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기 어린 싱크대와 수전에 걸린 고무장갑, 살짝 틀어져 등을 보이는 세재. 일상의 장면으로 우리는 그곳에 서 있던 사람과 삶을 바로 떠올릴 수 있죠. 연신내 유지원이 다루는 물건은 평범하고 무용하지만 그래도 우리와 가까운 존재입니다. 이불 빨래를 미루는 이유가 이불과 교섭하는 과정이 불편해 회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연신내 유지원은 비슷한 마찰과 불편을 야기하는 재료와 방식을 선택하고 작업해 왔습니다. 자신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일상의 작은 호불호에서 시작한 작업은 이제 자신을 관찰하는 일로 번지죠. 각자의 일상에서 어떤 물건과 이상한 힘겨루기를 하는 것 같은 상상을 할 때 오히려 자기 마음과 더 가까워집니다. 연신내 유지원의 작업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힘을 BE(ATTITUDE)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이사 갈 용기›, 2025, 합성섬유에 아크릴, 건조대, 가변 설치.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저와 함께 생활하며 일상을 꾸려 가고 있는 물건을 회화와 글쓰기를 포함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록하고 전시하고 있습니다. 기록자로서 기록되는 대상의 환경이 보다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기록을 통해서 그들과 저의 관계는 나아질 수 있는지, 그 결과 저는 어떻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학부생 때 작업실을 이사하면서 버려야 할 물건이 많았습니다. 그중 과제로 제작한 몇몇 물건은 버리기가 매우 망설여졌는데요, 매년 제작되고 버려지는 수천 개의 과제물 중 하나인 제 물건과 매년 배출되는 수천 명의 미대생 중 한 명인 제가 교차되어 보인 것이 이들을 버리기가 어려웠던 이유는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이들 물건이 버려지지 않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생각해 봤는데 이것들이 작품이 되도록 주변 환경을 바꿔주면 되겠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하나의 물건을 잘 가꾸고 기록하는 작업을 해 봤는데요, 그게 꽤 큰 성취로 다가왔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저와 유사한 환경에 놓인 혹은 저와 함께하는 물건의 처우 개선을 위한 기록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마이 리틀 프린터› 프로젝트, «집안일들: 어떻게 그것들과 살 것인가», LDK, 사진 Studio Stack.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몇 달 전까지는 런던의 베란다가 딸린 집에서 생활하며 작업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집안일을 하면서 집안일과 관련한 작업을 제작해 왔습니다. 얼마 전 연신내로 다시 이사왔는데요, 지축기지가 보이는 친구 사무실 한 편을 작업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아직 사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열심히 적응 중입니다. 편의점조차 7분 정도 걸어가야 나올 정도로 주변에 사무실밖에 없어서 요즘은 왜 저는 꼭 커피를 마셔야만 생활이 가능한 개체인지, 어떻게 정기적인 커피 조달이 가능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왜 이렇게, 이런 식으로 살고 있지 하는 질문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가볍게는 어디서 받은 선물이나 주운 물건을 모은 ‘나만의 컬렉션 리스트’가 몇 개 있어요. 가끔 이들을 감상하면서 왜 아직도 버리지 않고 여기 두었을까 고민하기도 하고요. 조금 무겁게는 집이나 작업실에서 뭔가 불편한 상황이 있으면, 그 원인을 찾아보는 글을 작성하기도 합니다. 이런 생활 속 비평을 쌓아두다 보면, 그중 몇몇은 좀 더 열심히 고민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광어와 우럭›, 2024, 플라스틱 접시에 아크릴, 에폭시, 38 × 20 × 3 cm
‹송어›, 2024, 플라스틱 접시에 아크릴, 에폭시, 38 × 27 × 3 cm.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자기평가를 쌓아 가는 방식으로 작업을 제작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왜 저는 커피를 마셔야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어떤 요인이 저와 커피의 생활 방식을 방해하거나 도와주는지를 정리합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면, 이와 비슷한 경험을 유발하는 물질이나 방식이 있었는지를 살펴봅니다. 그렇게 선택한 소재로 프로젝트의 첫 작업을 진행합니다. 그 후 작품에서 왜 커피를 마셔야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지, 그 이야기가 드러나는지를 검토합니다. 만약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설명을 보조할 다른 작업(회화, 설치, 조각, 글 등)을 제작합니다. 혹은 그 작업이 커피가 아니라 왜 포도를 싫어하는지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되었다면, 주제를 수정해 포도를 싫어하는 이유를 보완할 다른 작업을 제작하기도 합니다. 어떻게든 작업이 어떤 이야기를 충분히 시사하고 있다는 판단이 설 때까지 보조 작업과 설치 방식을 보완해 나갑니다.
