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만큼 유명한 동시대 러시아인은?” 이 질문에 답변하려고 머리를 굴려봤는데, 의외로 바로 생각나는 인물이 없네요. 얄궂게 머리를 스쳐 지나간 사람은 소련 여자라는 활동명으로 유명한 유튜버 크리스입니다. 구독자 100만 명을 넘기며 골드 버튼을 받은 그는 특유의 이성적인 표정과 함께 유창한 한국어로 시청자에게 직설을 날립니다. 반말은 기본이고, 지난 영상에 달린 악플을 추적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진행되는 그의 영상은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던 한국의 민낯에 대해 조곤조곤 말하죠. 국뽕이 넘치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물게 솔직한 외국인 유튜버입니다. 그런 그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잠정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가 지난 3월 22일 정말 느닷없이 복귀했습니다. “돈 다 떨어졌다”라고 시작하는 컴백 영상의 주된 내용은 채널 편집자를 맡은 친구의 소설 출간 홍보였는데요. ‘밈 원정대’를 연재하는 김경수 님이 한국의 심연을 풍자하는 소련 여자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소련 여자를 바라보는 가장 최신의, 가장 정확한 눈인데요. (채널 편집자의 실제 반응입니다) 과연 어떻길래…궁금하시다면 얼른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나다. ‘밈 원정대’ 쓰는 김경수. 오늘은 유튜브 채널 ‘크리스 [구 소련여자]’ 리뷰하려고 나왔다. 니들 1년 만에 크리스 컴백 영상 올라온 거 모르지? 왜 알아야 하냐고? 나, 김경수가 보장한다. 크리스 영상 정주행하면 인생 진짜 재밌다.
맞다. 내 글 노잼이다. 근데 크리스와 내 인생, 니들 댓글보다는 재밌다.
여기 악플러들, 러시아 홍차 마셔볼래?
저 무덤덤한 표정과 거침없는 솔직함이야말로 소련 여자의 매력이다.
처음부터 쏟아지는 반말에 당황스러웠다면 진심으로 사죄드린다. 보자마자 ‘뒤로 가기’를 눌러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오랜 팬심을 담아 크리스 흉내를 내보았는데, 똑같지도 않은 데다 웃기는 데에도 실패한 듯하여 분위기까지 싸해지니 자괴감이 들고 괴롭다. 그만큼 크리스의 개성은 나 따위가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대체 크리스가 누구이기에 이 난리인가, 싶은 독자도 있을 테니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크리스, 일명 소련 여자는 지난 2019년 데뷔했다. 그의 데뷔 내막은 이렇다. 그해 7월 26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그의 소속팀 유벤투스는 내한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 호날두는 내한 경기에 45분 정도 출전하기로 계약했으나 이를 어기고 경기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른바 노쇼, 즉 먹튀를 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호날두는 메시와 양강 구도였다. 한국의 해외 축구 팬이 메시파와 호날두파로 나뉠 정도로 팬덤이 두터웠다. 호날두는 먹튀에 대한 제대로 된 해명과 사과 없이 넘어가서 한국 팬의 분노를 샀다. 내한 일정을 소환한 다음에는 한국 팬을 무시하는 듯한 언행을 이어가며 인터넷에서 국민적인 비호감이 되었다. ‘호’라는 음절이 금지돼 ‘호불호’가 ‘메불메’가 되었을 정도였다.
호날두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던 7월 31일, 한 러시아 여성이 친구(유튜브 채널 ‘크리스 [구 소련여자]’의 편집자 박힘찬)와 함께 공터에서 호날두 유니폼에 기름을 뿌리고 불태운 후 카메라를 마주 보고 이렇게 소리쳤다. “호날두 X발 놈아” 이 영상은 인터넷 커뮤니티와 소셜 미디어에서 ‘호날두 유니폼을 불태우는 러시아 여자’라는 제목으로 삽시간에 퍼지며 곧바로 화제가 되었다. 영상 속 주인공은 BBC 등 해외 언론에도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단숨에 유명세를 얻었는데, 훗날 우리에게 소련 여자로 익숙해진 유튜버, 크리스다.
