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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저 비건 아닌데요

Writer: 양다솔
vegun, 채식, 채식주의, 비건, 도시락, 양다솔, 에세이, 가난해지지않는마음

일러스트레이션 제공 © 윤미원, 매거진F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최근 들어 채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에도 비건이란 말이 널리 쓰이고 있는데요. 에세이스트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양다솔 작가는 비건에 대한 여러 가지 편견을 친절하게 설명하며, 비건으로 사는 소회를 에세이에 담았답니다. 지속가능한 비건을 위해 매일 노력하는 작가가 밝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어느 날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야, 너 선볼래?” 깜짝 놀랐다. 서른 문턱을 앞두고 알람이라도 울린 것 같았다. “무슨 소리야, 됐어.” 허공에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엄마가 말했다. “이제 갈 때 됐잖아.” “됐다니까.” “한번 만나나봐.” 나는 말했다. “나 집에서 놀고먹게 해줄 수 있대?” 그러자 엄마가 코웃음을 치더니 전화를 끊었다.

얼마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야, 너 선볼래? 너 집에서 놀고먹게 해준대.” 나는 말했다. “됐어.” 엄마는 말했다. “애비도 없는 게, 시집가야지.” “혼자 잘 살 건데.” “애가 진짜 괜찮대.” 나는 말했다. “잘생겼어?” 정적이 흘렀다. “키는? 몸매는? 성대는? 집에서 놀고먹으면서 그 사람 얼굴만 볼 텐데 재미없으면 안 되지.” 그러자 엄마가 콧방귀를 뀌더니 전화를 끊었다.

얼마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야, 이번엔 진짜야. 잘생기고 능력도 좋대.” 나는 말했다. “포기를 모르는 아줌마네.” 엄마는 말했다. “야,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있냐?” “내가 알아서 하면 안될까?” “유학파래 유학파.” 내가 말했다. “그래 좋아, 근데 있잖아.” 엄마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어.” “평생 밥상에서 달걀, 우유, 고기, 생선 구경 못 할텐데 괜찮대?” 그러자 다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기 가장 쉬운 방법 알고 있다. 만나자마자 “비건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대의 얼굴에 작은 폭탄이 터지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비건이 뭔지 모른다고? 이때 “모르면 검색창에 쳐보시죠.” 같은 말을 했다가는 풀떼기만 먹어서 신경질적이라는 소리를 듣기 딱 좋으니 유난히 상냥하게 말해야 한다. “고기, 해산물, 유제품 등 동물성 식품 일체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 입니다.” 그때부터는 신나게 헛발질을 하는 상대를 구경하면 된다(특권이다). 대부분의 경우 어떡하냐면서 갑자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알겠지만 나한테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이 경우, 그냥 고기를 먹는 착한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또 많은 경우 느닷없이 자신이 왜 고기를 먹는지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한다. “고기 없이 어떻게 살아요.” “맛있는 걸 어떡해요…” ”저는 고기가 좋아요!(안 물어봤다)” 그렇다. 사람들은 비건을 어려워한다. 정확히는 불편해한다. 어떻게 잘 지낼 수 있는지 모른다. 눈빛이 흔들리고, 말을 가다듬는다. “저는 게이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저는 여자를 좋아해요,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완벽히 동문서답이다. 한 사람의 식습관이나 성적 취향이 서로에게 전혀 상관이 없는 일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는 양다솔입니다.”라고 했을 때 “저는 양다솔이 아닙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완벽히 틀린 답이듯이 말이다. 어떤 이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전 세계 비건 대표로 만들어버린다. 세상 진지한 얼굴을 하고 동물권부터 기후변화, 환경, 공장식 축산, 페미니즘, 채식이 가진 모순점, 공격적 시위 그리고 플랜테이션까지 온갖 카테고리에서 무작위적 질의를 던진다. 나는 어떤 문제 제기에도 당황하지 않고 과학적이고 빈틈없고 설득력 있는 논지를 펼치는 대신 “그냥 제가 먹는 건데요.” 하고 웃는다.

희귀종을 발견한 것처럼 눈을 부릅뜨며 묻기도 한다. “그럼 대체 뭘 먹어요?” 편의점에서 사온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잔뜩 안고서 말한다. “풀만 먹으면 단백질이나 철분 섭취가 굉장히 부족해진다던데.” 질병관리본부야 뭐야. 나는 말없이 웃으며 거대한 비건 도시락을 꺼낸다. 정성스럽게 만든 유부초밥과 두부조림을 조금씩 덜어 나눠준다. 그들이 걱정하는 게 진정으로 나의 건강일까 궁금해하며. 대부분의 이들은 이후로도 눈을 똑똑히 뜨고 내가 뭘 먹는지 지켜본다. 그리고 혼란과 기쁨이 뒤섞인 얼굴로 숨 가쁘게 달려와 이렇게 묻는다. “지금 티라미수 먹는 거예요? 티라미수는 유제품인데.” 그런 질문을 받는 순간에는 약간의 전율마저 느낀다. 먹는다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 누구에게나 침범 가능한 영역으로 변모하는 장면을 목격했으므로. ‘The personal is political(사적인 것이 곧 정치적이다)’라는 표어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하는 순간이 있을까.

