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삶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애쓰지만, 그럴 때마다 예측하지 못한 일과 고난이 찾아옵니다. 최진석의 작품은 일상에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주변 사람과 함께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던 사람과 협업해 공감각적인 조각을 빚어내기도 하고, 데이터를 잃어버린 개인적인 경험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기도 합니다. 더 많은 사람과 교류하는 방식을 고민하는 것이 곧 감각을 예리하게 가다듬는 방편이라고 믿고 있어서입니다. 어떻게든 우리를 지키려고 애쓰는 최진석의 작업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Double Movement› 설치 전경, «Collective Witchcraft», 콤플렉스 갤러리 (서울), 2026, 사진 이지수(Jisu Lee)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최진석이라고 합니다. 저는 거대한 사회정치적 구조가 개인의 일상과 사적인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들여다보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청소년 시기에는 다양한 방면에 얕은 관심이 있었는데, 끈기가 없는 제가 그 다양한 관심을 좀 더 인내심 있게 끌고 가려면 어떤 형태의 육체적인 활동을 꼭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습니다. 각종 운동이나 뭔가를 그리고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그런 것을 하면 어렵지 않게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었거든요. 한편으로는 수학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만, 운동과 수학은 제가 특출나게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은 없었던 반면에 미술은 그런 경쟁과 등수 매기기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입시미술을 시작하자마자 그런 착각은 와르르 무너졌지만요. 어찌어찌 미술로 대학에 진학하고, 예술에 관한 저의 오해와 이해가 계속해서 생기고 부서지는 경험을 하면서 조금 더 잘 이해하려고, 조금 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아가려고 애쓰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최근까지는 제가 거주하는 로스앤젤레스 도심에 작업실이 있었습니다만, 현재는 작업실을 없앴습니다. 코로나19 확산 기간에 커스텀 가구를 제작하는 1인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곳에 작업실을 얻었습니다. 작업실 자체는 작지만, 건물 안에 공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목공실이 있어서 그 공간을 추가로 사용할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제 노동이 작업의 많은 부분으로 연결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미래를 멀리 내다보고 계획하기가 어려운 시기라서 작업실을 비롯해 생활의 많은 부분을 덜어내 가볍게 만드는 중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에게 작업실은 특정 공간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현실 조건을 저울질하며 임시로 점유하는 모든 물리적, 정신적, 시간적 개념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Run Run›, 2026, 합판 위에 인그레이빙, 각종 자투리 목재트랜스듀서, 앰프, 사운드(67 분), 38 × 180 × 180 cm, 사진 Coffee Kang
‹Run Run› 디테일, 사진 Coffee Kang
‹Run Run› 설치 전경, «I Hear You Better With Noise», Cevera Yoon 갤러리 (로스앤젤레스), 2026, 사진 최진석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보통 제가 보고 경험한 데서 출발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환경이나 교류했던 사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인 상황, 제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에 관한 생각을 주기적으로 정리하다 보면 한 줄기의 작업이 시작됩니다. 예를 들면 꽤 오랫동안 다른 작가들의 어시스턴트로 일하거나, 가구 만드는 일을 하거나, 전시를 설치하고 철수하는 일을 하는 등 육체노동을 꽤 오랫동안 해 왔는데, 보통 노동을 하는 주체가 누구이고, 이 노동이 사회적 위계질서의 어디쯤에 위치하며, 어떻게 주변부로 밀려나는지에 관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노동의 위계와 사회적 계급에 관한 생각이 몇몇 연작의 주제가 되기도 하고, 아티스트런 스페이스(저는 2012년 서울에서 ‘공간N’을 공동으로 설립해 운영했고, 2021년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MOTOR’를 공동으로 설립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습니다)를 운영하는 방식과 다른 사람과 협업하는 저의 태도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더 나아가 미술계 종사자로서 적절한 태도를 정하고, 많은 선택을 내리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그 견해와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해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춰 가기도 하고, 다른 방향으로 변화하기도 합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직간접적으로 느끼는 문제나 주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반영하는 재료(특정 시간, 장소, 사람, 사건의 파생물 등을 자주 재료로 사용합니다)로 어떤 형식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즉, 물리적인 재료, 그것들을 모아 만든 형태, 그것이 차지하는 공간, 감각적(시각적, 후각적, 촉각적, 청각적)인 정보가 모여 형성된 사회적인 맥락 등에 관심을 두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거나, 다뤄본 적 없는 재료를 사용하거나, 새로운 테크닉을 익혀야 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합니다. 결국 창작 과정은 이 같은 예측 불가능하고 복잡다단한 단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심을 유지하고 이끌어 나가는 편입니다.
