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밈 원정대: 오늘부로 ‘주접 밈’ 지지를 철회한다

Writer: 김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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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제목만 보면 ‘주접 밈’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뒤로 여러 말이 붙으면 주접 밈에 대한 끝없는 찬가가 시작된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소셜미디어 댓글 창에 우르르 출몰하는 주접 밈의 오묘한 세계에 대해 ‘밈 원정대’를 연재하는 김경수 님이 일타로 정리했습니다. 인터넷 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르를 그냥 지나치기엔, 밈 원정대를 이끄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일까요. (후후) 오타쿠에서 탄생한 ‘덕’ 개념이 K-팝 아이돌 팬덤과 결합해, 덕질하는 마음을 유머러스하게 승화시킨 주접 밈은 이제 생태계를 가리지 않고 소셜미디어를 뒤덮고 있습니다. 덕질이 위기에 처하는 시대일수록 그 가치가 더욱더 빛나는 주접 밈의 세계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나의 사랑, 나의 빛, 나의 어둠, 나의 삶, 나의 기쁨, 나의 슬픔, 나의 안식, 나의 영혼, «비애티튜드»…의 아티클에서 지금 바로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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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통사고의 순간이다. 첫눈에 반한 아이돌이라든지, 아이돌의 심쿵 모먼트를 발견할 때 흔히 저러하다. 솔직히 우리는 예쁘거나 아름다운 상대를 만났을 때 과장된 표현을 잘 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예쁘다’ 혹은 ‘아름답다’ 이상의 말은 느끼하다는 인상만 남긴다. 영화 ‹카사블랑카›의 명대사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는 할리우드 스타나 이탈리아 사람에게 어울리지, 한국 사람에게는 영 부담스럽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한 게 주접 밈이 아닐까 싶다.

생각지도 못했다. 이세계물도 아니고, 클래식 애호가이던 내가 ‘레드벨벳Red Velvet’ 덕후가 되다니. 2016년쯤이었나. 레드벨벳 덕후인 친구가 한 번만 ‘러시안 룰렛’과 ‘Dumb Dumb’의 뮤직비디오를 봐달라고 졸라서 못 이기는 척 보았다. 키치하고도 발랄한 색감의 미장센, 반항과 놀이를 넘나드는 전위적 서사, 각 멤버의 매력까지. 모든 것이 ‘문화컬쳐’였다. 그다음 날부터 레드벨벳 노래가 내 플레이리스트를 점령했다. 얼마 뒤에는 하루라도 레드벨벳 MV를 안 보면 기분이 싱숭생숭해 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 몰아치는 감정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마땅한 단어나 표현, 속담이 없었다. (이제는 흔하디흔한 말이 되었지만) 소셜미디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던 ‘덕통사고(덕질+교통사고)’라는 주접 밈을 본 다음에야 체증이 풀렸다. 속을 쓸어내리는 개비스콘 아저씨처럼 말이다. 내가 느낀 충격을 그만큼 잘 표현해 주는 밈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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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안 룰렛’ MV의 명장면. ‘러시안 룰렛’은 레드벨벳 MV 중에서도 해석의 여지가 분분하다. ‹The Itchy & Scratchy Show› 등 미국 애니메이션에 대한 오마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마주 등 온갖 시각적인 요소와 의식의 흐름에 가까운 난해한 진행 등이 매력적이다. 개인적으로는 다섯 소녀가 예측불가능한 행동을 통해 여성이 타인에게 해석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는 게 흥미롭다. 체코 뉴웨이브 영화 거장, 베라 히틸로바Věra Chytilová의 ‹데이지즈Daisies›(1966)와 결이 비슷하다.

