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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에서 발견한 ‘안전하다는 감각’

Writer: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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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서촌을 걷다 보면 괜히 발걸음이 느려집니다. 천천히 걸을수록 풍경 하나, 공기 한 줄기에도 의미가 스며 있는 것 같거든요. 그 무드의 근원지를 찾는다면 아마 ‘팩토리2’를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2002년 문을 연 갤러리 팩토리는 2018년, 두 번째 시즌을 맞아 이름을 팩토리2로 바꾸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아티스트와 함께 전시·출판·퍼포먼스·워크숍을 실험하며 공간의 안과 밖을 유연하게 확장해 왔죠. 이곳을 20년 넘게 이끌어온 홍보라 디렉터가 이번엔 ‘안전하다’는 감각을 붙잡아 글로 풀어냈습니다. 서울의 끈적한 여름부터 헬싱키 도서관의 서늘한 바람까지. 도서관, 광장, 케이팝 댄스 현장에서 포착한 순간들이 모여 ‘Safe Space’라는 시리즈가 시작됩니다. 도시와 예술을 새롭게 읽어내는 시도이자,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작은 안식의 기록입니다. 모두의 안전한 감각을 위해, 첫 번째 이야기를 지금 함께 열어봅니다. 그 특별한 풍경을 «비애티튜드» 웹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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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카르보넨(Otto Karvonen), ‹헌정›(Omistuskirjoitus), 2018, 공공 커미션, 오오디 도서관, 헬싱키, 핀란드, ©Oodi Library

Safe Space는 예술을 매개로 도시와 일상 속에서 자유로운 사고와 대화를 열어주고, 사변적 단상과 사회적 질문을 탐색하며 나누는 안전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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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디 도서관의 넓은 창가 자리에서 청소년들이 모여 체스를 두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유리 너머 도시 풍경과 어우러져, 도서관이 품은 여유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2025 ©홍보라

헬싱키에서 발견한 ‘안전하다는 감각’

올해 7월, 전시를 위해 꼬박 한 달을 헬싱키에서 머물렀다. 인구 밀도가 낮고, 특별히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볼거리가 없는 도시의 느슨함. 밤 열두 시가 되어서야 겨우 어두워지는 북유럽의 긴 여름, 해가 지면 서늘하다 못해 쌀쌀해지는 공기. 그 심심하고 선선한 기운이 나를 천천히 걷게 하고, 발걸음을 멈춰 관찰하며 짧은 단상들을 모을 마음의 여유를 주었다. 한 달 살기이자 한 달 일하기였지만, 리듬은 느리고 머리는 맑았다.

서울로 돌아오니, 공기는 여전히 잔인하게 뜨겁고 끈적했다. 사고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글 한 줄 읽고 쓰기조차 어려운 날들. 거리 위로 쏟아져 나온 도시의 욕망이 이글거리는 풍경 속에서 나는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고, 지난 헬싱키에서의 시간을 하나씩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그중 유독 선명하게 남은 장면들을 글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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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디 도서관 전경 ©Oodi Library

도서관, 안전 공간으로의 진화

‘안전공간(Safe Space)’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패닉룸 같은 물리적 은신처나, 편견과 위협 없이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공론장을 떠올리기 쉽다. 올 한 해 이 개념은 내게 중요한 의제이자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나는 그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도시 안에서 예술을 매개로 마음껏 상상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심리적 공간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한쪽에서는 다양성을 신앙처럼 외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문화·종교·관습·정치적 입장·젠더 인식 차이로 인해 갈등과 혐오가 오히려 커져만 가는 시대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의제들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가운데, 도서관은 여전히 드물게 다양한 사람들이 편견 없이 머물 수 있는 장소다. 이제 도서관은 단순히 책의 집을 넘어 시민들의 활동과 예술적 경험이 교차하고, 오프라인으로 여러 신체가 나란히 놓이며 각자의 방식대로 존재할 수 있는 ‘안전 공간’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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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디 도서관 이용 풍경 ©Oodi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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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디 도서관 이용 풍경, 2019 ©홍보라

헬싱키 중앙도서관 오오디(Oodi)

헬싱키 중앙도서관 오오디(Oodi)는 그 좋은 예다. 창작 스튜디오와 모임 공간, 어린이와 부모를 위한 쉼터, 퍼블릭 아트까지 품으며 미술관 못지않은 예술적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설계 초기 단계부터 함께 기획된 퍼블릭 아트 오미스투스키리요이투스(Omistuskirjoitus, ‘헌정’, 작가: Otto Karvonen)는 “도서관을 누구에게 헌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시민 381명의 응답을 모아 만든 텍스트 설치 작품이다. 중앙의 나선형 계단실 벽을 가득 채운 단어와 문장은 위계 없이 무작위로 배열되어, 누구나 자기만의 연결과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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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카르보넨(Otto Karvonen), ‹헌정›(Omistuskirjoitus), 2018, 공공 커미션, 오오디 도서관, 헬싱키, 핀란드 ©Oodi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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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카르보넨(Otto Karvonen), ‹헌정›(Omistuskirjoitus), 2018, 공공 커미션, 오오디 도서관, 헬싱키, 핀란드 ©Oodi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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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카르보넨(Otto Karvonen), ‹헌정›(Omistuskirjoitus), 2018, 공공 커미션, 오오디 도서관, 헬싱키, 핀란드 ©홍보라

