다카야마(高山)에 가면 높이 솟은 나무들이 참 예쁘게도 계속 풍경을 펼치는데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오지 않은 미래를 빌려서 사랑을 노래 해봤어요. 그리고 그 텍스트에 음을 덧칠해 봤습니다. 듣는 데 도움이 되실까요? (웃음)

사실 ‹POWER ANDRE 99›는 들으면 들을수록 이렇게 조각조각 나누어 물어보는 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돼요. 단순한 앨범 한 장이 아니라, 마치 2023년 실리카겔의 모든 조각을 모은 ‘시간과 공간의 방’으로 다가옵니다. 그 공간에서 멤버 각자에게 가장 큰 울림으로 남은 건 무엇인가요?

춘추: 소위 ‘머신 보이’ 세계관에 한 해 동안 집중했던 과정이 콘셉트와 활동 방향, 그리고 이전의 저희에게 부족했던 것, 이후의 저희에게 필요한 것을 많이 감지하도록 도와준 것 같아요. 선택과 집중이란 게 어쨌든 중요한 상황에서, 실리카겔이 지닌 가능성에 대한 작은 확신과 새로운 추진력의 원동력을 축적한 한 해이자 프로젝트였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하네요.

웅희: 저에게 큰 울림이었던 순간은 다른 멤버들의 방을 구경할 때였습니다. 말씀대로 멤버들의 시간에 감명받으며 버텨왔어요. 제게 가장 큰 힘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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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재: 너무 멋진 질문을 주셔서 부담스러운데요. 그냥 다른 미사여구나 이것저것을 차치하고 아무래도 ‘이들과 내가 열망하고 사랑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라는 마음이 항상 동력이 되어주는 것 같아요. 존경이나 표현의 울림은 평소에도 장착이 돼있어서 따로 꼽기 어렵네요!

한주: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앨범 뮤지션으로서 탄력을 회복한 게 크지 않나 싶어요. 싱글이나 EP 이슈도 좋아하지만, 시즌별로 넉넉히 표현할 수 있는 단위는 앨범이니까요. 이런 탄력을 활용해 이제 새로운 일을 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실리카겔의 멤버들이 서로에게 모두 좋은 동료이자 자극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제작 막바지에는 멤버들이 먼 곳으로 떠나서 집중적으로 합숙 작업을 한 걸로 알고 있어요. 당시 재미있었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건재: 뭐 다들 꼴이 말이 아닌 채로 작업하던 모습이 다 코미디였던 것 같은데요. (웃음) 사실 너무 고농도로 집중하다 보니 제게는 기억이 감각으로 남아있지, 시간의 시점으로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최웅희 감독님의 유튜브 채널 ‘채 웅희최 널’의 ‘SILICAGEL AWESOME MOMENTS’를 통해 생생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POWER ANDRE 99›를 만드는 과정에서 새롭거나 기억에 남는 순간을 알려주세요. 자기만 아는 특정 곡의 숨겨진 포인트나 작업 당시 에피소드도 환영합니다.

춘추: 믹싱할 때 기억을 하나 꼽자면, 사실 믹싱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이번 음반에는 더욱더 성숙한 사운드를 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기존 실리카겔이 작업하는 방식에서 부족한 요소들을 보완하는 여러 방법과 시도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우선순위에서 떨어지는 트랙(곡 안에서의 개별 트랙)들은 많이 탈락하기도 했어요. 지금까지는 다양한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는 방식으로 믹스를 해왔었는데, 이번에는 조금은 닫힌 방식으로 제 기준과 판단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방법적으로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아쉬운 것은 아쉽고 좋은 것은 좋았던 건 마찬가지긴 하네요.

웅희: ‘Ryudejakeiru’ 뮤직비디오 촬영 날 하늘이 도와주신 덕분에 날씨가 따듯했어요. 덕분에 야외에서 스텝들과 배우들이 다 같이 모여 앉아 햄버거를 먹었는데 그때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아무래도 좋은 기억만 남아서 추억이 보정된 것 같긴 하지만요. (웃음)

건재: 녹음 전 사전단계에서 정말 엄청나게 고민하고, 연구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가며 준비했거든요. 한 곡 한 곡 사운드 셰이프Shape를 예측하며 모델링을 하고, 이를 토대로 이것저것 심벌즈들과 드럼들을 조합한 후 몽땅 들고서 녹음 장소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한 모델, 한 조합, 한 구성 등등을 꺼내면서 멤버들과 소리를 듣고, 좋아하고, 부정하고, 의문을 가지고, 선택한 소리들을 담았습니다. 그 기억이 많이 남아있어요. 체력이 좋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녹음을 끝낸 후 끼니도 못 먹을 정도로 졸아버리곤 했답니다.

한주: ‘Babyface’라는 트랙을 작곡하던 당시의 상황이 생각나요. 중후반부 기타와 보컬 유니즌 솔로를 메이킹할 때 술에 취해있었거든요. 작업방에서 홀로 기타와 보컬을 동시 연주로 녹음하며 극에 치닫는 기분을 느꼈던 추억이 있습니다. 후에 스튜디오에서 춘추 씨가 해당 파트 기타 연주를 하냐 마냐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결국 제가 술에 취해 녹음한 데모 테이크가 앨범에 반영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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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라디오 방송에서 ‘실리카겔은 멜로디스트들의 모임’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저도 무척 동의합니다. 데뷔 당시 독특한 사운드로 주목받았지만, 실리카겔 음악의 핵심은 아름다운 멜로디라고 생각하거든요. 혹시 멤버들 각자 ‘이건 정말 끝내준다’라고 생각하는, 특별히 좋아하는 실리카겔의 킬링 멜로디가 있을까요?

춘추: ‘Mercurial’의 멜로디 라인을 정말 좋아해요. 느린 템포, 비교적 빠른 하모닉 리듬으로 순차 진행되는 코드, 길게 뻗어나가는 벌스Verse 멜로디, 후렴 직전의 변화폭이 작은 긴장감을 주고, 후렴에서 다소 편안한 진행감의 멜로디가 주는 카타르시스, 2절에서 치고 나오는 과감하고 다이내믹한 벌스 등 여러 가지로 다양한 다이내믹이 만들어지는 좋은 멜로디라고 생각합니다.

