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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낯선 찰나를 담아

Writer: 김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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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을 기억하시나요? 개인이 추구하는 사적인 이윤이 의도치 않게 공익에 기여하고, 경제적 효율성을 이끌어 낸다는 뜻으로 널리 쓰이죠. 지극히 사적인 행동은 보이지 않는 다양한 힘과 실타래처럼 맞물리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엮어냅니다.

김덕희의 작업 역시 자신과 세계를 연결하고 그 상호작용을 관찰한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닮았습니다. 그는 열과 빛, 시간과 중력 같은 ‘보이지 않는 힘’이 우리의 감각과 기억, 나아가 삶과 세계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작품으로 그려냅니다. 막연한 감각의 결을 더듬어 세계의 뼈대를 찾아가는 김덕희의 작업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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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노래›, 2025, 파라핀왁스, 염료, 350×350×35cm, 제공 부산현대미술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설치미술가 김덕희입니다. 열과 빛, 시간과 중력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계의 작동에 관여하는 힘들이 서로 다른 존재와 물질, 조건 사이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우리의감각과 기억, 삶과 세계를 구성하는지 탐구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고등학교 때 디자인과 진학을 목표로 입시 미술을 준비했지만 대학 입시에 실패했습니다.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상실과 감정적인 혼란을 겪기도 했어요. 삶이 내가 계획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찍 경험하면서 ‘우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품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창작은 그 질문을 붙들고 나와 세계의 관계를 이해해 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후 우연한 계기로 일본에 워킹홀리데이를 떠났고, 그곳에서 대학과 대학원까지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면서 개인 작업을 계속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어요. 고민 끝에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던 인테리어회사에 정직원으로 입사했습니다. 이후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다시 작업을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요.

그러다 부산에서 우연히 한 일본 작가의 작업을 돕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창작이 제 삶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다시 생생하게 깨달을 수 있었어요. 제게 작업은 현실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작은 피난처이자 나와 세계를 다시 연결하고 가장 자유롭게 숨 쉴 수 있게 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말이죠. 그때가 30대 중반이었는데 뭔가에 이끌리듯 다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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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on›, 2025, 파라핀왁스, 석고, 전기 발열체, 가변 크기, 사진 CJYART STUDIO(조준용), 제공 아마도예술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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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 일식›, 2024, LED 디스플레이 25대, 25채널 영상 설치, 가변 크기, 제공 갤러리바톤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저는 현재 부산 원도심인 중앙도에 있는 ‘또따또가’ 레지던시에 입주해 있어요. 작가들이 한건물에 모여 있는 형태가 아니라 주변의 여러 건물에 조금씩 흩어져 작업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입주 기간은 3년이고 올해로 2년 차입니다. 이 지역에는 인쇄소가 많아서 평일에는 인쇄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작업을 하고 있어요.

반대로 주말이 되면 주변이 무척 조용해집니다.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아요. 요일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점이 재미있어요.

이전에 사용하던 작업실은 다세대주택의 반지하에 있는 좁은 공간이었습니다. 지금의 작업실은 꽤 넓은 편이라 재료와 공구를 작업 동선에 맞게 정리해 두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어 매우 만족합니다. 여러 매체를 다루다 보니 재료의 종류나 양도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공간이 넓어진 만큼 작업의 규모와 방식도 조금 더 자유로워졌지만, 입주 기간이 끝나면 이 많은 재료를 다시 어디로 옮겨야 하나 하는 걱정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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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bra›, 2024, 4면 LED 디스플레이, 전선, 비디오 루프(8분 30초), 제공 갤러리바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과학과 문학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 편입니다. 어릴 때부터 과학을 좋아해서 과학 서적을 꽤 열심히 읽었어요.

우주와 별, 지구 안에 존재하는 너와 내가 어떤 원리와 힘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가는 일이 늘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조금씩 이해해 가는 과정에서 작품으로 만들어 보고 싶은 장면이나 아이디어도 자주 떠올랐고요.

