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 작품 앞 작가, 김명희 개인전 ‹깊은 시간› 2026. 5. 7 ~ 6. 14 갤러리현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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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과정에 집중합니다.
[인터뷰/인터뷰어/인터뷰이]는 70년대 이후 해외에서 거주하고 활동해온 한국 디아스포라 여성 현대미술작가의 스튜디오와 작업 장소를 방문하여 현장성과 대화성을 결합한 인터뷰를 수행하는 기록 프로젝트입니다. 다수의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들이 참여하는 인터뷰 기록을 영상과 텍스트로 퍼블리싱해서, 한국 미술사 서술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해외 거주 여성 작가들의 위치를 새롭게 맥락화하고, 다양한 독자와 관객이 접속할 수 있는 다층적 지식·감각 네트워크를 구축 합니다.
[인터뷰/인터뷰어/인터뷰이] 시리즈 첫 번째로 강원도 춘천 내평리와 미국 뉴욕 소호를 오가며 작업해온 김명희(1949년생) 작가를 초대합니다. 아래로 스크롤하면 전체 인터뷰 영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민정 – 김명희 인터뷰
2026.03.01. 9:00-11:30(@ 김명희 작가 스튜디오)
천민정(Mina Cheon, MFA, PhD)은 뉴미디어 아티스트이자 학자, 교육자, 평화 구축 활동가로, 팝아트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영감을 받은 ‘폴리팝(Polipop)’ 작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업은 한반도 분단에서 출발한다. 대표적인 예가 북한 출신의 또 다른 자아 ‘김일순(Kim Il Soon)’이라는 이름으로 병행해 온 작업군이다. 작가는 회화, 조각, 영상, 설치, 퍼포먼스, 공공 프로젝트 등 다양한 매체를 동원해 남북한의 위태로운 역사와 현재진행형인 공존을 해체하고 화해시키고자 한다. 천민정은 국제적으로 전시해 왔으며, 제1회 아시아 소사이어티 트리엔날레(뉴욕, 2020–2021)와 부산비엔날레(부산, 2018)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볼티모어 미술관, 스미스 칼리지 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메릴랜드 예술대학(MICA) 학장을 지낸 명예교수로, 현재 뉴욕 코미디 클럽 스탠드업 NY에서 출연 코미디언 섭외와 공연 기획을 총괄하고 있다. 작가로서는 뉴욕 에단 코헨 갤러리에 소속되어 있다.
김명희: “와줘서 고마워요.”
천민정: 우리가 모이게 될 때는 항상 다른 일 때문이었지 선생님과 스튜디오에서 이렇게 진지하게 인터뷰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 것은 처음인 것 같아요.
김명희: “그동안 오프닝에서나 보고 그러니까 깊은 얘기를 할 수가 없었죠.”
천민정: 그래서 저는 정말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을 드리게 되었어요. 아티스트로서 작가님은 물론이고,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든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개인적인 근황에서 시작해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아티스트로서 소위 ‘거장들의 반열(placed in the cannon)’에 오르신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이르기까지 정말 궁금한 점이 많거든요.
그 점을 어떻게 느끼시나요? 어떻게 지내시는지… 아, 우선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부터 여쭤봐야겠네요.
김명희: “제가 혼자 지내다 보니 사람들이 제 걱정을 하곤 하는데요, 정작 저는 제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이 상황을 꽤 즐기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능력이 되고 기회가 닿는 대로 어디에서든 김차섭 작가의 작품을 보여주고 그가 더 알려질 수 있도록 도우려고 해요. 그리고 우리가 운영하고 있는 김차섭기념사업회 도움 덕분에 그런 일이 잘 풀려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차섭기념사업회 제1회 심포지엄 초대장, 2025
천민정: 그러니까 예전에는 김차섭 작가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셔야 했다면, 이제는 그분을 ‘위해’ 시간을 쓰실 수 있게 된 거네요. 맞죠? 그분의 유산을 지키고 그분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 일에만 온전히 전념하면서요.
그림을 그리시고 작품을 만드시는 그 과정이 참 궁금한데요, 그 사건이 작가님의 삶의 방식이나 작업 방식에 어떤 식의 변화나 영향을 끼쳤나요?
김명희: “그 사람이 떠나고 난 이후에 말이지요.”
천민정: 네. 네.
김명희: “솔직히 말해서 그 사람이 남겨두고 간 것들이나 재정적인 문제 같은 것들을 정리하는 데 한 2년은 보내야 했어요. 그래서 2년 동안은 그런 일들을 처리해야 했고, 그게 끝나고 나니까 갤러리 현대에서 전시를 하자는 제안을 해 왔어요. 그때부터 내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정말 치열하게 고민하고 몰두해야 했죠. 그리고 내가 내린 결정은 대학 졸업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가 작업해 온 모든 것, 그동안 했던 모든 작업을 전부 다 보여주고 싶다는 거였어요. 그동안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작품이 정말 많거든요. 그래서 다가오는 5월 전시에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죠.”
천민정: 오는 5월 말씀이시지요? 그럼 작가님의 전 생애를 아우르는 작품이 대략 어느 정도가 된다고 보면 될까요?
김명희: “초기 작품 말씀이시죠?”
천민정: 초기 작업에 더 집중하시는 편인가요, 아니면 작가님 평생의 작업에 관한 전시가 될 예정인가요?
김명희: “음, 특정 시기가 아니라 전체적인 여정이라고 할 수 있죠. 제가 어떻게 발전해 왔고, 또 어떻게….”
천민정: 그러니까 초기 작품부터 시작해서… 말하자면 작가님의 삶 전체, 아. 작가님 인생의 전 여정을 아우르는 일종의 회고전 형식에 집중하고 계신 거군요.
