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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인치 앨범과 7인치 싱글, 나란히 놓인 두 신보를 함께 들어봅니다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죠. 예측할 수 없는 일의 반복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를 경험할 때면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로레인L’Rain의 네 번째 정규 앨범 «fata morgana»는 인디록, 가스펠, 댄스홀, 메탈 등 한 앨범에서는 함께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장르가 뒤섞여 있습니다. 스스로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것 같은 앨범이랄까요. 6년 만에 찾아온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싱글 ‹신나는 음악, 잘못된 인생›은 밴드도 예측하지 못했던 발매입니다. 노래 속 화자 역시 예측하지 못한 인생 앞에서 일단 춤추는 자리로 도망치고요. 예측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두 음악이 힌트가 되어 줄 겁니다.
L’Rain, «fata morgana» 커버
술탄 오브더 디스코, ‹신나는 음악, 잘못된 인생› 커버
L’Rain, «fata morgana»
2024년 5월, 상상마당에서 열린 로레인L’Rain의 내한 공연은 사운드 사고로 시작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공연을 이어 나갔고, 이 모습은 그해 내가 본 최고의 장면으로 남았다. 공연이 끝난 후 이를 기획한 김밥 레코드 김영혁 대표의 포스트(https://www.instagram.com/p/C7Jw9QepXoq/)를 통해 뒷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이후 내게 로레인은 다정한 음악가로 남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그의 네 번째 정규 앨범 «fata morgana»이 도착했다.
앨범을 판매하는 밴드캠프 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잘 살아가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세상에서, 너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How do you grow in a world not meant for you to thrive in?)” 앨범에 답이 있을까. 앨범의 제목 «fata morgana»는 수평선 근처의 물체가 공중에 떠 있거나, 길게 늘어나거나, 여러 겹으로 뒤집혀 보이는 복잡한 신기루 현상을 의미한다. 답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에 많이 헤매야 할 것 같아 보인다. 밴드캠프 장르 태그에 적힌 ‘not jazz’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이는 로레인이 자신의 모든 앨범에 붙여 온 오랜 농담이다. 그의 음악은 재즈가 아니지만 음악을 이끌고 가는 방법과 에너지는 재즈에 가깝다. 즉흥 연주처럼 그의 음악은 형식을 뛰어넘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대표적인 곡은 ‹july 5th›다. 미니멀한 인디록으로 시작한 이 곡은 어느새 댄스홀로 바뀌며 스크리치 댄Screechy Dan의 영적인 토스팅으로 마무리한다. 지친 목소리로 시작한 곡은 이를 위로하는 대신 목소리의 리듬을 받아 다음 메시지로 옮겨간다. 이후 에코로 가득 찬 1분 11초짜리 기타 앰비언트 ‹bedroom songs›이 이어지며 우리가 자리한 음악적 공간은 어느새 낯선 곳이 된다. ‹soulless cycle›은 “피곤한 것에 피곤하고, 미안해하는 것에 미안하다”며 스테레오로 중첩되는 사운드를 통해 자기 부정을 폭발시키고 물러난다. 이어지는 ‹no body / know body›는 기타 노이즈를 선율로 바꾸며 다음 곡 ‹glass ceiling›과의 다리 역할을 한다.
«fata morgana»에는 노래와 1분 남짓의 짧은 사운드가 혼재되어 있다. 인디록, 댄스홀, 가스펠, 메탈까지 극과 극의 장르가 아무렇지 않게 놓여 있다. 인터뷰에서 로레인은 음악을 작업하다 황당한 아이디어가 나오면 보통 그쪽을 따라간다고 밝혔다. 덕분에 앨범은 예측할 수 없는 시퀀스가 연이어 나오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앨범을 전부 듣고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떠올렸다. 대체 뭘 들은 걸까.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걸까. 꿈을 꾼 건 아닐까. 곡이, 또는 앨범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모습으로 변했을 때, 그것은 다른 음악이 된 걸까. 아니면 뒤늦게 그 안에 있던 모습이 드러난 걸까.
