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의 작업실을 방문해 공간, 일상과 창작을 위한 도구 그리고 소중한 오브제를 글과 이미지로 소개하는 독창적인 섹션입니다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동양화가이자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교수로 활동하는 이진주입니다.
동양화의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어요. 1학년 때에는 전공을 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여러 분야를 탐색하는데요. 그중 동양화가 제 취향과 성격에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했고,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어요. 동양화를 선택한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작업을 하면 할수록, 생각보다 스펙트럼이 넓은 분야라고 생각해요.
작업실 이곳저곳에 드로잉의 흔적이 보여요. 벽에도 많이 붙어 있고요.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드로잉을 꼼꼼하게, 많이 그리는 편이에요. 하나라도 잊지 않도록 작업실 곳곳에 붙여 놓고 있죠.
드로잉 단계부터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나요?
작품마다 달라요. 어떤 드로잉은 10년 후에 작품이 되기도 하고, 각각의 드로잉이 파편이나 조각처럼 조합되어서 또 하나의 구조를 이루기도 합니다. 작품으로 구현하고 싶어서 벽에 붙여 놓았지만 좀처럼 시작이 되지 않아서 종이가 누렇게 변색한 드로잉도 있어요. 규모가 큰 작품은 구조를 짜는 데에만 6개월 넘게 고민하기도 합니다. 기성 캔버스처럼 크기나 형태를 정하지 않고 입체적인 조각 형식의 작품도 있기 때문에 그 끝을 좀처럼 짐작하기 어려운 경우도 존재하죠. 제 그림은 섬세한 묘사가 필요하긴 해도, 손이 워낙 빠른 편이라 그림 그리는 시간만 순수하게 따지면 길게는 일주일, 짧게는 2~3일 만에 끝낼 때도 있어요.
엄청나게 몰두해서 작업하는 작가님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네요.
맞아요. 대신 하루에 12시간 정도는 집중해서 그린다는 조건이 붙는답니다. 경험치가 쌓이면서 손도 점점 빨라지지만, 특별한 형식의 작품이라면 더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해요. 작년 8월부터 올 7월까지 제주도에 있는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 시네마에서 1년간 전시했던 ‹비좁은 구성›이라는 작품은 완성하는 데 무려 2년이 걸렸어요. 작은 미술관 방 안에 작품이 꽉 들어찬 형태인데요. 하도 오래 작업하다 보니 완성을 기다리는 기대와 설렘보다 오히려 걱정과 불안이 더 컸던 기억이 납니다.
사각형 기성 캔버스와 비교해 작가님의 캔버스는 소재도, 형태도 특별해 보여요.
제가 작업하는 캔버스는 모두 남편인 이정배 작가가 직접 제작을 맡고 있어요. 먼저 제가 종이 위에 실루엣과 여백을 표현하면 나무판 위에 다시 연필과 마스킹테이프를 이용해 전체적인 구조를 잡아요. 그다음 남편이 비례와 형태에 맞게 판을 자르고 광목을 씌우면 작업의 바탕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비정형적인 도형일 때도 있고, 입체적인 형태를 취하기도 해요.
작가님의 작품은 세밀하고 섬세한 묘사가 눈길을 사로잡아요. 특별히 노력하는 점이 있으신가요?
드로잉과 더불어 사진의 힘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요. 그림의 자료로 쓰는 거죠. 인물을 그리는 경우, 보통 제가 검은 옷을 입고 직접 모델을 맡아 배경 천 앞에서 머릿속에 그린 분위기에 맞는 동작과 연출을 합니다. 한 동작을 위해서 수십 장에서 수백 장까지 사진을 찍어요. 그중 제가 포착하고 싶었던 느낌이 잘 살아있는 사진을 고르는데요. 작품에서는 23번째 사진에 있는 손과 641번째 얼굴이 조합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사진 동작을 참고해 드로잉할 때 ‘23의 손’ 같은 식으로 표기합니다.
