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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이 맥락이 될 때

Writer: 김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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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다소 산만한 사람’이 때로는 가장 집요하게 하나의 맥락을 추적합니다. 자신을 “산만한 사람”이라 소개하는 조각가 김윤식은, 흩어진 파편 사이의 인과 관계를 끝까지 붙잡는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가죠. 금속과 세라믹, 유리처럼 반영구적인 물질을 다루지만, 그가 진짜 응시하는 곳은 매체의 단단함이 아니라 위태로움입니다. 김윤식은 모든 실체가 매끄러운 데이터로 변환되는 디지털 홍수 속에서 ‘물질적 근거’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묻습니다. 치열한 물음을 통해 이미지로 비롯된 조각의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새로운 신체와 가치를 증명해 내고자 합니다. 0g의 디지털 세계가 약속하는 가짜 영원 대신, 물질의 무게를 지키려는 김윤식의 태도와 그 작업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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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rnal stage›, 2024, 스테인레스 스틸, 세라믹, 알루미늄, ABS 플라스틱, 모터, 아크릴, 황동, 듀얼채널 비디오, 사운드, 62 × 62 × 206 cm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저는 조각을 기반으로 뮌헨에서 활동하고 있는 시각 예술가 김윤식입니다. 디지털 이미지 시대에서 조각적 신체가 지닌 물질적 근거의 가치 쇠퇴에 관한 질문을 품고 조각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 동시대 멀티미디어 환경 안에서 조각이 디지털 이미지로 치환되며 겪는 신체성의 약화를 “조각의 신체적 죽음”이라 바라보고, 이를 보존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금속, 세라믹, 유리 등 매우 단단하고 반영구적인 조각 재료와 비디오나 기계 장치 등의 매체를 혼합하여 움직이는 조각을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떤 특정한 계기가 있기보다는, 꽤 어릴 때부터 미술을 해왔다 보니 다른 삶의 방향을 생각해 본 적이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운이 좋게도 학부 과정에서 좋은 동료를 만나게 되어 작업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고, 예술에 관한 공부도 너무 좋아서 계속하다 보니, 관성으로 이렇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릴 때는 작업하는 예술가 이외의 다른 삶의 방향도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그것 또한 창작자라는 범주 안에 놓여 있더라고요. 작업을 통해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와 삶을 풀어가다 보니, 이제는 쉽지는 않지만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답이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지만, 그렇기에 계속 작업하며 탐구해 나가고 있습니다.

‹고스트 터치-내 다리와 발과 바퀴로는 멀리는 가지 못해›, 2025, 유리 위에 텍스트 각인, 스테인레스 스틸, 알루미늄, 폴리우레탄, 모터, LED, 아두이노 프로세서, 45 × 59 × 34.5 cm

‹고스트 터치-내 다리와 발과 바퀴로는 멀리는 가지 못해›, 2025, 유리 위에 텍스트 각인, 스테인레스 스틸, 알루미늄, 폴리우레탄, 모터, LED, 아두이노 프로세서, 45 × 59 × 34.5 cm

