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오브서울Piece of Seoul’은 대중음악평론가 김윤하 님이 최근 새롭게 발매한 한국 대중음악 앨범 중 가장 인상 깊은 피스를 꼽고, 해당 뮤지션과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입니다. 피스오브서울에서 피스는 조각(piece)이면서 동시에 평화(peace)를 뜻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태어난 새로운 음악의 조각과 여기에서 길어 올린 마음의 평화를 뮤지션의 목소리로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아홉 번째 피스의 주인공은 별다른 예고도 없이 지난 8월 갑자기 나타난 의외의 조합, 정인과 마일드 비츠Mild Beats입니다. 보컬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인 정인, 힙합 프로듀서 마일드 비츠가 만나 평소 기대할 수 없었던 새로운 에너지로 가득 찬 앨범 ‹정인 & 마일드 비츠›를 내놓았습니다. 우아하고 소울 넘치는 비트와 끈적하고 뇌쇄적인 보컬이 선사하는 멋진 신세계. 영혼의 쌍둥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서로를 이해하며 완성한 기깔난 앨범 이야기, 정인과 마일드 비츠, 두 사람이 빚어내는 좌충우돌 만담이 궁금하시다면 피스오브서울에서 확인해 보세요.
별다른 예고도 없이 앨범 하나가 음악 사이트에 떴다. ‹정인 & 마일드 비츠›. 정인은 정인대로, 마일드 비츠Mild Beats는 마일드 비츠대로 알고 있었지만, 최근 두 사람의 행보를 생각하면 함께 음악을 만드는 풍경 자체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 조합이었다. 물음표가 느낌표가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의심을 거두고 앨범을 재생하며 첫 곡 ‘뭐?’를 듣는 순간, 육성으로 “뭐?”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앨범에는 조선 최고의 붐뱁Boom Bap 힙합 프로듀서로 이름을 날리던 마일드 비츠도,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어디서든 ‘오르막길’을 부르던 정인도 없었다. 이런 호랑이 같은 에너지를 지금까지 어디에 숨겨놨다가 이제 꺼내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정도로 야성적인 비트와 목소리가 서로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 앨범 내내 으르렁댔다. 1번 트랙 ‘뭐?’에서 제대로 맛을 보여준 앨범은 마지막 곡이자 타이틀 곡 ‘탓’이 끝날 때까지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두 사람만의 음악으로 그림을 그려 나갔다. 마일드 비츠가 이렇게까지 우아하고 소울 넘치는 비트를 뽑는 프로듀서였던가. 정인이 이렇게까지 끈적하고 뇌쇄적인 보컬이었던가. 앨범을 들으며 몇 번이나 다시 크레딧을 살펴봤다. 이런 참신한 조합이 이제야 나온 게, 이런 영혼의 쌍둥이를 이제야 찾은 게 아쉬울 뿐인, 오직 두 사람의 힘으로 완성된 멋진 신세계였다.
‹Jung In & Mild Beats› 앨범 커버
슬슬 인터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정인: 사실 저 오늘 이 자리를 엄청 기대했거든요. 앨범을 내긴 했지만, 앨범에 대해서 마일드 비츠 오빠랑 같이 얘기를 나눠본 적이 없어요. 그냥 모든 작업이 스무스하게 흘러갔어요. 몇 가지 기술적인 문제 빼고는 앨범을 만들면서 어떤 대립도 없었고요. 그냥 자연스럽게 툭툭 만들다 보니까 딱히 작업을 회고하고 말로 풀고 할 게 없더라고요. 아마 이 자리가 그런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질문도 하기 전에 대답부터 하시는 분은 처음 봅니다. (웃음) 재미있는 게, 듣는 입장에서도 앨범에서 그런 분위기가 느껴졌어요. 두 사람의 음악적 영혼이 편안하게 담긴 앨범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답니다. 어디서 이런 소울메이트를 만났나 싶은데, 같이 작업한 건 처음이죠?
정인: 처음이에요.저희 둘 다 오래된 사람이다 보니 (웃음) 뭔가 같이 하지 않았나 싶은 분도 계실 텐데, 서로 알고 지낸 지는 오래됐어도 사적으로 만난 건 앨범 작업을 위해 서울역에서 만난 게 처음이었어요.
