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니다 킴은 조각에서 출발해 설치, 영상, 웹아트, 사운드까지 가볍게 경계를 넘나드는 창작자입니다. 그에게 ‘기술’은 목적이 아니라 통로. 메타미디어(컴퓨터)와 소리를 매개로, 변하고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의 감각과 인지라고 말하죠.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빨리 보게 된 시대에, 그는 다시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인지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래서 후니다 킴의 작업엔 늘 ‘사유체로서의 장치’가 등장합니다. 몸에 걸치거나 공간에 놓이는 장치가 청각과 촉각을 흔들고, 관객의 움직임과 데이터의 예측이 미세하게 어긋나는 그 틈을 드러내죠. 그는 이것을 ‘느린 소화’라고 부릅니다. 정보를 급히 삼키지 않고 오래 씹어 자기 감각으로 체화시키는 일.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만져질 듯한 소리를 다루는 태도입니다. 완벽한 해답 대신 집요한 질문을 택하는 창작자. 관람자를 감상자보다 ‘참여자’로 초대하는 작가. 후니다 킴이 제안하는 근미래의 감각과 새로운 듣기의 방법을 BE(ATTITUDE)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NEO PRODUCT series ‘Player’ sounds that may disappear›, 2024, sensor, electronic circuit, brass, aluminum, ABS plastic, Raspberry Pi, OLED, speaker, amplifier, 20×9×7 cm, Culture Station Seoul 284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저는 조각을 기반으로 미술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설치, 사진, 영상, 웹아트, 인터랙티브 디자인, 사운드 아트 등 다채로운 매체를 탐구해 왔습니다. 특히 메타미디어(컴퓨터)와 소리를 주요 매개로 삼는 저에게 디지털 기술은 현재의 세상을 읽어내는 통로이자 깊이 있는 사유의 대상이에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인공지능, 가상공간, IoT 환경 등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저는 기술 자체보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감각적·인지적 변화에 더 눈길을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각 능력과 감수성이 급격한 사회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 버겁고 넘쳐나는 정보를 온전히 소화하기 어려운 지금, 저는 대상을 바라보고 읽어내는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사유체(思惟体)로서의 장치’를 고안하며 그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새로운 감수성과 근미래의 감각을 살피며 관객에게 질문을 건네고자 해요.
‹NEO PRODUCT series ‘Sound Table_Floating Body’›, 2024, sensor, electronic circuit, brass, aluminum, ABS plastic, Raspberry Pi, OLED, speaker, amplifier, 70×70×70 cm, Culture Station Seoul 284
‹NEO PRODUCT series ‘Sound Table_Floating Body’›, 2024, sensor, electronic circuit, brass, aluminum, ABS plastic, Raspberry Pi, OLED, speaker, amplifier, 70×70×70 cm, Culture Station Seoul 284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중학생 때 우연히 잡지 『취미가』를 접하게 되었어요. 거기 실린 2차 대전 독일군 스케일 모형에 단숨에 빠져들었죠. 손으로 만지고, 조립하고, 완성하는 그 과정이 너무 즐거워서 ‘이걸 직업으로 삼을 수는 없을까?’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문제는 제가 그림을 정말 못 그렸다는 거예요. (웃음) 당시엔 ‘미술 = 그림 잘 그리기’라고 생각했거든요. 건축과에 가서 건축 모형을 만들까, 아니면 독학으로 프라모델 원형 제작자가 될까 고민하던 중, 친구 하나가 그러더군요. “야, 미대에 조소과라는 게 있어. 입시만 통과하면 네가 하고 싶은 거 만들기만 하면 돼!” 그 말을 듣고는 눈앞에 새로운 길이 열렸죠. 입시 미술을 시작해 계원예대 조형과에 들어갔는데, 막상 가 보니 제가 상상했던 ‘조각만 하는 곳’은 아니었어요. 컴퓨터그래픽, 영상, 사진, 시간 예술… 다양한 매체로 마음껏 실험하는 놀이터였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아, 예술이 이렇게 넓구나.”
