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자신이 아끼는 오래된 물건이 있습니다. 해묵고 손때 탄 물건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언가의 시작과 낡아가는 시간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죠. 그 시간을 쓰다듬고 매만질수록 마음이 기우는 것처럼 고용국은 유한한 물건에서 창작의 실마리를 발견합니다. 시들고 생기를 잃은 물건을 수집하고 잘 다듬어 보관해 두면, 언제든 꺼내어 즉흥적으로 조합해 어느 순간 작업으로 깨우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동안 지켜보고 만족스러운 형태가 될 때까지 놔주지 않지만요. 와이어에 매달려 있는 듯한 형상이 규칙적으로 놓인 전시장은 추모비 같기도 혹은 새로운 생명의 인큐베이터 같기도 합니다. 허물어진 것으로 다시 만든 고용국의 생명력을 BE(ATTITUDE)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꽃 6›, 디테일컷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현재 일산에 거주하며 조형 작업을 하고 있는 고용국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릴 때부터 미술 활동을 좋아했어요.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고, EBS ‹만들어 볼까요›에 나오는 장난감을 따라 만들기도 했습니다. 특히 만화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만화가를 장래희망으로 삼았는데, 사람을 몰입하게 만드는 세계관과 개성 있는 그림체, 그런 것이 책 한 권으로 나오는 결과물에 굉장한 매력을 느꼈어요. 어릴 때부터 쭉 그 꿈을 가졌는데, 갑작스레 꿈을 접고 방황하다가 다시 예술을 생각하게 되었고, 만화가가 아니라 순수 미술 쪽을 해 보기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해외로 나가 좀 더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미술 공부를 하러 독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Untitled›, 2025, 흑연, 마커펜, 21×29.7 cm, 사진. 양이언
전시전경, «Nap II», 2026, KOMPLEX, 사진. 양이언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고양시에서 1990년대 지어진 아파트 단지 내 상가 건물을 얻었습니다. 옆 호실에는 태권도장이, 맞은편에는 작은 교회가 있는 곳입니다. 작업하다가 중간중간 아이들의 기합 소리가 들리고 찬송가가 들리는 매력 있는곳입니다. 그와 함께 아파트 단지 내에서 산책하고 상가 옥상에 앉아 있을 수도 있어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오래된 것, 무용지물에서 많은 영감을 얻습니다. 관심 받지 못하는 변두리에 놓여 있는 사물을 볼 때 그것들이 제게 말을 거는 열린 공간이 생기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책이나 도록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는데, 최근에는 『장욱진: 그림으로 보는 선의 미학』을 읽고 있습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창작 과정은 그때 그때 다릅니다. 저에게 창작은 거의 발견의 과정인데, 많은 부분은 길거리나 온라인 플랫폼에서 발견한 중고 물품을 수집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재료는 물성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데, 그것들은 바로 쓰지 않더라도 가지고 있다 보면 운명처럼 필요한 타이밍에서 쓰임새를 발견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 후 수집한 사물을 즉흥적으로 조합하거나 분해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우연성에 많은 것을 기대기도 합니다.
최근 작업인 ‹꽃 시리즈›를 예로 들면,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인형, 키링을 수집해 사이즈 별로 분류합니다. 솜을 빼내고 인형에 있는 표정을 도려내어 구멍을 낸 뒤, 천가죽만 남겨 상자에 보관합니다. 그러고 나서 뼈대를 만들고, 보관해 둔 인형 가죽을 꺼내 분해하고 조합하며 생각했던 키워드로 다가갑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미니어처가 들어가기도 하고, 천이나 옷을 잘라 넣기도 합니다. 그다음 조형물을 염색하고 말린 뒤, 완성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시점에서 며칠 동안 지켜보며, 필요한 부분을 보충하거나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결정합니다.작업은 주로 작업실에서 이뤄지지만, 집에서 작업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럴 때는 집으로 가져와서 바느질이나 스티커 붙이기 같은 단순 노동을 하게 됩니다.