‹이불속 채우기 #5›, 2025, 진공 압축팩, 혼합재료, 90 × 60 cm, 사진 Studio Stack.
‹이불보를 씌우는 용기› 연작, «집안일들: 어떻게 그것들과 살 것인가», LDK, 사진 Studio Stack.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작년에 서울에서 소개한 개인전 «집안일들: 어떻게 그것들과 살 것인가»(LDK, 2025)의 연장선에서 최근까지 저는 집안일과 관련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의 일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행동을 함께하는, 그리고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의 관계를 어떻게 더 긍정적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 그 이야기를 몇 년째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상을 개선하기 위한 질문을 만들고, 그 질문의 구조를 회화와 전시 제작에 활용할 방안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 다시 살펴보고 있는 작업은 작년에 일단락했던 ‹이불보를 씌우는 용기› 시리즈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불 빨래를 미루는 이유가 어쩌면 이 행동이 저와 이불의 협업이기 때문에 이불과 교섭하는 과정이 불편해서 회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물건 간 마찰을 협업으로 다루고자 했는데요, 비슷한 마찰과 불편을 야기하는 재료와 방식을 선택해 기존 시리즈를 제작해 왔습니다. 다시 돌아보니 부연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 요즘은 이 프로젝트의 후속 작업을 위한 자료 수집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빨래를 할 용기›, 2025, 합성섬유에 아크릴, 건조대, 가변 설치, 사진 Studio Stack.
‹빨래를 할 용기›, 2025, 합성섬유에 아크릴, 건조대, 가변 설치.
『이불보를 씌우는 용기』, 2025, 56쪽, 사진 Studio Stack.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실제로 지금 저에게 시급한 문제를 작업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불 빨래가 옛날보다 편리해진 이유는 이불 빨래를 직접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기업의 제품 개발에 반영됐기 때문이잖아요. 이처럼 제가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목소리를 더욱 낸다면, 스스로 모든 일을 마무리해야 하는 개인들에게 약소하게나마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최근 작업에서 만족스러웠던 점과 불만족스러웠던 점이 궁금합니다.
전에는 제 생활 방식이 다른 사람들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와 제 물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 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올해 들어 제 예시가 어떤 사람이나 물건도 대변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하면 이 프로젝트를 여러 사람의 일상에 적용할 수 있는 무언가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 그런 고민이 큽니다. 한편으론 제가 쓰고 있는 재료가 제대로 선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런 의심도 몇 년째 이어가고 있고요.
‹스펀지›, 2025, 폴리카보네이트에 아크릴, 29.7 ×.84 cm.
‹스펀지들›, 2025, 플라스틱 접시, 도마, 아크릴, 44 × 34 cm.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을 여쭤봐도 될까요?
세 끼를 꼭 챙겨 먹고, 최대한 규칙적으로 생활하려고 합니다. 매일 11시 전에 작업실에 도착해 이메일과 메신저를 확인하고, 하루 일정을 세우는 것만큼은 꼭 지키고 있습니다. 운동을 좀 해야 한다고 해서 요즘은 자전거도 타고 있습니다.
‹버스 LED 행선판›, 2026, 폴리카보네이트에 아크릴, 44 × 33 cm.
