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늘 사실로만 남지 않습니다. 타인의 기억과 허구적 서사, 재현과 오해, 뒤늦게 발견된 기록들이 서로 부딪히며 새로운 시간을 다시 쓰기도 하지요. 최현아는 이미 기록되고 버려진 물질의 시간에 시선을 둡니다. 산업화한 공정으로 생산된 사물과 낡은 기록 매체, 주변인의 일화와 책 속의 문장을 마구잡이로 교차해 보는 작가의 작업은 서로 다른 층위를 포개어 소통하는 서사를 만들어 냅니다. ‘모든 것은 가변한다’는 삶의 태도는 전시가 끝난 후 작품을 조각내어 주변 사람에게 선물하는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과거의 사건과 허구적 서사를 넘나드는 최현아의 작업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최현아라고 합니다. 주로 설치미술 작품을 만들고 글을 쓰는 활동을 합니다. 지금은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습니다. 허구의 구조와 그것이 반복되는 현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미술학교를 처음 다니기 시작할 때 사진으로 내러티브를 만드는 것을 공부하다가 이미지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 개인적인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물리적인 신체가 있는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지금 인터뷰를 진행하는 현재는 서울에 있어요. 지인의 소개로 잠시 보문동에 있는 작업실을 빌려 사용하면서 전시 준비를 한 달 정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파리와 파리 근교에서 여러 명과 공유하는 스튜디오 2곳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건물의 특징이나 재료를 구하는 방식 등 작업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작업 방법과 조건도 달라지는데요, 다름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어요.
파리의 작업실에서는 대부분 작업을 야외에서 해요. 실내에서는 가능한 한 큰 규모의 책상을 두고 바퀴가 달려 굴러가는 데스크 의자와 화물용 앉은뱅이 의자를 꼭 하나씩 사용합니다.
(좌) ‹Chantal›, 2024, 피그먼트 프린트와 금속 프레임, 60×200×6cm
(우) ‹Auto-Portrait-Panic Bed›, 2025, 접이식 금속 침대 프레임, 루프랙, 출입문 비상 탈출 장치, LED 조명 덮개, 가발, 음향 시스템, 가변 크기
‹Chantal›, 2024, 피그먼트 프린트와 금속 프레임, 60×200×6cm
‹Amy›, 2024, 피그먼트 프린트와 금속 프레임, 60×160×6cm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역사나 과거의 사건, 허구의 서사가 교차할 때 느껴지는 충돌이나 불협화음, 쪼개짐의 감각을 찾고 있어요. 그래서 리메이크나 롤플레잉, 재연 또는 재현 방식을 활용한 많은 종류의 창작물이나 아카이브 자료를 봅니다. 일상이나 주변인의 일화가 극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도 저에게 상상력을 불어넣어 줘요. 일화를 타자의 기록처럼 적어내고, 그것을 최근 읽고 있는 책의 문장들과 마구잡이로 편집해 읽어 보기도 합니다.
알고 있거나 스쳐 지나간 여성 인물도 자주 생각해요.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조각이나 설치의 형식으로 완성되는 것들을 만듭니다. 항상 제가 본 것과 경험한 것, 말한 것을 섞은 이야기를 적으며 작업을 시작해요. 이야기는 길이가 있는 희곡 대본에 가까울 때도 있고, 상황에 따른 두세 문장의 짧은 묘사일 때도 있습니다. 그 후에 이 같은 픽션이 구현될 법한 장소나 사물들을 떠올리며 작업을 구상합니다. 마치 어떤 이야기가 일어날 법한 영화 촬영장이나 연극 무대, 그 위에 세울 인물의 몸을 만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후에는 필요한 사물을 구하고 최대한 사물들을 인간의 신체처럼 보이도록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 작업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작업실에 있는 시간만큼 바깥으로 물건을 주우러 돌아다니거나 폐기 처리되는 것들을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재작년부터는 의도적으로 주변인과 교환하거나, 우연히 소개받은 유가족이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는 자리에 가거나, 돌아가신 분의 스튜디오에 들러 사물을 가져오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저는 산업화된 공정에서 만들어진 사물이 쓰임과 버려짐의 주기를 거쳐 파편화와 반복의 행위자로 기능하는 측면을 봅니다. 주체적 능력이 없는 사물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를 계속 인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과정에서 물질과 서사를 거쳐 다른 몸과 정체성에 관한 불가능한 시도를 구현하게 됩니다. 그 시도는 작업의 결과물에서 명확하고 친절하게 보일 수 없어요. 그리고 명확하고 친절할 수 없다는 그 한계가 가장 인상적이기도 합니다.
‹수근호 양공주›는 7월 17일 오픈한, 더 윌로에서 전시 «Surrogate/Cut»에 선보인 설치 작업입니다. 2018년에 타계한 배우 최은희의 생애를 둘러싼 추측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환경과 관련한 관심으로 동료 김상하 작가와 만든 2인전입니다.