그 후로는 정말 예측 불가한 행보였습니다. 실험 영상을 만들고 웹아트에도 도전했고, 인형을 조각해 보기도 했고, 인터랙티브 광고 디자이너로도 일하기도 했죠. 그러다 일본 유학 중 우연히 사운드 아트를 만났고, 소리가 물리적 공간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강한 전율을 느꼈죠! 돌이켜보면, 중학생 시절 모형을 만지작거리며 느꼈던 그 촉각적 즐거움이 지금의 ‘만져질 듯한 소리’를 다루는 작업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런 재료를 만지고 있는 셈이죠.
‹Landscape being decoded›, 2021, 2 datascapes, video, sound, booklets, 4 navigators, installation,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Seoul, korea
‹Landscape being decoded›, 2021, 2 datascapes, video, sound, booklets, 4 navigators, installation,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Seoul, korea
‹Landscape being decoded›, 2021, 2 datascapes, video, sound, booklets, 4 navigators, installation,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Seoul, korea
작업 공간을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제 스튜디오는 말하자면 ‘사유 실험실’에 가까워요. 3D 프린터, 가공 장비, 솔더링 도구, 그리고 온갖 전자 부품과 소재 샘플들이 곳곳에 쌓여 있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프로토타이핑을 할 수 있도록 해 두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실험을 하다 보면 금세 공간이 좁아지고 마치 작은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카오스 상태가 됩니다. (웃음) 그래서 정작 글을 쓰거나 생각을 정리할 때는 카페를 전전하곤 해요. 머릿속을 정리하려면 물리적 공간도 깨끗해야 하더라고요. 결국 스튜디오는 주로 ‘손으로 만지는’ 피지컬한 작업과 미팅 공간이자, 생각을 물질로 전환하는 곳이죠. 카페는 흩어진 생각을 텍스트로 묶는 장소입니다. 생각을 물질로 바꾸는 곳과 언어로 묶는 곳. 그렇게 두 공간이 제 작업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탱해 주고 있어요.
작업실 전경
작업실 전경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저는 주로 이동할 때, 혹은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을 때 가장 많은 영감을 받아요. 특히 한적한 지하철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이동하는 그 시간을 무척 좋아합니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지상 전철이라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까지 보여 더 특별했죠. 가끔은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 소리를 360도로 스캔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 작은 습관이 또 다른 영감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녹음용 마이크를 늘 가지고 다니려 하지만 서울에서는 소음이 워낙 많아 실제로 녹음하는 경우는 줄어들었어요. 그리고 다른 분야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도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에요. 예를 들어 셰프에게서 “음식의 온도가 맛을 좌우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문득 “그럼 소리의 온도는 뭘까?”라는 엉뚱한 질문이 떠오르거든요. 그렇게 우연히 스친 대화들이 서서히 제 안에 스며들고, 어느 순간 작업으로 발현되는 것 같아요.
‹Fine-Tuning Human Sense 1.0›, 2023, AI model, 3 cameras, iPad, electronics, 3D printing, sound, mixed media, «ZER01NE Day», Hyundai Motors (Sfactory)
‹Fine-Tuning Human Sense 1.0›, 2023, AI model, 3 cameras, iPad, electronics, 3D printing, sound, mixed media, «ZER01NE Day», Hyundai Motors (Sfactory)
‹Fine-Tuning Human Sense 1.0›, 2023, AI model, 3 cameras, iPad, electronics, 3D printing, sound, mixed media, «ZER01NE Day», Hyundai Motors (Sfactory)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저는 사람들이 지금의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그 태도와 생각, 그리고 기술 환경 속에서 변화하는 인간의 감각을 관찰합니다. 그런 생각들이 늘 머릿속을 떠다니다가, 어느 아주 평범한 순간에 한 찰나의 풍경이 모든 것을 꿰뚫듯 들어오곤 해요. 그게 때로는 문장이 되고, 때로는 이미지, 혹은 단어 하나로 시작점이 됩니다.
