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션 카코포니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온 마음과 온몸으로 노래한다고요. 엄마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며 치솟은 감정을 음악으로 풀며 갑작스레 뮤지션이 된 그에게 가장 중요한 음악적 덕목은 진심을 담는 것입니다. 매사 솔직해지기 위해 누군가를 따라 하지 않는다는 그는 ‘나만의 것’을 만들고 있다고 확신하는데요. 음악마다 마치 지문처럼 찍히는 그의 목소리에서 자신의 길을 걷는 창작자의 모습이 떠오른답니다. 음악에 욕망이 아니라 사랑을 담고, 세상을 어떻게든 사랑하려고 발버둥 치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카코포니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온 마음과 온몸으로 노래하는 카코포니입니다. 2018년 정규 1집 ‹和›로 데뷔 후 꾸준히 작업하고 있어요. 감사하게도 프로듀싱이나 영상 음악 작업을 의뢰하는 분들이 계셔서 현재 음악감독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자칫 무거워질 수 있지만 사실이니까 숨길 필요 없이 편하게 말씀드릴게요. 저는 엄마의 죽음을 옆에서 목도하고 음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누군가의 죽음 곁에 서 있으면, 그 사람의 삶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기회가 생깁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엄마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어요. 하지만 엄마를 용서하자마자 이별해야만 하는 끔찍한 상황에 놓였죠. 이런 경험에서 비롯된 감정을 둘 곳을 찾지 못하다가 ‘그냥 다 그만두고 음악을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어요. 사회에서 말하는 나름의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외무고시를 준비하던 중이었는데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참 어렵지만 그렇게 순간 떠오른 생각을 계기로 음악을 선택했습니다.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성산동에 있는 작업실을 기타리스트 거누와 함께 쓰고 있어요. 제 모든 작업물이 만들어지고 생활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거누와 저는 돈을 벌면 죄다 장비와 플러그인에 투자하는 편이라, 작업실에 뭐가 참 많아요. (웃음) 벽에는 소중한 순간을 품은 물건을 붙여 두었는데요. 전시 팸플릿, 티켓, 편지, 엽서 등 두고두고 보고 싶은 게 마구잡이로 있답니다. 말만 들으면 굉장히 정신 사나운 공간 같지만, 예상외로 매우 아늑해요!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사실 어떻게 영감을 받는지 잘 모르겠어요. 멜로디는 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고, 음악을 완성하는 방법은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가 떠올라요. 최근 제가 완성하지 못한 데모 음원의 수를 확인해 보니 1000개가 넘더군요. 저를 찾아오는 영감을 가끔은 버겁게 느낄 때도 있는데요. 그래서 어떻게 작업을 완성해야 하나, 더욱더 고민하는 것 같아요. ‘이 음악이 지금의 나와 어울리는가?’, ‘내가 지금 도전하고 싶은 완성의 영역인가?’ 등을 스스로 질문하며 작업을 시작합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보통 아이폰 녹음기 앱을 켜고,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작업을 시작해요. 신기할 정도로 멜로디와 가사가 맞물려 곡 하나를 완성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멜로디에 맞는 가사를 찾으면서 작업하죠. 그렇게 가사를 완성하면 다음 순서는 편곡인데요. 가사가 품은 이야기가 이끄는 방향대로 악기를 쌓아가며 멜로디에 옷을 입힙니다. 이야기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올바른 방향으로 악기를 쌓는 일에 시간을 오래 투자해요. 작업물을 완성하면 차분히 들어보며 어떤 악기를 빼야 하는지 고민합니다. 혼자서 판단하기에 역부족이란 느낌이 들 땐, 연주자에게 도움을 요청해 작업물을 함께 완성해요. 곡을 완성한 다음에는 녹음을 하고 믹싱을 합니다. 최근에는 여러 곡의 믹싱 작업도 제가 직접 맡았어요. 믹싱 단계에서는 이야기를 해치지 않고, 필요하다면 이야기를 더 재밌게 전달할 방법을 연구하며 각각의 소리를 배치합니다. 믹싱까지 마치면 곡의 마스터링 작업이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품을 수 있는 영역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스터링 엔지니어분께 최종 작업을 맡깁니다.
‹Reborn› EP 커버
최근 작업 중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은 몇 가지 예를 들어 주시겠어요?
작년 11월 23일, 정규 3집 ‹DIPUC›을 발매했어요. ‘DIPUC’은 사랑의 신 ‘큐피드Cupid’의 철자를 반대로 적은 단어인데요. DIPUC이라는 단어는 어린 남성인 큐피드를 대신해, 성인이자 여성인 제가 사랑의 화자가 되는 ‘뒤집힌 이야기’를 상징해요. 이전 앨범에서는 저의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그대로 제시하며 상황에 지배된 무기력한 소녀를 등장시켰는데요. 이번에는 상황을 지배하는 여성으로 변모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저의 개인사를 복원해 스스로 역사의 주체로 위치시킨 앨범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정규 3집 ‹DIPUC› 커버
이번 앨범에서는 총 세 편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는데요. 가장 먼저 선공개 곡 ‘End’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어요. 타로Tarot 중 ‘소드 10번(Ten of Swords)’에서 영감받아 김도이 감독이 제작을 맡았습니다. 타이틀인 ‘당겨요, 바로 지금’은 저의 폴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촬영한 영상입니다. 해당 뮤직비디오는 백윤석 감독이 맡아 주었어요. 마지막으로 ‘살아남은’의 뮤직비디오는 저의 단독 공연 무대에 함께 섰던 안무가 젬마 님이 직접 출연하고 연출까지 해주셨습니다.
‹당겨요, 바로 지금(Draw The Bow Right Now› 촬영 현장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나의 잘못이 아닌 일로 벌어진 끔찍한 상황, 이로 인한 트라우마로 삶이 망가진 분에게 ‘살아도 괜찮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함께 살아갈 수 있다’라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망가진 이들은 서로 냄새를 맡고 알아보며, 서로의 아픔에 공감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은 ‘카코포니’의 변화예요. 대중에게 단순히 토해내는 음악가가 아니라, 매력적인 여성으로 비쳤으면 했습니다. 음악적인 면에서 과감하게 쌓을 뿐 아니라, 뺄 수도 있는 뮤지션임을 증명하고 싶었어요. 지금까지는 대중과 거리가 먼 뮤지션으로 보인 것 같은데요. 이번 3집을 통해서 이제 카코포니가 팝 아티스트라는 점을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End(없어)› MV 스틸 이미지
작업을 진행했을 때 만족했던 부분과 불만족했던 부분이 궁금합니다.
저는 이번 앨범에서 뼈를 깎는 노력과 좌절을 통해 자신을 엄청나게 바꿨어요. 그런데 주변 사람에게 이번 음반의 수록곡을 들려주면, 제가 얼마나 변했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그런 반응이 굉장히 불만족스러웠는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변화를 잘 느끼지 못할 만큼, 이번 앨범이 제게 딱 맞는 옷처럼 자연스럽다는 뜻이니까요. 창법을 바꿔도 제 목소리가 음악에 지문처럼 남는 건 아티스트로서 큰 축복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사실 3집을 만들기 시작할 때는 대중성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중적인 음악을 만드니까 막상 저랑 어울리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수많은 노래를 쓰고 버리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저와 어울릴 만한 옷을 찾기 위해 스스로 변화를 거듭하며 노래를 불렀죠. 그렇게 3집을 완성해 보니, 처음 기획과는 다르게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대중적인 음악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앨범이 되었는데요. 계획한 방향이 달라진 건 아쉽지만 어울리지 않은 옷을 과감히 버렸다는 사실에 만족합니다.
‹End(없어)› MV 스틸 이미지
‹살아남은› MV 스틸 이미지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늘 일합니다. 메일에 답장하고, 보내야 할 서류를 정리하고, 음악 작업을 하고, 노래 연습을 하고, 기획안을 쓰고, 예산을 편성하고, 연락을 돌리고, 새로 나온 음악을 체크하며 일상을 보내요. 말하고 나니 조금 숙연해지네요. (웃음) 혼자서 너무 많은 일을 처리하는지라 환기의 시간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시간이 남으면 산책하고, 폴 댄스나 요가를 하면서 일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일에서 아직 덜 빠져나왔다고 느낄 때면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거나 책을 꺼내 들어요.
요즘 들어 특히 관심을 두는 대상은 무엇인가요?
최근까지 작업에 몰두하면서, 저 자신에 가장 큰 관심을 두었어요. ‘나는 왜 고장이 난 걸까?’, ‘나는 왜 이방인처럼 느껴질까?’, ‘나의 목소리는 왜 이렇게 소리 날까?’, ‘내 음악은 어떤 음악일까?’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했죠. 과거를 돌아보며 놓친 순간을 다시 붙잡아 저를 이해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요즘 들어 무언가를 쉽게 좋아하기 힘들어요. 원래 작품 감상을 즐겼는데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깨달아버려서인지, 좋은 작품을 보면 창작자의 고통부터 느껴져서 마음이 따갑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못하는 몸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감상자 모드로 전환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거짓’이 싫어요. ‘꾸밈’도 싫어합니다. 매사에 솔직하고 싶어요.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고, 솔직한 사람이 저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작업 측면에서도 솔직해지기 위해서 누군가를 따라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지금의 저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작업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게는 ‘나만의 것’을 만들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요.
정규 1집 ‹和› 커버
정규 2집 ‹夢› 커버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작업의 메시지가 모호하게 느껴질 때 슬럼프를 겪게 되는 것 같아요. 이상한 욕망이 투영될 때 슬럼프가 찾아오기도 하는데요. 그럴 때는 작업과 거리를 둬요.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거나, 전시나 영화를 보기도 하고, 술을 마시거나 게임을 하기도 하죠.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후 작업을 다시 시작하면 갖고 있던 문제점을 생각보다 쉽게 해결할 수 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깔끔하게 포기하기도 합니다.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저는 진심이 언젠가 통한다고 믿으며 살아왔어요. 누구보다 음악에 진심을 담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진심이 잘 전해지지 않는다고 느낄 때 생각이 많아져요. ‘이 믿음을 어떻게든 실현하는 게 맞는 걸까?’라는 생각과 함께 ‘차라리 내 음악을 하지 않는 게, 내 믿음을 지킬 방법일까?’ 자문하게 됩니다. 최근 들어 ‘다른 사람의 진심을 전하는 데 몰두하는 게 내 가치관과 더 맞는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졌어요.
개인적으로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감시로부터 해방되어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 사랑받는 무언가를 따라 하지 않고, 내 안에 있는 목소리를 들을 것. 동시에 다른 이의 작품을 경청할 것. 작품에 욕망이 아니라 사랑을 담을 것. 사랑을 담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기술을 배워 작품으로 만들어낼 것.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자기 자신을 가스라이팅하는 수밖에 없어요.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다’라는 마음을 어느 정도 품고 있어야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멋진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나 시련을 겪고 있구나’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작업도 더 열심히 하고, 이전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자신을 만나게 돼요. 비록 저는 아직 큰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노력한 만큼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또 이를 전하기 위해 끔찍하게 노력한 사람. 세상을 어떻게든 사랑하려고 발버둥 쳤던 사람.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지 궁금합니다.