웅희: ‘Andre99’의 메인 멜로디도 좋지만 ‘9’의 베이스 라인도 킬링 멜로디라고 생각합니다. 베이스를 한번 들어보세요. 하하!

건재: 그때그때 취향이 달라지는데요. 요즘에는 ‘Juxtaposition’의 후주에 나오는, 저희 표현으로 말하자면 ‘국밥 베이스 라인’을 참 좋아하고 있습니다.

한주: 진성 멜로디스트로서 하나는 너무 어렵고 둘을 꼽자면, ‘Kyo181’과 ‘NO PAIN’ 이야기를 해볼게요. ‘Kyo181’은 하나의 동기 멜로디로 곡 전체를 해결하는 재밌는 곡이에요. 멜로디스트로 유명한 작곡가들은 미니멀리즘적 경향을 겸비하고 있기도 하죠. 멤버로서 칭찬하는 게 우습지만, 정말 좋은 곡이에요. ‘NO PAIN’은 A-B-C-D 전개가 명확한 곡인데요. 인트로-인터루드-아웃트로 테마와 후렴 멜로디가 주는 힘이 곡 전체를 잘 아우른다고 생각해요.

실리카겔은 ‘동료와 함께하는’ 것을 무척 중시하는 밴드 같아요. 실제로도 영상감독, 엔지니어, 스타일링 등 지금 함께하는 스태프 중 데뷔 때부터 호흡을 맞춘 이들이 많고요. 추상적인 노랫말 가운데에서도 ‘모두’, ‘함께’ 같은 단어에는 유독 방점이 찍힌 듯한 느낌을 받아요. 실리카겔에게 ‘동료와 함께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춘추: 예전부터 주변 뮤지션들이 ‘새로운’ 작업자를 매번 찾아가는 게 좀 의아했어요. 이렇게 중요한 프로젝트에서는 당장의 아웃풋보다 팀워크가 더 중요한 거 아닐까, 생각하거든요. 밀도 높은 작업은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깊은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좋은 아웃풋의 비밀은 결과물 그 자체보다 작업자들 사이에 있다고요. 좋은 작품은 특정한 누군가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함께하지 않으면 생길 수 없는 신뢰와 여유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에 함께하는 동료 한 명 한 명이 감사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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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희: 혼자였다면 절대, 절대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었다고 자주 생각합니다. 아까 말했듯 멤버들도 그렇지만 동료들이 저희 프로젝트를 위해 모든 걸 쏟는 모습을 보면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어요. 저를 성장시킨다고 할까요?

건재: ‘좋은 동료가 계속 있어 줄 이유를 계속해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계속 머무를 수 있는 이유를 계속 제공할 수 있어야 하겠다 싶어서요. 그래서 뭐든 열심히 하려고 노력합니다.

한주: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실리카겔 멤버, 동료 작가, 동료 스태프 등을 아우르는 관계에서 오는 시너지가 지금까지 실리카겔에 굉장히 중요한 에너지를 선사했어요. 앞서 언급했지만, 실리카겔의 세계는 꽤나 다양하고 다자적이기에 저희와 알맞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모듈을 잘 연결해 두고 재밌는 일들을 합성해 내려고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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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상은 실리카겔이라는 밴드 색깔에도 반영됩니다. 멤버 네 사람 모두가 그 자체로 실리카겔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완전히 독립된 음악가라는 인상을 무척 강하게 받아요. 이렇게 민주적으로 바람직한 운영은 어떤 공감대를 바탕으로 가능한 걸까요?

춘추: 오랜 활동으로 자연스럽게 학습된 멤버들 간의 무언가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성격과 경향, 취향… 이런 것들이요. 100% 알긴 어렵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여러 요소가 있거든요. 그런 것들이 멤버들 간의 신뢰를 공고히 해가면서, 서로를 인정하는 거죠. 딱히 다른 이유가 필요 없이, 오랫동안 서로를 이해하려고 고민도 많이 하고, 그렇게 지내온 시간이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해요. 그 힘든 기간을 버틴 멤버들도 대단합니다.

웅희: 각자가 서로를 존경하기 때문에 이런 운영이 가능한 것 같아요. 일전에 이야기했던 ‘팀플레이’라는 이야기가 다시 한번 생각나네요.

건재: 하하. 과찬 감사합니다. 사실 저희 스스로 훈수를 둘 만큼 대단한 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사회적, 미학적, 예술적인 차원에서 모범 사례가 되고 싶어 소망하거나 집착하는 그런 열망도 강하지 않은 편인 것 같고요. 제 경우에는 그냥 저의 부족한 점이나 나약한 점을 더 정확히 인지하거나 찾으려고 노력하고, 보완할 방법을 고민하죠. 물론 힘든 부분도 여전히 많아요. 이를 마주하고 고민하는 행위가 분명 즐겁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하면서도, 그렇게 쉽기만 하지 않을 때가 늘 있거든요. 뭐…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생각 위에서 자란, 이를테면 삶을 견지하려는 태도 같은 게 다들 여러 모양으로 존재할 테고, 뭐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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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 전체적인 공감대는 실리카겔이라는 규정할 수 없는 사상으로 엮이는 게 아닐까 싶고요. 기본적으로는 멤버들 각자가 지니고 있는 전문적인 영역을 최대한 존중하고 따르려는 의지인 듯해요. 저의 경우, 작/편곡 혹은 작사나 초기 아이디어 제안이 주된 역할이라면, 춘추 씨는 실리카겔의 기술적인 모든 부분을 감독하고 있어요. 음향적인 부분, 물건이 관여하는 부분에 누구보다 전문적이죠. 건재 씨는 드러머로서 물리적으로 구현해야 하는 부분들을 치밀하게 잘 짜내고, 프로젝트에 있어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내거나 행정적인 처리를 말끔히 하는 등 그만의 분야가 있답니다. 웅희 씨는 최근 실리카겔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고, 개인 채널에 저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유하는 등 음악 이외에도 멀티미디어적인 부분에 일조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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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실리카겔이 걱정 없이 단단하게 항해할 것 같다는 믿음이 드는 대답들이네요.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웃음) 올 한 해 실리카겔로서의 활동과 멤버 개개인의 활동도 다양하게 준비하고 있는데요. 혹시 공개해도 좋은 이슈를 알려줄 수 있을까요?

