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Essay

2026 성북아트위크 성북동의 예술가들 1

Writer: 이소영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1

성북동 아뜰리에, 1954년,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올가을 가장 주목받은 행사를 꼽으라면 단연 성북아트위크가 아닐까요?


역사와 문화, 두 단어를 떠올리면 왠지 거창하게 느껴집니다. 올해 첫선을 보인 성북아트위크는 어렵고도 익숙한 주제를 제대로 보여줬어요. 아니, 경험하게 했죠. «집: 이어진 숨결»이라는 기획으로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자 창작의 산실이었던 장소를 새롭게 조명하고, 그곳에 머물며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했어요. 남녀노소 함께 어울리고, 외부 방문객을 환대하는 마을 풍경이 행사 기간 내내 이어지고 있죠. 피드에는 방문 후기와 관람 팁이 공유되고, 그 호응에 화답하듯 참여 기관에서는 마지막 주말을 앞두고 운영 기간을 연장한다는 반가운 소식도 전해왔습니다. 


성북동은 오래전부터 예술가들이 살아온 마을입니다. 김용준의 노시산방을 이어받은 김환기와 김향안의 수향산방, 이쾌대가 문을 연 성북회화연구소, 권진규가 말년까지 작업했던 아뜰리에, 서세옥과 서도호 부자의 흔적, 백석의 연인 김영한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한 길상사까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간 예술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고, 지금도 많은 창작자가 이곳에서 일상을 보내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예술가의 마을에 발걸음이 이어지고,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는 성북아트위크. 성북동의 특유의 안온함을 떠올리며, 이소영 기자가 안내하는 성북동의 이야기를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2

동선동 아틀리에에서, 조각가 권진규, 고려대학교 제공

“성북동은 단순한 부촌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궁궐과 가깝고, 풍광도 수려해 많은 선비가 찾아와 풍류를 즐겼으며, 역사 유적지도 산재한 유서 깊은 동네입니다.”

(『동아일보』 2000년 12월 10일 서세옥 인터뷰 중)

산정 서세옥(1929~2020)은 1940년대부터 친구들과 성북을 자주 찾았고, 1960년대 중반에는 이곳에 정착했다. 스승 근원 김용준은 1930년대부터 10여 년간 한옥 ‘노시산방’에 거주했으며, 산정에게 서예를 가르친 소전 손재형은 수장가 배정국의 성북동 집에서 김환기, 이태준과 자주 어울렸다. 그렇기에 서세옥이 성북을 평생의 안식처로 결정한 것은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1973년 창덕궁 연경당을 본떠 만든 열네 칸 사랑채 무송재(撫松齋)를 직접 지었고, 그곳에서 자란 서도호, 서을호 형제는 아름다운 영감을 받아 미술가와 건축가로 우뚝 섰다.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3

Suh Se Ok in his studio, 2018 Photo by Joo Yeon Lee Courtesy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4

무송재(撫松齋),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성북은 조선시대 북한산의 남쪽 자락에 위치한 산림 지역이었으나 도성 뒤편에는 자연경관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왕족이 별장을 짓거나 문인들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주거지와 보성전문학교가 들어섰지만, 도심에서 벗어난 한적한 자연경관은 문화예술인들을 매료시켰습니다. 1970년대에는 대사관저와 고급 주택이 대거 들어서면서 현재의 이미지가 형성되었고, 길상사와 개운사, 심우장, 성락원 등의 공간은 성북구를 특별한 곳으로 자리매김한 문화유산입니다.”

성북구립미술관 김보라 관장은 성북은 당대의 예술가들이 서로 교류하며 영감을 주고받았다는 것이 독특하다고 설명했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6.25전쟁을 거쳐 2026년에 이르기까지, 성북의 예술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근현대 문화사를 알 수 있을 정도다. 특히 미술가, 음악가, 문학가, 건축가 등 60여 명의 20세기 거장들이 성북동, 정릉동, 삼선동, 동소문동, 돈암동, 동선동을 중심으로 활약했기에 지역별로 그들의 자취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성북동의 대표 미술가는 김환기, 장승업, 최만린, 전성우 등이다. 문학가로는 김광균, 김광섭, 이어령, 조지훈,한용운이 대표적이며, 건축가 김중업, 음악가 윤이상도 성북에서 살았다.