환경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되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사소한 일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불행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아이들이 더 자유로워졌으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편하게 내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지 않고, 더 나은 가치를 위해 함께 싸우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진심이 통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Artist
카코포니는 온몸과 온 마음으로 노래하는 사람이다. 2018년 어머니의 죽음 이후 음악을 시작했다. 죽음 뒤에 찾아온 절망을 이겨내며 피어난 음악은 진정한 삶을 노래할 수 있다고 믿는다. 불협화음(cacophony)이라는 뜻처럼 조화롭지 못한 감정과 기억을 솔직하게 노래하며, 완벽하지 않고 상처받은 삶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는 죽은 어머니를 기리는 정규 1집 ‹和›, 실패한 사랑담을 담은 정규 2집 ‹夢›, 자전적인 내용의 영화와 함께 제작한 EP ‹Reborn›을 연이어 발매하며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장해왔다. ‹和›1집 수록곡 ‘숨’은 유튜브 Kpop 채널 ‘ReacttotheK’에서 ‘올해의 노래’ 1위로 선정되었고, ‹夢›은 한국대중음악상 팝 음반 부분에 노미네이트되었다. EP ‹Reborn›과 함께 제작한 영화는 다수의 해외 영화제에 초청되어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셀린박 작가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Speculative Design’을 다뤄요.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마주칠 사회적 이슈를 고민하고, 디자인적으로 해결점을 찾는 시도인데요. 여러 미래학자와 관련 분야의 연구진과 소통하고, 미래 사회의 이슈를 지금 여기로 가져와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기회를 마련해 왔죠. ‘무뎌진 생각을 날카롭게 만든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은 그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Data Slave›, 2021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작가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셀린박입니다. 저는 2014년부터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이너Speculative Designer로 활동하고 있어요. 2019년부터 2022년까지는 아이러브아트센터와 셀린박갤러리 관장으로 일했고요.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프랑스에서 중학교를 다녔고, 이후 캐나다, 미국, 덴마크, 영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 학·석사 과정을 이수했어요. 2017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 셀린박 스튜디오를 창업해 다양한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 작업을 수행한답니다. 국내외에서 강의와 전시도 진행하고 있어요.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뉴욕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며 조수아 레이 스테픈스Joshua Ray Stephens 교수님을 만났어요. 교수님 수업이 열리는 날이면 독일 바우하우스에서 온 교환 학생과 밤늦게까지 디자인에 대해 토론하곤 했죠. 이런 과정을 거치며 아름다움의 측면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북 메이킹, 포스터 디자인 작업을 하며 제가 생각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했던 게 기억나요. 당시에는 지금 사회 구성원의 관점과 심리를 캡처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뉴욕의 유니언스퀘어Union Square에서 6000명 넘는 사람을 인터뷰하고, 여러 조사를 거치며 작업을 진행했죠. 디자이너 혼자 진행하는 작업의 한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키운 기간이라고 봐요.
그 와중에, 보그Vogue, 니켈로디언Nickelodeon, 리핀콧Lippincott에서 인턴과 프리랜서 활동을 이어갔는데요. 어느 날 직장 동료들과 디자인 이야기를 하던 중, 제 답답한 심정을 알던 사람이 앤서니 던Anthony Dunne과 피오나 라비Fiona Raby가 이끌던 영국왕립예술대학(RCA)의 ‘디자인 인터랙션’ 전공 링크를 보내줬어요. 링크를 연 순간, 제가 정확히 원하던 걸 바다 건너 영국에서 10년 가까이 진행하는 디자이너가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던 기억이 나요.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전시 중 «Design and the Elastic Mind»는 발을 딛기 어려울 정도로 굉장히 인기가 많았는데요. 해당 전시가 방금 말씀드린 디자이너들과 그 제자가 맡았던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라는 걸 알고 더욱더 놀랐어요. 당시 학부생이던 제게 디자인의 새로운 경지를 깨닫게 해준 전시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고민 끝에 해당 전공에 지원했고, 2014년 극적으로 합격통지서를 받았어요. 디자인 인터랙션에서 공부한 덕분에 현재 제가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을 공부하게 되었죠. 이를 통해 사회에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하면서, 후회 없이 작업 중이에요.
‹Object Marriage› Performance, 2018, V&A Museum
‹Object Marriage› Performance, 2018, V&A Museum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압구정 아이러브아트센터에서 4년간 작업하다가 올해부터 새로운 작업 공간을 물색 중이에요. 그동안 사용한 공간은 모두 편해서 좋았어요. 때마다 마음에 드는 작업실을 자연스레 만나는 기적이 일어났기에, 지금도 제게 맞는 공간을 기다리며 열심히 물색 중이에요. 요즘은 제가 있는 자리가 곧 작업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노트북을 켜서 연구와 작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구 작업실 전경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저는 주로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던 중에 아이디어를 떠올릴 경우가 많아요. 기도하기 전에는 항상 복잡한 생각의 트랩에 갇힌 기분이 종종 드는데요. 기도를 하고 나면 생각이 정리되어 평소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떠오르곤 해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연구를 하고, 시나리오를 구축하는 일을 진행합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어떤 주제가 인상에 깊게 남으면, 전문가와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다양한 양의 연구를 찾아요. 그리고 전문가와 이메일 혹은 대면으로 만나면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죠. 제 아이디어를 설명하면서 이게 먼 미래에 가능한 시나리오일지 타진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연구 과정은 인정하면서도 현재 관점으로 바라볼 때 윤리·문화적으로 문제 된다는 판단 아래 반대하는 전문가분들이 더러 계신데요. 미래학자의 추측에 근거해 설명해 드리면 대부분 이해하시더라고요. 도리어 연구를 더욱더 후원해 주시는 경우도 있어요.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갑니다. 관객 이해도를 높이려고 영화 시나리오로 작업하는 편이에요. 시나리오를 완성하면 제 작업에서 여러 번 촬영 감독으로 참여해 주신 구본영 감독님을 비롯해 영화감독 출신의 형부, 샤글리 마키제Charlie Marquiset가 큰 힘을 줘서 자주 프랑스에 갑니다. 프랑스에선 형부가 조감독으로 도와주기도 해서 촬영할 때 너무 큰 도움이 돼요.
‹The Object Right›, 2017~2018
‹The Object Right›, 2017~2018
‹The Object Right›, 2017~2018
작가님의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2021년 작업한 ‹Data Slave›는 박은희, 김다예 디자이너와 리서치를 협업으로 진행했어요. 미래학자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이 고안한 ‘에너지 노예(Energy Slave)’ 개념과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The Social Dilemma›(2020) 등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현재 데이터에 대해 집착하는 사회적 현상이 극대화되는 걸 고려하면, 미래에는 더욱 나쁘게 흘러갈 거라고 예상해요. ‘만약 우리가 위험을 감수하고 (지금과 다른 형태의) 에너지를 몸에 흘려보내면서까지 데이터를 얻는 상황이 미래에 펼쳐진다면?’이라는 디스토피아적 시나리오를 생각했죠. 사람 몸에서 전류를 내보내는 수치를 마치 전기뱀장어처럼 극대화한 상황을 떠올려 봤어요. 그리고 사람이 몸에서 전류를 에너지로 흘려보낸 만큼 데이터 은행에서 바꿔서 가상화폐처럼 사용하는 시나리오를 세웠고요. 작업을 구상하는 중, 인체에서 전기뱀장어만큼 전류를 흘려보내는 연구를 진행한 국내 메커니컬 엔지니어 팀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저는 국내 최초로 관련 연구 결과를 발표한 교수님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작업을 완성했습니다.
‹Data Slave›, 2021
‹Data Slave›, 2021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데이터의 범람 속에서 난무하는 거짓 정보를 살피고, 분별하기 어려운 윤리적·도덕적 문제를 더욱더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최근 진행한 작업에서 작가님이 만족하는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연구의 범주와 시나리오 측면에서는 만족하지만, 미적인 측면에서는 불만족스러워요. 예전 작업에서 빠지지 않던 유토피아적인 영상, 즉 맑고 명랑한 색으로 가득한 이미지가 최근 작업에서는 보이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평소 작가님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새로운 시도를 좋아해요. 가보지 않은 나라에 가거나, 먹어보지 않은 걸 맛보거나, 해보지 않은 체험에 도전하는 일은 아주 어려서부터 좋아했답니다. 새로움을 경험하고, 이전에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을 기대하며 일상을 보냅니다.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요즘은 ‘거대한 침체(Great Stagnation)’에 관심이 많아요.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동시에 어느 시대보다 발전이 더디다고 생각해요.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1960년대까지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류는 자동차, 텔레비전, 전구, 시민권, 원자력 등 엄청난 기술의 발전을 경험했어요. 이런 진보는 미래에도 여전할 거라 믿었지만, 현재는 과거 기술을 조금 더 발전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 같아요. 저는 정보가 과대하게 불어난 것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해서 관련 연구를 이어가는 중이에요. 소셜 미디어로 인해 전 세계가 손바닥 안에서 서로를 연결하는 것 역시 원인의 일부 아닐까 싶습니다.
‹Object Matcher›, 2018 2019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나요?
잘 정돈한 작업실을 좋아해요. 머릿속이 번잡할 때 작업실을 청소하면 생각도 함께 정리되는 느낌이에요. 이런 태도가 작업에도 묻어난다고 생각합니다.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슬럼프가 오면 작업에서 손을 떼고 책을 읽습니다. 2023년 1월부터 트레바리에서 클럽장을 맡아 독서 토론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나 홀로 아이디어의 블랙홀에 빠져있을 때,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블랙홀로부터 벗어나는데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최근 들어 작가님에게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한국에 돌아와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 작업을 한 지도 어언 6년이 흘렀는데요. 여전히 한국에서는 해당 개념을 잘 받아들이기 어려운것 같아요. 중국과 일본으로 향한 대학원 동기들이 말하길, 그곳에서는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이 또렷한 윤곽을 보인다고 해요. 예를 들어, 중국은 베이징에 있는 중앙미술학원(CAFA) 총장이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의 영향력과 가능성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디자이너의 발전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10년 가깝게 여러 스페큘레이티브 디자인을 가르치는 교수님을 초청해 강의를 열고 수업과 워크숍을 진행했다고 해요. 그런 영향 덕분에 중국은 이제 디자인에 대한 견해가 전과 같지 않고, 발전 가능성이 놀라울 만큼 성장 중인데요. 한국 디자인 교육에서도 과거의 보편적인 디자인 경계를 넘어 더욱 다양한 디자이너를 양성하길 바랍니다.