마일드 비츠: 너 전혀 기억을 못 하는구나? 우리 홍대에서 처음 만났잖아! 시기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리쌍이 한참 활동할 때쯤이었어요. ‘소울맨Soulman’이라는 가수가 있는데, 정인이와는 친구 사이고, 저와도 인연이 있어요. 제가 소울맨과 먼저 만나서 치킨을 먹던 중, 정인이를 부르니까 행사를 마치고 좀 늦게 왔어요. 무대 메이크업한 상태로 처음 보고 인사를 나눴죠.
정인: 그랬어요? 그냥 인사만 한 거 아니에요? 얘기도 했어요?
마일드 비츠: 다 했지. 치킨 맛있다는 얘기도 하고, 난 네가 “키가 크시네요” 해서 내가 “좀 말라서요” 대답한 것도 다 기억나는데! (웃음) 저는 원래부터 가수로서의 정인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아마 그래서 저한테 그날이 더 인상적으로 남았을 수도 있어요. 정인이 입장에서는 그냥 ‘아, 키 크고 마른 사람이구나’ 했을 수 있죠.
정인: 무슨 소리예요. 저도 당연히 마일드 비츠라는 프로듀서의 존재를 알았죠! 그날 음악 얘기 같은 건 안 했죠? 그래서 기억을 못 했나 봐요. 이거 봐요, 역시 제가 오늘을 기대한 이유가 있어요. 여기 오면 이렇게 제가 전혀 모르는 얘기를 들을 것 같더라고요. (웃음)
마일드 비츠: 그 이후에도 몇 번 인연이 있었어요. 그날 만난 치킨집 근처에 ‘인플래닛’이라는 스튜디오가 있는데, 거기 대표와 제가 친분이 있어서 자주 놀러 갔거든요. 어느 날 평소처럼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소파에 누가 맨발로 누워서 자고 있는 거예요. 자세히 보니까 정인이더라고요. 조심조심 들어가는데 눈을 뜨길래 인사도 하고 사인도 받았어요. 저는 그 사인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정인: 어머 어머 어머
마일드 비츠: 아니, 우리 진짜 앨범 어떻게 같이 만든 거냐? (웃음)
정인: 전 정말 서로에 대한 리스펙트만으로, 만난 적도 없는데 함께 작업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거든요. 어머, 웬일이야.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웃음)
마일드 비츠: 덧붙이자면 전 정인이 목소리를 ‘지플라G.Fla’ 시절부터 쭉 좋아했어요. 너무 매력적이잖아요. 그때부터 절 아는 지인들은 아마 다 알 거예요. 제가 술자리 같은 데서 음악 얘기할 때마다 “정인이 목소리 좋다. 언젠가 작업해 보면 좋겠다”라고 말했거든요. 그런데 제 성격이 막 들이대는 스타일은 아니라… 시간이 오래 걸린 셈이죠.
G.Fla ‹Love Story›(2004)
정인: 이렇게 얘기가 흘러가면 제가 상당히 불리해 지는데… (웃음) 제 입장도 좀 들어주세요. 사실 이 EP가 제 기획으로 시작한 건데요. 솔직히 오빠는 아무 생각도 없었을 거예요.
마일드 비츠: 전 그냥 정인이를 좋아만 하고 있었죠.
정인: 물론 엄밀히 말하면 오빠로부터 시작된 앨범이긴 해요. 예전부터 제가 무슨 활동을 하든, 그걸 자꾸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시더라고요. 심지어 엄청나게 대중적인 행사나 제가 살짝 스쳐 지나가는 방송까지 다 올려주시는 거예요.
마일드 비츠: 아무래도 저는 정인이를 너무 좋아하니까.