최근에는 ‹블랙 페인팅› 시리즈를 전개하고 계시죠. 검은색이 무척 묘한 느낌이더라고요.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검정 물감을 캔버스에 칠할 때마다 제가 원하는 만큼 진한 블랙이 아니라서 고민이 많았어요. 한없이 어둡고 극도로 깊은 감정을 지닌, 그래서 수많은 사건을 뒤덮은 것처럼 보이는 순수한 블랙을 꿈꿨거든요. 그러다 남편과 여러 안료 브랜드의 블랙을 섞어서 새로운 블랙을 개발했어요. 안료가 같더라도 정제하는 방법, 바인더와 섞는 색에 따라 최종적인 물감 색이 달라지거든요. 그렇게 완성된 블랙은 기성 물감과 비교해 색과 질감 면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저희는 이 색을 ‘이정배 블랙’이라고 불러요. 남편이 물감을 제조하는 모습은 마치 화학자의 실험 장면처럼 보인답니다.
작가님의 아이덴티티를 잘 보여주는 작품 몇 점을 소개해 주시겠어요?
‹가늠›(2014)은 많은 서사가 수수께끼처럼 하나의 그림에 숨어 있어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는 점이 매력입니다. ‹저지대›(2017)는 사각형에서 벗어난 대형 셰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 작업이에요. 생에 대한 순환과 죽음에 대한 고찰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회화-조각적 성격을 가진 대형 작품으로, 볼 수 없지만 긴밀하게 연결되고 영향력을 가진 세계에 대해 표현한 ‹사각›(2020)도 있네요. ‹0막›(2024)은 흰 막에 둘러싸인 여성 군상을 통해 삶의 무게와 여성성에 대한 은유적 표현을 드러냅니다.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침묵›(2024)을 꼽고 싶어요. ‹블랙 페인팅› 시리즈 중 작가인 제가 좋아하는 장면을 담고 있어요. ‘진짜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통해 오히려 이목구비가 드러나지 않는 인물을 보여주면서 그 너머의 감각을 제시하는 작품입니다.
‹가늠›, 2014,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119.5 × 239.5 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저지대›, 2017,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222 × 550 cm
‹사각(死角)›, 2020,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122 × 488 cm, 122 × 488 cm, 122 × 244 cm, 122 × 220 cm, 아리리오뮤지엄 소장
‹0막›, 2024,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237.5 × 112 cm, 상하이 롱 뮤지엄 소장
‹볼 수 있는-침묵›, 2024, Handmade Leejeongbae black, powdered pigment, animal skin glue and water on unbleached cotton, 109.7 × 81 cm
작업실 책상 옆에 봉투가 하나 붙어 있어요. ‘즐겁고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적혀 있네요.
이슬아 작가의 뉴스레터를 구독한 적이 있는데, 어느 날 ‘즐겁고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문구를 봤어요. 제게 정말 크게 와닿는 말이었죠.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는 저에게 정말 좋아하고, 잘하고 싶고, 기쁨을 주는 일이어서 그걸 좇아 지금까지 왔는데요. 일과 시간에 치여 그 순수한 행복을 무겁고 부담스럽게 느끼는 순간이 종종 있었어요. 당시 이 문구를 읽었을 때도 아마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에게 그림이란 ‘가끔은 터무니없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너무너무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봉투 앞에 커다랗게 써 놓았어요. 작업실을 오가며 즐겁고 터무니없는 일에 관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메모로 남겨서 봉투에 넣고 있죠.
작업하랴, 전시 준비하랴 늘 바쁘실 텐데요. 앞으로 예정된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
오는 10월 19일부터 내년 2월까지 중국 상하이에 있는 유즈 뮤지엄 상하이Yuz Museum Shanghai에서 개인전을 열어요. 모든 준비는 끝난 상태이고, 그 후로 몇 년간 전시 일정이 여럿 잡혀 있습니다. 전시마다 제가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의 형태를 고민 중이에요. 단순히 벽에 걸리는 회화가 아니라, 제가 제시하고 싶은 이미지를 관객이 좀 더 강렬하고 긴밀하게 경험하는 방식을 입체적이고 구조적으로 구상하려고요. 그에 따른 재료와 작업 형식에 대한 실험과 도전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습니다.
주거 공간 내부에 자리 잡은 현재 작업실은 언제부터 사용하셨나요?
5년 정도 됐어요. 예전에는 집과 작업실을 분리했었는데 아이들을 돌보면서 작업도 원활히 하고 싶어서 3층 규모의 주택을 짓게 됐죠. 1층에는 저와 이정배 작가의 작업실이 있는데요. 남편의 목공 작업 도구나 기계들이 무겁기도 하고, 작업할 때 소음도 만만찮아서 자연스레 저희 둘의 작업실을 집 1층에 배치하게 됐어요. 작업실과 연결된 작은 정원에는 토종 야생화와 매화나무, 난초, 국화, 대나무를 심었습니다. 말 그대로, 매란국죽(梅蘭菊竹)이죠. 지금은 꽃이 지는 계절이고 정원도 꼼꼼히 관리하지 못해서 난초가 시들고 말았네요. 자기 집을 지어본 많은 사람들이 그러듯, 다음 집은 정말 잘 지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다음 집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어요.
