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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반복은 늘 다른 반복

Writer: 박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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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박소진 작가는 회화 작업과 코스튬 작업을 병행합니다. 주로 실을 가지고 회화로 만들고, 독립 패션 레이블 ‘어셈블드 하프Assembled Half’를 운영하며 옷을 만들죠. 독일 베를린으로 떠난 이후 지금까지 지속하는 창작 루틴인데요. 쉬지 않고 계속 창작하는 일은 매일 계속되는 반복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반복성이 정말 중요하다고 믿어요. 매일 일어나는 단순한 반복은 사실 단 한 순간도 똑같지 않거든요. 반복은 결국 변신이면서, 삶을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행위로서 다가가죠.

그의 작업은 떠오르는 이미지의 흐름에 따라 느슨하게 스케치한 흔적을 실로 바느질하면서 패턴을 짜듯 면을 구성하고 선을 잇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진행한다는 점에서 모든 것을 철저히 준비하는 자수와는 정 반대편에 있죠. 그래서 삑사리 또한 자연스럽게 포용하고 감상하는 즐거움이 됩니다. 요즘 들어, ‘아끼는 똥 된다’라는 말을 실감하며 애정과 관심을 가진 것을 마음껏 좋아하고 만들고 시도해 봐야겠다고 다짐하는 박소진 작가. 오전이면 수영하고 매일 작업하는 귀엽고 이상한 할머니가 된 미래를 꿈꾸는 그의 이야기를 BE(ATTITUDE) 웹 아티클에서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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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ghtmare in Childhood›, 2023, Cotton, thread, mixed materials, 130 × 95 cm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주로 실을 가지고 회화 작업을 하면서 독립 패션 레이블 ‘어셈블드 하프Assembled Half’를 통해 코스튬 작업을 진행하는 박소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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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림 그리는 일, 뭔가를 만드는 일, 잡다한 이미지를 모으고 스크랩하는 걸 어릴 때부터 가장 재미있어하고 즐거워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대에 갔어요. 졸업 후에는 인테리어 스타일링, 담뱃갑 같은 오래된 물건에 콜라주해 쌈지길 같은 데서 팔기도 했고, 빈티지 옷을 리폼해서 쇼핑몰을 운영하는 등 잡다한 일을 했는데요. 이때부터 제가 회사에 맞지 않는 인간이란 걸 깨달았어요.

독일 베를린으로 공부하러 떠난 후, 거기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어요. 졸업 후에도 계속 혼자서 옷을 만들고 그림을 그렸죠. 생계나 비자를 연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옷을 계속 만들어 팔아야 했는데, 그 과정을 거치며 정말 많이 만들어 보고 다양한 시도를 해봤던 것 같아요. 그림은 전시가 없어도, 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계속 그렸고요. 그러다 조금씩 그림을 소개하고 전시할 기회가 생기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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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sembled Half ‘Nightmare in Childhood’, 2023

