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하고 분명한 작품보다 여리고 먹먹한 그림이 더 마음에 와닿을 때가 있죠. 가볍고 연약한 우리의 삶을 인식할 때 더 즐겁게 살 수 있다는 수연의 믿음처럼 작가의 부드럽고 뭉근한 그림은 마음을 툭 건드리지요. 그런 마음을 아는지 수연은 화면을 맑게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죠. 결국 맑은 것은 덜어내는 것이고,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일이에요. 미묘한 그리드 위에 맑고 은은하게 얹힌 형상은 누군가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단순한 도형으로 이루어진 그림 속 형상은 우리의 삶에서 부질없는 것을 걷어내고 남긴 본질에 다가가려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작가가 작업하는 삶을 통해 남기고자 하는 건 작품보다는 하루의 선명함에 가깝습니다. 매일 그리는 드로잉으로 즐거움을 쌓아 올리는 수연의 작업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미농지», 콤플렉스 갤러리, 2025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그림을 그리는 수연이라고 합니다.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가치를 꼽으라면 자율성과 기쁨입니다. 자신의 리듬에 맞게 살면서 크고 작은 즐거움을 매 순간 만끽하는 게 살아가는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제 그림 역시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세계를 함축하는 도상으로 그리드를 떠올렸어요. 가로선과 세로선이 일정한 간격으로 만나는 이 격자무늬는 오래전부터 세상을 측정하는 이성적, 수학적 도구였죠. 제 눈엔 선과 선이 교차하며 만들어지는 좌표 점이 마치 무수히 많은 만남과 헤어짐, 삶 자체의 은유로 느껴졌습니다. 그런 삶에 때때로 찾아오는 순수한 기쁨은 아름답고도 무상하지요. 숨이 닿으면 연약하게 흔들리는 거미줄처럼 얇은 그리드와 그 위에 생겼다가 사라지는 반투명하고 얇은 기호들의 풍경은 제게 세계의 모습이자 견지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18 The Glow of Dawn›, 2022, 모눈종이에 색연필, 29.7x21cm
‹#125 포옹 Hug›, 2024, 모눈종이에 색연필, 29.7x21cm
«Flow Riding», 권농공간, 2023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원래는 영화를 공부했었어요. 영화를 보는 것을 매우 좋아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일련의 긴 ‘이야기’보다도 섬광처럼 짧은 찰나의 ‘이미지’에 더 관심이 있다는 걸 깨달았고,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그림 그리기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즈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장면이 있어서 그걸 물감으로 옮겨봤는데, 무척 개운한 기분이 들었어요. 그때 이렇게 내 안에 생겨나는 이미지를 계속 바깥으로 꺼내는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어요.
돌이켜보면 영화를 보면서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의미심장한 컷을 캡처해 두는 걸 좋아했어요. 커다란 구조와 그 안에서 도드라지는 특정 사건들 말이죠. 지금은 그림으로 그런 작업을 하는 셈입니다.
작업실 책상
‹#112 A Pair›, 2024, 모눈종이에 스티커와 색연필, 21x29.7cm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오래된 건물 4층에 자리 잡고 있어요. 공간이 낡고 조금 좁지만, 위치가 좋고 볕이 잘 드는 점이 좋아요. 서울 시내가 잘 보이는 큰 창이 하나 있는데요, 그 창가 쪽 책상 위에는 모눈종이, 색연필, 독서대가 항상 놓여 있어요. 책상에 앉아 드로잉 작업을 하다가 그것이 마음에 들면 페인팅으로 옮겨요.
반대쪽 벽에 큰 패널을 걸어놓고 대형 페인팅 작업을 해요. 근처에는 각종 아크릴 물감과 미디엄, 물통이 올려져 있는 트롤리와 책상이 있습니다.
한쪽 구석에 있는 책상에는 재봉틀이 있어요. 가끔 천을 사용한 재봉틀 작업도 하거든요.
휴식하거나 사람들을 초대했을 때 대화할 공간도 마련되어 있는데요, 소파 앞 테이블 위에는 항상 리코더가 올려져 있어요. 취미로 리코더를 부는데, 그림을 그리기 전에 몸 풀듯 리코더를 몇 분간 불곤 합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책상에 앉아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 저 자신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런 질문에서 얻은 답을 이미지로 찾아요. 하얀 백지보다는 모눈종이 위에 드로잉할 때 마음이 편합니다. 연한 하늘색 선이 때때로 생각의 길을 안내해 주거든요. 요즘은 직접 격자무늬를 그리기도 해요. 그러다 보면 불현듯 꼭 그림으로 그려야 할 좋은 장면이나 소재를 얻기도 합니다.
