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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새벽 4시의 클럽 향기가 났다

Writer: 김도훈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김도훈 작가는 클러빙 마니아입니다. 무릎도가니가 나갈 때까지 클럽을 다닐 거라고 호언장담하는데요. 베를린의 유명 클럽, 베르크하인 문 앞에서 입장객을 냉혹하게 입뺀시키는 악마의 문지기에게 거절 한 번 당하지 않는 영혼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을 정도죠. 2000년대 초반 영국에서 벼락처럼 경험한 클러빙에 매혹된 이래 그는 새벽 4시 클럽에서 피어오르는 향을 맡을 때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몽롱한 심상에 젖습니다. 클러빙을 둘러싼 그의 매력적인 고백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클러빙을 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이트클러빙Nightclubbing’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이트클러빙’이라는 이름의 향수다. 셀린느에서 새로 출시한 향수다.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형. 셀린느에서 새 향수가 나왔는데 이름이 나이트클러빙이야.” 순간 나는 직감했다. ‘나는 그 향수를 사게 될 것이다.’ 친구가 말했다. “형, 그 냄새 알지? 새벽에 클럽에서 나는 묘한 냄새 있잖아. 향수에서 진짜 그런 냄새가 나.”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여러분도 알 것이다. 새벽 4시쯤 클럽에서 나는 그 냄새 말이다. 모른다고? 아니, 지금 당신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새벽 4시 클럽 냄새를 모른단 말인가. 특히 당신이 20대라면 그건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일이다. 인생은 길다. 해볼 만한 건 뭐든 해봐야 한다. 특히 클러빙이 그렇다. 클럽은 꼭 누군가를 꼬시기 위해서 가는 곳이 아니고, 아. 나는 지금 클럽에 가보지 않은 젊은 독자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다. 이런 게 바로 ‘클럽 꼰대’다.

사실 새벽 4시 클럽의 향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아니, 그 냄새를 모른다고 지적질을 해놓고 설명할 수 없다니 이건 또 무슨 심보냐고? 미안하다. 비록 설명할 수 없는 냄새지만 최선을 다해 한 번 시도해보겠다. 그러니까 그건 이런 냄새다. 클럽에 있는 싸구려 가죽 소파의 향, 어디선가 몰래 피워대는 담배의 향, 클럽에 가득 찬 사람들의 각기 다른 향수가 뒤섞인 향, 그들이 미친 듯이 몸을 흔들며 흘린 땀의 향, 테이블마다 놓여있는 샴페인과 칵테일과 맥주에서 나는 향, 누군가가 너무 취해 바닥에 쏟은 각종 알코올을 사람들의 신발이 바닥의 먼지와 짓이겨 나는 향, 그리고 그 바닥 위에서 몸을 흔들며 주변을 쉴 새 없이 둘러보는 남녀의 몸에서 적극적으로 분비되는 호르몬의 향, 거기에 클럽이 문을 닫기 직전인데도 마음에 드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실망의 향. 그 모든 것이 뒤섞이면 새벽 4시 클럽의 향기가 된다.

여기까지 이 글을 읽은 당신의 반응은 두 가지일 것이다. 클럽에서 새벽 4시까지 있어 본 경험이 없는 독자라면 이게 무슨 개소리냐며 짜증을 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분명 지금쯤 그윽하게 눈을 감고 ‘그렇지. 그런 향기가 있지’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이다. 다만 독자들 모두 셀린느의 향수 ‘나이트클러빙’을 최소한 시향이라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게 틀림없다. 나는 친구의 말을 듣자마자 셀린느 매장으로 달려가려다, 혹시나 해서 검색을 해봤다. 셀린느 공식 사이트에서 100ml 가격은 37만원, 200ml 가격은 무려 55만원이었다. ‘빌어먹을 향수가 무슨 가격이 이따위로 생겨먹었나’ 울부짖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당근마켓을 켰다. “남편에게 선물 받은 건데 향수가 너무 많아서 팔아요”라는 글과 함께 200ml 향수가 22만 6000원에 올라와 있었다. 나는 즉각 택시를 타고 홍제동으로 날아갔다. 모두 아는 사실이겠지만, 당근마켓에서 키워드 알림 요청으로 꼭 설정해야 하는 단어는 바로 ‘남편’이다. 뭐든 생각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정말이지 ‘마법의 단어’다.

