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호프›에 관한 언쟁이 시작될 무렵 편집부가 애정하는 필자 김도훈 님께 원고 청탁 메시지를 보냈어요. 원고를 기다리는 3주간 매일 메일함을 새로고침하고, 그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살피며 시답잖은 메시지로 은근하게 독촉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드디어 ‘호프 원고 갑니다.’라는 메일을 받았죠. ‘역시, 김도훈이네.’
김도훈 님이라면 영화의 속도만큼 거침없이 달려가면서도, 집요할 만큼 면밀하게 들여다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토록 쓰기 싫다고 하더니 결국 이 원고를 마친 이유. 후속편이 나오지 않는 데 원고료 절반을 걸겠다는 그에게 반대쪽에 걸겠다고 읊조려 봅니다. 나홍진의 팬으로서.
자! 그럼 기다리고 기다리던 김도훈의 ‹호프›를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영화 ‹호프› 스틸컷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글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무슨 소리냐고? 일단 이미 ‹호프›의 극장 상영은 마무리되고 있다. 아마도 나홍진 감독의 전작 ‹곡성›을 넘어서지 못한 채 끝날 것이다. 말 그대로 실망스러운 결과다. 예상했던 결과다. 나는 ‹호프›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당황했다. 그렇다. 황당했다. 영화를 이렇게 끝낸다고? 아니다. 3부작으로 설계됐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다. 나에게는 이미 충분한 정보가 있었다. 3부작으로 설계됐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영화가 갑자기 툭 끊기듯 끝나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황했다. 알고 있는데 왜 당황했냐고?
때로는 정보가 지나치게 많은 게 사람을 더 당황하게 만든다. 이건 3부작으로 설계된 영화가 아니었다. 3부작으로 설정됐을 수는 있다. 설계는 아니다. 설계는 꼼꼼하게 하는 것이다. 설정은 그냥 대충 하는 것이다. 만들면 좋고 아니면 됐고, 그게 설정이다. 설계는 관객에게 믿음을 주어야 한다. 속편에 거는 기대를 남겨야 한다. 당연히 만들어질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스타워즈› 한 편이 망했다고 다음 편이 나오지 않을 리는 없다. 트릴로지는 트릴로지다. 뭐가 됐든 후속편에 거는 기대는 남는다. 떡밥을 회수할 것이라는 믿음이 남는다.
영화 ‹호프› 샌디에이고 코믹콘 포스터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만약 당신이 ‹호프› 2편과 3편을 내심 기다리는 독자라면 망했다고 본다. 아니, 망한 건 아니다. 영화 한 편 망했다고 여러분의 삶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나는 ‹스타워즈›의 새 트릴로지가 그냥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2017)에서 끝났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분노가 있다. ‹매트릭스›(1999)가 ‹매트릭스: 리로디드›(2003)와 ‹매트릭스: 레볼루션›(2003)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냥 단독 영화로 끝나버렸다면 세상은 더 아름다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트릭스: 레저렉션›(2021)을 보면서는 극장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거기서 불타 죽으면 네오처럼 어항에서 깨어나 온몸에 연결된 호스를 뽑으며 ‘아, 결국 이거였구나’라고 깨닫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헛소리다.
내가 보기에 이제는 자매가 된 당시 워쇼스키 형제는 속편에 관한 어떤 설계도 없었다. 실제로 없었다. ‹매트릭스›가 떡밥과 떡밥, 떡밥으로 이어지는 방만한 속편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다. 흥행에 지나칠 정도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호프›는 흥행에 지나칠 정도로 성공하지 않았다. 사실 성공했더라도 답은 없었을 것이다. ‹호프› 제작비는 약 700억 원이다. 시골을 무대로 했는데도 700억 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홍진은 갑자기 떡밥을 마구 밀어 넣는다. 괴물은 알고 보니 외계인이었다. 심지어 우주적 전쟁에 휘말린 듯한 고지능 외계인이었다. 고지능인데 육체적 능력은 초인적이다. 변신도 한다. 그런 와중에 지구인들이 죽인 건 외계인들의 세자다. 아마도 도망친 세자일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숨이 차는데 나홍진은 마지막 장면에서 거의 도시 하나 크기의 외계인 모선을 추락시킨다. 오페라이다. 스페이스 오페라이다.