가끔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끝말잇기 하듯이 그다음에 등장할 장면이 무엇일지 추측하거나 리서치하기도 해요. 그리드를 그리다가 거미줄이나 크로셰를 그리기도 하고, 얇은 막을 그리다 보니 종이접기나 비눗방울 같은 것을 그리는 것처럼요.
최근 보고 겪은 것을 바로 작업에 반영하기보다는 오랜 세월 동안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온 단순한 모양의 도상을 주로 선택해요. 비눗방울, 거미줄, 천사 같은 소재인데요,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대체로 본질적이고 오래도록 유효할 감정이나 감각에 관한 결과물이기 때문이에요.
«미농지», 콤플렉스 갤러리, 2025
«미농지», 콤플렉스 갤러리, 2025
«미농지», 콤플렉스 갤러리, 2025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최근의 작업 과정은 이렇습니다. 먼저 가로선과 세로선을 번갈아 그리며 격자무늬를 만듭니다. 선의 간격과 비율, 색과 굵기는 그날그날 달라져요. 그렇게 만들어진 그리드를 따라가기도 하고, 참고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시하기도 하며 도상을 그려 나갑니다. 대체로 우연함, 경이로움, 접촉, 만개, 성실함, 다정함, 만족감 같은 감정이나 현상에 관한 것이에요. 도상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의식적이기도, 자의적이기도 한데요, 제게는 그림을 완벽히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는 기준과 프로세스를 찾는 게 중요하진 않아요.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온전히 자유롭고 솔직해지길 바라요. 그리고 그렇게 그린 그림은 공명할 수 있는 사람을 초대하는 하나의 암호문과 같다고 생각해요.
종이 위에 색연필로 이미지를 다듬은 뒤에는 마음에 드는 드로잉을 골라 큰 페인팅으로 옮겨요. 옅은 아크릴 물감을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릴 때는 선풍기 바람으로 말려가며 작업합니다. 가볍고 투명한 느낌이 곧바로 잘 전달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그러데이션이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신경 쓰며 그림을 그립니다.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거미줄›
이 그림은 직선적인 그리드를 변형해 그린 그림이에요. 선과 선이 교차하는 곳에서 수많은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며 그렸어요. 태어나서 지금껏 살아오며 만난 사람과 사건,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에서 벌어졌을 사건을 동시에 떠올렸어요.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고 또 앞으로 펼쳐지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머리가 아득해지기도 하고, 너무나 큰 부분 속 작은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신비한 기분에 잠기곤 해요.
직선으로 그린 그리드는 때때로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져서 제가 감각하는 바를 좀 더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거미줄이나 뜨개실처럼 유연한 그리드를 더 그려보고 싶어요.
‹거미줄›, 2025, 면천에 아크릴릭, 130.3x162.2cm
‹천사›
삶이 아주 얇고 연약하다고 느껴요. 그 속성을 빛나고 반투명한 물성으로 치환해 그린 전시가 «미농지»(콤플렉스 갤러리, 2025)였어요. ‹천사›는 반투명한 종이 두 개 면이 만났을 때 더 하얗게 빛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에요. 두 손을 곱게 모은 천사의 날개가 겹쳐지면 더 견고하고 빛나는 형상이 되는데요, 이렇게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일처럼 드물게 찾아오는 특별한 순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 또한 언젠가는 사라질 무상한 일이라는 사실도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천사›, 2025, 면천에 아크릴릭, 112.1x145.5cm
«미농지», 콤플렉스 갤러리, 2025
‹패랭이꽃›
사진은 없지만, 무상함과 아름다움이라는 키워드를 종이로 오린 두 송이의 패랭이꽃으로 표현한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그림 하단에는 이를 실과 바늘로 엮는 형상이 들어 있어요.
