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희는 매일 자신만의 지도를 그립니다. 하지만 그에게 지도는 목적지에 닿기 위한 효율적인 수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꺼이 이탈해 전혀 예상치 못한 풍경에 우연히 다가가기 위한 정거장에 가깝죠. 이준희는 모험을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에스키스를 두 손에 쥐고, 게임이나 만화 같은 대중문화 콘텐츠부터 중세 연금술과 점성술의 도상까지 접붙이며 새로운 것으로 탈바꿈시킵니다. 그래서 그에게 드로잉은 방향을 일러주는 이정표인 동시에 길을 잃는 모험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완전한 정의를 거부하고 규정된 언어의 이면을 살펴보며, 끊임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 헤매는 이준희의 탐험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함께해 보세요.
‹나무의 제단›, 2026, 혼합재료, 가변크기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회화를 중심으로 작업하고 있는 이준희입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릴 때부터 공상을 많이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머릿속에 있는 것을 화면에 옮기는 것 자체에 즐거움을 느꼈던 것 같아요. 자기 작업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청소년기부터였지만, 미대에 들어가서 대학원까지 진학하며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늘 ‘일단 조금만 더해볼까?’라는 생각을 연장하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어요.
‹나비의 길›, 2025, 캔버스에 유채와 연필, 53.0×45.5cm
«자기 미로에서 죽은-죽지 않는 거미», 공간 파도, 2024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경기도 김포에서 작업실을 쓰고 있습니다. 작업실이 신도시와 시골의 경계에 있는 건물에 위치해서 신기한 느낌이 있어요. 가끔 옥상에 올라가 노을 풍경을 구경하기도 합니다. 작업실 한쪽 벽에는 드로잉과 포스터가 붙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제가 좋아하는 책과 피규어가 있어요. 최근에는 디지털 피아노를 하나 들였는데 작업이 안 풀리거나 스트레스받을 때 코인노래방 가듯이 연주하는 용도로 애용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주로 이미지 면에서는 평소에 접하는 게임, 만화, 영화, 소설, 음악 등에서 영감을 얻는 편입니다. 핀터레스트에 중세 연금술이나 점성술, 천문학 관련 이미지를 검색해 살펴본 후 드로잉하기도 합니다. 대학원에서 이론 수업을 듣거나 관심사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다 보면 그리고 싶은 장면이 많이 생각나기도 해요. 저는 주로 드로잉에서 출발한 작업을 하는데, 드로잉 시점에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나 음악, 소설, 만화 등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드로잉북 안에 드러나게 돼요. 그래서 평소에도 최대한 많은 콘텐츠를 즐기려 하고 있습니다. 주로 제가 보거나 듣는 어떤 한 부분에 꽂히면 그걸 혼자 드로잉하거나 이리저리 변형시켜 보며 제 작업에 빌려옵니다. 썩은 달걀을 먹고 장염에 걸린 사건을 토대로 거대한 알을 그린 ‹알의 저주›라는 작업처럼 일상적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을 때도 있어요.
‹연금술의 원리›, 2025, 캔버스에 유채, 90.9×72.7cm
‹별의 시간›, 2025, 캔버스에 유채, 97.0×193.9cm
‹알의 저주›, 2023, 캔버스에 유채, 116.8×91.0cm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보통은 드로잉에서 출발합니다. 저는 캔버스 회화를 그리기에 앞서 많은 양의 드로잉을 하는데, 이때는 특정한 의도 없이 즉각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상적 이미지를 손이 가는 대로 드로잉북에 옮기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드로잉 중에서 캔버스 화면에 확장시켜 그리고 싶은 이미지가 생기면, 좀 더 정밀하게 에스키스를 하거나 그 드로잉에서 이차적으로 해석하거나 부여할 수 있는 의미를 다른 레퍼런스와 결합해 확장하려 합니다. 또한 산책하면서 잡생각을 많이 하는데, 그러다 갑자기 그리고 싶은 선명한 이미지가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걸 드로잉으로 옮긴 뒤에 캔버스 작업을 하는 편이에요. 대략적인 색과 구성 등 어느 정도 에스키스로 쓸만한 이미지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토대로 회화 작업을 시작합니다.
