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TITUDE
창작의 업과 삶의 태도를 바라봅니다
며칠 전 막을 내린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전기톱을 든 90세의 여인 김윤신이었습니다. 백지숙과 정순민이 이끄는 모은발 프로덕션이 처음 선보인 다큐멘터리 ‹김윤신은 미술관에 없다›는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되었고, 김윤신은 레드카펫에 올라 화제를 모았죠. “바보 같은 할머니의 일상을 봐 주셔서 감사하다”라는 인사와 함께 105세까지 작업하겠다는 다짐은 GV 현장에 큰 웃음과 감동을 안겼습니다.
“진실한 삶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자신의 삶으로 답해 온 여성 미술인들을 조명하는 모은발 프로덕션은 김윤신에 이어 김명희와 노원희의 이름을 꺼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낯선 이름일지 모르지만, 이들이 나란히 호명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겠죠. 알고 싶은 게 많은 비애티튜드 편집부는 이번에 김명희의 삶과 작업을 종횡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인터뷰에 이어 선보일 아카이브 섹션도 기대해 주세요. 그럼,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볼까요?
프롤로그
큐레이터이자 건축비평가, 역사가인 배형민이 춘천 내평리에 있는 김명희의 작업실을 찾았다. ATTITUDE의 첫 번째 인터뷰이였던 배형민이 이번에는 인터뷰어로 나섰다. 비평가로서가 아니라 사촌 동생으로서, 오래 품어온 존경과 애정으로 쉽지 않은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배형민에게 김명희는 가족 모임에서 이야기로만 접하던 신화 속 인물과도 같았다. 그가 한국에서 학생으로 지내던 시절, 김명희는 이미 뉴욕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89년 보스턴에서 유학 중이던 배형민은 아내와 함께 뉴욕을 방문해 소호Soho의 작업실과 7번 애비뉴의 가게를 찾았다. 김명희와 김차섭이 사준 햄버거를 길거리에 앉아 먹으며 나눈 이야기의 기억이 강렬하다. 빵과 고기밖에 없었지만 유난히 맛있었던 햄버거.
김명희와 김차섭의 작업과 생활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는 친근하고도 경외로운 일상이라고 배형민은 말한다.
그냥 가면 된다고
배형민: 누님에게 중요했던 장소를 따라가며 인터뷰를 진행해 볼까 합니다. 뉴욕 소호Soho, 춘천 내평리까지 오려면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일본과 영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었잖아요.
김명희: 아버님이 외교관이셔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일본으로 갔어요. 아버님은 경제 분야 전문가였고, 재무부 장관도 지내셨는데,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이 생기면서 외교관으로 나가게 된 거죠. 주일 한국대사로 가셨고, 일본에서 한 1년 반 있다가 다시 영국으로 이주했어요.
대사관은 런던에 있었는데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외곽에 있는 기숙사 학교를 다녔어요. 얼마 전에도 다시 찾아가 봤어요. 학교에 제 이름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사람들이 이것저것 보여주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약간 『해리 포터』에 나오는 기숙학교 같은 곳이었어요. (웃음) 일본에서 1년 반, 영국에서 1년 반 정도 살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한국말을 잘 못했어요. 같은 반 친구가 “언니가 몇이니?”라고 물어봤는데, 제가 “두 개”라고 대답할 정도였으니까요. 한 학년을 낮춰 5학년으로 입학해 한국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됐어요.
외국으로 간다는 게 나한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해봤으니까. 나중에 뉴욕으로 떠날 때도 그랬어요. 외국에서 살아봤고, 외국어도 하니까 그냥 가면 된다고 생각했죠.
배형민: 미술은 언제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김명희: 집안에 음악 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어렸을 때 지휘도 하고 합창도 했는데, 개인적으로 제일 마음이 편했던 건 그림 그리는 일이었어요. 음악은 여러 사람하고 같이 해야 되잖아요. 그림은 나 혼자 할 수 있어서 그게 좋았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미술대학에 가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뭐 그렇게 어려운 걸 하려고 하느냐고 하셨어요. 그래도 했어요. 그 당시 입시는 목탄 드로잉도 하고 정물 수채화도 하고, 디자인 계통은 색채 구성도 했어요. 화실에 다니면서 준비해서 1968년에 서울대 미대에 들어갔죠. 학교 생활이 재미있었어요. 아침이슬과 상록수로 잘 알려진 김민기도 있었고, 임옥상과 민정기도 같은 학년이었어요. 그전까지는 서양의 것, 특히 미국 것을 많이 따라갔다면 그때부터 “우리의 것을 찾자”라는 분위기가 조금씩 생겼어요. 김민기가 한국적인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도 그렇고요. 나중에 민중미술로 이어지는 움직임도 당시에는 아직 태동하는 정도였어요. 그 당시 미대 학생의 성비는 여자가 4분의 3 정도로 많았는데 졸업하고 전업 작가가 된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이 남자더라고요. 학생 때부터 친구들과 인지하고 있었어요. ‘결혼하면 그림을 못 그릴 수도 있겠구나’라고.