‹거미줄›과 ‹천사›에서 했던 각각의 연구를 하나의 화면 안에서 유기적으로 결합해 보고자 보라색 크로셰 실과 얇은 종이꽃의 형상을 연결해서 그렸어요. 세계의 모양과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한 화면에서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지요. 이 같은 결합의 방식을 당분간 탐구해 나갈 예정입니다.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최근 작업에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화면을 가능한 한 맑게 만드는 일이에요. 작업을 하다 보면 그 당시 마음의 상태가 그림에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느낍니다. 사사로운 고민을 가득 안고 있으면 그리려는 그림에 가닿기가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최근에는 무엇을 더 그릴지보다 무엇을 덜어낼지를 더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을 좀 여쭤봐도 될까요?
주 3일은 약국으로 일을 하러 나가요. 생활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입을 위해서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거든요. 새로운 분야를 알아가는 것도 재미있고, 비어 있는 약을 채우고 공간을 정리하는 반복적인 일이 주는 안정감과 만족감이 있어요. 오후 2시쯤 일이 끝나면 작업실로 가고, 나머지 요일에도 가능하면 작업실로 갑니다.
한 달에 한 번은 친구들과 쉬운 악기로 합주하는 밴드 모임을 해요. 멜로디언, 리코더, 실로폰 등을 서툴게나마 연주하면서 음악을 조금 더 가까이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가끔 글을 써요. 제게 그림으로는 할 수 없는 이야기가 남아 있을 때가 있거든요. 최근에는 9년 전에 다녀온 이탈리아 여행기를 다듬은 에세이를 책으로 출간했고, 그림 그리는 다른 작가님과 공동 집필 중인 에세이도 12월쯤 출간될 예정이에요. 아직 많이 서툰데요, 그래도 글을 쓰는 기쁨을 점점 알아가고 있어요.
책을 읽기도 하고, 영어 화상 채팅을 하기도 하고… 예능을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하죠. 특히 보드게임을 좋아해요. 하루하루 참 바빠요.
여행 에세이 『흰 비둘기가 사는 곳: 아씨시에서 보낸 3일』(현현에피파니, 2026)
‹Berceuse II›, 2025, 면천에 아크릴릭, 24×33.4 cm
요즘 작가님이 관심을 가장 많이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작업을 진행할 때 자유로움과 일관성의 밸런스를 갖추는 것입니다.
백지 앞에서 순간순간에 몰입해 작업을 진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작업 세계를 거시적인 차원에서 인식하고 일관성을 갖추는 것 역시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최근에 깨달았어요. 그래야만 생기는 추진력이 있다는 것을 느꼈거든요.
직감이 보내는 여러 가지 신호를 민감하게 알아차리되 가장 중요한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 둘 사이의 밸런스를 찾는 일이 요즈음의 목표입니다. 작업의 이해도를 예리하게 벼르다 보면, 평생 천착해야 할 부분과 조금씩 변하고 넓어져야 하는 부분을 구분해 다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그 사이의 밸런스 역시 잘 찾을 수 있을 테고요.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삶의 길이가 얼마나 짧은지, 삶은 내 선택에 따라 내일이라도 끝날 수 있는 얇은 판과 같다는 걸 믿어요. 그게 제 작업의 시작점이기도 하고요. 그런 삶의 얇기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어요. 삶은 반투명할 정도로 얇아서 찢어질 수 있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동시에 그건 슬픈 일이 아니라는 것도요. 저는 삶의 가벼움과 연약함을 직시할 때 비로소 삶을 더 깊이 기리며 즐겁게 살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무서워하지 않고 수용한다면, 세상의 제약과 방해를 쉽게 넘어설 힘을 가지게 되기도 하고요.
‹클로버와 수국›, 2025, 면천에 아크릴릭, 12x22.7cm
‹백합과 패랭이꽃›, 2025, 면천에 아크릴릭, 12x22.7cm
‹학›, 2025, 면천에 아크릴릭, 15.8x22.7cm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아직 크게 슬럼프가 온 적은 없는데요, 작업이 안 되어도 책상에 앉아서 하염없이 드로잉을 하다 보면 일주일 안으로는 그리고 싶은 게 나오곤 하더라고요. 제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리는 것’이 해답이었어요.
만약 혼자 하기가 어렵다면 ‘벌금계’를 만드는 것을 추천해요. 몇 달 전부터 가까운 동료와 함께하고 있는 건데요, 하루에 드로잉 한 장씩 공유하기, 인스타 비공개 계정에 작업실 출근 도장 남기기를 하고 있어요. 이를 어길 때는 1만 원을 내고 있어요. 무작정 쉬기보다는 하루에 한 점이라도 드로잉하고, 작업실에 나가다 보면 어느새 돌파구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혼자 하기가 어렵다면 동료와 함께 헤쳐 나가는 걸 추천해요.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자신이 오래 좋아하며 즐길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오래도록 즐길 수 있다는 건 곧 그것이 그만큼 자신에게만큼은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니까요. 주변의 반응은 금방 바뀌거나 때로 너무 이르거나 늦게 오기도 해서 기준을 거기에 두지 않았으면 해요.
