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도는 가장 반듯한 선만 남기려는 문서죠. 노송희는 그 선을 일부러 흐트러뜨립니다. 건축가가 건물 하나를 짓느라 몇 년씩 씨름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도면과 손으로 그은 정교한 선, 급하게 휘갈긴 메모 등에 오래 붙들려 있다가 벗어나서, 그는 그것을 타이벡 천에 옮긴 후 뒷면엔 부드러운 곡선을 그려 오려내어 이어 붙였습니다. 완성한 새 도면은 가벽 하나 없는 100평 공간에 통째로 펼쳐졌어요. 같은 형태를 두고 어른들은 계단과 로비를 읽어냈고, 아이들은 선풍기와 하트를 찾아냈습니다. 작가는 이렇게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형태를 알아보는 순간들이 전시장 곳곳에서 동시에 일어나도록 유도합니다. 반듯한 선을 흔들어 낯선 모양을 찾아내는 이 방식은, 그가 자료를 다뤄 온 오랜 태도이기도 하죠. 같은 형태에서 저마다 다른 모양을 길어내는 노송희의 작업을 BE(ATTITUDE)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드리프트 드래프트(Dri(a)ft)›스틸컷, 2026, 4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4시간 53분)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노송희입니다. 저는 회화를 전공한 뒤, 지금은 영상예술학을 공부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규격화된 자료 자체가 지닌 시각적 가능성에 관해 관심을 둡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예전부터 예중, 예고 시험을 보면 다 떨어졌어요. 심지어 그 전에는 병설유치원도 떨어지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미술이 그냥 좋아서 계속했는데, 그러다 보니 학부 4학년 때 ‘앞으로 뭐 하고 살지?’라는 생각이 들었죠. 근데 그때 당시 지도교수님이 칭찬을 잘 안 하시는 분이었는데, 상담에서 “네가 작업을 안 하면 누가 하겠어?” 하시는 거예요. 칭찬에 굉장히 굶주려 있을 때였거든요. 솔직히 그 말 때문에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남의 말 함부로 믿으면 안 되는 건데······ (웃음)
‹드리프트 드래프트(Dri(a)ft)› 스틸컷, 2026, 4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4시간 53분), 가변크기(비디오), 사진 남기용,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드리프트 드래프트(Dri(a)ft)›, 2026, 4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4시간 53분), 엽서 1점, 가변크기(비디오), 14.8 × 10.5cm(엽서), 사진 남기용,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작업실은 마포구의 평범한 상가주택에 있어요. 제가 손발이 차요. 바닥에 발이 닿는 걸 좋아해서 바닥 난방이 되는 곳을 애써 찾았습니다. 작업용 모니터를 비치한 방과 서재 겸 휴게실, 거실이 있습니다. 공간을 구분하는 걸 좋아해서 밥을 먹을 때는 거실에서만 먹습니다. 망원시장에서 과일이나 빵을 사서 직접 차려 먹습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제가 운전 10년 차인데, 운전 중에 물론 졸리기도 하지만 잡생각을 많이 하잖아요. 보통 전시를 보거나 수업을 듣거나 수업하고 돌아오는 길에 운전을 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아까 들었던 내용을 머릿속에서 복습하기보다 제 나름대로 샛길을 만들어서 다른 생각을 하는 쪽으로 여러 방향으로 모색해 보는데, 그 과정에서 재밌겠다 싶은 게 떠오르기도 해요.
