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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과정에 집중합니다.
[인터뷰/인터뷰어/인터뷰이]는 70년대 이후 해외에서 거주하고 활동해온 한국 디아스포라 여성 현대미술작가의 스튜디오와 작업 장소를 방문하여 현장성과 대화성을 결합한 인터뷰를 수행하는 기록 프로젝트입니다. 다수의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들이 참여하는 인터뷰 기록을 영상과 텍스트로 퍼블리싱해서, 한국 미술사 서술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해외 거주 여성 작가들의 위치를 새롭게 맥락화하고, 다양한 독자와 관객이 접속할 수 있는 다층적 지식·감각 네트워크를 구축 합니다.
㈜모은발 프로덕션의 프로젝트 ‘멀리뛰기 프로젝트’ 중 김명희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생성된 아카이브입니다. 아래로 스크롤하면 전체 인터뷰 영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Kyoo Lee – 김명희 인터뷰
2026.05.11. 월. 오후 10:45
Kyoo Lee(일명 Q)는 뉴욕시립대학교(CUNY) 철학과 교수이자 『philoSOPHIA: A Journal of transContinental Feminism』의 편집장으로, 철학자이자 작가, 비평가,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큐레토리얼 활동으로는 2022년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 한국관(김윤철 작가의 «Gyre») 편집 매니저, 2024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개관 30주년 특별전«모든 섬은 산이다(Every Island is a Mountain)»(한국문화예술위원회, 1995~2024) 자문과 협업, 발표, 토리노 동양미술관(Museo d’Arte Orientale) 객원 큐레이터(샤머니즘실, «달에 사는 토끼(The Rabbit Inhabits the Moon)»,2024~2025) 등이 있다. 또한 베니스의 마이크로클리마(Microclima)와 함께 시작한 ESTUAR 시리즈(2023~)의 창립자이기도
Kyoo Lee: 다도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 내주시는 차를 (그림 속 손님의 잔을 들어올리는 제스처와 함께) 기쁘게 마실게요. 저를 기다려 주신 것 같네요.
김명희: “네, 손님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요.”
Kyoo Lee: 상상 속의 손님이었겠지요, 맞아요!
제가 선생님의 그림을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초기 주요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특정 인물상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처음 보았던 아주 초기의 작품 중 한 작품에서도 나타나는데, 한 소녀가 등장하잖아요. 그 인물이 소녀인지, 여인인지, 가정주부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어요. 그 인물상에는 시간의 경계가 열려 있는 듯한(open time temporality) 아주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분명 소녀 같은 면모가 있지만 일반적인 인물화와 달라요. 그래서 무척 관심이 갔습니다.
그 인물이 다양한 버전의 그림 속에서 계속 변주되며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제가 보았던 건 김치를 담그는 인물이었죠, 맞죠? ‹김치 담그는 날(Kimchi Making Day)›이라는 작품이요. 그런데 지금 이 그림 속에서 차를 달이고 있는 인물도 아주 유사한 형상으로 나타나네요. 오늘 저는 이곳에 대화 파트너이자 손님으로 와 있는데, 늘 복제본으로만 보던 이 그림을 실제로 보게 되어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저는 작가님의 작품 속에 언제나 둘 이상의 존재가 머무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두 개의 잔이 존재합니다. 이미 차를 우려내어 잔에 담으셨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 그림 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두고 선생님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아주 흥미로운 디테일이 가득한데, 우선 이것부터 여쭙고 싶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먼저 지금 여기에 가상으로 함께하고 있는 이 보이지 않는 상상 속 손님이 누구인지 묻고 싶습니다. 부재하는 듯 존재하고 있는 그림 속 이 인물은 누구인가요?
김명희: “다도에서 가장 높은 경지는 오직 단 한 사람과 함께, 즉 둘이서 차를 마시는 것이라고 해요. 그렇기에
이 자리에는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초대하고 싶었어요.”
Kyoo Lee: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특유의 친밀감이 느껴지네요. 둘만의 내밀한 감정 말이죠.