춘추: 개인적으로는 ‘놀이도감’이라는 프로젝트가 있는데요. 기회가 된다면 공연도 하고 음반도 내게 되겠죠? 일단은 실리카겔의 다음에 조금 더 신경을 많이 써보고 싶습니다!

웅희: 올해 뮤직비디오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상물 시리즈 제작을 생각 중이에요. 그리고 조만간 5월에 큰 공연이 있겠네요.

건재: 역시나 일단 실리카겔의 제작 및 활동이 언제나 최우선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더 많이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요. 그런 마음이 흘러넘칠 때마다 조금씩 모아 ‘시라카미 우즈Shirakami Woods’에도 풀어내 보고 싶습니다. 이런 실험을 통해 실리카겔과 제게 양분이 되는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거든요.

한주: 실리카겔은 변태(變態)를 거듭하지 않을까 싶어요. 깜짝 놀랄 법한 이벤트가 있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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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새롭고 용감한 사운드(Brave New Sound)’. 밴드 실리카겔Silica Gel은 김한주(건반/보컬), 김춘추(기타/보컬), 김건재(드럼), 최웅희(베이스) 4인으로 이루어진 밴드다.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바탕으로 구축해 낸 고유의 사이키델리아, 폭발적인 에너지의 라이브 퍼포먼스가 응집하여 현재 가장 새롭고, 용감한, 사운드를 만드는 밴드 실리카겔이 되었다. 2015년 EP ‹새삼스레 들이켜본 무중력 사슴의 다섯 가지 시각› 발표 이후 정규 앨범 2장, EP 3장, 다수의 싱글을 발표하며 활약 중이다. 그들의 가능성이 궁금하다면 그 답은 음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도 시도한 적 없기에 들어본 적 없는, 들어본 적 없기에 새로울 수밖에 없는, 이상한 것들은 늘 곱씹을수록 새로움을 선사하기에. 

Writer

김윤하(@romanflare)는 K팝에서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관해 쓰고 이야기하는 대중음악평론가다. 다양한 온오프라인 매체에 글을 기고하거나 출연하면서, 가끔은 작가 겸 기획자, 음악 콘텐츠 프로듀서로 일한다. 2023년 TVING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케이팝 제너레이션K-POP GENERATION›에 스토리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현재 «한국일보» «국민일보» «시사IN» «채널예스»에 칼럼을 연재하며,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사랑과 음악이 끝내 세상을 구할 거라고 믿는다.

영원한 신의 것을 훔쳤다

thumbnail, 원정백화점
Performance

header, 원정백화점

Visual Portfolio

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원정백화점은 디지털 미디어와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독특한 작업을 합니다. 특히 신체 감각에 주목하며 ‘불온한 판타지’를 스크린과 육체로 끌어들이는 데 집중하는데요. 환상과 릴스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금세 소멸하는 것을 붙잡는 방법론으로 영원한 존재인 신의 것을 훔쳐 온다고 해요. 그래서 작품들은 서양 중세 종교화에서 자주 보이는 삼면화의 특성을 차용하고, 성경 구절을 사운드의 일부로 쓰고, 지극히 육체적인 체액과 혈흔, 염증을 신적 존재와 결부시키면서 불온한 천사와 조각난 천사와 대립하는 본능적인 몸에 대해 상상한답니다. 이때 인공지능으로 생성해 스크린에 나타나는 몸의 존재와 물리적인 공간에서 퍼포머가 실연하는 몸의 존재가 서로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공존하는 상태가 무척 흥미롭답니다. ‘불온한 상태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환상, 이미지, 욕망, 현실, 신체 감각을 탐험하는 이 신비한 창작자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01, 원정백화점, ઈ스킨케어신화ઉ

‹ઈ스킨케어신화ઉ› 퍼포먼스, 2022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원정백화점입니다. 서비스하거나 환상을 좇는 일을 합니다.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불온한 판타지를 몸과 스크린으로 끌어들입니다. 현재는 온라인과 온라인 밖에서의 신체 감각에 주목하고 있어요.

02, 원정백화점, ઈ스킨케어신화ઉ

‹ઈ스킨케어신화ઉ› 퍼포먼스, 2022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18년 ‹영적삶게임›이라는 보드게임을 만들어서 체험행사를 진행한 게 원정백화점의 첫 활동이었어요. 이벤트 형식에 맞춰 일회성으로 ‘원정백화점’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사용했는데요. 그러면서 한동안 기존의 종교적 고민에 대한 작업이 아니라 백화점으로서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작업했어요. 현재는 그 시기와 생각과 작업이 다르지만 이름은 계속 쓰고 있습니다. ‹영적삶게임›이 종교적 고민에 대한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마지막 작업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종교적인 것에서 훔쳐 오고 있어요. 환상과 릴스처럼 금세 소멸하는 것을 붙잡기 위해서 영원한 신의 것을 훔쳐서 작업합니다.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아, 불과 얼마 전에 작업 공간을 이사했어요. 지금은 컴퓨터와 의상 정도만 구비한 상태이고, 거의 비어 있답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너무 진부한 질문인가요. (웃음)

걸으면서 떠올린 생각,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 그렸던 그림들, 썼다가 고민한 메모들, 유튜브에서 본 뮤직비디오, 블로그로 훔쳐본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일기, 학교와 학원과 극단과 교회에서 배운 것들, 실패하고 있는 운동, 인공지능에 의존해 만든 이미지, 최신 유행하는 패션 스타일에서 영향을 받아요.

