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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형상 바깥에서

Writer: 김사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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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어떤 그림은 무엇을 그렸는지보다 무엇을 지웠는지가 먼저 보입니다. 서브컬처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이 복잡해질수록 그리는 사람에게 더 많은 고민이 요구되지만, 김사피는 반대로 움직이죠. 설명을 더하는 대신 덜어내는 쪽으로 향합니다. 캔버스에 올라온 미소녀 형상은 이야기와 맥락을 지운 채 붓질 한 획과 비슷한 무게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미소녀는 그의 작업에서 지극히 평범한 요소가 되죠. 그렇게 형상이 의미에서 조금씩 멀어질 때 김사피가 마음을 기울이는 곳은 오히려 형상 바깥이죠. 그는 얇은 선을 몇 번이고 겹쳐 쌓으며 화면에 어떤 질감과 구조가 생기는지에 집중합니다. 구성과 배치, 질감을 진중하면서도 유희적인 태도로 실험하며, 오랫동안 자신의 작업에 깔려 있던 질서를 들여다보죠. 미소녀의 형상을 하나의 색처럼 다루는 김사피의 작업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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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mine›, 2025, Oil, colored pencil on canvas, 227.3 × 363.6cm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김사피입니다. 그림 그리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 친언니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그림을 시작했어요. 물론 언니는 제가 자기 그림을 따라 그리면 엄청 뭐라고 했지만요. 매사에 진득하지 못한 성격이었는데, 동네 미술학원만큼은 좋아해서 꾸준히 다녔어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미대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학교 작업실이 폐쇄됐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선배, 친구들과 함께 외부 작업실을 쓰게 되었습니다. 굳이 갈 일이 없어도 작업실에 매일 가는 습관이 생기자 그림을 계속 그리며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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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om 1›, 2024, Oil on canvas, 130.3 × 162.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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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om 1.5›, 2024, Oil, acrylic on canvas, 193.9 × 390.9cm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2025년 하반기 대학원에 복학하면서 외부 작업실을 정리하고 대학원 작업실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두 달 뒤면 수료하게 되어서 작업실을 새로 구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아직 어디에 정착할지 정하지는 않았지만 막연하게 서쪽으로 가고 싶네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고전 회화나 애니메이션, 건물 공사 현장, 음악 앨범 재킷 등 다양한 곳에서 얻습니다. 또한 그림을 그리면서 든 생각이 다음 작업으로 이어지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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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피 작가의 작업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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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e›, 2025, Oil, pencil, colored pencil on canvas, 260.6 × 260.6cm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특정 작품을 소개하기보다 최근 작업하면서 해 온 생각을 이야기해 볼게요. 저희 집은 정말 보수적이었습니다.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것은 자연스럽게 터부시되는 환경이었어요. 어렸을 때 애니메이션 ‹이누야샤›에 나오는 가영이의 목욕 장면을 몰래 연습장에 그린 후, 부모님께 들키지 않게 스스로 찢어서 버려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어린 시절의 애정이 점점 커지면서 망가의 문법 속에서 작동하는 미소녀를 오랫동안 작업 대상으로 삼아 왔어요. 성인이 된 후 미소녀 피규어를 수집하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그 피규어가 제 그림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브컬처에서 여성을 다루는 방식이 점차 당위나 담론의 문제와 연결되며 스스로 검열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검열이 제가 처음 캐릭터를 그리던 순간의 감각과 멀어지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검열을 멈추고 기준을 세워 제 작업 내에서 무얼 덜어내고 무얼 남길지 재정립하고 있어요.


특히 과잉 서사와 맥락으로 범벅된 캐릭터를 덜어내고, 고유성을 유발하는 요소를 제거해 미소녀로 식별할 수 있는 최소 단위를 추려내고자 했습니다. 캐릭터가 지닌 빈틈없는 무게를 회화의 ‘붓질 한 획’ 정도의 무게로 균질화해요.


