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와 민’은 아마 현재 가장 명망 있는 한국 그래픽 디자이너 듀오일 거예요.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한국 그래픽 디자인의 지평을 넓히고 있으니까요. 최슬기, 최성민 두 사람의 이름을 딴 슬기와 민은 이미 거장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디자인과 미술을 오가며 다양한 작업을 지속해 왔습니다. 워낙 작업량이 방대하고, 기존 인터뷰도 많아서 어떻게 해야 흥미로울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비주얼 포트폴리오 특유의 촘촘한 질문망에 걸린 답변들은 딱딱 떨어지는 간결함과 흥미로움으로 기대 이상 넘실댔어요. ‘일은 명료하게, 재미는 모호하게’라는 좌우명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이상한 무엇, 또는 이상하게 자연스러운 무엇을 원한다”라는 말에서, 평소 알 듯 모를 듯하던 그들을 이해하는 힌트를 얻은 느낌에 약간의 흥분마저 동반되었습니다. 윤문을 하다 보면 어투를 고치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이번 인터뷰는 특유의 매력을 고스란히 전하기 위해 노력해 보았어요. 슬기와 민의 ‘요즘’을 아티클에서 살펴보세요.
‘어워드360° 2023’ 아이덴티티, 2023. 의뢰처: 디자인360° (중국 광저우)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슬기와 민’은 주로 서울에서 작업하는 시각 디자이너 최슬기와 최성민의 협업체를 편의상 줄여 부르는 이름입니다. 대략 2003년부터 함께 일했고,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건 2005년입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최슬기: 예고에서 미술을 전공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할 때 디자인을 선택했고요. 디자인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언제나 국외에서 공부해 보고 싶었기 때문에 일찍이 유학을 결심했고, 조사 중 학교 소개서가 가장 멋있었던 미국 예일대학교를 선택했습니다. 거기서 시각 디자인의 재미를 제대로 느꼈고, 덕분에 이 분야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최성민: 저는 대학 시절 보던 외국 디자인 잡지를 통해 그래픽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의 멋을 알게 됐습니다. 저도 그런 작업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결국 그렇게 됐습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WE» 전시회 포스터, 2023. 의뢰처: 리움미술관
작업 공간에 대해서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최슬기: 저희의 공식적인 주소지는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19길 25입니다. 2021년 디자인 스튜디오 겸 출판사 워크룸과 함께 그곳에 작은 건물을 세우고 한구석을 쓰고 있습니다.
최성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딱히 정해진 작업 공간이 없습니다. 팬데믹 이후로는 집에서 작업을 더 많이 하는 것도 같고요.
두 분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최슬기: 기사, 음악, 강연, 소문, 백과사전, 미술 작품, 강연, 일상 대화 등 어디에서나 얻습니다. 숨 쉬듯 영감을 받기 때문에 대부분은 딱히 ‘영감’이라고 의식조차 하지 못합니다.
최성민: 디자인, 특히 시각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의 역사 또는 현 상황에 대한 불만도 자극이 되곤 합니다. 늘 긍정적인 영감만 받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프랑스 프락(Frac) 컬렉션 특별전 «경이로운 여행» 포스터, 2024. 의뢰처: 청주시립미술관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최슬기: 주어진 과제를 분석합니다. 아이디어를 내고, 저희끼리 논의하다가 자신이 붙으면 시각화해 봅니다. 특별한 과정이랄 게 없네요.
최성민: 굳이 말하자면 저희는 막연한 시각적 스케치나 ‘레퍼런스’ 조사를 하지 않는다는 점 정도가 있겠습니다. 저희 접근법은 직관적이거나 감각적이기보다, 상당히 개념적입니다. 즉 이미지보다 언어와 개념를 중시한다는 뜻입니다.
«젊은 그들—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Only the Young: Experimental Art in Korea, 1960s–1970s)» 전시 도록, 2023. 의뢰처: 국립현대미술관,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 사진 출처: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최슬기: 작년과 올해 작업을 한 번 볼까요? 우선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마우리치오 카텔란 회고전 아이덴티티, 청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프랑스 프락FRAC 소장품 전시회 아이덴티티, 국립현대미술관과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실험미술 도록, 중국에서 열린 그래픽 디자인 공모전 ‘어워드 360° 2023’ 아이덴티티 작업이 생각납니다. 어워드 360°에는 심사위원으로도 참여해 더 뜻깊었습니다.