2층에는 가족 구성원의 방과 거실, 부엌이 있네요.
가족이 주로 사용하는 생활 공간은 전부 2층에 배치했어요. 집을 완공한 건 오래 전인데, 지금의 풍경이 만들어진 건 몇 달이 채 안 됐어요. 집안 곳곳에 위치한 가구와 조형물부터 담, 대문 같은 부분까지 대부분 남편이 만들었거든요. 개인 작업을 하면서 집안에 필요한 걸 채우다 보니 시간이 꽤 걸렸어요. 2층 입구와 부엌 앞의 커다란 여닫이문도 남편이 만들었고, 거실의 큰 책장은 2년 전에 완성한 거예요.
조명을 설치한 방식이 독특해요. 이정배 작가님의 또 다른 구조물을 통해 모빌처럼 연결돼 있어요.
이정배 작가는 그런 구조물 하나하나까지 모두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냥 가구라고 하면 서운해하죠. (웃음) 하나의 작품이라는 개념으로 조명을 다루기 때문에 그렇게 설치하는 것 같아요. 삼베로 감싸서 따뜻한 느낌을 더한 조명도 있고요.
2층 벽에 설치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이정배 작가가 나무로 제작한 ‹해안선›이에요. 남편의 작업은 미니멀하고 추상적이지만, 지극히 현실에서 포착한 요소로 이루어져요. 제부도를 비롯해 인공적으로 간척한 지역의 해안선을 지도상에서 이어보면 그 선이 무척 수직적이고 기하학적인데요. 이를 형상화해서 만든 작품입니다.
대망의 3층은 어떤 공간인가요?
사실 처음부터 3층으로 계획한 건 아니었어요. 시공비 때문에 2층을 생각하다가, 고민 끝에 결국 3층이 되었어요. 저희에게 3층은 예상에 없던 공간이나 마찬가지라, 어떻게 채워야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요. 결국 저희 부부의 작품을 자유롭게 전시하는 갤러리 같은 용도로 사용하고 있어요. 학생들의 논문을 조용히 읽거나 공부를 하기도 하고, 손님이 오시면 이곳에서 맞이해 담소를 나누기도 합니다. 제가 요즘 동양 철학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어서 조용한 독서실이 될 때도 있죠. 어른들의 다락방이자 놀이터, 공부방 같은 느낌이랄까요. 이정배 작가가 실험적으로 만든 작품도 많이 놓았어요. 서 있는 방식의 책꽂이, 연필을 한 자루씩 꽂을 수 있는 연필꽂이 등이죠. 특히 연필꽂이는 드로잉을 위해 언제 어디서나 연필이 필요한 제게 아주 요긴하답니다.
넓은 공간을 채운 작품들에서 두 분의 현재 삶과 예술의 방향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맞아요. 그래서 이 공간에 올라오면 여러모로 환기가 돼요. 일상도 예술적으로 살고 싶지만, 사실 매 순간 그러기에는 쉽지 않잖아요. 일상적인 공간에서는 눈에 보기 싫은 것도 보고,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3층에는 저희가 좋아하고 아끼는 것만 모여 있어서, 왠지 이상향 같은 공간처럼 다가와요. 오래전, 남편이 처음 만든 가구를 보며 아름답다고 느꼈던 그때 그 시절도 생각나고요. 허름한 전셋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할 때는 한스 베그너Hans J. Wegner나 임스 부부가 디자인한 아름다운 가구를 갖고 싶어도 너무 비싸서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그래서 손재주 좋은 남편을 믿고 목공방에서 테이블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상상한 것보다 훨씬 멋진 레드오크 테이블을 만들어와서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았던 기억이 나요. 테이블만 바라봐도 너무 좋아서요.
공간 곳곳에 두 분이 협업한 결과물이 있네요.