‹고스트 터치-내 다리와 발과 바퀴로는 멀리는 가지 못해›, 2025, 유리 위에 텍스트 각인, 스테인레스 스틸, 알루미늄, 폴리우레탄, 모터, LED, 아두이노 프로세서, 45 × 59 × 34.5 cm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2024년 2월에 독일에서 졸업한 이후로 작업실이 걱정이었는데요, 어떻게 하다 보니 1년 동안 PS61이라는 단기 레지던시 스튜디오를 받게 되어 입주해 있다가 2025년 7월부터는 뮌헨시 문화국으로부터 Domagkateliers라는 5년짜리 장기 레지던시 스튜디오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이곳에서 좀 더 안정적인 작업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100명 정도의 뮌헨 기반 예술가가 각자의 방에 입주해 있는 규모가 큰 레지던시 스튜디오 시설인데, 함께 활동하는 동료가 많이 입주해 있어서 여러 가지 교류를 하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제 작업실은 넓지는 않지만, 층고가 높아서 공간 제약이 크지 않아 다양한 작업을 시도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작업실 구조를 조금 바꾸어보고자 복층 공사를 진행 중인데, 곧 시작해서 마무리가 되면 더 안정적인 작업 공간이 될 것 같아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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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입주했던 뮌헨 PS61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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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입주했던 뮌헨 PS61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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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입주 중인 뮌헨 Domagkateliers의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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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입주 중인 뮌헨 Domagkateliers 내 작업실 풍경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살면서 여러 가지 사소하고 작은 일, 현상, 경험이 모두 제각기 다른 곳에서 저에게 다가오는데, 그것이 언뜻 서로 무관한 요소지만 모여서 어떤 맥락을 이루면, 인과 관계를 맞추어 보기도 하고 저만의 방식으로 재맥락화하여 “아, 이런 걸 좀 해보고 싶다.”라는 결론에 다다르는 것 같아요.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하고 느끼는 사소한 무언가가 쌓여서, 그게 어떠한 맥락을 이룰 만한 덩어리가 될 때 다루는 것 같아요. 그 이후에는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작업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기는데, 저는 기본적으로 물질 조각을 주로 다루다 보니 항상 어떠한 물질을 어떻게 다루어 작업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작업해요.


저는 한 번에 여러 재료를 다루는데, 재료마다 물질적 특성이 다르다 보니 다루는 방식도 다릅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조각을 만들다 보니 작동 조건도 해결해야 해요. 그렇다 보니 한 단계마다 마주하는 장애물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작업을 합니다. 그렇게 작품이 하나 나오고 나면 그게 프로토타입이 되기도 해요. 그 프로토타입을 제작하며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계획을 세워 다음 작업을 이어 나가요. 이런 식으로 3~4번 반복하면 한 시리즈나 프로젝트가 끝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음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면 다시 이러한 과정의 새로운 반복이 되지만, 이전에 했던 작업에 다른 것을 더해 계속해서 무언가를 쌓아가며 작업을 지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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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돌은 없는 거야», 유영공간,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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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돌은 없는 거야», 유영공간,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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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가의 작업 과정 사진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최근 서울 유영공간에서 개최한 개인전 «현자의 돌은 없는 거야»에서 선보인 작업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전시는 요즘 제가 느끼는 조각가로서 마주한 어떤 ‘무력감’에서 출발했습니다. 부업으로 전시 기록 촬영을 하며, 수많은 작품이 전시 후 폐기물로 처리되거나 기약 없이 해체되어 사라지지만 SNS 등 웹 기반 매체에서의 ‘이미지 소비’는 오히려 더 중요해지는 현상을 자주 목격하게 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조각의 물리적 실체는 사라지고 매끈한 데이터로만 존재가 증명되는 상황을 마주하며, 조각과 조각을 촬영한 디지털 사진 간의 관계에서 지위 역전이 일어나는 현상을 ‘조각의 물리적(신체적) 죽음 또는 쇠퇴’라 보고 있습니다. 과연 조각의 신체는 디지털 이미지가 되기 위한 일시적인 중간 과정으로 전락한 것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를 다룬 다섯 점의 작업을 선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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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mzug›, 2024, 4K 비디오 (21분 40초), 2023년 촬영, 천장에 프로젝션

먼저 비디오 설치 작업인 ‹Umzug›는 저희 집안 조상 묘 3대의 이장 과정을 다큐멘터리로 담았습니다. 마치 땅속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설치하여, 관객은 세라믹으로 만든 차가운 선베드에 누워 천장에 투사되는 영상을 관람하게 됩니다. 죽은 인간의 신체를 보존하는 과정을 촉각적, 시각적, 공간적 감각 경험과 결합하여 신체 존재의 리얼리티를 다루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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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ration_crystallized 14days›, 2024, 세라믹, 스테인레스 스틸, 황동, 비디오(1.5인치 디스플레이), ESP32 프로세서, 8.5 × 7.8 × 18cm

이 작업을 계기로 조각의 신체와 보존이라는 주제에 본격적으로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그 연장선에 있는 ‹Migration› 시리즈는 폐기되거나 보존할 수 없게 된 기존 조각들에 새로운 신체를 부여하려는 조각적 시도입니다.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같은 디바이스의 마이그레이션 기능을 조각적 방식으로 풀어냈으며, 유골함과 같은 형식을 갖춘 세라믹 바디에 텍스트와 그래픽 애니메이션이 재생되도록 하여 반영구적으로 오래 지속될 조각의 새로운 신체를 제시했습니다.