오랫동안 진심으로 만든 작업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고 믿어요. 그런 작업은 생각보다 흔하지 않고, 그래서 어떤 식이든 언젠가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거예요.
‹즐거운 나의 집›, 2023, 옥사천에 바느질, 32.5x38.5cm
‹그리드›, 2023, 노방천에 바느질, 270x109cm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저는 ‘과연 내가 좋은 걸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일까?’ 하는 의심을 오래 했어요.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은 전혀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그렇다고 해서 관둘 것도 아닌데 계속 그 문제를 붙잡고 있으면 작업할 힘이 떨어지고 애초에 무얼 하려고 했는지, 그 목표도 흐려져서 제자리에서 맴돌게 되더라고요. 제자리에 있다는 건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점점 뒤로 밀려나는 데 가깝고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자신에 관한 믿음을 지켜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몇 달 전부터 ‘십계명’을 만들어 읽고 있어요. 나는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내게 중요한 게 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적어두고 매일 읽어요. 십계명의 모든 문장은 현재형이어야 해요.
이것을 하고부터는 자기 의심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느껴요. 하루하루가 좀 더 단순하고 선명해져서 좋습니다.
‹In the Journey›, 2024, 면천에 아크릴릭, 34.8x27.3cm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무언가 내려놓게 만드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몸과 마음이 뻣뻣해지는 일이 많다고 느끼는데, 그렇게 잔뜩 주고 있던 힘을 쭉 빼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소란스러웠던 바깥에서 물러나 좀 더 섬세한 소리에 집중하는 시간 같은 그림이요. 그 사이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아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더 길게 말하기보다는 오르한 파묵의 『다른 색들』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싶어요.
(…) 작가의 약인 상상이 왜 다른 사람들의 약도 될 수 있는지 밝혀보겠습니다. 내가 전적으로 소설 속에 있다면, 그리고 잘 쓰고 있다면, 그러니까 전화벨 소리, 질문, 요구 그리고 일상생활의 지루함에서 벗어났다면, 내 소설을 통해 다다른 자유와 무중력의 천국의 규칙들, 어린 시절 놀이를 떠올립니다. 모든 게 단순해져서, 이 단순함에서, 유리로 만들어져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 주는 집, 자동차, 배, 건물처럼 비밀을 말해주기 시작합니다. 감각으로 이 규칙을 듣고 적는 게 나의 일입니다. (…) 지루했던 장소에서 본 것을 감각적으로 바꾸는 것, 무책임하게 즐기는 것, 아이에 관해 흔히 말하듯 즐길 때도 무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꿈꿔요. 지금은 작업할 시간이 모자라는 편이니까요. 도시에서 조금 동떨어진 조용한 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그렇게 지내보고 싶어요.
저는 자극에 예민한 편이라서 너무 많은 사람과 쉴 새 없이 어울리기보다는 홀로 있는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을 때 더 만족할 만한 작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사할 이유가 없는 조용하고 넓은 작업실과 어떤 의무도 없는 평화로운 상태를 꿈꿉니다.
Artist
Suyeont 수연(@suyeont)은 서울에 거주하며 그리드와 반투명하고 연약한 물질에 관심을 두고 드로잉, 페인팅, 패브릭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그리드는 세계와 시간을 은유하고, 그 위에 얹혀지는 얇고 가벼운 소재는 삶의 유한함과 일시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어린 시절 손으로 하던 종이접기나 실뜨기 등을 연상시켜 삶이 선사하는 즐거움과 유희를 함께 떠올리도록 한다.
개인전으로는 «미농지»(콤플렉스 갤러리, 2025)와 «부드러운 미래»(전시공간, 2021)를 열었고, «포옹»(제일주택, 2025), «비누향»(콤플렉스 갤러리, 2024), «MMCA 과천 프로젝트: 연결»(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23), «영원과 하루»(WESS, 2023) 외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여행 에세이 『흰 비둘기가 사는 곳: 아씨시에서 보낸 3일』(현현에피파니, 2026)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