주접 밈은 이제 일상적으로 쓰인다. 아이돌과 관련된 게시물을 볼 때마다 “○○○에 대한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든지, “나 ○○ 좋아했네”, “나 몇 살인데 동년배들 다 ○○ 좋아한다.” 등의 댓글이 달려 있다. 이 외에도 “○○ 인기 거품 아냐? 언빌리버블” 식의 웃긴 말장난도 가득하다. 지금껏 다룬 ‘음MAD’나 ‘리믹스 밈’,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의 ‘상황극 밈’ 등을 생각해 보자. 이러한 밈은 제작자가 합성 소스를 가지고 독보적인 콘텐츠를 만들어 공유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 반면, 주접 밈은 아이돌 음방 등 특정 콘텐츠에 대한 반응에 그치고, 보통 정형화된 문장을 되풀이한다. 최근에는 ‘기습숭배’라는 주접 밈의 변형이 등장하기도 했다. 뭔가 웃기지 않거나 뻘글이라 여겨지는 게시물에 급작스럽게 “새삼 페이커가 대단하다고 느껴진다”라며 프로게이머 페이커Faker를 찬양하는 댓글을 다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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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페이커 생각만 한다는 것을 이토록 어지럽고 의식의 흐름에 가깝게 이야기할 수 있다니… 아무 말 대잔치와 주접의 만남은 주접 밈의 위력을 한껏 드높인다.

내가 아는 한, 주접 밈의 역사는 2014~15년쯤부터 시작됐다. 주접 밈의 탄생에는 여러 복잡한 배경이 있다. 우선 덕후라는 말이 당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덕후의 어원은 일본어 오타쿠オタク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오타쿠는 비웃음거리였다. 2010년 1월 27일 방영한 ‹화성인 바이러스› ‘십덕후’ 편에 나온 ‘오덕페이트’를 기억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는 ‹마법소녀 리리컬 나노하›에 나온 페이트 테스타로사 전신 베개를 들고 2D 캐릭터와 결혼하겠다고 만천하에 외쳤다. 이는 일파만파를 일으켰고, 이후 오타쿠에게는 사회성이 부족하고, 뚱뚱하고, 안경을 쓰고 있다는 낙인이 덧씌워졌다. 오타쿠가 실은 아니메アニメ나 특촬물 등 일본 서브컬처를 전문적으로 파고드는 애호가에 더욱 가까운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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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오덕페이트. 오타쿠 이미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며 오타쿠 사이에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베개와 결혼한 남자라고 외국에까지 기인으로 소문났으니 오죽할까. 지금은 인간 여성과 결혼해 잘 사는 중이라고.

2010년대 중반 이후, 대중은 프랑스를 음역해 불란서(佛蘭西)라 부르듯, 오타쿠를 ‘오덕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파생한 ‘덕’은 대상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는 어미가 되었고, 이를 활용한 신조어가 계속 탄생했다. 연극과 뮤지컬 팬은 ‘연뮤덕’, 클래식 팬은 ‘클덕’, 역사 애호가는 ‘역덕’이라 불렸다. 더불어 어떤 대상을 덕질하기 시작한 순간을 ‘입덕’, ‘덕통사고’라고 호칭했다. 덕질하는 대상을 통해 한 사람의 취향이 드러날 수 있다면, 덕질은 타인이 그를 파악하는 정체성 중 일부인 셈이다. 마치 소개팅에서 인생 영화로 서로의 취향을 어렴풋이 가늠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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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뮤덕 친구를 볼 때마다 존경심이 든다. 오로지 연극과 뮤지컬을 보기 위해서 그 나머지 시간을 갓생으로 보내고 있어서다. 또 한 달에 공연은 몇 번이나 가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덕후라는 단어를 적극적으로 흡수한 주체는 아이돌 팬덤이다. 2015년은 K-팝의 최전성기를 이끌게 되는 BTS, 블랙핑크, 트와이스, 레드벨벳 등 3세대 아이돌이 데뷔하거나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시기다. 그때 일상화된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아이돌 덕후가 태어났다. 특정 집단이 단단하게 뭉친 팬카페와 다르게, 개인이 산발적으로 존재하는 소셜미디어에서는 유사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뭉치고, 정체성을 형성하려면 적당한 키워드가 있어야 한다. 덕후는 연대감을 생성하고 팬덤의 언어를 구축하는데 더없이 적절한 단어였다. ‘찍덕’과 ‘홈마’ 등 팬덤 내 역할을 나누거나 머글과 덕후 등 일반인과 팬을 나누기도 했다. 즉, 팬덤 내부의 은어를 친근하게 포장해 준 것이다. 아이돌 팬덤이 빠순이, 빠돌이로 불리며 과거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사실을 생각해 보자. 오타쿠의 이미지를 중화한 덕후는 팬덤의 이미지를 중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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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시절에 대학 축제를 많이 다녔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대학 축제 공연의 맨 앞 열은 대부분 찍덕의 몫이었다. 공연 시작 5시간 전부터 대포 카메라를 들고 모이는 집념에 새삼 놀랐다. 과연 저 에너지와 돈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저 카메라는 얼마짜리일까, 생각하다 보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다만 팬으로 열렬히 마음을 고백하는 것보단 선을 지키면서 앨범을 한 장이라도 더 사고, 스트리밍을 더욱더 빡세게 돌리는 게 자기가 덕질하는 아이돌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돈쭐낸다’라는 유행어에서 드러나듯, 우리 사회는 이제 타인을 감정적으로 지지할 때 응원보다는 소비를 권장한다. 응원은 한때뿐이지만 매출은 통장에 영원히 남는 법이다. 더불어 열렬한 애정은 자칫 사생팬 등 아이돌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 팬들 입장에서는 서로의 덕질을 존중하는 선에서 암묵적인 룰을 지키는 게 상식이 됐다. 아이돌은 생산자로, 팬은 소비자로 머물러야만 하는 현실은 유사 연애 감정을 상업화한 아이돌 시장의 역설 중 하나다. 팬의 열정적인 감정은 억눌리기 마련이다.