김명희: “맞아요, 일종의 회고전 같은 형식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화랑 측에서는 회고전이라는 개념을 그리 반기지는 않더라고요. 현대화랑에는 저보다 훨씬 연세가 많으신 원로 작가분이 많이 계시다 보니 제가 아직 회고전을 열기에는 젊은 축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동안 초기 작품을 보여줄 기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제가 누구인지, 그리고 제가 어떤 작업을 해왔는지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천민정: 그렇군요. 그럼 혹시 수치로 말씀해 주실 수 있다면, 대략 몇 백 점 정도 될까요, 아니면 수천 점에 달하나요?
김명희: “이번에 제가 선보일 작품은 아마 60점에서 70점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천민정: 아, 선생님께서 선별하신 것 말이지요?
김명희: “네”
천민정: 네, 그런데 그중에서 고르셔야 했던 작품은 총 몇 점이었나요? 평생의 결실이 담긴 것일 텐데요.
김명희: “200~300점이 넘었죠. 네, 소묘(드로잉)나 다른 모든 작업을 한데 모아놓고 보았습니다. 저의 성장 과정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을 선별하고 싶었어요.”
천민정: 그런 작품을 어떻게 골라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정말 어려운 선택이었을 텐데요.
혹시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며 이어지는 어떤 지속적인 주제 같은 것이 있으셨는지요?
김명희: “음, 제 작품에는 어떤 ‘부재의 정서’가 있는 것 같아요. 그건 대학 시절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줄곧 이어 오고 있죠. 풍요로운 부재(abundant absence), 그건 바로…”
Sky Reflection, 1987, Charcoal on paper, 21×30 inches (53.3×76.2 cm)
천민정: ‘풍요로운 부재’, 정말 아름다운 표현이네요.
김명희: “기억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그 부재가 제 작품 속에서 보여집니다.”
천민정: 그렇다면 그 ‘부재의 공간’은 채워 넣어야 할 일종의 공백인가요, 아니면 그 자체가 공간을 압도하는 것인가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그 의미가 어떻게 변해왔나요? 작품 속에서 그런 면이 보이거든요.
김명희: “아마도 제가 어릴 때부터 워낙 이사를 자주 다녔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한 곳에 정착해 본 적이 없었죠. 초등학교 시절같이 어릴 때는 한 곳에 2년 이상 머물렀던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늘 친구들을 바꿔야 했고, 누구와도 깊은 친구 관계를 맺을 수가 없었어요. 여기저기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완전히 또 다른 세계였죠.”
천민정: 네. 그러셨군요.
김명희: “그래서 제 작품에 그런 본질적인 정서가 담기게 된 것 같아요. 오랜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춘천 내평리 폐교를 만났을 때, 그런 개념이 본격적으로 피어올랐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들이 머물다 떠나간 온갖 흔적을 발견했고, 저는 그것을 다시 살려내고자 했어요. 그렇게 칠판 그림이 시작되었습니다.”
천민정: 네, 하지만 그것은 작가님이 버려진 공간뿐 아니라, 부재가 지닌 ‘존재감’ 속에서 살아가고 계신 것 같기도 합니다.
제가 또 궁금한 것은 작가님의 전 생애에 걸친 작업기를 돌이켜보았을 때 혹시 영화처럼 기록되거나 새로운 입체감을 얻었던 그런 시점이 있으셨는지요? 작품 세계의 큰 줄기 속에서 어떤 전환점(spark)이나 변화의 지점이 있었는지, 기억에 남는 구체적인 순간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New Mexico, 1982, Pencil and color pencil on paper, 17 3/4 × 22 3/4 inches (45×58 cm)
김명희: “1985년이나 1986년쯤이었어요. 갤러리 원에서 1987년에 전시를 열었죠. 맞아요,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있었는데, 기억하시나요? 그러고 나서 저희가 1989년에 강원도의 폐교를 보러 한국에 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1990년에 완전히 이주했습니다.”
천민정: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서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바쁜 일상을 보내던 시기였던 거군요. 매일 바쁜 삶에 얽매여 있으면서도, 순간적인 틈이 날 때마다 다양한 풍경을 포착해 내셨던 것이고, 바로 그때부터 작품에 일종의 서사가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네요. 제가 작가님과 김차섭 선생님을 생각하면 두 분 모두 구상 화가(figurative painters)이시지만, 작가님의 작품은…
더 ‘체화된(embodied)’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삶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거든요. 반면에 김 선생님의 작품은 좀 더 분석적이고 관조적이며, 세상을 해석하는 확고한 방식이 있으신 것 같아요. 자신만의 철학이 있고 우주관을 설명하고 계시죠. 하지만 작가님의 작품은 자화상이나 인물이 등장하더라도 굉장히 ‘유령 같은(ghostly)’ 면모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아까 말씀하신 그 ‘부재’일지도 모르겠네요.
김명희: “맞아요, 그래서 제가 ‘환영(apparition)’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그저 아이들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저는 그것이 일종의 환영처럼 느껴져요.”
천민정: 아, 그러네요.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공백이나 부재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작품을 만드는 제작 과정에 직면할 때는 실제 시간의 현실성도 존재하지만, 동시에 시간을 길게 늘어뜨리기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평리 스튜디오에서 작품 슬라이드를 살펴보는 있는 작가, 장우진 감독 촬영, 2026
천민정: 이 질문을 정확히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이 점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작가님은 여러 곳으로 여행하셨고, 한편으로는 사람들과 깊게 친해지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친구나 혹은 특정 장소, 그리고 어떤 커뮤니티와 한 곳에 뿌리를 내리게 해 주는 그런 끈끈하고 구체적인 유대감이 없으셨던 셈이니까요. 여러 국가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시는 초국가적인(transnational) 분으로….