‹Between Our Palms›, 2021 – 2026, 톱밥으로 만든 향, (각각 대략) 11.5 × 6.3 × 3.8 cm, 사진 Coffee Kang
‹Between Our Palms› 참여자들과 찍은 제작 과정, 사진 최진석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2025년 말 시작해서 진행 중인 두 연작, ‹I Hear You Better With Noise›, ‹Regurgitating›은 모두 그 당시 저에게 닥친 일과 그 배경으로 작용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지정학적 상황에서 출발했습니다(공개적인 플랫폼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드릴 수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이때 저는 전자기기에 저장된 많은 정보를 잃어버렸는데, 그 손실된 데이터와 거기에 담긴 기억, 관계를 뒤틀린 방식으로 복원한 결과가 두 연작입니다. ‹I Hear You Better With Noise›는 몇 년간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던 사람들과 협업해 만든 공감각적 조각입니다. 즉, 각 조각은 한 사람과 나눈 대화와 서로의 관계를 청각적, 촉각적, 시각적 조각으로 변환한 것입니다. 손실된 혹은 앞으로 손실될 가능성이 있는 언어적 교류를 비언어적, 물리적, 감각적 조각으로 바꾸는 노력은 그 배경이 되는 특정 상황을 환기하기도 하고, 비언어적이고 대안적인 교류의 가능성을 예술의 형태로 탐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Regurgitating› 또한 잃어버린 데이터에서 시작했습니다. 삭제된 사진과 텍스트를 백업하고, 프린트한 문서를 파쇄기로 잘게 자른 뒤 다시 직조해 복원한 평면 작업 연작입니다. 직조로 완성된 결과물은 날실과 씨실이 서로가 흩어지지 않게 지탱하는 동시에 서로의 정보를 뚜렷이 알아보기 어렵도록 만듭니다. 즉, 정보를 복원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보를 은폐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모순적인 태도가 현재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의 생존 전략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통제가 아득히 벗어난 압도적인 상황에서 무언가는 버려야 하고, 무언가는 숨겨야 하며, 그 와중에 그것을 어떻게든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거의 시대정신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요즘입니다.
‹Walk Backwards›, 2026, 사진, 발견된 글, 형광펜, 나무, 45 × 25.5 × 5 cm, 사진 Coffee Kang
‹Clear In Peripheral Vision›, 2026, 사진, 발견된 글, 형광펜, 나무, 58 × 32 × 4 cm, 사진 Coffee Kang
‹이제는 혼자 울지 않는다›, 2026, 사진, 발견된 글, 형광펜, 나무, 40 × 71 × 1.4 cm, 사진 양이언
‹We Are All ____________›, 2026, 사진, 발견된 글, 형광펜, 나무, 40 × 71 × 1.4 cm, 사진 양이언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사람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합니다. 가족이나 친구, 연인, 동료, 이웃 등 수많은 이름표가 붙은 관계가 다가와 오래 머물기도 하고, 스쳐 지나가기도 하는데, 결국 이들이 저로서는 혼자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과 세상을 어찌어찌 견디게 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상당히 오랜 시간 저는 창작이란 천재적인 개인이 이루어 낸 성취라는 뿌리 깊은 착각과 오해에 천착하면서 제 스스로를 괴롭혀 왔습니다. 수많은 창작자처럼 저 또한 항상 예술을 하기에는 제 재능이 너무 미천한 것은 아닐까 하는 자기 의구심이 있었거든요. 비교적 최근에야 창작은 어떤 형태가 되었든 여러 사람 간 교류로 이뤄낸 공동의 노력이라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것이 최근 작업의 과정이나 주제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A Rose In/From/To You› 설치 전경, «I Hear You Better With Noise», Cevera Yoon 갤러리 (로스앤젤레스), 2026, 사진 최진석
‹A Rose In/From/To You› 디테일, 사진 Coffee Kang
최근 작업에서 만족스러웠던 점과 불만족스러웠던 점이 궁금합니다.