이정배 작가의 조각과 저의 페인팅이 함께 한 작품도 있고, 각자 작업한 페인팅이 나란히 대구를 이루도록 구성한 작품도 있어요. 올해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렸던 세월호참사 10주기 추념전에 출품한 작품인데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시기에 저희 마음도 참 어려웠어요. 그때 남편이 마음을 다잡고자 작업실에서 매일 향을 피웠죠. 그 순간을 기억하며 1만 개의 향을 피우고, 그 재를 모아서 물감으로 만든 후, 평면에 칠하고 덧대어 작업했어요. 그 당시 느꼈던 서로의 마음과 의식을 모았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협업보다 의미가 깊은 작품입니다.
세월호참사 10주기 추념전 «우리가, 바다»에서 발표한 ‹볼 수 있는-얼룩›
예술가 부부의 집에는 어떤 작품이 있을까 늘상 궁금했는데요. 선택 받은 작품 간에 공통점이 있을까요?
저희는 다른 작가의 작품도 꾸준히 모으고 있어요. 컬렉션을 관통하는 아주 특별한 공통점이 있는 건 아니지만, 때와 상황, 당시의 저희 취향과 맞아떨어지는 작품들이에요. 유근택, 김기라, 권도연, 우정수, 강철규, 임노식 작가 등의 작품이 저희 집 곳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1층에서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옆에 놓은 강철규 작가의 그림이 가장 최근에 들인 작품이에요. 권도연 작가는 지난 2021년 전시 공간 더소소에서 ‘묘사’라는 주제 아래 2인전을 함께했는데요. 전시 내내 작품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서로의 작품을 하나씩 교환하자고 제안한 끝에 그의 그림을 소장하게 됐어요.
집과 작업실이 연결된 구조의 장단점은 무엇일까요?
사실 작업실의 물리적인 거리는 제게 중요하지 않아요. 자려고 눕더라도 그림에 관한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드로잉을 해야만 하고, 여행을 가서도 눈에 들어오는 소재가 있으면 곧바로 메모해요. 올여름에는 손과 팔이 너무 아파서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여러 번 방문했는데요. 그날만이라도 쉬어야지, 생각하며 가만히 누워 있다 보니,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더라고요. 결국 ‘조금만 그려볼까?’ 하면서 작업실에 내려갔죠. 이처럼 작업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는 건 불가능해요. 작업과 도통 분리되지 못하는 게 저의 즐거움이자 괴로움이죠.
아티스트의 숙명이네요.
제가 지닌 창의력과 잠재력이 작업을 높은 수준으로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할까 봐 항상 긴장과 두려움을 안고 사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제가 바라본 세계와 이를 표현하는 방식으로서 그림을 찾았기에 정말 흥미롭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더 잘 해내고 싶어요.
생활과 작업이 모두 이루어지는 집에서 특히 좋아하는 자리가 있다면요?
남편이 만든 긴 식탁도, 커다란 책장도 좋아해요. 책장 앞에 서 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과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많이 떠오릅니다. 더불어 두 자리 모두 가족이 다 같이 모이는 공간이기도 해요.
책장에는 몇 권의 책을 표지가 보이도록 세워놨어요. 선정의 이유가 궁금해요.
무척 좋아하거나, 최근 읽고 싶은 책이 눈에 띄도록 일부러 빼놓았어요. 책등이 예쁘지 않은 책을 가리는 역할을 병행하기도 해요.
최근에 구입하거나 읽고 있는 책은 무엇인가요?
책장 옆의 낮은 테이블에 모아 놓았는데요. 『깊은 밤의 영화관』, 『인문학 개념어 사전』, 『한국의 전통 한지』 등 분야가 다양해요. 시간이 될 때마다 조금씩 읽으려고요. 함께 놓여있는 책은 박완서 작가님의 『미망』인데요. 올해 민음사에서 새롭게 출간하면서 제 그림을 표지로 사용했어요.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의미 있는 작업입니다.
시집도 제법 많이 꽂혀 있어요.
시집을 좋아해서 자주 사는 편이에요. 살 때 꼭 두 권을 구입해서 한 권은 제가 읽고, 다른 한 권은 주변 사람에게 선물해요. 가깝게 지내는 작가의 전시 오프닝에 가거나, 지인과 만남을 가질 때 시집 한 권을 포장해서 손 편지와 함께 주는 걸 좋아해요.
다양한 책 중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책을 꼽아 본다면요.