작업 공간을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구한 공간이에요. 제 낡은 체력 때문에 무조건 집과 가까운 곳이어야 했고, 10여 년간 베를린에서 생긴 잡다한 물건들이 다 들어가야 할 만한 공간이라는 조건을 충족했죠. (참고로 저는 맥시멀리스트입니다…) 제 작업실은 전에 쓰던 사람이 피아노 학원을 오랫동안 운영한 공간이었고, 재래시장이 앞에 있어 점심 걱정이 없어서 좋아요. 초등학교와 귀여운 길고양이가 많아 아기자기한 골목을 걸어가는 길이 즐겁고 매일 소소한 재미가 있습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신화, 오래된 유물, 석고상 등을 보면 꿈처럼 사적인 체험과 집단적인 꿈 사이의 무의식의 원형 같은 게 느껴져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본능이나 충동, 갈등 등이 내면과 외면의 세계와 연결되고, 우리 몸속 에너지와 이미지가 형태로 드러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드러내는 추함의 다양성에도 관심이 많아요. 섞거나 이것저것 그러모아 뒤섞인, 일관된 톤으로 맞춰지지 않아 완벽하진 않지만 아름다운 것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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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ghtmare in Childhood› costume (front), 2023, Cotton, wool, th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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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ghtmare in Childhood› costume (back), 2023, Cotton, wool, thread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주요한 이미지가 정해지고 흐름이 생기면 캔버스나 원단에 이미지를 그려나가요. 이때 주요 이미지 외에는 선을 그냥 겹쳐 넣거나 곡선을 그려 넣으며 러프하고 느슨하게 스케치해요. 이후 실로 바느질하면서 패턴을 짜듯 면을 구성하고 선을 이으며 무의식적으로 접근합니다.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얼마 전 성수동에 있는 갤러리 ‘디 언타이틀드 보이드The Untitled Void’에서 삼인전을 가졌어요. 여기에서 ‹사이라는 것, 사이가 되는 것, 사이가 된다면› 시리즈의 신작을 선보였습니다. 지금까지는 커다란 원단에 바로 작업을 해왔는데요. 이번 신작은 크고 작은 사이즈의 캔버스로 미리 짜놓은 상태에서 작업을 해봤어요. 틀로 짜놓고 작업을 하니까 마감도 더 깔끔해지고, 설치도 간편해지는 장점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허리에 무리가 많이 가고 시간도 더 오래 걸렸어요. 각각 표현할 수 있는 영역에서 장단점이 존재해서, 두 가지를 병행하며 계속 진행할 것 같아요.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구상 중인 ‹Blanket in the forest› 시리즈는 틈틈이 이어오고 있어요. 몸도 안 좋고 작업실이 없던 시절에 작은 옷방에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쌓아둔 이불이나 데드스톡을 이용해 바느질하는 걸로 시작했는데요.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을 실험하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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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라, 박소진, 손효정», The Untitled Void,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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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라는 것, 사이가 되는 것, 사이가 된다면›, 2025, 100 × 8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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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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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라는 것, 사이가 되는 것, 사이가 된다면›, 2025, 60 × 5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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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라, 박소진, 손효정», The Untitled Void,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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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 컷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인가요?

밑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않고 작업하기 때문에 얽히거나 꼬임 없이 정확한 자수와는 다릅니다. 실이 얽히는 부분도 그대로 드러나고 계획성도 없어서 ‘삑사리’도 나요. 선을 긋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실을 사용하는 작업이니까 화면에 드러나는 실을 따라가며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궁금합니다.