정인: 제 기준에서 마일드 비츠는 완전히 장르 음악 전문가고, 그 안에서도 자기 색깔이 완전 깊은 프로듀서인데, 신기하면서도 너무 감사했죠. 그럴 때마다 ‘감사하다’라는 DM 정도만 주고받으며 마음만 계속 쌓아가던 와중에 앨범 하나를 들었어요. ‹Fragment›(2021)였죠. 그걸 듣는데 느낌이 온 거야. 여기에 그동안 내가 하고 싶던 소울 음악을 더하면 뭔가 재미있는 게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확 들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연락을 드려봤어요. 진짜 부담 없이, 하고 싶은 거 해보자고.
마일드 비츠: 저야 완전 땡큐였죠. 저는 지금까지 주로 힙합을 다뤘는데, 만약 제 비트에 목소리가 올라가야 한다면 무조건 정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말 그대로, 팬의 입장에서 쭉 지켜보고 응원하는 중이었는데 문자가 온 거죠. 순간, ‘아, 됐다! 대박이다!’ 생각했어요. (웃음)
마일드 비츠 ‹Fragment›(2021)
지금 거의 ‘마일드 비츠 성덕설’ 듣는 분위기인데요. (웃음) 사실 저도 이번 EP를 들으면서 ‹Fragment›를 떠올린 터라 살짝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럼, 앨범 작업은 어떤 식으로 진행됐나요?
마일드 비츠: 연락받자마자 “바로 시작하시죠” 했어요. 제게는 정말 기다려왔던 순간이었으니까요. 그게 2년 전쯤이었는데, “서로 분위기 한 번 봅시다” 하면서 제가 처음으로 보낸 비트가 1번 트랙인 ‘뭐?’였어요. 사실 이번 앨범 트랙 순서는 저희가 작업한 곡 순서 그대로입니다.
정인: 첫 트랙을 받고, 뭐랄까… 정말 아무 생각 않고 본능에만 충실하게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너무 멋져서, 그냥 그 곡에 제가 존재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마음이 들다 보니, 억지로 가사를 끌어내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전부 애드리브와 스캣으로만 채웠어요.
‹뭐?›
덕분에 첫 곡부터 무척 강렬한 인상의 앨범이 완성되었다는 느낌을 전달해요. 그 곡 외에는 전부 가사가 있는데, 혹시 프로듀서로서 마일드 비츠 님이 앨범 전반을 이끈 부분이 있을까요?
마일드 비츠: 전혀 없어요. 이 앨범의 모토가 지금 우리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나는 제일 하고 싶은 비트를 만들 테니, 너는 제일 하고 싶은 노래를 해라’였어요.
정인: 그런 의미에서도 이번 작업은 제게 정말 신기하고 좋은 경험이었어요. 제가 사실 평소 성격상 주위 흐름이나 분위기를 많이 신경 쓰는 타입이거든요. 회사 입장도, 함께 일하는 분의 입장도 잘 알다 보니까 타협해야만 하는 순간에는 적당히 타협하곤 해요. 그래서 프로듀서나 회사에서 오는 피드백에 저도 모르게 쉽게 흔들리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이번 작업에서는 놀랍게도 피드백을 단 한 번도 받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그게 너무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첫 곡 ‘뭐?’를 작업할 때, 관성처럼 오빠에게 답신이 오기를 계속 기다렸는데, 피드백 대신 아무 말 없이 새 비트가 툭 오더라고요. 그럼 저는 그걸로 다시 작업하고. 이런 경험 자체가 처음이어서 여러모로 새로운 걸 정말 많이 배운 시간이었어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수준이네요. 이 정도면 거의 음악 천생연분 아닌가요. (웃음)
마일드 비츠: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저 역시 그게 자연스러웠어요. 멜로디는 따로 생각 안 하고 비트만 먼저 보냈는데요. 그 위에 정인이가 완성한 버전을 받아서 듣자마자 ‘와 이거 미쳤다’ 싶더라고요. 물론 세상에는 잘하는 분들이 무척이나 많지만, 제가 비트를 줬을 때 이런 감각으로 맞부딪힌 사람은 개인적으로 정말 드물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 피드백이라고 해 봤자 “오케이, 오케이” 밖에 안 남더라고요.
