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의 원고를 받을 때마다 도입부를 어떻게 시작할지 고민됩니다. 너무 상투적이지는 않을까, 피상적인 표현으로 그 감흥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매거진을 읽는 여러분을 상상하며 문장을 쓰고 고칩니다.
오늘은 꾸밈없이 ‘안전 공간’ 시리즈로 우리에게 안도감을 선사한 보라보라 홍보라 디렉터가 보내온 전문으로 시작해 볼까 합니다. 예술을 매개로 누구에게나 안전한 감각을 만들고 싶었다는 그의 메시지가 편집부의 그 어떤 도입문보다 빛났으니까요.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치를 믿는 팩토리2를 응원하며, 홍보라 디렉터의 안전공간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에서 소개합니다.
«안녕, 안녕!»의 마지막 행사 ‘라이프 앤 타임 마켓’이 열리는 팩토리2의 외부 풍경, 사진 정해민
Safe Space는 예술을 매개로 도시와 일상 속에서 자유로운 사고와 대화를 열어주고, 사변적 단상과 사회적 질문을 탐색하며 나누는 안전 공간입니다.
작년 여름부터 비애티튜드와 함께 구상해 온 에세이 ‘안전 공간’ 시리즈. 그 출발점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예술기획자로서의 삶과 사고가 변해온 궤적, 그리고 끊임없이 요동치는 도시의 풍경 앞에서 나는 왜 이토록 ‘안전 공간’이라는 개념에 천착해왔을까요.
누군가는 예술 기획과 안전이 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요하던 경복궁 서쪽이 멋쟁이 러너들의 성지가 되어가는 시간을 지나오며, 약 21년간 뿌리내렸던 내 일과 성장의 터, 창성동의 팩토리2를 선택의 여지 없이 떠나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말 그대로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입장에 서고 나니, ‘안전 공간’과 ‘안전하다는 감각’은 제게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지난 6월, 새로운 맥락 속에서 제로 그라운드에 선 마음으로 새문안로 피어선 빌딩 1008호에서 팩토리2의 새 항해를 조심스레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예술 공간이 누군가에게 온전한 ‘안전 공간’으로 작동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전을 앞둔 지난 4월 말 편지 형식으로 썼던 인사를 다시 꺼내어 건넵니다.
돌아보니 팩토리2는 그저 예술을 매개로, 누구에게나 열린, 안전하다는 감각을 만들고 싶었나 봅니다.
안녕, 그리고 안녕!
창성동의 팩토리2에서, 이웃과 동료와 관객 여러분께
그리고— 반갑게 안녕! 새로운 새문안길의 팩토리2에게 (2026.04.)
«안녕, 안녕!»의 마지막 행사 ‘라이프 앤 타임 마켓’이 열리는 팩토리2의 외부 풍경, 사진 정해민
21년 동안 팩토리를 아껴주신 동료, 이웃, 그리고 오랜 관객 여러분께 마음을 담아 인사를 전합니다. 팩토리는 2002년 12월, 경복궁 동쪽 팔판동의 아주 작은 전시장 겸 아트숍으로 시작했습니다. 3년 뒤인 2005년, 이곳 창성동으로 옮겨왔을 때 그곳은 여기까지 전시를 보러 오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만큼 조용하고 생활감 짙은 거리였습니다.
경복궁과 청와대라는 엄숙하고 권위적인 공간을 가까이 두고 있었기에, 저는 오히려 더 작고 소수인 이야기들을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잘 들여다보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들려야 할 이야기들. 어쩌면 권위에 작은 균열을 내고 싶은 소심한 시도였지만, 동시에 작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권위를 상징하는 장소 근처에서도 당신의 목소리는 충분히 보호받고 들릴 가치가 있다’는 감각을 잠시나마 느끼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한 안전 공간이었습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어도 ‘여기 오면 뭔가 환기가 된다’는 느낌을 받기를 바랐습니다. 사회적 편견이나 평가로부터 자유로운, 작고 평평하고 나란한 자리. 혹시 누군가 이곳에서 불편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그 평평함보다는 더 뚜렷한 위계에 익숙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보다 익숙한 것에서 편함을 찾는 사람이었거나요.
예술기획자로서, 특히 퍼블릭 아트를 중심으로 여러 사례를 찾아 연구해오며 저는 티에스터 게이츠(Theaster Gates)의 작업에 오래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시카고 남측의 쇠퇴한 지역에서 버려진 건물들을 매입하고 개조해 작업실이자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들며, 예술을 매개로 동네의 활력을 되살렸습니다.