김명희:“중국 명대의 유명한 다도 격언 중에 평론가님이 잘 아실 만한 구절이 있어요. 다도에는 여러 단계가있지만, 두 사람이 마시는 단계가 가장 고결하다는 내용이지요.”
Kyoo Lee: 아름답네요, 정말 아름답습니다.
Drinking Tea, 2004, Oil pastel on chalkboard with LCD monitor, 47 1/4×90 1/2 inches(120×230 cm)
김명희: “네. 서로 다른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Kyoo Lee: 한자어로 표현하면 중심이나 과녁을 뜻하는 ‘중(中, zhong)’ 자와도 통하겠네요.
김명희: “사실 저는 ‘경첩’이 한자어인 줄 알았는데, 구글에 찾아보니까 순우리말이더라고요.”
Kyoo Lee: 한국어 단어였군요, 흥미롭습니다.
김명희: “어감이 꼭 한자어처럼 들리는데 말이죠.”
Kyoo Lee: 경첩에 관한 선생님의 말씀은 화면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중력, 그러니까 ‘중심이 잡힌 느낌(centeredness)’이라는 주제와도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중심은 아주 흥미롭게도 ‘창조적인 차분함(creative calmness)’을 자아내고 있네요.
김명희: “맞아요, 존재의 수직선(plumb line, 다림줄) 바로 그 중심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죠.”
Kyoo Lee: 정확합니다. 이 그림을 보아도 매우 흥미로운 중심점이 보여요. 선생님의 신체 표출은 아주 차분하고 올곧게 서 있고, 그림 전체의 분위기가 ‘창조적인 차분함’과 ‘중심 잡힌 안정감’을 전달하죠. 그러면서도 화면 밖을 향해 뻗어 나가는 거칠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공존하고 있어요. 그리고 말씀하셨다시피 이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김치 담그는 날›에서와 같은 종류의 구조적인 패턴이 발견됩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림 속에서 차를 바라보며 저를 아주 소중한 찻자리에 초대해 주시는데 저로서는 무척 영광입니다. 이 그림 속에는 미술사적으로 주목해야 할 특징(art historical pointers)도 아주 많이 숨어 있어요. 아까 성모 마리아 도상을 언급하시면서 아기를 안고 있거나 신의 계시(수태고지, annunciation)에 귀를 기울이는 성모 마리아가 바로 그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는 태도를 말씀하셨잖아요.
Preparing Kimchi, 2000, Oil pastel on chalkboard with LCD monitor, 47 1/4×94 1/2 inches (120×240 cm)
Kyoo Lee: 외부의 시선, 즉 관객의 시선과 직접적으로 부딪히지 않는 이 시선 처리가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예컨대 ‘프레임 속의 프레임’이라는 또 다른 틀의 존재는 우리가 초기 근대 회화나 르네상스 회화에서 자주 보던 기법이기도 합니다. 벨라스케스(Velázquez)의 그림처럼 말이죠.
김명희: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한 예수 그리스도 그림 말씀이시죠? 평론가님이 처음 보셨다고 한 그 드로잉의 모티브가 정확히 거기서 온 거예요.”
Kyoo Lee: 아, 그렇군요! 정말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일종의 상호 참조(cross-references)가 일어나는 거네요.
김명희: “수많은 미술사적 상호 참조가 얽혀 있죠. 옛것과 새것, 동양과 서양이 모두 하나로 결합되어 하나의 서사(narrative)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Kyoo Lee: 네, 맞습니다. 지리적·역사적 경계가 서로 만나며 양방향으로 상호작용하고 있어요. 우리가 풀어내야 할 예술적 층위가 정말 많습니다. 그리고 화면 공간을 분할하는(partition) 방식도 인상적입니다. 다소 표상적인 접근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일상적인 가재도구를 배치한 방식은 마치 네덜란드 정물화나 세잔(Cézanne)의 그림을 연상시킵니다. 그런 거장들의 전통을 은근히 오마주하는 듯한(art historical winking)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그리고 이 그림 속 탁자는 자신이 지닌 고체로서 중심적 물질성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테이블 표면이 마치 미끄러지듯 건너가는 드넓은 바다나 수면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빛을 다루는 방식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이 그림의 경우, 그것은 모니터 화면의 전자기적인 빛, 일종의 액체 같은 유동적인 오브제입니다.