정인: 저도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리고 다음 비트를 받았는데, 와 이게 또 좋은 거예요. 사실 제가 가사 쓰는 걸 특별히 즐기는 사람도 아니라, ‘뭐?’를 작업하면서 앨범 처음부터 끝까지 아예 애드리브로 다 채워버릴까, 생각도 살짝 했는데요.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비트를 듣자마자 가사가 술술 나오더라고요. 그 곡이 2번 트랙 ‘Midnight running’이에요. 다음 곡들도 계속 그렇게 가사가 나오길래 붙여버렸어요. 오빠 비트가 본연의 제가 잘할 수 있는 말을 잘 끌어내 준 것 같아요. 음악의 영혼이라고 해야 하나, 여튼 저희 기운이 잘 맞는 사이이긴 한 것 같아요,
‹Midnight running›
마일드 비츠: 제게도 항상 꿈꿔왔던 작업이었어요. 체계적인 것도 멋지지만, 원초적인 느낌 그대로 완성한 앨범이거든요. 저나 정인이 모두, 스튜디오에서 수십 번, 수백 번 다시 작업하는 게 낯설지 않은데요. 이번 작업은 모두 편안함 그 자체였어요. 이렇게 편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요.
음악가로서 서로의 영혼이 닮은 느낌이네요. 음악 생활을 해오면서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던 목마름이 잘 채워졌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사실 마일드 비츠 님 입장에서는 최근작과 어느 정도 연장선에 서 있는 앨범인데요. 정인 님에게는 ‘이런 모습 오랜만이야!’ 싶은 작업이기도 해요. 정인 님은 혹시 이런 음악에 대한 갈증을 평소에도 느꼈나요?
정인: 사실 제가 그렇게까지 음악에 갈증을 느끼는 타입은 아니에요. 평소에도 생각이 크게 많지 않고, 가볍다면 가벼운 사람이거든요. 흐르는 강물을 따라 그때그때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나름 재미있게 살았고, 그래서인지 ‘뭘 해야 한다’라는 강박도 별로 없는 편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더욱더 이번 EP는 마일드 비츠의 비트에서 태어난 앨범이다, 싶어요. 음악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제가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제가 딱히 이런 음악을 하고 싶어서 오빠한테 연락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또 그렇다고 다른 프로듀서랑 이런 작업을 해보고 싶은 것도 아니고요. 그냥 마일드 비츠의 음악을 뿌리 삼아 앨범에 담긴 노래들이 가지를 뻗어나갔어요.
마일드 비츠: 그렇게 따지면 제 입장에서 이번 음악은 정인에게서 시작한 거예요. 전 정인이 ‘사랑은’을 부르는 걸 처음 봤을 때를 아직도 기억해요. 그 노래 원곡이 글래디스 나잇Gladys Knight의 ‘I Don’t Want To Know’잖아요. 절대 쉽지 않은 노래인데, 자기답게 부르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정인은 상업적인 작업도 잘하지만, 그렇게 자신만의 자연스러움이 드러날 때 더 멋있는 보컬이구나, 싶었어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그 목소리가 있어서 이런 비트가 나오고, 앨범이 나올 수 있었어요. 서로 반대로 생각하고 있지만, 이 친구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하니까 정말 좋네요. 그게 제가 원했던 바이기도 하고요.
정인(Jung In) 사랑은 [윤도현의 러브레터] | KBS 20040514 방송
정말 훈훈합니다.
정인: 말하다 보니까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이번 EP는 제게 정말 본능 그 자체였어요. 마일드 비츠에게는 어떤 작업이었는지 궁금해요. 오빠도 콘셉트 같은 거 전혀 생각하지 않은 거예요?