‹고스트 터치-두껍게 내리는 비›, 2025, 유리 위에 텍스트 각인, 스테인레스 스틸, 알루미늄, 폴리우레탄, 모터, LED, 아두이노 프로세서, 20.5 × 11 × 105 cm

기계 장치를 활용한 ‹고스트 터치› 시리즈는 스마트폰 인터페이스의 세로 스크롤링 동작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작업입니다. 영화 크레딧처럼 유리 위에 각인된 텍스트가 빛과 함께 회전하며 나타나지만, 정작 이 텍스트는 파편화되어 읽히지 않으며 어떤 상호작용도 수행하지 않습니다. 디스플레이를 만지며 상호작용을 하는 기능적 수행 대신, 한정적 물질로 이루어진 유리와 기계 장치라는 ‘물리적 덩어리’로서만 기능하게 하여 조각적 만듦에 집중했던 작업입니다. 어찌 보면 디지털 인터페이스와 웹 기반의 스크롤링이 실제로 가지는 물질성을, 비약을 통해 폭로하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만지는 스마트폰 화면과의 상호작용을 실제로 가능케 하는 물질적 기반 시설에 관한 생각도 많이 했고요.

‹12개의 기둥으로 지어진 0g의 세계›, 2026, 세라믹, 스테인레스 스틸, 알루미늄, 필름 위에 UV 프린팅, LED, 모터, 비디오(3.5인치 디스플레이), ESP32 프로세서, 14 × 12.5 × 26.5 cm

마지막으로 신작인 ‹12개의 기둥으로 지어진 0g의 세계›는 두 가지 다른 속성의 애니메이션을 병치한 움직이는 조각입니다. 필름 위에 프린트된 12프레임의 컷이 회전하며 만들어내는 물질적 영상과, 스크린에서 재생되는 디지털 영상을 한 화면에 병치시켜 비디오 이미지의 무게감에 대해 조각적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작업이 이번 전시의 개념적 핵심을 가장 직접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작업이 아니었는지 생각합니다.


전시 제목인 «현자의 돌은 없는 거야»는 이러한 작업을 관통하는 제목이라고 생각하여 붙였습니다. 디지털 미디어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변환하고 보존해 줄 ‘현자의 돌’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저는 오히려 디지털로 치환 될 수 없는 조각의 촉각적 질감과 부피감을 물리적 공간 안에 끝까지 붙잡아두고자 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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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d, Lapis Philosophorum’s just a legend›, 2025, 세라믹, 금속, 2채널 비디오(5.1인치 디스플레이), 라즈베리 파이 프로세서, 32 × 9 × 24 cm

최근 작업에서 만족스러웠던 점과 불만족스러웠던 점이 궁금합니다.

최근 서울에서 했던 개인전에서 제가 해오던 여러 작업을 그래도 너무 억지스럽지 않게 맥락화하여 전시해서, 그로부터 다양한 피드백을 얻었던 것이 만족스러운 결과였던 것 같네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한국에서의 첫 활동이다 보니 전시에서 조금 욕심을 냈던 것 같아요. 제 작업을 이것저것 조금 넓은 범위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저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그게 전시에서 좀 아쉬워요.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을 여쭤봐도 될까요?

제 일상 패턴은 생각보다 단순해요. 반 이상의 시간은 작업실에서 제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머니잡으로 다른 작가의 작품이나 전시 촬영을 하는 일과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큐레이터가 전시를 기획할 때 필요한 시각적, 기술적 코디네이팅을 하는 업무를 자주 해요. 그러다 보니, 가까운 출장을 가거나 미술 관계자와의 미팅을 종종 합니다. 