요즘은 과학이 발전하는 속도도 너무 빠르고 정보도 끝없이 쏟아지다 보니 새로운 이론을 따라가는 일이 예전보다 조금 더 버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지만 일상에서는 쉽게 잊고 지내는 사실에 더 마음이 움직여요. 우리가 아주 작은 행성 위에 잠시 존재한다는 것, 서로 멀리 떨어져 보이는 존재들도 결국 하나의 세계 안에서 관계 맺고 있다는 것처럼 말이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오래전에 쓰인 책인데도 읽을 때마다 새롭게 감동을 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세계가 갑자기 낯설고 경이롭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요즘은 소설이나 시에서 작업의 힌트나 돌파구를 얻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저는 항상 작품을 완전히 이해하고 확신한 상태에서 만드는 것은 아니에요. 어떤 감각이나 장면에 이끌려 먼저 만들어 놓고도,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잘 설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소설이나 시를 읽다가 제가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감정과 마주치면, ‘아, 이런 것이었을지도 몰라!’라고 뒤늦게 알아차리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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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bra›, 2024, 4면 LED 디스플레이, 전선, 비디오 루프(8분 30초), 제공 갤러리바톤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먼저 지금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리해 봅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명확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니에요. 하나의 장면이나 물질의 움직임 혹은 막연한 감각이 먼저 떠오르고, 그것을 오래 들여다보면서 작업의 뼈대를 찾아갈 때도 많습니다.

기본적인 아이디어가 잡히면 작품이 놓일 전시 공간을 살펴봅니다. 제게 공간은 작품을 담는 배경이라기보다 작업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에 가까워요. 공간의 크기와 높이, 관객이 움직이는 방향을 고려하면서 작품의 규모와 재료, 제작 방식을 정해 갑니다. 그 과정에서 처음에는 없었던 다른 작업이 떠오르거나 기존의 아이디어가 전혀 다른 형태로 바뀌기도 하고요.

실제 제작에 들어가면 재료가 예상대로 반응하는지 여러 번 시험합니다. 특히 열이라는 에너지나 파라핀처럼 계속 상태가 달라지는 재료를 사용할 때는 제가 의도한 방향과 재료 자체의 성질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해요. 마지막에는 각각의 작업이 공간 안에서 너무 강하거나 약하게 느껴지지 않는지 살피며 세밀하게 조율합니다. 작은 아이디어가 공간과 재료를 만나면서 제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더 멀리 발전할 때 가장 만족스러운 작업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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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quiem›, 2025, 파라핀왁스, 염료, 철, 전기 히터, 239 × 105 × 105cm, 사진 CJYART STUDIO(조준용), 제공 아마도예술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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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개의 눈», 제공 부산현대미술관, 2025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2025년에 부산현대미술관의 «열 개의 눈»에서 ‹밤의 노래›와 ‹하얀 목소리›를 함께 선보였습니다. ‹밤의 노래›는 푸른 파라핀왁스가 흘러내리고 굳어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만들어진 거대한 원형 구조물입니다. 관객이 그 아래를 지나갈 때, 파라핀의 질감과 규모, 물질에 축적된 시간과 열의 감각을 함께 느낄 수 있기를 바랐어요.

이 작업에서 열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파라핀을 녹이고 흐르게 한 뒤 다시 굳히면서 물질의 표면에 힘의 이력을 남깁니다. 열이라는 에너지와 파라핀이라는 물질이 만나 만들어 내는 예측하기 어려운 형태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무질서하고 유동적인 한 장면을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하얀 목소리›가 별자리처럼 흩어져 있습니다. 시민들의 손을 직접 본떠 만든 조각으로, 2021년부터 이어오고 있는 손 조각 연작이기도 합니다. 각각의 조각 안에는 히터가 들어 있어 미세한 열을 내고, 관객은 작품을 실제로 만질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접촉이 반드시 따뜻함이나 위로 같은 하나의 감정으로 귀결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손 조각의 열은 뜨거워졌다가 다시 식기를 반복하거든요. 차갑고 단단한 익명의 신체 조각 안에 숨어 있는 열이 한 사람의 생의 흔적을 넘어 모든 존재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힘으로 느껴질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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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목소리›, 2025, 석고, 전기 발열체, 콘크리트, 가변 크기, 제공 부산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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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on›, 2025, 파라핀왁스, 석고, 전기 발열체, 가변 크기, 사진 CJYART STUDIO(조준용), 제공 아마도예술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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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목소리›, 2025, 석고, 전기 발열체, 콘크리트, 가변 크기, 제공 부산현대미술관

같은 해 아마도예술공간의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 에서는 ‹레퀴엠›과 ‹캐논›을 선보였습니다. 자본주의사회의 작동 원리를 다룬 전시였는데, 두 작품에서 열은 서로 다른 성격으로 나타납니다. ‹레퀴엠›은 뜨겁게 가열된 철판이 파라핀왁스로 만들어진 기둥을 서서히 녹이는 작업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하강하는 철판과 무너지는 기둥을 통해 자본을 향한 인간의 욕망과 모든 것을 소모시키며 움직이는 자본의 냉혹한 속성을 은유하고 있어요.