마일드 비츠: 엄청 깊은 생각은 없었지. (웃음) 그래도 기본적인 틀은 있었던 것 같아요. 정인이가 ‹Fragment› 앨범을 잘 듣고 제게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연락했으니, 그런 맥락에서 정인이가 노래하기 쉬울 만한 비트 리스트를 만든 거죠. 더불어 저희가 처한 현실적인 상황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우선 나이가 있잖아요. (웃음) 앨범 만들자고 하고 서울역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 얘기를 했어요. 저는 결혼하고 지금 지방에 살고 있고, 정인이 또한 기혼에 육아까지 쉽지 않은 상황이니까, 혼자 작업할 때와는 다르게 ‘생활하는 음악인’으로서의 지금을 자연스럽게 담아 보자고 말했어요. 그래서 작업 과정에도 현실이 다 반영됐고요. 제가 지금 대전에 살고 있는데요. 서울역에서 만난 것도 그래서고, 직접 만난 것도 파일을 주고받기 시작한 지 거의 1년 정도 지난 다음이었어요. 각자 내키는 대로 작업하다가 ‘이제 정리 한 번 해야지’ 하면서 드디어 본 거죠. 앨범을 2년 동안 만들었다고 하지만, 사실 2년 내내 작업한 것도 아니에요. 정인이가 많이 바쁘기도 했고, 중간중간 서로 아플 때는 좀 쉬기도 했어요. 확실히 나이가 드니까 아플 일이 많아지더라고요. 잘 낫지도 않고요. (웃음)
현실이 팍팍해도 칼을 뽑아 든 이상 무라도 썰어야 하잖아요. (웃음) 작업하면서 ‘어쨌든 이제 됐다’ 마음이 든 순간은 언제였나요? 개인적으로 4번 트랙 ‘Fate Fighter’부터 여러 의미로 고양감이 들다가 마지막 곡 ‘탓’을 듣는 순간 ‘아, 완성됐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인이라는 사람과 가장 먼 곳에 있을 것 같은 호전적인 느낌이 점점 강해지는 구성도 흥미로웠어요.
정인: 작업하는 내내 ‘이제 됐다’라는 만족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수록곡 순서가 곡이 만들어진 순서와 같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작업하면 할수록 제 안에서 뭔가 강하고 선명해지는 게 느껴졌어요. 말씀하신 ‘Fate fighter’도 그런 감정이 든 대표적인 곡이었는데요. 곡을 받는 순간 ‘이건 파이터fighter의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로 작업이 오가는 가운데 묘하게 영향을 주고받지 않았을까, 싶어요. 6번 트랙인 ‘Love warrior’는 제가 예전에 작업한 곡을 오빠에게 보내면서 리믹스를 해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비트 먼저’가 아니었는데도 그냥 자연스럽게 작업의 흐름이 이어지더군요.
‹Fate fighter›
마일드 비츠: 말은 안 했지만, 확실히 서로 간에 화학작용이 조금씩 일어났던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앨범이 뒤쪽으로 가면서 점점 파워풀해지잖아요.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Fate Fighter’ 같은 경우에는 수록곡 중에서 드물게 나름의 의도가 있던 곡이었어요. 전반부 곡들을 쭉 작업하다 보니까 중간에 환기하는 곡이 하나 있어야겠다, 싶더라고요. 저희가 생활하는 음악인으로서의 음악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잖아요. 생활에는 기쁨과 재미도 있지만 당연히 시련도 있죠. 시련을 이겨내는 느낌으로 작업하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갑자기 뜬금없이 뭔가 부수는 사운드를 넣고 싶지는 않았고, 드럼을 기본으로 간단한 리프를 만들어 보냈는데 정인이가 코러스까지 다 쌓아서 보내주더라고요. 듣자마자 정말 좋았어요. 이 곡이 앨범의 분기점이 되겠구나, 싶었죠.
정인: 와. 저는 지금 처음 듣는 얘기예요. 놀랍네. 이런 의도가 다 있었구나.
지금 거의 정인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마일드 비츠의 손인데요. (웃음)
정인: 엄밀히 말하면 비트로 저를 조종한 거죠. 비트에 그 의도를 다 넣은 거예요. 비트로 말을 걸어서 음악으로 소통한 거죠. 와 대단한 사람이네. 정말 저한테 이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거든요.
마일드 비츠: 이게 또 이렇게 포장이 되네요! (웃음) ‘적’과 ‘Love warrior’ 같은 경우에는 정인이가 먼저 곡을 보내줬어요. 아카펠라로 녹음한 MR에 제가 비트를 입히고 몇 차례 곡이 오가면서 서로의 곡을 서로 리믹스해서 완성한 곡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적›
‹Love warrior›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간 동행의 마지막 곡이 ‘탓’입니다. 타이틀 곡이기도 하고요.