일과 관련된 것 이외에는 요리를 좋아해서 밥하는 시간이 꽤 많아요. 여가 시간에는 영화나 만화를 보는 시간도 꽤 많고요. 과거에 베이시스트로 친구들과 밴드를 취미로 했던 적이 있어요.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것도 좋아해서 조금 여유가 있을 때는 취미로 1인 밴드 음악 작업도 하는데, 어디까지나 취미 수준의 여가 활동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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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the Soul without Body›, 2024, 스테인레스 스틸, 세라믹, 유리, 면직, 폴리에스테르, 알루미늄, 황동, 비디오(26인치 디스플레이), 50 × 40 × 203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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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the Soul without Body›, 2024, 스테인레스 스틸, 세라믹, 유리, 면직, 폴리에스테르, 알루미늄, 황동, 비디오(26인치 디스플레이), 50 × 40 × 203 cm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요즘 화두가 되는 AI가 미술 생태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최근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조각 매체에서 조각의 신체와 그것의 디지털화, 이미지화, 그리고 소비거든요. 즉, 신체가 받아들이는 물질적 조각과 디지털 환경에서 이미지의 무게감에 관하여 다루다 보니, AI와 같은 디지털 매체 또는 도구가 조각이라는 물질 기반의 매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이러한 환경에서 조각가가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AI 기술에 대해서는 작업에서 다룰 흥미를 딱히 많이 느끼지는 않지만, 이미 우리 삶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기술이다 보니 저를 포함한 동시대 예술가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한번 깊이 생각해 볼만하다 보니 관심이 많이 가요.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저는 자신을 여러 방면에서 다소 산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관심사가 끊임없이 옮겨가고, 머릿속에 뒤섞인 수많은 생각의 파편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혼란을 정리해 보려고 파편 사이의 맥락을 구축하고 인과관계를 집요하게 따지는 태도가 저만의 방식이 되어, 이제는 이러한 방법이 삶과 작업 전반에 깊게 배어들게 된 듯합니다.