03, 원정백화점, 하팃구리

‹하팃구리HEARTIGURI›, 2020 2022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드로잉과 메모에서 출발할 때가 가장 많아요. 창작자와 실연자로서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실행 과정에서 작업 내부에 어떤 캐릭터를 만들고 그것을 따라갔다가 벗어났다가 하는 과정이 존재해요. 예컨대 ‹ઈ스킨케어신화ઉ›라는 작업에서는 ‘신의 것을 훔치는 여자’라는 캐릭터를 생각하며 만들어 나갔죠. 그렇게 크게 붙잡을 수 있는 선을 하나 만들어두고, 그다음으로는 과정 중에 몸을 움직이며 변화에 적응해 나갑니다.

작가님의 작업 세계가 궁금해요. 최근 작업 중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ઈ스킨케어신화ઉ›(2022-2023)는 디지털 자아를 위한 현재 진행형 신화입니다. 소셜미디어에 E-girl의 모습으로 셀피를 올리면서 시작한 작업인데요. 서양 중세 종교화에서 보이는 삼면화(triptych) 같은 구조로 스크린을 설치하고 중앙에는 셀피가, 좌우로는 천사와 괴물 형상의 버추얼 이미지가 나옵니다. 작년부터 몇몇 공간에서 설치와 퍼포먼스 등 형태를 변형하면서 실연해 오고 있어요. 스크린 아래에서는 성경 구절을 낭독하는 소리와 클래식, 비트가 교차하는 사운드에 맞춰 춤을 추죠. 스크린 속 인물이 카메라 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데 반해, 그 아래에서 춤추는 인물은 신체 내부로 감각을 집중합니다.

04, 원정백화점, ઈ스킨케어신화ઉ

‹ઈ스킨케어신화ઉ›, 2022

05, 원정백화점, ઈ스킨케어신화ઉ

‹ઈ스킨케어신화ઉ› 퍼포먼스, 2023

06, 원정백화, _ઈ스킨케어신화ઉ

‹ઈ스킨케어신화ઉ› 퍼포먼스, 2023

‹ઈ스킨케어신화ઉ›가 스크린에 매끈한 피부처럼 붙어있는 상태라면, ‹탈락한 피부와 디지털 체액 편지›(2023)는 피부 내부에서 떨어지는 체액과 혈흔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설치물과 비디오, 퍼포머 등 작업의 구성 요소를 배치할 때 피부, 체액, 혈흔, 염증이 한데 모인 하나의 몸을 생성한다고 상상하며 구성했어요. 스크린에서는 몸이 마치 매끈한 피부처럼 시각적인 요소로 존재한다면, 공간에 현존하는 실제 몸은 촉각적이고 청각적인 상태에 가깝습니다. 디지털 세계의 이미지와 현실 공간의 신체가 대립항이 아니라, 뼈와 살처럼 함께 있는 느낌으로 인식하고 있어요.

07, 원정백화점, 탈락한-피부와-온라인-체액-편지

‹탈락한 피부와 온라인 체액 편지›, 2022

‹Pure Hymn›(2023)은 ‹ઈ스킨케어신화ઉ›의 찬송가로 신의 자리에 생긴 염증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체액의 사운드와 인공지능 사운드로 구성해 순수한 힘에 대한 찬양을 담았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신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잉태하지 않고 그저 염증이 생긴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어요. 생명이 잉태하는 장소로 신화적 장소인 자궁은 염증이 발생하고 사라지는 물리적인 몸으로 존재합니다. 가장 환영받는 자리에 환영받지 못하는 물질이 생기고, 염증 걸린 불온한 천사들이 서로 의존하며 비행합니다.

08, 원정백화점, pure-hymn

‹Pure Hymn› MV 스틸 이미지, 2023

온라인에서 음악 앨범 및 뮤직비디오로 유통하는 ‹Pure Hymn›은 ‹염증을 위한 구유›(2024)에서 건물의 일부, 병풍 또는 벽지처럼 연하게 스크리닝 돼요. 바닥 중심에 위치한 구유에서는 계속해서 인공지능 제너레이팅을 통해 염증으로 변하는 천사의 몸이 등장하고, 둘러싼 공간과 기둥에는 조각난 천사의 몸으로 만든 금줄을 매었습니다. 바로 이곳에 염증을 맞이하러 온 두 몸이 등장하면서 퍼포먼스 ‹워워워십Worworworship›(2024)을 진행해요. 몸들의 괴물적이고 본능적인 에너지와 소리에 집중해 구성한 퍼포먼스입니다.

09, 원정백화점, Worworworship

‹워워워십Worworworship› 퍼포먼스, 2024

10, 원정백화점, Worworworship

‹워워워십Worworworship› 퍼포먼스, 2024

작업을 통해 작가님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디지털 자아는 자기 몸에 새로운 것을 붙이거나 삭제하면서 변신할 수 있는 자아인데요. 변신에 대한 욕망은 현실과 연결되어 육체와 밀착한다고 느껴요. 디지털 자아로 만날 수 있는 판타지적 이미지를 신체와 연결하려는 충동과 욕망에 대해서 생각한답니다. 스크린 안에서의 몸과 스크린 밖에서의 몸을 구성할 때, 서로 다른 에너지를 가진 캐릭터를 구축하고, 각 캐릭터가 반대편에서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공존할 수 있도록 집중하기도 해요. 앞서 말한 ‹ઈ스킨케어신화ઉ›처럼요. 스크린 속 인물의 애교스러운 행동과 온몸의 에너지를 다 쓰는 듯한 공간 속 인물의 움직임을 함께 배치하고 싶은 면도 있고요. 이런 흐름은 ‹Pure Hymn›, 이와 엮이는 ‹워워워십›에서도 이어집니다. 스크리닝 되는 미디어의 몸들은 몽환적인 필터 속 이미지와 함께 존재하고, 퍼포먼스에 출현하는 몸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면서 신체적인 에너지에 집중해 움직입니다.

11, 원정백화점, Worworworship

‹워워워십Worworworship› 퍼포먼스, 2024

해당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하는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작업 과정 중에 발생하는 충동적인 생각들, 미리 기획한 범위 밖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을 좀 더 들여와서 작업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크게 정해진 루틴 없이 진행하는 작업에 따라 일정이 들쑥날쑥해요. 작업을 만들고, 작업을 위한 연습에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편이에요.