형상이 반복적인 노동의 손짓으로 물성을 쌓게 될 때 ‘형形’은 가치 판단이 거세된 순수한 조형 단위가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는 실제로 만든 것과 화면에 남은 형을 근거로 제가 그린 만큼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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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2025, Oil on canvas, 130.3 × 80.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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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2025, Oil on canvas, 130.3 × 80.3cm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요즘에는 작업하면서 미소녀라는 대상이 스스로 완전한 질료로 안착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지금의 제게 미소녀는 ‘하나의 색’과 비슷해진 상태입니다. 처음에는 그 색을 써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지만, 이제는 그게 완전히 회화 안으로 들어오면서 하나의 질료로 흡수됐어요. 그렇게 되니 제게 더는 ‘왜 미소녀를 그리는가?’가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치 파란색을 매번 꼭 써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형상 역시 그때의 화면에 따라 선택하거나 배제할 수 있는 요소가 된 셈이죠.


그래서 요즘은 형상이라는 요소를 잠시 내려놓고, 그동안 제 그림 안에서 유지되었던 질서를 탐구하고 있어요. 예전부터 반복해서 제 작품에 등장했던 특정한 구성과 배치, 질감 등 제 취향 정도로 여겨지던 회화 요소에 집중하며 작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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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no›, 2025, Oil on canvas, 130.3 × 193.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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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no›, 2025, Oil on canvas, 130.3 × 193.9cm

최근 작업에서 만족스러웠던 점과 불만족스러웠던 점이 궁금합니다.

만족스러운 점을 먼저 말씀드릴게요. ‹Piano›(2025) 작업을 예로 들면 일단 줄을 긋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후 제가 그은 줄이 쌓여서 어떤 밀도를 만들어 내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붓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무언가를 그려야겠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고, 그저 가는 선들이 만들어 내는 직조의 질감과 그 선들로 생기는 구조감을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최근에는 ‘일단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봐야겠다’는 직관적 충동이 캔버스 위에서 마치 하나의 독립적인 플레이어처럼 스스로 작동하도록 내버려둡니다. 약간 진중한 놀이터에서 노는 기분이 들어 만족스럽습니다.


반면 불만족스러운 점도 있어요. 어제는 작업이 꽤 괜찮았다고 생각했는데, 똑같은 그림을 그 다음 날 보면 너무 못나 보일 때가 있거든요. 그림은 그대로인데 날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제 평가가 믿음직스럽지 않아서요. 그런 부분이 불만족스럽습니다. 그래서 제 그림을 오래오래 봐야 하는 것 같습니다. 어려운 일이죠.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을 여쭤봐도 될까요?

작업실과 집만 반복해서 다니고 있어요. 보통 늦은 시간에 작업하는 편이라 새벽 1~2시에 집에 들어옵니다. 일정이 없는 날은 절대 밖에 안 나갑니다. 혼자 있으면 먹는 것도 귀찮아서 하루에 한 끼 정도 먹곤 합니다. 집에서 닌텐도를 하거나, 누워 있거나, 애니메이션과 유튜브를 보거나 번개장터를 구경하다가 늦게 잠듭니다. 그러고 그 다음 날 멜라토닌을 먹고 다시 수면 패턴을 맞춥니다. 건강하지 못한 습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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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1/125326›, 2024, Oil, pencil on canvas, 162.2 × 130.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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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gerine Axis›, 2025, Oil, acrylic on canvas, 195 × 7cm

