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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쉘터를 찾는 여정: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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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티튜드가 주목하는 요즘 ‘무엇’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쉘터’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 요소인 주거 공간, 치명적인 재난을 피하는 방공호, 주로 난민을 위해 제공하는 임시 거처뿐 아니라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장소 어디든 쉘터에 속하죠. 그런데 과연 물리적으로 고정된 장소만 쉘터일까요? 현대자동차에서 지원하는 큐레이터 양성 프로그램 ‘현대 블루 프라이즈’의 수상자 박지민 큐레이터는 이런 관념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자신과 관계 맺는 장소와 물건, 혹은 비물리적인 어떤 것까지 쉘터의 범위를 확장한 그의 아이디어는 지금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에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전시로 구현되었어요. 서로의 쉘터를 찾는 여정에 독자 여러분을 정중히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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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친구여. 당신과 소통하는 순간이 내게는 쉘터로 다가옵니다.’ – 에밀리 디킨슨 (1830~1886)

언제부턴가 ‘쉘터(shelter)’라는 단어가 우리 일상에 자주 쓰이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이유는 지난 몇 년간 전 세계를 갈라놓은 팬데믹 때문이다. 사람들로 넘실대던 흥겨운 거리가 도리어 가장 위험한 장소였으며, 가장 믿을 수 있는 동거인이라도 ‘코로나19’라는 주홍 글씨가 붙으면 집에서조차 격리하던 슬픔의 시대. 인류 역사상 가장 활발히 교류하던 황금기가 급격히 쇠퇴하는 와중에 사람들은 그래도 믿을 것은 집밖에 없다고 여겼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아지면서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고, 인테리어 붐과 함께 집이 지닌 정서적 의미를 묻는 의견이 텍스트 생산량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집을 포함한 쉘터의 개념은 난민에게 통용되는 임시 대피소를 넘어, 대역병에 노출된 인류의 물리적인 피난처, 정신적인 안식처를 상징하는 단어로 그 존재감을 확실히 새겨놓았다.

팬데믹이 사그라지면서 인류의 이동성은 다시 붐을 이루고 있지만, 쉘터는 여전히 여러 주체에게 흥미로운 연구 주제다. 미래의 이동성을 고민하는 기업인 현대자동차도 그중 하나다. 현대자동차는 ‘인류를 위한 진보’라는 브랜드 비전 아래 인간의 삶과 밀접한 아트와 디자인의 가치를 조명하며, 신진 큐레이터를 양성하는 어워드 프로그램 ‘현대 블루 프라이즈’를 운영 중이다. 지난 2022년 공모 주제는 질병, 환경 오염 등 인류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오는 피로감을 해소할 수 있도록 안식처로서의 쉘터를 고찰하는 ‘쉘터 넥스트Shelter Next’였다. 휴식과 도피를 위한 공간으로 여기는 쉘터를 동시대적 관점에서 논의해 보자는 제안은 그만큼 쉘터의 함의가 앞으로 지속해서 호출될 수밖에 없는 존재감을 획득했기 때문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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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 전경.

당해의 최종 수상자인 박지민 큐레이터는 난생처음 홀로 전시를 책임지는 데뷔 무대를 작년 12월 8일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에서 치렀다. 7개월간의 준비 끝에 선보이는 전시 제목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이란 영화를 세계에 알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걸작,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Where Is the Friend’s House?)›의 타이틀을 차용했다. 제목 특유의 착 감기는 맛과 더불어 팬데믹의 후유증(?) 때문인지 ‘집’이라는 단어가 유달리 눈에 띄지만, 큐레이터가 전시를 통해 던지는 질문에 집중하려면 오히려 집에서 멀리 떨어지길 추천해 본다. 왜냐하면, 이번 전시는 사실 쉬지 않고 이동하는 현대인의 삶에서 집이라는 물리적 장소를 쉘터와 동일시하는 관념에 의문을 품으며, 새롭게 쉘터를 정의하는 고유한 특성에 대한 탐구 정신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길어 올린 교훈은 ‘관계성’이다. 이를 통해 한 개인과 독특하고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대상을 쉘터의 너른 정의에 끌어들인다. 물리적인 공간, 대상, 혹은 보이지 않는 비물리적인 무엇에 이르기까지! 덕분에 우리는 진실하고 은밀하게 머무는 행위의 확장된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는 기회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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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7개월의 준비 끝에 작년 12월 8일 오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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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민 큐레이터.