‹호프› 300만 돌파 기념 외계인 인물 관계도 및 소개 이미지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 ‹호프›의 첫 촬영 비하인드 에피소드를 다룬 유튜브 ‘호프 촬영썰’ 패러디 영상. 출처: 유튜브 채널 @Hone5204
나홍진이 ‹호프› 속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편의 다섯 배 정도의 제작비를 털어 넣어야 할 것이다. 왜 다섯 배냐고? 그냥 대충 때려잡은 수치다. 열 배일지도 모르겠다. 만들 수 없다는 소리다. 나홍진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호프› 마케팅은 몇 가지 실수를 했다. 마치 ‹스타워즈›나 ‹듄› 시리즈처럼 설정집을 만들어 배포한 것이다. 어떤 외계인이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상세하게 일러스트로 그린 설정집이다. 나홍진은 인터뷰에서 그게 실수였다고 이미 밝혔다. 나가서는 안 되는 자료였다는 것이다. 그게 나가는 걸 아예 몰랐을 리는 없다. 어차피 그 설정도 나홍진이 다 한 것이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감독이라 마케팅팀과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았을 리도 없다. 감독의 허락 없이 그런 게 나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나갔다. 나가자 나홍진은 부정했다. 아니, 어쩌라고요?
어쩌면 우리는 나홍진에게 그냥 속고 있는 걸 수도 있다. ‹호프›는 괴상한 영화가 맞다. 영화는 딱 세 스테이지로 이어지는 활극이다.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 주인공들은 시골 마을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지나칠 정도로 잔인하게 사람들을 학살하는 괴물과 싸운다. 두 번째 스테이지에서 우리는 괴물이 외계인 종족이며, 인간이 죽인 외계인 세자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 번째 스테이지에서 주인공들은 이유를 알면서도 살기 위해 싸운다. 나홍진은 진짜 별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는 이야기를 위해 액션을 설계한 것이 아니다. 액션을 위해 이야기를 설계했다. 아니, 여기에는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아무것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오해가 증폭되어 폭주하는 인간들과 외계인들의 액션밖에 없다. 맞다. 이건 ‹곡성 2›다.
영화 ‹곡성› 스틸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나는 ‹곡성›(2016)을 매우 좋아한다. 사람들은 ‹곡성›을 보고 나서 불평했다. 이제 와서 여러분이 나홍진을 거장으로 여기기 때문에 당시 불평을 조금 잊었을 뿐이다. 영화를 하도 드물게 만드는 감독이라 시간이 불평을 잊어버리게 했을 뿐이다. ‹곡성›도 사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는 대사로 설명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중하게 여기는 것은 중한 게 아니라고 말이다. 뭣이 중하냐고 말이다. 아니, 이야기는 중하다. 중해야 한다. 나홍진은 이야기를 흐트러뜨린다. 설명해야 할 구간을 다 빼먹는다. 나는 그것이 나홍진의 의도라고 생각했다. 매력적인 구멍으로 가득한 치즈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최초 편집본을 본 사람들에 따르면, ‹곡성›은 그렇게 구멍이 난 영화가 아니었다. 많은 것이 대체로 설명되는 명확한 장르영화였다. 역시 그들에 따르면, 나홍진은 최종 편집본에서 설명하는 장면들을 모조리 삭제했다. 그들에 따르면 그렇다는 것이다. 이걸 나홍진이 들으면 부정할 것이다. 베드로처럼 세 번 아니라고 부정할 것이다.