‹Object Matcher› Exhibition, 2020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요즘에는 ‘정성(精誠)’이 깃든 디자인을 만나기 어려운 것 같아요. 시각적인 호기심을 끄는 것은 디자인의 역할 중 하나인데, 그 이상 깊이와 성의를 다하는 과정이 빠진 듯한 작업을 접할 때가 많아요. 물론 과거에 본 작업을 융화하거나 조금 바꾸며 새로운 작업을 하지 않고, 완벽히 새롭게 작업하는 건 저에게도 무척 어려운 일이죠. 다만 최대한 자기 색깔과 취향을 살리고, 내면의 이유와 철학을 불어넣지 않으면 디자인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단기간에 대중의 관심을 받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다소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좋은 작업을 완성하는 데 의의를 두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좋아하는 데에는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그 이유를 찾고, 자신의 다름을 타인의 강요에 맞추려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건네고 싶어요. 또한 지금 쫓는 일의 방향이 달라지더라도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기를 바라요. 모든 과정이 결국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있도록 돕는다고 생각하거든요. 마지막으로, 제게도 하고 싶은 말을 남길게요. “Just Do It.”
작가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무뎌진 생각을 날카롭게 만든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어요.
현재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이 없는 미래가 가장 이상적인 모습 아닐까요?
Artist
셀린박은 셀린박 스튜디오, 아이러브아트센터의 설립자이자 대표 디자이너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셀린박 갤러리, 아이러브아트센터를 운영했다. 그는 작업을 위해 한국에서 유럽으로 끊임없이 이주하며 유럽과 한국의 대학, 박물관을 포함한 여러 기관에서 전시와 강의를 한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프랑스, 캐나다, 미국에서 자란 그는 영국 왕립예술대학에서 ‘디자인 인터랙션’ 석사 과정을 마치고, 런던 V&A 뮤지엄, 부산국제단편영화제, 주프랑스한국문화원 등 유럽과 한국에서 작업을 선보였다. 2019년부터 제주도 프랑스영화제 단편 부문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책 집필 중에 있다.
«비애티튜드»가 귀히 모시는 에세이 필자인 김도훈 님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하는 칼럼니스트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여름철에 들이닥치는 다양한 영화 시사회에 다녀오느라 요즘 무척 바쁜 몸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정말 재미있는 신작 영화에 대한 리뷰를 부탁하려고 했는데요. 의외로 그의 대답은 ‘노no’. 알고 보니 얼마 전 뉴스에 뜬 자비에 돌란의 은퇴 소식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답니다. 김도훈 작가가 기억하는 돌란은 어떤 모습일까요? 돌란의 은퇴를 믿지 않는다는 그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영화감독 자비에 돌란Xavier Dolan을 만난 적이 있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만난 건 아니다. ‘만났다’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마디라도 나눴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나는 그를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다.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봤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나는 돌란을 가까운 발치에서 봤다. 한 5m 거리 정도?
2010년이었다. 영화잡지에서 일하던 나는 칸 영화제(Festival de Cannes)로 출장을 갔다. 임상수 감독의 ‹하녀›와 이창동 감독의 ‹시›가 동시에 경쟁 부문에 오른 해였다.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는 일종의 2차 경쟁 부문이라 할 법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출품됐다. 한국 영화가 경쟁 부문에 오르면 칸 해변에도 한국 기자들이 많아진다. 결국 이창동 감독이 각본상을 받고, 홍상수 감독이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받았다. 흥겨운 해였다.
사실 내가 가장 보고 싶은 영화는 따로 있었다. 돌란의 ‹하트비트Heartbeats›였다. 이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함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대됐다. 나는 칸 영화제에 가기 전 돌란의 데뷔작인 ‹아이 킬드 마이 마더I Killed My Mother›(2009)를 봤다. 엄마를 죽여버리고 싶은 16살 게이 소년의 이야기였다. 에너지가 굉장했다. 영화는 엄청 거칠고, 서툴고, 직설적이었다. 그게 매력이었다. 나는 데뷔작부터 지나치게 유려하게 만드는 감독보다 뭔가 좀 엉망진창인 것 같은데도 뺨을 후려치는 것 같은 치기를 지닌 감독을 좋아하는 편이다. 돌란이 딱 그랬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부산 사투리로 “하따 이 새끼 보소”라고 내뱉은 기억이 난다. 나는 마음에 드는 영화를 보면 저절로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경향이 있다. 나에게는 서울 사투리보다 좀 더 본능적인 언어라 그럴 것이다.
슬프게도 나는 칸 영화제에서 ‹하트비트›를 보지 못했다. 대신 함께 출장을 갔던 김혜리 기자가 봤다. (선배라고 썼다가 호칭을 기자로 바꾼 이유는, 요즘 아이돌까지 공식 석상에서 선배 선배 거리는 게 영 마뜩잖기 때문이다.) 김혜리 기자를 보자마자 물었다. “어땠어요?” 나는 아직도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를 봤을 때 그분 특유의 어떤 표정이 있다. 나는 그 표정을 두 번 더 겪었다. 한 번은 소피아 코폴라의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고 나오던 중 “선배 이 영화 너무 좋지 않아요?”라고 했다가 목격했다. 또 한 번은 첫 번째 ‹토르› 영화를 보고 나오던 중 “저는 지금까지 나온 마블 영화 중 이게 제일 좋네요”라고 했다가 목도했다. 절대적으로 인자하지만, 어쩐지 근심이 서려 있는 그 표정. 나는 기대를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영화제 기간 중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돌란을 봤다. 내가 간 식당 바로 옆 파티오에 앉아서 몇몇 힙스터 친구들과 밥을 먹고 있었다. 당시 그는 영국 록 스타 모리세이Morrissey처럼 앞머리를 무스와 스프레이로 단단하게 치켜올리고, (마치 알프스의 마터호른 같았다) 가슴까지 파인 하얀 티셔츠를 입고, 저게 어떻게 사람 몸에 들어가나 싶은 검은 스키니진을 입고, 굽이 앞머리처럼 높은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나는, 반했다. 아니. 돌란은 어떻게 봐도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반했다. 그러니까 이건 뉴진스의 ‹어텐션Attention› 뮤직비디오를 보고 민지에게 반한 것처럼 반한 것이다. 뭔가 아름다운 존재를 목격했을 때 나오는 당연한 반응이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하트비트›가 별로여도 나는 이 남자를 계속 좋아하겠구나.
잠깐만. 지금 혹시 외모 때문에 감독의 팬이 됐다고 고백하는 거냐고? 아니, 솔직히 좀 그러면 어떤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든 감독이 외모까지 잘 생기면 좀 더 애정을 갖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솔직히 생각해 보시라. 나는 폴 토머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이 잘 생겼기 때문에 그의 영화가 더 좋아 보인다고 말한 동료 평론가도 한 명 알고 있다. 한 사람의 팬질이 꼭 예술적인 이성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세세한 요소가 있을 수 있다. 외모도 그중 하나다. 그리고 나는 ‹하트비트›가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욕망의 대상이 되는 금발의 남자 주인공을 자기보다 덜 멋있는 사람으로 캐스팅한 덕에 돌란의 예쁨은 유독 빛이 났다. 아주 반짝반짝거렸다.
다만 감독으로서 그의 커리어에 그리 큰 기대를 걸진 않았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는 아마도 젊고 치기 어린 감독이 어쩌다가 내놓은 근사한 데뷔작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트비트›는 예쁜 영화지만 데뷔작처럼 좋은 영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로렌스 애니웨이Laurence Anyways›(2012)를 보고 나는 내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돌란은 이르게 스타가 된 자신을 카메라에 담지 않고 카메라 뒤로 빠지는 선택을 했다. 멜빌 푸포Melvil Poupaud가 트랜스젠더를 연기하는 이 영화는 무려 3시간에 달하는 유미주의적 영화 만들기의 극치였다. 당시 영화잡지에서 일하던 나는 이렇게 20자 평을 썼다. “자비에 돌란은 과대 평가된 힙스터 감독인가? 이 영화는 그 모든 의심에 대한 당돌한 대답이다. 종종 예술적 허세가 폭발하는데, 이렇게까지 허세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니 두손 두발 다 들고 투항하게 된다.” 그렇다. 나는 투항했다.
‹로렌스 애니웨이Lawrence Anyways›, 2012
‹로렌스 애니웨이Lawrence Anyways›, 2012
스릴러 영화 ‹탐엣더팜Tom at the Farm›(2013)과 ‹마미Mommy›(2014)를 거치며 그의 영화는 정말 놀랄 정도로 빠르게 진화했다. ‹마미›는 여러 부분에서 데뷔작인 ‹아이 킬드 마이 마더›의 연장이었다. 감정은 더욱 격렬한데 솜씨는 더욱 단아해졌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많은 분은 ‹마미›의 바로 ‘그 장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1:1 비율의 정사각형 프레임에 갇혀 있던 주인공이 록 밴드 오아시스의 ‘원더월Wonderwall’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양손으로 화면을 열어젖히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솔직히 이런 형식적 실험 혹은 장난은 잘못 사용하면 유치하기 짝이 없게 마련인데, 유치하지 않았다. 아니다. 솔직히 유치했다. 그런데 그 유치한 진심이 꽤 감동이었다. 그건 어떤 면에서 오로지 돌란처럼 약간 자신의 재능에 취한, 그러나 확실히 재능이 절정으로 치닫는 젊은 감독만이 해낼 수 있는 영화적 치기였다. 나는 그 치기가 어디까지 더 갈 수 있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탐앳더팜Tom at the Farm›, 2013
‹마미Mommy›,2014
‹탐앳더팜Tom at the Farm›, 2013 (좌)
‹마미Mommy›,2014 (우)
사실 나는 이 글을 조금 슬픈 마음으로 쓰고 있다. 돌란은 얼마 전 스페인 매체 «엘 문도El Mundo»와의 인터뷰에서 영화 제작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그는 “예술은 쓸모가 없고 영화에 전념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말했다. 단호한 워딩은 순식간에 인터넷 세계로 퍼져나갔다. ‘자비에 돌란이 은퇴를 선언하다’라는 제목을 달고 퍼져나갔다. 며칠 뒤 돌란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인터뷰를 정정했다. 그는 자신의 발언이 통역을 거치며 잘못 일반화된 부분이 있다며 “영화를 그만 만들고 싶다고 말한 건 사실”이라면서도 “예술은 쓸모가 없고 영화에 전념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는 말은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계속해서 TV 시리즈 등을 만들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다고 했다. 사실 이 해명은 조금 이상했다. 영화를 더는 만들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는 점에서 결국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직접 연출한 ‹The Night Logan Woke Up›에 배역으로 출연한 자비에 돌란
며칠 뒤 «엘 문도»는 인터뷰 오디오 녹취를 공개한 뒤 “자비에 돌란이 애초 언급했던 내용과 일치한다”며 반박을 내놓았다. 굳이 이런 반박을 내놓을 필요가 있나 싶지만, 나는 오히려 좋았다. 돌란이 자신의 발언을 후회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꼭 자기가 한 모든 말을 지키고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막상 인터뷰를 했더니 주변 사람들이 “정신 좀 차리라”며 전화했을 수도 있는 일 아니겠는가. 내가 그의 친구였다면 곧바로 퀘벡에 전화를 걸어 “마음이 불안정할 때는 제발 인터뷰 같은 거 하지 마”라고 쏘아붙였을 것이다. “칸 영화제의 기억은 제발 좀 잊어버리라”고도 말했을 것이다. 나는 영화 만들기에 대한 그의 순간적 혐오가 분명 마지막 두 영화에서 얻은 경험에 기인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2016년 돌란은 ‹단지 세상의 끝›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문제는 이 영화가 어떻게 봐도 그의 최고작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영화제 기간 중 매체들이 내놓는 별점은 경쟁작 중 최악이었다. 나 역시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스물일곱의 돌란이 조금 더 성숙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형식적 재주를 모조리 제거한 느낌이었다. 그런 와중에 큰 상을 받자 스캔들이라고 일컬을 만큼 비난이 터져 나왔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던 매즈 미켈슨Mads Mikkelsen이 울면서 수상소감을 말하는 자비에 돌란을 멍하게 바라보는 장면은 밈이 되어 인터넷을 떠돌기 시작했다. 아직 한국에 공개되지 않은 영어 데뷔작 ‹존 F. 도노반의 죽음과 삶›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혹평받았다. 로튼토마토 평점을 다 믿는 건 곤란하지만, 신선도 19%는 아무래도 좋은 소식이 아니다. 2019년 작 ‹마티아스와 막심›은 모든 국가에서 처참한 흥행 성적을 거뒀다. 그래도 나는 이 영화가 자신의 세계를 견지하면서 성숙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일종의 이정표라고 생각했다. 그래. 다시 시작하면 되지. 그런데 어랍쇼? 은퇴 선언을 해버렸다.