김명희: “(테이블 위에 비친 모니터 스크린의 반영을 가리키며) 그건 화면 속 비디오 영상의 빛이 반사된 거예요, 맞아요. 그 반사된 빛을 거기에 집어넣음으로써 이 그림 속 요소를 온전히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어요. 테이블 위에 꽃이나 다른 요소를 그려 넣을지 말지 결정하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결국 긴 고민 끝에 이 반사된 빛을 넣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죠.”
Kyoo Lee: 이 순간은 아주 아름답습니다. 테이블이 마치 바다처럼 변하여 경계를 횡단하는 듯한 느낌을 시각적으로 강조하셨으니까요. 마치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듯 에너지가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가로질러 가고, 앞뒤로 출렁이는 파도 같은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내셨어요. 이를 통해 엄청나게 매력적인 긴장감의 순간을 창조해 내신 겁니다.
매우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사용하시면서도 이를 아주 현대적이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결합하셨어요. 격자무늬 (grid)를 보면, 전통적인 칠판을 사용하셨는데, 이들 격자 선은 분명 구도를 잡으실 때 의도하신 결정이었겠죠?
김명희: “맞아요. 실제로 화면 위아래에 줄자(tape measure) 눈금이 표시되어 있거든요. 이들 눈금 덕분에 이 칠판 표면이 평평한 공간(flat space)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지죠.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죠?
나리, 1994, Oil pastel on chalkboard 47 1/4×47 1/4 inches (120×120 cm)
Kyoo Lee: 그렇군요, 그렇네요.
김명희: “만약 그 줄자 눈금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관객은 그 너머로 공간이 확장되는 환영을 상상했을 거예
요.”
Kyoo Lee: 아름다운 장치입니다. 또 하나의 모호성이 생겨나는 지점이네요. 왜냐하면 선생님은 이 칠판을 빛이 투영되는 반사 표면으로 바꾸어 놓으셨고, 그 위에 배경 속으로 사그라드는 듯한 글자(letters)를 얹으셨잖아요. 그래서 아주 묘한 깊이감을 만들어 내셨어요.
김명희: “맞아요, 분명 어떤 차원(깊이감)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이 줄자가 우리에게 이곳이 평평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
Kyoo Lee: 맞아요. 관객이 그 본질을 절대 놓치지 않게 만드시는군요. 일종의 연대기적 시간(chronological time) 같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작품 속 시간은 여러 겹으로 레이어드되어 있어요. 시계 시간(clock time)도 존재하고요. 선생님처럼 프로 숙련자 수준으로 경계를 오가는 방랑자(pro ambulant)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스케줄을 매우 정확하고 꼼꼼하게 관리해야 하며, 일정을 끊임없이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김명희: “그러려면 아주 많은 경첩(hinges)이 필요하겠지요.”
Kyoo Lee: 그러니까 이것들은, 말하자면 그저 단순히 열려 있는 막연한 대양(바다)의 공간이 아니라 마치 항해할 때처럼 명확하게 ‘지도가 그려진(charted)’ 공간을 나타내는 셈이군요.
그러면서 추상 회화에서 격자선(grid lines)을 사용하는 방식과 작가님이 그것을 얼마나 가볍고 섬세한 터치로 그 위에 겹쳐 놓으셨는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인물이 어떻게 갇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갇혀 있지 않은지(contained and not contained)를 보려면 정말로 직접 작품을 마주해야만 해요. 그것은 또 다른 종류의 모호성이죠.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늘 밖에 있는 느낌이니까요. 이 인물은 격자 안에 갇혀 있는 듯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요. 정작 인물 자신은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에 깊이 몰입해 있습니다.