에스키스로 존재하는 드로잉은 저에게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지도처럼 느껴져요. 지도를 통해 초기에는 빠르게 전체 구조를 설정하고,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화면을 조정합니다. 하지만 지도는 당연히 실제 땅과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길을 잃으며 작업합니다. 그날그날 본 장면, 작업실에 튼 음악, 날씨 등 외부 요소가 캔버스 위에 덧붙여지고, 그 안에서 헤매기도 하고 찾기도 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거죠. 그러다 보면 일부는 전혀 다른 화면이 되기도 하고 일부는 계획한 화면이 되기도 하는데, 이렇게 완성을 위한 균형을 찾아가는 것을 저의 창작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 했던 개인전에서는 ‘변신술’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이미지 안의 기호가 서로 연결되며 의미를 변형시키고 작동하는 과정을 시각화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특히 ‹나무가 타오르는 지도›에는 여러 가지 시각적 기호와 도상으로 보이는 것이 등장하는데, 이를 형태적·의미적 유사성 같은 느슨한 연결고리를 통해 자의적으로 접붙여볼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마치 지도의 궤적을 스스로 그려 나갈 수 있는 것처럼 보는 사람이 이미지간의 관계를 따라가며 의미를 생성할 수 있었으면 했습니다.
또한 지점토로 만든 입체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데, 이 작업을 저는 드로잉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덩어리를 따라가며 색과 선을 입히며 부담 없이 임하는 작업 중 하나입니다.
‹나무가 타오르는 지도›, 2026, 캔버스에 유채, 162.2×224.2cm
«변신술의 제단», 유영공간, 2026
«변신술의 제단», 유영공간, 2026
최근 작업에서 만족스러웠던 점과 불만족스러웠던 점이 궁금합니다.
만족스러운 점은 화면 구성이 이전보다 다양해졌다는 점이고, 불만족스러운 점은 여전히 완성의 선을 잡는 것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을 여쭤봐도 될까요?
일어나서 간단하게 아침 겸 점심을 해먹고 작업실에 가거나 아르바이트를 갑니다. 엄청나게 바쁠 때와 엄청나게 게으를 때를 시소 타듯이 극단적으로 오가며 사는 것 같아서 요즘은 느슨한 루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탄생하는 암모나이트›, 2023, 캔버스에 유채와 스프레이, 162.2×130.3 cm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저는 평상시에도 뭔가가 고정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에요. 어떤 것을 완전히 정의 내리기보다는 늘 규정된 언어 이면의 가능성을 열어두려는 편이에요. 이런 태도가 작업에서도 드러나는 게, 형상과 서사가 두드러지는 화면을 완성한 뒤에는 곧바로 추상적인 제스처 중심의 작업을 시작하는 식으로 서로 다른 방향의 작업을 번갈아 진행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평소에도 하나의 관심사에 깊게 몰입했다가 비교적 빠르게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있어요. 작업에서도 때마다 꽂히는 도상이 다른데, 한 소재를 중심으로 여러 연작을 진행하다가 이제 충분하다 싶으면 다른 소재로 떠나는 편입니다. 또한 저는 말할 때 다른 무언가에 비유하며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알레고리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작업에서도 그런 태도가 드러나는 것 같아요.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슬럼프가 오면 작업과 상관없는 일을 하거나 충분히 쉬며 숨 고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는 생각이 엄청나게 많아지는 편이라 몸을 움직이는 달리기나 악기연주처럼 생각을 비울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요즘은 일과 다른 일정을 병행할 때 작업 시간을 확보하는 부분에서 고민이 제일 많은 것 같아요.
꾸준히 하는 것과 재밌게 하는 것이요. 이 일이 엄청 정직하게 보상이 오는 일은 아닌 만큼, 지속 가능한 작업을 어떻게 해 나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 어렵지만, 작업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혹은 쉽게 가지 않으려는 태도를 갖고 싶습니다.
‹땅으로 가는 태양›, 2025, 캔버스에 유채, 162.2×130.3 cm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재밌는 작업을 하는, 즐겁게 작업하는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지금처럼 작업을 지속하며 잘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Artist
이준희(@jooneelee)는 인간-비인간의 경계에 있는 형상을 배역 삼아 현실적인 단상과 초현실적인 모티브가 결합한 변신술적 이미지를 만든다. 그 과정에서 성스러움과 키치함, 우울과 기쁨 등 이질적인 요소를 화면 위에 충돌시키고 조화시키며, 그것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한 유머를 연출하는 데도 관심이 있다. 주요 전시로는 개인전 «변신술의 제단»(2026, 유영공간), 단체전 «UnHeavenly»(2025, SPACE INK), 단체전 «어느날: 먼 미래에서 온 이야기»(2025, 피비 갤러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