‹마티아스와 막심Matthias et Maxime›, 2019
나는 자비에 돌란의 은퇴 선언을 믿지 않는다. 믿지 않을 생각이다. 마지막 두 영화가 비평적, 흥행적으로 실패를 거둔, 이제 갓 서른이 된 예민한 예술가의 말은 믿을 게 못 된다. 왜냐하면 마흔 중반의 나는 서른쯤의 나이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두 번의 위기를 겪는다. 첫 번째가 서른이고 두 번째가 마흔이다. 마흔이 중년의 위기라면 서른은 정체성의 위기다. 마흔은 정신과 육체가 마침내 절정을 넘어서서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끼는 단계다. 더는 젊은이로 불릴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하는 순간이다. 더는 새로운 것에 도전할 여유도, 시간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아직 마흔이 되지 않았다면, 축하한다. 아직 인생 최악의 정신적 위기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른은? 사람이 다시 중2병에 접어드는 단계다. 이팔청춘도 지났으니 이제 뭔가 제대로 된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 같은데 이 길이 맞는 건지 아닌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럴 때 마흔이 넘은 나 같은 늙은이가 할 수 있는 조언은 하나다. 그냥 자기를 믿고 밀어붙이라는 것이다. 꾸준히 밀어붙이는 것보다 현명한 방법은 사실 몇 없다. 아니, 갑자기 글이 꼰대의 인생 조언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글은 썩 좋지 않다. 그러니 마지막은 다시 돌란의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만약 당신이 나처럼 삐뚤어질 정도로 돌란의 열성적인 팬이라면 지레 은퇴를 슬퍼할 필요가 없다. 그는 결국 다시 영화를 만들게 될 것이다. 어쩌면 더 나은 영화를 만들 것이다. 사람이 한 번 은퇴한다고 선언했다가 슬그머니 복귀할 때는 자기 인생 최고의 것을 내놓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돌란이 계속 “여전히 감성만 가득하고 무게감이 없다”고 비평가가 불평하는 영화를 만드는 힙스터 예술가로 늙어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 뭐 어떤가. 인생은 길다. 그리고 불공평하다. 모든 사람이 항상 더 성장하며 더 나은 걸작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는 법도 없다. 나는 육십이 되어서도 ‹마미›의 그 장면을 다시 보며 울컥할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Writer
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황예지 작가는 좋은 사람과 좋은 이야기, 좋은 기류가 감도는 말괄량이 삐삐 같은 창작자를 꿈꿉니다. 그의 활동 영역은 사진부터 인터뷰, 에세이까지 뻗어있는데요. 눈길을 준 대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 늘 면밀히 바라보고 성찰을 멈추지 않으려 노력해요. 아는 만큼 말하고, 아는 만큼 다가가면서도 물러나려 하죠. ‘나다움’과 ‘나’만의 균형을 유지하며 다양한 형태의 서사를 수집해 나가는 황예지 작가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안녕하세요,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작가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저는 서울에서 사진을 중심으로 이것저것…하는 황예지라고 합니다. 창작과 더불어 생계를 지탱하기 위해 했던 일들이 제 생활에 깊게 자리매김하면서 사진 외에도 글쓰기, 인터뷰, 강의 등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어요. 친구들이 저를 두고 ‘느적느적 부지런하다’고 말하는데요. 제게 딱 맞는 표현 같아요. 긴 시간 동안 뭔가를 쳐다보고 생각하고 있다가 불시에 행동하는 편이에요.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창작자로 살겠다는 결연한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다만 창작자가 아닌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까마득하게 느껴졌어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야간 자율 학습이 두려워서 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 사진과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살면서 처음으로 능동적으로 움직였던 일이었어요. 그렇게 창작을 삶에 끼워 넣으니 무료함과 단절이 사라지고, 점진성과 성취의 맥락이 생기면서 창작자의 삶을 계속 이어가게 됐어요.
‹거기에 있는 이들›,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2
‹거기에 있는 이들›,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2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마감과 함께라면 그게 어디든 작업 공간으로 만드는 과몰입 인간인데요. (웃음) 주로 라떼가 맛있는 카페나 신중하고 뜨거운 사진가와 공유할 수 있는 망원동 모처 작업실에 머무릅니다. 집에서 작업할 때도 있고요.
‹거기에 있는 이들›,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2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좋은 창작물을 보면 한동안 고양된 감정으로 살아가게 되어요. 남들이 권해서 좋은 것 말고 저만의 루트를 만들어서 좋은 창작물을 접했을 때가 가장 쾌락적이고 좋더라고요. 때마다 장르도 내용도 다르지만, ‘지금 이 시기에 꼭 필요한 작업이구나’ 하고 느끼는 작업이 있어요. 요즘은 책과 영화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아요.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때마다 다른데요.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고 레이어를 얹힌 후 제가 생각하기에 말끔하고 타당해질 때까지 변주를 주다가 확신이 설 때 시각적으로 구현을 시작해요. 그러다 마음처럼 안 되면 속상해하고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무작정 하고 보는 힘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요. 그 힘을 보강하려고 애써볼 참입니다.
‹거기에 있는 이들›,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2
‹거기에 있는 이들›,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2
‹거기에 있는 이들›,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2
‹거기에 있는 이들›, 2022.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에 원목 액자, 가변 설치. 서울시립미술관 커미션. 사진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사진 촬영: 김상태
‹거기에 있는 이들›, 2022.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에 원목 액자, 가변 설치. 서울시립미술관 커미션. 사진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사진 촬영: 김상태
‹거기에 있는 이들›,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2
‹파파›, 2022. 사진 제공: 아트센터 예술의 시간
작가님의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작년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춤추는 낱말» 전시에서 보인 널따란 사진 연작, 그리고 아버지의 생애를 담은 비디오 작업이 저의 최근 작업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네요.
사진 연작의 제목은 ‹거기에 있는 이들›인데요. 제가 여태까지 눈길을 주고 마음을 썼던 장면을 벽에 이어 놨어요. 셀프 포트레이트, 가족, 퀴어 퍼레이드에 참가한 친구, 세월호, 홍콩 민주화 운동…작은 불화와 적당히 소홀한 연결감을 인식하며 개인을 바라보는 사진과 사회를 바라보는 사진을 구성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처지-서 있을 자리, 환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또 아버지의 생애를 다룬 비디오는 ‹파파›라는 제목으로, 범일운수종점 Tiger1에서 열린 «2050년 10월 5일 수요일» 전시에 참여하며 미래를 감각하게 될 기회가 생기면서 만들게 되었어요. 아버지가 살아온 시간을 둘러보고 함께 죽음을 준비하는 대화를 영상에 담았습니다. 삶과 죽음의 순환로를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며 손잡고 걸어 보니 마음이 담백하고 정갈해지더군요.
‹거기에 있는 이들›,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2
‹거기에 있는 이들›,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2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살아감이나 어떤 경계였던 것 같아요. 사진과 작업으로 확언이나 확증하기를 삼가고 저-피사체-관객들이 걸어 다닐 공간을 확보하고 유예하고 싶었어요.
최근 진행한 작업에서 만족하는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저는 자책이 강한 편이라서 작업을 돌아보거나 검사하는 일에 거리를 두고 있어요. 만족하는 점과 만족하지 못하는 점이 언제나 빼곡하지만, 보완할 점만 확실하게 확인한 뒤에 미련 없이 작업에서 자리를 뜹니다. 어찌 보면 참 무책임하기도 하지요.
‹거기에 있는 이들›,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2
평소 작가님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과 혼자 있는 시간의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요. 사교적인 시간과 혼자 치닫는 시간의 균형이 좋을 때 일상을 활보하기 가장 좋더라고요. 배우는 시간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일주일에 한두 번씩 글쓰기나 운동 배우는 활동을 등록해놔요.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나요?
쉽게 몸집을 키우지 않는 것, 그리고 웅장하지 않으려는 점이 삶과 작업을 관통하고 있지 않나 싶어요. 대단한 사람이기보단 면밀히 바라보고 성찰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고 싶어요. 아는 만큼 말하고, 아는 만큼 다가가면서도 물러나려고 해요.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확실하게 내려놓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처절하게 시간을 보내고, 내가 못 하는 걸 순순히 인정한 후 다시 고개를 내밀어요.
‹거기에 있는 이들›,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2
최근 들어 작가님에게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저는 현실적인 문제는 언제나 생계라고 생각해요. 현실적인 문제에서 달아나지 않고 강도 높은 노동으로 20대를 보내고 나니 몸과 마음을 한시름 돌릴 수 있는 30대가 되었어요. 현실적인 문제가 생기면 창작자로 살아가는 고집을 내려놓고 그것부터 해결하려고 노력한 게 돌아보면 제법 잘한 일 같아요.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창작 위에 노동, 창작 위에 사람.
