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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有印良品 유인양품4-일체유물조一切唯物造

Writer: 정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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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의 ‘붉은 커튼’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영화를 추천하면, “넷플릭스에 있어?”라는 질문이 돌아오곤 합니다. 이런 흐름 한편에서 묵정동의 한 귀퉁에는 영화를 소중한 ‘유물(遺物)’로 대접하는 새로운 공간이 생겨났어요. 공간 ‘유물론(唯物論)’은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소품을 판매하거나 영화를 상영하며, 운영자 문동명의 오랜 영화 사랑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붉은 커튼 너머 빼곡히 들어찬 오리지널 포스터와 팸플릿은 상품이기에 앞서 영화를 둘러싼 물리적 대상이 여전히 가치 있음을 증명하는 흔적이기도 하죠.
 정우영은 단순히 새로운 영화 공간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물론’의 풍경을 단서 삼아 우리가 영화라는 대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방법론을 제안합니다. 디지털 플랫폼이 영화와 관련한 경험까지 집어삼킨 지금, 역설적으로 영화의 물질성을 되짚어가며 영화를 사랑하는 또 다른 방식에 관한 유물론의 이야기를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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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에 진열된 포스터들

유물론(唯物論)이 인게이지먼트(engagement)만큼 일반 상식이던 때가 있었다. 인게이지먼트가 ‘SNS 사용자의 콘텐츠 참여율’이 아닌 ‘사회/정치 참여’를 가리키던 냉전 시대였다. 유물론은 인간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지 않고 존재(물적 토대)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공산주의 진영의 인식론이었다. 그만 단어는 시효를 다했을지언정 진단은 살아남았다. 예컨대 빈곤을 개인의 나태가 아닌 구조적 문제로 보는 지금의 관점이 유물론의 유산이다. 그리고 지난 3월, 공간 ‘유물론’이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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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구석 붙어있는 영화 팸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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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구석 붙어있는 영화 팸플릿

‹트윈 픽스›의 레드룸이 떠오르는 붉은 커튼이 문을 마주보고 있다. 나머지 세 개 벽면에는 영화 포스터가 가득하다. 바닥과 천장 모서리 곳곳에도 영화 팸플릿이 책갈피처럼 돌출 됐다. 하지만 홀린 듯 공간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문득 당황할 수 있다. 종목이 영화라는 건 알겠는데, 도무지 업태가 보이지 않는다. 안내문도, 제품 설명도, 가격표도 없다. 유물론의 대표 문동명은 말한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드나드는 ‘만만한 갤러리’였으면 했어요. 권위 없이 구경하는 공간이랄까요. 찾아오시는 분께 보는 재미를 드리고 싶었어요. 제 소장품까지 여기저기 배치한 건 과시가 아니라 저도 이런 영화, 이런 이미지를 좋아한다는 고백이에요. 물건을 파는 곳이기 전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의 방에 들어온 기분을 느끼셨으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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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에 진열된 포스터들

한국에서 특정 분야를 상품으로 다루는 방식은 두 갈래다. 그 분야와 관련된 상품을 최대한 많이 소개하고 판매하는 것. 영화라면 영화 굿즈, 관련 서적, 음반, 포스터를 망라한다. 또 하나는 고졸한 취향을 전시해 그 가치를 강조하고 그만한 가격을 덧붙여 판매하는 것. 공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리가 있는 방식인데, 영화 분야에 서는 후자의 시도가 꽤 빈약했다. 영화가 대중매체라는 것에 너무 쉽게 매몰됐다. 그동안 한국에서 영화는 그 사망 선고가 가장 인기 있는 주제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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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에서 선보이는, 대표 문동명의 개인 콜렉션

그가 영화 매체 기자로 일하며, 또 해외 출장과 여행을 다니며 모은 영화 오리지널 포스터와 팸플릿이다. “품질이 좋을 가능성이 높고, 과거의 것일수록 절대에 가까워진다.”라는 믿음으로 오리지널을 고집해 왔다. 그러나 유물론에는 판매하지 않는 포스터와 팸플릿도 많다. 또한 업태가 소매업이 맞는지를 되묻고 싶을 만큼, 매주 영화를 상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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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에 진열된 포스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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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블루문› 공식 트레일러

오늘(3월 19일)은 영화 ‹블루문›의 상영이 있었다. 에단 호크가 ‘인생 연기’를 펼친 것으로 회자됐던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걸작이나 한국에서는 극장 개봉 없이 2차 시장으로 직행한 작품이다. 미국 팝과 재즈 스탠더드가 확립된 1920~50년대 ‘그레이트 아메리칸 송 북 시대’에 대한 국내 관객의 부족한 이해, 한 공간에서 대사로 모든 것을 채우는 완고한 영화 형식 탓이었을 것이다. “제가 좋아하는 것, 근래 스크린에서 볼 수 없었던 것, 모객이 될 만 한 것을 틀어요. 세 번째는 문 연 지 얼마 안 됐으니, 기왕이면 공간을 홍보하고 싶어서요. 가게가 어느 정도 알려진다면 마지막 기준은 버리고 싶고, 버려야 정말 귀중한 공간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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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덴 형제의 사인이 담긴 ‹로제타›의 일본판 팸플릿

문동명의 이 관점 덕분이겠다. 유물론에서는 상품보다 작품이 먼저 보인다. 그는 “내가 팔게 될 것도 일종의 유물(遺物)일까?”하고 생각하다가 이 공간의 이름을 정했다. 영화가 유물인지 아닌지 명확히 답할 수 없는 시대다. 지금 누군가에게 영화를 추천할 때 가장 먼저 돌아 오는 말은 “넷플릭스에 있어?”다. 영화는 “과거부터 내려오는 가치 있는 뭔가”가 아니라 OTT에 없으면 그만인 매체다. 하지만 그는 꼭 회의적으로 보지 않는다. “정말 깊고 다양하게 영화를 보는 젊은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그 친구들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길 바라요.” 콜렉티오, 지하실처럼 온라인 시네마테크가 하나둘 생겨나고 있는 지금, 유물론의 새로운 방법론이 반갑다. 답십리 고미술 상가에 있어서 유물이 아니라,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이 아끼고 돌봐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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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상영 시에만 나타나는 의자와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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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상영 시에만 나타나는 의자와 스크린

다만 영화를 유물(遺物)로 접근하는 것은 단지 한 가지 제안이다. 예컨대 바이닐을 사는 사람이 음악을 더 사랑한다 말할 수 없고, 음악을 사랑하는 방식은 각자 다양하지만, 음악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실재적인 시도가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이 유물(遺物)에서 비롯된다고 믿는 유물론(唯物論)이다. 문동명은 말한다. “지금으로선 (유물론을 만든) 2026년이 제가 영화를 가장 좋아한 해가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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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 중인 팸플릿들

Writer

정우영 에디터(@youngmond)는 『Dazed & Confused Korea』와 『GQ Korea』에서 일했다. 서울 인기 페스티벌, 우주만물, 에코서울, 버드엑스비츠를 기획하고 운영했다. Youngmond로 믹스 테이프 『태평』을, Fairbrother로 앨범 『남편』을 발매했으며, 정우영으로 책 『버리기 전에 듣는 음악』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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