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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ce of Seoul

피스오브서울: 실리카겔 ‹POWER ANDRE 99›

Writer: 김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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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nterview

다채로운 대화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피스오브서울Piece of Seoul’은 대중음악평론가 김윤하 님이 최근 새롭게 발매한 한국 대중음악 앨범 중 가장 인상 깊은 피스를 꼽고, 해당 뮤지션과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입니다. 피스오브서울에서 피스는 조각(piece)이면서 동시에 평화(peace)를 뜻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태어난 새로운 음악의 조각과 여기에서 길어 올린 마음의 평화를 뮤지션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보세요. 여섯 번째 피스의 주인공은 지금 ‘한국 록의 분명한 미래’라고 불리는 밴드 실리카겔입니다. 얼마 전 ‘2024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악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는데요. 그들이 7년 2개월 만에 2CD로 발표한 정규 2집 ‹POWER ANDRE 99›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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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춘추, 김한주, 김건재, 최웅희

2022년 8월, ‘NO PAIN’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지자, 아무도 ‘실리카겔Silica Gel’을 막을 수 없었다. 싱글 커버 이미지처럼 힘껏 공중으로 뛰어오른 이들은 자신에게 불어온 바람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계속 가속도를 붙였다. 다행히 10년여간 다져놓은 체급이 기꺼이 감당할 만한 속도였다. 2023년 3월 싱글 ‘Mercurial’, 4월 EP ‹Machine Boy›, 8월 다시 한번 싱글 ‘Tik Tak Tok’을 발표했고, 한국 땅에 존재하는 페스티벌을 모조리 도장 깨기 하겠다는 기세로 무대에 서고 또 섰다. 일 년을 꽉 채워 각종 무대를 섭렵한 이들은 11월 단독공연 ‘POWER ANDRE 99’를 열었다. 아직 발표되지도 않은 새 앨범의 신곡들을 수록 순서대로 부르는 과감한 구성이었다. 티켓은 순식간에 매진됐고, 사흘간 이어진 공연에 다녀온 이들은 온통 호평을 쏟아냈다. 그 긴 여정의 마지막에 정규 2집 ‹POWER ANDRE 99›가 탄생했다. 첫 정규 앨범 ‹실리카겔› 이후 7년 2개월 만이었다.

CD 2장에 18곡을 넣은 방대한 앨범 볼륨은 어쩌면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들이 겪어온 유무형의 경험 전부를 아우른 결과일지도 모른다. 멤버 전원이 병역의 의무를 마치자 곧이어 팬데믹이 터졌다. 그 사이 이들의 영상 아래 달리던 ‘귀 썩는 음악’이라는 댓글은 어느새 마치 마법처럼 ‘밴드 붐이 왔다’로 바뀌었다. 이 모두가 정말 마법일 리 없다. 그렇다고 단지 버티기만으로 이루어질 리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규 2집 ‹POWER ANDRE 99›는 단순히 앨범이라기보다 그러한 변화에도 한결같이 음악과 동료를 진지하게 대하던 ‘실리카겔 정신’이 음악으로 승화한 결과물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이들의 음악은 여전히 현란하고 광폭하며, 동시에 소박하고 따뜻하다. 호사가들이 말하는 장르를 떠나서, 밴드라는 형태와 음악이라는 매체로 시도할 만한 각종 실험체가 앨범 안에 꿈틀거렸다. 앨범의 방대한 서사를 이끄는 미지의 존재 ‘머신 보이Machine Boy’, 브레인스토밍 페이지를 통해 그를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재창조하는 팬들과의 상호작용까지, ‹POWER ANDRE 99›는 우리가 음악으로 경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선사했다. 말만 번지르르한 세계관이나 콘셉트가 아닌, 단단한 현실과 상상 사이 어딘가 ‹POWER ANDRE 99›가 위치한다. 누구보다 열린 자세로, 누구보다 견고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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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카겔 정규 2집 ‹POWER ANDRE 99› 커버

‹POWER ANDRE 99›를 발매한 지 두 달이 조금 넘었어요. 앨범이 발매되기 전 2023년 내내 EP, 싱글 발매에서 공연까지 전력 질주하는 기간이 있었고요. 앨범 발매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이나 느낌에 대해서 기억나는 대로 알려주실 수 있나요?

춘추: ‘휴! 나왔다!’ 사실 발매할 때까지 엄청 힘들었어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시기고, 음반이었기 때문에. 성숙한 모습은 아니지만 ‘잘해야 해!’라는 생각이 너무 커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은 후련해요. 다음 활동에 대한 기대감과 열정이 점점 커지고 있는 시기입니다.

웅희: 저는 사실 앨범 나오고 뮤직비디오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 더욱더 긴장 상태였어요. 좋은 기분은 아니었던 기억이…

건재: ‘아- 나왔다!’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좀 더 촘촘히, 좀 더 잘, 좀 더 신경 쓸 수 있는 부분을 더 챙길 수 있었다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한주: 한차례 종업식을 치러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Machine Boy’ 및 ‘POWER ANDRE 99’ 캠페인을 주파하는 감각에 드디어 제동이 걸리는구나. 그리고 자연스레 다음 작업에 대한 생각이 들었죠. ‹POWER ANDRE 99› 후에 어떤 도약을 할 수 있을지 각력(脚力)을 비축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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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정말 쉴 틈 없이 달린 것 같아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요. 힘든 순간은 없었나요?