이 작품은 오프라인의 계단실 벽에만 머물지 않는다. 10개 언어와 음성 낭독 기능을 갖춘 애드온(*작품을 온라인에서도 다국어·음성으로 체험할 수 있는 보조 확장 기능)을 통해, 시각과 언어, 움직임과 참여의 차원에서 누구든 자기 속도로 작품과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 덕분에 휠체어 이용자, 어린이, 비핀란드어 사용자 등 다양한 신체 조건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방문객 모두가 도서관과 예술을 함께 누린다. 이는 오오디가 지향하는 접근성과 포용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젠더리스 화장실과 스트리트 레벨에서 입구까지 단차 없이 이어지는 세심한 건축적 설계는 물리적 편의성을 넘어 방문객에게 심리적 안도감까지 제공한다. 덕분에 오오디는 단순한 도서관을 넘어, 확실한 ‘안전공간’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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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카르보넨(Otto Karvonen), ‹헌정›(Omistuskirjoitus), 2018, 인터랙티브 웹, 오오디 도서관 공식 웹사이트 ©Oodi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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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디 도서관의 안내문. 보호자와 함께 차분히 시간을 보내자는 문구 옆에 앙증맞은 동물 그림이 더해져 미소를 자아낸다 2025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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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디 도서관 내부 ©Oodi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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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디 도서관 이용 풍경, 2022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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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디 도서관 내부, 2022 ©홍보라

광장에서 마주한 광야(KWANGYA)

매번 갈 때마다 오오디와 그 주변 도심 광장은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책을 읽는 사람들, 갓난아기와 부모, 3층 한쪽에 가지런히 세워진 유아차들. 낮은 책장 사이 자연스럽게 놓인 벽 없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 사람들. 책의 집이자 커뮤니티 센터, 음악 감상실이자 미술관, 창작 스튜디오와 모임 공간을 오가는 발걸음, 방문객의 움직임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사운드 설치, 그리고 입구와 연결된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낯선 음악과 몸짓까지. 오오디는 특정한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는다. 방문객의 필요와 상상력에 따라 끊임없이 진화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품는다. 그 모든 장면은 누구나 각자의 방식과 속도대로 머물 수 있도록 허용하는 공간이다. 헬싱키 시민들이 오오디를 자랑스러운 공공재로 여기는 이유가 충분히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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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디 도서관 이용 풍경, 2025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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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디 도서관 이용 풍경 ©Oodi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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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디 도서관 이용 풍경, 2022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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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디 도서관 전경, 2025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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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디 도서관 이용 풍경, 2025 ©홍보라

지난 7월의 주말 이른 오후, 오오디 앞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장면이 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케이팝 음악에 맞춰 저마다의 칼군무를 추고 있었다. 서로 다른 문화와 배경, 성별과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아이들이 뒤섞여 있었고, 그중 유난히 어색해 보이는 소년도 눈에 띄었다. 그는 케이팝 랜덤 플레이에 맞춰 가장 많은 안무를 따라 추며 자신만의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냈고, 함께 춤을 추는 무리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서 어색한 몸과 마음이 조금씩 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그 순간, 오래된 내 음악적 선입견과 케이팝 팬문화에 대한 편견이 무너졌다. 케이팝이라는 울타리 안에는 사회·종교·정치적 갈등과는 무관한 그들만의 평행우주, “광야(KWANGYA)”가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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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디 입구 광장 앞에서 케이팝 랜덤 플레이 댄스를 즐기고 있는 청소년들, 2025 ©홍보라

오오디 입구 광장 앞에서 케이팝 랜덤 플레이 댄스를 즐기고 있는 청소년들, 2025 ©홍보라

왠지 나는 오오디 입구 광장에서 펼쳐진 케이팝 랜덤 플레이 댄스 현장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오랜만에 예상치 못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마치 버튼이 눌린 듯 그 자리에 서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온갖 케이팝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 곡은 무엇일지, 또 이 어색하고 조금은 서툰, 다양한 신체와 머리색의 청소년들 가운데 누가 광장 중앙의 동심원으로 나와 자신의 춤사위를 뽐낼지 홀린 듯 지켜보았다. 아슬아슬해 보이던 그들이 그 순간만큼은 더없이 안전해 보였다.

오오디 입구 광장 앞에서 케이팝 랜덤 플레이 댄스를 즐기고 있는 청소년들, 2025 ©홍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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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 속한다는 감각. 누구의 편견이나 평가로부터 자유로운, 보이지 않는 투명한 무지개 지붕이 잠시 그들 위에 드리워진 듯했다. 반짝반짝.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졌다. 안전공간이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다. 그저 나 자신으로서, 마음껏 속하거나 속하지 않을 자유를 스스로 허락한 심리적 공간,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여백이 있는 곳. 그날 오후, 오오디 앞 광장은 내게 바로 그런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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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홍보라(@borabola5)는 경복궁 서쪽에서 작고 뾰족한 예술 공간이자 기획 사무소인 팩토리2의 운영하는 디렉터이자 예술기획자로, 도시·사람·예술의 역동적 관계를 기반으로 퍼블릭 아트와 국내외 다양한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장르 간 경계를 선이 아닌 넓은 지대로 확장하고자 연구, 기획, 제작, 교육 등 예술과 문화 전반에 걸쳐 경계 없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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