시작은 늘 자료 조사예요. 처음엔 객관적인 정보부터 최대한 모아 들여다 봅니다. 어떤 대상의 역사부터, 지은이와 엮은이가 누구인지, 그 사람은 어떤 인터뷰를 했는지 등을 살펴보죠. 이게 굉장히 지루하고 어떻게 보면 단순노동이고 불필요한 과정일 수도 있는데요, 처음부터 바로 직관적으로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작업을 시작하면 나중에 거리 조절이 조금 힘들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되도록 이 과정을 거치려 합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 나만의 위키를 만든 후에 그다음에 배치하고, 매핑하고. 근데 위키를 만든다는 말에 이미 배치와 매핑이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되짓기(Noitilomed)›(2025) 제작을 위한 편집 과정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2025년 12월에 개인전 «아카이브 모양Shaping the Archive»(금천예술공장 PS333)을 열었어요. 그동안 작업하며 모아둔 디렉터리를 다시 뒤지는 데서 시작했는데, 그중에서도 제가 자주 다뤄온 건축 도면이 출발점이었습니다. 건축 도면이 재밌는 게, 건축가가 건물 하나 짓느라 몇 년씩(길면 10년까지) 씨름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거든요. 복잡하게 얽힌 선이나 급하게 적은 메모를 천천히 살피다 보면, 전공자가 아니어도 그때의 상황과 기분이 전해져요. 제가 다룬 도면 중엔 김석철·프랑코 만쿠조의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김종성의 힐튼호텔 서울, 김수근의 아르코예술극장이 있었는데, 손으로 그린 정교한 선에 완전히 반했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다들 한국 근대건축을 이끈 인물이자, 전부 남성 건축가더라고요. 그래서 ‘이 반듯하고 남성적인 구조를 흔들어서 유기적인 모양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데서 작업이 출발했습니다. 도면을 커다란 타이벡(건축 현장에서 자재를 덮거나 방수용으로 쓰는 천)에 프린트하고, 뒷면엔 곡선 형태를 그렸어요. 처음에는 여성 생식기 형태였는데 점점 추상적인 곡선 모양으로 변했습니다. 그걸 오려서 다시 배치해 커다란 새 도면을 만들었어요. 그 도면을 100평짜리 PS333 공간에 가벽 하나 없이 쫙 펼쳤어요. 보통은 가벽을 세워 구획하는 공간인데, 저는 반대로 뻥 뚫린 시원한 장면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한동안 CCTV로만 작업이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시던 경비·청소 담당 선생님들이 직접 보러 전시장에 올라오셨는데, 그날이 제일 뿌듯했어요.
앞선 이야기랑 이어지는데, 저는 아카이브의 ‘내용’만큼이나 그것의 물리적 상태와 그 안에 들어 있는 ‘모양’에 주목하고 싶었어요. 다시 말해, 반듯한 직선이 뒤틀리고 겹치면서 생기는 새로운 형태랑 구멍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어린이 관객이 정말 많이 왔는데, 같은 모양을 서로 부르는 방식이 너무 재밌었어요. 어른들은 계단·로비·방이나 1, 2, 3 같은 걸로 읽을 법한 형태를, 아이들은 선풍기, 하트, 손가락이라고 부르더라고요. 다들 전시장을 거닐며 자기만의 모양을 머릿속으로 직조해 내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기존엔 하나의 서사로 흘러가는 싱글채널 영상이 주였는데, 이번엔 공간 자체가 한 편의 영상처럼 느껴지길 바랐어요. 그래서 시각과 청각을 일부러 분리했습니다. 안다영, 박다함, 장영규 세 분께 각각 다른 소스 100여 개와 가상의 문서·스토리를 드리고 작곡을 부탁드렸고, 각 20분씩 총 60분이 루프로 도는 구조였어요. 바닥이 부드러워서 그런지 관객들이 구석에 앉거나 눕기도 하고, 힐튼호텔 분수대 형태를 테이블·의자 높이로 올려 만든 구조물에 걸터앉아 음악을 듣기도 했어요. 아이들은 작품에 뚫린 구멍을 프레임 삼아 전시장을 들여다봤는데, 그 장면이 특히 좋았습니다.
또 하나의 축은 가상의 여성 이민자 건축 그룹을 만드는 거였어요. 제가 다룬 건축가들이 대부분 남성에, 유학파에, 정치·경제적으로 혜택 받은 분들이었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맞서는 여성 건축가 조합이 있다면?’ 하는 상상에서 ‘AEWA’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이 그룹이 저한테 커미션을 줬다는 설정으로 작업했어요. 예전 커미션 작업들이 실제 자료에 기댄 다큐멘터리에 가까웠다면, 이번엔 픽션을 만들어 제가 저한테 커미션을 준 셈이죠. 음악 소스도 이들이 모은 거라는 설정으로 작곡가들에게 넘겼고, 단체의 매니페스토도 함께 전달했어요. 전시장엔 영상 3개를 배치했는데, AEWA가 만들었을 법한 아카이브 리스트와 단체 소개 영상, 공예품 등을 곳곳에 흩어 놓았습니다.