미국의 SF 블랙 코미디 애니메이션 ‹퓨처라마Futurama›에서 비롯한 밈으로 “어머 저건 사야 해~” 격의 밈이다. 살 만한 가치의 물건이 있을 때 무조건 사야 한다는 용례로 쓰인다. 한국에서는 “돈쭐내자”로 발전했다. 돈쭐내자는 선행을 베푼 가게에서 구매를 많이 하며 그곳이 망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소비자 운동이다. 보통 이런 가게 사장님들은 겸손한 탓에 선행이 밖으로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에 대한 지지를 드러내고 싶을 때, 겸손 따위는 필요 없으니 내 돈을 가져가라고 말한다. 이러한 퉁명한 감정 표현과 이미지의 과격함이 맞아떨어져 계속 밈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때 덕질하는 마음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창구는 댓글 창뿐이었다. 2015년쯤부터 ‘씹덕사’와 ‘심쿵사’라는 짤방이 유행했다. 씹덕사 짤을 처음 본 순간이 기억난다. 전형적인 병맛 만화 그림체로 말풍선에 주저리주저리 대사를 적은 짤 말이다, “아예, 거기 관 짜주는 곳이죠. 제가 방금 씹덕사를 당했으니까 관하나만 짜주세요.” 덕질하는 아이돌의 실물을 보았을 때 아우라에 압도당해 잠깐 숨이 멎는 경우가 있다. 나도 레드벨벳을 실제로 보았을 때, 영화 언론 시사회에서 덕질하는 배우를 처음 마주쳤을 때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런데 죽는 건 아무리 봐도 허무맹랑한 과장 아니던가. 그렇기에 더욱더 정확하고 웃긴 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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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쯤 페이스북에서 유행한 씹덕사 짤방이다. 출처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방식으로 초기 씹덕사는 귀엽고 깜찍한 캐릭터로 그려졌다. 나중에는 ‹무한도전› 짤방 등과 결합해 ‘주접스럽게’ 바뀐다.