춘추: 정말 힘들었죠. 공연하는 건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다만 음반 일정이 조금 타이트해서 그 안에 모든 걸 넣는 데에 감정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게 조금 힘들었던 것 같네요.

웅희: 물론 힘들긴 했지만, 저는 빠르게 달려 나가다 보니 음미하면서 가지 못했던 순간들이 아쉽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고속 열차를 타면 풍경이 안 보이죠.

건재: 의외로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은 많지 않았고요, 음악가가 음악을 만들고 공연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굉장히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반면에 많은 자리와 기회들을 습관적으로 건조하게 행하지 않고 싶어서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했거든요. 그런 거에 스트레스를 좀 받았던 것 같아요.

한주: 거짓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멤버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곡을 써내면서 프로젝트의 초반 기획에 힘을 싣고자 노력하는 포지션이다 보니 그 후의 과정을 떠넘기는 듯한 부채감도 상당하고요. 멤버들의 능력을 신뢰하는 만큼 의지하는 바도 크기에 작업 과정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엿볼 때마다 정말 괴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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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수많은 무대 가운데 제일 기억에 남는 무대가 뭐였는지 궁금해요.

춘추: 단독 공연 ‘POWER ANDRE 99’의 첫날이었던 거 같아요. 거의 대부분이 신곡들로 이루어진 공연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반응들이 기억에 남았어요. ‘거봐. 좋잖아’라는 생각이 딱 들면서, 공연 당시에도 진행하고 있던 앨범 후반 작업에 대한 걱정들이 많이 사라졌죠.

웅희: 뮤직비디오 촬영이 생각나네요. ‘Realize’ 뮤직비디오 촬영 날 섭외된 관객분들과 슬램도 하고 크라우드 서핑도 하고 내가 무슨 짓을 벌인 건가 생각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즐거웠다는 생각이 들어요.

건재: 이게 무대라고 하기엔 조금 다를 수도 있을 텐데요. 수많은 무대도 좋았지만, 그 무대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가져온 곡을 쓰는 시간, 회의와 제작… 그렇게 지나간 숱한 밤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아요.

한주: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바뀌곤 하는데요. 요즘엔 산산기어가 주최한 헨즈 클럽 파티에서 공연했던 때나 신도시에서 카운트다운 공연을 했을 때가 떠올라요. 연주자인 실리카겔과 관객인 분들이 서로 엄청난 기운을 부딪쳤던 게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인가 봐요. 서울 어딘가 클럽에서 게릴라 공연을 열면 다시 그런 상황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많이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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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카겔 라이브를 떠올리다 보니 갑자기 궁금해지는데요, 춘추 님은 ‘Tik Tak Tok’ 후반부 기타 솔로 연주할 때 보통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거의 접신 수준이잖아요. (웃음)

춘추: 실리카겔 곡 중에 기타 솔로라고 할만한 구간이 있는 곡들이 몇 곡 있어요. 대표적으로 ‘Desert Eagle’의 후주라던가, ‘9’의 기타 솔로처럼요. ‘Tik Tak Tok’은 그 곡들과는 다르게 즉흥적으로 녹음했고, 처음부터 즉흥적인 구간으로 의도적으로 계획했던 만큼 라이브 때마다 자유롭게 연주하곤 합니다. 저도 즉흥연주를 정말 좋아하고, 많이 공부한 분야이기도 해서 항상 즐겁고 기대되는 부분이에요. ‘Tik Tak Tok’이 있는 날이면 무대에 오르기 전에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합니다. ‘어떤 라인으로 시작할까? 저음부터 밀어낼까? 고음부터 연주할까? 단선율로 시작할까? 코드로 시작할까? 노트를 처음부터 많이 뿌릴까? 길고 적은 음으로 시작할까?’ 등등요. 연주 중에는 코드와 음, 음정과 물밀듯이 밀려오는 강력한 음의 방향성에 집중하게 돼요. 그러다 솔로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멜로디로 나설 때 그제야 멤버들을 보죠. 기다리고 있었다는 그 표정에 매번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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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햇수로 결성 10년 차가 되었습니다. 요즘 드물게 긴 시간, 단계별로 성장한 밴드라고 생각하는데요. 밴드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터닝포인트라고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춘추: 다른 뮤지션들의 음반 작업이나 개인 작업에 참여하며 기타리스트에서 프로듀서의 위치가 되어 가던 순간이 결국 실리카겔에서 제가 한 단계 성숙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한 명의 뮤지션으로서의 기량을 높인 과정이었습니다.

웅희: 저는 역시 베이시스트로 파트가 바뀐 시점이 터닝포인트였습니다. 그때부터 밴드에서 맡아야 할 음역대도 달라졌지만 흔들리지 말아야 할 역할을 맡다 보니 저의 인격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의 다짐이 지금의 실리카겔에 영향을 많이 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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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재: 저는 분명히 이들에게 영향을 받았고, 또 계속해서 받고 있어요. 그만큼 저도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을 테고요. 터닝포인트라고 콕 집어 이야기해 드리기는 어렵지만 좋은 영향을 기다리는 사람보다는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계속 든다는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제부터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러나 그 마음이 큰 터닝포인트였을 거라는 확신이 드네요.

