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를 알 수 없는 형태의 유기물 덩어리가, 짙고 두터운 물감층 아래 혹은 집요하게 얽힌 선 사이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마주합니다. 장순원은 정형화된 신체가 아니라 괴물 혹은 잡종이라 불리는 이형의 육체를 통해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의 징후를 집요하게 탐구합니다. 긁히고 패인 표면의 거친 질감은, 그 테두리가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꿈틀대고 있는 어떤 존재의 원초적인 생명력을 부각하며, 우리가 믿고 있던 현실에 유연한 균열을 냅니다. 하지만 이 역동성이 마냥 즉흥적이고 본능적인 것은 아니에요. ‘느림’과 ‘지난함’이라는 삶의 무게를 기꺼이 감내하며 천천히 쌓아 올려진 서사는, 불가항력적인 현실의 압박에 능청스럽게 맞서기 위한 그만의 유연한 전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쉽게 타협하지 않는 태도로 낯선 존재에게 숨을 불어넣는 장순원의 작업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건져내기, 하나씩, 차례로(Drawn Up, One by One)›, 2026, 염색된 장지에 잉크, 41.0×31.5cm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회화, 드로잉, 부조 등 이런저런 방법론을 경유해 작업하고 있는 장순원입니다. 최근에는 문화적 구성물로서의 육체 이미지, 특히 키메라, 크리처, 잡종, 괴물이라는 이름으로 위치지어진 몸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합성된 인간과 비인간 생물종의 몸을 상상하고, 이러한 상상의 결과를 징후로서 독해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왔고, 그렇게 그리고 그리다 보니 어느샌가 작업을 업으로 삼고 있네요. 여전히 조형 언어가 지금 저의 삶에 필요한 까닭을 찬찬히 궁리하고 있습니다.
‹닫히지 않는 길 (A Road Left Open)›, 2026, 염색된 장지에 잉크, 14.0×60.0cm
‹꼬리 (Tails)›, 2025, 염색된 장지에 잉크, 18.0×22.0cm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개포동에서 작업실을 2년여간 써왔는데, 지금은 석사 과정 중이라 학교 스튜디오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저는 공간에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두는 게 좋아서,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 둘지 루틴을 만드는 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기 전에 정리정돈을 열심히 합니다.) 개중에서는 특히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책꽂이 구역을 잘 관리합니다. 선물 받았던 친구의 판화와 자주 펼쳐보는 책, 여행을 다니며 수집한 물건을 모아뒀어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책, 칼럼, 만화, 애니메이션과 여러 미술사 레퍼런스를 자주 들여다보고 곱씹습니다. 최근에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읽고 있습니다. 책이라는 매체의 특수성과 그것이 쌓인 시공으로서의 도서관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이를 바탕으로 상반기 작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또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를 읽고 미술과 식물성, 그리고 몸에 대한 에세이를 쓰고 있습니다. 루스 이리가레와 마이클 마더가 교환한 서신이 담긴 『식물의 사유』도 같이 읽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에른스트 헤켈과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세밀화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아직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다 (No One Has Been Born Yet)›, 2025, 캔버스에 유화, 97.0×145.5cm
‹아직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다 (No One Has Been Born Yet)›, 2025, 캔버스에 유화, 97.0×145.5cm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프로젝트를 진행 할 때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다시 말해 그림으로 물질화하고 싶은 장면이 꽤 뚜렷합니다. 특정한 대상을 작업의 제재로 삼은 후에, 스케치와 메모에서부터 그림이나 조각으로, 또 이야기로 다종다양하게 외재화했던 것 같아요. 다만 요즘은 제 사적 관심을 공적 차원으로 확장할 수 있는 방법을, 또 구체적 현실과 정면으로 접속할 수 있는 방법을 분석하고 점검하고 있습니다. 다소 충동적으로 흘러나왔던 작업물들을 시간을 들여 복기하고 확장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2월에 GallerySP에서 가까운 동료 작가 정주원과 2인전 «획, 세포, 그리고 유령»을 소개할게요. ‹건져내기, 하나씩, 차례로›는 꼬리라는 체부에 대한 상상적 서사를 기반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캔버스, 패널, 종이가 지닌 네모난 프레임의 제한성을 유희적으로 이용하며 이미지의 안과 밖, 그림의 사물성과 환영성의 관계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우측에 그려진 두 개의 꼬리는 서로를 얽어매며 밧줄을 만들어 구멍으로 내려보내고, 구멍을 타고 내려간 밧줄은 화면의 좌측 위에서부터 다시 하강합니다.