‘어워드360° 2023’ 아이덴티티, 2023. 의뢰처: 디자인360° (중국 광저우)
최성민: 오랫동안 저희와 협업해 주신 분들과도 꾸준히 작업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 미술아카이브에서 열린 미술가 박미나 님과 Sasa[44]님의 전시회 «이력서», 공연 예술 기획자 김성희 선생님과 함께한 ‘옵/신 페스티벌’, 출판인 임경용, 구정현 님의 편저 『방법으로서의 출판』 작업 등이 그렇습니다. 제 은사이신 고(故) 조영제 선생님이 1976년 발표하신 탈네모틀 한글 제안을 발전시킨 ‘올해의 작가상 2023’ 아이덴티티 작업도 보람 있었습니다.
최슬기: 가장 최근에 한 주요 프로젝트로는 미국 선댄스 영화제(Sundance Film Festival)의 2025년 브랜딩을 꼽을 수 있습니다만, 보도 금지가 걸려 있어서 아직 공개는 할 수 없습니다. 영화 관련 작업은 처음이었는데, 오래간만에 강도 높은 일이었지만 즐겁게 마무리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디스이즈네버댓thisisneverthat의 모회사 JKND에서 2023년 성수동에 개장한 멀티 브랜드 패션 스토어 ‘튠TUNE’의 브랜딩 작업도 저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프로젝트였군요. 패션 관련 작업은 10여 년 전에 한 에이랜드ÅLAND 웹사이트 디자인과 2018년 빈폴 30주년 기념 아이덴티티 시스템 작업 이후 처음이었는데, 확실히 개념과 논리를 중시하는 미술계 작업에 비해 직관이나 ‘감’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신선했습니다.
튠TUNE 아이덴티티, 2023. 의뢰처: JKND. 사진 제공: 튠
최성민: 작년에는 태국 쭐랄롱꼰대학교에서 작은 전시회를 열었고, 올해에는 중국 항저우의 ‘트랜스테이지Transtage’에서 좀 더 규모 있는 회고전을 열었습니다. 특히 후자는 작품에 대한 이미지 없이 그에 대한 설명 글만 모아 2017년 출간한 책 『작품 설명』의 중국어판 출간에 맞추어 기획된 점이 재미있었습니다. 자오완칭, 샤오녠, 유총제, 루타오 등 전시를 기획한 젊은 중국 디자이너들의 헌신과 지성이 무척 감명 깊었습니다.
«슬기와 민—명료함과 모호함(瑟杞与旻:清晰与模糊)» 전시 전경, 트랜스테이지, 중국 항저우, 2024. 사진 제공: 트랜스테이지 / XYZ 레이버
최근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최슬기: 최근 들어서 특별히 뭔가를 강조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늘 그랬듯, 저희가 작업에서 원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상한 무엇, 또는 이상하게 자연스러운 무엇입니다.
최성민: 작품이 좋다면 보기에 예뻐도 상관없다는 생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쁘고 쾌적하기만 한 작업은 피하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위악적으로 추한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색함과 긴장, 모순의 공존을 원합니다.
최슬기: 조금 전에 말씀드린 항저우 전시의 제목이 ‘명료함과 모호함’이었습니다. ‘일은 명료하게, 재미는 모호하게’라는 저희 좌우명에서 따온 것이죠.
«슬기와 민—명료함과 모호함(瑟杞与旻:清晰与模糊)» 전시 전경, 트랜스테이지, 중국 항저우, 2024. 사진 제공: 트랜스테이지 / XYZ 레이버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스러운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최성민: 저는 저희 작업이 다 마음에 듭니다.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작업을 마무리하면 곤란하죠. 돌이켜 보면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좀 흘러야 합니다.
최슬기: 어쩌면 욕심이 작은 걸까요? 욕심을 더 내서 불만을 키워야 할까요?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최슬기: 아직 나이가 어린 아이가 있어서 함께 시간을 보내려 애씁니다. 육아와 가사 같은 ‘집안일’과 작업과 교육 같은 ‘바깥일’을 물리적, 시간적으로 선명히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최성민: 일상이라는 게 본디 특별할 것 없는 것이겠죠? 아침 6시쯤 일어나 하루를 보내고 11시쯤 잠자리에 듭니다. 요일마다 하는 일의 구성이 달라서 같은 일상이 매일 반복되지는 않습니다.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가 익숙해져서 이제는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냅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학생들 말고는 사람을 거의 안 만납니다.