과정은 매번 다릅니다. 수많은 정보를 선별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데, 저는 이 ‘느린 소화’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즉각적인 정보 소비가 당연한 시대에, 오히려 이런 느림이 강한 인내력을 요구하거든요.) 어느 정도가 체화되면, 사유하는 뇌의 움직임과 그것을 아웃풋하는 손의 움직임이 교차하기 시작합니다. 생각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은 채, 마치 뜨개질처럼 한 올 한 올 엮여 가는 거죠. 그러다 어느 순간 ‘상’(像)이 맺힙니다. 안개 속에서 형체가 서서히 드러나는 것처럼요. 그때부터는 구체적인 장치의 형태와 파편적인 메모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 반복됩니다. 끝없는 순환이지요.
‹Fine-Tuning Human Sense 1.0›, 2023, AI model, 3 cameras, iPad, electronics, 3D printing, sound, mixed media, «ZER01NE Day», Hyundai Motors (Sfactory)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저는 2019년부터 지금까지 〈Sensory Datascape Series〉라는 연작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감각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탐구하는 작업이죠. 자율주행에 쓰이는 라이다 센서에서 곤충 눈을 닮은 디지털 임플란트까지, 관객의 몸에 직접 보철되는 장치를 통해 일상 풍경을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게 하는 작업이죠.
이 시리즈의 올해 신작 〈파인-튜닝 되는 신체감각 2.0〉은 2025년 아르츠 일렉트로니카에서 Artificial Life & Intelligence 부문 Honorary Mention을 수상했어요. 이 작품은 어떤 대상을 또렷하게 보기 위해 관람객이 멈춰 서서 여러 차례 눈을 깜빡이게 합니다. 때로는 눈 근육이 경련할 만큼 강박적인 깜빡임을 유도하기도 하죠. 동시에 AI는 관객이 아직 보지 못한 영역을 선제적으로 예측하죠. AI의 예측과 인간의 실제 감각이 충돌하고 어긋나는 순간, 우리는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됩니다.
정보의 과잉 속에서 인간의 감각이 흐려질 위험이 있는 지금, ‘감각의 최적화’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AI가 건네는 데이터를 우리는 어떻게 느끼고 몸으로 체화할 수 있을까요? 이 작업은 바로 그 물음에 대한 시도입니다.
‹Fine-Tuning Human Sense 2.0 from the Sensory Datascape Series›, 2025
‹Fine-Tuning Human Sense 2.0 from the Sensory Datascape Series›, 2025
그 외에도 <네오 프로덕트: 무심한 귀를 위한 애피타이저 시리즈>라는 사운드 프로덕트 작업과 신체·사운드 인터페이스 연구 작업을 계속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김승범 작가와 함께 콜렉티브PROTOROOM으로, 서울시립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에서 신작 <0.000001 GB Matter Matters 당신의 탐색을 기달리며>를 상설 전시로 선보이기 시작했어요. 이 작업은 소리 데이터가 0.000001GB, 즉 먼지 같은 작은 소리 데이터를 연주하는 ‘계산하는 악기’ 를 다수 설치한 작업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대용량으로 고화질과 고음질이 넘치는 시대에서 말이죠. (웃음) 자세한 내용은 직접 전시장에 방문해서 텍스트를 읽고, 악기를 만져 보고, 관계의 배치를 따라가며 체감해 보시길 권합니다. 내년에는 이 작업을 매개로 한 관객 소통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선보일 예정이에요.
‹NEO PRODUCT : Appetizers C. SoundMirrors_0›, 2025, Raspberry Pi, electronic parts, speaker, mixed media
‹NEO PRODUCT : Appetizers C. SoundMirrors_0›, 2025, Raspberry Pi, electronic parts, speaker, mixed media
지금 같은 초기술의 시대, 우리는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감각합니다. 하지만 몸의 기민함은 조금씩 흐려지고, 때로는 마모되기도 하죠. 이런 상황에서 제가 최근 몰두하는 건 ‘사유체(思惟体)로서의 아파라투스¹ 를 고안하고 제안하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에요. 청촉각(듣기 감각)과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인간의 감각과 인식 변화를 탐구하고 말 그대로 ‘생각하는 장치’를 만들어 내는 거예요. 이 장치는 공간에 설치되기도 하고, 관객이나 퍼포머의 몸에 직·간접적으로장착되면서, 직접 몸으로 참여하는 감각을 유도합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하는 건 기술 그 자체보다, 변화하는 기술과 상호작용하며 감각을 재조정하고 새롭게 체화해 가는 인간의 적응 과정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됐어요. 우리가 보고, 듣고, 감각하는 것들을 정말 하나하나 씹어서 체화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질문을 던지는 작업입니다.