‹거기에 있는 이들›,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2022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나를 힐난하지 않기. 나다움과 나만의 균형을 찾기. 잘 먹고 잘 놀고 잘 쉬기.
작가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때때로 궁금하고, 제멋대로 잘 살고 싶어요. (웃음) 좋은 사람과 좋은 이야기, 좋은 기류가 감도는 말괄량이 삐삐 같은 창작자를 꿈꿉니다.
Artist
황예지Yezoi Hwang는 수집과 기록을 좋아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그들의 습관 덕분에 자연스럽게 사진을 시작했다. 사진과 에세이, 인터뷰 등 다양한 형식을 다루며 개인적인 서사를 수집한다. 개인의 감정과 관계, 신체를 통과해 사회를 바라보려고 노력 중이다. 사진집 『Mixer Bowl』과 『절기Season』를 출간했고 개인전 «마고Mago»를 열었다. 에세이집 『다정한 세계가 있는 것처럼』을 냈다.
«비애티튜드»에 언제나 흥미로운 글을 보내주는 김도훈 작가의 본업은 영화평론가입니다. 그는 어떻게 영화평론가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아니, 언제 영화에 매혹되었을까요. 작가는 정확히 말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그의 작품을 보고 영화라는 매체의 신비로운 비밀을 깨달았다고요. 여러 주제를 두고 편집부와 고민하던 김도훈 작가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신작, ‹파벨만스›의 시사회를 다녀온 후 맹렬한 기세로 글을 보내온 것을 보면, 영화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글을 다 읽어 내려갈 때쯤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이 순수한 러브레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이 글은 러브레터다. 내가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의 영화를 처음으로 본 건 1985년이었다. 물론 1976년생이 기억하는 1985년은 좀 흐릿하다. 적잖게 왜곡됐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내가 기억하는 건 엄마 손을 잡고 둘이서 갓 개봉한 ‹인디아나 존스 2›를 보러 갔다는 사실과, 나오면서 했던 생각들이다. 당시 세 살 터울인 내 동생은 왜 그 자리에 없었는지 모르겠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다행이다. 동생은 ‹인디아나 존스 2›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라는 매체에 일찍 매혹을 느끼지 못했다. 덕분에 영화에 관한 글을 써서 겨우 먹고사는 형과는 달리 훨씬 수익이 좋은 전문직을 골라 잘살고 있다. 내 인생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망친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2› 포스터
그래도 아홉 살짜리가 거대한 극장 화면으로 처음 본 영화가 ‹인디아나 존스 2›라는 건 행운이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게 내가 처음으로 본 영화는 아니다. 1980년대 교육의 가장 거대한 화두는 ‘반공(反共)’이었다. 교실에는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과 영부인 이순자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근래 그의 손자가 약에 취해 일가의 만행을 유튜브로 공개하는 걸 보고 있으려니 참으로 그 시절이 아련해진다. 어린아이에게 특정한 사상을 주입하려고 할 때 가장 편리하고 강력한 프로파간다는 역시 ‘영화’다. 그래서 전두환 정부는 각 학교를 순회하며 반공 영화 상영회를 열었다.
학교에는 극장이 없었다. 대신 교육부에서 나온 사람들은 강당이나 큰 교실에 간이 천막을 스크린으로 만들어 반공 영화를 상영했다. 1970~1980년대 생들이 여전히 기억하는 추억의 국산 애니메이션 ‹똘이장군› 시리즈와 ‹해돌이 대모험›은 전국을 순회하며 무료로 상영됐다. 그냥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면 돼지 형상을 한 공산당과 김일성이 마지막에 등장했는데, 우리의 자랑스러운 소년 주인공이 싸그리 처단했다. 그런 장면에 모두가 환호했다. 물론, 나도. 영화관 가는 게 지금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던 시절에는 컴컴한 공간에서 큰 화면으로 뭔가를 본다는 것 자체가 마술 같았다. 그러니 처음으로 진짜 극장에서 할리우드의 최신 블록버스터를 목도한 아홉 살짜리 아이의 심경이 어땠을지 한 번 상상해보시라.
‹똘이장군 제3땅굴편› 포스터 (좌)
‹해돌이 대모험› 포스터 (우)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분 중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세대도 있을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이를테면 당대의 마블, 혹은 ‹아바타›였다. 이를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는 지금 여러분이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21세기 모든 위대한 블록버스터 감독들의 총합에 가까웠다. 1975년 개봉한 ‹죠스›는 900만 달러를 투자해 미국에서만 무려 2억 6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당시 할리우드에서 영화 한 편이 2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조어를 하나 만들었다. 그게 바로 ‘블록버스터blockbuster’다. 여러분이 지금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 단어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죠스›로 블록버스터 개념을 만든 지 2년 후, 그의 차기작인 SF 영화 ‹미지와의 조우›와 조지 루카스의 첫 번째 ‹스타워즈›가 공개됐다. 나는 그해, 그러니까 1977년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할리우드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분기점이라고 확신한다. 두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 할리우드의 아날로그 특수효과는 형편없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오디세이›(1968)는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나간 ‘오파츠OOPArts’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할리우드에서 SF나 판타지는 B급 영화의 영역에나 머무르던 장르였다. 스필버그와 루카스는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 아날로그 특수효과를 진화시켰다.
친한 친구 사이인 스필버그와 루카스 주변에 열정적인 젊은이들이 모였다. B급 장르를 좋아하던 영재들이 모였다. 컴퓨터 그래픽스(CG)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전 세계 관객에게 시각적 환희를 안겨준 1980년대의 대표적인 영화들은 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 우리는 그들을 ‘스필버그 사단’이라고 불렀다. 나는 내 유년기를 지배했던 스필버그 사단의 영화를 요즘도 정기적으로 다시 보곤 한다. 조 단테Joe Dante의 ‹그렘린›(1984), 리처드 도너Richard Donner의 ‹구니스›(1985), 로버트 저메키스Robert Zemeckis의 ‹백 투 더 퓨처›(1985) 시리즈는 물론, 스필버그의 ‹E.T.›(1982)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블록버스터 영화 작법의 기본을 만들어냈다.
자, 여기서 다시 1985년 마산의 한 극장으로 돌아가 보자. ‹인디아나 존스 2›의 클라이맥스는 지하 갱도에서 광차(鑛車)를 타고 벌이는 추격 장면이다. 나는 굉장한 속도로 펼쳐지는 현란한 추격을 가쁜 숨을 내쉬며 보다가 깨달았다. ‘이건 가짜구나. 이건 진짜가 아니구나. 눈속임이구나. 만든 거구나.’ 아홉 살짜리가 영화를 보다가 처음으로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을 깨달았다. 사람을 진짜로 광차에 싣고 탈선한 갱도를 달리면서 찍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게 바로 효과였다. 특수효과. 나는 엄마 손을 잡고 극장을 나오면서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영화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영화란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영화란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가.’ 그 순간이었다. 나는 영화에 대한 일을 하고 싶었다. 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맥북 앞에 앉아서 마감 시간이 5시간밖에 남지 않은 글을 이렇게 열심히 쓰고 앉아 있는 것이다.
나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그럴 만큼 대담한 사람은 아니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과에 지원할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행정학과를 갔다. 행정 공부는 하지 않고 영화 동아리에 밤낮이고 앉아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며 자조했다. 누가 그랬다. 영화평론가는 모두 다 실패한 영화감독이라고. 솔직히 평론가가 메가폰megaphone을 쥔다고 좋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일은 없겠지만, 뭐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닐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 2› 의 백미인 갱도에서 광차를 타고 벌이는 추격 장면.
나는 한동안 스티븐 스필버그를 조금 옆으로 제쳐놓고 살았다. 좋아하는 감독을 누가 물으면 스필버그보다 더 세련된 감독들, 더 야심 찬 감독들, 더 실험적인 감독들, 더 젊은 감독들의 이름을 내놓았다. 그게 좀 더 ‘있어’ 보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침내 CG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젖힌 ‹쥬라기 공원›(1993)과 ‹우주전쟁›(2004)을 위대한 걸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디아나존스와 크리스탈 왕국›(2008)과 ‹틴틴 : 유니콘 호의 비밀›(2011), ‹마이 리틀 자이언트›(2016)를 보며 조금 복잡한 심경이 됐다. 물론 스필버그는 사이사이에 진중하고 품위 있는 걸작들을 만들었다. ‹워호스›(2011)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블록버스터 감독으로서 그의 감각은 조금 낡아버린 것 같았다. 특히 나는 ‹인디아나 존스와 크리스탈 왕국›을 보며 한탄을 했다. 1980년대에 머무른 이야기에 CG로 범벅했기 때문이다.
‹파벨만스›를 보며 나는 그 모든 한탄을 접었다. ‹파벨만스›는 스필버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그가 영화라는 환상을 동경하며 성장해 결국 할리우드에 발을 딛는 것으로 문을 닫는 이야기다. 첫 장면에서 주인공 소년은 부모님과 함께 인생 첫 영화를 보러간다. 세실 B. 드밀Cecil B. DeMille의 ‹지상 최대의 쇼›(1952)다. 그 영화에서 어린 파벨만, 아니 스필버그를 사로잡는 건 1950년대로서는 최고의 특수효과를 이용해서 만든 기차 충돌 장면이다. 그 순간 어린 스필버그의 눈은 깨닫는다. ‘이것은 가짜구나. 이건 진짜가 아니구나. 눈속임이구나. 만든 거구나.’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아이가 영화를 보다가 처음으로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을 깨닫는다. 극장을 나서는 아이는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영화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굉장한 것인가.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가.’ 그 순간이었다. 파벨만은, 아니 스필버그는 영화에 대한 일을 하고 싶었다. 해야만 했다.
‹파벨만스› 촬영 현장에서의 스티븐 스필버그
‹파벨만스› 스틸컷
그렇다. 나는 위 문단에서 이 글의 중간 즈음에 나온 문장을 그대로 다시 활용했다. 게으른 활용이니 원고료는 조금 깎여도 큰 불만은 없다. 아니 잠깐,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는 평론가 나부랭이는 자기의 소년 시절을 스필버그와 동일시하는 뻔뻔한 소리를 하는 것인가? 그렇다. 아주 뻔뻔한 소리를 하고 있다. 물론이다. 나는 스필버그가 아니다. 극동의 한 작은 국가에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며 먹고사는 영화 언저리의 잔챙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은 있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영화가 놀라운 사람들이 만들어낸 놀라운 환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말이다. ‹파벨만스›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창조자 중 한 명이 컴컴한 공간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다 같은 현현을 경험한 적 있는 우리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다. 그리고 이 글은 그 놀라운 러브레터에 바치는 나의 러브레터다.
