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Essay

쿠소영화를 위한 안내서4-아류작의 극단

Writer: 박동수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매일 행복할 수는 없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곰돌이 푸를 기억하시나요? 꿀단지를 들고 다니며 느긋하고 낙천적인 모습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선사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죠. 그랬던 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100에이커 숲을 이탈해 현대인의 절망을 알아버린 걸까요? 푸가 흑화하고 맙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푸의 친구 피글렛과 티거, 심지어 옆 동네 피터팬과 피노키오까지도 살인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한데 모여 유니버스를 구축한다고도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죠. 저작권 만료로 제작된 뒤틀린 동심의 끝은 어디까지일까요?


박동수가 풀어내는 기발한 잔혹극의 유희를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essay]쿠소영화_4_2

‹곰돌이 푸: 피와 꿀 2›의 캐릭터 포스터

아류작의 극단: 피와 함께 돌아온 크리스토퍼 로빈의 친구들

새해가 되면 저작권에서 해방된 작품의 리스트가 소셜미디어에 올라온다. 나는 주로 퍼블릭 도메인이 된 영화의 리스트를 열심히 살펴보지만, 누군가에게 이 리스트는 새로운 IP 발굴지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2022년에는 하필 저작권이 소멸한 A. A. 밀른의 동화 『곰돌이 푸』가 그 대상이 되었다. 저작권 소멸과 거의 동시에 공개된 ‹곰돌이 푸: 피와 꿀›(Winnie-the-Pooh: Blood and Honey, 2023)의 제작 소식은 많은 사람을 경악게 했다. 누군가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통해 가졌던 동심이 파괴되었다고 절규했고, 누군가는 100에이커 숲의 동물 친구들이 성인용 슬래셔 속 살인마로 변질된 것을 개탄했다.

이런 폭발적인 관심에 힘입어 ‹곰돌이 푸: 피와 꿀›은 10만 달러의 제작비로 전 세계에서 52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린 히트작이 되었다. 영국의 제작사 재그드 에지 프로덕션(Jagged Edge Productions)은 잽싸게 차기작을 발표한다. 이듬해 ‹곰돌이 푸: 피와 꿀 2›(Winnie-the-Pooh: Blood and Honey 2, 2024)를 내놓았다. 그들의 세계는 다른 퍼블릭 도메인 동화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통해 히트한 캐릭터로 확장된다.

피터팬이 싸이코 광대 살인마가 된 ‹피터팬 네버랜드 나이트메어›(Peter Pan’s Neverland Nightmare, 2025)와 아기사슴 밤비를 숲속의 괴수로 만든 ‹블러드 밤비›(Bambi: The Reckoning, 2025)가 빠르게 제작되었고, 올해는 ‹피노키오: 언스트롱›(Pinoccgio: Unstrong, 2026)을 발표했다. 이 영화에서 피노키오는 자신의 코를 부러뜨린 뒤 수리검처럼 던져 살인을 저지른다.

[essay]쿠소영화_4_3

‹곰돌이 푸: 피와 꿀›의 포스터. 참고로 하단의 캐릭터는 피글렛이다.

우리의 동심을 지켜주던 동화 속 캐릭터들은 어쩌다 살인마가 되었나? 이는 쿠소영화의 주요한 형태 중 하나가 아류작이라는 데 있다. 이미 성공한 캐릭터나 장르를 빠르게 가져와 원본의 인기에 편승하는 전략이다. 사실 이런 전략은 영화의 역사 전반에 걸쳐 꾸준히 활용되어 왔다. 가장 좋은 예시는 아무래도 ‹킹콩›이다. 1933년 RKO가 제작한 ‹킹콩›(King Kong)은 세계적으로 히트했고, 개봉한 지 고작 9개월 뒤에 속편 ‹콩의 아들›(Son of Kong, 1933)이 제작된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전 세계에서 ‹킹콩› 아류작이 제작된다.

일본에서는 지금은 유실되어 볼 수 없는 ‹에도에 나타난 킹콩›(江戸に現れたキングコング, 1938)이나 고지라와 결투를 벌이는 ‹킹콩 대 고지라›(キングコング対ゴジラ, 1962) 등이 제작된다(다행히 후자는 도호가 RKO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미군을 인천에 상륙시킨 킹콩이 한강까지 진출하는 ‹킹콩의 대역습›(1976)이 만들어졌다. 유럽에서는 암컷 거대 고릴라가 잘생긴 남성을 납치하는 ‹퀸콩›(Queen Kong, 1976)이 제작되었고, 홍콩에서도 고릴라를 베이징원인으로 탈바꿈시킨 ‹성성왕›(猩猩王, 1977)이 만들어진다.