반면 아래층에 설치한 ‹캐논›에서 열은 작고 연약한 힘에 가깝습니다. 녹인 파라핀왁스를 바닥에 펼치고 그 위에 손 조각을 두어 관객이 공간 안으로 들어가 직접 만질 수 있게 했어요. 이 작품은 관객 간 상호작용이없다면 완성되지 않습니다. 거대한 힘에 맞서기에는 너무 작아 보인다 해도 작은 존재가 서로 연결되고 축적되면서 만들어내는 힘을 믿어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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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속에 녹아있는 태양›, 2023, 파라핀왁스, 염료, 심지, 가변 크기, 제공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가장 가까운 것과 가장 먼 것은 어쩌면 늘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작은 온도나 한 사람의 구체적인 몸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가까운 것이지만, 동시에 에너지의 흐름이나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구조와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대부분의 작업에서 관객이 직접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작은 감각과,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거대한 힘과 구조를 한공간 안에 함께 놓으려 합니다. 최근 작업에서도 이런 관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싶었어요. 아주 연약하고 사적인 감각이 작은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세계의 구조와 맞닿아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최근 작업에서 만족스러웠던 점과 불만족스러웠던 점이 궁금합니다.

아마도예술공간에서 선보인 ‹레퀴엠›은 뜨겁게 가열된 철판이 자체 중력으로 하강하며 파라핀 기둥을 녹이도록 만든 작업입니다. 처음 시도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짧은 기간 테스트만으로는 전시 기간 동안에 재료가 어떻게 변화할지 완전히 예측하기 어려웠어요.

전시가 진행되면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녹아내린 파라핀이 고드름처럼 굳어 쌓이면서 기둥을 다시 지지하기 시작했고, 결국 철판이 더는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기둥을 끝까지 녹이는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에 결과만 놓고 보면 최초의 계획은 실패한 셈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작품이 스스로 붕괴를 멈추고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낸 것처럼 느껴졌어요.

작가가 모든 결과를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은 여전히 불안하고 아쉬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재료와 시간이 제 의도를 넘어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무척 놀랍고 만족스러웠어요. 처음 시도하는 작업은 늘 예상 밖의 결과를 낳기에 긴장되지만, 동시에 바로 그 점이 새로운 작업을 계속 시도하게 만드는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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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quiem›, 2025, 파라핀왁스, 염료, 철, 전기 히터, 239 × 105 × 105cm, 사진 CJYART STUDIO(조준용), 제공 아마도예술공간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을 여쭤봐도 될까요?

전시가 없을 때는 그동안 보고 싶었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다음 작업을 위한 리서치를 하며 지냅니다. 일도 하면서 가능하면 주말에는 어머니와 산책을 나가요. 전시 일정이 정해지면 생활의 중심이 거의 작업 준비로 옮겨갑니다. 미리 준비한다고 해도 제작 과정에서는 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고,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리더라고요. 대체로 예상한 시간의 1.5배 정도는 더 걸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감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수면 시간을 줄여가며 작업하는 일이 반복되고는 해요. 아직은 일이 몰리면 생활 전체를 작업에 내어주는 편인데, 앞으로는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라도 조금 더 건강한 리듬을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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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그림자›, 2023, 석고, 전기 발열체, 가변 크기, 제공 부산시립미술관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요즘은 노화하는 몸에 가장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최근 초고령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준비하면서 노화를 질병이나 결핍처럼 바라보고, 늙음을 부정하려는 사회의 태도에 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어요. 저 역시 별다른 의심 없이 젊음을 기준으로 몸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요.