호날두의 티셔츠를 불태우고 자본주의의 화신 소련 여자를 소환하는 강령술 영상이다.
경고: 호날두가 아무리 싫더라도 어린이 여러분은 이 영상을 따라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순수함 절대 지켜.
해당 영상이 내게 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소련 여자가 등장할 당시, 한국어로 활동하는 외국인 유튜버는 K문화에 대한 이방인의 리액션을 중계하는 방식에 집중했다. 영국남자 조쉬 등이 대표적인데, 황천의 뒤틀린 애국심, 즉 국뽕을 건드리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한편 ‹미녀들의 수다›, ‹비정상회담› 등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외국인은 지적이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지닌 채, 대부분 외국 문화를 소개하는 가이드에 가까운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한국인이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활동했고, 한국을 풍자하는 일은 드물었다. 로버트 할리, 이다도시 등 1세대 외국 방송인 시절부터 쭉 그러했다. 개인적으로 ‘외국인이 한국인의 뒤틀린 심정을 더욱 잘 볼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있던 차에 크리스가 등장한 것이다.
사진 속 이들의 지적이고 차분한 인상과 정돈된 포즈는 스타트업 CEO 세미나에 참석한 듯한 인상을 준다. 아니면… 야레야레 못 말리는 아가씨”라고 속삭이며 춤을 출 듯한 집사 같다.
K POP보다 역시 K-Chicken인 법이다. 한국만큼 치킨집의 수가 많고 치킨이 맛나기까지 한 국가는 세계적으로 드물 것이다.
크리스는 달랐다. 그의 영상은 한국인의 심연을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호날두 유니폼을 불태우는 행위는 외국의 과격한 훌리건이나 할 법한 짓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돌 팬덤에서 굿즈 화형식은 흔한 일이다. 크리스는 이를 수면 위로 드러내 풍자적으로 그려낸 셈이다. 크리스의 독특한 지점은 두 번째 영상에 더욱 잘 드러난다. 그는 유튜버로 데뷔한다는 말을 꺼내며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 나 국뽕이다. 국뽕 잘해서 ‘영국남자’처럼 될 거다.” 곧이어 손흥민부터 시작해 ‘두유 노?’ 클럽에 있는 인물 리스트를 외운다. 한 마디로 경이로웠다. 크리스는 유튜브로 한탕을 노리는 한탕주의와 자기 계발에 미쳐 있는 한국인, 국뽕이라고 불리는 애국심을 동시에 풍자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동양학을 전공했고, 한국 대중 문화에 드러나는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주제로 논문을 쓴 적이 있다. 이미 한국인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한국에 온 것일 수도 있다. 편집자 또한 최근 발간한 소설 『백만 유튜버 죽이기』를 보면 신랄하게 한국 사회를 풍자하는 태도를 지닌다. 이 둘의 의기투합은 폭발적인 시너지의 원천이다.
나한테도 귀감이 되는 말이다. 빨리 국뽕이 차오르는 글을 써서 조회수가 폭발하고 정부 지원금도 받는 것이 꿈이다. 국뽕을 자극하려면 다른 국가와의 비교를 통해 한국의 우월함을 증명하거나 자국에 대한 가짜뉴스나 신화를 만들어야 한다. 신화는 역시 건국 신화다. 결국 이 두 조건을 만족하려면 ‹건국 전쟁›이라는 제목을 지녀야 할 듯하다. 그런데 나는 외국인이 아니니까 사이버 렉카 취급당할 듯하다.