이 생산의 행위는 출발지나 목적지 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언제나 그 ‘사이(in between)’에 존재합니다. 이 그림을 보면 볼수록 소위 현대성을 대변하는 ‘디지털적 시공간’과 이 공간에 실재하는 ‘아날로그적 신체’가 서로 교차하고 맞물리는 방식에 매료하게 됩니다. 관객을 아주 다정하게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말이죠.
Preparing Kimchi 09, 2009, Oil pastel on chalkboard, 45×64 inches (114.3×162.6 cm)
Kyoo Lee: 이 인물은 거창한 물질적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아요. ‘내가 여기 존재한다!’라며 자아를 강하게 내세우는 선언 같은 게 없습니다. 그 대신 언제나 무언가를 대접하고(serving), 돕고, 스스로를 섬기고 있죠. 그리고 이 화면에유령처럼 흘러드는 정체 모를 타자, 즉 ‘유령 손님(ghost guest)’이 등장합니다.
이 회화적 공간에 이미 비디오 영상의 이미지가 들어와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유령 같은(ghostly) 느낌을 줍니다. 꼭 다른 세계로 통하는 창문처럼 말이죠.
김명희: “맞아요. 실제로 저는 제 그림 속 인물을 일종의 ‘환영(apparitions)’으로 여깁니다.”
Kyoo Lee: 환영적인 존재군요. 아주 멋진 표현입니다.
내평리 스튜디오에서 김명희. 장우진 촬영. 2026
김명희: “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이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Kyoo Lee: 환영이라니, 정말 유령 같은 존재가 맞네요.
김명희: “네, 제가 붓질을 몇 번 툭툭 던졌기 때문에 어느 순간 화면에 쓱 나타났지만, 동시에 언제든 다시 사라
질 수도 있는 존재죠.”
Double Mirror, 2026, Oil on chalkboard with LCD monitor, 44 1/4 × 68 1/2 inches (112.5 × 174 cm)
Kyoo Lee: 그렇다면 선생님이 미술 작업을 하는 그 결정적 순간에 이 덧없는 순간을 붙잡아 매어두는(anchoring) 역할은 다름 아닌 ‘만드는 행위(making)’ 그 자체이겠군요.
김명희: “아주 철학적인 통찰이네요.”
Kyoo Lee: 실제 작품을 보니 선생님의 붓질이 지닌 힘이 더 명확히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화면에 적힌 글, 이 텍스트는 무엇인가요? 혹시 ‹훈민정음› 같은 건가요?
김명희:“그건 여성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유교적 행동 규범을 담은 오륜행실도예요. 18세기의 저작입니다.”
Kyoo Lee: 농담이시죠, 이거 지금 장난하시는 거 맞죠?
김명희: “지워내려고 애쓰는 중이에요. 하지만 아직 완전히 다 지워내지는 못했죠.”
Kyoo Lee: 아니, 그러니까… 이걸 대체 이렇게 다루고 계시니 말이에요! ‘올바른 여성’이 되는 법, 어떻게 행동해야 ‘올바른 여성’다운 것인지, 그 텍스트를 그대로 펼쳐 놓았으니, 명확하게 텍스트로 강제하는 격이잖아요. 확실한 격자선(grid line)처럼 모든 것이 자로 잰 듯 딱 들어맞아 있어요. 저 직선 좀 보세요. 심지어 반사되는 빛조차 정직한 직선이잖아요, 그렇죠?
김명희: “텔레비전 화면의 빛이 어떻게 반사되는지 아주 오랫동안 관찰해야 했어요.”