아주 사소한 변화지만, 매달 당연한 일처럼 해 오던 흰머리 염색도 그만두었습니다. 염색하지 않는 행위 자체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 그동안 나는 왜 흰머리를 감추는 일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는지 생각해 보고 싶었어요. 요즘은 노화를 단순히 쇠퇴나 결핍으로 규정하지 않고, 몸이 이전과 다른 상태로 변화해 가는 과정으로 바라보려 합니다.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저는 세계를 여러 힘과 조건이 잠시 균형을 이루거나 충돌하며 만들어 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로 바라보는 편입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모습도 완전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조건에 의해 잠시 유지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태도는 작업에서도 완결되고 변하지 않는 형태보다 움직이고 변화하며 사라지거나 다시 나타나는 상태에 관심을 두게 하는 것 같습니다. 열은 물질을 녹이고, 흐르게 하며 다시 굳힙니다. 빛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작은 픽셀로 흩어지고요. 나의 체온은 벽이나 사물로 전달되고, 열을 전달받은 사물은 잠시 빛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집니다. 저는 하나의 결과를 확정하기보다 힘과 조건이 만나 잠시 만들어 내는 상태를 작업 안에 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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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속에 녹아있는 태양›, 2023, 파라핀왁스, 염료, 심지, 가변 크기, 제공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슬럼프가 오면 같은 생각을 반복하는 관성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작업을 계속 붙들고 있기보다 마음 한쪽에 잠시 대기 모드로 돌려놓고,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며 실컷 웃거나 충분히 잠을 자요. 그렇게 생각을 느슨하게 풀어놓으면 가끔 꿈속에서 작업의 실마리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최근에 발목을 다쳤어요. 설치 작업은 재료를 옮기고 제작하거나 현장에서 오랜 시간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 많아서 작은 부상도 작업 일정과 방식에 곧바로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지금은 무리하지 않으면서 예정된 작업을 어떻게 이어갈지 조율하는 일이 가장 현실적인 고민입니다.

‹36.5 – The Bone›, 2017, 비디오, 9분

‹36.5 – The Heart›, 2017, 비디오, 6분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무엇이 창작자에게 가장 중요한 태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 사람만의 색채가 분명하게 느껴지는 작업을 좋아해요. 여기서 말하는 색채는 겉으로 드러나는 스타일이라기보다 그 사람이 세계를 바라보고 감각하는 고유한 방식에 가깝습니다. 그런 작업을 마주하면 잠시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작업을 지속하는 일은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건강이나 경제적인 상황, 돌봄처럼 개인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조건 때문에 어느 순간 작업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최근에는 그런 현실적인 문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서 반드시 지금 생각한 방식대로 해야 한다는 집착을 조금씩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저렇게 해보고, 지금 할 수 없다면 잠시 멈추는 것도 작업을 포기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좋아하는 일로만 삶을 가득 채우는 것보다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일이 때로는 더 어렵고 중요한 태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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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바다 가득히›, 2023, 인조 진주, 비즈, 스텐인리스 와이어, 400×800×800cm, 출처 박홍순, 제공 (사)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거창하게 기억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어떤 소설이나 시를 읽고 오래 마음에 남아 있다가 삶의 어느 순간 다시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제 작업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남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작품을 본 순간 모든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난 뒤 문득 하나의 장면이나 감각이 떠오르고 그 사람의 생각이나 삶에 작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충분할 것 같아요.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제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일은 이상하게도 잘되지 않습니다. 계속 작업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는 좀처럼 그려지지 않아요. 오히려 오래전부터 삶의 끝을 맞는 방식은 종종 생각해 왔습니다.

예전에 죽은 고래가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뒤 수많은 해양생물의 먹이이자 서식처가 되고, 오랜 시간이지나 하얀 뼈만 남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어요. 그 장면이 잔혹하다기보다 이상할 만큼 깊고 평온하게 느껴졌습니다.

죽은 몸이 결국 다른 생명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 자체는 특별하지 않지만, 단순히 땅에 묻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죽은 몸이 오랜 시간 다른 생명체의 먹이와 서식처가 되는 그 과정에 마음이 끌렸던 것 같습니다.

저도 삶의 마지막 순간부터 그 이후까지, 제 몸이 다른 생명과 이어지는 과정 안에 놓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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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doki kim 김덕희(@doki.kim.dh)는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설치미술가이다. 열과 빛, 시간과 중력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계의 작동에 관여하는 힘들을 감각 가능한장면으로 전환하며, 몸과 세계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여러 관계와 조건 속에서 잠시 형성되는 상태임을 드러낸다. 


2026년 7월, 제1회 백남준미디어아트페스티벌 기획전 «달들»(백남준아트센터, 2026)에 참여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사과와 달»(갤러리바톤, 2024),«유령의 죽음»(홍티아트센터, 2021) 등이 있고, «의존하는, 의존하지 않는»(아마도예술공간, 2025), «열 개의 눈»(부산현대미술관, 2025), 2023 바다미술제 «깜박이는 해안, 상상하는 바다»(일광해수욕장, 2023), «위상의 변주: 제23회 하정웅청년작가초대전 빛 2023»(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 2023),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2023: 슬픈 나의 젊은 날»(부산시립미술관, 2023) 외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