한국인의 심연을 제대로 풍자하려면 그에 적합한 형식이 필요하다. 크리스의 영상은 몬티 파이선Monty Python 식의 코미디를 연상시킨다. 채널 편집자인 박힘찬 작가는 실제 몬티 파이선의 애청자다. ‘코미디의 비틀스’라고 불리는 몬티 파이선은 1960년대부터 영국에서 활동한 전설적인 코미디 그룹이다. 굳이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피식대학’ 느낌이랄까. 한국에서는 몬티 파이선이 찍은 극장용 영화 ‹몬티 파이튼의 성배›(1973)로 유명하다. 몬티 파이선의 코미디는 부조리하며 초현실적이다. 이들의 쇼는 여러 스킷(작은 상황극)으로 구성되는데, 스킷이 부드럽게 연결되지 않고 툭툭 끊기며, 인물끼리 대화도 안 통한다. 쇼에 등장한 모든 캐릭터가 아무 말 대잔치를 하는 느낌이다. 또한 스킷 중간마다 테리 길리엄(‹브라질›(1984)과 ‹12 몽키즈›(1999)로 유명하다)의 애니메이션 작업을 삽입하면서 제4의 벽이 무너지기도 한다. 자막 오류 등 영상 요소를 이용한 개그와 방송 패러디도 적극적으로 쓴다. 그들의 개그 너머에는 영국 정치는 물론, 인간 전반에 대한 냉소와 허무주의가 가득하다.
1975년에 제작된 영화인데도 지금 봐도 새롭다. 하드코어한 ‹SNL› 느낌이랄까. 넷플릭스에 있으니까 한 번 보기를 권한다. 아서 왕과 성배 전설이 와장창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나름 완성도도 훌륭하다. 이 시리즈의 3편 ‹삶의 의미›는 박찬욱의 ‹박쥐›가 타기도 했던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탔다!
아서왕 전설 중 흑기사를 풍자한 파트다. 가오 하나로 사는 캐릭터라 팔 하나가 잘려 나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서 왕에게 덤빈다. 이 외에도 니! 라든지 마녀사냥, 아서 왕에 맞서서 코뮤니즘을 외치는 서민 등 킬포가 한가득하다.
‘소련 여자’도 에피소드마다 이야기의 연결이 끊기는 건 기본이고, 아무 말 대잔치가 펼쳐진다. 자막이나 댓글에 대한 반응을 활용해 제4의 벽을 무너뜨린다. 영상 중간마다 크리스의 편집자 디스를 삽입하기도 하며 제2대 소련 여자로 불리는 조연 샌즈가 서사에 끼어들기도 한다. 마치 한국 예능을 어설프게 따라 하는 느낌이다. 가끔은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짤방을 보내고 싶을 정도로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넘친다. 나아가 세상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보는 몬티 파이선 정신을 계승하기도 하는데 이를 말로 표현하기엔 복잡하니까 직접 영접해 보자. (개인적으로 ‹새벽에 엄마 몰래 라면 끓여먹기!› 영상을 추천한다)
새벽에 몰래 라면을 먹는대서 보았는데 어느덧 LH와 비트코인 풍자를 하고 있다. 소련 여자의 스타일이 가장 잘 녹아 있는 영상이라 생각한다.
크리스가 유튜브 활동을 본격적으로 할 때, 수도권 지하철 1호선 리뷰 영상을 올린 적이 있다. 지하철 1호선은 지하철 빌런이 등장하는 마계로 소문난 곳이다. 다큐멘터리처럼 있는 그대로 찍기만 해도 조회수가 나와서 많은 유튜버가 소재로 애용한다. 그는 지하철 1호선을 ‘한국의 작은 러시아’라고 말하며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고 농담을 던진다. “지구 멸망 이후에 탄 열차와 같은” 1호선에서 마주한 풍경―지하철을 어슬렁거리며 시비를 거는 노인, 크게 찬송가를 부르며 전도하는 개신교인, 지하철 잡상인 등등―을 통해 한국이 지닌 기이한 혼종성을 내보인다. 인생은 가까이서 볼 때는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란 말처럼,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다닐 때는 자연스러웠던 풍경이 크리스의 시선을 거치자 부자연스럽고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이후에 제작된 크리스의 영상은 지하철 1호선 리뷰 영상에 기반해 반복과 변주한 결과물에 가깝다. 보통 “나다.”로 시작하는 영상은 지난 영상에 달린 악플을 소개한 다음, 이에 대한 리액션을 펼치며 진행된다. 그는 일진이 애용하는 스타일로 옷을 입는다든지. 먹방 유튜버를 따라 한다든지, 뒷광고로 삽입해야 할 광고를 영상 중간에 삽입해 앞광고로 만든다든지, 하는 식으로 한국의 인터넷 밈을 영상에 마구잡이로 삽입해 한국을 풍자한다. 인터넷 밈뿐만 아니다. 『환단고기』에 기반한 유사 역사와 유구한 반공주의 및 온갖 음모론도 풍자 대상에 포함한다.