그래서 졸업하고 여자 친구들끼리 ‘표현그룹’을 만들었어요. 이대하고 서울대 나온 사람들이 같이했는데, 1년에 한 번씩이라도 전시를 하자는 취지였죠.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 그림을 그릴 테니까. 그냥 각자 작품 하나씩 가지고 나오는 게 아니라 그해에 주제를 정했어요. 종이를 가지고 해 보자, 공통된 재료를 가지고 해 보자, 그런 식으로 운영하며 꽤 오래된 그룹인데, 제가 미국으로 가버리면서 두세 번밖에 참여하지 못했죠.
대학을 졸업한 김명희는 모교인 이화여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곽훈과 김차섭도 같은 시기 교사로 있었다. 학생들에게 한국미술사를 가르치면서 그는 자신이 한국미술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어로 된 책과 잡지를 읽으며 다른 사람보다 서구 미술에 관한 소식과 정보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신라시대부터 시작되는 한국미술사를 설명하려니 막막했다. 대학원에서 처음 연구하려던 주제는 키네틱 아트였다. 하지만 방향을 바꿔 민화와 화각공예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국적인 정서를 알고 싶다면 수묵화보다 민화를 보는 것이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효당 최범술을 만났다.
김명희: 효당 스님이 우리나라에 차 문화를 다시 소개한 분이에요. 차라고 하면 일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우리나라에도 오래된 차 문화가 있잖아요. 이화여고 재직시절, 학교 선생님과 목사님, 스님 등 종교인들이 함께하는 차회가 있었어요. 아마 한국에서는 초기 차회가 아닐까 싶어요.
그때 효당 스님이 제게 호를 하나 지어주셨어요. ‘곡명’이라고. 곡은 음악에 쓰이는 굽을 곡(曲)이고, 명은 빛을 의미하는 밝을 명(明)이에요. 이 호를 거의 안 썼어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거예요. 설명해 주셨는데도 너무 어려웠고, 이해가 안 갔는데, 요즘 들어 갑자기 이해가 되더라고요. 곡이라는 건 음악이고 명은 빛light잖아요. 음악도 빛도 모두 wave예요. 그래서 ‘아, 이분이 이걸 알고 있었구나’ 싶었어요.
나중에 효당 스님 아드님을 만날 일이 있어서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물리학을 공부하셨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이해가 되더라고요. 젊었을 때는 전혀 몰랐는데, 그래서 요새는 ‘그 호를 다시 써볼까’ 그런 생각을 해요.
배형민: 왜 뉴욕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나요?
김명희: 학교를 다니다가 어느 순간 한국에서는 이제 내가 도전할 게 없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다음 단계로 가려면 외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처음부터 뉴욕으로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상태였어요. 단순하게 학비는 벌어서 가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냥 그렇게 간 거예요.
뉴욕으로 떠나기 직전 김명희는 표현그룹 전시에 인화지를 이용한 작품 ‹Liminal›을 출품했다. 인화지 위에 자신의 몸을 놓고 햇빛을 받아 몸의 그림자를 남기는 작업이었다.
김명희: 작품 제목이 ‹Liminal›이었어요. 그때 내가 딱 그런 상태였던 것 같아요. 여기에도 완전히 있는 게아니고, 아직 뉴욕에 간 것도 아니고, 중간에 붕 떠 있는 상태.
뉴욕의 시간
배형민: 그때 뉴욕에는 한국 예술가가 많이 있었잖아요. 누님 개인 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미술 전반에 꽤 중요한 시기였을 것 같아요.