한주: 개인적으로는 수적 지표가 늘어나고 밖에서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많아지면서 ‘뭔가 바뀌었구나’ 바로 체감하지만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성공적인 모델에 안착했다는 감각은 전혀 없어요. 그에 대한 욕심도 없고요. 그래서인지 터닝포인트라 여길 지점을 떠올리면 흐릿한 느낌뿐이에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무대에 오르고 스튜디오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상황이 달라졌다 싶은 거죠. 다만 ‘NO PAIN’ 발매쯤부터 주변 시선의 변화가 빨라진다는 느낌은 받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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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성장한 만큼 위기도 많았을 것 같아요. 한주 님은 ‘NO PAIN’을 개인적으로 굉장히 어려웠던 시절 작업한 곡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요.

한주: 사실 지금을 포함하여 쉬운 상황은 없지만, ‘NO PAIN’은 확실히 그런 것들을 밀어내고자 만든 곡이란 느낌이 크죠. 어찌 보면 신화 속 이카로스Icarus 같은 느낌도 있어요. 태양에 닿고자 ‘NO PAIN’을 외치지만 날개가 녹으면 ‘Mercurial’에 어울린달까요. 하지만 ‘NO PAIN’은 날개가 녹아도 우리의 의지는 어느 지점에서 하나가 된다는 이야기에 가깝다고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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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PAIN› 커버

‘피스오브서울’은 앨범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인터뷰인데요. 이번에는 사전 정보를 찾을수록 오히려 어려워지는 지점이 있어요. 멤버들 모두 앨범 관련 인터뷰나 방송에서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기도 했고요. 생각해 보면 이 기조는 실리카겔의 활동 전반을 둘러싼 어떤 ‘정신’이기도 한 것 같아요. 자신들의 결과물에 대한 해석을 ‘열어 놓는다’라는 건 밴드 실리카겔이 음악이나 창작물을 대하는 태도일까요?

춘추: 명확한 의미나 사상이나 뜻을 전달하고 싶지 않아요. 멤버들끼리도 취향이 너무나 달라서 뭘 정하든 지금도 만장일치가 나오는 경우가 잘 없어요. 저희끼리도 좋아하는 게 이리 다른데 어떻게 우리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뜻과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까 싶어요. 그래서 저는 해석의 여지를 열어 놓고 싶다는 표현보다, 추상적이어도 좋으니 어떤 느낌을 즐겼으면 해요. 뭔가를 보거나 듣거나 맛보았을 때 ‘!’ 하는 그 찰나의 순간이 있잖아요. 그 느낌을 즐기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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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희: 저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때 처음 접하고 펼쳐지는 다양한 세계,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상을 너무나도 즐겨요. 그래서 그런 기분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게 커요. 근데 최근엔 조금씩 의도를 설명드리는 것도 재미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건재: 분명히 기초, 근원에는 정확한 생각이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걸 규정하면 아무래도 재미있는 상상력이나 펑션이 나올 가능성을 좁히는 행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느끼는 건, 저희는 활짝 열려있지만, 또 분명히 닫혀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는 점이에요. 그런 양면성 덕분에 저희도 아마 똑바로 규정하거나 재단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해요

한주: 이런 질문에조차 열린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네요. 실리카겔은 꽤나 다자적인 그룹이에요. 결성 때부터 명백한 리더 체제로 운영되기보단, 구성원 각각의 기능이 원활하게 작동하며 자연스레 형성되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방식이었고요. 그만큼 각 모듈의 해석을 방임적으로 두고, 합쳐질 때의 임의적인 결과물을 즐겁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만드는 음악이나 세계관적 내용 또한 느슨하게만 합의하고 각자의 해석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어요. 작품을 공개한 후에도 감상하는 분들을 저희의 다자주의적 평행선에 두면 좋겠다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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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치열할 만큼 꼼꼼한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게 실리카겔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음악도 음악이지만 외적인 면도 그렇죠. 그렇게 모든 게 열린 ‹POWER ANDRE 99›의 첫 곡 ‘On Black’을 1집의 ‘비경’과 같은 코드로 흡사하게 작업한다거나, 오랜만에 금의환향한 ‘헬로루키’ 축하 무대에서 수상 당시 마지막 곡으로 불렀던 ‘9’를 다시 부른다거나 하는 것들요. 실리카겔이 다양한 결과물을 만들면서 가장 ‘대충 하는’, 즉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부분과 가장 ‘꼼꼼하게 작업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춘추: ‘대충’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 명확한 의미나 내용을 전달하는 것보다 더 쉽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일은 듣는 사람에게 확실한 무언가를 넣는 게 아니라, 다양한 감상이나 인상의 느낌을 떠올리도록 더욱더 치밀하고 디테일한 요소를 넣는 작업으로 연계돼요. 의도적으로 우리가 전달할 내용을 빼는 게 아니랍니다. 저희는 ‘이 정도는 비워놓자’라고 작업하는 부분은 단 한 군데도 없어요. 모든 것에 의도가 있고, 그것이 해석적인 공백이 되도록 만드는 것 또한 실질적인 작업 과정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웅희: 이번 ‹POWER ANDRE 99›의 꼼꼼한 부분은 역시 사운드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운드는 해석의 여지가 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반면 제가 만든 ‘Ryudejakeiru’의 뮤직비디오는 해석이 여러 갈래로 파생되더군요.