Writer
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김도훈 작가는 과거에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결국 좋아하게 된 대상에 대한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어요. 취향의 변화도 있겠지만 세월이 지나며 깨달은 사실도 큰 영향을 주는데요. 자기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묘사한 대상의 정보를 읽다 보면 어느새 지적인 만족감이 차오른답니다. 이번 주인공은 할리우드의 전설이 된 여배우 메릴 스트립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신성모독에 가까운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메릴 스트립Meryl Streep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문장 하나만으로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의 90%는 “어디서 니가 감히”라는 말을 내뱉고 있을 것이다. 메릴 스트립은 연기의 신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 누구도 배우이자 예술가로서 그의 권위를 의심하지 않는다.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이 아니다. 미리 설명하자면 이 칼럼 시리즈는 내가 좋아하지 않았으나 결국 좋아하게 된 것이 주제다. 그러니 결국 이 글은 메릴 스트립을 좋아하게 됐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될 예정이다. 화를 내지 마시고 일단 들어보시라.
더스틴 호프먼과 메릴 스트립이 출연한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의 한 장면
내가 처음 본 메릴 스트립의 영화는 1980년대 MBC ‘주말의 명화’를 통해 본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였을 것이다. 가정에 무심한 남편(더스틴 호프먼)과 집을 나간 아내(메릴 스트립)가 아들의 양육권을 두고 싸운다는 이야기다. 지금 다시 돌아보자면 이 영화는 가히 시대적이다. 주부로 일하던 여성이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쟁취하는 과정을 그리는 여성주의적 영화인 동시에, 결국 스타인 더스틴 호프먼이 연기한 남편의 부성애에 더 초점을 맞추는, 여전히 조금은 가부장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시대의 진보와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대적이라는 이야기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가 방영된 1980년대 말, 이미 메릴 스트립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기파 배우로 불렸다. 그 시절에는 ‘외모는 특출나지 않지만 연기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 배우’가 주로 연기파 배우에 속했다. 요즘은 이런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여러모로 편견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연기파 배우’로 불리던 이들은 대개 남자였다. 이를테면 1970년대 등장해 1980년대 전성기를 보낸 더스틴 호프먼, 로버트 드니로, 알 파치노 같은 배우들이다. 여성 배우에게는 여전히 육체적 매력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됐다. 여성은 아름답지 않으면 배우가 되기 힘들었다. 남성은 아름답지 않아도 배우가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요즘도 딱히 다르진 않다.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도록 하자.
‘연기파 배우’로 불리며 1980년대 전성기를 보낸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메릴 스트립의 출세작이었다. 1970년대 초반 연극배우로 데뷔한 그는 1978년 로버트 드니로와 함께 출연한 ‹디어 헌터›로 오스카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이듬해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연기파 배우로 불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는 메릴 스트립의 전성기였다. 1981년 ‹프랑스 중위의 여자›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그는 이듬해 ‹소피의 선택›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83년에는 전설적인 환경운동가 캐런 실크우드를 연기한 ‹실크우드›로 다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는 1985년 로버트 레드포드와 출연한 ‹아웃 오브 아프리카›로 또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1988년에는 ‹어둠 속의 외침›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메릴 스트립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소피의 선택›(1982) 포스터
여기서 기나긴 리스트를 잠시 멈추자. 나는 그의 수상 경력을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이 지면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메릴 스트립은 이후에도 계속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다. 지금까지 노미네이트된 횟수는 총 21회로 오스카상 역사상 최대 후보 기록이다. 그중 세 번 수상했다. 그는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배우다. 거대 예산이 들어간 상업 영화에는 좀처럼 출연하지 않은 탓에 대중적인 흥행작은 드문 편이다. ‹디어 헌터›, ‹아웃 오브 아프리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맘마 미아!›(2008) 정도가 메릴 스트립의 드문 상업적 성공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진중한 영화에 출연해 완벽할 정도로 기술적인 연기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1970~80년대의 메릴 스트립은 확실히 ‘여배우’의 새로운 모델을 창조했다. 그는 상업적 성공작 없이도 여배우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일종의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메릴 스트립이 출연하여 상업적 성공을 거둔 ‹맘마 미아!›(2008)의 한 장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의 한 장면
그렇다면 메릴 스트립 이전에는 그런 배우가 없었다는 이야기일까? 나는 그렇다고 감히 주장할 참이다. 할리우드는 (충무로도 마찬가지지만) 남성 배우에게는 강요하지 않는 성적 매력을 여성 배우에게 강요해왔다. 당신이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할리우드 여성 배우들을 떠올려 보시라. 그레타 가르보, 오드리 헵번, 엘리자베스 테일러, 잉그리드 버그먼, 소피아 로렌, 심지어 ‘연기의 신’으로 간주되던 캐서린 헵번까지, 모든 배우들은 육체적으로 아름답다. 그렇다면 남성 배우는? 물론 클라크 게이블, 게리 쿠퍼,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 캐리 그랜트는 아름답다. 하지만 가장 위대한 남성 배우 리스트에는 험프리 보가트와 제임스 스튜어트와 제임스 캐그니와 스펜서 트레이시의 이름도 있다. 그들이 아름다운 배우일까? 그럴 리가. 개성 있는 외모, 이를 이용한 캐릭터로 사랑받았던 배우들이다. 이상할 정도로 위대한 여성 배우 리스트에는 그들과 비슷한 성격의 배우가 드물다. 지나칠 정도로 드물다.
메릴 스트립은 어쩌면 할리우드 역사상(혹은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신이 빚은 듯한 외모와 성적 매력이 아니라 연기 그 자체로 위대한 배우 리스트에 오른 여성 배우일 것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나는, 혹은 젊은 시절의 나는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메릴 스트립의 연기가 기술적이라고, 지나칠 정도로 기술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4회 수상한, 아마도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일 캐서린 헵번도 메릴 스트립을 싫어했다. 2003년 작고한 그의 전기 『케이트를 기억하며』에는 그가 좋아한 배우와 싫어한 배우에 대한 아주 솔직한 평가가 들어있다. 그는 메릴 스트립을 두고 “지나치게 지적인 데다 테크닉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배우”라며 아예 ‘가장 싫은(Least favorite)’ 여성 배우라고 혹평했다. 캐서린 헵번을 존경하던 메릴 스트립에게는 아주 실망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가장 위대한 할리우드 여성 배우 중 하나로 평가 받는 잉그리드 버그먼과 캐서린 헵번
그건 온당한 비판이었을까? 위대한 캐서린 헵번의 의견에 딱히 딴지를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만, 그럼에도 헵번이 ‘할리우드의 과거’에 머무른 대가였다는 사실은 언급하고 넘어가야만 할 것 같다. 메릴 스트립은 이전의 여성 배우에게 당연히 요구되던 많은 것을 갖추지 않은 채 커리어를 시작했고, 결국에는 그 이상의 것을 성취해낸 배우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메릴 스트립이 지나치게 기술적으로만 연기하는 배우라는 편견을 벗어던지는 중이다. 왜냐고? 그가 기술적으로 연기하는 배우라는 사실을 부인하진 않는다. 그는 여전히 기술적인 배우다. 그러나 우리는 수많은 기술적인 남성 배우들을 “자연스럽지 못하다”라느니, “지나치게 테크닉에 의존한다”고 비판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로버트 드니로는 딱히 자연스러운 배우가 아니다. 그가 출연한 1970~80년대 영화를 보면 놀랄 정도로 기술적이다. 최근 출연한 코미디 영화에서도 나는 딱히 자연스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여전히 그는 기술적이다. 메릴 스트립 또한 커리어 후반부에 출연한 코미디 영화들에서 여전히 기술적이라고 생각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맘마 미아!›, ‹줄리&줄리아›(2009), ‹철의 여인›>(2011)에서 그가 선보인 연기는 기막히게 기술적이다.
그러나 메릴 스트립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철저한 기술적 연기로부터 감정을 폭파시킬 줄 아는 배우다. 나는 그걸 지난 몇 년 사이에야 겨우 깨달았다. 남성 배우에게 들이대는 잣대를 여성 배우에게 동일하게 적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건, 그러니까 성격이 강한 남성 CEO는 뭔가 독특한 천재로 간주하면서, 같은 결의 여성 CEO는 ‘드세다’고 표현하는 우리의 깊은 편견과도 아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하여간 남자들은 종종 이렇게 어리석다.
1980년대 메릴 스트립과 비슷한 시기에 전성기를 누린 미셸 파이퍼
메릴 스트립에 관한 이번 글은 다른 여성 배우의 이야기로 마무리해 볼까 한다. 1980년대 메릴 스트립과 비슷한 시기에 전성기를 누린 미셸 파이퍼다. 미셸 파이퍼는 1980년대 내내 ‘섹시한 여성의 몸에 갇힌 연기파 배우’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 대단히 비뚤어진 평가다. 그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출연한 ‹위험한 관계›(1988), ‹사랑의 행로›(1989), ‹러브필드›(1992)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꾸준히 올랐지만, 계속해서 아름다운 금발의 외모로만 평가받았고, 마블의 ‹앤트맨› 시리즈에 출연하기까지 한때 거의 중요한 출연작이 없었다. 메릴 스트립과 미셸 파이퍼는 전혀 다른 편견에 시달리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두 위대한 배우는 어쩌면 우리가 여성 배우를 바라보는 관점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는 살아있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이제 파치노와 드니로의 자리에 스트립과 파이퍼를 올리자. 그렇다. 이건 기나긴 반성문이다.
Writer
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loser21
비애티튜드에 늘 신선한 글을 투척하는 김도훈 작가의 정체는 사실 영화평론가랍니다. 배우 톰 크루즈는 1986년 ‹탑건›으로 만인이 사랑하는 할리우드의 슈퍼스타가 됐어요. 성공적인 커리어의 전형을 쌓던 그는 2000년대 들어 계속 내리막을 걸으며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로 소생하고 있는데요. 36년 만에 ‹탑건›의 후속작인 ‹탑건: 매버릭›으로 돌아온 톰 크루즈에 대해 김도훈 작가는 의미심장한 평가를 내립니다. 아래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나는 톰 크루즈Tom Cruise를 포기했었다. 세상은 톰 크루즈를 포기했었다. 2005년이었다. 톰 크루즈는 케이티 홈즈Katie Holmes와의 열애를 홍보하기 위해 ‹오프라 윈프리 쇼the Oprah Winfrey Show›에 출연했다. 그는 갑자기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라고 외치며 갓 수족관에서 꺼낸 방어처럼 소파 위를 방방 뛰기 시작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사랑에 빠지면 과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미친 짓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톰 크루즈의 행동은 사랑에 푹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남자의 행동이라기에는 좀 기괴했다. 사실 톰 크루즈는 토크쇼에 자주 등장하던 사람도 아니었다. 사생활을 비교적 드러내지 않는 배우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남자가 소파에서 뛰고 있었다.