‹I Hear You Better With Noise› 연작을 통해 청각과 촉각을 처음으로 작업에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시도였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협업을 진행했으며, 예상치 못한 재미와 즐거움을 느꼈다는 점이 만족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청각과 촉각이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 감각인지 혹은 저에게 생소한 언어인지 아는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배우는 것을 꽤 좋아하고 즐기는 편이라고 자부해 왔는데, 청각과 촉각의 언어 영역이 배우고 익히는 데 너무 방대하게 느껴져서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작곡가, 사운드 디자이너와 협업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이슈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현대 미술계의 시스템이 다양한 종류의 공동 작업을 어렵게 만든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A Rose In/From/To You› 디테일, 사진 양이언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을 여쭤봐도 될까요?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 외에는 건강을 돌보기 위해 운동하고, 먹고 싶은 음식을 해 먹으며, 보고 싶은 전시를 최대한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원래 걱정과 불안이 많은 편인데, 그래서 더더욱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기회가 올 때마다 산책을 하려고 하고, 여러 가지 잡념을 수시로 글로 써서 비워내려는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친구나 지인과 주기적으로 대화하는 시간도 보내려고 합니다.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을 더 섬세하게 가다듬을 수는 없을까, 그런 여러 가지 감각을 서로가 교류하는 방식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받아온 미술 교육은 (그리고 우리가 정보를 교류하는 방식 전반이) 시각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다른 종류의 감각이 지닐 수 있는 가능성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청각, 촉각, 후각, 미각과 더 친해지려고 하는 중입니다.
‹Run Run› 설치 전경, «Collective Witchcraft», 콤플렉스 갤러리 (서울), 2026, 사진 양이언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최근 굉장히 오랜만에 한국에서 전시(후암동 콤플렉스에서 5월에 한 개인전 «Collective Witchcraft»)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전시를 봤던 오랜 친구가 주었던 피드백을 종종 생각합니다. 그들은 각자 약간씩 다른 얘기를 했습니다만 결국 제 성격의 집착적인 부분을 봤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만의 세상에서 맞이하는 많은 기대와 좌절 등이 작업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다고 느끼게 해 주었던 것 같아요.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슬럼프를 벗어나는 데 너무 집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많이 걷거나, 운동하거나, 대화하거나, 여유가 있다면 현재 닥친 일과 크게 상관없는 관심사에 눈을 돌리기도 합니다. 만약 마감일에 맞춰서 뭔가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양질의 결과물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내려놓으려고 노력합니다. 모두에게 효과적인 태도는 아닐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스스로에게 ‘너무 최선을 다하지 말자’라고 되뇌는 혼잣말이 도움이 됩니다. 한 발짝 떨어져서 저와 제가 처한 상황을 나른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그 순간에 닥친 숨막히는 압박감이나 긴장감 등을 별것 아닌 것으로 취급할 수 있게 해 주거든요. 매 순간 고비를 어찌어찌 넘어가는 데 의의를 두려고 합니다.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지속가능성입니다. 창작 활동을 업으로 삼았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마라톤을 하려면 적당한 수분과 영양분을 지속적으로 섭취하면서 자신을 돌볼 줄도 알아야 하니까요. 아직도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아요.
‹In Vertigo›, 2026, 참여자가 기증한 발견된 오브제, 철, 체인, 트랜스듀서, 앰프, 사운드 (137 분), 254 ×42 × 42 cm, 사진 Coffee Kang
‹In Vertigo› 디테일, 사진 Coffee Kang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그냥’, ‘계속’ 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그저 응원합니다. 우리 모두 자신에게 관대하니까요.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약점과 상처를 들여다보는 창작자가 되고 싶습니다.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낙원은 목적지가 아니고 그곳을 향해 가는 여정이다”라는 레베카 솔닛의 말을 자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상적인 미래의 모습보다는 이상적인 태도를 먼저 생각하려고 합니다. 제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적다고 느끼고, 어떤 미래를 그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반면에 내가 오늘 내리는 결정의 근거는 비교적 가늠하기 쉬우니까요. 크고 작게 변하는 제 일상생활에서도 창작 활동을 계속하는 이유와 방법은 무엇인지,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을 위해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합니다.
Artist
jinseok choi 최진석(@jinseok_choi_)은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으며, 사회정치적 구조가 개인의 일상과 사적인 관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양한 감각과 매체로 연구하고 있다. 대안적인 지역 예술 커뮤니티에 오랜 관심을 두고 서울에 ‘공간N’(2012)을 공동 설립·운영했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는 ‘MOTOR’(2021~현재)를 공동 설립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다양한 역할을 통해 비관습적 공간의 전시부터 커뮤니티 구성원을 위한 실용적인 워크숍, 공공장소의 야외 행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개인 작업의 관심사를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