소련 여자의 영상을 보다가 당황하지 마시라. 크리스는 처음부터 대놓고 광고를 한다. 심지어 스킵을 할 수도 없다.
크리스의 풍자에 이유는 없다. 그냥 우스꽝스럽고 이미지가 웃겨서 한다. 수많은 풍자를 아무 이유도 없이 연결하면 기분이 나쁠 만도 한데, 왜인지 모르게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좋아’랄까! 소련 여자 영상의 구성은 하나의 콘텐츠에 집중하기 힘든 한국의 정신 없는 소셜 미디어 풍경을 감각으로 체험시키기 때문인 걸까? 게다가 그의 영상은 혼란스럽지 않다. 보통의 유튜버는 혼란한 각을 발견하면 ‘좋아요’를 노리고 과잉된 리액션과 욕설을 쏟아내며 구독자의 도파민을 자극한다. 하지만 크리스는 정반대로 반응한다. 그는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의중을 도저히 알 수 없는 표정만 지을 뿐이다. 여기에는 크리스가 러시아 사람이라는 콘셉트가 숨어 있다.
러시아는 불곰국 시리즈라고 불리며 인터넷 밈으로 승화한 국가다. 불곰국 밈은 군인 여럿이 겨우 드는 통나무를 여자 한 명이 혼자 통째로 든다든지, 사람이 불곰을 타고 다닌다든지 하는 초현실적인 사건이 일상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이미지에 기반한다. 최저 기온이 영하 수십 도까지 떨어지는 나라인 만큼 거기에 사는 사람은 그만큼 강할 거라는 고정관념이 강해서 왠지 설득력을 갖춘다. 이처럼 한국보다 더욱 혼란스러운 지옥(?) 러시아에서 온 크리스는 고요한 태도를 고수한다. 오함마를 드는 등 엽기적인 행동을 할 때마저도 무덤덤한 표정이다. 아무리 혼란스러운 상황이 생겨도 평온한 태도로 일관하는 크리스의 말투는 시청자가 그런 상황에 거리를 두도록 돕는다.
러시아는 술집에서 두 남성이 칸트로 토론하다가 서로 총으로 쏴죽였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국가다. 그만큼 러시아 밈은 상상초월할 정도로 재밌다. 이미 세계적인 놀림거리(?)이므로 소련 여자도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다.
러시아의 상징이기도 한 불곰은 러시아 밈의 단골 소재다. 불곰을 기르는 러시아인의 모습은 강아지를 기르는 듯하다. 유사품으로는 캥거루가 맨날 집을 드나든다는 호주 밈이 있다.
또 하나 눈여겨볼 만한 점은 채널명이 러시아 여자가 아니라, 소련 여자란 거다. 크리스는 1995년~1997년생으로 추정되는데, 소련은 그가 태어나기 전인 1991년 해체됐다. 소련 여자는 진짜가 아니라 콘셉트에 불과한 셈이다. 만약 그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유행하던 시대에 동일한 콘셉트로 활동했다면 진작에 간첩으로 몰려 남산으로 잡혀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소련은 망한 지 20년도 더 됐다. 제아무리 소련을 위대하다고 말해도, 모두가 우스갯소리로 취급한다. 그래서 소련에 대한 인터넷 밈은 공산주의를 언급하더라도 한국인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지 않는 아이러니를 지닌다. 크리스는 돈에 미쳐 있는 한국을 매섭게 비판하지만, 소련 여자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얻는다.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비판 요소는 여전히 시청자의 마음에 남기면서.