건재: 아마 저희가 가장 대충 하는 부분은 본인의 건강 아닐까 해요. 적어도 무언가를 만들면서 ‘대충’을 겨냥하고 행했던 적은 제 기억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대충 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이 자리를 빌려 사과를 드립니다. 저 단어를 떠나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부분에 주안점을 둔다면 짧게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을 장황하게 늘려서 전달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저게 또 대충 하는 느낌은 아니거든요. 엄청 꼼꼼하게 이것저것 연결해 본다는 말이죠. 이 답변이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웃음)

한주: 해석의 여지를 남긴 듯한(대충 혹은 느슨하게 보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업들은 대체로 ‹POWER ANDRE 99›처럼 거시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프로젝트에서 더욱 그렇지 않나 싶네요. 그 안에 미시적으로 구성된 모든 요소는 가장 꼼꼼하게 작업하는 부분이라 답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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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의 여지를 열다 열다 ‹POWER ANDRE 99›의 브레인스토밍 페이지까지 만들었어요. 이 아이디어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한주: 앨범에 있어 여러모로 감상하신 분들의 해석이 열려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걸 실천할 장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에 채무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러다 발견한 서비스예요. 실리카겔이 작업적으로 실천하는 탈중심화를 그대로 열어둘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겨 오픈하게 됐어요. 아이디어는 멤버들이 제출했지만, 준비하는 데는 저희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크루가 힘을 많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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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ANDRE 99› 브레인스토밍 페이지 © 실리카겔 공식 인스타그램

뇌가 어마어마하게 커져 있더라고요. (웃음) 혹시 직접 확인한 브레인스토밍 결과 중에서 가장 기발하거나, ‘우리 생각을 간파했다!’ 싶은 내용이 있었다면 알려주세요.

춘추: 재미있던 것 중 하나가 있어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뭔가 갑자기 곡의 내용을 설명하는 글에(무슨 곡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Mercurial’이었나?) 개구리가 등장해서 뭐 ‘○○○은 개구리였다’ 이런 글이 있었거든요. 거기에 그 개구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웅희: 간파한 부분도 많다고 생각하지만, 저희가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감상평 혹은 해석이 정말 많고 재밌어요. 저는 ‘PH-1004의 신체 개조라는 트렌드와 자폭 시스템’이라는 파트가 너무 재밌었습니다. 하염없이 읽게 돼요.

건재: 직접적인 내용 한 줄을 꼽기보다는, 살아가면서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꼭 해줄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 멋대로 힘내자고 하지 않는다든가, 상상을 만들어 대입해 해소해 본다든가, 응원이나 위로하는 그런 것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것들요. 우리가 그 안에서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한 ‘한 덩어리’라는 느낌이 되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 보니 서로를 빌어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것 같은 풍광이 기억에 남습니다. 본인이 스스로에게 말해줄 때는 무엇보다 본인의 속도와 본인의 시간으로 하게 되고, 또 듣게 되잖아요. 많은 예시나 우화들을 만들어 이야기하던 게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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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ANDRE 99› 브레인스토밍 페이지 중 일부 © 실리카겔 공식 인스타그램

한주: 앞서 이야기했듯이 ‘저희의 생각’이라는 부분은 꽤나 느슨한 영역이라서 어떤 내용이 그에 부합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애초에 해당 프로젝트 오픈 때부터 서비스가 허락하는 한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었기에 그런 면에서는 정점(APEX)을 갱신했다고 생각합니다.

‘출마를 선언합니다’라는 말이 멤버와 스태프 사이에서 유행이라고 들었어요. 요즘도 계속 유행 중인지, 혹시 2024년 새롭게 생긴 유행어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건재: 조금씩 변화구가 있긴 하지만 아직 애용 중인 문구입니다. 연초라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공통적으로 제일 많이 한 말은 아무래도 어떤 일정이 끝나면 ‘수고하셨습니다’와 같은 말인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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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앨범 얘기를 해 볼게요. 우선 18곡이라는 수록곡 숫자부터 압도적인 앨범이 아닌가 싶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면 거의 광기 아닌가요?! 처음부터 이렇게 큰 볼륨이 될 걸 예상하고 작업했는지, 어쩌다 이런 볼륨이 됐는지 궁금합니다.

웅희: 다들 정규 2집에선 오랜 기간을 투자해서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는 쪽으로 합의했던 것 같아요. ‹POWER ANDRE 99› 이전에 보여줬던 ‹Machine Boy›와 그 앞에 발매한 싱글들도 ‹POWER ANDRE 99›의 서사를 염두에 두고 작업하며 발매했거든요. 그런 이유로 2CD의 정규 앨범이 나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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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curial›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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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ine Boy›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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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k Tak Tok› 커버

‹POWER ANDRE 99›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웅희: ‘Mercurial’을 발매하기 전부터 거대한 정규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쌓아 올리자는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 그 당시 인간의 형태를 한 기계의 이미지를 필두로 한주가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때 한주가 썼던 짧은 글이 있었는데요. 빌드업 과정에서 해당 글과는 멀어졌지만, 그게 최초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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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곡을 1차로 배치하고 조금씩 다듬어 갔다고 들었어요. 혹시 처음부터 절대 위치가 바뀌지 않았던 곡이나 최종 단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추가된 노래가 있을까요?

춘추: 처음부터 가장 강력한 위치를 고수했던 것은 아무래도 ‘On Black’과 ‘Eres Tu’였어요. ‘시작은 무조건 이렇게 가져가야 해!’라는 느낌이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지라 이것만큼은 그대로 보여주자고 다들 생각했어요. 작업 후반에 ‘PH-1004’라는 곡을 추가하기로 했죠. 아무래도 수록곡 간의 다이내믹을 최대한 크게 가져가고 싶었어요. 이번 앨범에서 어쩌면 가장 극단적인 수록곡이죠.