[essay]쿠소영화_4_4

한미 합작으로 만들어진 킹콩 아류작 ‹킹콩의 대역습›. 킹콩은 ‘마릴린’이라는 이름의 여성 배우를 납치하고, 자신을 생포하려는 군대에 가운뎃손가락을 보여준다. 심지어 이 영화는 3D로 제작되었다.

21세기 들어 목버스터(Mockbuster), 직역하면 ‘가짜 블록버스터’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보다 직접적으로 원본의 인기를 자신의 흥행으로 끌어오려는 시도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샤크네이도›와 ‹샤크토퍼스› 시리즈로 유명한 제작사 어사일럼(The Asylum)은 스필버그의 ‹우주전쟁›(War of the World, 2005) 개봉에 맞춰 ‹H. G. 웰스[1] 의 우주전쟁›(H. G. Wells War of the Worlds, 2005)을 제작했다.

그 당시만 해도 북미 최대의 DVD 대여점 프랜차이즈였던 ‘블록버스터’는 이 영화를 스필버그의 영화로 오인해 10만 장의 DVD를 구입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사일럼은 단순히 저예산 아류작을 만드는 데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목버스터를 제작해 원본의 개봉 시기에 맞춰 공개한다. 피터 잭슨의 ‹킹콩›(King Kong, 2005)에 ‹쥬라기 공원: 잃어버린 세계›(The Lost World: Jurassic Park, 1997)를 더한 ‹킹: 잃어버린 세계›(King of the Lost World, 2005)는 두 영화를 섞었다는 점에서 나름의 창의성이 발휘된 영화다. 그 이후 제작된 목버스터들은 ‹트랜스모퍼›(Transmorphers, 2007), ‹아틀란틱 림›(Atlantic Rim, 2013), ‹작전명 덩케르크›(Operation Dunkirk, 2017)처럼 제목만 들어도 어떤 영화를 베꼈는지 알 수 있는 작품으로 즐비하다.

[essay]쿠소영화_4_5
[essay]쿠소영화_4_6
[essay]쿠소영화_4_7
[essay]쿠소영화_4_8

어사일럼의 목버스터 영화 포스터 모음. 왼쪽부터 ‹H. G. 웰스의 우주전쟁›, ‹트랜스모퍼›, ‹아틀란틱 림›, ‹작전명 덩케르크›. 몇몇 영화는 국내에서 정식 개봉되어 원본이 되는 영화와 비슷한 시기에 VOD로 공개됐다. 한 지인은 어릴 적 아버지가 ‹작전명 덩케르크›를 크리스토퍼 놀런의 ‹덩케르크›인 줄 알고 틀어줬다고 한다.

다만 아류작에는 한계가 있다. (대부분의) 전 세계가 저작권 협약을 맺은 지금, 무차별적으로 원본의 이름과 이미지를 가져오는 것은 송사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행위다. 실제로 어사일럼은 ‹호빗: 뜻밖의 여정›(The Hobbit: An Unexpected Journey, 2012) 개봉에 맞춰 ‹호빗의 시대›(Age of the Hobbits)라는 영화를 내놓으려 했다. 하지만 원작의 제작사 워너브러더스와 뉴라인시네마, MGM이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제목을 ‹제국의 충돌›(Clash of the Empires, 2012)로 바꾸어 제작했다. ‹곰돌이 푸: 피와 꿀›의 제작진도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수십 편의 아류작과 초저예산 호러영화를 제작했던 재그드 에지 프로덕션은 영리하게 이런 함정을 피해 왔다. 크람푸스나 노움 등 유럽의 전래동화나 신화 속 캐릭터, 공룡이나 악어, 뱀, 드래건 같은 (상상 속) 동물을 내세운, 사실상 저작권이 성립할 수 없는 대상을 소재로 삼는 전략이다.

[essay]쿠소영화_4_9
[essay]쿠소영화_4_10
[essay]쿠소영화_4_11
[essay]쿠소영화_4_12
[essay]쿠소영화_4_13

위에서부터 ‹곰돌이 푸: 피와 꿀›, ‹곰돌이 푸: 피와 꿀 2›, ‹피터팬 네버랜드 나이트메어›, ‹블러드 밤비›, ‹피노키오: 언스트롱›의 스틸컷. 우리의 동심이 기억하는 것과는 180도 다른 모습을 자랑한다.