“1944년 5월 1일.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고희동 선생의 주례로 정지용, 길진섭의 사회로. 성북동 274-1. 근원 선생이 손수 지으신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보금자리를 꾸미다…….”

(김향안 ‹월하의 마음›중)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5

성북동 노시산방에서 김용준, 1930년대 말 1940년대 초, 열화당 제공

미술가 김용준은 김환기에게 화초를 잘 가꾸어 달라는 부탁을 하고 노시산방을 맡겼다. 김용준은 이곳으로 이사온 신혼부부를 위해 김환기의 호 수화와 김향안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수향산방’이라는 새 이름을 지어줬다. 그 당시 김환기는 전통 목공예와 도자기를 수집하는 데 열중했었고, 추상 화가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 단계를 성북에서 밞았음을 알 수 있다. 김환기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년)는 성북에서 친분을 나누던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6

김용준, 수향산방(樹鄕山房) 전경, 1944년, 종이에 수묵과 담채, 24×32cm,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소장

영화 ‹취화선›의 모델로 알려진 조선의 천재 화가 장승업도 성북동 초가집에 살았다. 장승업은 춘곡 고희동, 위창 오세창, 석제 서병오와 교류했고, 장승업의 작품을 본 근원 김용준이 전통 그림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장승업, 김용준, 서세옥이 서로에게 스승과 제자가 되어 성북에서 교류하며 배우고,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성북의 예술가들은 각자도생이 아니라 서로를 격려하고 예술적 영감을 교환하는 존재였다.

성북동의 상징인 간송미술관은 1938년 간송 전형필이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 사립 미술관이다. 간송은 위창 오세창의 가르침을 받아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추사 김정희 등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위창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 오경석의 아들로, 한국미술사 연구의 근간을 이룬 인물이다. 간송 전형필, 위창 오세창, 혜곡 최순우는 성북동에서 가까이 살면서 서로 소통하며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알렸다. 간송의 장남 전성우 역시 뉴욕 휘트니미술관, SF MOMA 등에 작품이 소장된 현대미술 작가이지만, 그의 작품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아쉽다.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7

간송미술관 출처 성북마을아카이브 ©성북구청

“다행히 내가 사는 정릉 골짜기가 온통 산으로 뒤덮여 있는 까닭도 있어 십상인 것이다. 행여 반가운 친구나 와서 깊숙한 산속으로 그들을 찾아 자리를 잡아도 좋고, 또한 홀로 기슭을 돌아 높은 하늘을 우러러 보아도 좋다. 마음이 후련해짐을 느낀다.”

(박고석 ‹정릉 골› 중)

바로 옆 정릉동에서는 미술가 이중섭·박고석·한묵·최만린·정영렬, 문학가 박경리·박화성·계용묵·신경림 같은 거장들이 맹활약했다. 극작가 차범석, 음악가 금수현·김대현 등도 경치 좋은 정릉에서 재능을 꽃피웠던 예술가이다.

‘산의 화가’로 불렸던 박고석은 평양 출신이었으나 부산 피란 생활을 마치고 정릉동으로 이사 왔다.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작은 집을 짓고 가족들과 살았으며, 작업실은 돈암동에 두었다. 이에 한묵과 이중섭도 그의동네로 이사와 셋은 항상 가깝게 지냈다.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8

1952년 12월 부산 피란지에서 함께 어울려 다니던 이중섭(왼쪽부터)과 박고석, 한묵,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출처 문화일보

“1955년으로 기억하는데, 묵이 내가 사는 정릉 골짜기로 이사를 왔다. 손수 끓여 먹는 것에 진저리가 나서 하숙을 했다. 생활은 궁핍한데도 오가는 정의가 두터웠고, 서로가 마음의 여유 속에 활보했다. 이러한 서리가 얼싸는 듯한 일상 속에서 묵과 중섭은 한편 작품 활동에 정진했고, 많은 제작을 남겼다…… 1955년 중섭이 성베드로병원을 퇴원하면서 이곳으로 가담해 왔다. 어지간히 지치기도 했던 외로운 사람끼리 벽 하나를 사이에 둔 하숙생활이다. 묵, 중섭과 같이 살면서부터 더욱 그 주변은 두터운 정과 뜨뜻한 기가 오고 가는 친구들이 적지 않게 정릉 골짜기로 모여 들었다.”