요즘 작가님이 관심을 가장 많이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첫 번째는 수영이나 요가입니다. 예전에 수영과 요가를 계속 다니다가 요즘엔 시간 조율이 안 되어 못 다니고 있는데, 다시 꾸준히 다니고 싶어서 시간을 맞추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두 번째는 아이돌, 세 번째는 매운 음식입니다.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글쎄요, 삶을 대하는 태도라고 하니 너무 거대해 보이네요. 딱히 거창한 태도는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특별히 슬럼프를 극복하기보다 슬럼프가 와도 계속 작업실에 가서 앉아 있으려고 합니다. 어차피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아서 그냥 딴짓만 하다가 가는 듯한데, 그렇다고 작업실을 안 가게 되면 정말 아무것도 안 하는 하루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더 안 좋습니다. 그래서 일단 작업실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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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saie›, 2026, Oil, colored pencil on canvas, 193.9 × 130.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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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ee›, 2026, Oil on canvas, 145.5 × 97cm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올여름에 곧 대학원을 졸업합니다. 그와 맞물리는 작업실과 집 이사, 직장 구하기가 문제네요, 하하.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그림을 그릴 때 재미를 느끼는 마음이 고갈되거나 소진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여러 가지를 고려하지 않고, 때로는 주어진 현실에 맞지 않더라도 무리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충동과 열정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애니 ‹죠죠의 기묘한 모험›을 보면 저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주인공이 외치는 대사인 “요동친다 하트! 불타버릴 만큼 히트! 새긴다, 혈액의 비트!”에 담긴 태도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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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rd›, 2026, Oil on canvas, 24.3 × 40.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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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mine›, 2025, Oil, colored pencil on canvas, 227.3 × 363.6cm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아이돌처럼 7년만 활동할 게 아니기에 그림 그리기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너무 조급해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사람마다 기회가 찾아오는 시기가 다르잖아요. 그런데 남들이 먼저 뭔가를 이루는 모습을 보면, 당장 저도 뭐라도 이뤄야 한다는 압박감이 엄습하는데, 그럴 때마다 저를 잘 타일러 보려고 합니다. 물론 저도 통달하지 못한 노하우이긴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하지 않으려고 해요. 애매한 재능은 저주라는 말도 있잖아요. 가끔 저 자신이 애매한 재능만을 지닌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데, 그 의심은 끊임없이 저를 불안하게 하죠. 그러나 제가 내린 결론은 애초에 재능을 명확히 판단할 수 있는 순간은 거의 없다는 겁니다. 천재인지 아닌지는 결국 죽기 전까지 알 수 없잖아요. 그리고 만약에 제가 죽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재능이 없다고 판정(?)하더라도 ‘나는 이미 죽었는데 뭐 어쩔 거야?’라고 생각하려고요. 


결국 자신이 재능 있는 사람인지에 관한 최종 판단은 죽기 직전까지 계속 유보될 수밖에 없기에 재능에 관해 걱정하는 일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 의미가 없죠. 자신이 재능을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를 계속 따질수록 정작 지금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는 점점 멀어지기만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면 자꾸만 슬퍼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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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ㅣ金 › 2026, Oil, wax on canvas, 130.3 × 219.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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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ㅣ金 › 2026, Oil, wax on canvas, 130.3 × 219.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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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ㅣ金 › 2026, Oil, wax on canvas, 130.3 × 219.7cm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그림을 재미있게 그리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인구밀도가 낮은 곳 + 일 안 해도 되는 재력 +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기 + 층고 높고 넓은 작업실 + 애인과 함께 먹고살기. 낙원에서 사는 듯한 미래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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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김사피(@gimsapi)는 서브컬처 속 캐릭터가 지닌 무게감을 걷어내고, 형形으로 인식되기까지의 조건을 실험하며, 기표와 기의를 회화 구조 속에서 실험한다. 최근에는 화면에서 유화를 타설이나 양생 같은 건축 방법론 안에서 구조를 세우는 자재로 간주해 유화를 단순히 채색을 위한 재료가 아니라 중량과 물질성을 지닌 대상으로 이해한다.


개인전 «지킬 건 지키기»(PCO, 2025), «금지된 융합: 서드임팩트»(pie, 2021)을 열었고, 단체전 «Letting go»(여주미술관, 2026), «Loading»(A/D gallery, 2023), «Hybrid Visions: Searching for Digital Era»(lupo lupo lupo, 2023), «고고 로맨틱 걜즈»(공간 사일삼, 2022), «Stars in your eyes»(Plan x, 2022)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