마일드 비츠: ‘이제 곡이 좀 모였다’ 싶은 생각이 들면 모아놓은 곡을 다시 한번 쭉 들어보거든요. 그렇게 듣다가 제가 예전부터 정말 해보고 싶던 어떤 느낌이 갑자기 확 떠올랐어요. ‘탓’ 비트를 들어보면 아실 텐데, 솔직히 위에 랩 하면 딱 좋은, 힙합에 어울리는 생짜 드럼으로 만든 러프한 느낌이거든요. 예전부터 그런 비트에 보컬리스트와 합을 맞춰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어요.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오랜만에 떠오르더라고요. 드디어 임자를 만났다, 싶었죠. 예전에 DJ 프리모Primo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Christina Aguilera가 같이했던 ‘Back in the Day’(2006) 아시죠? 그런 곡 같은 느낌을 꼭 한 번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노래를 입혔는데 마음에 쏙 들더군요. 또 ‘됐다’ 했죠.
‹탓›
정인: 그게 그런 거였어요? 오늘 놀란 부분이 정말 너무 많아요. 이제 보니까 이번 EP는 마일드 비츠라는 프로듀서가 제가 마음대로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어 준 거였네요. 태어나서 거의 처음 느껴본 감정이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예요. 육아에 비유하자면, 애들은 자기가 다 알아서 큰 줄 알지만 사실 그 뒤에 부모님의 어마어마한 노력이 숨어 있잖아요. 지금 그 사실을 처음 깨달은 어린애가 된 심정이에요. 철 들었네요. (웃음)
부모 자식 얘기까지 나왔으면, 정말 끝인걸요. 두 분 이렇게 호흡이 좋으신데, 설마 일회성으로 끝내실 건 아니죠?
정인: 제가 오빠한테 이렇게 얘기한 적 있어요. 아마 서울역에서 두 번째로 만날 때였던 것 같아요. 이런 앨범 하나 만들었으니까, 이제 2~3년 정도마다 한 번씩 우리 나이대에 맞는, 그때의 일기를 쓰는 것 같은 앨범을 계속 만들어 보고 싶다고요. 마일드 비츠와 정인이라는 규약도 없고, 이번 앨범의 연장선이라는 의식도 없이, 그냥 정말이지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대로 나오는 음악이요. 제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특별한 의미나 무게를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라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수도 있는데요. 사실 이 앨범도 정말 별생각 없이 만들었는데 이렇게 인터뷰를 하게 되고, 여기저기 연락 주시는 분들이 있다 보니까 갑자기 확 부담스러워지더라고요. 다음 기회가 존재한다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제대로 멋있게 해야 할 것 같고. (웃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지만, 만약 그 미래에 마일드 비츠가 있다면 저도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갑자기 떠오른 건데, 이런 식으로 오빠 근처에 모인 사람들과 만드는 프로젝트 하는 건 어때요?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랩, 보컬, 프로듀서 다 모아서 오빠의 비트에서 모든 게 시작되는 앨범을 만드는 거죠. ‘마일드 비츠 크루’처럼. 저 지금 너무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고 있나요? (웃음)
마일드 비츠: 좋지, 좋지. 전 너무 좋아요.
문득 궁금해지네요. 딱히 의식하는 것 같진 않지만, 두 분 모두 어느덧 한국 흑인 음악 신의 1세대라면 1세대, OG라면 OG가 되었어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활동하면서 신에 대한 뾰족하거나 애정 어린 시선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요즘 신의 분위기나 동료, 선후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신 적 있을까요?
마일드 비츠: 제 역할이 아무래도 프로듀서다 보니, 주변에 음악 하는 친구들이 계속 많을 수밖에 없어요. 정인이도 그랬지만, 딱히 친분이 없어도 제가 관심 있는 사람은 꾸준히 지켜보는 편이에요. 제 성격은 단순히 오래 했다는 사실만으로 리스펙트하고 인정하는 스타일은 아니고요. 딥플로우Deepflow, 이센스E SENS처럼 제 기준에서 지금 봐도 멋있는 행보를 보이는 동료를 보면 확실히 더 반갑고, 멋있는 작업을 계속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함께 작업하고 싶기도 하고요. 정인이에게도 가끔씩 그런 얘기 한 적이 있거든요. 노래 좀 오래 해달라고, 목소리 오랫동안 듣고 싶다고요. 직접 얘기하긴 좀 쑥스러워서 카톡 같은 걸로 가끔 마음만 남겨요. 요즘 ‘국힙 죽었다’ 뭐 이런 말도 많은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거고, 음악 하는 사람들은 그냥 계속해야죠. 안 하면 진짜 아무것도 없는 거니까요.