(박고석 ‹인간 한묵› 중)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9

이중섭, 정릉나무와 노란새, 1956년, 종이에 크레파스, 14.7 × 15.5 cm, 이미지 최열 제공

박고석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이중섭은 정릉 시절 생계를 위해 ‹문학예술›, ‹현대문학› 등의 잡지 표지와 삽화를 그렸다. 1956년 ‹돌아오지 않는 강›, ‹정릉 풍경›, ‹정릉 나무와 노란 새›를 마지막 그림으로 남기고,세상을 뜨고 말았다. 박고석은 한줌의 재가 된 이중섭을 정릉 뒷산에 뿌렸다.

1957년 박고석과 한묵이 중심이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그룹 모던아트협회를 만들기도 했다. 박고석, 한묵, 문신, 유영국, 천경자, 김경, 이규상, 문신, 황염수, 임완규, 정규 등 중견 미술가 11명이 활동했던 협회다. 이들은 모두 일본 유학을 다녀온 30~40대 미술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던아트협회는 1950년대 6회의 전시를 함께 했으나 급진적 성향의 단체에 묻혀 주목받지 못했다. 천경자는 박고석, 한묵의 집과 가까이 살았기에 그들의 집에 종종 찾아가 하소연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10

제 3회 모던아트협회 전시 인쇄물, 출처 경남일보

“종로에서 택시를 타고 정릉으로 향하였다. 정릉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개울을 따라 무작정 골짜기로 올라갔다. 일요일이 아닌 때문인지 별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적한 숲속에 흐르는 물소리만이 시원하게 감각된다. 바위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일혜는 밀짚모자를 벗어 들고 영재를 바라보며 웃었다.”

(박경리, 소설 『노을진 들녘』 중)

그때만 해도 정릉은 산세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는 박경리의 소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박경리의 장편 소설 『노을진 들녘』의 표지는 박고석이, 『파시』의 삽화는 천경자가 그렸다. 미술가와 문학가, 음악가, 건축가 등 성북의 예술가들은 분야를 넘나들며 소통했다.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11

박경리 장편 소설 『노을진 들녘』 표지, 출처 성북마을아카이브, 삼성출판박물관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12

천경자, ‹파시›(박경리 작) 소설 삽화, 동아일보, 1964.10.12., 79화, 10.1 × 15.2 cm, 출처 신문박물관

마지막으로 돈암동과 동선동에는 구상 조각의 거장 권진규, 한국화가 소정 변관식, 구상 조각가 백문기, 제주 그림으로 알려진 우성 변시지가 살았다. 문학가도 많이 살았는데, 염상섭, 정지용, 김동리, 신동엽, 박완서, 주요섭, 김내성, 오영수 등이 그들이다.

“동소문 밖 언덕빼기, 듬성듬성 보이는 고옥들 사이에 자리잡은 칠순의 소정 변관식 화백의 남향받이 화실은 그의 작품 세계처럼 소박하고 온아했다. 화실이래야 서민풍의 십구 간 한옥의 건넌방이지만 화필 오십여 년의 체취가 배어서인지 그윽함이 풍긴다……. 그러나 소정은 아침 일찍 정릉골까지 산보를 다녀와서는 바깥 출입도 거의 하지 않고 작품에 손대는 노익장을 보이고 있다. 간혹 틈을 내어 즐겨 모은 수석을 매만지며 머리를 식힌다. 그래서인지 마루 밑에도, 장독 위에도 돌이다…… 낭곡의 십곡 병풍이 펼쳐 있는, 전에 있던 ‘돈암산방’이란 현판 대신에 새로 성당 김돈희의 ‘소정화실’이란 현판이 걸린 화실 안은 문지방까지 내리비치는 정월 한 달의 여광 때문인지 무척 환하다.”