CELINE ‘NIGHTCLUBBING’

내가 처음으로 클럽을 간 건 1990년대의 일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이트’였다. 테이블마다 정해진 주문 금액이 있는, 한참 춤추다가 자리에 앉으면 “합석하시겠어요?”라는 음흉한 웨이터의 웃음을 마주하게 되는 그 ‘나이트’ 말이다. 그런 곳에서 처음 클러빙을 시작했으니, 나에게 클럽이라는 장소의 첫 기억이 좋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90년대에는 ‘록카페’라는 신종 클럽이 있었다. 정부가 유흥업소를 사회악으로 지정하고 탄압하기 시작하자 편법으로 생긴 클럽이 록카페였다. 일반음식점으로 분류한 탓에 춤을 춰서는 안 되는 공간이었다. 본격적인 무대도 없었다. 다만 밤이 되어 DJ가 음악을 틀기 시작하면 모두 좁은 공간으로 나와 춤을 췄다. 맥주와 과일 안주 세트를 무조건 시켜야 하는 나이트와는 달랐다. 부킹도 없었다. 음악도 좀 달랐다. 가요 메들리가 나오다가 중간에 블루스 타임을 시작하는 나이트와는 달리, 당시 한국에는 생소하던 힙합이나 하우스 음악이 나왔다. 단속이 들어오면 다들 얌전히 자리로 돌아가 술을 마시며 대화하는 척하는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클럽은 아니었다. 록카페에서도 여전히 부킹은 중요했다. 하여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적어도 90년대까지 클럽이란 대충 부킹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가는 곳이었다.

The Cross, Coal Drop Yard, Kings Cross, 2000

내 인생 처음으로 진정한 ‘클러빙’을 경험한 곳은 20대 후반에 잠시 살았던 영국이었다. 2000년대 초반이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레이브 파티Rave Party’의 끝물이 끓어오르던 시점이었다. 브리스틀에서 렌트해서 살았던 빅토리아 양식의 이층집에는 네 명의 하우스메이트가 있었다. 그중 세 명이 DJ였다. 그들은 주말마다 나를 이상한 곳으로 끌고 다녔다. 스마트폰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주말이 오기 전 전화 사서함을 이용했다. 특정 번호로 전화를 걸면 미리 녹음된 목소리가 “몇 월 며칠 어디서 파티가 열립니다”라고 안내했다. 친구의 낡은 파란색 닛산 스카이라인에 몸을 구겨 넣고 교외를 한참 달리면 갑자기 버려진 거대한 창고나 공장 건물, 혹은 넓은 평원에 도착했다. 처음 레이브 파티를 간 날, 나는 압도적으로 황폐한 야밤의 공장 건물 앞에서 잠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무서웠다. 대체 이 빌어먹을 영국 놈들이 나를 어디에 팔아먹으려고 시도하고 있는 건가. 저 건물 안에 들어가면 나는 결국 신장이 사라진 채 새벽에 홀로 깨어나는 건가. 어쩌겠는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동아시아 국가에서 온 청순한 청춘이었다. 레이브 파티라는 건 마이클 윈터바텀Michael Winterbottom의 위대한 영화 ‹24시간 파티하는 사람들›(2002)에서나 보던 것이었다.

공장으로 들어서자, 지옥이 펼쳐졌다. 매력적인 지옥이었다. 원래 아무것도 없어야 할 거대한 창고에는 이미 각양각색의 빛나는 조형물들이 채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빛나는 야광봉이나 횃불을 들고 트랜스 음악에 맞춰 마구 몸을 흔들었다. 그건 일종의 주술적 현장이었다. 종교적인 공동체였다. 누구도 구찌나 프라다로 차려입지 않았다. 아니, 누구도 차려입지 않았다. 신분도 알 수 없고 국적도 알 수 없고,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새벽이 되자 친구들이 말했다. “이제 집에 갈 때야. 토마스는 내일도 일해야 한다고.” 나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안 돼. 이런 건 끝이 나서는 안 돼. 나는 그냥 여기에 살 거야.” 친구들은 누군가가 전해준 보드카 병을 한 손에 들고 울부짖는 나를 끌고 나와야 했다. 그때였다. 새벽 4시 클럽의 냄새가 났다. 나는 그 냄새에 중독됐다. 2년간 중독됐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나는 또 새벽 4시의 클럽을 떠나 혼자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내 앞에 청소차가 멈췄다. 익히 클럽에서 보던 익숙한 얼굴이 운전석에서 튀어나왔다. “야! 코리안. 너 또 레이브 갔다 오는 거야?” 그는 청소부였다. 형광 옷으로 도배를 하고 얼굴에 잔뜩 피어싱한 청소부.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곧 한국으로 돌아가.” 그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한국에도 레이브는 있겠지? 잘 갔다가 다시 오라고!”