많은 시간을 들인 작업을 들여다보면 완벽히 만족하는 것도, 완벽히 불만족하는 부분도 없어요. 작업할 때마다 수많은 뜻밖의 순간과 우연이 생기는데 이를 모두 반영하거나 똑같이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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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ket in the forest›, 2025, 폐원단 실크에 식물로 염색, 손바느질, 30 × 24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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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ket in the forest›, 2025, 린넨 원단에 손바느질, 손바느질, 50 × 50 cm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특별한 일이 없다면 대부분은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내요. 작년부터 아침에 일어나 수영을 가고, 반려묘 소춘이의 밥을 챙겨 주고, 일상적인 아침 식사를 끝낸 후 일하러 갑니다. 작업실은 저의 요새이자 일종의 감옥이기도 해요. 작업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그리곤 일을 하죠. 밤늦게까지는 할 수 없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술을 끊으니까, 저녁이 더 단촐해지고 개인적인 시간으로 채워진 것 같아요.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작업 측면에서는 원단과 실의 물성, 텍스처를 좀 더 본질적으로 표현하면서 그게 또 다른 물질과 결합하는 걸 시도 중이에요. 그래서 요즘 해당 작업의 맥락이 되는 균류에 관심이 많습니다. 균류는 실처럼 서로 얽히며 번식하고, 그 과정에서 생명력과 재생의 개념을 엿볼 수 있어요. 제 작업에서는 보이지 않는 실과 그물망을 매개 삼아 자연과 생명의 순환을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생활적인 측면으로는 수영에서 ‘플립턴Flip Turn’의 완성입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반복성인 것 같아요. 매일 일어나는 단순한 반복이 단 한 순간도 똑같은 반복은 아니에요. 하루하루가 똑같다면 형벌이겠죠. 반복성은 제 작업에서 궁극적으로 정말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것 같아요. 반복은 결국 변신이고, 제 삶의 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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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라는 것, 사이가 되는 것, 사이가 된다면›, 2024, 200 × 116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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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라는 것, 사이가 되는 것, 사이가 된다면›, 2024, 100 × 80 cm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그냥 하던 것을 계속합니다. 일어나서 작업하러 갑니다.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그림을 그리고 옷을 만드는 일은 언뜻 보기에 다른 유형의 작업을 만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하지만 작업 과정에서 필요한 에너지가 다르므로 밸런스를 맞출 필요가 있죠. 이는 제 체력과 건강이 안녕하고 무사한지와 연결되는 이슈이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이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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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International Position», Kang Contemporary Gallery, 독일 베를린,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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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ifting Stitches», Migrant Bird Space Gallery, 독일 베를린, 2021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모든 건 난데없이 갑자기 쉽게 찾아오는 법이 없더라구요. 작가가 철학이나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나 이야기를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파헤쳐야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넓고 깊게 작업하는 작가들을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아끼면 똥 된다’는 말을 최근 실감합니다. 생각보다 인생은 짧을 수 있으므로 마음껏 멋 내고 뽐내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업적인 태도에서도 말이죠. 자신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좋아하는 것을 만들고 시도해 보는 것. 제가 좋아하는 대만 영화감독 허우샤오시엔(侯孝賢)이 이런 말을 했어요. “생각하는 것은 물 위에 흘려버리는 일이다. 바위에 파서 새겨 넣어라.” 저에게도 창작자에게도 좋은 팁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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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 2024, 종이 위에 펜, 48 × 36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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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 2024, 종이 위에 펜, 48 × 36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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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 2024, 종이 위에 펜, 48 × 36 cm

‹장승›, 2024, 종이 위에 펜, 48 × 36 cm

‹장승›, 2024, 종이 위에 펜, 48 × 37 cm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자신만의 세계와 고유한 관점을 가졌던 작가.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나이가 들어도, 오전이면 수영하고 매일 작업하는 귀엽고 이상한 할머니. 함께 이야기 나누고 공감하는 동료와 산책하고 커피 마시는 일상을 즐기는 여유 있는 할머니.

Artist

박소진(@sojin_assembledhalf)은 독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섬유, 회화, 그리고 패션 레이블 ‘어셈블드 하프Assembled Half’(@assembledhalf)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자기만의 서사적 조형 세계를 구축해 오고 있다. 사회 구조와 비표준적 혼종성에서 출발한 작업은 실과 섬유를 매개로 현실과 비현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기체적 형상을 동시다발적으로 한 화면에 담으며 문화적 혼종성과 탈경계적 존재를 서사화한다. 실을 통한 반복과 신화를 기반으로 한 이미지들은 인간성과 자연, 내면의 유토피아적 풍경을 마주하게 한다. 이자람 판소리 ‘눈, 눈, 눈’(LG아트센터, 2025) 무대 의상,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 ‘OVERHEATED’(Festsaal Kreuzberg, 독일 베를린, 2025), 닉 노바크Nik Nowak ‘Crossing Borders’(KINDL, 독일 베를린, 2021)를 비롯해 다양한 협업을 진행했고, 베를린 패션위크와 여러 전시에 참여했다. 가장 최근 전시로 «박미라, 박소진, 손효정»(The Untitled Void, 2025)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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