전시는 이런 인식의 틀을 따라서 천천히, 그리고 명징하게 스텝을 밟는다. 다른 층에 마련한 ‘아카이브’ 파트를 제외하면, ‘이동’, ‘확장’, ‘관계’라는 키워드로 이루어진 세 가지 파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각자의 공간을 확보하며 관람객을 기다린다. 물론 재미를 위해서 하이라이트 작품을 맨 처음으로 옮기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바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사운드 아티스트이자 디자이너인 유리 스즈키의 거대한 설치 작품, ‹히비키 트리›다. 마치 거대한 나무를 본뜬 마냥 위로 솟아올랐다가 저마다의 곡률로 모양을 유지하는 10개의 관에는 모두 스피커가 숨어있다. 조형물 앞에 마련한 초록색 네모진 창구에는 마이크를 내장해 그 앞에서 무슨 소리든 내뱉으면 최대 10초까지 녹음이 가능하다. 이후 10개의 관 중 무작위로 돌아가면서 녹음된 소리를 울린다. ‘울림 나무’라는 작품명처럼 소리를 매개로 상호작용하는 ‹히비키 트리›는 관계성을 암시하는 쉘터를 직접적으로 노출하는데, 전시를 시작하는 애피타이저로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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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스즈키, ‹히비키 트리›, 2023, 알루미늄, 열연강판, 전자부품, 495 × 551 × 125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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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스즈키, ‹히비키 트리›, 2023, 알루미늄, 열연강판, 전자부품, 495 × 551 × 125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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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관람객은 이동, 확장, 관계를 다루는 파트에 맞게 큐레이팅한 작업을 순차적으로 접하게 된다. 먼저 ‘이동’ 파트에서는 큐레이터가 전시를 기획한 이유이기도 한 이동성에 초점을 맞춰 쉘터의 속성을 살펴본다. 리슨투더시티의 리서치 프로젝트 ‹집의 의미 그리고 을지로의 미래 시나리오›,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는 펠릭스 렌츠의 ‹정치적 기류›에 이어 파트 마지막에 자리 잡은 오픈투베리어블스의 ‹연착륙›은 여러 면에서 매력적인 작업이다. 탈북민, 몽골과 파키스탄의 이주노동자, 외국인 유학생, 고려인 등 한국 사회로 편입했지만 그 위치가 불안정한 이주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동이 곧 인생의 변곡점이자 생존의 방식인 다섯 명의 이야기를 인터뷰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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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의미 그리고 을지로의 미래 시나리오›, 2023,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12분 50초, 그래픽, 270 × 400 cm. (좌)


펠릭스 렌츠, ‹정치적 기류›, 2020, 비디오 설치, 컬러, 실시간 송출, 사이렌 모듈, 금속, 콘크리트, 산업용 모터, 플렉시 글라스, 목재, 전자 부품, ADS-B 안테나, 가변 크기. (우)

‹집의 의미 그리고 을지로의 미래 시나리오›, 2023,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12분 50초, 그래픽, 270 × 400 cm. (상)


펠릭스 렌츠, ‹정치적 기류›, 2020, 비디오 설치, 컬러, 실시간 송출, 사이렌 모듈, 금속, 콘크리트, 산업용 모터, 플렉시 글라스, 목재, 전자 부품, ADS-B 안테나, 가변 크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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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투베리어블스, ‹연착륙›, 2023,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30분 26초, 그래픽 출력, 혼합매체, 가변 크기.