‹Best Television is Noh Television›, 2025,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5분, 250 × 250 × 80cm, 사진 이의록, 제공 두산아트센터 두산갤러리
‹Best Television is Noh Television›, 2025,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5분, 250 × 250 × 80cm, 사진 이의록, 제공 두산아트센터 두산갤러리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을 여쭤봐도 될까요?
아침엔 비타민, 유산균과 오메가3를 챙겨 먹어요. 비싼 돈을 주고 몇십억 마리가 들어있는 유산균 영양제를 먹은 적이 있는데 돈이 아까워서 요새는 ‘몇억’ 마리만 들어있는 제품으로 바꾸고 그 대신 오메가3를 추가로 복용합니다. 아침은 되도록 같은 시간에 먹고, 오전엔 메일이나 서류처럼 빨리 끝낼 일부터 해치웁니다. 요즘은 더워서 산책을 아침저녁 짧게 두 번 나가요. 산책 때 동네 강아지 구경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굉장히 규칙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데, 제가 약간 강박이 있어서 이런 루틴이 있어야 불안하지 않더라고요. 저녁엔 설거지나 청소를 한 뒤 나름의 작업실 마감을 합니다. 그렇지만 보통 마감 후에도 집에 가기 싫어서 자정 이후까지 이어서 작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해야 건강하게 오래오래 작업할 수 있을까?’, 이게 요즘 제일 큰 관심사예요. ‘오래 버틸 수 있는 몸과 마음’을 지니고 싶습니다.
슬럼프라고 부를 만한 건 딱히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작업이 안 풀리면 엄청 딴짓을 합니다. 제가 정리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작업실에 있는 물건과 서류를 파일링하고, 옷을 개고, 흙을 조몰락거리거나 철사를 구부리고, 재료를 정리하고······ 손은 바쁜데 머리는 쉬는 그런 일을 해요. 자기 전엔 죄책감 없이 영화를 몰아 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다시 작업이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창작이라고 하면 혼자 골방에서 다 해내는 그림을 떠올리기 쉬운데, 실제로는 같이 만드는 부분이 훨씬 많아요. 작가 동료, 기획자, 제작을 도와주시는 대표님들, 작곡가…… 결국 회사 생활이랑 크게 다르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저한테 제일 중요한 건 거창한 철학보다 의사소통이에요. 서로 존중하면서 즐겁게 일하는 게 시시해 보여도, 제일 어렵고도 중요합니다.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흔들릴 때가 있죠. 그래도 나를 의심하지 않으려 합니다. 남의 말이든, 스스로 이룬 작은 성취든 뭐든 붙잡고 스스로를 (좋은 의미로) 안심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스스로를 다독이기, 후회하지 말기······ 이런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오래오래 작업을 이어가는 작가요. 근데 그러면서도 다음 전시에 뭐 한다고 하면 누군가 슬쩍 찾아보게 되고, 궁금하기도 한 작가. 그 뻔하고 같아 보이는 레퍼토리 안에서도 뭔가 다른 걸 계속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면 좋겠네요.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적당하게 높은 2층 집에서 담 너머 옆집 마당 리트리버를 흐뭇하게 구경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Artist
노송희(@songheenoh)는 서울에 거주하며 잡동사니로 여겨졌던 다양한 대상의 독특한 형식을 발견하고 새로운 연결 관계를 창발하는 일에 흥미를 두고 있는 작가다. 개인전으로는 «아카이브 모양(Shaping the Archive»(금천예술공장 PS333, 2025), «DIZZY»(시청각 랩, 2023)을 열었고, 그룹전 «디어 알렉사»(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2026), «2025 두산아트랩»(두산아트센터, 2025), «큰 사과가 소리없이»(제7회 창원조각비엔날레, 2024), «모든 산은 섬이다»(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30주년 기념 전시, 2024) 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