‹제목 없는 인사말 2024› 설치 전경, «슬기와 민—명료함과 모호함», 트랜스테이지, 중국 항저우, 2024. 사진 제공: 트랜스테이지 / XYZ 레이버
요즘 가장 큰 관심에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최슬기: 전 세계적으로 다시 전쟁의 시대가 열렸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우크라이나도 그렇고 최근에는 팔레스타인의 가자와 레바논도 그렇고요. 어떻게 보면 저희가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랬지, 전쟁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한동안은 세계화와 정보화 덕분에 열전이 불가능한 시대가 열렸다는 착각에 취해 있었는데, 구식 대포와 미사일의 완력이 그런 환상을 산산이 부수고 있습니다.
최성민: 이와 관련해, 미국 대선 뉴스에 촉각을 기울이는 편입니다. 도널드 트럼프와 미국 공화당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트럼프의 재집권을 허락한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핵무장 국가가 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입니다. 민주당 후보가 카멀라 해리스로 바뀌고 상황이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결과를 점치기 어려운 선거입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최슬기: 글쎄요,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삶 자체에 대해 특별히 깊이 생각하지 않는 편입니다.
최성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저희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는지 생각해 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작품 설명』 한국어판과 영어판 『Explained』, 2017. 사진: 남기용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최성민: 슬럼프가 사전에 나온 대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부진 상태가 비교적 길게 계속되는 일’을 뜻한다면, 저희는 슬럼프를 겪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일을 하기 싫은 때는 있지만, 일이 잘 안 풀리는 때는 없습니다.
최슬기: 일이 하기 싫을 때는 K-드라마를 봅니다.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최성민: 현실적인 문제와 가상 또는 상상의 문제를 구별하는 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최슬기: ‘현실적’인 문제는 별로 풀기 어렵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풀면 됩니다. 상상의 문제가 문제죠. 그건 상상으로 풀기 어렵습니다.
『작품 설명』의 중국어판 『解释』, 2024. 사진 제공: 트랜스테이지 / XYZ 레이버
두 분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최슬기: 지구력. 지치지 않고 달리는 힘.
최성민: 집중력, 집요함, 진지함. 그리고 이들 태도에 끌려 수렁에 빠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역설 감각.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최성민: 좋아하는 일이 앞으로 전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전망을 걱정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최슬기: “꿈이란 최초의 충동을 지속할 수 있는 자만이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만화 『20세기 소년』의 ‘친구’가 한 말이 영감이 되면 좋겠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최초의 충동’은 인류 파괴를 뜻하기는 하지만요.
『작품 설명』의 중국어판 『解释』, 2024. 사진 제공: 트랜스테이지 / XYZ 레이버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최슬기: 궁금해하던 사람.
최성민: 여전히 작업하는 사람.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최성민: AI가 인간을 전쟁과 노동에서 해방해 할 일이 없어진 인간이 쏟아 낸 엉터리 예술 작품으로 온 세상이 뒤덮인 미래입니다.
최슬기: AI가 엉터리 예술을 하고, 인간은 전쟁과 노동만 하는 미래는 원하지 않습니다.
Artist
슬기와 민(@sulki_and_min)은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최슬기와 최성민의 협업체다. 2001년 미국 예일대학교 그래픽 디자인 석사 과정에서 만났고, 네덜란드 얀 반 에이크 아카데미에서 연구원으로 일한 후 2005년 서울에 돌아와 정식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문학동네, 매스스터디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미국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MoMA), 필라델피아 미술관, 홍콩 M+ 등과 협력해 그래픽 아이덴티티와 출판 디자인 작업을 진행했다. 2006년부터 2021년까지 운영한 스펙터 프레스는 한국 독립 미술 출판의 선구적 사례로 인정받는다. 미술과 디자인을 아우르며 국내외 여러 전시회에 참여했고, 중국 항저우 트랜스테이지Transtage(2024), 태국 방콕 쭐랄롱꼰대학교(2023), 서울 시청각 랩(2021), 휘슬(2020), 페리지 갤러리(2017) 등에서 단독 전시회를 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홍콩 M+, 미국 뉴욕 쿠퍼 휴잇 스미스소니언 디자인 뮤지엄, 프랑스 파리 국립장식미술관,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등에 작품이 영구 소장돼 있다. 그래픽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미술, 대중문화에 관해 다양한 글과 책을 썼으며, 국내 주요 대학은 물론 미국 예일대학교, 로드아일랜드 디자인대학교, 보스턴대학교, 미니애폴리스 워커아트센터, 중국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항저우 중국미술학원,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 일본 오사카 예술대학교, 싱가포르 라살예술대학, 체코 브르노 국제 그래픽 디자인 비엔날레, 구글 VISD 서밋 등에서 강연한 바 있다. 최슬기는 계원예술대학교, 최성민은 서울시립대학교에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