Eve of 3.1 유관순, 2020, Oil pastel on chalkboard with LCD monitor, 48.0 × 72.0 in (122 × 183 cm)
Kyoo Lee: 정확히 맞아요. 하지만 그것은 대개 선이 아니라 정말 ‘색채의 유희’로 이루어진 이들 인물과 공존하고 있죠, 그렇죠? 그리고 전 그게 정말 흥미로워요. 그림을 보면, 이들 인물과 머리카락 같은 것들이 배경 속으로 물러나서 사라지잖아요. 우리가 말하듯 어느 쪽이 머리카락이고, 어느 쪽이 ‘칠판’인지 더는 알 수 없게 되죠, 그렇죠? 그래서 그런 번짐이 일어나는데, 이건 일종의 바로크(Baroque)적인 특성 같아요.
그리고 여기 빛의 유희가 있습니다. 일종의 조명 같은 감각이죠. 이 스포트라이트가 조명을 비추어 선생님이 그린 인물의 형상성(figurativity)을 부각하지만, 그것은 어떤 선화(line drawing)의 방식으로 그려지지 않았어요. 모두 빛과 어우러진 색채의 유희 같습니다. 이를 두고 혹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김명희: “금속 촛대에 녹색이 반사되는 것을 볼 수 있고, 촛불 또한 아래쪽에 아름답게 반사되고 있어요. 그건 전부 반사광이죠. 바로 빛의 유희예요.”
Kyoo Lee: 멋지네요. 방금 알아챈 건데, 화면 전체에 초록색이 변주되고 있군요. 짙은 초록색이 감도는데 아마 ‘녹차’를 시각화하신 게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칠판 고유의 어두운 초록빛과 어우러지면서 빛의 유기적인 순환이 일어나고 있어요. 문득 선생님 작업실 입구에서 보았던 현판이 생각나네요.
‘곡명’이라는 이름이었죠? 음악적인 울림, 음악적인 밝음(musical brightness)이라는 뜻이지요.
김명희:“처음 그분이 저에게 그 이름을 지어주셨을 때는 왜 그런 이름을 주셨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Kyoo Lee: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정교하고 복합적인 밝음(brightness)의 유희가 저에게는 매우 음악적으로 다가옵니다.
김명희: “제 별명(곡명)을 해석하도록 도와주셨네요. 방금 든 생각인데, 어쩌면 그 스님은 이미 빛이 파동이라는 걸 알고 계셨던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물리학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사실이지만, 그분은 미리 직감하셨을지도 모르죠.”
Kyoo Lee: 이 작품을 다른 여러 장소에서 더 많이 보여주셔야 해요. 사람들이 와서 꼭 봐야 합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실제 작품을 통해 이 작업을 이렇게 깊이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정말 놀라운 특권이에요.
김명희: “평론가님의 비평(statement)이 정말 아름답네요.”
1990년대 내평리 스튜디오 장면. 작가 제공
Kyoo Lee: 비디오 이야기를 마저 이어가 보죠. 정말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김명희: “슬픈 건, 영상 속 저 산의 나무가 지금은 다 벌목(cut down)되어 없어졌다는 사실이에요.”
Kyoo Lee: 와… 그 사실이 오히려 이 작품을 한층 더 경이롭게 만드네요. 사라진 풍경의 흔적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현재로 남아 있는 셈이니까요.
이 비디오 자체를 놓고 여쭙고 싶은데, 화면에 움직이는 이미지로 등장하는 저 거대하고 울창한 숲과 나무, 언덕 영상은 대체 언제, 어디서 촬영하신 건가요?
김명희: “15년도 더 된 영상이에요. 내평리 작업실 창가에 서서 앞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찍은 것이죠.”
2010년 경 김명희가 촬영한 내평리 자작나무 비디오. 작가 제공
Kyoo Lee: 세상에, 정말로 집 창문 너머로 보이던 풍경을 그대로 담으신 거군요! 아, 이제 이해가 됩니다.
김명희: “그 당시 제가 소니(Sony) 비디오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줌(zoom) 기능이 아주 기가 막히게 좋았어요.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산이었는데, 줌을 아주 깊숙이 조절해서 촬영할 수 있었죠. 요즘 기술로는 오히려 그런 특유의 아날로그적인 질감이 안 나와요.”