확실히 그런 느낌이에요. 앨범 첫 곡 ‘On Black’을 듣자마자 ‘나는 지금 ‘POWER ANDRE 99’가 주인공인 이야기에 초대되었구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거든요.

한주: 맞아요. 애초에 1번 트랙으로 사용할 곡이 필요해 만들었습니다. ‹POWER ANDRE 99›라는 앨범의 부팅 이미지를 선사하는데 집중했어요.

앨범의 마지막 곡 ‘PH-1004’도 그래요. 자연스럽게 긴 이야기가 마무리된 뒤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춘추: ‘PH-1004’는 머신 보이의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싶어서 나오게 된 곡이에요. 사랑 노래처럼 보이지만, 사실 엄청 불안정하죠. ‹POWER ANDRE 99›에 수록된 강렬한 곡들과 강하게 대비시켜 이런 모습도 잊지 말아 달라는 목적이었달까요? 저희가 ‘Machin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고, 비주얼적으로도 기계, 금속을 느끼게끔 했지만, 결국 머신 보이의 이야기는 저희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앨범에는 ‘Realize’, ‘Budland’, ‘Mercurial’, ‘NO PAIN’처럼 이미 발표한 곡과 신곡이 새롭게 조합돼 있어요. 저는 글을 새로 쓰는 것보다 수정하는 게 더 어렵던데요. 기발표 곡을 새로 줄 세우는 게 어렵지는 않았나요?

건재: 사실 저희가 묵혀놨다가 다시 꺼내 후닥닥 재편해 사용하는 경우도 왕왕 있고, 지속적으로 계속 편곡해서 재생하는 곡과 소리도 있어요. 많이 어려운 접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니라서 딱히 어렵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수정이라는 주제는 늘 어려워요. 그렇지만 잦은 수정은 결국 곡의 퀄리티를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곡을 쓰는 단계에서 앞뒤 순서를 상정하고 만들어놓은 것도 있다 보니 ‘으악! 어려워서 못 하겠다!’라는 느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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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앨범에 새로 들어간 곡들 위주로 여쭤볼게요. 첫 곡이 끝난 뒤 ‘Eres Tu’와 ‘Juxtaposition’이 바로 이어집니다. 연주나 편곡, 구성적 측면에서 각각 실리카겔 ‘초기’와 ‘지금’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곡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두 곡은 어떤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나요?

한주: 두 곡 모두 ‹POWER ANDRE 99› 프로젝트 콘셉트에 대한 기여를 의식했어요. ‘Eres Tu’에서는 실리카겔 멤버들이 지닌 컬러풀한 지점과 돌발적이지만 글리치한 느낌을 살리려고 했죠. 이어지는 ‘Juxtaposition’은 앨범이 어필해야 하는 질감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기계적이고 강압적인 뉘앙스를 강조하게 됐답니다.

‘APEX’와 ‘Ryudejakeiru’는 앨범의 더블 타이틀로 정해져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곡들이라는 느낌이었어요. 실리카겔이라는 요소를 이루는 불과 물을 극대화해 만든 작업이랄까요. 두 곡을 타이틀로 정하면서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궁금합니다.

춘추: 그런 의도를 가지고 발매했던 건 아니지만, ‘NO PAIN’의 집중도가 우리에게 어쩌면 선입견을 만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저희는 이때 더 이상한 걸 들려주자는 생각으로 곡을 쓰고 작업했어요. ‘APEX’를 필두로 우리가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다만 단순히 이상한 것만 던져놓는 실리카겔이라는 이미지도 저희가 원하는 건 아니었기에 이번 앨범이 우리의 단적인 모습에 집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PEX’가 ‘들어라!’라는 곡이라면, ‘Ryudejakeiru’는 ‘같이 듣자!’라는 곡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NO PAIN’을 기점으로 드디어 실리카겔의 노랫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라는 반응이 소소한 화제가 되기도 했죠. (웃음) 가사는 실리카겔 음악의 그 어떤 부분보다 열린 영역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혹시 이번 앨범에서 그렇게 ‘들리는 것’ 혹은 ‘함께 부르는 것’을 의식하고 쓴 가사나 단어가 있을까요?

춘추: 아무래도 ‘Ryudejakeiru’의 후반부 합창 부분이 아닐까 해요. 가사는 “나나나” 뿐이지만, 실제로 녹음하면서 다양한 보이스와 다양한 인격을 담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희 목소리로도 담고, 괴상하게 목소리를 내어서도 녹음을 받았죠. 단순히 다수의 사람이 노래하는 연출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노래하는 모습을 염두에 두고 소리를 담아 봤어요.

얼마 전 EBS에서 바로 그 ‘Ryudejakeiru’를 실버 합창단과 함께 부르는 색다른 연출을 보여주기도 했어요. 라이브 당시도 그렇고 이후 인터뷰에서도 멤버들 모두 상당히 몰입한 것 같더라고요.