상관없다. 나는 그 논리적 구멍이, 의도한 구멍이 ‹곡성›을 정말 무시무시한 영화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구멍이 숭숭 뚫린 무서운 영화를 좋아한다. 뭔가를 설명하려 들지 않는 장르영화에는 비뚤어진 애정이 좀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1980)이 그런 영화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1997)나 ‹회로›(2001)가 그런 영화다. 개인적으로는 21세기에 만들어진 최고의 호러영화라고 여기는 ‹팔로우›(2014)가 그런 영화다. 곧 리메이크되는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포제션›(1981)이 그런 영화다.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가 그런 영화다. 코엔 형제 영화는 호러가 아니지 않으냐고? 나는 안톤 시거만큼 무서운 호러영화 주인공을 본 적이 별로 없다. 우리는 그런 영화를 보며 머릿속으로 빈칸을 채워 나가야 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목적이 무엇인가? 존재가 무엇인가? ‹곡성›이 그런 영화다. ‹호프›가 그런 영화다.
영화 ‹샤이닝› 중 웬디(셸리 듀발)를 찾아간 호텔 지배인, 이미지 제공: 타셴 © 워너 브라더스
나홍진은 논리적으로 장면을 연결하는 부분을 모조리 없앰으로써 관객을 헷갈리게 한다. 그런 장면을 빼는 순간 정보는 충돌한다. 영화가 관객에게 듬성듬성 준 정보는 전혀 연결되지 않거나 서로 마구 부딪친다. 여기서 관객은 두 가지 결정을 해야 한다. 계속 궁금해할 것인가 아니면 궁금증을 버리고 모호함이 주는 스릴에 몸을 맡길 것인가. 다 만들어 놓고도 설명하는 부분을 삭제해 버린 유명한 사례가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이다. 최초 극장 개봉판에서는 주인공 잭(잭 니콜슨)이 죽는 것으로 영화가 끝나지 않는다. 살아남은 부인 웬디(셸리 듀발)는 병원에 입원한 상태다. 호텔 지배인이 병문안을 온다. 지배인은 잭의 시체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분명히 얼어 죽었다. 시체는 없다. 어쩌면 모든 것은 웬디의 상상이었을 수도 있다. 웬디가 미친 것인가?
거기서 ‹샤이닝›은 또 하나의 암시를 남긴다. 웬디가 입원한 병실을 나서던 지배인은 웬디의 아들인 대니에게 노란 테니스공을 하나 건넨다. 그 테니스공은 영화의 초반에서 호텔의 영혼(?)이 대니를 그 무시무시한 237호실로 유인할 때 굴러오던 것이다. 웬디가 미친 게 아니라 지배인은 호텔에서 벌어진 악몽 같은 사건을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거나 사건을 지휘한 인물일 수도 있다. 큐브릭은 상영 일주일 만에 이 장면을 삭제해 버렸다. 미국 모든 극장주에게 마지막 부분 필름을 잘라서 자신에게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 엔딩을 본 사람은 최초 개봉 일주일 안에 북미의 어떤 극장에 앉아 있었던 몇 안 되는 관객밖에 없다. 독자 여러분은 어떤 엔딩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압도적으로 스탠리 큐브릭이 옳았다고 확신한다. 에필로그 장면은 쓸모없었다. 그걸 삭제함으로써 ‹샤이닝›은 설명과 설정 없이 불안으로 가득한 걸작이 됐다.