김명희: “맞아요, 그게 바로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국제적인 존재(international)’라는 이슈입니다. 우리는 세계 시민일까요? 우리는 국제적인 사람이 될 수는 있겠지만, 정치적인 관점에서 그렇게 되고자 한다면 소수자(minority)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소수자의 정체성을 기꺼이 짊어지고자 하는 사람들은 충분치 않을 겁니다.”
천민정: 언제나 소수자라는 말씀이시군요.
김명희: “언제나 소수자입니다. 20세기를 보면 그들은 숙청당했잖아요, 완전히 숙청됐죠. 그러니 21세기에는 다르게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치적인 현실은 그렇습니다.”
천민정: 외국인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기도 하죠. 늘 이동하며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방인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끊임없이 이동하는 사람들은 시간을 다르게 경험하는 것 같아요.
김명희: “어느 시점에 작가님이 스스로를 세계 시민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도 그렇게 느끼시는지 모르겠네요. 우리 사이에 그런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작가님도 해외에서 교육을 받으셨고 외교관의 자녀이시니까요. 외교관 자녀들은 그렇게 양국을 오가는 경험을 하게 되죠.”
천민정: 현재의 이민 상황에 관해서는 어떻게 느끼시나요? 왜냐하면 ‘세계 시민’이 된다는 것과 지금의 이민자 상황은 뉘앙스에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작가님이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다른 시간감각을 지닐 수 있었고, 공간을 바라보는 색다른 방식, 그리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색다른 방식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글로벌 시민이나 세계 시민으로서 가능한 일이었겠죠. 하지만….
갈수록 용어가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민자의 상황이나 이민자의 권리 같은 것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전시 전경, 김명희 개인전 ‹깊은 시간› 2026. 5. 7 ~ 6. 14 갤러리현대 제공
김명희: “네, 그것은 구체적이고 정치적 정체성이죠. 하지만 저는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민정: 일시적이라고 보시나요?
김명희: “네, 앞으로는 더 살기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천민정: 아, 네. 그렇군요. 이제 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서 이 책, 즉 여성 작가 세대를 다루는 『페미니즘 미술읽기』(김홍희 저, 열화당, 2024)에서 한국의 페미니스트 거장 작가 중 한 명으로 정의되는 부분은 어떻게 느끼시나요?
김명희: “맞아요, 당신 어머니인 김홍희 선생님께서 이 책을 쓰셨고, 작가들도 직접 선정하셨죠.”
“그분은 소위 극단적인 페미니즘이나 그런 유의 페미니즘을 지향하시진 않아요. 이 책에서 페미니즘 작가들을 선정하실 때 외연을 아주 넓게 잡으셨는데, 인물을 고르시는 면에서 저도 여러모로 그분에게 동의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천민정: 네, 맞아요. 하지만 이건 어떤 작가들이 존재하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개괄서(survey)잖아요. 저는 미래 세대가 이 책이나 선생님의 예술을 보며 아주 큰 영감을 받을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더 활동적이거나 눈에 띄게 정치적인 페미니즘 작가들도 존재할 수 있지만, 선생님의 페미니즘은 훨씬 미묘하고 은은한 방식으로 존재하니까요. 혹시 그 부분에 관해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김명희: “그건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 음, 저는 그냥 페미니스트로서 존재하는 거예요.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저는 모든 것을 여성의 눈으로 바라보고, 여성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천민정: 그건 그냥 본연의 모습인 거네요, 굳이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는 거네요.
김명희: “그렇죠. 나는 나일 뿐이니까요. 제 예술은 여성 작가의 미술이고, 여성의 미술이에요. 제가 여성이기에 그건 여성의 미술인 거죠.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제 관점은 분명 페미니즘적인 시각일 겁니다.”
뉴욕 소호 작가 스튜디오에 있는 김홍희 저서와 김차섭 2주기 기념 도자기, 2025
천민정: 흠, 그렇다면 자화상 작업을 하실 때는 어떤가요? 선생님의 자화상 작품을 많이 보았는데, 저는 그것들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김명희: “네, 김장을 하는 모습은 저의 자화상이자 아주 중요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천민정: 네, 이미 글로 쓰인 것들 말고, 작품 자체를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자화상 속 인물을 설명해 주세요. 그 여성은 누구이며, 선생님은 그 여성을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김명희: “그 안에서 저는 음식을 준비하고 있고, 창문이 하나 있어요. 창밖으로는 버드나무 잎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죠. 마침 폭풍이 불어서 제가 창문 밖으로 그 비디오를 찍었어요. 그건 마음의 이미지예요. 제가 가사 노동을 하고 있다 해도, 제 마음은 세차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죠. 그리고 배경에는 한자와 한글 고체(옛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17세기에 쓰인 여성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한 내용이죠.”
천민정: 아. 그렇군요.
김명희: “우리는 그런 사상의 후손이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날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제가 그것으로부터 백퍼센트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아요. 아마 새로운 세대는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지금 제가 처한 조건이죠. 그래서 자화상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제 제가 더는 배경이 아니라 전경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천민정: 선생님이 주인공이신 거네요, 그렇죠? 하지만 거기엔 풍요로움도 있어요. 풍요로움이 느껴져요.
김명희: “풍요로움이죠. 자연은 늘 풍요로우니까요.”
천민정: 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 텍스트(언어)가 선생님 뒤에 있는 억압이자 규율이겠네요, 맞죠? 유교적 교리 같은 것일 텐데, 그걸 목탄으로 작업하셨으니….
김명희: “처음에는 목탄으로 그렸고, 그다음에는 지워지지 않도록 오일 파스텔로 다시 작업했어요. 하지만 지워지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어요. 명확한 글자가 아니라, 지워나가는 과정 속에서 일부가 지워진 교리 같은 느낌으로 말이죠.”