웅희: 모두가 어울려 화합하고 싶다는 초기 아이디어가 있었어요. 그때 저는 뚝딱이와 번개맨, 뿡뿡이 등 EBS의 유명 캐릭터들을 한자리에 모아 어벤져스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덕분에 뚝딱이를 만날 수 있었네요. (웃음) 여하튼 이를 시작으로 어떻게 하면 소외받지 않고 모두가 모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어린이 합창단 혹은 실버 합창단과 ‘Ryudejakeiru’를 다 함께 부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감동적일 것 같다는 추측으로 시작했는데, 기대보다 더 감동적인 무대를 만들어주셔서 다시 한번 합창단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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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에 또 하나의 감동 포인트가 있던데요. 건재 님이 ‘Gosan’에서 처음으로 보컬을 담당했어요. (웃음) 상당히 목가적인 느낌이 드는 게 실리카겔 음악에서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묘한 감상을 자아내더라고요. 곡의 뼈대를 건재 님이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건재: 과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실리카겔에서 잘 느껴보지 못한 묘한 감상을 느끼셨다고 말씀해 주시니 무척 즐겁네요! 아무래도 들리는 목소리 중에 제가 전면에 있다 보니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어요. ‘Gosan’은 하나의 생각이나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곡은 아니에요. 당시에 저를 이루던 생각, 몸, 시각, 청각 등을 뭉쳐서 음악으로 표현해 봤습니다. 일본 다카야마(高山)에 가면 높이 솟은 나무들이 참 예쁘게도 계속 풍경을 펼치는데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오지 않은 미래를 빌려서 사랑을 노래 해봤어요. 그리고 그 텍스트에 음을 덧칠해 봤습니다. 듣는 데 도움이 되실까요? (웃음)

사실 ‹POWER ANDRE 99›는 들으면 들을수록 이렇게 조각조각 나누어 물어보는 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돼요. 단순한 앨범 한 장이 아니라, 마치 2023년 실리카겔의 모든 조각을 모은 ‘시간과 공간의 방’으로 다가옵니다. 그 공간에서 멤버 각자에게 가장 큰 울림으로 남은 건 무엇인가요?

춘추: 소위 ‘머신 보이’ 세계관에 한 해 동안 집중했던 과정이 콘셉트와 활동 방향, 그리고 이전의 저희에게 부족했던 것, 이후의 저희에게 필요한 것을 많이 감지하도록 도와준 것 같아요. 선택과 집중이란 게 어쨌든 중요한 상황에서, 실리카겔이 지닌 가능성에 대한 작은 확신과 새로운 추진력의 원동력을 축적한 한 해이자 프로젝트였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하네요.

웅희: 저에게 큰 울림이었던 순간은 다른 멤버들의 방을 구경할 때였습니다. 말씀대로 멤버들의 시간에 감명받으며 버텨왔어요. 제게 가장 큰 힘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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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재: 너무 멋진 질문을 주셔서 부담스러운데요. 그냥 다른 미사여구나 이것저것을 차치하고 아무래도 ‘이들과 내가 열망하고 사랑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라는 마음이 항상 동력이 되어주는 것 같아요. 존경이나 표현의 울림은 평소에도 장착이 돼있어서 따로 꼽기 어렵네요!

한주: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앨범 뮤지션으로서 탄력을 회복한 게 크지 않나 싶어요. 싱글이나 EP 이슈도 좋아하지만, 시즌별로 넉넉히 표현할 수 있는 단위는 앨범이니까요. 이런 탄력을 활용해 이제 새로운 일을 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실리카겔의 멤버들이 서로에게 모두 좋은 동료이자 자극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제작 막바지에는 멤버들이 먼 곳으로 떠나서 집중적으로 합숙 작업을 한 걸로 알고 있어요. 당시 재미있었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건재: 뭐 다들 꼴이 말이 아닌 채로 작업하던 모습이 다 코미디였던 것 같은데요. (웃음) 사실 너무 고농도로 집중하다 보니 제게는 기억이 감각으로 남아있지, 시간의 시점으로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최웅희 감독님의 유튜브 채널 ‘채 웅희최 널’의 ‘SILICAGEL AWESOME MOMENTS’를 통해 생생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POWER ANDRE 99›를 만드는 과정에서 새롭거나 기억에 남는 순간을 알려주세요. 자기만 아는 특정 곡의 숨겨진 포인트나 작업 당시 에피소드도 환영합니다.

춘추: 믹싱할 때 기억을 하나 꼽자면, 사실 믹싱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이번 음반에는 더욱더 성숙한 사운드를 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기존 실리카겔이 작업하는 방식에서 부족한 요소들을 보완하는 여러 방법과 시도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우선순위에서 떨어지는 트랙(곡 안에서의 개별 트랙)들은 많이 탈락하기도 했어요. 지금까지는 다양한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는 방식으로 믹스를 해왔었는데, 이번에는 조금은 닫힌 방식으로 제 기준과 판단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방법적으로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아쉬운 것은 아쉽고 좋은 것은 좋았던 건 마찬가지긴 하네요.

웅희: ‘Ryudejakeiru’ 뮤직비디오 촬영 날 하늘이 도와주신 덕분에 날씨가 따듯했어요. 덕분에 야외에서 스텝들과 배우들이 다 같이 모여 앉아 햄버거를 먹었는데 그때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아무래도 좋은 기억만 남아서 추억이 보정된 것 같긴 하지만요. (웃음)

건재: 녹음 전 사전단계에서 정말 엄청나게 고민하고, 연구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가며 준비했거든요. 한 곡 한 곡 사운드 셰이프Shape를 예측하며 모델링을 하고, 이를 토대로 이것저것 심벌즈들과 드럼들을 조합한 후 몽땅 들고서 녹음 장소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한 모델, 한 조합, 한 구성 등등을 꺼내면서 멤버들과 소리를 듣고, 좋아하고, 부정하고, 의문을 가지고, 선택한 소리들을 담았습니다. 그 기억이 많이 남아있어요. 체력이 좋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녹음을 끝낸 후 끼니도 못 먹을 정도로 졸아버리곤 했답니다.