영화 ‹샤이닝› 중 대니(대니 로이드)를 유인하는 테니스공과 대니, 이미지 제공: 타셴 © 워너 브라더스
많은 독자가 여기서 조금 뿔날지도 모르겠다. 나홍진의 ‹호프›가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같은 걸작이냐고 불평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아직은 모르겠다. 나는 ‹호프›가 쾌작이라고 생각한다. 걸작이라는 말은 너무 이르게 붙이는 게 아니다. 영화는 시간을 통과해 살아남아야 한다. 첫 개봉 시 졸작으로 평가받던 수많은 영화가 시대를 뛰어넘어 마침내 걸작으로 불리게 된 사례가 지나치게 많다. 반대의 경우도 지나치게 많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홍진은 ‹곡성›을 다시 편집한 방식으로 아예 ‹호프›를 찍은 것 같다. 전자가 이미 촬영한 논리적 연결 지점들을 모조리 삭제하는 것으로 완성됐다면, 후자는 아예 그런 지점들을 촬영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나는 이것이 마침내 나홍진이 스스로 발견한 작가로서 자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한다는 문장이 너무 많긴 하다만, 나홍진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너무 확신만 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
‹호프›는 엄청난 규모의 블록버스터 상업영화인 동시에 나홍진이라는 작가의 예술영화다. 이런 게 가능하냐고? 할리우드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한국 영화의 희한한 특징이 하나 있다.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찬욱, 봉준호는 상업영화 감독이다. 그와 동시에 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예술영화 감독이다. 나는 2004년 칸영화제에 취재 갔던 일을 기억한다. 박찬욱의 ‹올드보이›가 경쟁 부문에 올랐다. 시사를 마치고 나오는 기자들에게 코멘트를 받았다. 절반 정도는 치를 떨었다. 잔인하기 짝이 없는 B급 액션영화가 왜 칸영화제 경쟁 부문이냐며 닦달하는 외국인 기자들과 마주했다. 하도 불평을 해대서 모조리 신림동 고시원에 가둬 놓고 CJ 만두만 먹이고 싶을 지경이었다.
영화 ‹올드보이› 스틸컷 © CJ엔터테인먼트
그리고 20년 후,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가 없는 한국 영화는 한국 영화만의 독창적인 특징이 됐다. 나는 이 부분에서 오히려 한국 영화가 세계 영화에 끼친 어떤 중요한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역시 지난 20년간 두 분야의 경계를 흐트러뜨려 왔다. 잘 생각해 보시라. 크리스토퍼 놀런과 드니 빌뇌브 같은 21세기 블록버스터 상업영화 감독들은 전 세대와는 다르다. 예술영화를 만드는 방식으로 상업영화를, 그것도 대자본 블록버스터를 만든다. 두 분야를, 두 분야를 연출할 감독군을 철저하게 나누던 시대는 끝이 났다. 잘 생각해 보라. 전형적인 상업영화를 만드는 J.J. 에이브럼스나 루소 형제는 결코 예술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상업영화는 예술영화의 영역에서 평가받지 않을 것이다. 놀런과 빌뇌브는 다르다.
영화 ‹호프› 스틸컷 © 포지드필름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올해 ‹호프›가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된 것은 정말 정말 정말 이상한 일이다. 칸영화제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액션 스테이지 위주로 달려가는 거대 예산의 장르영화를 경쟁 부문에 초대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없다. 봉준호의 ‹괴물›(2006)도 비평가주간이라는 작은 부문에서 상영됐을 뿐이다. 나는 그게 큰 실수였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도리 없었다. 어쨌거나 ‹괴물›은 괴물이 나오는 블록버스터 액션영화였다. 칸은 그런 영화를 미드나이트 상영 같은 부문에 그냥 몰아넣기 마련이다. ‹호프›는 어떤 면에서 ‹괴물›보다도 더 순수한 장르영화다. ‹괴물›이 장르 속에 봉준호다운 계급과 사회적 콘텍스트를 담아냈다면, 나홍진의 ‹호프›는 딱히 그렇게 읽을 여지조차 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호프›는 경쟁 부문 영화 중 최상급의 별점을 얻어냈다. 칸 현지 평론가들이 열광했다. 아니 왜?