오프라 윈프리가 케이티 홈즈를 무대로 불렀다. 나는 그 순간 홈즈가 지은 표정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건 사랑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표정이라기보다 친하지 않은 아빠가 ‹전국노래자랑›에서 박현빈의 ‘샤방샤방’을 부르는 장면을 지켜보다 무대에 강제 소환된 딸의 표정에 더 가까웠다. 그때 소셜 미디어가 있었다면 이 사건은 더 난리가 났을 것이다. 2005년은 아이폰이 세상에 나오기 전이었다. 소셜 미디어는 그다지 위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세상은 충분히 난리가 났다. 누군가 과할 정도로 흥분해서 날뛰는 걸 두고 ‘Jump The Couch’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즈음 톰 크루즈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가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라는 컬트 종교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을 ‘아는 것’과 사실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당시 막 떠오르던 유튜브에는 톰 크루즈의 사이언톨로지 관련 영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이언톨로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그의 눈빛은 실로 광적이었다. 만약 ‘종교적 자유에 대한 딴지’로 불편함을 느낀다면 당장 유튜브에서 그 영상을 검색해보기를 권유한다. 나는 그 영상을 보고 ‘마침내 톰 크루즈가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악역을 맡을 준비가 됐다’고 생각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은 할리우드 스타의 괴상한 사생활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관대했다. 스타들이 호텔 방을 때려 부수고, 길거리에서 주먹질해도 ‘그 사람은 할리우드 스타니까’라는 한 마디면 용납받던 시대였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 스타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슈퍼스타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톰 크루즈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슬프게도 사이언톨로지 홍보 영상과 ‹오프라 윈프리 쇼› 소파 영상은 당시 톰 크루즈 최고의 히트작이었다.
2000년대 중반은 톰 크루즈의 할리우드 경력 자체가 기울기 시작하던 시기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와 함께 만든 ‹마이너리티 리포트Minority Report›(2002)와 ‹우주전쟁The War of the Worlds›(2005)이 유일한 성공작이었다. ‹바닐라 스카이Vanilla Sky›(2001), ‹라스트 사무라이The Last Samurai›(2003), ‹콜래트럴Collateral›(2004)이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미적지근한 반응을 얻었다. 남은 한 방은 당시 가장 떠오르던 신인 감독 J.J. 에이브럼스J.J. Abrams와 손을 잡은 ‹미션 임파서블 3 Mission: Impossible III›였다. 톰 크루즈는 속편에 참여하지 않기로 유명한 배우였다. 하지만 그는 가라앉고 있는 경력이 다시 상승하길 바랐다. 자신의 유일하고도 성공적인 프랜차이즈가 될 가능성을 갖춘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로. 하지만 ‹미션 임파서블 3›는 실패했다. 오랫동안 파트너십을 유지하던 파라마운트가 흥행 실패 이후 톰 크루즈와의 장기 계약을 취소했다. 모두가 ‘그는 끝났다’고 떠들었다.
모두를 숨죽이게 했던 ‹미션 임파서블›의 그 유명한 명장면.
‹미션 임파서블 3›가 그렇게 나쁜 영화였던가? 그렇지는 않다. 나는 우위썬吳宇森이 연출한 ‹미션 임파서블 2 Mission: Impossible II›가 브라이언 드 팔마Brian De Palma라는 저주받은 천재가 자신의 모든 영화적 마술을 투입한 ‹미션 임파서블›이 지닌 스파이 영화로서의 즐거움을 철저하게 파괴한 자아도취적 졸작이라고 생각한다. J.J. 에이브럼스는 오히려 이 시리즈의 정체성을 다시 궤도에 올린 업적을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미션 임파서블 3›의 흥행 실패, 혹은 만족스럽지 않은 흥행은 어떤 면에서 톰 크루즈의 업보였다. 사이언톨로지와 소파 사건으로 1980년대부터 완벽하게 관리한 그의 스타 이미지는 거의 완벽하게 훼손됐다. ‹미션 임파서블 3›에 굳이 아내 캐릭터가 등장하며 키스로 마무리한, 도무지 시리즈와는 어울리지 않는 설정도 톰 크루즈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불평이 터져 나왔다. 당시 톰 크루즈는 사생활과 영화 사이의 간극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었다.
많은 스타는 사생활을 자신의 어떤 매력 지점으로 사용한다. 2000년대 가장 거대한 스타였던 브래드 피트Brad Pitt와 조니 뎁Johnny Depp은 연인과의 사생활 자체가 스타 아우라의 일부였다. 그들은 지속적인 성공작이 없어도 스타로서 기울어지지 않는 인기를 누렸다. 왜 톰 크루즈에게는 그게 적용이 되지 않았던 걸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톰 크루즈는 거의 무성영화 시절의 스타에 가까운 최후의 고전적인 스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사생활과 가십이 아니라 온전히 스스로 만들어낸 영웅의 이미지로 1980년대와 1990년대를 통과한 배우였다. ‹위험한 청춘Risky Business›(1983)과 ‹아웃사이더The outsiders›(1983)로 당대 할리우드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배우의 반열에 오르자마자 그는 ‹탑건Top Gun›(1986)으로 스타가 됐다. 아니, 곧바로 슈퍼스타가 됐다. 그리고 그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할리우드의 슈퍼스타 반열에 오르게 해준 ‹탑건›(1986)에서의 톰 크루즈.
그는 다작하지 않는 대신 일찌감치 하나의 전략을 세웠다. 블록버스터에 출연한 다음에는 자신에게 오스카상을 줄 수 있는 진지한 영화에 출연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를 반복하는 것이다. ‹탑건› 이후 그는 더스틴 호프만Dustin Hoffman과 ‹레인 맨Rain Man›(1988)을 찍었다. ‹레인 맨›으로 오스카상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연기력에서도 상찬받은 그는 이후 ‹탑건›의 토니 스콧Tony Scott과 함께 레이싱 블록버스터 ‹폭풍의 질주Days of Thunder›(1990)와 올리버 스톤Oliver Stone의 베트남전 영화 ‹7월 4일생Born on the 4th of July›(1990)을 동시에 찍었다. ‹폭풍의 질주›는 흥행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7월 4일생›으로 그는 꿈꾸던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92년에는 ‹어 퓨 굿 맨A Few Good Men›(1992)과 ‹파 앤드 어웨이Far And Away›(1992), 1993년에는 ‹야망의 함정The Firm›과 ‹뱀파이어와의 인터뷰Interview With The Vampire: The Vampire Chronicles›, 1996년에는 ‹미션 임파서블›과 ‹제리 맥과이어Jerry Maguire›를 내놓은 것도 ‘블록버스터와 작가 영화의 반복’이라는 패턴에 꽤 부드럽게 들어맞는다. 한마디로 그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완벽하게 커리어를 설계하는 스타였다.
거기서 문제가 비롯된다. 완벽한 스타는 지루하다. 세상은 더는 완벽한 스타를 원하지 않는다. 2000년대부터 세상은 인간적인 허점까지 드러내는 친근한 스타를 더 원하기 시작했다. 인간적인 입체성을 철저하게 숨기고 완벽한 스크린 스타로 존재하는 건 점점 힘든 일이 되었다. 거기에서 톰 크루즈의 추락은 시작됐다. 그의 사생활 중 우리가 아는 건 사이언톨로지와 극적으로 실패한 몇 번의 결혼 생활뿐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인생 자체가 일종의 연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의 인터뷰는 언제나 팬 서비스에 충실했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충실한 팬 서비스에 가까워졌다. 마음을 드러내기보다 슈퍼스타 톰 크루즈만 존재했다. 그런 경직된 이미지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려 보겠다고 나선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의 소동은 오히려 지옥문을 열었다.
2010년대에도 톰 크루즈의 부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톰 크루즈의 가장 멋진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나잇 앤 데이Knight & Day›(2010), ‹오블리비언Oblivion›(2013),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2014), ‹아메리칸 메이드American Made›(2017)는 기대보다 미지근한 흥행을 기록했다. ‹미션 임파서블›만한 프랜차이즈를 만들겠다고 나선 ‹잭 리처Jack Reacher› 시리즈는 톰 크루즈의 스타성이 휘발됐다는 슬픈 증거가 됐다.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마블에 필적하는 다크 유니버스를 만들겠다며 톰 크루즈와 손잡고 내놓은 ‹미이라The Mummy›(2017)의 대실패는 치명적이었다. 그가 국제 시장에서 힘을 발휘한 유일한 작품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였다. ‹미션 임파서블: 로그 네이션Mission: Impossible – Rogue Nation›(2015)과 ‹미션 임파서블: 폴 아웃Mission: Impossible – Fallout›(2018)은 흥행에서 성공을 기록했지만, 사람들은 늙고 퇴색한 스타의 마지막 생명줄이라고 조소했다.
1980년대부터 스타였던 남자가 2010년대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유일한 성공적 프랜차이즈에 매달리는 모습은 어떤 면에서 조금 필사적으로 보였다. 생각해보시라. 우리는 더는 청룽成龙의 액션 영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직접 액션을 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들었다. 톰 크루즈는 청룽과 거의 같은 시기에 영화를 시작한 배우다. 그가 직접 비행기 옆에 매달리는 ‹미션 임파서블: 로그 네이션›의 스턴트 장면을 공개했을 때 세상은 감탄하는 동시에 탄식했다. 그건 마지막 프랜차이즈에 가까스로 매달려야만 하는 톰 크루즈라는 스타의 현재를 그대로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톰 크루즈가 국제 시장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작품 ‹미션 임파서블: 로그 네이션›(2015)의 한 장면. 여기서 그는 스턴트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맨몸으로 비행기에 매달리는 장면을 연출했다.
자, 나는 지금까지 톰 크루즈의 추락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다시 불멸의 궤도에 오른 놀라운 스타라고 상찬하며 이 글을 마무리할 생각이다. ‹탑건: 매버릭Top Gun: Maverick›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던 블록버스터였다. 미국의 많은 유튜버는 이 영화가 2022년 최고의 실패작이 될 거라고 조소했다. 지금은 마블Marvel의 시대다. 마블의 시대에는 스타가 없다. 당신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obert Downey Jr.의 이름으로 반박하고 싶겠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시라. 그는 마블 영화 최후의 슈퍼스타였다. ‹아이언맨Iron Man›은 마블의 첫 번째 블록버스터였다. 마블은 막 시작하는 신진 영화사였다. 그들에게는 스타가 필요했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1990년대부터 스타였던 남자다. 그의 아우라는 마블 프랜차이즈의 어떤 성격 자체를 창조해냈다. 그러나 다음은? 크리스 헴스워스Chris Hemsworth나 크리스 에반스Chris Evans는 스타다. 그러나 슈퍼스타인가? 그렇지는 않다. 마블 영화는 스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마블 영화 속 배우들은 일종의 체스 말이다. 마블은 더 많은 돈을 요구하는 배우를 과감히 해고하고 다른 배우로 대체하기로 유명하다. 그들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죽이기로 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그가 지나치게 비싸졌기 때문이라는 풍문은 충분히 논리적으로 일리가 있다.