인테리어와 건축 현장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투바이 각재를 나룻배 구조 모양으로 잘라 뒤집어진 형태로 얽은 작업인데요, 배의 형상을 느슨하게 띠고 있지만 작동하거나 이용할 수 없는, 목적을 잃은 채 순전한 장식으로 존재해요. 제목은 최은희가 납북되었을 당시 사용됐다고 알려진 공작선의 이름 ‘수근호’와 해당 전시에서 김상하 작가와 제가 주로 참조한 최은희의 출연작 중 하나인 ‹지옥화›(1958)에서 재연되는 인물에게 붙여진 기표 ‘양공주’를 접목한 말입니다. 하지만 ‹수근호 양공주›는 실제 수근호로 밝혀진 선박과 전혀 닮지 않았어요. ‘수근호’와 ‘양공주’가 서로를 상호적으로 설명하거나 보완하는 관계의 언어가 아니라, 사물이 사물로써 기능을 잃고 무엇을 흉내 내는 상태에 처해 있을 때의 ‘미끄러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수근호 양공주›, 2026, 목재, 라텍스, 젤라틴, 스테인리스, 가변 크기
‹수근호 양공주›, 2026, 목재, 라텍스, 젤라틴, 스테인리스, 가변 크기
‹수근호 양공주›, 2026, 목재, 라텍스, 젤라틴, 스테인리스, 가변 크기
해당 전시 전에도 타나카 키누요(1909-1977), 루이즈 브룩스(1906-1985) 등 20세기 초반 영화사의 공인을 인용하는 비디오 내지 설치 작업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들과 그들이 연기한 캐릭터가 그들의 (적어도 영화사에 종사하는 여성으로서) 생애와 어떤 식으로 섞이고, 스스로 인용되고, 무너지는지 저의 접근에 포함시켜 새로운 정체성이나 인물, 포지션을 만드는 식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지닌 경계에 관심이 커요.
이전에 시리즈로 만들던 철제 프레임의 사진 설치 작업이나 파운드 오브제로 만든 작업들에 지금은 많이 사용되지 않는 여성형 이름을 제목으로 많이 사용해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목과 작업, 말로써 가리키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단차나 미끄러짐입니다. 해당 인물이나 오브제를 습득한 경로, 해당 작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제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데 중요합니다.
작년 d/p에서 진행한 기획전 «홀딩스»에서 선보인 ‹Actresses’ Dressing Room›과 ‹회전문과 미아›도 있습니다. 엔터테인먼트산업이 기억과 감정을 상품화하는 방식을 프랑스와 미국의 지정학적 맥락에서 탐구한 리서치에서 출발한 작업이에요. 이 두 작업에서 1920년대 프랑스 아르데코 양식과 할리우드 공장식 프로덕션 시스템 간의 관계를 설치와 조각 형태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Actresses’ Dressing Room›은 1925년 파리 국제장식박람회에 사용된 쇼케이스의 구조를 복제한 뒤, 아르데코 양식의 아주 열화된 버전을 흉내 내려는 2000년대 초반의 한국제 양산형 가구를 분해한 작업입니다.
«홀딩스», d/p, 2025
‹회전문과 미아 Revolving door and Mia›, 2025, 피그먼트 프린트와 아크릴, 가변 크기
‹회전문과 미아›는 아르데코 양식을 할리우드 영화미술에 본격적으로 수입한 MGM 영화 ‹그랜드 호텔›(1929)의 호텔 회전문을 아주 얇게 재현했어요. 댄서였던 루이즈 브룩스가 무성영화 시대의 끝 무렵에 연기한 여성형 인물이 어떻게 오마주나 전형으로 자리 잡고 할리우드 영화 산업 안에서 거듭 다시 만들어졌는지를 나타내는 콜라주를 곁에 설치했습니다.
‹Actresses’ Dressing Room›은 낙원상가의 허리우드극장을 마주보는 전시장 입구에 배치했어요. 영화 제작 시스템과 전시장 경험 사이의 시간을 겹쳐 보이게 하고자 했거든요. 형식적 모방과 재료적 혼성은 허구의 물질 구조를 드러냅니다. 프랑스에서 수집한 1920년대 오브제와 한국에서 그 양식을 모방한 저가 ‘앤티크’ 철제 가구를 결합하고, 인공 목재(MDF) 위에 천연 무늬목을 붙이거나 철제 가구를 인위적으로 부식시키는 방식으로 작업했어요. 특정 시대의 장면을 소유하려는 욕망과 ‘전시장–영화 세트–쇼룸’ 간 공간적 중첩을 의도했습니다.