천민정: 글을 쓰면서 동시에 지워 나가신 거군요. 정말 아름답네요. 저는 이 포털(portal), 즉 움직임과 바람이 존재하는 이 개념이 정말 좋습니다. 선생님의 마음은 늘 움직임이 있는 공간인 것 같아요. 비록 한 장면이나 부엌이라는 공간에 갇혀 있다 해도, 예술적 창의성을 통해 언제나 움직이고 계시는 거잖아요, 그렇죠? 정말 아름답습니다.
Preparing Kimchi, 2000, Oil pastel on chalkboard with LCD monitor, 47 1/4×94 1/2 inches (120×240 cm) 갤러리현대 제공
천민정: 특히 한국 여성 예술가들이 어떤 세대이든 선생님의 자화상을 보고 정말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는 젊은 세대라 해도, 비록 한국에 살지 않는다 해도 전통적인 한국적 삶의 방식에서 남겨진 깊은 문화적 각인(encoding) 같은 것이 여전히 그들에게 남아 있다고 믿거든요. 한국적인 것이 여전히 존재해요. 기대치도 존재하고,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한국 특유의 체면 문화(Korean shame)도 있죠. 너무 크게 웃으면 안 된다거나, 무슨 뜻인지 아시죠? 조신해야 한다거나 하는 고정관념들이요.
김명희: “고정관념이에요.”
천민정: 맞아요, 그래서 참 혼란스러운 부분인데, 선생님의 작품이 지닌 거대한 정적 그리고 움직임이라는 개념 혹은 쓰인 것과 지워지는 것 사이의 이런 대조가 참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김명희: “그림 안에 그림을 배치하는 그런 형식은 벨라스케스에게서 온 거예요.”
천민정: 벨라스케스요, 네, 네, 맞아요.
김명희: “그의 작품 중에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예수›라는 작품이 있어요.”
천민정: 네. 네.
김명희: “그 그림을 보면 한쪽에 창문이나 거울 같은 이미지가 있고, 거기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어요. 반면에 앞에 있는 여성은 가사 노동을 하면서 ‘왜 마리아는 예수의 말을 듣고 있는데, 나만 이 일을 하고 있어야 하지?’ 하며 불평하고 있죠. 그걸 보고 ‘벨라스케스는 왜 이런 주제를 선택했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걸 그리다니, 벨라스케스 치고는 꽤나 예상 밖의 일 아닌가요? 안 그래요?”
Diego Velázquez,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probably 1618. Oil on canvas, 60 × 103.5 cm.
Endless Thought, 1987, Pencil and pastel on paper, 38 1/4×24 3/4 inches (97×63 cm)
Is God a Mathematician, 2026, Oil on chalkboard with LCD monitor, 44 1/2 × 68 1/2 inches (113 × 174 cm)
김명희: “그리고 그 안의 내용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세속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잖아요. 예수가 그렇게 말했죠. 오, 그건 꽤 진취적이고 혁명적이지 않나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네, 그래서 그게 제가 시작한 형식이에요. 이와 비슷한 장면을 드로잉으로 작업한 적이 있는데, 그 작품(‹끝없는 생각(1987)›)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 작품이 그 작품의 두 번째 버전이에요.”
“이 작품은 캔버스 안에 비디오로 작업했어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작품에는 거울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넣지 않고, 정치적 권력의 오르내림을 상징하는 상원의원들이 오르내리는 모습을 넣었죠.”
천민정: 네, 네, 이해가 되네요.
김명희: “사람들은 그게 철학자나 뭐 그런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천민정: 선생님께서 실제로 그림을 그리실 때는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채워지나요? 무슨 생각을 하세요?
김명희: “실제로 그림을 그릴 때 그 그리는 행위 자체를 할 때는 공(void)의 상태가 돼요. 완전히 비어있죠. 시간 감각도 없어져요. 그림을 그릴 때는 그래요.”
천민정: 고도로 집중하신 상태군요. 작품에 완전히 몰입하시는 거네요, 그렇죠? 정말 멋지네요.
주로 작가님의 예술과 작업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가며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치 작업실 방문(studio visit)을 한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 이사를 많이 다니셨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오래 지속되는 긴 우정을 쌓지 못하셨고, 친구들이 계속 바뀌었죠.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사람을 대하는 기술 같은 요령이 생겨서 다른 친구로 대체하거나 새로운 친구가 들고나는 상황에 쉽게 적응하고, 새 친구를 더 잘 사귀게 되셨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영속성의 느낌이 없으니 일종의 외로움 같은 것… 그러니까 혼자 지내는 것에 더 익숙해지며 존재하게 되는 면이 있죠.
김명희 작가의 1950년대 영국 초등학교 시절, 작가 제공
천민정: 하지만 김차섭 선생님을 만나고 함께하셨을 때 제가 자라면서 제 평생 기억하는 두 분의 모습은 늘 함께였어요. 아주 젊은 시절부터 함께하셨으니까, 저는 항상 두 분이 함께 계신 것을 보았죠. 선생님은 더 외향적이셨고, 작가님은 내향적이셨지만, 한 번도 두 분을 분리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우리가 모일 때마다 늘 함께 오셨고 함께 떠나셨으니까요. 그리고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정말 얼마 안 되어 작가님을 뵈었잖아요, 그렇죠? 기억나세요? 우리 비콘(Beacon)에 같이 갔었잖아요, 그때.
김명희: “맞아요, 그랬죠. 네네.”
천민정: 그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데, 그때 우리가 상실감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제가 애도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 당시 저는 작가님이 애도 과정 중 어느 단계에 계신지 잘 몰랐어요. 여전히 충격 단계에 계신 게 아닐까 생각했죠.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서로 깊이 얽혀 있을 때 때로는 가족으로서 아주 상호의존적으로 얽히기도 하지만, 부부로서도 깊이 동화되곤 하잖아요. 두 분이 함께하신 지 얼마나 되셨죠?