12, 원정백화점, 베드트레이닝

‹베드 트레이닝BED TRAINING› 퍼포먼스, 2023

요즘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낭만과 건강이요. 몽상적인 시간을 가지면서도 작업에 필요한 행정적인 업무까지 웬만큼 잘 처리하는 능력을 갖추고 싶네요.

자신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아주 최근에는 정신적인 부분보다 육체적인 몸의 태도가 작업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생각하게 돼요. 저에게는 자아 폐쇄적인 성향과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부여받았을 때 자아를 버리고 이를 충실히 수행하는 성향이 공존하기 때문에, 한동안 여느 과정들이 고생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었어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채 양다리 걸치듯 양쪽을 왔다 갔다 하는 상태가 작업에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해요.

13, 원정백화점, 가상공동설Virtual-Hollow

‹가상공동설Virtual Hollow› MV 스틸 이미지, 2023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저는 슬럼프가 육체적으로 발현되는 편이에요. ‹Pure Hymn›(2023)을 작업하는 과정에서 특히 몸 상태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갑자기 촬영 2주 전부터 당시 복용하던 약의 부작용이 상당했어요. 울렁증이 계속 생겼거든요.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일정을 처리했어요. 어지러울 때는 쉬었다가, 괜찮을 때 작업을 하는 등 결국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몸이 허락하는 만큼만 받아들이며 진행했는데요. 그때 ‘작업이 망한다는 건 어떤 걸까?’ 다시 생각해 보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한동안 다른 일을 비우고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만 했어요. 정서적으로 평온하지 못할 때는 문장이나 단어들을 계속 써 내려갔고요. 그리고 수면을 좀 더 오래 취하는 법도 배웠어요. 이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마음먹기도 했고요. 어쨌거나 결국 다시 몰입할 수 있는 걸 찾았을 때, 그래도 평온해질 거라고 믿고 있답니다.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앞서 말한 대로, 컨디션 관리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불온한 상태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 정도가 있습니다.

14, 원정백화점, pure-hymn

‹Pure Hymn›, 2023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토요일마다 ‘서울야생마’라는 모임을 가져요. 작업하면서 만나거나 극단에서 같이 활동한 멤버 세 명이 함께 막춤을 추려고 모였다가 어느날 정식으로 이름을 짓게 되었죠. 퍼포먼스와 연극, 움직임에 대한 관심을 함께 하고 있어요. 모임에서는 체력 훈련, 감정 훈련, 읽기, 글쓰기, 움직임 만들기, 즉흥, 마임 같은 걸 해요. 기존 멤버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함께 참여해서 연습하고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모임은 열려있어요. 저는 작업 과정에서 최대한 건강한 에너지를 가질 수 있기를 열망해요. ‘불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요. 혼자서는 어려울 때가 많은데, 모임에서는 건강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충실한 코스튬 플레이어 같은 느낌이면 좋을 것 같네요.

15, 원정백화점, 베드-트레이닝

‹베드 트레이닝BED TRAINING› 설치 전경, 2023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생각해 보면 저는 미래에 대한 그림이 터무니없이 막연한 사람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아주 가깝고 일상적인 곳에서 롤모델의 부재를 느꼈고, 제 몸 하나조차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그려지지 않았어요. 최근에는 가까운 미래에 사람들이 어떻게 꾸밀지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면에서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을 통해 액세서리와 코스튬을 만들고 있답니다. ‘삭제된 세계’라는 제목으로 작업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고요. 이제 이미지와 사운드 모두 인공지능으로 생성할 수 있는 세계에서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제너레이터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시작한 작업이에요. 인공지능의 생성물은 기존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삼기 때문에 어떤 이미지가 많이 소비되고 인지되었는지 반영한 결과물이기도 하죠. 그래서 삭제된 세계의 작업자들은 그동안 덜 소비되고 인지된 물질을 인공지능으로 생성하는 과정을 거쳐 작업을 제작해 보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가까운 미래의 그림 중 하나를 그려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16, 원정백화점, Costumes-for-Conceiving-Inflammation-in-Place-of-God

‹Costumes for Conceiving Inflammation in Place of God›, 2023

17, 원정백화점, Costumes-for-Conceiving-Inflammation-in-Place-of-God

‹Costumes for Conceiving Inflammation in Place of God›, 2023

Artist

원정백화점은 미디어 설치와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환상성을 지닌 이미지에 대한 욕망과 해당 이미지가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탐구한다. 최근 온라인과 온라인 밖에서의 신체 감각에 집중하고 있다. «THE CHAMBER»(2024, 캡션 서울), «끝에서 두 번째 세계»(2022, 하이트컬렉션), «올 투모로우즈 파티스»(2022, 아트스페이스3), «하팃구리 데뷔 쇼케이스»(2020, 아노브) 등의 전시에 참여했다.

홀리 호니 듀킴!

Performance

Visual Portfolio

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듀킴Dew Kim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주제를 용감하게 다룹니다. 퀴어, 페미니즘, 섹슈얼리티, 사도마조히즘, 대중문화, 종교와 신비주의를 오가며 조각과 설치, 영상, 퍼포먼스 작업을 선보이는데요. 그의 말에 따르면, “홀리holy하고 호니horny한 것들에서 받은 영감”이 큰 원동력이 된다고 해요. 개인의 경험에서 출발해 사회에 다양한 화두를 던지는 작품으로 다른 이와 소통하는 듀 킴 작가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When the Water Blushed›, 2020, a prayer chair, imitation leather, handcuffs, ankle cuffs, egg topper, stained glass,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작가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저는 주로 입체와 퍼포먼스 작업을 하는 듀킴Dew Kim입니다. 한때는 허니듀Huh Need-you이기도 했고, 호니허니듀HornyHoneyDew이기도 했어요.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무언가 그리고 만드는 걸 좋아했어요. 다른 데에는 관심이 크게 없었던 것 같아요. 커가면서 자연스레 미술을 계속하게 되었고, 결국 지금도 이렇게 미술을 하고 있네요.