시카고 남쪽 오래 폐허로 방치된 은행 건물을 매입해 ‘Stony Island Arts Bank’라는 복합문화공간이자 미술관이자 아카이브센터로 만들어내다, 사진 Tom Harris Stony Bank 갤러리 & archive 02
티에스터 게이츠의 시카고 남부의 ‘Kimbark’ 스튜디오, 사진 Sara Pooley Kimbark Studio
작업실 일부를 열어두었을 뿐인데 자연스럽게 커머닝이 발생했고, 주변의 작은 공간들이 서로 연결되었고, 동네 사람들은 예술을 통해 안전하다는 감각을 느끼며 모여들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자리가 특별한 마을이 되고, 도시 전체로 번져 나갔습니다. 정책이나 계획이 만들 수 없는, 오직 예술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팩토리 역시 창성동의 지난 20년 동안 그런 존재이고 싶었고, 충분히 그랬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지난 20여 년 사이 서울은 훨씬 촘촘해졌고, 조용한 뒷골목이었던 창성동은 어느새 큰 길이 되었습니다. 동네의 1층은 패션숍과 인터내셔널 브랜드들로 채워졌고, 길을 향해 큰 창을 낸 팩토리는 주변의 다이나믹과 점점 달라져갔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어색함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돈 냄새 나지 않는 비영리 공간이 서울 한가운데 1층에 있는 것도 나름 쿨하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를 달래면서요. 그전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이 길을 채웠지만,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팩토리2의 예술적 시도를 접하고 새로움을 느끼거나 소수성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팩토리2와 이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호흡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저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더 들썩이는 리듬으로 소비되고 빠르게 변해가는 풍경 앞에서, 오히려 우리만의 작은 감각을 더 담담하고 당당하게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조금 더 오래 이 자리에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더 이어지기 어려워졌습니다. 이사를 앞두고 서촌 어드메에라도 남아 팩토리가 가진 동네의 맥락을 붙잡을까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가 그리워하는 동네와 그 여유로운 분위기는 이미 추억 속의 어떤 ‘스타일’로만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판을 바꾸기로. 그냥 앞으로 나아가기로. 창성동의 팩토리를 기억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웃으로, 동료로, 관객으로 이 공간을 함께 만들어주셨습니다. 한 시절을 정리하고 다른 시간으로 옮겨가는 이행의 과정에도 다정한 동료가 되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새로운 공간의 중심에는 부엌을 두었습니다. 실제 부엌이라기보다는 부엌이 상징하는 가치를 공간의 중심에 두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습니다. 부엌은 소비와 감상에 앞서 창작의 재료를 다듬고 과정을 나누는 곳입니다. 서로 다른 속도와 보폭을 가진 이들이 스스럼없이 넘나들며 함께 먹고 대화하고 만들고 나누는 실천을 통해 경계를 넓혀가는 곳. 땅속에서 유연하게 틈을 만들며 낮고 넓게 퍼져 나가는 균사체처럼, 창작자와 매개자가 위계 없이 교류하고 질문하고 실천하며 만들어가는 자리. 그것이 지금 제가 다시 그리는 안전 공간의 모습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작게, 내용은 넓고 깊게. 공간의 형태나 규모가 달라지더라도 그 중심에는 언제나 연결이 있을 것입니다. 덴마크와 핀란드와 네덜란드의 거리에서 제가 느꼈던 그 여백, 다름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그 감각을, 저는 이제 이 작은 사무실이자 랩이자 전시 공간에서 다시 이어가려 합니다.
팩토리2는 서울을 거점으로 ‘함께’라는 방법론으로 경계 없이 확장하는 예술기획사무소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작게, 내용은 넓고 깊게. 공간의 형태나 규모가 달라지더라도 중심에는 언제나 ‘연결’이 있습니다. 균사체가 땅속에서 숲을 잇듯, 국내외 파트너들과 느슨하지만 단단하게. 이곳에서 창작자와 매개자는 위계 없이 교류하며질문하고, 대화하고, 실천하면서 새로운 예술 생태계를 만들어갑니다.
정체성이 아닌 과정
팩토리2를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매번 프로그램의 형식과 주제가 유연하게 변하고, 다양한 기획자들의 탐구와 질문이 그 중심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속도보다 관계를, 결과보다는 과정을 향해 걷습니다. 신뢰와 돌봄, 함께 빚어내는 시간처럼 숫자로 잴 수 없는 것들의 가치를 믿습니다.
경계에서 함께
우리는 늘 경계에 선 존재들과 함께했습니다. 쉽게 정의되기보다 자신만의 길을 내는 창작자들, 편견의 벽을허물고 그 경계를 새로운 ‘장’으로 확장하는 이들과 함께. 새로운 공간에서도 팩토리2 특유의 ‘작고 뾰족함’은 계속됩니다. 이는 누군가를 배제하기 위함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다름을 지켜내기 위한 명료한 태도입니다.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면서도 단단하게 이어지는 연대를 만들어갑니다.
부엌이 있는 공간
새로운 공간은 소비와 감상에 앞서 창작의 과정을 나누는 ‘부엌’의 가치를 중심에 둡니다. 물리적인 밥솥과 식탁을 넘어, 서로 다른 속도와 보폭을 가진 이들이 스스럼없이 섞이고 대화하며 실천의 장을 짓는 생태계. 그것이 팩토리2가 지향하는 앞으로의 모습입니다.
각 계절별 사이니지를 다양한 물질을 다루는 창작자들에게 의뢰하여 제작하고 있다, 천연 쪽염색으로 만든 모시와 면 재질의 여름 버전 사이니지 제작 과정과 설치 광경, 디자이너 쿤스트호이테, 사진 쿤스트호이테
시간과 공간을 나누며, 새로운 상상을 함께해 나갈 파트너를 찾습니다
2026년, 팩토리2는 새 공간을 함께 쓸 파트너를 찾습니다. 고용이나 소속이 아닌, 각자의 작업 방식을 유지하면서 물리적 공간과 느슨한 네트워크를 나누는 방식입니다. 서로의 고유함을 존중하며 다름이 힘이 되는 공존, 팩토리2와 얽히고 이어질 다양한 제안을 기다립니다.
Writer
홍보라(@borabola5)는 작고 뾰족한 예술 공간이자 기획 사무소인 팩토리2를 운영하는 디렉터이자 예술기획자로, 도시·사람·예술의 역동적 관계를 기반으로 퍼블릭 아트와 국내외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장르 간 경계를 선이 아니라 넓은 지대로 확장하고자 연구, 기획, 제작, 교육 등 예술과 문화 전반에 걸쳐 경계 없이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