김명희: 뉴욕에 한국 아티스트가 굉장히 많이 있던 시기예요. 백남준 선생부터 시작해서 여러 작가가 있었어요. 한국 미술사를 연구하려면 그 시기의 뉴욕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부분이 비어 있어요. 제대로 연구가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뉴욕 자체도 지금하고 아주 달랐어요. 위험했고, 작가들은 돈이 없으니까 큰 공간을 싸게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죠. 소호도 그런 곳이었어요. 저는 프랫Pratt Institute에 다니면서 한국 작가들과 많이 만났죠. 백남준 선생과도 가까이 지냈죠.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제가 작품에 영향을 받아 비디오 작업을 했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오해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아요.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과 작업의 영향은 다른 문젠데 말이죠. 그때 뉴욕에서 스스로 전혀 몰랐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아요. 한국에 있을 때 어떤 법대생이 제게 “미술과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는데, 그 질문의 답으로 ‘Pop Art’ 이야기를 했어요. (웃음) 그 사람과 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던 거죠. 그가 유명한 사회운동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중에 생각하니까 얼마나 창피하던지. 뉴욕에서 계속 그런 경험을 했던 것 같아요. 내가 무언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내용이라든지… 사람들이 있고, 다른 생각이 있고, 내가 몰랐던 그런 세계가 있는 거죠.
뉴욕에 도착했다고 곧바로 작가로만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남편이자 동료, 또 다른 아티스트 김차섭은 밤에 작업하고 낮에 잠을 잤다. 김명희는 아침이면 출근했다. 생계를 위해 직장을 다녔고, 약 5년 동안은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김명희: 직장에 다니니까 그림을 못 그리는 거예요. 차섭 씨는 밤에 작업하고 낮에 자는 사람이었고, 나는 아침에 출근해야 했어요. 그렇게 살다 보니까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내가 필요한 것은 결국 자유로운 시간인데, 직장을 다녀서는 그 시간을 만들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비즈니스,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패션 사업을 시작했던 것도 패션을 잘 알아서 한 건 아니에요. 먼저 학교에 가서 작은 사업체를 어떻게 운영하는지를 배웠어요. 그리고 실제 매장에서 한 6개월 일했죠. 미국 여자들의 몸이 어떻게 다른지, 어떤 사이즈를 입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직접 봤어요. 그리고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매장을 인수했죠. 실크를 중심으로 옷을 만들어 팔았고, 사업이 잘되면서 사람을 고용할 수 있게 됐어요. 그제야 나만의 시간이 생긴 거예요. 다시 그림을 그리고 여행도 할 수 있는 시간.
배형민: 몇 년 동안 작업을 거의 못 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아쉽지는 않아요?
김명희: 작품이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은 들죠. 그런데 그때 내가 계속 그림만 그렸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나왔을지는 모르겠어요. 그 시간을 꼭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른 일을 하면서 배운 것도 있고, 결국 그 일을 해서 ‘시간’을 만들었으니까. 그다음부터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여행도 할 수 있었어요.
사업이 자리를 잡은 뒤 김명희는 서른세 살 무렵 소호에 로프트를 마련했다. 김차섭과 함께 생활하고 작업할 공간이었다. 그러나 두 명의 작가가 한 공간을 공유하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김차섭은 자연광이 필요했고, 김명희는 큰 작업을 할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김차섭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두 사람은 자연이 있는 곳이 필요했다.
춘천 내평리
김명희: 차섭 씨가 몸이 안 좋아졌어요. 그런데 자연에 가 있으면 상태가 좋아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미국의 자연으로 갈 것인가, 한국으로 갈 것인가 생각하기 시작했죠.
예전에 Tate에서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작업을 본 적이 있었어요. 외국에서는 버려진 학교나 교회 같은 곳을 작가들이 작업실로 쓰기도 하잖아요. 한국도 도시화가 계속되면 언젠가는 학교가 빌 거라고 생각했죠.한국에 돌아와서 교수를 하는 길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미국에서 이미 내가 현실적인 역할을 많이 했는데 한국에 와서도 다시 프로바이더provider가 되는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둘이 각자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싶었고, 그래서 “폐교를 찾자”라고 했죠. 조카가 어느 날 부동산 잡지를 가져왔는데, 거기에 마침 폐교가 매물로 나온 거예요. 그래서 본 장소가 이곳이에요.
두 사람이 찾은 곳은 강원도 춘천의 내평초등학교였다. 그 당시 학교까지는 제대로 된 길도 없었다. 마지막 언덕에는 굴착기를 불러 길을 냈고, 지붕에서는 비가 샜다. 겨울이 오자 배관이 얼어 터졌다. 두 사람이 폐교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자 동네에서는 간첩이 아니냐는 의심과 신고가 이어졌다.