쉘터가 난민을 위한 임시 대피소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들이 한국에서 쉘터라고 느끼는 대상은 그 자체로 매우 현실적이며 동시에 개인의 서사가 담긴 내러티브의 집합으로 읽힌다. 이주자가 많이 거주하는 지방 소도시의 단관 극장에서 영감받아 여러 시각 요소를 차용한 설치물은 보는 재미가 있다. 극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팝콘 기계에 공존하는 팝콘과 뻥튀기부터 한국에서 만들어진 이주 관련 영상 목록을 색깔 별로 아카이빙한 평면은 시각적인 호기심을 강화한다. 무엇보다 흰색 파사드에 알파벳을 집자해 전시 제목과 이에 영감을 준 영화를 만든 감독명을 상영 정보처럼 표기하면서, ‘NOT’을 더해 언어유희를 부린 유쾌함은 커미션 작업만이 지니는 깨알 같은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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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투베리어블스, ‹연착륙›, 2023,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30분 26초, 그래픽 출력, 혼합매체, 가변 크기.

첫 번째 파트에서 얻은 ‘가변성’이란 인사이트를 발판 삼아 쉘터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확장’ 파트는 물리적인 집에 머무르던 쉘터를 다양한 관점으로 파고든 작업을 소개한다. 스튜디오 쉘터와 기어이가 협업한 ‹이향정: 기억으로 만든 집›은 2D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활동하는 주인공이 가상 세계에 새로운 집을 축조하는 VR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다. 친할아버지와 함께 살았고, 지금은 아버지가 지키고 있는 경주 양동마을의 300여 년 된 고택, 이향정은 자신의 소중한 기억과 추억을 담은 매개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VR 기술을 전적으로 활용한 덕분에 관람객은 화자 입장에서 내러티브를 겪으며 극적으로 빠져드는 게 매력이다. 2022년 열린 세계 최대 창조산업 축제 ‘SXSW’ 가상현실 부문에 국내 유일하게 초청된 해당 작품은 VR 전문 기기를 동반해야만 제대로 즐길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번 마주침이 귀하게 다가온다.

스튜디오 쉘터 & 기어이가 제작한 ‹이향정:기억으로 만든 집› 공식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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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배치한 VR 전문 기기로 작품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이어지는 아키타입의 ‹아열대로부터›는 방대한 리서치에 기반한 연구 프로젝트다. 먼저 아열대 지대에서 재배하는 사탕수수를 소재로 삼아, 원산지인 동남아시아를 넘어 전 지구의 아열대 지역에 널리 퍼진 국제적인 작물로 자리 잡은 이동의 역사를 살펴본다. 특히 기후 위기와 관련해 점점 아열대 기후로 변하는 우리나라 상황과 엮어서 실제 남부 지방에서 재배한 사탕수수로 종이를 만들고 여기에 사탕수수 세밀화를 그린 일련의 실험은 현실 감각을 타격한다.

작가가 생각하는 쉘터의 예시도 흥미롭다. 지리학에서는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생태계가 만나는 전환 지대를 에코톤(ecotone)이라고 부른다. 육지와 호수가 만나는 습지, 산에서 비탈져 평지로 이어지는 기슭, 사막에 물이 고인 오아시스가 대표적인 예다. 작가는 다양한 생물체가 상호작용하는 역동적인 에코톤을 식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쉘터로 상정하고 전 세계 아열대 지역의 에코톤 여덟 곳을 선정해 풍향, 풍속, 기온, 습도, 강우, 일광, 일조, 구름, 고도, 지형에 대한 1년 치 평균 데이터를 정리했다. 이를 기하학적 요소로 시각화한 태피스트리 필름을 레이어로 겹친 모습은 보는 이의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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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타입, ‹아열대로부터›, 2023,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4분 50초, 수제 종이 실험, 사탕수수, 수제 사탕수수 종이에 UV 평판 인쇄, 에코톤 태피스트리, 투명 필름에 UV 출력, 가변 크기.