정인: 전 요즘 존경심이 정말 많이 늘었어요. 어느 정도냐, 하면 자기 분야에서 오래 활동한 분들이 뭐든 같이 하자고 연락을 주시면, 분야와 상관없이 시간이 되는 한 무조건 하겠다고 할 정도로요. 음악도 그렇고, 예술 쪽은 나이가 들수록 세상의 관심과 인기가 하락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자기 것을 계속 추구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현실과 얼마나 타협해야 하고 마음고생하는지 알고 나니, 도저히 쉽게 외면할 수가 없더라고요. 자기 것 오래 하시는 분들을 무조건 응원하고 존경하게 됐어요. 솔직히 어릴 땐 이런 생각 별로 없었거든요. (웃음) 나이가 들면서 제가 경험해 보니까 너무 잘 알겠더라고요. 전에는 선배나 후배 같은 개념으로 서열 따지는 것에 전혀 관심도 없었고 모두가 동료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는데요. 이제는 가끔 선배라는 말이 마음에서 우러나와요. 저보다 늦게 시작하신 후배분들도… 필요하시면 그냥 연락주세요. 저 정말 그런 사람 아닌데, 까마득한 윗사람으로 생각하고 어려워하는 분들이 가끔 계시더라고요. 후배님들의 요청, 무조건 다 고맙습니다. 전 항상 열려있다는 사실 잊지 말아 주세요. (웃음)
Artist
정인(@junginjungin)은 한국 R&B, 소울 계열에서 손꼽는 색깔과 실력을 갖춘 보컬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다. 2002년 힙합 듀오 리쌍LeeSSang의 히트곡 ‘Rush’ 피처링으로 인기를 얻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후 리쌍과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춘 ‘사랑은’(2004), 윤종신의 월간 프로젝트 ‘월간 윤종신’을 통해 선보인 ‘오르막길’(2013) 등으로 대중에 한 발 더 가깝게 다가갔다. 2000년대 중반 소울 밴드 지플라G-Fla로 활동했고, 2010년 첫 솔로 앨범 ‹정인 From Andromeda› 이후 몇 장의 EP와 다수의 싱글을 발표했다.
마일드 비츠Mild Beats(@realmildbeats)는 ‘밀림닷컴’에서 음악을 시작해 2000년대 빅딜 레코드Bigdeal Records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힙합 신을 대표하는 프로듀서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MC 메타Meta, 팔로알토Paloalto, 사이먼 도미닉Simon Dominic, 이센스E SENS, 허클베리피Huckleberry P, 딥플로우Deepflow 등 그와 작업한 래퍼 이름만 대도 한국 힙합 역사를 쓸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라이머리Primary와의 합작이나 프로듀서 크루 ‘언스포큰Unspoken’ 활동 등 장르와 형태를 불문하고 음악 작업을 쉼 없이 해왔다. 특유의 러프한 질감을 살린 비트로 완성한 ‹화면조정›(2020),‹Fragment› (2021) 등이 마니아를 중심으로 좋은 반응을 끌어냈다.
Writer
김윤하(@romanflare)는 K팝에서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관해 쓰고 이야기하는 대중음악평론가다. 다양한 온오프라인 매체에 글을 기고하거나 출연하면서, 가끔은 작가 겸 기획자, 음악 콘텐츠 프로듀서로 일한다. 2023년 TVING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케이팝 제너레이션K-POP GENERATION›에 스토리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현재 «한국일보» «국민일보» «시사IN» «채널예스»에 칼럼을 연재하며,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사랑과 음악이 끝내 세상을 구할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