여기서 나는 앨범의 제목과 소개문을 다시 떠올린다. 피치포크의 기사에서 로레인은 파시즘으로 기운 세상이 자신과 사회에 관해 어떤 믿음을 만들어내는지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9월 21일 새벽), 트위터(X)의 타임라인에는 유럽에 전쟁이 닥칠지 모른다는 전 세계인의 불안감으로 채워지고 있다. 귀에는 로레인이 만든 사운드가, 눈앞에는 타임라인 속 세상이. 둘이 중첩되며 문득 내가 지금까지 봐 온 세계가 신기루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아까 질문의 주어를 바꿔본다. 세상이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 다른 모습으로 변할 때, 그건 다른 세상이 된 걸까, 아니면 뒤늦게 그 안에 있던 모습이 드러난 걸까.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여기서 글 위로 잠시 백워드 효과를 삽입해, 2024년 5월 공연이 열리던 상상마당으로 돌아가 보자. 밴드에게 주어진 상황은 좋지 않았다. 시간도, 예산도 부족했기에 간신히 사운드체크를 마쳤다. 공연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페달에서 사고가 났고, 모니터도 사운드체크 때와 달랐다. 로레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연주할 다음 소리를 찾았다. 자리를 반쯤 채운 관객을 향해 그는 예정된 시간보다 10분 넘게 공연을 이어갔다. 앨범을 들으며 그날 로레인의 태도를 떠올렸다. 가사는 자기 파괴적이고 사운드는 실험적이다. 이 앨범은 섣부른 위로나 명확한 답을 건네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그 때문에 «fata morgana»가 다정하다고 느낀다. 내게 다정함이란 상대를 위로하거나 상태를 섣불리 고치는 일이 아니라, 이를 인정한 채 그 옆에 자신의 소리를 계속 놓아두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Musician 소개
로레인L’Rain은 브루클린 출신으로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멀티인스트루멘털리스트이자 작곡가, 보컬리스트, 큐레이터인 타자 치크Taja Cheek의 음악 프로젝트다. 치크는 첫 앨범을 만드는 도중 세상을 떠난 어머니 로레인Lorraine을 기리기 위해 발매 직전 프로젝트 이름을 정했고, 셀프타이틀 «L’Rain»(2017)을 발표했다. 이후 상실과 변화의 감각을 복잡한 사운드 콜라주로 확장한 «Fatigue»(2021), 사랑과 관계의 끝, 여성성과 타인이 부과한 음악 형식을 되묻는 «I Killed Your Dog»(2023)를 거쳐 네 번째 정규앨범 «fata morgana»(2026)를 발표했다. R&B와 소울, 재즈, 가스펠, 노이즈, 앰비언트, 록, 전자음악의 요소를 보컬 루프와 샘플, 콜라주 방식으로 엮는 그의 음악은 어느 한 장르에 머무르지 않는다. 음악가이자 큐레이터인 치크는 2017년 브루클린에 DIY 리허설·공연 공간을 공동 설립했고, 뉴욕현대미술관 모마에서 약 6년간‹Warm Up›과 ‹Sunday Sessions› 등 퍼포먼스 프로그램을 이끌었다. 2024 휘트니 비엔날레의 게스트 큐레이터와 BRIC셀레브레이트 부루클린의 첫 아티스트 큐레이터를 거쳐, 현재는 퍼포먼스 스페이스 뉴욕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술탄 오브 더 디스코, ‹신나는 음악, 잘못된 인생›
2020년, 코비드로 세상이 멈춘 시기. 술탄 오브 더 디스코Sultan of The Disco가 마지막으로 발표한 싱글 ‹Waiting For Your Calling Back›의 소개 글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아직 멈춤의 끝은 보이지 않지만, 술탄 오브 더 디스코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후 우리는 술탄 오브 더 디스코를 만날 수 없었다. 코비드가 지나고 사람들은 팝업에 페스티벌에, 온갖 곳에 모였지만, 술탄 오브 더 디스코는 멈춤을 멈추지 않았다. 멤버들은 각자의 일에 몰두했고, 페스티벌 섭외는 매년 거절했다. 나잠 수는 음악에 관심이 사라졌고, 창작을 멈춘 후 오히려 행복을 느꼈다. 그러다 높은 개런티 제안을 받아들여 선 B주류초대석 공연, 이참에 주변의 권유로 출연하게 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6년 만의 컴백에 많은 관객이 옛 술탄의 복장을 하고 춤을 따라 췄다.