김명희, 김차섭 작가의 뉴욕 결혼식 사진, 1976 작가 제공
김명희: “40여 년 되었죠.”
천민정: 세상에, 와, 정말 긴 시간이네요. 그래서 저는 늘 상상하곤 했어요. 두 사람이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가다 보면, 일종의 연금술처럼 동화되어서 한 사람처럼 변해갈 거라고요. 왜냐하면 다른 공간에 있더라도 늘 상대방의 시간을 생각하게 되니까요. 상대방의 일정에 맞춰서 자신의 하루 일과를 짜게 되고요. 작가님의 경우에는 아마 자신의 예술과 그분의 예술을 모두 생각하셨을 텐데….
김명희: “그이가 떠난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해야 해요. 아시다시피 오는 9월에 뉴욕한국문화원에서 그이의 전시회가 열리거든요.”
천민정: 올리셔야 하는군요. 네, 그러니까 여전히 깊이 연결되어 계신 거네요.
김명희: “여전히 거기에 머물러 있죠. 저는 그이도 일본에서 태어났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그이는 한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여러 가지로 부패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죠. 저한테 그렇게 말하곤 했어요.”
천민정: 네, 맞아요. 두 분 다 유목민(nomads)이네요.
김명희: “맞아요, 그랬죠. 그래서 우리가 여행하는 걸 좋아했어요. 제가 어딘가 가고 싶어 할 때마다 그이는 기꺼이 응해줬고, 우린 어디든 함께 갔어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선 아무런 문제가 없었죠.”
김명희 김차섭 1980년대 멕시코 여행 사진, 작가 제공
김명희: “작품이 정말 많아요. 그리고 저는 그이의 구상노트들 대부분을 아직 다 읽지도 못했어요.”
천민정: 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그분의 예술을 새로이 알아가고 계신 거네요.
김명희: “네, 그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배우고 있어요. 전에는 그게 일기장이라고 생각해서 감히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읽어야만 해요. 왜냐하면 여러 미술관에서 그걸로 아카이브를 만들었기 때문에, 아마 세상에 다 공개될 테니까요.”
김차섭 구상 노트, 1988. 작가 제공
천민정: 그리고 참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게, 여기서 2주기 추모식을 하셨을 때였나요? 작가님이랑 제미나이(Gemini AI)가 그분의 노트를 해석하는 작업을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김명희: “아, 네, 맞아요. 지금 그걸 하고 있어요. 실제로 제미나이에게 노트를 모두 필사하고 텍스트로 옮겨달라고 요청하면 정말 흥미로워요. 아주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놓거든요. 그이가 쓴 메모가 정확히 어떤 책에서 인용된 것인지까지 알아내더라고요. 와, 흥미로워요. 정말 아주 흥미롭습니다.”
천민정: 네, 맞아요. 그건 마치 어떤 영적인 기술(Spiritual Technology)이 작가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을 거예요, 분명 어떤 의미가 있는. 저는 두 분 다 시간여행자 같다고 늘 생각했기 때문에 이 상황이 정말 잘 어울려요. 두 분이 시간에 관해 말씀하시는 방식도 그렇고요. 음… 혹시 선생님의 메모를 보시면서 혹은 제미나이를 이용하시면서 선생님께서 노트를 통해 작가님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시나요? 어떤 면에서….
김명희: “가끔은 깜짝 놀라곤 해요. 거기 적힌 내용을 보면 가끔 깊은 충격을 받죠.”
천민정: 네, 그렇군요. 그럼 그분이 없는 지금, 작가님만의 시간은 어떻게 느끼시나요? 빈 공간을 채워 넣고 있다는 느낌인가요? 아니면 무언가로부터 해방되어… 그러니까 온전히 작가님에게 엄청난 시간이 다시 주어지게 된 셈이잖아요. 선생님께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부재하는 지금, 작가님께 새로 주어진 이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다루고 헤쳐 나가고 계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느끼시는지 궁금해요.
김명희: “필사된 글 속에서 그이를 만나거나, 그이의 작품, 그리고 제 작품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요. 그래서 자유롭게 오갈 수 있죠. 그 안에는 존재와 부재가 공존하고 있어요.”
80년대 복시 현상으로 치료중이던 김차섭 작가를 그린 김명희의 드로잉, 1988 작가 제공
천민정: 네, 맞아요. 하지만 스스로 관리하고, 선택하고,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더 큰 주체성(sense of agency)을 느끼실 수도 있겠어요.
김명희: “맞아요, 그게 바로 자유죠. 그이가 살아있을 때는 음식에 정말 신경을 많이 써야 했거든요. 특히 그이는 설탕을 먹으면 안 됐기 때문에 그것이 제가 챙겨야 할 아주 큰 일이었어요. 네, 음식은 음식인 동시에 독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정말 조심해야 했죠.”
천민정: 네, 김차섭 선생님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셨던 거네요. 네, 와….
김명희: “무려 12년 동안이었어요. 12년 동안 음식을 볼 때마다 ‘이걸 먹어도 되나’하고 살폈어야 했죠.”
천민정: 예 선생님이 표현하신 대로 오케이, child memory에서 시작하네요.
제 어린 시절 기억을 얘기해 보고 싶어요. 네, 그러니까 그때 저희 가족이 뉴욕에 있을 때 제 아버지가 미국 최초의 한국 문화원 문공관(cultural attache)이셨잖아요, 아버지가 뉴욕에 오신 게 1979년쯤이었고, 저희는 84년까지 여기 머물렀어요. 그리고 저희 아파트에서 파티가 정말 자주 열렸죠.