(김진홍 ‹봄을 바라보는 아뜰리에(1) ‘소정화실’의 변관식 씨› 중)

변관식은 1954년부터 성북에 자리 잡았으며, 여름에는 정릉 골짜기의 대성사로 가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실경산수 화가로서 전국을 유랑하며 바라보았던 풍경과 사람을 성북의 한옥 작업실에서 작품으로 남겼다. 1960년 전후에는 금강산을 주요 소재로 삼아 적묵법, 파선법 같은 독창적 양식을 남겼다.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13

변관식, ‹외금강 삼선암 추색›, 1966.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권진규는 함흥 출신이지만 1946년 가족과 함께 월남해 성북동에 정착했다. 1947년 이쾌대가 운영했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미술 공부를 했고, 일본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공부하다 귀국해 동선동에 집과 작업실을 직접 만들었다. 큰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높은 천장과 테라코타를 제작하기 위한 가마가 있는 2층 작업실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동물상, 여인상, 자소상 등을 제작했다. 당시 정릉에 살고 있던 여동생 집에 벽화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권진규의 공간은 2006년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 기증함으로써 매년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다.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14

성북회화연구소터 출처 성북마을아카이브 ©성북구청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15

권진규의 아뜰리에 작업 사진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16

권진규, 예술가의 일생 (감독 민환기, 내년 개봉 예정) 다큐 속 아카이브

제주 출신의 화가 변시지는 1960년 결혼하면서 돈암동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1970년대 초까지 매일 고궁을 찾아 삼세하고 사실적인 풍경을 주로 그렸다. 이렇게 고궁을 찾아 그림을 그렸던 변시지, 손응성, 천칠봉, 이의주, 장리석 등의 화가를 ‘비원파 라고 불렀다. 1972년에는 돈암동에 아틀리에를 만들어 변시지 화가의 집 으로 명명했다. 이곳은 건물의 일부가 변경되기는 했지만, 아들 변정훈이 아트시지재단을 설립해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어 반갑다. 

인근 삼선동과 동소문동에는 우리나라 1세대 조각가 김종영, 문학가 전광용 정한숙, 음악가 이관옥 전봉초, 음악 비평가 안동림 등이 거주했다.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17

김종영, 삼선동 풍경, 1960년대 말, 종이에 수채, 40 × 29 cm

장소의 정신(Genius Loci) 이 뜻하는 고대 로마의 개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노르웨이 건축가 크리스티안 노르베르크슐츠(Christian Norberg-Schulz)가 현대에 이를 다시 부활시켰다. 모든 장소가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우리가 이를 만끽하고 향유해야 한다는 의미다. 성북의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과 공간이 멋지게 보존되고 있어서 감사하다. 문화유산을 단순히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평생을 정진하며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목소리에도 관심을 가진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예술은 찾아나서야 하는 파랑새가 아니라 우리 곁에 이렇게 가까이 있으며, 대중에게도 예술적 영감은 언제나 필요하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시대이기에 진심을 담은 예술이 더욱 중요해졌다.

[ESSAY]성북동의 예술가들_18

Writer

이소영(@soyoung_lee_art)은 문화 기자다.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스타일 H», «더 갤러리아»에서 일했고, 최근에는 여러 매체에 기사를 쓰고 있다. 『사진 미술에 중독되다』,『서울, 그 카페 좋더라』, 『전통 혼례』의 저자이며, 『와인과 사람』, 『노래하지 않는 피아노,『미국에서 서바이벌하기』, 『나를 마케팅하고, 세계를 PR하라』, 『브로드웨이의 노래를 들어라』 등을 기획·편집했다.

‘현대모터스튜디오 고양’의 개관 콘텐츠를 총괄했고, CJ ENM과 함께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들의 시즌 그리팅 굿즈를 만들었다.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한류여행안내서 Person:able SEOUL』을 출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