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 속에서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6년 만의 새 싱글 ‹신나는 음악, 잘못된 인생›이 만들어졌다. 펜타포트 출연이 결정된 후 발매 일정을 먼저 잡고 곡 작업을 시작했다. 발매 당일에 ‘지금 녹음 중’이라며 올린 숏폼 영상은 일종의 메타 코미디였던 셈이다. 반가운 귀환인데, 제목 속 인생은 영 괜찮지 않다. 곡에서 행복의 유효 기간은 단 두 줄이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걱정 없이 행복하다는 말은 곧 불안하다는 고백으로 뒤집힌다. 이어 화자는 자신이 상대와 문제가 생기자 마주하는 대신 회피했으며, 결국 택시를 타고 이곳으로 도망쳤다고 말한다. 택시에서 내린 화자가 고른 도피처는 춤추는 자리다. 화자는 강한 킥에 맞춰 상대의 모습을 날려버리려 하지만, 화려한 조명과 들리지 않는 대화 사이에서 그 얼굴은 다시 떠오른다. 지우려던 기억이 돌아오자 그는 자신도 자신이 밉다고 말하고, 망가진 인생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곡을 들으며 6년 동안의 시간을 떠올렸다. 그들의 둥지 붕가붕가 레코드는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신나는 음악, 잘못된 인생›은 처음으로 붕가붕가레코드 대신 나잠 수의 스튜디오인 ‘Wormwood Hill Studio’의 이름을 달고 발매됐다. 멤버들은 각자의 일에 몰두하고 커리어를 쌓았다. 코비드는 끝났고, 인디 음악 신은 ‘밴드붐’으로 시끌벅적해졌다. 새로운 미디어를 타고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의 노래는 젊은 팬들 사이에서 전보다 큰 인기를 얻었다. 밴드는 돌아왔지만, 그들이 서 있던 곳은 전과 같지 않다.
곡을 들은 후 만난 나잠 수에게 그동안 나이를 먹고 성장한 술탄의 이야기 같아 좋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그는 되레 젊은 친구들을 떠올리며 만든 곡이라고 답했다. 멈춰서 행복했던 나잠 수는 밴드와 함께 다시 불려 나왔다. 노래 속 화자의 눈앞에는 잊으려 한 얼굴이 떠올랐으며, 이를 은유로 밴드의 6년을 읽으려던 내 해석도 빗나갔다. 정말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신나는 음악, 잘못된 인생. 기억을 지우는 침을 놓고 관광버스에서 춤추던 «마더»의 김혜자처럼, 일단 이 곡의 훵크 리듬에 맞춰 춤이라도 춰볼까.
Musician
수(보컬/키보드), J.J 핫산(댄스/MC/키보드), 김간지(드럼), 지(베이스), 홍기(기타/보컬). 결성 초기에는 댄서 중심의 퍼포먼스 그룹에 가까웠으나 2010년 무렵 지금의 라이브 밴드 진용을 갖추었고, 이후 디스코/훵크/소울을 바탕으로 한 연주에 군무와 의상, 유머를 결합한 공연을 이어 왔다. 정규 1집 «The Golden Age»(2013)와 2집 «Aliens»(2018), EP «Easy Listening For Love»(2019)를 발표했으며, 2014년과 2016년 영국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 무대에 올랐다. 2020년 싱글 ‹Waiting For Your Calling Back› 이후 활동이 뜸했다가, 결성 20주년을 맞아 2026년 신곡 ‹신나는 음악, 잘못된 인생›으로 돌아왔다.
2026년 9월 플레이리스트
Writer
하박국(@HAVAQQUQ)은 콘텐츠와 이벤트를 통해 음악을 소개하고 음반을 만드는 사람이다. 2002년 음악 잡지에 글을 쓰기 시작해, 100여 개의 매체에 글을 써왔다. 2012년 인디 레코드 레이블 영기획(YOUNG, GIFTED&WACK Records)를 설립, 50여 장의 앨범을 제작했다. 주로 전자 음악 필드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국내 최초의 전자 음악 페어 암페어(Amfair)를 개최하고 서울시립미술관과 사운드를 주제로한 ‘소음인가요’ 전시를 공동 기획했다. V Live의 캐스퍼라디오 음악 인터뷰 프로그램 ‘하박국의 박국박국해’를 진행했으며 현재는 비디오 팟캐스트 ‘음이온 라디오’를 제작 및 진행하고 있다. 티빙 다큐멘터리 ‹케이팝 제너레이션›의 스토리 프로듀서로 참여했으며, ‹DIY 뮤직 가이드 북›, ‹씬의 아이들›의 공저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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