김명희: “거의 매주 가다시피 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정말 훌륭한 호스트이셨어요.”
천민정: 맞아요, 그리고 우리 아파트 온 사방에 미술 작품이 걸려 있었어요. 거의 매일 밤마다 예술가분들이 모여서 파티를 했고, 퍼포먼스 같은 것도 열렸어요. 일종의 살롱이자 한국에서 오신 미술가, 공연 예술가분들의 안식처 같은 곳이었죠. 거기서 작가님과 김차섭 선생님을 뵌 기억이 나요. 그리고 주말도 정말 같이 많이 보냈잖아요.
천호선 당시 주뉴욕한국문화원 문정관과 김홍희(Mrs. 천)의 방문 기록, 김차섭 구상노트, 1988, 작가 제공
김명희: “롱아일랜드도 같이 갔었지요.”
천민정: 맞아요! 그리고 김차섭 선생님이 돌 그림을 그리시던 게 기억나요. 맞죠? 네, 그거 보던 것도 기억나고, 그 시절 사진도 있어요. 그런데 혹시 덴마크나 캐나다에서도 우리 가족을 만나셨던 거 기억나세요?
김명희: “네. 캐나다였지요. 캐나다로 보러 갔었어요. 천민정 선생이 고등학생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천민정: 아, 네! 캐나다였군요. 캐나다는 정말 기억이 나요. 그럼 덴마크로는 저희를 보러 안 오셨었나 봐요?
김명희: “덴마크는 가지 않았어요.”
천민정: 아, 그렇군요. 어쨌든 제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뵌 것 같고… 왜냐하면 제가 자라면서 늘 선생님들을 뵈었던 것 같거든요. 시기 마다요. 그리고 저희 항상 같이 스케치 대회(sketchathons) 같은 걸 하거나 하면서 스케치를 정말 많이 했잖아요. 아니면 우리 아버지가 한지 스케치북을 꺼내 오시거나요, 맞죠? 그리고 먹도 꺼내 오셔서 선생님들이 그림을 그리시게 하거나… 그 모임에는 늘 그림 그리기가 빠지지 않았어요.
김명희: “맞아요, 늘 그랬지요. 사실 나는 미나 씨 어머니가 뉴욕에 오시기 전부터 알고 지냈답니다.”
천민정: 네, 저도 그 얘기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김명희: “어머니의 자매분(이모)과 내가 아주 친했거든요. 고등학교 때 말이지요. 그래서 미나 씨 어머니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습니다.”
천민정: 아, 제가 태어나기도 전이네요!
김명희: “그렇지요, 내가 미나 씨 부모님 댁에 갔을 때였는데, 이모가 방금 막 결혼했다고 나한테 얘기해 주더군요. 아, 미나 씨 어머니가 결혼하신 거였나 봅니다.”
천민정: 저희 이모랑 연세가 같으신가요?
김명희: “나보다 한 살 어렸었나 그랬지요. 하지만 정말 친하게 지냈답니다.”
천민정: 맞아요, 우리 어머니가 늘 바쁘셔서 이모가 제게는 제2의 어머니 같은 존재였어요. 네, 이모가 항상 저희를 돌봐주셨거든요.
김홍희 가족과 김명희 부부, 왼쪽에서 세 번째가 천민정 작가, 맨 왼쪽이 김홍희의 아들 천재승. 1980년대, 작가 제공
김차섭이 드로잉한 천재승. 1980. 김홍희 제공
김차섭이 드로잉한 천재승. 1980. 김홍희 제공
김명희가 드로잉한 천민정. 1980. 김홍희 제공
김명희: “함께 돌봤지요. 그래서 내가 특별한 유대감을 느끼는 것이랍니다.”
천민정: 맞아요, 정말 그렇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선생님이 저를 스케치해 주신 적도 있지 않나요? 제가 알기로는 그런데요. 선생님이 그려주셨던 것 같고, 지금 저희 어머니가 그 스케치를 찾고 계시거든요. 그걸 찾을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김명희: “그래요, 돌 같은 걸 다루는 작업을 했던 기억도 나고, 릴리(Lily)였나 함께 작업했던 기억이 있어요. 미나 씨를 스케치했던 기억은 잘 나지 않는군요.”
천민정: 아, 그렇군요. 음, 그리고 또 저희는 철학에 관한 토론 같은 것도 하곤 했지요. 대화는 주로 김차섭 선생님이 많이 이끄셨고요.
김명희: “늘 그랬지요.”
천민정: 그런데 저도 그 토론에 끼워 주셨어요. 마치 제가 늘 상상하던 한국 조선시대의 예인들이 가야금을 타고 시를 읊던 모습 같았지요.
김명희: “문인들은 항상 그런 모임을 했고, 그러면 다들 시를 한 수 짓거나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곤 했지요. 그것이 하나의 전통이었습니다.”
Dragon, 2006, Oil pastel on chalkboard, 35 1/2 × 47 1/4 inches (90 × 120 cm)
천민정: 그래서 저희는 저희만의 아방가르드한, 일종의 한국식 아방가르드 방식으로 교류하고 어울렸던 것 같아요. 제 생각엔 아주 유희적이고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김명희: “그에 관한 책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미나 씨가 무언가 글을 써야 할 것 같지 않아요?”
천민정: 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김명희: “그 당시 분위기가 어땠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아왔고 우리가 어떻게 함께 어울렸는지 말입니다. 정말 중요한 시기였어요. 왜냐하면 1975년부터 1985년 무렵의 그 시절은 뉴욕 내 한국 예술가들의 황금기였기 때문입니다. 백남준 선생을 비롯해 지금은 거장이 된 중요한 예술가들이 모두 활동하던 때였으니까요.”