배형민: 이런 곳에 처음 들어와 사는 게 무섭지는 않았어요?
김명희: 별로 그런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워낙 여행을 많이 했잖아요. 그리고 제가 원래 모험을 좋아하는 성격이에요. 첫겨울에 배관이 다 얼어 터져서 그냥 여행을 떠났어요. 한 3개월 동안 한국을 돌아다녔어요. 휴전선에도 갔죠. 거기가 굉장히 아름답잖아요. 그 아름다운 땅 한가운데 철조망이 있는데, 그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서 나중에 드로잉으로 남겼어요. 차섭 씨도 내평리에 와서 건강이 좋아졌어요. 여기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거든요. 돌도 옮겨야 하고 계속 몸을 써야 해요. 그런 생활 자체가 몸을 바꾼 것 같아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깨진 유리창을 막아 두었던 것들을 걷어내던 김명희의 눈에 교실에 남아 있던 칠판이 들어왔다.
김명희: 칠판을 내가 찾아서 쓴 게 아니에요. 여기 있었던 거죠.
처음 왔을 때는 유리창이 깨져 있으니까 이것저것 가져다가 막아놨었어요. 겨울이 지나고 봄이 돼서 그걸 걷어내다가 칠판이 보였어요. 그래서 그냥 거기에 그림을 그렸어요. 저는 꼭 캔버스만 회화의 바탕 재료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러 surface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칠판은 다른 성질이 있어요. 쓰고 지울 수 있죠. 뭔가를 남길 수도 있고 지울 수도 있어요. 게다가 옛날 칠판과 지금의 칠판은 달라요. 옛날 것은 손으로 칠한 것이고 지금 것은 metal이죠. 그러니까 칠판이라는 물건 자체에도 시간이 있는 거예요.
배형민: 그러면 칠판 작업은 처음부터 계획하고 시작한 게 아니었던 거네요.
김명희: 그냥 여기 있으니까 해 본 거예요.
그리고 저는 칠판에만 그리는 사람은 아니에요. 캔버스에도, 종이에도 작업하고 여러 가지 작업을 하죠. TV 방영 당시에 인상이 강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저를 ‘칠판 화가’로 부르기도 했는데, 그렇게 알려진 것 같아요.
A line is where light is
김명희: 사실 오래전부터 빛을 그렸어요. ‹Liminal›도 생각해 보면 빛으로 만든 이미지잖아요. 몸 자체를 그린 게 아니라 빛 때문에 생긴 그림자를 남긴 거니까.
루이스 칸Louis Kahn이라고 아주 유명한 건축가가 있는데, 그분이 드로잉을 굉장히 탁월하게 잘하는 건축가였거든요. 그분이 드로잉에 관해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어요. “선이란 빛이 없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A line is where light is not).” 그러니까 흰 바탕에 검은 선을 긋는 건 빛이 부재하는 어둠을 만드는 행위라는 하는 곳이 되는 거예요.
저는 풍경 자체보다 물에 비친 것을 많이 그려요. 실제로 존재하는 풍경보다 물에 비친 상(像), 그러니까 reflected image에 더 관심이 있는 거죠.
요즘에는 하이드로페미니즘hydrofeminism에도 관심이 있어요. 물이라는 게 경계를 나누기가 어렵잖아요.
우리 몸 안에도 물이 있고, 그 물이 땀이나 소변으로 몸 밖으로 나와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요. 그러면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서부터가 바깥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다 연결돼 있는 거죠.
요즘에 와서 앞에서 이야기한 효당 스님이 지어주신 ‘곡명’이라는 이름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그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지금 제 작업을 보면서 이해하게 되는 거죠.
자리
배형민: 장소에 관한 생각도 예전과 조금 달라졌나요? 예전에는 디스로케이션dislocation이라는 말을 많이썼던 것 같은데요.