전설적인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피나 바우쉬Pina Bausch를 오래전부터 정말 흠모해 왔어요. 빔 벤더스Wim Wenders가 감독을 맡은 영화 ‹피나Pina›는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봤고, 바우쉬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꾸준히 봐요. 그의 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섬세한 손과 몸동작에서 많은 영감을 받습니다. 제 작품에도 신체의 동작들이 많이 나오는 만큼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얻기도 해요. 오래전, LG아트센터에서 했던 바우쉬의 공연을 보고, 오랫동안 마음이 압도당한 게 기억나네요.
평소 작업할 때 주로 어떤 도구를 사용하세요?
예전 이합 장지나 삼합 장지에 그림을 그릴 때는 동양화 붓을 주로 사용했어요. 요즘에는 고운 광목 위에 그림을 그리는데요. 광목은 종이에 비해 표면이 좀 더 질겨서 올 사이사이로 물감이 파고들거나 잘 발리지 않아요. 여러 실험을 거친 끝에 현재의 작업에는 수채화 붓이 더 잘 맞는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굉장히 얇은 선을 그려야 할 때는 동양화 붓을 쓰지만, 대부분의 경우 수채화 붓으로 그림을 완성하는 편이에요.
스케치할 때는 어떤가요?
주로 연필로 드로잉을 해요. 가장 흑심이 연하고 딱딱한 B 연필을 특히 좋아해요. 드로잉을 할 때는 연필 끝이 최대한 뾰족한 상태를 선호해서 자주, 많이 깎아 놓고요. 드로잉을 위한 노트는 특별히 가리지 않아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곧바로 그릴 수 있도록 빈 노트를 집안 여기저기에 펼쳐 놓는 편이죠. 연필이나 지우개는 그림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손에 익어서 그런지, 잠자리가 그려진 톰보Tombow 제품을 가장 애용합니다.
작업 도구가 필요할 때 주로 어디에 가시나요?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홍대 앞 호미화방에 가장 자주 가고요. 인사동에도 필방이 많지만, 역시 익숙한 가게가 좋더라고요. 물감은 일본 브랜드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라 온라인 주문도 자주 이용해요. 키쇼(吉祥)에서 나오는 형광 안채 물감 세트는 맑고 높은 채도의 색을 사용하고 싶을 때 기존 물감과 섞어서 사용하기 좋습니다.
새롭게 알고 싶거나 도전해 보고 싶은 도구나 재료가 있나요?
‘이정배 블랙’을 처음 시도한 지 7년이 흘렀는데요. 여전히 계속 실험하는 중이에요. 비율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긴 한데, 만드는 날의 온도나 습도, 여러 상황에 따라 색과 물성, 점성 등이 미세하게 달라지거든요. 아직까지는 완벽에 가까운 블랙을 탐구하는 일에 좀 더 시간을 들여야 할 것 같아요. 블랙 안에 그리 다양한 팔레트가 있다는 사실을 오랜 시간에 걸쳐 알게 되면서, 새로운 블랙이 탄생할 때마다 하나의 색이 지닌 깊이와 영역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혹시 작업할 때 음악을 들으시나요?
남편 작업실이 문 하나로 이어져 있어서 한 사람이 음악을 틀면 함께 듣게 돼요. 예전에는 음악에 대한 제 성향이 뚜렷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알고리즘이나 스트리밍을 통해 자동으로 재생되니까 취향이 조금 희석된 느낌이에요. CD로 들을 때는 첫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뮤지션이 원하는 순서와 맥락을 따라가는 걸 좋아했거든요. 빌 에반스Bill Evans, 리차드 보나Richard Bona, 팻 메스니Pat Metheny 같은 뮤지션을 좋아하고, 제3세계 음악도 즐겨 들어요. 예전에는 남편이 최백호 노래를 들을 때 이해를 잘 못했는데, 이제 가을이 되면 제가 더 생각나더라고요. (웃음)
작가님의 작품에는 수많은 오브제가 나타나요. 의자, 돌, 화초, 가위 등등…어떨 때는 주제와 전혀 다른 맥락의 기묘한 오브제도 있고요. 이를 선택하는 기준이 있나요?