나는 지치고 피곤할 때 가끔 케이크와 빵을 허용한다. 설탕을 한 숟가락 입에 퍼먹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순간이 삶에는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비건을 하면서 기쁘고 싶기 때문이다. 결코 먹지 못해서 화가 나거나 억울한 순간을 맞닥뜨리고 싶은 생각이 없다. 오랫동안 하고 싶다. 너무 좋아서 매일 하는 산책처럼 하고 싶다. 비건을 꾸준히 하고 싶은 마음과 가끔 케이크를 먹고 싶은 마음은 완벽히 모순적으로 서로를 도우며 공존한다. 인간은 복합적인 존재다. 누군가 내가 비건임을 잊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케이크를 선물한다면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받아야 하는 존재이며, 케이크 몇 번을 못 먹어서 어느 날 잔뜩 화가 나 비건을 관둘 수 있을 만큼 약한 존재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나의 권리다. 내가 앞으로 삼시 세끼를 티라미수만 먹으며 이름을 티라미수 공주로 개명해도 어느 누구도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현재 비건이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동물성 식품의 소비량 또한 획기적으로 줄었다. 비건의 지향점은 완벽함이 아니다. 자신을 이루는 신념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나는 비건 함량 미달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 비건을 하려면 건강해야 하고, 부지런해야 하고, 아름다워야 하며, 상냥하고 친절해야 하고 심지어 똑똑해야 한다. 그야말로 완벽해야 한다. 앞으로는 만나자마자 “저는 비건이 아닙니다.”라고 밝혀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누군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좋은 건 알겠는데, 귀찮지 않아요?” 순간 무릎 힘이 탁하고 풀리는 것 같았다. 아득해졌다. 비건이 귀찮은 일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삶에서 가장 귀찮은 일 중 하나일 것이다. 얼마 전에 제주도에 며칠 동안 방송 촬영 일정이 잡힌 적이 있다. 방송 출연이라니 기쁨과 설렘은 잠시였고 바로 문제가 등장했다. ‘나 뭐 먹지?’ 제주도는 잘 알려진 비건 불모지다. 간단한 국수 한 그릇에도 고기 조각이 둥둥 떠 있다. 혼자 여행을 가면 직접 해 먹거나 시간이 걸려도 식당을 찾아갈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단체 일정에서 나만을 고려한 선택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정확히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 귀찮군.’ 그리고 곧이어 이렇게 생각했다. ‘아주 재밌겠군.’ 답은 아주 간단하다. 나는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 제주도에서 먹을 도시락을 준비했다. 잘 상하지 않으면서 바로 덥혀 먹을 수 있고 간단하면서도 배부르고 심지어 맛까지 있는 메뉴를 열나게 고민했다. 그렇게 무려 다섯 개의 메뉴를 엄선하여 도시락을 만들었다. 안 그래도 힘든 일정이 될 텐데 내가 한두 가지 메뉴로 질릴까봐서다. 가방이 천근만근이었다. (이게 재미가 없을 리가 있나?) 밤에 졸려 죽겠는 와중에 요리를 하는 나 스스로가 너무 웃겨서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알아준다고 이렇게까지 할까. 비건이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까. 방송 스태프들은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내가 준비해온 도시락을 보고 안심과 경악이 공존하는 표정을 내비췄다. 나는 촬영 내내 기분 좋게 배때기가 부른 해피 비건이었다. 정말이지 비건은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매일 새롭게 귀찮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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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 © 양다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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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y © 양다솔

그 와중에 세상은 전에 없이 편리하고 효율적이다. 하루가 다르게 개편된다. 빨라진다. 낡은 것은 부서지고 새로운 게 들어선다. 빽빽해진다. 그런 세상에서 귀찮음은 아주 짧은 순간일지라도 장애가 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불 보듯 뻔하다. 편리와 효율이라는 강력한 등대가 비추고 있는, 가장 환한 길이다. 가장 높은 효율을 위해서 우리는 몸을 전혀 움직일 필요도 없다. 손가락 하나로 충분하다. 우선 집 밖으로 나가는 것부터 그만두자. 신발을 신는 것도 비효율적이다. 모든 것을 새벽 배송으로 시키자. 내가 움직이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가 새벽부터 온몸을 죽도록 움직여야 한다는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눈 깜빡 하면 집 앞에 원하는 것이 대령해 있는 마법에 집중하자. 뭘 먹을지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 가장 잘 팔리는 순으로 정렬해 상단에 있는 걸 사면 된다. 그것이 허위 광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 먹기만 하면 되니까. 책도 사라져야 한다. 유튜브를 보면 되니까. 인도도 없애자. 고속도로를 타면 되니까. 걸을 필요가 없어졌으니 다리도 없애자. 삶의 고민도 없애자. 학교에 갔다가 학원에 갔다가 대학교에 갔다가 결혼을 하고 대기업에 갔다가 자영업을 하면 되니까. 시장은 사라지고, 산책하는 사람들도 사라지고, 붕어빵 포장마차나 가망 없는 꿈을 좇는 사람들, 미끄럼틀이나 그네도 사라져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보니까. 그리고 깨닫게 된다. 내가 스스로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마법처럼 저절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의 파도 속에 잠겨 내 몸이 함께 쓸려가고 있다는 것을. 그 거대한 컨베이어벨트에서 이탈하려면 감내해야 하는 어마무시하고 유일한 것이 있다. 바로 귀찮음이다. 세상이 원하지 않는 길은 모두 귀찮다. 다른 길을 상상하는 것은 귀찮다. 찾기 어렵고 복잡하고 어둡고 지난하고 낯설다. 그리고 너무도 값지다. 누구도 대신하지 않는, 나 스스로 옮기는 걸음이기에.

Writer

양다솔은 글쓰기 소상공인, 비건 지향인이다 . 에세이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2021)을 썼고, 유료 뉴스레터 [격일간 다솔]을 발행하고 있다.

@kakmsic

일러스트레이션 제공 © 윤미원, 매거진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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