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아트위크 전시 장소를 찾아 걷다가 높은 가을 하늘을 마주했습니다. 오래된 기억이 떠오르면서 가상세계를 마주한 듯 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낮은 담장과 골목길, 오래된 지붕 위 감나무와 산 능선. 성곽 아래 빼곡한 집보다 더 넓게 펼쳐진 하늘. ‘가을 하늘이 높다는 게 이런 건가?’라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가 가야 할 곳을 지나쳤습니다. 애쓰지 않아도 ‘생각 버리기’가 되는 순간이었죠.
성북동에는 오래된 일상이 있습니다. 누구의 집이 전시 공간이 되고, 작업실에는 새로운 작가와 사람들이 드나들죠. 동네를 따라 걷다 보니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북아트위크에 참여한 모두에게 성북동은 익숙하고 그리운 장소가 될 것 같아요. 가을 낭만 치사량의 경계, 성북동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성북 예술 산책의 출발은 성북동이다. 성북 역사문화예술 공간 프로젝트에 참여한 11개곳 대부분이 성북동에 있다. 권진규 아틀리에, 장승업 집터, 성북회화연구소 터, 선잠단지 등 예술가들이 살았거나 작품 활동을 했던곳이라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뜻깊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특별 전시까지 만날 수 있다.
먼저 심우장으로 가보자. 심우장은 201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만해 한용운이 말년을 보낸 한옥으로, 그가 지은 시조의 제목이기도 하다. 성북동 가파른 골목을 올라가면 전망이 시원한 심우장이 나온다. 만해가 조선총독부를 마주보기 싫어서 북향으로 지은 한옥으로 유명하다. ‘심우장(尋牛莊)’은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불교 설화에서 따온 이름이다. 미술가 이우성이 잃어버린 소를 찾아 나선 여정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뒤뜰 담장에는 이우성 작가의 귀여운 21세기 심우도 10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여덟 번째 그림 ‘인우구망(人牛俱忘)’은 소와 사람을 모두 잊은 공(空)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여덟 번째 그림만 간결하게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 마당에 흰 돌이 동그랗게 놓여 있는 이유도 알게 된다.
조금 걸어 내려오면 최순우 옛집이 있다.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혜곡 최순우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등 명저를 남긴 미술사학자이다. 혜곡은 간송 전형필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성북으로 거처를 옮겼고, 같은 동네에 살았던 위창 오세창, 미술가 김환기·김기창·변종하, 시인 김광균과 우정을 나누었다. 그의 집에는 교류했던 성북 예술가들의 그림과 글씨뿐 아니라 조선시대 자기와 가구가 곳곳에 놓여 있어서 정취를 돋운다. 2002년 혜곡이 살았던 한옥이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재)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에서 새롭게 복원해 문을 열었고, 2006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는 성북아트위크를 맞아 팔순의 미술가 최인수의 조각을 실내외에 설치했다. 최인수는 젊은 시절 혜곡에게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고미술의 여백과 공간의 조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조각은 공간을 압도하거나 장악하지 않고, 조용한 존재감을 보인다. 정원의 감나무와 조각의 어울림도 근사하다.
이종석 별장은 조선 말기의 큰 부자 이종석이 1900년 성북동에 지은 한옥 별장이다. 행랑채와 안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당시 양반 가옥의 주거 형태가 변화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어서 흥미로운 가옥이다. 이곳에는 젊은 조각가 김동해의 우아한 작품을 설치했다. 채집한 돌과 함께 황동, 은, 철 같은 가느다란 금속을 사용해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같은 작품을 만들었다. 이종석 별장의 입구와 처마 밑, 석주에 놓인 가녀린 작업은 눈을 크게 떠야 보일 만큼 놓인 장소에 완전하게 녹아 있다.
성북동 별서
2026 성북아트위크 공간프로젝트 성북동 별서_한성필, 송석정; 비움으로 짓는 집, 2026 전시 전경
이번 성북아트위크의 최고 인기 장소는 서울 성북동 별서다. 예약이 필요했던 이곳은 오픈하자마자 빠르게 마감되어 대중의 관심을 입증시켰다. 성북동 별서는 조선 말기 문인 황윤명(1844~1916년)이 조성한 전통 정원이다. ‘성락원’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2020년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앞뜰에는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로 모이는 쌍류동천이 있다. 안뜰을 감싸는 용두가산에는 수령 수백 년의 엄나무, 느티나무, 참나무 등이 우거진 울창한 숲이 있다. 별서를 만들기 전에도 오랫동안 경승지로 유명한 곳이었다고 한다.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가 피란했던 곳이며, 의친왕 이강이 별궁으로 사용한 적도 있는 역사적인 장소다. 대사관저와 고급 주택이 가득한 성북동 한복판에 이런 정원이 숨겨져 있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평소에는 방문하기 어려운 성북동 별서를 포함한 성북아트위크의 배려가 반갑다. 이곳에서는 한성필 작가의 가림막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지난해 갑작스러운 화재로 일부 소실된 송석정을 가림막 작품으로 감쌌다. 캐나다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 한성필은 사진으로 만든 환상적인 가림막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에는 그가 직접 수묵으로 그린 가림막으로 송석정을 둘러싸고 있어 보존이 필요한 별서의 현재를 은유했다.