‹As If You Wish›, 2021, single channel film(07 17 ), mixed media_dimensions variable (좌)

‹As If You re Dreaming›, 2022, wood, acrylic, light, mixed media, iPhone(single channel video, looped) (우)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작업실은 보광동에 뒀어요. 제가 보광동에서 태어났는데요. 어릴 때라 기억이 있지는 않아요. 이후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로 계속 움직였는데, 지금 결국 보광동으로 돌아왔네요. 올여름 3개월 정도 해외에 체류하며 작업실을 비웠더니, 공간 곳곳에 곰팡이가 피는 바람에 현재 사용을 못 하고 있어요. 개인전을 오픈하고 나서 대청소를 벼르고 있습니다. (반지하는 너무 힘든 것 같아요…) 그래도 작업실에서 이태원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바로 ‘게이 힐Gay Hill’이 있어서 작업하다 지칠 때 놀러 나가기에는 위치가 아주 좋아요. (웃음)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저는 홀리holy하고 호니horny한 것에서 영감을 얻어요. 예를 들어, 종교적인 장소나 SM 플레이 같은 거랄까요.

«Dear Fear»(2020, 아웃사이트 서울) 전시 전경

‹The Object›, 2020, latex sheet, stainless steel, vacuum machine, 220 x 100 x 130 cm

‹Enrapture›, 2022, wood, lenticular print, mixed media, 180 x 95 x 4 cm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저는 작업할 때 주변 사람과 아이디어를 자주 공유하는 편이에요. 조언을 얻으면 작업에 바로 적용하기도 하죠. 이런 과정이 제 창작 과정 전체에서 무척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대부분 저에 대한 이야기, 제 경험에서 작업이 비롯되기 때문이죠. 주변 사람과 작업 중간 과정을 공유하는 일은 자신의 작업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기회이자 작업의 유연성을 기르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답니다.

작가님의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올봄 한남동에 자리한 갤러리 VSF에서 개인전 «I Surrender»를 열었어요. 퀴어와 기독교를 주제로 돔(Domination)과 섭(Submission)의 SM 플레이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기도하는 손 혹은 피스팅하는 손이 교회 건축이나 장식 양식을 확장하는 이미지를 입체 작업으로 구현했어요. 예전에 공부했던 금속 공예와 주얼리 디자인을 작품 제작에 적용해 볼 수 있어서 기억에 남아요.

«I Surrender»(2023, Various Small Fire) 전시 전경

‹O Come to the Altar›, 2023, mixed media, 190 x 140 x 30 cm

‹Let the Church Say Amen›, 2023, mixed media, 170 x 80 x 10 cm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요즘은 제가 집중적으로 연구해 오던 사도마조히즘과 종교, 아이돌 문화처럼 초자아 명령이 지배하는 문화 영역을 연결해 좀 더 이야기를 확장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요. 서로 다른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상하고 기이한 것을 연결 지어 바라보고 싶어요.

‹Got the Whole World in the Hands›, 2023, mixed media with wood, metal, silicone casting (좌)


‹Shackles›, 2023, mixed media with metal and silicone, 40 x 54 x 15 cm (우)

‹In the Garden›, 2023, mixed media with silicone casting, metal and beads, 60 x 40 x 20 cm

평소 작가님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최근 몇 년간 정말 쉬지 않고 전시와 프로젝트가 이어지면서, 작업하지 않는 때에는 대부분 머리를 비우고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어요. 혼자 있을 때는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를 즐겨 보았고, 혼술도 자주 했죠. 친구들과도 자주 술자리를 가지다 보니 음주 능력이 늘어난 것 같아요. (웃음)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음… 생각해 보니 요즘 개인전을 준비하느라 그 이외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네요. 뉴욕에서 3개월 동안 레지던시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체중이 불어난 거라서 현재의 몸 상태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고민 중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체중 관리가 정말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개인전을 성료하면 정말 운동을 시작하려고 해요. 친구들은 더 이상 제 말을 믿지 않지만요…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저는 호기심이 많아서 일단 저지르는 타입인데요. 이런 성격이 작업에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가끔은 무모한 도전 때문에 실패를 겪기도 하지만, 결국 이런 성향이 작품에 에너지를 불어넣는다고 믿습니다.

«아시아 기획전: 또 다른 가족을 찾아서 Asia Project; Looking for Another Family»(202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전시 전경

«Tangible Error»(2020, d/p) 전시 전경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슬럼프가 찾아오면, 제 예전 작업을 스스로 분석해 봐요. 예전 작업할 때 받았던 영감을 다시 찾아보려고 노력하죠.

최근 들어 작가님에게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다 보니 완성작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요. 어디에 어떻게 보관해야 할지 고민이에요. 지금 사용하는 작업실에는 이제 빈 곳이 거의 없거든요. 작품 보관에 알맞은 컨디션을 갖춘 것도 아니고요. 그렇다고 별도의 스토리지를 따로 마련하자니 부담이 되어서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계속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를 탐구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특히 탐구 과정을 외부와 연결하고 확장하며 어떤 시각 언어로 소통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답니다.

‹Faster than a Kiss›, 2018, digital printing on polyvinyl chloride, silicone tubes, mixed media_dimensions variable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주변 사람들마저 지겨워서 그만하라고 말릴 때까지 좋아하는 일을 해보세요.

현재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평생 하면서 살고 싶어요.