천민정: 황인기 선생님, 백남준 선생님… 네, 백남준 선생님도 그렇고, 전광영 선생님 같은 분들까지 모두가 오셨었지요. 곽훈 선생님도 모든 한국 예술가분들이요.
김명희: “그 시기에 관한 책이 어떤 형태로든 나와야 합니다. 정말로 황금기였으니까요. 내 생각에 미나 씨가 그 일을 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요.”
“어제인가 어떤 자리에 갔었는데, 우리가 활동하던 그 시절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천민정: 그 당시 우리 부모님 아파트가 파티의 중심지였지요.
김명희: “정말 파티의 중심지였지요. 그 모든 일은 정말 미나 씨의 어머니 김홍희 선생님 덕분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천민정: 맞아요, 우리 아버지는 예술가들, 특히 한국 예술가들을 정말 사랑하셨어요. 저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며당시 미국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모든 한국 예술가분들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근현대 미술이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모두 대표적인 이름들이 되셨고, 그 덕분에 작품 활동과 전문적인 커리어에서 모두 성공한 작가들이 되셨지요.
캐나다에서 김명희와 김홍희, 1980년대, 작가 제공
천민정: 한국 내에서도 그렇고, 한국을 넘어 해외에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이런 뉴욕의 예술가 그룹의 일부이셨지요. 그래서 드리는 질문인데, 선생님께서는 한국을 집으로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여기 뉴욕을 집으로 생각하시는지요?
김명희: “그건 내가 매일 생각하는 질문이지요. 잘 모르겠어요.”
천민정: 네, 맞아요. 확실히 함께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곳이 집처럼 느껴지실 것 같기도 해요. 어쩌면 창작의 과정 속에 있을 때나 창작하는 바로 그 순간이 선생님의 집이자 진짜 안식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평리 작업실 공간이거나, 바로 지금 여기 스튜디오가 집일 수도 있겠네요.
김명희: “영감이 샘솟는 곳이 바로 집이죠.”
천민정: 영감이 있는 곳이군요, 와… 네, 그렇네요. 선생님께서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시는지 혹은 정의하고 싶어 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이렇게 계속 이동하며 살아가는 삶(transient life)을 좀 더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선생님과 세대는 다르지만 저 역시 여러 곳에서 자랐고 다양한 세계와 공간을 오가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형태가 아주 비슷하다고 느끼거든요. 이런 삶이 예술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김명희: “나는 실질적으로 두 곳 모두에서 살아야만 해요, 그렇게 해야 하고. 어쩌면 여기 뉴욕에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지만 세상을 떠난 후에는 경주에 있는 그이 곁에 있고 싶어요.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한국에서 챙겨야 할 프로젝트가 많아서 계속 양쪽을 오가며 지낼 것 같아요.”
천민정: 방금 말씀하신 건 나중에 그곳(경주)에 묻히고 싶다는 뜻이신가요?
김명희: “그곳에 묻히고 싶다는 말이에요, 맞아요. 그 사람이 경주에 있는 선산(가족묘지)에 있거든요. 내이름도 거기에 있어요.”
천민정: 그럼 선생님 자리도 그분 옆에 마련해 두신 거군요.
김명희: “아니에요. 내 이름도 그의 비문에 같이 새겨져 있어요. 김환기 선생님과 부인 김향안 여사님도 함께 계시지요. 네. 그렇습니다.”
천민정: 아, 정말 좋네요. 네. 저도 항상 여기 미국에서 죽을 것 같다고 말하곤 해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날 화장해서 유골을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DMZ나 북한 혹은 독도라든지 제가 평소에 관심 있어 하던 곳 중 한 군데를 아이들이 직접 골라서 뿌려달라고 했죠. 그건 아이들의 프로젝트가 되는 셈이지요.
김명희: “천 작가는 스스로를 ‘세계 시민(world citizen)’으로 정의하는 것 같은데, 어떤 마음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정말 공감이 가요. 나로 말하면, 나는 계속 오가야만 하는 명확한 장소가 있어요. 사실 더 많은 장소를 갖고 싶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한국의 내평리라는 작업 공간이 있고, 또 뉴욕 소호에 집이 있죠. 그래서 가끔은 다른 곳도 여행하고 싶지만, 결국 이 두 곳만 줄곧 오가게 되는 것 같아요. 맞아요, 그래서 탈식민주의(Postcolonial)에 관한 책을 쓴”
“인도의 한 철학자가 ‘이동하는 존재(ambulant)’라는 말을 썼는데, 그게 내 마음에 깊이 와닿았어요. 어쩌면 그 단어야말로 내가 살아온,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삶을 가장 정확하게 정의해 주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인도 역시 오랜 식민지 역사를 겪어서 그런 개념이 나온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여기저기 떠돌며 살았지만, 지금은 내가 무척 사랑하는 명확한 터전이 한국에 있어요. 그와 동시에 여기(뉴욕)에서도 40년 넘게 살았으니 이 공간도 정말 사랑하죠. 그래서 나는 이 두 장소를 ‘이동하는(ambulant)’ 상태로 살아갈 것 같아요. 한국에서도 온전히 내 삶을 살 수 있고, 여기 뉴욕에서도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 덕분에 삶이 풍요로우니까요. 맞아요, 앞으로도 내 삶은 이런 방식으로 계속 이어질 것 같아요.”
춘천 소양강 댐에서 티벳 춤을 주고 있는 김명희, 장우진 촬영, 2026
천민정: 네, 이해해요. 그 모든 걸요.
김명희: “어느 한 곳으로 완전히 이주하거나 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한쪽을 아주 버리거나 어느 한 곳에만 정착하는 것 말이에요. 나는 그렇게는 못 할 것 같아요. 네.”
천민정: 그 많은 작품을 다른 두 지역에 어떻게 다 보관하고 관리하세요?