삼청각 취한당에서는 가수이자 미술가 유나얼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한옥 한 채를 다 쓰는 작지 않은 개인전이며, 작품 25점 중 대부분이 신작이기 때문에 나얼의 팬이라면 놓칠 수 없다. 그를 대표하는 콜라주 작업부터 침대 프레임을 이용한 대형 설치 작품까지 다채로운 작품이 매력적이다. 삼청각은 한옥 식당으로 알려져 있지만, 1970~1980년대 우리나라 국빈 접대와 정치 회담이 이루어진 중요한 곳으로, 2000년 서울시 문화시설로 지정되었다.
최만린, 기(氣), 1969, 테라코타, 49×45×23 cm, 성북구립미술관 소장, 사진 이정훈
“집은 생명이 나고 자라고 떠나가고, 궁극에는 나 또한 거기서 잠드는 생명의 밭입니다.”(최만린)
2020년 개관한 최만린미술관은 작가가 생전에 직접 지은 집을 미술관으로 개관한 특별한 곳이다. 삼선교와 돈암동 전셋집에서 살던 작가 최만린(1935~2020)은 정릉동으로 이사해 집과 작업실을 지었다. 이곳은 그가 거주하며 작업했던 역사적 장소이기에 꼭 한 번 방문해볼 가치가 있다. 1958년 제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이브’로 특선을 수상한 작가이기에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이브› 연작을 만날 수 있다. 11월 28일까지는 그와 밀접하게 교류했던 후배 조각가 박병욱과 함께 연 2인전 «집: 두 조각가를 잇다»가 열리고 있다. 박병욱은 1980년대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했을 만큼 두 사람의 인연은 각별했다. 최만린은 동양 사상에 기반을 둔 추상 조형이 특징이며, 박병욱은 인체 구상 조각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정원에도 최만린의 조각이 가득해 마치 작가가 반겨주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 미술관이다.
성북을 대표하는 두 곳의 미술관도 가세했다. 이번 성북아트위크를 총괄 기획한 성북구립미술관은 특별전 «서세옥ㆍ서도호: 어루만지다»를 12월 20일까지 선보이며, 간송미술관의 «상서, 컬렉션을 읽다»는 12월 6일까지 열린다.
“아버지 서세옥과 함께하는 전시는 처음이라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번 전시는 앞으로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아버지와 함께하게 될 대형 전시의 프리퀄 개념으로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전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버지와 저의 관심사가 일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굉장히 다른 점도 있어요. 작가로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개막식에 성북구립미술관을 찾은 서도호 작가는 아버지와 함께하는 첫 공동 전시에서 따뜻한 소감을 밝혔다. 성북을 기반으로 작품 세계를 열었던 서세옥과 서도호가 공유하는 성북동 한옥을 삶과 기억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살펴보는 전시다. 서세옥의 ‹인간› 시리즈와 서도호의 성북동 한옥을 탁본한 신작, 실 드로잉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 탄신 12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상서, 컬렉션을 읽다» 전시 중이다. ‘상서(箱書)’는 오동나무 상자 위에 쓴 유물의 기록을 뜻한다. 상서는 본래 일본 무로마치시대에 중국 다기의 진위를판정하던 감식 문화에서 시작되었다. 1910년대 이후 고미술 유통이 시작되면서 간송 컬렉션 고유의 수장 체계로 승화되었다. 오동나무 상자는 습기 조절과 방충ㆍ방부 효과가 있어서 미술품 보관에 적합하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오동나무 상자 700건에서 상서가 확인된 상자는 258건입니다. 그중에서 51건 106점의 작품을 선보이는 올해의 마지막 전시입니다. 당대의 감식가 위창 오세창, 관재 이도영, 무호 이한복, 나가오 우잔이 남긴 유물에 관한 기록으로 작품의 진짜 이름부터 지나온 여정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인건 관장은 단원 김홍도의 ‹낭원투도›, 추사 김정희의 ‹차호호공›(보물), 오원 장습업의 신선도 ‹송하녹선›, 심전 안중식의 ‹한산충무› 등을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추천했다. 중국으로 반환한 중국 사자를 대신해 보화각을 지키고 있는 귀여운 조선 석호상도 놓치지 마시라.
2주간의 성북아트위크 기간에 성북의 명소 수십 곳을 모두 다니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성북아트위크가 끝나도 성북의 예술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역사문화예술 공간과 문화 기관에서는 여전히 전시와 행사가 이어지므로 이번 주말, 성북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늦가을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성북에서 예술가들이 남긴 삶과 기억을 만날 수 있다.
Writer
이소영(@soyoung_lee_art)은 문화 기자다.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스타일 H», «더 갤러리아»에서 일했고, 최근에는 여러 매체에 기사를 쓰고 있다. 『사진 미술에 중독되다』,『서울, 그 카페 좋더라』, 『전통 혼례』의 저자이며, 『와인과 사람』, 『노래하지 않는 피아노』, 『미국에서 서바이벌하기』, 『나를 마케팅하고, 세계를 PR하라』, 『브로드웨이의 노래를 들어라』 등을 기획·편집했다.
‘현대모터스튜디오 고양’의 개관 콘텐츠를 총괄했고, CJ ENM과 함께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들의 시즌 그리팅 굿즈를 만들었다.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한류여행안내서 Person:able SEOUL』을 출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