«Purple Kiss ♡»(2018, 아카이브 봄) 전시 전경

Artist

듀킴Dew Kim은 변화와 충돌의 임계점에 있는 예술, 종교, 정체성의 다양한 교차점을 탐구한다. 건국대학교에서 금속 공예를 전공하고 영국왕립예술학교에서 조소로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주로 퀴어, 페미니즘, 섹슈얼리티, 사도마조히즘, 대중문화, 종교와 신비주의를 주제로 조각, 설치, 영상, 퍼포먼스 작업을 한다. 개인전으로는 «I Surrender»(2023, Various Small Fires, 서울), «Apocalypse Kiss»(2021, Fragment Gallery, 모스크바), «Dear Fear»(2020,아웃사이트,서울) 등이 있으며, «Sweet Salvation»(2023, Subtitled, 뉴욕), «Fanatic Heart»(2022, Para Site, 홍콩), «펑키-펑션»(2022, 대구미술관, 대구), «노래하는 사람»(2021, 대안공간 루프, 서울), «아시아 기획전: 또 다른 가족을 찾아서»(202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뉴노멀»(2020, 오래된 집, 서울), «양각의 기술»(2019, 오퍼센트, 서울), «포스트-사이버 페미 니스트 인터내셔널»(2017, ICA, 런던) 등 국내외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만약’이라는 질문으로 쌓아 올린 미래

Perform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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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셀린박 작가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Speculative Design’을 다뤄요.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마주칠 사회적 이슈를 고민하고, 디자인적으로 해결점을 찾는 시도인데요. 여러 미래학자와 관련 분야의 연구진과 소통하고, 미래 사회의 이슈를 지금 여기로 가져와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기회를 마련해 왔죠. ‘무뎌진 생각을 날카롭게 만든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은 그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Data Slave›, 2021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작가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셀린박입니다. 저는 2014년부터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이너Speculative Designer로 활동하고 있어요. 2019년부터 2022년까지는 아이러브아트센터와 셀린박갤러리 관장으로 일했고요.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프랑스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이후 캐나다, 미국, 덴마크, 영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 학·석사 과정을 이수했어요. 2017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셀린박 스튜디오를 창업해 다양한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 작업을 수행한답니다. 국내외에서 강의와 전시도 진행하고 있어요.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뉴욕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며 조수아 레이 스테픈스Joshua Ray Stephens 교수님을 만났어요. 교수님 수업이 열리는 날이면 독일 바우하우스에서 온 교환 학생과 밤늦게까지 디자인에 대해 토론하곤 했죠. 이런 과정을 거치며 아름다움의 측면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북 메이킹, 포스터 디자인 작업을 하며 제가 생각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했던 게 기억나요. 당시에는 지금 사회 구성원의 관점과 심리를 캡처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뉴욕의 유니언스퀘어Union Square에서 6000명 넘는 사람을 인터뷰하고, 여러 조사를 거치며 작업을 진행했죠. 디자이너 혼자 진행하는 작업의 한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키운 기간이라고 봐요.

그 와중에, 보그Vogue, 니켈로디언Nickelodeon, 리핀콧Lippincott에서 인턴과 프리랜서 활동을 이어갔는데요. 어느 날 직장 동료들과 디자인 이야기를 하던 중, 제 답답한 심정을 알던 사람이 앤서니 던Anthony Dunne과 피오나 라비Fiona Raby가 이끌던 영국왕립예술대학(RCA)의 ‘디자인 인터랙션’ 전공 링크를 보내줬어요. 링크를 연 순간, 제가 정확히 원하던 걸 바다 건너 영국에서 10년 가까이 진행하는 디자이너가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던 기억이 나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전시 중 «Design and the Elastic Mind»는 발을 딛기 어려울 정도로 굉장히 인기가 많았는데요. 해당 전시가 방금 말씀드린 디자이너들과 그 제자가 맡았던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라는 걸 알고 더욱더 놀랐어요. 당시 학부생이던 제게 디자인의 새로운 경지를 깨닫게 해준 전시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고민 끝에 해당 전공에 지원했고, 2014년 극적으로 합격통지서를 받았어요. 디자인 인터랙션에서 공부한 덕분에 현재 제가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을 공부하게 되었죠. 이를 통해 사회에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하면서, 후회 없이 작업 중이에요.

‹Object Marriage› Performance, 2018, V&A Museum

‹Object Marriage› Performance, 2018, V&A Museum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압구정 아이러브아트센터에서 4년간 작업하다가 올해부터 새로운 작업 공간을 물색 중이에요. 그동안 사용한 공간은 모두 편해서 좋았어요. 때마다 마음에 드는 작업실을 자연스레 만나는 기적이 일어났기에, 지금도 제게 맞는 공간을 기다리며 열심히 물색 중이에요. 요즘은 제가 있는 자리가 곧 작업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노트북을 켜서 연구와 작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구 작업실 전경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저는 주로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던 중에 아이디어를 떠올릴 경우가 많아요. 기도하기 전에는 항상 복잡한 생각의 트랩에 갇힌 기분이 종종 드는데요. 기도를 하고 나면 생각이 정리되어 평소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떠오르곤 해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연구를 하고, 시나리오를 구축하는 일을 진행합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어떤 주제가 인상에 깊게 남으면, 전문가와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다양한 양의 연구를 찾아요. 그리고 전문가와 이메일 혹은 대면으로 만나면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죠. 제 아이디어를 설명하면서 이게 먼 미래에 가능한 시나리오일지 타진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연구 과정은 인정하면서도 현재 관점으로 바라볼 때 윤리·문화적으로 문제 된다는 판단 아래 반대하는 전문가분들이 더러 계신데요. 미래학자의 추측에 근거해 설명해 드리면 대부분 이해하시더라고요. 도리어 연구를 더욱더 후원해 주시는 경우도 있어요.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갑니다. 관객 이해도를 높이려고 영화 시나리오로 작업하는 편이에요. 시나리오를 완성하면 제 작업에서 여러 번 촬영 감독으로 참여해 주신 구본영 감독님을 비롯해 영화감독 출신의 형부, 샤글리 마키제Charlie Marquiset가 큰 힘을 줘서 자주 프랑스에 갑니다. 프랑스에선 형부가 조감독으로 도와주기도 해서 촬영할 때 너무 큰 도움이 돼요.