Kyoo Lee: 그러니까 선생님은 따뜻한 방 안 창문 뒤에 계셨고….
김명희:
“네. 창문 안쪽의 내밀한 세계에 있었죠.”
Kyoo Lee: 카메라 줌을 멀리까지 조절하신 거군요.
김명희:
“네, 줌을 당길 수 있는 최대치까지 당겨서 찍은 풍경이에요. 그리고 영상을 의도적으로 아주 느린 슬로모션(slow motion)으로 편집했어요. 그날은 바람이 아주 심하게 부는 날은 아니었지만, 그 고요하고 잔잔한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거든요.”
Kyoo Lee: 딱 이 정도의 느린 속도로 말이죠.
김명희: “조용하게 흐르도록….”
Kyoo Lee: 소리 없이 움직이는 이미지만 남겨두셨군요.
이걸 보니 문득 축구에 관한 격언이 생각나네요. 미국에서는 사커(soccer)라고 부르는 축구 말이죠. 누군가 경기장의 거친 소음을 모두 제거하고, 오직 선수들의 움직임에만 집중한다면 ‘축구는 노동자 계급의 발레다’라고 했답니다.
김명희: “아, 오직 순수한 움직임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는 거군요.”
Kyoo Lee: 네, 그걸 슬로모션으로 돌려보면 한 편의 아름다운 무용이 되거든요. 거칠고 격렬한 축구가 어떻게 우아한발레로 치환되는지, 그런 이야기죠. 선생님의 이 영상 작업 역시 우리가 흔히 보는 평범한 자연 풍경이나 아주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을 비디오 매체를 조작해 느리게 늘려 놓음으로써 관객에게 신선한 충격과 기묘한 시적 타임랩스를 선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완벽하게 선생님의 특정 장소와 밀접하게 연결된 아카이브이기도 하고요.
김명희: “사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 산의 나무가 최근에 전부 다 잘려 나가 버렸어요.”
Kyoo Lee: 그렇기 때문에 이 영상은 이제 지구상에서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이름 없는 어느 과거의 결정적 순간을 영원히 기록해 둔 소중한 ‘아카이브 필름(archival footage)’이 된 셈입니다.
김명희: “강원도 내평리(Naepyeong-ri)의 앞산 풍경이었을 뿐인데 말이죠.”
Kyoo Lee: 내평리군요! 과거 내평리의 한 조각이 비디오를 타고 현재 이 회화적 공간 속으로 틈입한 거네요. 그림 속 인물이 존재하기 시작했을 작품의 초기 시점에는 아직 내평리라는 물리적 공간이 작품 세계에 들어오기 전이었을 텐데 말이죠. 이 결합이야말로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겹겹이 접히는 진정한 시간의 ‘경첩’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현실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 소멸된 풍경이니까요.
부재하는 상태로 실재하는 것(absent presence), 존재가 부재로 변해 가는 서글픈 과정이 담겨 있네요.
마지막 질문으로, 이 정적인 회화 이미지와 역동적인 비디오 풍경이라는 두 개의 이질적인 이미지를 한 공간에 결합해야겠다고 결심하신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요?
Preparing Kimchi, 2025, Oil pastel on chalkboard, LCD Monitor, 119 × 297.5 cm
김명희: “김치를 담그는 그림의 배경에는 버드나무에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이미지가 배치되어 있어요. 그날은 정말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이었거든요. 저는 사실 다른 방 안에서 안전하게 대피해 있었지만, 창밖으로 모질게 휘청거리는 버드나무를 보며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비디오를 찍었어요. 그리고 이 폭풍우 속 버드나무 영상을 회화라는 완전히 다른 상황 속으로 이식하여 대조해 보고 싶었죠.”
Kyoo Lee: 일종의 고도로 정제된 시각적 안무(choreographed)를 연출하신 거군요.
김명희: “정확히 딱 맞는 표현이네요. 맞아요. 이 칠판 화면 공간 안에 무엇을 채워 넣을지 정말 수만 번 고뇌하고 생각해야 했습니다.”