‹Actresses’ Dressing Room›, 2025, MDF, 아크릴 시트, 1920년대 생산된 청동 조명기구, 쇠, 산화철 페인트, 스프레이 페인트, 합성수지 가발, 나일론 가발 캡, 등나무, 전기 배선, 거실 테이블, 유칼립투스 무늬목, 유리와 피그먼트 프린트, 가변 크기
‹Actresses’ Dressing Room›, 2025, MDF, 아크릴 시트, 1920년대 생산된 청동 조명기구, 쇠, 산화철 페인트, 스프레이 페인트, 합성수지 가발, 나일론 가발 캡, 등나무, 전기 배선, 거실 테이블, 유칼립투스 무늬목, 유리와 피그먼트 프린트, 가변 크기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생활이나 삶에서 느끼는 정체성을 동일화한다거나 계급적 소속감 문제를 동일시하면서 대상에 투영하거나 단절된 상태로 이해하려는 모습이 저에게는 가장 큰 작업 동기입니다. 이 욕망을 어떻게 통제하고 다루려는지 고민할 때 저는 항상 보여 주고자 하는 것 뒤에 숨는 사람이에요. 이런 성향이 앞서 말한 픽션이나 허구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의인화된 사물과 같은 마네킹과 인형, 오브제, 변형된 가구들이 본질에서 먼 목적으로 충돌하거나 목적 없이 충돌하는 상황을 우회해서 보여주려고 해요. 이런 이유로 제 작업은 주로 완결된 하나의 조각이 아니라 사물의 스토리텔링으로 이해되는 서사적이고 수행적인 설치작업이 됩니다.
최근 작업에서 만족스러웠던 점과 불만족스러웠던 점이 궁금합니다.
제가 직접 할 수 있는 영역과 타인에게 맡겨야 하는 영역의 경계가 흐려지고 바뀌는 상황이 자주 있었습니다. 작품을 만드는 장소와 작업을 선보이는 공간이 다를 때 설치 과정에서 생기는 변화를 즐겼어요. 멋지고 유용한 앞치마나 허리와 허벅지에 매는 가방, 골전도 이어폰 등 작업용 도구를 선물 받거나 구매한 것도 기쁜 일이네요.
‹쏘냐 II›, 2026, 혼합 매체, 가변 크기
‹쏘냐 II›, 2026, 혼합 매체, 가변 크기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을 여쭤봐도 될까요?
글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작업실에서 나가기 전에 스튜디오 생활을 중심으로 자기 관찰 일기를 밤마다 거의 매일 적었어요. 그날그날 본 것을 묘사한 내용도 많이 적습니다. 본 것을 묘사한 내용은 양이 많아서 올해 초부터 쓰기 시작한 랩 가사나 산문의 문장이 되는 경우도 많아요. 그리고 오래된 뮤지컬이나 빌리 와일더 류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틀어 두고 계속 듣고 봅니다.
요즘 작가님이 관심을 가장 많이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요즘은 말장난과 립싱크, 거짓말 사이의 세밀한 다름에 관심이 있어요.
역사와 대중문화 속에서 현실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규모 시뮬레이션과 가짜 공간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포템킨 마을이나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만들어진 ‘웨스턴 폴스 프런트(Western False Front)’ 구조물과 같이 황폐한 현실을 감추기 위해 세워진 허구의 외관에 관해서요.
BBC에서 제작한 가짜 다큐멘터리 양식을 취하는 핵전쟁 시뮬레이션 영화 중에 ‹The War Game›(1966)이나 ‹Threads›(1984)도 있어요.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만들어진 마을 규모의 세트장이나 그곳에서 촬영한 푸티지에 나레이션과 통계, 정부 문서, 교육 영화 같은 연출을 삽입하는 등의 조종 방식에 관심을 갖기도 해요.
모든 것이 가변한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전시가 끝나고 남은 작업들도 마찬가지겠죠. 그래서 작업의 대부분을 잘게 쪼개 새끼 버전을 만들어 주변에 선물합니다.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잠을 잘 자고 일어나서 작업실을 벗어나요. 혼자 멀지 않은 영화관에 가려고 합니다.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이동이 잦을 때 어떻게 체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효과적인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체력과 기분, 창작의 능률이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럴 때 기분을 즉각적으로 낫게 만드는 음악이나 창작물, 게임을 쌓아 두고 바로 해 보려고 해요. 코미디쇼를 보는 시간을 하루 일과에 끼워넣기도 합니다.
‹Delon Wetting His Seat After Motorcycle Accident Scene›, 2024, 녹은 라텍스, 석고, 에폭시, 비닐 랩, 오토바이 헬멧, 알루미늄, 선형 액추에이터,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재생기, 가변 크기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집요함과 무심함이라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뻔한 이야기지만, 같은 것을 계속 기록하고 읽고 생각하는 습관 아닐까요.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공격력 있는 조각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된 방과 어떤 소음을 내도 문제가 되지 않는 방이 합쳐진 작업 공간이자 집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잠을 자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줄일 수 있다면 좋겠어요.
Artist
Hiiona Choi 최현아(@poresgonnaharden__________ha)는 파리에 거주하며 조각과 설치미술 작업을 한다. 사물을 픽션이나 재연 같은 스스로부터 거리두기의 언어로 이해하려고 하면서, 고의적인 신체의 파편화와 재구성을 구축해 나가고 있다. d/p, The Willow(한국), Museum of Contemporary Art(크로아티아), Espace Arlaud(스위스), Agence de Voyage, Treize, AWARE: Archives of women artists, Systema(프랑스) 등에서 단체전과 기획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