크리스의 영상은 미디어 아트로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농담이 아니다. 소련 여자가 유행할 즈음 아티스트 류성실은 정치 BJ를 풍자하는 ‹체리 장› 연작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체리 장›은 위악적인 인터넷 방송 BJ를 설정해 정치적 음모론이 생기고 확산되는 환경을 그려낸다. 작가는 키치한 정치적 구호와 음모론이 지배하는 한국 정치의 혼란스러운 풍경을 체험하도록 이끈다. 릴스와 쇼츠, 인터넷 밈을 콜라주한 혼종으로 한국의 어두운 심연을 그리는 크리스의 영상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영상의 목적의식이 작품만큼 확실하진 않지만, 이름을 가리면 미디어 아트 작품으로 봐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
‹체리장› 연작 중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다. 미디어아트라 해서 어렵다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체리장›은 정치 유튜브의 조악한 미술을 모두 모아다가 만들었다. 키치의 정수랄까. 내가 본 미디어아트 중 가장 재밌다고 추천할 만큼의 재미가 있다.
인터넷 밈의 미학은 서로 다른 이질적 요소가 한 곳에 공존하는 상황에서 생긴다. 그런 면에서 소련 여자는 인터넷 밈의 미학에 충실하면서도, 모두가 저마다의 평행우주에 사는 파편화된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구독자라면 잘 알겠지만, 크리스는 푸틴을 풍자하는 영상을 꾸준히 업로드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러시아인이라는 이유로 마녀사냥을 당했다. 악플에 응수하다가 지쳤는지,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어쩌면 자신이 풍자한 것 이상으로 미쳐있는 진짜 광기의 나라, 한국의 일면을 마주한 것일지도 모른다.
크리스는 지난 3월 22일 1년여 만에 복귀를 선언했다. 자신의 채널 편집자인 박힘찬의 소설 『백만 유튜버 죽이기』를 홍보하면서 “돈 때문에 복귀했다”라고 당당히 말한다. “채널의 주인장 크리스는 (구독자를 포함한) 시청자를 ‘개돼지’에 빗댄다. (글쓴이 주: 개돼지는 영화 ‹내부자들›의 대사에 나오며 인터넷 밈이 됐다) 과격한 비유와 함께 크리스는 개돼지에 대한 감사 인사를 빼먹지 않는다. 크리스는 손님이 왕이고 시청자가 갑인 시대에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며 그들의 치부를 건드리는 왕실 광대 노릇을 하는 중이다. 언제 떨어질지는 모르지만 힘닿는 데까지 줄을 타보는 게 우리 목표다.” 박힘찬의 이런 당부대로라면 소련 여자는 지금까지의 영상보다 더욱더 파격적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크리스는 결국 유튜브에 복귀했다. 크리스에게 돈을 직접 건네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그녀의 멤버십에 가입하면 된다. 크리스는 멤버십을 아보카도와 갈비로 나누었다. 이 둘은 크리스의 최애 음식이다. 아보카도는 월 4900원, 갈비는 월 6만원이다.
이 글을 마감한 직후에 새 영상을 업로드했고, 그 영상도 무척 재밌고 독하다.
Artist
김경수(@vivre_wasavie)는 영화평론가이자 인터넷 밈meme 연구자다. 학부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화제를 모은 졸업논문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은 단행본으로 나올 채비를 마치고 있다. 영화와 인터넷 밈을 동시에 연구하는데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현재 «코아르»에 영화 비평, «여성동아»에 인터넷 밈 비평을 연재하고,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 (FIPRESCI) 한국 지부 정회원이자 인문학 스탠드업 코미디 페이지 ‘인문학적 개소리 의 운영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