Kyoo Lee: 그리고 그 배경에는 옛 여성의 족쇄였던 ‹행실도(Haengsildo)› 텍스트가 깔려 있죠. 여성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강요 말이에요. 하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색채와 고즈넉한 분위기를 보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찻잔을 들고 저 평화로운 야외 테라스로 나가서 차를 마셔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밖에는 아주 기분 좋은 미풍이 솔솔 불고 있고, 그리 거칠지 않은 평온한 날씨가 펼쳐져 있을 것만 같아요. 탁 트인 현관의 야외 테라스에 걸터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는 풍경이 그려집니다.
자, 그럼 저희도 이제 정말 차를 마시러 이동해 볼까요? 아주 경이로운 비하인드 스토리였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김명희: “네, 정말 차 마시러 가요.”
Kyoo Lee: 저는 그림 앞에 유령처럼 다시 돌아와 이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이 배경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비평적 포인트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림의 배경에는 수많은 역사적 고통과 억압이 칠해져 있어요. 하지만 찻자리에 집중하고 있는 이 여성 인물은 마치 그 어떤 억압과 고통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오직 자기 자신의 고유한 작업에만 온 정신을 몰입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기억과 지독한 가부장적 역사가 가득 찬 방 안에서 배경을 빼곡히 채운 텍스트의 정체는 우리가 방금 배운 유교 경전 ‹오륜행실도›입니다.
‘다섯 가지 덕목과 행실’을 뜻하는 유교 텍스트죠. 왕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을 상대하는 아내가 어떻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하는지, 철저히 위계적이고 윤리적인 도덕 규범과 행동 코드를 강요하는 유교 철학의 잔재입니다. 어른과 아이의 관계, 친구 간의 도리 등 인간관계를 다섯 가지 위계적 카테고리로 묶어 통제하는 텍스트가 배경을 시커멓게 장악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그림 속 주인공은 무얼 하고 있나요? 배경에서 무슨 무서운 훈육을 하든 말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철저하게 유교적 배경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유교의 유령은 배경에서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지만, 이 주체적인 여성은 그것을 완전히 무력화하며 무시해 버려요. 이 양면적 모호함이 핵심입니다. 텍스트를 자세히 읽어보면 “죽어도 편치 않아서” 같은 영원히 족쇄를 채우려는 가부장적 훈계가 시퍼렇게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뉴욕에서의 김명희, 1976년 작가 제공
Kyoo Lee: 그림 속 인물은 가부장적 배경을 뚫고 나와 아무런 고통의 기색도 없이 묵묵히 자신의 주체적인 행위를 이어 나가는 일종의 ‘소녀 페미니스트(girl feminist)’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 묵묵한 이미지 속 인물이 지닌 강력한 주체적 힘(agency)은 실로 놀랍습니다. 자신을 옭아매는 억압적인 역사적 배경, 개인적 고통, 사회적 환경을 당당히 극복하고 일어서서 자신과 타인을 위해 차를 달이는 고결한 창조 행위에만 오롯이 집중하고 있으니까요. 인물은 남성에게 차나 시중드는 유순한 가사도우미(tea lady)가 아닙니다. 스스로가 삶의 주권을 쥐고 차를 달이는 든든한 ‘아기 페미니스트(baby feminist)’인 셈이죠.
자신과 타인을 위해 주체적인 찻자리를 마련하는 이 위대한 여성상을 두고 이 수다쟁이 비평가 유령(gossiping ghost)으로서 이 찬사를 한마디 보태고 싶었습니다.
아카이브 정보
생산일자 2026.5.11.
생산자 [인터뷰/인터뷰어/인터뷰이]#1
형태 문서
내용 인터뷰 영상 녹취록과 기타 자료(사운드, 영상, 사진 등)
편집 백지숙, 정순민
참여자 Kyoo Lee, 김명희
작품 사진 및 자료 출처 김명희, 김차섭 기념사업회
이 사업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의 ‘2026년 시각예술창작산실’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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