한주: ‘Babyface’라는 트랙을 작곡하던 당시의 상황이 생각나요. 중후반부 기타와 보컬 유니즌 솔로를 메이킹할 때 술에 취해있었거든요. 작업방에서 홀로 기타와 보컬을 동시 연주로 녹음하며 극에 치닫는 기분을 느꼈던 추억이 있습니다. 후에 스튜디오에서 춘추 씨가 해당 파트 기타 연주를 하냐 마냐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결국 제가 술에 취해 녹음한 데모 테이크가 앨범에 반영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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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라디오 방송에서 ‘실리카겔은 멜로디스트들의 모임’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저도 무척 동의합니다. 데뷔 당시 독특한 사운드로 주목받았지만, 실리카겔 음악의 핵심은 아름다운 멜로디라고 생각하거든요. 혹시 멤버들 각자 ‘이건 정말 끝내준다’라고 생각하는, 특별히 좋아하는 실리카겔의 킬링 멜로디가 있을까요?

춘추: ‘Mercurial’의 멜로디 라인을 정말 좋아해요. 느린 템포, 비교적 빠른 하모닉 리듬으로 순차 진행되는 코드, 길게 뻗어나가는 벌스Verse 멜로디, 후렴 직전의 변화폭이 작은 긴장감을 주고, 후렴에서 다소 편안한 진행감의 멜로디가 주는 카타르시스, 2절에서 치고 나오는 과감하고 다이내믹한 벌스 등 여러 가지로 다양한 다이내믹이 만들어지는 좋은 멜로디라고 생각합니다.

웅희: ‘Andre99’의 메인 멜로디도 좋지만 ‘9’의 베이스 라인도 킬링 멜로디라고 생각합니다. 베이스를 한번 들어보세요. 하하!

건재: 그때그때 취향이 달라지는데요. 요즘에는 ‘Juxtaposition’의 후주에 나오는, 저희 표현으로 말하자면 ‘국밥 베이스 라인’을 참 좋아하고 있습니다.

한주: 진성 멜로디스트로서 하나는 너무 어렵고 둘을 꼽자면, ‘Kyo181’과 ‘NO PAIN’ 이야기를 해볼게요. ‘Kyo181’은 하나의 동기 멜로디로 곡 전체를 해결하는 재밌는 곡이에요. 멜로디스트로 유명한 작곡가들은 미니멀리즘적 경향을 겸비하고 있기도 하죠. 멤버로서 칭찬하는 게 우습지만, 정말 좋은 곡이에요. ‘NO PAIN’은 A-B-C-D 전개가 명확한 곡인데요. 인트로-인터루드-아웃트로 테마와 후렴 멜로디가 주는 힘이 곡 전체를 잘 아우른다고 생각해요.

실리카겔은 ‘동료와 함께하는’ 것을 무척 중시하는 밴드 같아요. 실제로도 영상감독, 엔지니어, 스타일링 등 지금 함께하는 스태프 중 데뷔 때부터 호흡을 맞춘 이들이 많고요. 추상적인 노랫말 가운데에서도 ‘모두’, ‘함께’ 같은 단어에는 유독 방점이 찍힌 듯한 느낌을 받아요. 실리카겔에게 ‘동료와 함께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춘추: 예전부터 주변 뮤지션들이 ‘새로운’ 작업자를 매번 찾아가는 게 좀 의아했어요. 이렇게 중요한 프로젝트에서는 당장의 아웃풋보다 팀워크가 더 중요한 거 아닐까, 생각하거든요. 밀도 높은 작업은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깊은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좋은 아웃풋의 비밀은 결과물 그 자체보다 작업자들 사이에 있다고요. 좋은 작품은 특정한 누군가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함께하지 않으면 생길 수 없는 신뢰와 여유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에 함께하는 동료 한 명 한 명이 감사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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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희: 혼자였다면 절대, 절대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었다고 자주 생각합니다. 아까 말했듯 멤버들도 그렇지만 동료들이 저희 프로젝트를 위해 모든 걸 쏟는 모습을 보면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어요. 저를 성장시킨다고 할까요?

건재: ‘좋은 동료가 계속 있어 줄 이유를 계속해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계속 머무를 수 있는 이유를 계속 제공할 수 있어야 하겠다 싶어서요. 그래서 뭐든 열심히 하려고 노력합니다.

한주: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실리카겔 멤버, 동료 작가, 동료 스태프 등을 아우르는 관계에서 오는 시너지가 지금까지 실리카겔에 굉장히 중요한 에너지를 선사했어요. 앞서 언급했지만, 실리카겔의 세계는 꽤나 다양하고 다자적이기에 저희와 알맞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모듈을 잘 연결해 두고 재밌는 일들을 합성해 내려고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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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상은 실리카겔이라는 밴드 색깔에도 반영됩니다. 멤버 네 사람 모두가 그 자체로 실리카겔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완전히 독립된 음악가라는 인상을 무척 강하게 받아요. 이렇게 민주적으로 바람직한 운영은 어떤 공감대를 바탕으로 가능한 걸까요?