저작권이 만료된 동화들은 그들에게 군침이 싹 도는 소재였을 것이다. 슬래셔 영화 속 살인마가 된 곰돌이 푸는 장르의 전통에 충실하다. 주인공 크리스토퍼 로빈의 여자친구는 물론이고 외딴 시골에 놀러 온 청년들을 학살하고, 그들을 가로막으려는 시골 아저씨들도 가차 없이 죽인다. 일그러진 표정의 고무 가면처럼 보이는 곰돌이 푸와 피글렛 분장은 마이클 마이어스의 흰 가면이나 프레디 크루거의 화상 입은 피부만큼 강렬하다. ‹피의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 1981) 속 광부 복장 살인마처럼 곡괭이나 농기구를 쓰기도 하고, ‹텍사스 전기톱 학살›(The Texas Chainsaw Massacre, 1974)의 레더 페이스처럼 갈고리에 피해자를 걸어두기도 한다.

첫 영화의 성공으로 제작비가 상승한 속편에서는 보들보들한 털을 갖춘 곰돌이 푸가 클럽에서 파티를 즐기던 이들을 난데없이 학살한다. 그뿐일까? 피터팬은 페니와이즈처럼 아이들을 유혹하고, 조커처럼 분열한 자아를 선보인다. 아이를 잃고 방사능 괴수가 된 밤비는 끈질기게 쫓아와 사람을 박살내 버린다.

사실 이들 영화에서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인간 캐릭터들이다. 살인마가 되고 괴수가 된 동화 속 캐릭터가 1차적으로 충격을 준다면, 인간들이 선보이는 행동들은 뒤이어 충격을 준다. 방사능 괴수 밤비의 목표가 된 가족은 캠핑카를 타고 도망치던 중 초등학생 아들에게 운전대를 맡긴다. 딱히 초등학생이 운전대를 잡아야 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 아닌데도 말이다. 곰돌이 푸는 물론이고 피글렛과 올빼미까지 마주하는 크리스토퍼 로빈은 자신의 동심이 완벽하게 뒤틀려 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캐릭터이다. 전편의 사건으로 PTSD를 겪는 그는 일하던 병원에서 해고당하는 것도 모자라 곰돌이 푸가 자신의 숨겨진 OOO라는 진실을 알게 되기까지 한다(OOO이 무엇인지는 강력한 스포일러이니 영화에서 확인하시길).

[essay]쿠소영화_4_14

‹푸니버스: 몬스터 어셈블›의 티저 포스터. 곰돌이 푸가 괴수 밤비를 타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포스터 하단에 ‘2025’라 써 있지만 아직 공개되지 못했다.

재그드 에지 프로덕션은 노다지 땅을 찾은 광부처럼 저작권이 소멸한 동화에 달려들었다. 2023년부터 4년 동안 영화를 5편 만들었고, 이들을 하나의 ‘시네마틱 유니버스’로 엮어낼 계획까지 발표했다. 마블처럼 페이즈를 구분하는 이 유니버스의 이름은 ‘Twisted Childhood Universe’, 직역하면 ‘뒤틀린 어린 시절 세계관’이 되겠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뒤틀린 동심을 마주한 사람처럼 행동한다. 살인마로 변해버린 동물 친구를 보며 경악하고, 더는 귀엽지 않은 괴수 사슴을 보며 도망친다. 푸와 피글렛, 피터팬, 밤비, 피노키오까지 차례차례 데뷔작을 내놓은 지금, 이들은 ‹푸니버스: 몬스터 어셈블›(Poohniverse: Mosters Assemble)로 한데 뭉치며 첫 번째 페이즈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각각의 영화는 그림책풍의 일러스트로 시작되고 마무리되는데, 이들 일러스트는 마블의 쿠키 영상처럼 서로를 엮어 낸다. 두 번째 페이즈에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앨리스와 모자 장수, 『곰돌이 푸』의 티거,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오로라 공주가 출격할 예정이다.

우리의 동심을 박살 내며 등장한 이들 영화는 존재만으로도 쿠소함을 풍긴다. OTT나 IPTV의 무수한 영화 사이에 떠 있는, 당황스러운 분장의 곰돌이 푸나 포효하는 밤비를 목격하는 일의 즐거움이랄까. 이들 영화가 원작 동화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몇몇 주장은 이런 즐거움을 이기지 못한다. 애초에 잘못된 지적이기도 하고…. 저작권 소멸로 촉발된 쿠소영화는 순식간에 전 세계의 안방극장으로 향했고, 우리는 바다를 건너온 동심 파괴자들을 보며 즐거워하면 될 뿐이다.

[essay]쿠소영화_4_15

Writer

박동수 평론가(@dsp9596)는 제3회 한국독립영화협회 독립영화비평상과 제1회 게임 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에 당선되며 활동을 시작했다. 학부에서 예술학을, 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를 전공했다. 영화와 게임을 주로 다루지만 종종 미술이나 방송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동료 평론가들과 함께 영화비평 팟캐스트 ‹영화 카페, 카페크리틱›을 진행하고 있으며, 동명의 비평집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첫 단독 에세이 『쿠소필리아』(2026)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