왜는 왜인가. 구멍 때문이다. 구멍 덕분이다. 나홍진이 지워 버린, 아니다. 애초에 찍을 생각도 없었던 논리적 연결 장면의 부재 덕분이다. 칸영화제가 애초에 이 영화를 경쟁 부문에 데려왔던 이유도 그놈의 구멍 덕분이다. 만약 ‹호프›가 전형적인 상업영화다운 논리적 구성으로 완성된 영화라면 칸영화제가 초대했을 리가 없다. 초대했더라도 개막작이나 미드나이트 상영 부문에나 들어갔을 것이다. 공개 이후 쏟아진 다소 놀라울 정도의 호평도 그렇다. 칸영화제 현지에 출장 가는 전 세계 기자와 평론가들은 예술영화의 경계에서만은 고집이 완강한 양반들이다. 그런데도 ‹호프›를 경쟁 부문 상영작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 예술영화의 경계 속에서 포옹했다. 나홍진은 지금까지 어떤 감독도 해 내지 못한 짓을 해 내버린 양반이다.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9회 칸국제영화제에서의 ‹호프› 기자회견. 왼쪽부터 배우 마이클 패스벤더, 알리시아 비칸데르, 황정민, 나홍진 감독, 배우 조인성, 정호연, 테일러 러셀. © EPA 연합뉴스
물론이다. 이 글을 읽으며, 아이고 어지간히 거대한 담론으로 나홍진 감싸고 있다며 불평하는 분이 절반 정도는 될 거라 생각한다. 믿는다. 확신한다. 여전히 속편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나홍진이 아니지만 속편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예측에 이 글을 쓰고 받을 원고료의 절반을 걸 수 있다. 속편이 나온다면 ‹호프›는 생명을 오히려 잃어버릴 것이다. 속편은 이 영화의 논리적 구멍을 메우는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나홍진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할 수는 있는 사람이지만 절대 그러지 않을 사람이다. 그러니 여러분이 공유한 그놈의 설정집은 그냥 떡밥이다. 해결할 생각 없는 떡밥이다. 설명할 생각조차 없는 꿈이다.
올해 초 나는 데이미언 허스트 회고전에 갔다. 벽에 쓰인 모든 데이미언 허스트의 말과 국현의 글을 페인트로 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 쓸모없는 말들은 안 그래도 낡을 대로 낡아서 예전 같은 충격을 주지 못하는 데이미언 허스트의 작품들을 더 고루하고 지루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냥 죽은 상어 시체만 우리 눈앞에 내밀어도 된다. 거기에 삶이 어쩌니, 죽음이 어쩌니 하는 허스트의 말이 붙는 순간, 논리적으로 작품을 설명하려 드는 전형적인 미술관의 언어가 붙는 순간, 어쨌든 한때는 뒤통수를 치기는 했던 허스트의 박력은 휘발된다. ‹호프› 역시 논리적 이치가 붙는 순간 나홍진 세계는 오히려 와해된다. 아니 지금 ‹호프›를 데이미언 허스트의 현대미술에 비유하는 거냐고? 아니다. 나는 나홍진이 데이미언 허스트보다 나은 예술가라고 믿는다. 그러니 ‹호프›에 가장 실망한 독자 여러분이야말로 나중에 OTT로 출시될 ‹호프›를 다시 보아야 할 최적의 관객일 것이다.
이 글의 첫 문장에서 나는 이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고 썼다. 아직도 그렇다. 이미 논쟁과 논박, 논란이 사그라든 영화를 두고 한마디 더하는 건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도 쓰고 말았다. 왜냐면 이 마지막 문장을 쓰고 싶어서였다. 나는 믿는다. 데이비드 린치가 살아 있었다면 ‹호프›를 정말 좋아했을 것이라 믿는다. 어떤 논리도 없이 관객을 (로스트) 하이웨이에서 (멀홀랜드) 드라이브시키는 영화를 린치가 싫어했을 리가 없다.
Artist
김도훈(@closer21)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다. 영화주간지 «씨네21» 기자, 남성지 «GEEK» 피처 디렉터,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으로 일했다. «조선일보», «한겨레신문», «에스콰이어»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하며 유튜브 영화 채널 ‹무비건조›에 출연 중이다. 낯설고 비범한 인물들을 탐구한 『낯선 사람』(2023)과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2019)를 썼다. 『패션 만드는 사람』(2024) 공저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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