요즘 작가님이 관심을 가장 많이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버스를 탔는데, 버스 내부 전광판의 영문 서체가 좀 특이한 거예요. 그래서 찾아보니 김중태 원장이 만든 ‘버금멋꼴3’ 혹은 ‘영문둥근모꼴’의 초기 서체라는 걸 알게 됐어요. 30년 전에 만들어진 서체라 비트맵 파일만 있더라고요. 그래서 근 한 달간 이걸 프린트나 웹용으로도 사용하기 좋게 조금씩 수정하면서 TTF 파일로 만들어 보고 있어요. 언젠가 쓰고 싶은 날이 올 것 같아서이지요. 어쩌면 다음 프로젝트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겠네요.또 한편으로는 좀 더 다양한 회화 매체를 사용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각의 경우, 재료가 원래 지니고있는 서사를 엮어 작업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더러 있잖아요. 회화도 재료와 기법을 선택하는 과정 자체가 작업이 될 수 있도록 제 선택지를 확장해 보려 합니다.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생활 면에서 외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다 보니 집안이나 컴퓨터, 일정을 정리하는 걸 좋아합니다. 깨끗하게 정리하는 건 아닌데, 제가 정한 순서대로 뭔가가 진행되는 걸 볼 때 가장 큰 성취감을 느낍니다. 작업도 이렇게 정리정돈을 하는 느낌으로 기획하고 제작하는 것이죠.
‹밤샤워 #25 & 4›, 2024, 폴리카보네이트에 아크릴과 에폭시, PE, PVC, 각 84 × 29.7 cm.
‹밤샤워› 연작, «Hazy Horizons», Noho Showroom, 사진 Xiong Wei.
‹밤샤워 #17›, 2024, 폴리카보네이트에 아크릴, 에폭시, 84 × 29.7 cm.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매일 일어나 집안일을 하고, 밥 먹고, 작업실에 와서 작업을 시작하기까지 무수한 고비가 있어서 매일이 슬럼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과의 시작 시간과 마무리 시간을 매일 정해 두려고 합니다. 좀 더 빨리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무슨 작업을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는 보통 요즘 근황과 최근에 얻은 자료를 검토하면서 제가 어떤 것에 애착을 갖고 있는지, 어떤 것에 불만을 갖고 있는지 찾아보고 있습니다.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제 한정으로는 무엇 혹은 누구와 함께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에 가장 예민해지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관찰하고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대신 풀어 나가는 것이 어쩌면 매우 오만한 행동으로 비칠 수도 있잖아요. 또 한편으로 제가 이렇게 기록하는 역할을 수행해도 될 만큼 윤리적으로 올바른 사람인지도 모르겠고요. 그래서 적어도 제가 관찰하는 사람 혹은 물건이 오독되지 않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조사를 진행하려 하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어디에 서 있는지 잊지 않도록 계속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이 리틀 프린터› 프로젝트, «Entwined Intimacies», hArtlane.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아직 저도 그 노하우를 알아내려고 노력 중입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어떤 작업이나 제품을 보면, 이 사람 이거 하면서 재밌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해요. 그렇다고 해서 누구에게 엄청 기억되는 사람으로 남고 싶은 건 또 아닌 것도 같네요.
Artist
Jiwon Yoo Yeonsinnae 연신내 유지원(@yeonsin_nae)은 생활 속 물건과 사건을 기록하는 회화 프로젝트를 제작하며, 이를 위한 부수 작업으로 설치, 조각, 글 작업을 병행하기도 한다. 개인전 «집안일들: 어떻게 그것들과 살 것인가»(LDK, 2025)와 «Doxie Pipey»(Roha Gallery, 2025), «키위와 연신내»(공간 루트, 2022)를 열었다. «RBA Rising Star»(The Royal OverSeas League, 2025), «작은 거인들»(구하우스, 2025), «Filthy Fox Auction Club Vol.III»(Sarah Kravitz Gallery & The Old Church, 2024)를 포함해 다수의 프로젝트와 그룹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