«획, 세포, 그리고 유령», GallerySP, 2026, 사진 양이언
«획, 세포, 그리고 유령», GallerySP, 2026, 사진 양이언
«획, 세포, 그리고 유령», GallerySP, 2026, 사진 양이언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인가요?
질서를 이탈하는 혼종적 몸은 불가항력으로 밀려오는 삶의 압력에 능청스럽게 반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항상 통증과 손실과 균열을 무릅쓰며 움직이고, 걷고, 뛰고, 기고, 삼키는 몸을 갈망하는 것 같아요.
최근 진행한 작업에서 만족하는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다만 제가 상상하는 몸은, 앞서 말했듯이 정치/사회/역사적 맥락 아래 발생한 문화적 구성물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특정 맥락과 이미지가 저에게 개입했는지, 또 그 개입의 까닭에 어떠한 동인이 자리 잡고 있는지 기민하게 살피고 드러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늘 어려운 작업이고요. 제대로 수행해 왔는지 오랫동안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2인전을 마무리한 후에는, 그 구성성 자체를 암시할 수 있는 작업 구조를 고안하고 있어요. 보다 메타적인 태도로요.
‹그 여자의 고치 (Her Cocoon)›, 2025, 염색된 장지에 잉크, 22.0×14.5cm
‹그 여자의 뼈 (Her Bones)›, 2025, 캔버스에 유화, 15.8×15.8cm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을 여쭤봐도 될까요?
단조롭고 심심한 일상을 보내요. 작업을 하고, 일하는 곳에 비정기적으로 출근을 하고요. 집에서 책을 읽고,만화를 보고, 게임을 합니다.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요즘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라쿠고(落語)라는 일본의 만담 예술입니다. 일종의 일인극인데, 라쿠고가는 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예술적 태도를 가진 사람 같아요. 수십에서 수백 개의 이야기를 자신의 몸, 부채, 손수건만으로 발산하는 자의 에너지가 좋습니다. 인간에의 헌신 같아요.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나요?
오래 걸림과 그에 따른 지난함인 것 같은데요. 유머, 능청스러움, 뻔뻔함, 사악함이 좋은 동시에, 그처럼 유연하고 재빠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게 어쩔 수 없이 작업에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첫 번째 피부는 당신을 해하고자 숨죽여 기다리므로 (Because My First Skin Silently Waits, Poised to Wound You)›, 2024, 캔버스에 유화, 단풍나무 프레임에 부조 조각, 167×232cm
‹나의 첫 번째 피부는 당신을 해하고자 숨죽여 기다리므로 (Because My First Skin Silently Waits, Poised to Wound You)›, 2024, 캔버스에 유화, 단풍나무 프레임에 부조 조각, 167×232cm
장순원(@graytomato__)은 서울에 거주하며 문화적 구성물로서의 육체 이미지, 특히 키메라, 크리처, 잡종, 괴물이라는 이름으로 위치 지워지는 이형적 몸에 주목하고 있다. 회화, 드로잉, 부조의 방법론으로 인간과 비인간 생물종의 상이한 신체를 탐구하며, 그러한 상상력의 기반이 되는 다양한 신화, 설화, 미신의 역사를 관찰하고 있다. 실린더1에서 개인전 «IDLING SKEIN»(2024)을 열었고, «획, 세포, 그리고 유령»(GallerySP, 2026), «Open Cache»(공실, 2025), «Come Nearer, Let Me Look at You»(수치, 2025) 등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Frieze Seoul(서울, 2025), Liste Art Fair Basel(바젤, 2025) 등 국내외 페어 및 레지던시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