문득 떠오르는 사소한 잔상들을 붙잡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것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맥락화하는 과정은 제게 일종의 생존 방식과 같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과거의 작업과 현재의 고민을 대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돼요. 텅 빈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파편화된 기억과 데이터를 재조합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 작업을 계속해서 이어 나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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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rnal stage›, 2024, 스테인레스 스틸, 세라믹, 알루미늄, ABS 플라스틱, 모터, 아크릴, 황동, 듀얼채널 비디오, 사운드, 62 × 62 × 206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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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rnal stage›, 2024, 스테인레스 스틸, 세라믹, 알루미늄, ABS 플라스틱, 모터, 아크릴, 황동, 듀얼채널 비디오, 사운드, 62 × 62 × 206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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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rnal stage›, 2024, 스테인레스 스틸, 세라믹, 알루미늄, ABS 플라스틱, 모터, 아크릴, 황동, 듀얼채널 비디오, 사운드, 62 × 62 × 206 cm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저는 슬럼프가 온 적이 한두 번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답답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슬럼프가 온다는 것은 작업에서 무언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 꽤 길게 쌓여있는 상태잖아요? 이것을 자각했을 때가 작가가 한 단계 퀀텀 점프를 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작가로서 슬럼프가 극복의 대상이라고 느끼진 않아요. 그만큼 무언가가 충분히 쌓였다는 것이니, 내가 어떤 작업을 해왔고 이제 무엇을 시도해 봐야 하는지 조금 더 깊이 고민하며 작업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 슬럼프도 발전의 계기로 기억되는 것 같아요.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점점 더 많은 프로젝트를 하다 보니 작업 이외의 많은 일에 있어서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조금씩 버거워요. 얼마 전 서울에서의 개인전처럼, 제가 주로 활동하는 곳이 아닌 매우 먼 거리에서의 프로젝트도 직접 모든 것을 해야 하는 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작업하고 어떻게 일을 처리할지에 관한 저만의 프로토콜을 만들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 고민하고 있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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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elfie of dead pigeon that can‘t die #2›, 2023, 세라믹, 스테인레스 스틸, 모터, 프로펠러, LCD 디스플레이, 아두이노 프로세서, 42 × 21 × 12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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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elfie of dead pigeon that can‘t die #2›, 2023, 세라믹, 스테인레스 스틸, 모터, 프로펠러, LCD 디스플레이, 아두이노 프로세서, 42 × 21 × 125 cm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창작자로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는 ‘정직함’과 ‘스스로 질문하는 태도’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가치가 창작 과정에서 평행선을 이루어 서로를 지탱하며 나란히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정직함이란 타인을 향한 도덕적 정직이라기보다, 창작자와 창작물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에 관한 것이에요. 작업하는 시간 동안 작업물에 대해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고민이자 노력인 셈입니다. ‘내가 이 작업을 왜 하고 있는가?’, ‘왜 이렇게 하고 있는가?’, ‘이것을 하며 내가 탐구하려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은 때론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어서 막막한 것 같아요. 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을 멈추지 않고 스스로에게 던질 때, 창작의 동력이 일시적인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페이스를 만드는 지속성을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혼란스러운 생각의 파편 속에서도 나만의 맥락을 잃지 않으려는 비판적인 시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자기 모습에 정직하려는 태도가 작업을 지속하게끔 만드는 것 같아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제가 누군가에게 노하우나 팁을 드릴 수 있는 위치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즘 같이 극단적인 속도감의 시대에서 창작을 지속하기 위해 경계하고 노력해야 하는 부분은 ‘외부와의 적당한 거리 유지’이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이 지점이 창작자에게는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숙제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시대의 흐름이나 타인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전시나 공연, 발표와 같은 여러 형태로 세상과 관계를 맺는 순간을 필연적으로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흐름에 매몰되기보다, 창작자 본연의 고유성과 깊이에 더 집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외부 세계에 너무 맞추기보다는 ‘내가 이것을 왜 지속하려 하는가?’, ‘앞으로 어떻게 나만의 궤적을 그려 나갈 것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맥락을 찾아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 맥락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를 선명하게 알려주며, 결과적으로 창작을 멈추지 않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 같아요. 앞서 말씀드린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게 질문하는 태도와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입니다. 분야는 다르더라도, 자신만의 호흡으로 중심을 잡으려는 이 태도가 창작의 길을 걷는 많은 분에게 지속을 위한 작은 조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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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ost touch_Not your usual finger-tap scroll›, 2025, 유리, 스테인레스 스틸, 폴리우레탄, 알루미늄, LED, 모터, 아두이노 프로세서, 48 × 50 × 20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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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ost touch_Not your usual finger-tap scroll›, 2025, 유리, 스테인레스 스틸, 폴리우레탄, 알루미늄, LED, 모터, 아두이노 프로세서, 48 × 50 × 205 cm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제가 해왔던 작업 또는 전시가 뜯어볼 만한 점이 많은 작가로 기억되고 싶네요. 스스로 정리되지 않은 무언가를 작업으로 풀어나가는데, 그렇다 보니 다양한 것이 작품에 조금씩 담겨요. 때로는 그게 오해의 소지가 되기도 하지만, 그래서 다양한 이야기를 해 볼만한 작품을 만들었던 작가로 기억되고 싶네요.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크게 바라는 게 있다기 보다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작업을 지속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단단한 나의 것을 구축해 나가고 그것을 다양한 곳에서 전시를 통해 보여주며 작가 활동을 계속해 나가는 것, 그 정도면 꽤나 이상적인 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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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김윤식(@ssik.k)은 디지털 이미지 시대에서 조각적 신체가 지닌 물질적 근거의 가치 쇠퇴를 화두로 독일 뮌헨에서 조각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시각 예술가이다. 최근 서울에서 개인전 «현자의 돌은 없는 거야»(유영공간, 2026)을 가졌으며 «TACKER 2025»(Galerie der Künstler, 2025), «Inside the woke cube»(알카모 현대미술관, 2024) 외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뮌헨시 문화국 지원의 Domagkatelier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 중이다. 중앙대학교 조소과 학사과정 이후 뮌헨 국립 조형예술대학 (prof. Alexandra Bircken 사사)에서 diplom 학위와 Meisterschüler 과정을 마쳤다.

그 외에 2024년 ‘바이에른 문화상(Kulturpreis Bayern 2024)’과 ‘Erwin & Gisela von Steiner 재단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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