할리우드 최후의 고전적 슈퍼스타들은 마블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다. 브래드 피트, 리어나도 디캐프리오Leonardo DiCaprio, 조지 클루니George Clooney가 마블 세계에 들어가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톰 크루즈도 마찬가지다. 그가 마블 영화에 출연한다는 여러 소문이 있었지만, 그는 마블과 손잡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마블의 세계는 자신이 지금까지 구축한 스타 이미지의 배반이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탑건: 매버릭›이 그 증거다. 톰 크루즈는 자신이 36년 전에 연기한 캐릭터 ‘매버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이 매버릭이라는 인물이 2020년대에 더는 영웅이 될 수 없는 낡아빠진 퇴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세상은 이미 무인 전투기의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탁월한 능력이 있는 인간 조종사의 시대는 끝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고전적인 블록버스터의 시대는 끝이 났다. 고전적인 슈퍼스타의 시대도 끝이 났다. 그러나 매버릭은 36년 전에 그랬듯이 여전히 반항한다. 기계적 히어로의 세상에서도 여전히 인간 조종사의 오랜 경력과 재능은 필요하다고 설법한다. 슈퍼스타가 사라진 마블의 세상에서도 여전히 고전적인 슈퍼스타의 아우라는 건재하다고 선언한다.
톰 크루즈는 마침내 자신이 36년 전에 연기한 캐릭터 ‘매버릭’으로 돌아왔다.
톰 크루즈는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찍으면서 깨달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의 힘을 여전히 믿는다. «할리우드 리포터The Hollywood Reporter»는 “CG 위조품의 무감각한 폭격에 대항해 본능적인 아날로그 액션을 끌어올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점”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완벽하게 동의한다. ‹탑건: 매버릭›의 마지막 공중전 장면은 관객의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키는 고전적인 ‘시네마’가 주는 쾌락의 어떤 절정이자 정점이다. 나는 영화가 끝나자마자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시사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모두 손뼉을 쳤다. 이런 일은 정말 드물게 일어난다. 그 박수는 고전적인 영화적 쾌감에 바치는 찬사인 동시에 톰 크루즈라는 오랜 스타에게 보내는 진심 어린 존경이었다.
톰 크루즈는 36년 전으로부터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나는, 우리는 한때 그를 포기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같은 의무감으로, 같은 방식으로, 같은 관객을 위해 40년간 영화를 만들었다. 톰 크루즈가 영화를 더 이상 찍지 않는 날이 온다면 그날은 ‘최후의 슈퍼스타 시대의 종말’로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나는 확신한다. 그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영화를 만들 것이다. 그는 더는 배우가 아니다. 영화다.
Writer
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이와 감독은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재구성하는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와 영상들을 제작합니다. 이번 비주얼 포트폴리오에서는 감독님의 여러 작업 중에서도 사라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풍경›을 집중 조명합니다. 김설진 안무가와 공동 연출을 한 작품 ‹풍경›은 영화와 공연의 두 가지 형태로 기획되었는데요. 자세한 작업기를 아래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저는 영화와 영상 작업을 하는 이와입니다.
작업 ‹풍경›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요.
‹풍경›은 오래된 병원에 머물고, 사라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단편 영화예요. 영화 ‹풍경›이 만들어지고, 공연 ‹풍경›이 만들어졌는데요. 이 두 작품은 처음부터 두 가지 형태로 기획되었어요. 서로 같은 듯 다른 이야기와 인물을 담고 있지만, 시간과 기다림이라는 동일한 키워드를 가지고 있답니다.
‹풍경›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김설진 안무가와 공동 연출을 통해 만들었어요.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몇 가지 이야기를 필름화시키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제법 긴 시간 동안 다양한 대화와 자료를 주고받으며 캐릭터와 장소 등을 정했죠.
작업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언제부턴가 영화, 영상 작업을 하면서 사진과 음악 작업을 같이하는 프로세스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하나의 이야기가 작품 하나로만 나오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는 창작자를 만나 여러 장르의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이번에도 손지민 포토그래퍼와 함께 사진 작업을 진행했어요. 저는 언제나 대략적인 시놉시스를 작가에게 이야기하고, 작가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며 작업하는 걸 원해요. 이번에도 그렇게 많은 사진 결과물이 나왔고, 이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고민하고 있어요.
배경이 폐병원인데요. 로케이션으로 삼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병원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설정 아래 몇 가지 가능성을 보며 장소를 찾았어요. 전문적인 대학병원, 큰 유리창의 개인실이 있는 요양병원 등 몇몇 후보가 있었지만, 결국 시간의 흐름이 가장 잘 보일 수 있는 오래된 병원으로 로케이션을 정하게 되었어요.
영화에서 무용과 음악이 무척 인상 깊어요. 구상하면서 유의하신 점이 있나요?
움직임을 위한 영화보다는, 영화와 이야기를 위한 움직임으로 보이질 바랐어요. 인물들이 겪는 다양한 상황을 대사가 아닌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안무가와 다양한 작업을 통해 만들어왔던 경험이 있었죠. 이번에도 적극적으로 시도해보려고 노력했답니다. 누군가의 과장된 몸짓은 격정적인 클래식을 지휘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로비에서 고개를 상하좌우로 흔드는 사람들은 간병인의 히스테릭한 집착과 우울함을 보여주기도 해요. 이런 동작과 음악은 대부분 콘티 없이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곤 했는데요. 저희는 그 과정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영화와 공연을 함께 보는 관람자에게 줄 수 있는 팁이 있을까요?
관람 순서나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나의 큰 주제를 가지고 영화와 공연이라는 다른 방식의 작업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탄생했다는 점을 관심 있게 봐주신다면 좋겠습니다. 영화에서는 불가능한 게 공연에서는 가능하기도 했었고, 공연에서는 어려운 게 영화에서는 쉽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게 재미있는 지점일 수 있겠네요.
작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조금 쉬워지면 좋겠다’라는 말처럼 작업의 친절도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듣는 편인데요. 저도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해요. 이번에는 그런 점에서 불친절한 부분이 없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답니다. 다만 지금 하고 있는 표현 방식이 제일 좋은 방법이고 수단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고 있어요.
요즘 스스로에게 만들어주고 싶은 스테레오타입은 무엇인가요?
산책을 하고, 시간을 여유롭게 보내는 걸 좋아하다 보니 한가한 창작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흔히 이런 부류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밤낮이 없고, 누군가의 요구에 갑작스러운 일을 하는 등 자기 시간을 잘 쓰고 있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영화에 관심이 없고 싶기도 하고, 누구보다 더 열심히 영화를 만들고 싶지만 어서 빨리 다른 일을 하고 싶기도 해요. 순간의 시간에 만족하고 즐거울 수 있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작업 중 찾아오는 어려운 순간은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긴 시간 공들여 찍고 편집하는 시간이 찾아오면 언제나 이상한 기분을 느껴요. 후회가 드는 컷과 장면이 있지만, 단 하나의 의미 있는 장면이 그 감정을 상쇄하기도 합니다. 그 장면이 작품의 불안정함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지만 다음 작업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해주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못한 건 가볍게 반성하고, 잘한 건 계속 들여다봅니다. 잘한 것을 더 잘하기 위해서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창작자에게 버티는 노하우를 공유해주세요.
개인적으로, 어떤 방식의 피드백이든 열심히 받으려고 노력해요. 친한 친구, 모르는 사람 또는 어떤 기관에 새로운 작업을 보여주고 주절주절 제가 가진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열 명, 백 명, 천 명이 관심 없다고 해도 한 명의 관객은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관객은 어쩌면 스스로일 수도 있어요. 자기 자신을 좋아할 수 있다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에 긍정적일 수 있지 않을까요. 좋아하는 걸 그저 계속해나가면 되겠습니다.
Artist
감독 이와는 이미지를 수집하고 재구성하는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와 영상을 만들고 있다. 연출과 촬영을 함께 했던 단편영화 ‹그녀에게›는 캐나다 몬트리올 누보시네마영화제, ‹들리지 않은 편지›와 ‹대만 이야기›는 이탈리아 몬테카티니 국제단편영화제 등에 초청됐다. 촬영 감독으로 참여한 장편영화 ‹갱›은 부산국제영화제, 단편영화 ‹진동, Vibration›은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미국 샌디에고 아시안영화제에 초청됐다. 국립현대무용단의 ‹볼레로 만들기›, ‹시간의 흔적› 등 영화와 댄스 필름과 더불어, 다양한 장르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일을 마치고 연희동에 영화를 보러 갔다(홍상수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독백은 보통 이렇게 시작하곤 한다). 삼청동과 인사동뿐만 아니라 가을의 연희동 또한 영화감독 홍상수와 제법 어울리는 공간이다. 그가 올해 발표한 신작 제목은 «당신얼굴 앞에서»였는데, 이 영화의 상영관을 찾던 중 알게 된 공간이 바로 연희동에 위치한 예술영화관 ‘라이카시네마’였다. ‘카메라 브랜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일까’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는데 알고 보니 그 라이카Leica가 아니라 최초로 우주로 나아간 개, 라이카Laika를 기리기 위한 이름이라 한다. 한글 표기만 같을 뿐, 로마자 철자는 다르다.
영화를 본 지 오래 지나고 나면 비록 영화의 줄거리는 어렴풋하게 남더라도 누구랑 봤는지, 어디서 봤는지에 대한 기억은 또렷이 남는다. 또한 영화의 장르에 따라 관람하기에 어울리는 장소가 있다. 마치 비슷한 시기에 영화관에 개봉한 SF 대작 «듄»을 보기 위해서는 용산 IMAX로 가야 하듯이, 이 홍상수 영화에는 이곳 라이카시네마가 제법 잘 어울린다. 상영관은 하나인데 좌석 또한 많지 않은 덕분에 그 시간대에 함께한 관람객들끼리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묶여 있다는 묘한 유대감을 준다. 영화를 마치고 상영관을 나서면서 하마터면 그들에게 ‘살펴들 들어가시라’고 인사를 건넬 뻔했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빠져나오면, 영화 속 삶과 현생을 이어주는 듯한 신비로운 형태의 계단을 마주칠 수 있다. 블록버스터나 공포 영화를 보고 나온 후의 영화관 밖 풍경은 너무나 가만해서 안심과 권태를 동시에 주곤 하는데, 홍상수 영화를 보고나서 보게 된 라이카시네마 바깥의 연희동은 현생이 마치 영화의 연장선처럼 느껴지게 한다. 수북이 떨어진 플라타너스 잎을 발로 차며 연희동 골목을 빠져나갈 때, 다시 한 번 뒤돌아 영화관 건물을 바라보게 만드는 여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