‹The Object Right›, 2017~2018

‹The Object Right›, 2017~2018

‹The Object Right›, 2017~2018

작가님의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2021년 작업한 ‹Data Slave›는 박은희, 김다예 디자이너와 리서치를 협업으로 진행했어요. 미래학자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이 고안한 ‘에너지 노예(Energy Slave)’ 개념과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The Social Dilemma›(2020) 등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현재 데이터에 대해 집착하는 사회적 현상이 극대화되는 걸 고려하면, 미래에는 더욱 나쁘게 흘러갈 거라고 예상해요. ‘만약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고 (지금과 다른 형태의) 에너지를 몸에 흘려보내면서까지 데이터를 얻는 상황이 미래에 펼쳐진다면?’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시나리오를 생각했죠. 사람 몸에서 전류를 내보내는 수치를 마치 전기뱀장어처럼 극대화한 상황을 떠올려 봤어요. 그리고 사람이 몸에서 전류를 에너지로 흘려보낸 만큼 데이터 은행에서 바꿔서 가상화폐처럼 사용하는 시나리오를 세웠고요. 작업을 구상하는 중, 인체에서 전기뱀장어만큼 전류를 흘려보내는 연구를 진행한 국내 메커니컬 엔지니어 팀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저는 국내 최초로 관련 연구 결과를 발표한 교수님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작업을 완성했습니다. 

‹Data Slave›, 2021

‹Data Slave›, 2021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데이터의 범람 속에서 난무하는 거짓 정보를 살피고, 분별하기 어려운 윤리적·도덕적 문제를 더욱더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최근 진행한 작업에서 작가님이 만족하는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연구의 범주와 시나리오 측면에서는 만족하지만, 미적인 측면에서는 불만족스러워요. 예전 작업에서 빠지지 않던 유토피아적인 영상, 즉 맑고 명랑한 색으로 가득한 이미지가 최근 작업에서는 보이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평소 작가님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새로운 시도를 좋아해요. 가보지 않은 나라에 가거나, 먹어보지 않은 걸 맛보거나, 해보지 않은 체험에 도전하는 일은 아주 어려서부터 좋아했답니다. 새로움을 경험하고, 이전에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을 기대하며 일상을 보냅니다.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요즘은 ‘거대한 침체(Great Stagnation)’에 관심이 많아요.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어느 시대보다 발전이 더디다고 생각해요.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1960년대까지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류는 자동차, 텔레비전, 전구, 시민권, 원자력 등 엄청난 기술의 발전을 경험했어요. 이런 진보는 미래에도 여전할 거라 믿었지만, 현재는 과거 기술을 조금 더 발전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 같아요. 저는 정보가 과대하게 불어난 것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서 관련 연구를 이어가는 중이에요. 소셜 미디어로 인해 전 세계가 손바닥 안에서 서로를 연결하는 것 역시 원인의 일부 아닐까 싶습니다.

‹Object Matcher›, 2018 2019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나요?

잘 정돈한 작업실을 좋아해요. 머릿속이 번잡할 때 작업실을 청소하면 생각도 함께 정리되는 느낌이에요. 이런 태도가 작업에도 묻어난다고 생각합니다.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슬럼프가 오면 작업에서 손을 떼고 책을 읽습니다. 2023년 1월부터 트레바리에서 클럽장을 맡아 독서 토론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나 홀로 아이디어의 블랙홀에 빠져있을 때,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블랙홀로부터 벗어나는데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최근 들어 작가님에게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한국에 돌아와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 작업을 한 지도 어언 6년이 흘렀는데요. 여전히 한국에서는 해당 개념을 잘 받아들이기 어려운것 같아요. 중국과 일본으로 향한 대학원 동기들이 말하길, 그곳에서는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이 또렷한 윤곽을 보인다고 해요. 예를 들어, 중국은 베이징에 있는 중앙미술학원(CAFA) 총장이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의 영향력과 가능성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디자이너의 발전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10년 가깝게 여러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을 가르치는 교수님을 초청해 강의를 열고 수업과 워크숍을 진행했다고 해요. 그런 영향 덕분에 중국은 이제 디자인에 대한 견해가 전과 같지 않고, 발전 가능성이 놀라울 만큼 성장 중인데요. 한국 디자인 교육에서도 과거의 보편적인 디자인 경계를 넘어 더욱 다양한 디자이너를 양성하길 바랍니다.

‹Object Matcher› Exhibition, 2020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요즘에는 ‘정성(精誠)’이 깃든 디자인을 만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시각적인 호기심을 끄는 것은 디자인의 역할 중 하나인데, 그 이상 깊이와 성의를 다하는 과정이 빠진 듯한 작업을 접할 때가 많아요. 물론 과거에 본 작업을 융화하거나 조금 바꾸며 새로운 작업을 하지 않고, 완벽히 새롭게 작업하는 건 저에게도 무척 어려운 일이죠. 다만 최대한 자기 색깔과 취향을 살리고, 내면의 이유와 철학을 불어넣지 않으면 디자인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단기간에 대중의 관심을 받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다소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좋은 작업을 완성하는 데 의의를 두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좋아하는 데에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그 이유를 찾고, 자신의 다름을 타인의 강요에 맞추려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건네고 싶어요. 또한 지금 쫓는 일의 방향이 달라지더라도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기를 바라요. 모든 과정이 결국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고 생각하거든요. 마지막으로, 제게도 하고 싶은 말을 남길게요. “Just Do It.”

작가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무뎌진 생각을 날카롭게 만든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어요.

현재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이 없는 미래가 가장 이상적인 모습 아닐까요?

Artist

셀린박은 셀린박 스튜디오, 아이러브아트센터의 설립자이자 대표 디자이너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셀린박 갤러리, 아이러브아트센터를 운영했다. 그는 작업을 위해 한국에서 유럽으로 끊임없이 이주하며 유럽과 한국의 대학, 박물관을 포함한 여러 기관에서 전시와 강의를 한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프랑스, 캐나다, 미국에서 자란 그는 영국 왕립예술대학에서 ‘디자인 인터랙션’ 석사 과정을 마치고, 런던 V&A 뮤지엄, 부산국제단편영화제, 주프랑스한국문화원 등 유럽과 한국에서 작업을 선보였다. 2019년부터 제주도 프랑스영화제 단편 부문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책 집필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