김명희: “보관 상태가 백퍼센트 완벽하진 못해요. 알다시피 한국에는 장마철이 있어 계속 신경을 써야 하거든요.”
천민정: 선생님께 드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제 딸 사샤가 선생님 웹사이트 작업도 하고, 김차섭 선생님 웹사이트 작업도 도와드렸잖아요. 그런데 사샤가 “어, 난 김명희 선생님 작품이 훨씬 더 마음에 들어”라고 하더라고요.
김명희: “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하하하)”
천민정: 정말이에요. 김차섭 선생님 작품을 감상하다가도, 결국엔 “아, 나는 김명희 선생님 작품이 정말 좋아. 훨씬 더 훌륭해”라고 하게 되더라고요.
김명희: “차섭 선생은 그런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하하하)”
천민정: 아, 틀림없이 그 말을 안 좋아하셨겠네요. (웃음) 맞아요.
김명희: “뭐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분 작품은 워낙 어려워서 사람들이 이해하려면 정말 깊이 파고들어야 하잖아요. 그게 바로 사람들이 찾아올 때마다 그분이 끊임없이 당신 작품을 설명해야 했던 이유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강사라 PD: 선생님, 저 하나만 더 질문해 볼게요. 네, 아까 ‘앰뷸런트(ambulant, 이동하는 존재)’ 이야기를 하실 때요, 사실 제가 그 ‘앰뷸런트’라는 개념에 정말 크게 공감하거든요. 그런데 저희 세대는 가끔 ‘한국인으로서 정체성(Korean identity)’이란 생각을 많이 잊어버릴 때가 있어요. 반면에 선생님과 인터뷰하면서 느끼는 건, 오히려 선생님에게는 이 ‘앰뷸런트’적인 삶 자체가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더욱 강조하게 만드는 어떤 영향이나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는 점이에요. 그 부분을 조금만 더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김명희: “그 문제는 어떤 학자가 이야기한 게 있는데, 우리가 설령 세계 시민으로 살아간다고해도 자기가 속한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는 거예요. 애국해야 한다는 거죠, 애국자가 되어야 한다고. 자기가 어디에 살고 있든 그곳의 진정한 애국자가 되기 위해 정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저 ‘난 여기에 잠시 임시로 사는 것뿐이야’라고 해선 안 되죠. 자기가 머무는 그곳도 사랑해야 하고, 또 원래의 이 장소도 사랑해야 하죠. 나는 충분히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봐요. 천 작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어느 한 곳만 사랑하고 꼭 단 하나의 여권만 가져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뉴욕 작가 스튜디오 벽면, 2026
천민정: 글쎄요, 참 흥미로운 부분이에요. 우리가 ‘국적’이란 걸 생각할 때 한 국가의 외곽선(국경선)을 보면 그렇잖아요. 당장 한국만 보더라도 지도상의 국경이 계속 바뀌었거든요. 아시다시피 한국이 더 컸던 적도 있고 더 작았던 적도 있죠. 그리고 하나였다가, 둘로 나뉘었다가, 어떤 때는 셋이나 넷이 되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국적이라는 건 결국 사람들이 시민권을 통해 자신들이 속한 다원적인(다양한 요소가 섞인) 국가를 정의하는 방식이자 일종의 법적 테두리로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명희: “천 작가의 작업은 북한에 관한 이야기잖아요.”
천민정: 네, 맞아요. 그리고 대부분은 ‘한국’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제가 한국 밖에 있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매년 한국에 가기는 하지만 어쨌든 제 시각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제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한국과 저의 관계성’으로 향하게 돼요.
그러다 보니 제가 느끼는 애국심의 성격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제 작품의 주제가 한국이다 보니 사람들이 저를엄청난 애국자라고 생각하곤 하더라고요. 하지만 사실 이건 거창한 애국심이라기보다 한국인으로서 제가 겪은 경험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밖에 머물면서 가교 역할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관점을 갖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에 하는 경험 말이에요. 그래서 선생님과 저의 또 다른 공통점은 우리 둘 다 한국의 내부이자 외부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외부의 시선으로 한국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거나 논할 수 있는 우리만의 독특한 관점이나 렌즈를 가지게 되는 거죠. 만약 우리가 한국 내부에만 있었다면 생각조차 못 했거나 굳이 입 밖에 꺼내지 않았을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실제로 한국에 있는 많은 한국 작가는 한국적인 것들에 대해 그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잖아요. 고민하는 당면 과제가 아예 다를 때도 있고요. 선생님의 작품 역시 ‘한국인다움(Koreanness)’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선생님이 지닌 특유의 정서와 감성 속에는 언제나 그 한국적인 느낌이 깊이 배어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김명희: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야 할 수 없죠. 그리고 아까 말한 그 철학자가 언급하기를 만약 어떤 노래를 들었을 때 마음이 깊이 움직인다면 바로 그 감정이 가 닿는 곳이 내 마음이 있는 자리이고, 그것이야말로 애국자(patriot)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 참 마음에 와 닿았어요.”
천민정: 그렇다면 선생님 마음속에는 어떤 노래가 흐르나요?
김명희:“아주 어렸을 때 들었던 노래들, 그러니까 내가 자라면서 늘 함께했던 그런 친숙한 것들이죠
뉴멕시코 Taos에서 드로잉중인 김명희 작가. 강사라 프로듀서 촬영. 2026
아카이브 정보
생산일자 2026.3.1.
생산자 [인터뷰/인터뷰어/인터뷰이]#2
형태 문서
내용 인터뷰 영상 녹취록과 기타 자료(사운드, 영상, 사진 등)
편집 백지숙, 정순민
참여자 천민정, 김명희
작품 사진 및 자료 출처 김명희, 김차섭 기념사업회
이 사업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의 ‘2026년 시각예술창작산실’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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