김명희: 1997년, 고려인 강제 이주 60주년을 기념해 여러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한 적이 있어요. 그 여행을 하면서 많은 걸 새롭게 보게 됐어요. 그분들이야말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진정한 디아스포라Diaspora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잖아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살아야 했던 거죠. 그런데 우리의 이동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적어도 어디로 갈지, 어떻게 살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요.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나라에서 살고 있고, 다른 나라로 가더라도 자신의 의지로 떠날 수 있으니까요. 원하는 방법대로 주체적으로 살 수 있죠. 그래서 저는 ‘앰뷸런트(ambulant, 이동하는 존재)’라는 말을 즐겨 써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책에 등장하는 개념이에요. ‘앰뷸런스(병원 구급차)’와 어원이 같아서 약간 병원 생각이 나기도 하지만 그런 뜻은 아니고, 자기 삶의 주권과 모든 역량을 갖춘 상태에서 주체적으로 경계를 이동하는 존재를 뜻하죠. 서로 다른 문화와 삶이 그렇게 섞이지 않으면 완전히 새로운 예술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예요. 그때부터 유목적인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생활 태도와 사유를 가지게 되었고, 작품에도 고스란히 반영하게 되었어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탔던 경험이 결정적이었죠. 내가 살아온 방식도 그런 것 같아요. 한 군데에서만 산 게 아니잖아요. 어렸을 때 일본에도 가고, 영국에도 가고, 다시 한국에 왔다가 뉴욕에 갔고, 또 여기로 왔고.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김명희는 지금도 뉴욕과 내평리를 오간다. 한 해의 일부는 내평리에서, 일부는 뉴욕에서 보낸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이동은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배형민: 누님은 살면서 큰 결정을 참 많이 했는데 이상하게 그걸 큰 결정처럼 이야기하지 않아요. 한국에서 잘 지내다가 뉴욕으로 갔고, 그림 그릴 시간이 없으니까 사업을 했고, 소호에 자리를 잡고 나서는 다시 내평리로 왔잖아요. 그런데 이야기를 들으면 늘 “그냥 했다”라고 해요. 원래 모험을 좋아해서 그런가?
김명희: 그런가 봐요. 나는 모험을 좋아하는 성격이니까. 그걸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지금도 여름에는 여기 있고, 겨울에는 뉴욕에 가고 그래요. 나는 비행기 타면 영화를 한 다섯 개 봐요. 그러면 이제 뉴욕 가는 거야. (웃음)
이제는 뉴욕 가는 데 설렘도 없고, 한국으로 오는 데 설렘도 없어요.
그냥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옮기는 거예요.
여성미술인 다큐멘터리 프로젝트, 모은발 프로덕션의 두 번째 주인공은 김명희다. 장우진 감독이 작년부터 춘천 내평리와 뉴욕, 뉴멕시코를 오가며 촬영하고 있다. 장우진 감독 간 인터뷰에서 이제 뭔가 남은 삶이라든가 혹은 미술 작가로서 작품에 줄 수 있는 어떤 도전이나 변화, 목표 같은 것이 있으신지요?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계획이나 목표 같은 게 있다면 말씀해 달라는 질문에, 김명희는 답한다.
김명희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명희는 칠판 위에 시간과 기억의 흔적을 새겨 온 화가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일본과 영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뒤 1972년 독일문화원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75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고 이듬해 뉴욕 소호에 정착했으며, 강원도 내평리의 폐교에 작업실을 마련한 뒤로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경계인 작가로 활동해 왔다. 폐교의 칠판을 캔버스 삼아 일상의 소소한 경험에서 시베리아 벌판의 역사적 기억까지 추적하고,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작업으로 회화의 근원적 의미를 묻는다. 뉴욕 아트 프로젝트 인터내셔널(2012, 2015, 2020), 오사카 AD&A 갤러리(2001)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뉴욕 해먼드 박물관, 브리지햄튼 박물관 등 해외 기관에도 작품을 선보였으며, 2026년 갤러리현대에서 세 번째 개인전 «깊은 시간»으로 반세기 넘는 작업 세계를 조망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환기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 콘텐츠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의 ‘2026년 시각예술창작산실’ 지원을 받았습니다.
Interviewer 배형민
큐레이터, 건축비평가, 역사가이며, MIT에서 건축역사·이론·비평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시립대학교에서 30년간 재직했다. The Portfolio and the Diagram (2002), 『감각의 단면』(2007), 『의심이 힘이다』(2019), 『건축 너머 비평 너머』(2025)등의 저서를 냈다.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공동 총감독(2017), 베니스비엔날레 국제 건축전 한국관 큐레이터(2014, 황금사자상 수상), 광주폴리 총감독을 역임했다.
Photographer 이근영
사진가로 사진과 글, 영상을 통해 쉽게 말해지지 않는 마음을 기록하고, 이야기로 남긴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작은 순간도 다정하게 바라보고, 그 너머의 의미에 귀 기울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을 담아 글로 표현한 『수면의 고양이』, 『우리, 헤어질 줄 몰랐지』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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