씹덕사와 심쿵사를 영화 대사로 번역하면 “널 죽을 만큼 사랑해!!” 정도일 테다. 격정이 휘몰아치는 멜로극에서 주인공의 광적인 집착을 상징하는 이 말은 아무리 연인 사이라도 섬뜩하게 들린다. 반면, 씹덕사는 비슷한 뜻이지만 왠지 모르게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고 무해하게 들린다. 아이돌에 대한 사랑, 숭배에 깃든 비장함을 없애고 우스꽝스러움을 과장한 채로 드러내서다. 나아가 씹덕사나 심쿵사하는 상황이 여러 짤방으로 제작되면서, 덕질은 서서히 하나의 밈이 됐다. 아이돌을 사랑하는 마음을 누가 더 창의적인 방식으로 고백하는지 여부가 밈의 핵심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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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마스크걸›에서 “아이시떼루”를 외치는 주오남은 오타쿠의 스테레오타입을 한데 모은 존재다. 안재홍의 인생 연기(?)라고도 불리는 이 캐릭터는 거북한 리얼함 때문인지 인터넷 밈으로 잠깐 쓰이다가 사라졌다.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유행한 덕질 밈은 어느덧 X(옛 트위터)에 퍼졌다. 정치적 공론장으로 쓰이던 트위터는 2017년 이후로 서브컬처와 아이돌 팬덤의 성지로 승격됐다. 그런 과정에서 주접 밈이 탄생했다. 주접은 ‘음식 따위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다. 심을 부리며 추하고 염치없게 행동하다’라는 뜻의 ‘주접떨다’에서 파생한 말이다. 이때 주접이란 단어가 지닌 추하고 지저분한 뉘앙스를 살리는 게 중요하다. 아이돌과 팬 사이에 그어진 선을 넘어 추한 방식으로라도 자기 마음을 드러내겠다는 의지가 담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난스럽고 웃긴 댓글을 다는 게 주접 밈의 규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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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음차를 따서 짓는 밈은 오래전부터 유행했다. 음차를 따더라도 제법 뜻이 맞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주접 멘트는 그야말로 발음만 남아 있다. 의미와 상관없이 “내가 사랑한다”만 외치면 되기 때문이다.

주접 밈은 대부분 언어유희에 기반한다. 280자라는 글자 수 제한 때문에 그 안에서 최대한 웃기게 적어야 하는 X의 개성과도 이어진다. X는 텍스트로 작성한 게시물을 캡처해 공유하면서 밈이 되는 플랫폼이라 굳이 웃긴 짤방이 필요치 않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텍스트를 웃기게 적으면 그만이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팬 계정은 익명으로 운영되기에 싸이월드식 문체부터 시작해 정말 갖가지 문체가 나타난다. X뿐만 아니라 디씨의 ‘해외축구 갤러리’를 중심으로 축구선수 손흥민에 대한 주접 밈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손흥민이 득점할 때마다 “손흥민은 공놀이 좀 하는 수준 아님?” “주인공놀이” 식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 갤러리에서는 프로게이머 페이커를 숭배하는 “젠장, 또 대상혁이야”, “새삼 페이커가 대단하다고 느껴지네” 등의 주접 밈이 활개를 쳤다. 이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생긴 주접 밈이 소셜미디어에 한데 뭉치게 되면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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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축갤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밈이라 볼 수 있다. 손흥민 드립 모음집이 나오기만을 기다린 순간이 있을 정도로 모든 드립이 레전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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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축갤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밈이라 볼 수 있다. 손흥민 드립 모음집이 나오기만을 기다린 순간이 있을 정도로 모든 드립이 레전드다.

개인적으로 주접 밈 중 가장 흥미로운 예시는 “○○○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다. 사실 이 밈은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글이었다. 원게시물은 다음과 같다.