춘추: 오랜 활동으로 자연스럽게 학습된 멤버들 간의 무언가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성격과 경향, 취향… 이런 것들이요. 100% 알긴 어렵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여러 요소가 있거든요. 그런 것들이 멤버들 간의 신뢰를 공고히 해가면서, 서로를 인정하는 거죠. 딱히 다른 이유가 필요 없이, 오랫동안 서로를 이해하려고 고민도 많이 하고, 그렇게 지내온 시간이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해요. 그 힘든 기간을 버틴 멤버들도 대단합니다.

웅희: 각자가 서로를 존경하기 때문에 이런 운영이 가능한 것 같아요. 일전에 이야기했던 ‘팀플레이’라는 이야기가 다시 한번 생각나네요.

건재: 하하. 과찬 감사합니다. 사실 저희 스스로 훈수를 둘 만큼 대단한 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사회적, 미학적, 예술적인 차원에서 모범 사례가 되고 싶어 소망하거나 집착하는 그런 열망도 강하지 않은 편인 것 같고요. 제 경우에는 그냥 저의 부족한 점이나 나약한 점을 더 정확히 인지하거나 찾으려고 노력하고, 보완할 방법을 고민하죠. 물론 힘든 부분도 여전히 많아요. 이를 마주하고 고민하는 행위가 분명 즐겁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하면서도, 그렇게 쉽기만 하지 않을 때가 늘 있거든요. 뭐…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생각 위에서 자란, 이를테면 삶을 견지하려는 태도 같은 게 다들 여러 모양으로 존재할 테고, 뭐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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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 전체적인 공감대는 실리카겔이라는 규정할 수 없는 사상으로 엮이는 게 아닐까 싶고요. 기본적으로는 멤버들 각자가 지니고 있는 전문적인 영역을 최대한 존중하고 따르려는 의지인 듯해요. 저의 경우, 작/편곡 혹은 작사나 초기 아이디어 제안이 주된 역할이라면, 춘추 씨는 실리카겔의 기술적인 모든 부분을 감독하고 있어요. 음향적인 부분, 물건이 관여하는 부분에 누구보다 전문적이죠. 건재 씨는 드러머로서 물리적으로 구현해야 하는 부분들을 치밀하게 잘 짜내고, 프로젝트에 있어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내거나 행정적인 처리를 말끔히 하는 등 그만의 분야가 있답니다. 웅희 씨는 최근 실리카겔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고, 개인 채널에 저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유하는 등 음악 이외에도 멀티미디어적인 부분에 일조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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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실리카겔이 걱정 없이 단단하게 항해할 것 같다는 믿음이 드는 대답들이네요.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웃음) 올 한 해 실리카겔로서의 활동과 멤버 개개인의 활동도 다양하게 준비하고 있는데요. 혹시 공개해도 좋은 이슈를 알려줄 수 있을까요?

춘추: 개인적으로는 ‘놀이도감’이라는 프로젝트가 있는데요. 기회가 된다면 공연도 하고 음반도 내게 되겠죠? 일단은 실리카겔의 다음에 조금 더 신경을 많이 써보고 싶습니다!

웅희: 올해 뮤직비디오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상물 시리즈 제작을 생각 중이에요. 그리고 조만간 5월에 큰 공연이 있겠네요.

건재: 역시나 일단 실리카겔의 제작 및 활동이 언제나 최우선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더 많이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요. 그런 마음이 흘러넘칠 때마다 조금씩 모아 ‘시라카미 우즈Shirakami Woods’에도 풀어내 보고 싶습니다. 이런 실험을 통해 실리카겔과 제게 양분이 되는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거든요.

한주: 실리카겔은 변태(變態)를 거듭하지 않을까 싶어요. 깜짝 놀랄 법한 이벤트가 있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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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새롭고 용감한 사운드(Brave New Sound)’. 밴드 실리카겔Silica Gel은 김한주(건반/보컬), 김춘추(기타/보컬), 김건재(드럼), 최웅희(베이스) 4인으로 이루어진 밴드다.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바탕으로 구축해 낸 고유의 사이키델리아, 폭발적인 에너지의 라이브 퍼포먼스가 응집하여 현재 가장 새롭고, 용감한, 사운드를 만드는 밴드 실리카겔이 되었다. 2015년 EP ‹새삼스레 들이켜본 무중력 사슴의 다섯 가지 시각› 발표 이후 정규 앨범 2장, EP 3장, 다수의 싱글을 발표하며 활약 중이다. 그들의 가능성이 궁금하다면 그 답은 음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도 시도한 적 없기에 들어본 적 없는, 들어본 적 없기에 새로울 수밖에 없는, 이상한 것들은 늘 곱씹을수록 새로움을 선사하기에. 

Writer

김윤하(@romanflare)는 K팝에서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관해 쓰고 이야기하는 대중음악평론가다. 다양한 온오프라인 매체에 글을 기고하거나 출연하면서, 가끔은 작가 겸 기획자, 음악 콘텐츠 프로듀서로 일한다. 2023년 TVING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케이팝 제너레이션K-POP GENERATION›에 스토리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현재 «한국일보» «국민일보» «시사IN» «채널예스»에 칼럼을 연재하며,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사랑과 음악이 끝내 세상을 구할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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