Rave Party © Siachen Studios

없었다. 한국에는 레이브가 없었다. 한동안 영국에서의 기억을 어떻게든 되살려 보겠다며 열심히 홍대 클럽을 다니던 나는 어느 순간 클러빙을 멈췄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홍대 클럽이 문을 닫았다. 대부분의 클럽이 덩치 큰 힙합 클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힙합도 즐거운 음악이다. 하지만 그건 뭐랄까, 레이브와는 다르다. 눈을 감으면 나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보내버리는 트랜스 음악을 트는 곳은―원래도 몇 없었지만―금세 사라졌다. 30대의 나는 일을 하기로 했다. ‘클러빙은 잊는 거야. 새벽 4시의 클럽 냄새 따위는 이제 내 인생에 없다. 일하자.’ 그렇게 일을 했다. 미친 듯이 일했다. 다만 외국으로 여행을 가면 꼭 클럽에 갔다. 중심가에 있는 번드르르한 클럽에 가지는 않았다. 지역 정보지를 구입한 다음, 테크노나 트랜스 음악을 트는 파티를 어떻게든 찾아냈다.

베를린에 갔다가 지역 정보지에 적힌 ‘트랜스 파티’라는 두 줄짜리 문구만 보고 택시를 타고 40분을 넘게 달려 마치 네오나치들만 살 것 같은, 아무런 인기척 없는 외곽 동네에 홀로 떨궈졌을 때, 나는 확신했다. ‘그렇구나. 오늘이 바로 내가 죽는 날이구나.’ 컴컴한 동네에서 오로지 건물 밖에 쓰인 주소만 보고 헤매던 나는 젊은 청력을 믿기로 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어디선가 미묘한 소리가 들렸다. 오로지 청력의 힘으로 10여 분을 걸어간 후 천막을 보았다. 말 그대로 천막 말이다. 천막에서 레이브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급조한 카운터에서 맥주를 하나 사서 마시고 있으니, 모두가 나보다 형편없는 영어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너같이 작은 아시아인이 이 동네를 어떻게 혼자 찾아왔냐며 놀라더니 모두가 나에게 술을 사기 시작했다. 거기서 보낸 8시간은 아마도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간 중 하나였을 것이다. 죽기 직전에 머릿속으로 떠올리게 되는 몇몇 인생의 절정 중 하나 말이다.

Le club Berghain à Berlin © images/POP-EYE

나는 아직도 클럽에 간다. 베를린에 가면 모두가 잘 아는 전설적인 클럽 ‘베르크하인Berghain’에 반드시 들린다. 나는 두 시간 동안 줄 서서 기다리던 손님의 절반 이상을 “안돼(Nein)”라는 짧은 말로 입뺀시키는 무시무시한 베르크하인 문지기에게 절대 거절당하지 않는 방법도 알고 있다. 여섯 번가량 갔지만 단 한 번도 입장 금지를 당한 적이 없으니, 이런 건 자랑해도 괜찮을 것 같다. 클럽 문을 지키는 키 2m짜리 악마 같은 케로베로스들은 당신 눈동자만 봐도 영혼까지 읽어내는 능력이 있다. 그들은 당신이 진정으로 ‘클러빙’을 즐기는 사람인지 아닌지 바로 알아챈다. 클러빙은 그런 것이다. 적당히 술도 마시고 적당히 남자(여자)도 꼬시고, 적당히 멋있는 척도 좀 하는 게 아니다. 당신은 영혼을 DJ에게 완전히 위탁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한다. DJ는 당신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그래서 인디프Indeep의 1983년 히트곡 ‘Last Night A DJ Saved My Life’가 여전히 명곡인 것이다. “만약 음악이 없었다면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요. 지난밤 DJ가 날 살렸어요. 날 무너진 마음으로부터 구원했어요. 지난밤 DJ가 날 살렸어요.”

나는 지금, 이 명곡을 들으며 글을 쓰고 있다. 글이 안 풀릴 때마다 셀린느의 나이트클러빙을 유튜버 ‘랄랄’처럼 온몸에 뿌려댄다. 옆에서 코 골며 자던 고양이는 그 냄새에 질색하며 다른 방으로 도망간 지 오래다. 나는 마흔여섯인데 아직도 클럽에 간다. 늙은이가 클럽 물 좀 흐리지 말라고 욕하지 말라. 나는 무릎도가니가 완전히 나갈 때까지 계속 클럽에 갈 거다. 이번 주말도 물론이다. 새벽 4시가 넘어서 나올 거다. ‘아, 이게 바로 20년 전 영국의 음침한 창고 파티에서 나오면서 처음으로 맡았던 그 냄새지’ 하면서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서 주말 밤 이태원 클럽에서 정신없이 춤을 추는 나를 발견한다면 꼭 아는 척을 해주시길 부탁드린다. 나는 반갑게 아는 척하는 낯선 자에게 비싼 술을 사는 버릇이 있으니, 여러분은 전혀 손해 볼 게 없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셀린느로부터 어떠한 협찬도 받지 않았다.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나는 셀린느 앰버서더인 블랙핑크 리사가 아니다.

Writer

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GEER»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 를 썼다.

@close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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