‹꽃 시리즈›는 꽃꽂이에 관한 글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꽃을 뿌리 부분에서 잘라내면 시들기 전까지 잠깐 동안 생명의 유한성을 뿜어냅니다. 길거리에서 종종 버려져 훼손된 인형을 보았을 때 오히려 인형의 생명력이 드러나는 것이 역설적이라고 느꼈어요. 죽음의 형상이 부여되었을 때 살아있다는 감각이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이에 중고 인형을 수집하고, 그것들을 더 의도적으로 훼손하고 조합하여 하나하나의 객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경주에 갔을 때 보게 된 ‘신라 토우’를 참조하여 현대사회에서 애도 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을 상상하며, 그들의 형상을 만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2025년에 열린 전시 «Nap»에서는 흰색 사물을 수집했습니다. 흰 열매, 풍선 꽂이, 양동이, 수건, 스티커 종이 같은 것을요. 그런 것을 함께 배치하고, 그 옆에 출토된 유물이나 뼈 같은 것을 측정하는 스케일바를 목재로 만들어 함께 전시했습니다. 쓰임새를 잃은 사물이 자신을 잊은 상태로, 마치 장자의 호접몽처럼 느껴졌어요. 그 당시 실제 전시 기간이 사흘밖에 안 되어서 아쉬웠는데, 오히려 전시와 작품의 콘셉트, 운명처럼 느껴졌습니다.
전시전경, «Nap», 2025, Kunstraum Neureut
‹Untitled›, 2025, 열매, 휴지, 천, 풍선꽂이
‹Untitled›, 2025, 장식함, 미니어처, 끈, 종이 뚜껑, 플라스틱 포스터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유한성이요. 삶은 죽음과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무한은 결국 유한한 것들이 이어져서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복잡한 세상 속에서 치이다 보면 근원적인 것을 잊게 되는데, ‘결국 죽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면서 겸손해지는 것 같아요.
전시 «Nap II»에서 3층 공간에 작업한 ‹꽃 시리즈› 28점 정도를 일부러 규칙적으로 배열했는데, 공간에 들어갔을 때 마치 납골당이나 공동묘지가 주는 기묘한 리듬이 잘 구현된 것 같아 만족스러웠습니다. 작품을 어떻게 전시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친한 작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 이후 직접 만들게 된 좌대가 그 리듬을 더 잘 살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만 불만족스러웠다기보다는 ‹꽃 시리즈›의 뼈대를 만들면서 ‘손에 익은 형태에 너무 집착한 것은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평일에는 작업실에 갑니다. 작업실에 가지 않게 되는 날에는 휴식을 취하거나 산책을 합니다. 요새는 일기도 꾸준히 쓰고 있어요.
요즘 작가님이 관심을 가장 많이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박물관이나 유적지에서 보게 되는 유물이나 오래된 것(뼈, 터 등)을 보면 축적된 시간이 느껴지는데, 그런 감각은 정말 시간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시간이 주는 아우라가 있는데,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그런 아우라를 주는 작품이 있어요. ‘그게 대체 뭘까’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아무 생각도 안 날 때 일단 드로잉을 합니다. 드로잉을 하면서 ‘뭘 해야겠다’, ‘뭘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하려고 합니다. 정처 없이 걷기도 하고, 친한 작가들과 만나 술도 마시고 여러 가지 이야기도 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때론 차라리 슬럼프가 계속돼서 슬럼프와 슬럼프가 아닌 때의 격차가 없는 지점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파고들며 생각하되 할 때는 별 생각 없이 하세요. 집중하면 몸은 자연스레 생각을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잘하려고 해도 힘들고, 못한다고 자책하는 것도 괴롭습니다. 세상에 정보가 너무 많기 때문에 따라오는 부작용도 많아요. 자신을 믿고, 할 때는 이 모든 것을 의식하지 말고 그냥 재미를 느끼며 했으면 좋겠어요. 이건 제가 저에게 하는 조언이기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보며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도 있을 텐데….’ 미래의 누군가가 제 작업을 생각했을 때 숨구멍을 내는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낚시와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 자신의 작업을 묵묵히 하는 모습.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은 더 베풀기.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니 이들 답변이 다짐이 되었는데, 제 말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일요일 새벽›, 2023, 목재, 아크릴, 바니쉬, 주운 물건, 램프, 인공 눈, 20×35 cm, 사진. Dirk Rose
Artist
고용국(@y0ngkukk0)은 수공예적 과정을 거치며, 주로 버려진 물건이나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사물을 이용하여 작업한다. 사물에 깃든 타인의 흔적과 시간을 경유하여 조형 작업을 하고 그 외 퍼포먼스와 평면 작업도 진행했다. 최근 개인전 «Nap II»(KOMPLEX, 2026)와 «Nap»(Kunstraum Neureut, 2025), 2인전과 단체전 «고트-송»(상업화랑, 2024), «Nowhere Forever»(Kunsthaus L6, 2024), «A private Smile»(Kunsthalle Basel, 2024)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