한국 남부 지방에서 재배한 사탕수수에 한지 제작법을 적용해 종이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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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에코톤 여덟 곳의 다양한 데이터를 시각화한 태피스트리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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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에코톤 여덟 곳의 다양한 데이터를 시각화한 태피스트리 작업.

이어지는 작품은 평소 가변성을 주제로 다루는 장명식 작가가 온난화가 초래한 해수면 상승 시대에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복어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고, 내려놓음의 가치를 받아들여 자유롭게 부풀어 오르는 젤리 인간의 이야기를 3D 애니메이션으로 풀어낸 <복어되기>다. 다채로운 색감으로 가득 찬 ‹복어되기›는 특유의 귀여움 덕분에 5분이라는 상영시간이 지루하지 않다. AR로 구현하는 필터는 관객의 전시 경험을 영리하게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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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식, ‹복어되기›, 2023,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5분, AR, 핸드 드로잉, 종이에 잉크, 270 × 45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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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벽에 부착한 QR 코드로 AR 필터를 체험할 수 있다.

세 번째 파트인 ‘관계’는 큐레이터가 생각하는 새로운 쉘터의 특성인 관계성을 다룬 여러 작업을 선보인다. 전시장 맨 앞에서 관객을 맞이한 ‹히비키 트리›와 포옹이라는 행위의 긍정적인 효과를 모방한 루시 맥래의 ‹압축 카펫 2.0›, 가시연잎 위에서 선잠을 자는 백로 떼를 오직 달빛을 광원 삼아 기록한 정봉채 작가의 ‹UPOJBC130810›은 큐레이터가 말하고자 하는 쉘터의 본질을 보여준다. 특히 이 파트에서 생각을 골똘히 하게 만드는 작품은 단연 김대욱 작가의 ‹노리›와 박은영 작가의 ‹필로우 스터디 2›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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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맥래, ‹압축 카펫 2.0›, 2019, 금속(자동차 잭), 목재, 섬유, 메모리 폼, 225 × 183 × 107 cm, 인화지 출력, 84 × 59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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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채, ‹UPOJBC130810›, 2013, 무광 디아섹, 월넛 프레임, 200 × 300 cm

스스로를 오브제 메이커이자 스토리텔러라고 소개하는 김대욱 작가는 인조 머리카락을 노리개 공예 기법으로 이리저리 땋아 옹골진 설치 작업으로 풀어냈다. 남성과 여성을 구별 짓는 보수적인 스테레오 타입에 짓눌려 어릴 적 원하던 머리 땋기를 억압받은 기억이 생생한 그는 이제 기다란 인조 머리카락을 추억의 오브제인 노리개와 형태적으로 엮어 마음껏 땋는다. 해당 작업을 만드는 과정과 결과물은 내밀한 욕망과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통로이자 그 자체로 쉘터다. ‘쉘터는 외부의 간섭 없이, 온전히 자신일 수 있게 해주는 곳 또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을 생각하면, 개인의 기원을 담은 토템의 쉘터화와 더불어 이번 전시가 가리키는 관계성의 또 다른 차원을 보여주는 독특한 예시로 다가온다. 독립된 방에 설치한 박은영 작가의 ‹필로우 스터디 2›는 부드럽고 정서적인 로봇을 축소해 휴먼 스케일로 구현한다.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로봇과 함께하는 상상이 극과 극을 달리는 지금, 생명체처럼 호흡하는 메커니즘을 빛과 그림자로 시각화한 모습은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범주의 관계성과 쉘터에 대한 호기로운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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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욱, ‹노리›, 와이어, 인조 머리카락, PLA, 에폭시 레진, 가죽, 가변 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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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영, ‹필로우 스터디 2›, 2023, 천, TPU, 아크릴, 공압 밸브와 튜브, 아두이노 및 센서, 가변 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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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영, ‹필로우 스터디 2›, 2023, 천, TPU, 아크릴, 공압 밸브와 튜브, 아두이노 및 센서, 가변 크기.