작업하던 당시에 보고 기억에 남은 오브제가 대부분이에요. 저희 가족이 사용하던 물건,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 물건, 차를 타고 지나가며 본 물건이죠. 태풍이 몰아치며 부서지고 쪼개진 큰 나무, 로드킬을 당한 노루의 흔적은 스치듯이 봤는데도 생각보다 잔상이 깊게 남더군요. 예전에 그린 작품에 등장하는 오브제를 보면 그때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고, ‘내가 생각보다 많은 물건과 치열하게 관계를 맺고 사는구나’ 생각이 들어요.
개인적으로 수집하는 오브제가 궁금합니다.
저는 가위를 조금씩 수집하는 중인데요. 작업실 한 벽에 걸어 놓았어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와 만들기를 좋아해서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봤는데, 칼은 너무 무섭고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뭔가를 잘라야 할 때 항상 가위를 사용해요. 다양한 가위를 모으면서 가위의 형태와 곡선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하고요. 때로는 지인들이 여행 기념품으로 가위를 선물해 주기도 해요.
작업할 때 가끔 향(香)도 피우는 것 같던데, 향기와 관련된 아이템을 좋아하시나요?
사실 저는 향보다 핸드 워시와 핸드크림을 더 좋아해요. 동양화를 그릴 때 손에 기름기가 있으면 안 돼서 그림 그리기 전에 항상 손을 닦아야 해요. 그때 좋아하는 향기의 핸드 워시를 사용하면 기분이 편안해져요. 핸드크림은 가끔 손목에 바르고 향기를 맡으면서 그림을 그리기도 해요. 우디나 시트러스 향을 좋아하고 이솝, 르 라보 같은 브랜드를 선호합니다. 마음에 드는 향이 있으면 꽤 오랫동안 사용해요. 좋아하는 향의 제품을 사용하는 게 일상 속 작은 행복 같아요.
마지막으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스테이에이치STAY H’가 크리에이터스룸을 위해 준비한 아이템에 관해 얘기해 볼게요. STAY H가 큐레이팅한 아이템 중 인터뷰이가 자기 공간에 어울리는 아이템을 한 점 고르면 선물로 드리고 있어요. 작가님은 어떤 아이템을 선택하셨나요?
저는 한스 베그너가 디자인한 칼한센앤선Carl Hansen & Søn의 ‘CH88T’ 체어를 선택했습니다. 등받이 양 끝의 우아한 곡선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이정배 작가가 처마나 버선의 곡선 같은 한국적인 디테일을 가구에 적용하는 걸 좋아해서, 디자인 가구를 구입할 때도 동양적인 미감을 선호하거든요. 저희가 한스 베그너가 디자인한 ‘CH24’ 체어도 소장 중이라, 서로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CH88T 체어를 어디에 놓고 사용하실 생각인가요?
3층에 가면 작은 드로잉 테이블이 놓여 있어요. 이곳에 앉아서 편안하게 드로잉에 몰두하라고 남편이 2012년 만들어줬죠. 어울리는 의자를 찾지 못해서 오랫동안 테이블 홀로 있었는데요. 10년이 넘은 지금에서야 비로소 제 짝을 찾았네요. CH88T에 앉아 새로운 작품을 위한 드로잉을 마음껏 그려볼 생각입니다.
Artist
이진주(@artistjinju)는 홍익대학교 동양화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모교에서 교수로 재임 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유즈 뮤지엄 상하이, 아라리오 갤러리, 에스더 쉬퍼 베를린, 화이트큐브 서울 등에서 열린 다수의 개인전과 기획전을 통해 한국의 전통적인 회화 방식에 개인의 감성과 서사를 접목한 고유의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특유의 정교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국내외 예술계의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Editor
정윤주(@chungyunjoo)는 대학에서 실내 디자인을 전공하고 «메종 코리아» 인테리어 에디터와 «보그 걸» 피처 디렉터로 일했다. 온라인 매거진 «디퍼differ»의 디렉터 겸 편집장도 역임했다. 영화 속 인테리어와 데커레이션에 주목한 책 『영화 속의 방』의 저자이며, «엘르 데코 코리아»의 객원 에디터이기도 하다. 현재는 프리랜스 에디터 겸 EYES and EARS 디렉터로 다양한 매체에 인터뷰와 라이프스타일에 관련된 글을 기고하고 있다.
Photographer
이우정(@iopppic)은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수년간의 어시스턴트 생활을 거쳤다. 현재 «보그 코리아», «엘르 코리아», «GQ 코리아», «하퍼스 바자 코리아» 등 다양한 매체와 협업하며 앨범, 광고 등 커머셜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