¹ 아파라투스(Apparatus): 디바이스의 어원으로 단순한 기계적 장치를 넘어, 사유와 감각을 매개하는 철학적 장치.
‹Meditation Apparatus for the Newtype Body: Meditation on Youtube›, 2023,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Seoul, Korea
‹Meditation Apparatus for the Newtype Body: Meditation on Youtube›, 2023,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Seoul, Korea
‹Meditation Apparatus for the Newtype Body: Meditation on Youtube›, 2023,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Seoul, Korea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아침에 일어나면 가벼운 근력운동으로 몸을 깨우며 하루를 시작해요. 특별히 급한 일정이 없을 때는 나름의 루틴을 지키려고 하죠. 주 3일은 아침 10시에 작업실로 출근해서 오후 6시까지 작업합니다. 하루는 프로토룸(김승범 작가와 함께하는 콜렉티브)에서 정기 작업을 하고, 또 하루는 대학원에서 ‘신체와 햅틱 사운드 인터랙션’을 강의해요. 나머지 시간은 유동적이에요. 보충 작업을 하거나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거나, 가끔은 그냥 엉뚱한 작업 상상에 빠져 있기도 하죠. 이런 ‘빈 시간’이 의외로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더라고요.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들이 빠르게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시대잖아요. 그래서 ‘내 작업은 어디에 위치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많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사운드’, ‘현대미술’ 같은 단어들이 어느 순간부터 굳어버린 것 같아 그 지점에도 눈길이 가요. 그래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소리가 소비되는 양상과 현대미술을 관객이 바라보는 태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시대는 너무 빠르게 진화하고 있어요. 대상을 보는 방식도, 듣는 방식도, 심지어 소통하는 방식까지 쉴 새 없이 바뀌는데, 정작 현대미술이나 소리를 인식하는 관념의 변화는 더딘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일 수도 있지만요.) 소리는 흔히 음악이나 정보로만 이해되고, 미술은 ‘바라보는 대상’으로 고정되곤 하잖아요. 제가 주목하는 건 바로 이 굳어버린 ‘상’(像)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소리가 더 넓게 해석될 수 있고, 미술도 능동적인 수행을 통해 읽히고 경험될 수 있음을 실험하고 싶습니다.
제게 삶과 작업의 경계는 모호합니다. 일상에서 관찰하고 고민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작업으로 이어지거든요.
저는 의도적으로 ‘느리게 사는’ 태도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앞서 말한 ‘느린 소화’처럼요. 빠르게 소비하고 지나가는 대신, 하나의 현상을 오래 들여다보고 곱씹는 거죠. 이런 태도가 작업에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관객에게도 “빨리 보고 지나치지 말고, 잠시 멈춰서 다르게 감각해 보라”고 제안하는 셈이지요.
가끔 제 삶의 태도가 변하는 시점이 있어요. 그때가 바로 작업이 전환점을 맞는 시기더군요. 삶과 작업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사유 과정인 것 같습니다.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슬럼프가 오면 일단 ‘정보와 작업량 다이어트’를 합니다. 뇌에 입력되는 정보량을 의도적으로 줄이고, 평소보다 더 느리게 생각하고 더 느리게 작업하려고 노력하죠. 그리고 한 공간에 갇혀 있지 않으려 합니다. 작업실에만 있으면 오히려 막막해지거든요. 그래서 많이 걷고, 이동하고, 장소를 바꿔 가며 시간을 보내요. 앞서 말했듯 지하철이나 이동 중에 영감을 많이 받는 편이라, 슬럼프일 때는 더욱 의도적으로 ‘이동 모드’로 전환하는 거죠.