제목: 인사문제로 오늘부로 문재인 지지를 철회한다

오늘부터 지지관계에서 벗어나

문재인과 나는 한몸으로 일체가된다

문재인에 대한 공격은 나에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그야말로 한국 정치의 오랜 고질병인 진영 논리와 팬덤 정치를 함축한 글인데, 지금은 정치적 지지와 덕질의 경계가 사라진 시대다. 정당이 다른 정당을 공격하며 지지 기반을 다지듯, 팬덤도 서로를 견제하고 적대시한다. 이는 서로를 혐오하는 극단주의를 불러올 수 있다. 덕질의 대상과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는 현상은 더욱더 심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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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보수’라는 닉네임 때문에 어그로용 게시물인 게 티 난다. 처음부터 엄청나게 흥한 글은 아니었기에 왜 발굴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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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보수’라는 닉네임 때문에 어그로용 게시물인 게 티 난다. 처음부터 엄청나게 흥한 글은 아니었기에 왜 발굴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흥미롭고도 독창적인 지점은 “○○○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를 K-팝 팬덤에서 차용하는 방식이다. ○○○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는 정치적 메시지 뒤에 “세상의 70억 명의 팬이 있다면 나는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라는 이상한 문장을 더한다. 거기에 소설 『롤리타Lolita』의 유명한 도입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을 패러디한 “○○○, 나의 사랑. ○○○, 나의 빛. ○○○, 나의 어둠. ○○○, 나의 삶. ○○○, 나의 기쁨. ○○○, 나의 슬픔. ○○○, 나의 안식. ○○○, 나의 영혼. ○○○, 나” 등의 문구가 뇌절로 더해져 완전한 꼴을 지니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위험할 수 있는 문장을 일부러 다른 문장과 뒤섞어, 위험을 차단한 것이다. 이런 식의 주접 밈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타인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기보다,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는 자정 작용의 일부라고 생각해 본다. 팬덤화된 정치적 언어를 팬덤의 언어로 뒤틀어 팬덤 정치에 대한 가장 적합한 풍자이자 비판 효과를 만들었다고나 할까. (비슷한 맥락에서 ‘동년배’ 드립은 네이버 뉴스 정치란에 달린 노인층의 젊은 층 사칭(?) 댓글을 뒤튼 것이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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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년배는 네이버 뉴스에서 자주 보이는 댓글이다. “나 20대인데 동년배들 다 문재인 싫어한다” 식으로 노년층이 다른 나이대로 속여 댓글을 다는 식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집단을 사칭하는  허무맹랑함이 인터넷 밈이 되기에 딱이었나 보다. “우리 모두가 ○○○를 좋아한다”보다 “내 동년배들 ○○○ 좋아한다”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주접 밈의 미덕은 덕후가 덕심을 드러낼 수 있는 언어로 기능하는 데 있다. 오로지 대상을 숭배하겠다는 마음을 굳건히 지키려는 덕후의 진심을 드러내는 목적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덕질이 위기에 처하는 시대일수록 주접 밈의 가치는 빛난다. 지금 덕질은 점점 힘겨운 일이 되고 있다. 아이돌은 콘텐츠의 주체이자 동시에 K-팝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는 산물이며, 사람들의 관심으로 지탱하는 관심 경제 시대의 상품이기도 하다. 덕후는 연예기획사가 유도하는 소비 패턴과 그들이 만드는 아이돌의 세계관을 기어이 따라야 한다. 연예기획사의 잘못으로 아이돌이 고생하는 경우도 많으며, 심지어 급작스레 해체하기도 한다. 최애 아이돌이 나락으로 떨어진 후 탈덕하는 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바닥에선 드물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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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은 우리 주변의 누군가에게 쉬이 마음을 내줄 수 없는 시대의 필수적인 마음으로 보인다. 우리는 인플루언서부터 시작해 누구든 덕질할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덕질은 아무리 사랑해도 내 목소리가 닿을 수 없는, 결국 실패에 수렴하는 열정적인 짝사랑이다. 주접 밈은 이런 숙명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타인에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드러내는 도구다. 주접이라는 추한 가면을 쓰고 짝사랑의 언어를 노래하는 아이러니를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밈 연구자로서 그 필연적 속성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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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돌 팬덤 이전에는 빠순이가 존재했다. 사생활 침해, 협박 편지, 숙소 침입 등 스타를 향한 온갖 범죄를 저지르던 시기라 낭만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티켓팅도 없던 시절, 저렇게 앉아 있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하다.

Writer

김경수(@vivre_wasavie)는 영화평론가이자 인터넷 밈meme 연구자다. 학부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화제를 모은 졸업논문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은 지난 6월 동명의 단행본으로 발행됐다. 영화와 인터넷 밈을 동시에 연구하는데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현재 «코아르»에 영화 비평, «여성동아»에 인터넷 밈 비평을 연재하고,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 (FIPRESCI) 한국 지부 정회원이자 인문학 스탠드업 코미디 페이지 ‘인문학적 개소리’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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