패기 있고 육중하게 시도한 다수의 커미션 워크는 단연 전시의 매력으로 꼽을 만하다. 첫 번째 파트에서 두 점, 두 번째 파트에서 두 점, 그리고 대망의 세 번째 파트에서 세 점, 총 일곱 점을 전시 주제에 맞춰 국내외 작가에게 해석을 부탁했다. 전시에 출품한 11점의 작품 중 절반이 넘는 규모로 커미션 워크를 채우는 건 솔직히 놀랄 만한 일이다. 다양한 아티스트가 기존에 발표한 작품을 리서치하고, 그중 주제와 맥락에 맞는 작품들을 골라낸 후, 실물을 대여해 전시장에 제대로 구현하기만 해도 큐레이터 업무를 충분히 해낸 거나 진배없기 때문이다.

큐레이터로서 첫 공식 데뷔라 엄청난 부담감에 시달렸을 기획자의 심정을 염두에 두면, 오픈할 때까지 생명체처럼 유기적으로 변화를 꾀하는 전시 특유의 성정에도 불구하고 커미션 워크를 의뢰하고, 얻어내고, 설치하고, 다른 작품과 융화시킨 점은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런 담대함은 해당 전시가 지닌 고유의 매력을 창출하는 힘이자, 한 점 한 점 충실히 살펴보며 오랜 시간을 보낼 만한 개연성을 제시한다. 다른 층에 장소를 마련해 작가가 생각하는 쉘터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 여러 서적에서 영감받은 큐레이터의 메모를 엿볼 수 있는 ‘아카이브’ 파트로 끝나는 이번 전시는 순서대로 관람하길 추천한다. 의문점을 던지며 현상을 파악하고, 확장된 예시를 탐구한 후, 인사이트를 녹인 광경을 엮어내면서 후일담으로 마무리하는 흐름에 자연스레 올라타면 전시 경험이 상당히 완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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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바로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의 역할이다. 이번 전시는 마치 퇴적층을 연상시킨다. 7개월 동안 전시를 준비하며 좌충우돌한 면모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노출하기 때문이다. 이는 의도된 자연스러움에 가깝다. 처음 전시를 기획하는 신진 큐레이터의 고군분투를 지켜볼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레퍼런스를 공유하고, 지름길을 알려주고, 아쉬운 점을 채워 넣고, 매끈하게 정리하고 싶은 유혹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 멘토링과 스터디를 통해 큐레이터 개인의 성장을 기다리며 반질거리는 사포질로 인위적인 광을 내지 않았기에 고요히 산란하는 원석이 제빛을 내뿜을 수 있었다. 재능 있는 큐레이터를 후방에서 지원하며 자발적인 성장 기회를 제공하는 플랫폼을 지향하는 현대 블루 프라이즈의 진정성이 얻은 성취다. 과정에 집중하는 가치를 존중하는 태도와 정신의 흔적은 그래서인지 특히 값지게 다가온다. 깊은 우물에서 맑은 물을 길어 올리는 애틋하고 선명한 기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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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기간: 2023.12.08 – 2024.06.16

10시~20시 (매월 첫째 주 월요일 휴관)

Place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  부산 수영구 구락로 123번길 20

Writer

전종현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하며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등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 편집위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고, 2021년부터 2023년까지 기아글로벌디자인센터와 함께 «기아 디자인 매거진» 창간 작업과 콘텐츠를 총괄했다. 현재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로 «조선일보» «디에디트»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기고 중이며, 동시대 한국의 기발한 창작자에 주목하는 «비애티튜드» 편집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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