사실 슬럼프도 일종의 ‘소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이 받아들인 것들을 천천히 소화시키는 시간. 그래서 슬럼프를 극복하려고 발버둥치기보다는, 그 시간을 인정하고 함께 가려고 해요.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1. 새로운 미술 생태계로의 확장 2. 자주 ‘듣기의 장’을 만드는 것 3.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비전을 제시하는 방법 4. 새로운 공간 5. 주기적으로 내 관성을 깨고, 내 안에 없던 나를 깨우는 것
이 다섯 가지가 요즘 저를 가장 고민하게 만드는 현실적인 과제들입니다.
‹Fine-Tuning Human Senses (Performance)›, ipad, electronics, speaker, 3D printing, sound,Ai Model, mixed media, Coreana museum, 2023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저는 ‘완벽한 이해’보다 ‘끊임없는 질문’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 유체 이탈하듯 한 발 떨어져서 현재 위치를 바라보는 태도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디지털 시대는 매 순간 엄청난 양의 정보와 자극을 쏟아냅니다. 이런 급류에 휩쓸리다 보면 의식적으로 멈춰 서서 대상을 깊이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저에게 창작은 바로 그 급물살 속에서 의도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관찰하고, 질문하는 행위입니다. 점점 추상화되고 복잡해지는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계속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저는 제 작업이 일종의 ‘트리거 장치’ 역할을 하길 바랍니다. 사람들이 잠시 멈춰 서서 그동안 그냥 받아들였던 것들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 그게 제가 생각하는 창작자의 역할이자 책임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글쎄요… 장 운동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시대는 너무 많은 것이 가능한 시대예요. 그래서 오히려 하나에 집중하고, 적절한 입력량과 제한된 범위 안에서 실험하는 자세가 필요한 듯합니다. 그래야 대상을 더 본질적으로 바라보고 인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마치 사냥감을 기다리는 사냥꾼 같은 자세로요. (웃음) 그 후에야 그것을 자기 것으로 체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시대를 관통하는 관찰자로서, 누구에게는 망원렌즈 같고 누구에게는 안경 같은 역할을 하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멀리 있는 걸 당겨서 보여주기도 하고, 가까이 있지만 흐릿한 것을 선명하게 만들어 주기도 하는 그런 존재로요.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음… 제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 더 관찰해야겠죠. 그리고 작업뿐 아니라 ‘후니다 스튜디오’로서 지금 느슨하게 준비하고 있는 프로덕트들과 새로운 공간이 자리를 잡아, 다양한 사람들과 프로젝트를 함께 이어 가고 있기를 바랍니다.
Artist
후니다 킴(@hoonidakim)은 조각에서 출발해 설치, 영상, 웹아트, 사운드 아트까지 다양한 매체를 탐구해 온 미술가이다. 메타미디어(컴퓨터)와 소리를 주 매개로 삼으며, 기술 그 자체보다는 기술 사용으로 인해 변화하는 인간의 감각적·인지적 변화를 주목한다. 방대한 정보 속에서 대상을 바라보고 읽어내는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사유체(思惟体)로서의 아파라투스’를 고안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주요 활동으로는 개인전 《무심한 귀를 위한 애피타이저 A부터 C: 네오프로덕트 선언》(디스위켄드룸, 2021), 《익숙함이ㆍ쌓이고ㆍ녹아내리는》(페리지갤러리, 2018) 등이 있다. 또한 《메가트론 랩소디》(서울시립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 2025~), 《MMCA 다원예술 2023 전자적 숲: 소진된 인간》(국립현대미술관, 2023)을 비롯해 송은 아트스페이스, 백남준아트센터, 코리아나 미술관, 현대 제로원, ICC(일본) 등에서 전시에 참여했다. 2025년 Prix Ars Electronica Artificial Life & Intelligence 부문 Honorary Mention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