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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굳건함보다 흔들림을 신뢰하는 이유

Writer: 최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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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최태훈 작가는 사람과 물건의 유용한 관계에서 한 발 떨어져 기능주의 너머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그의 손에서 여러 물건은 사용성과 무관한 맥락으로 엮여 조각의 골조를 형성하고, 발포 우레탄 폼은 접착제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흙을 대신해 덩어리가 됩니다. 창작자의 정교한 의지에서 살짝 벗어나 우연적이면서 어느 정도 자율성을 지닌 채 태어난 형상은 ‘물건에 의지가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까?’ 신비로운 생각이 드는데요. 그가 굳건함보다 흔들림을 신뢰하는 이유인 듯해요. 그는 작업을 진행하며 해방을 생각해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에서 벗어나고, 답이 정해져 있는 무력함에서 파괴적인 상상력으로 꺼내주는 해방의 힘 말이죠.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여전히 써먹을 만한 실패작을 많이 남긴 사람이 되고 싶은 최태훈 작가의 이야기를 BE(ATTITUDE) 웹 아티클에서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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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우드 타입 2›, 2022, 목재(벽선반, 스툴), 발포 우레탄 폼, 250 × 110 × 90 cm © 촬영: 조준용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최태훈입니다. 사물과 인간의 관계를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조각과 설치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을 동경해 와서 그런지, 작가 외에 다른 길을 찾아본 적이 없어요. 중학생 때 미술을 시작했는데요.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화실에 있는 시간이 즐거웠고 끈기가 있었어요. 고민이 될 만큼 재능 있는 분야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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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SAL)-톤(Tone) 3›, 2023, 발포 우레탄 폼, 유리컵, 수저, 포크, 빨래 집게, 청소 솔, 휴지통, 수납통, 꽃병, 독서대, 타월, 샤워볼, 91 × 60 × 40 cm © 촬영: 김진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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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SAL)-톤(Tone) 5›, 2023, 발포 우레탄 폼, 칸막이 수납함, 수납함, 매트, 어린이 식판, 152 × 104 × 100 cm © 촬영: 김진솔

작업 공간을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경기도 포천에 있는 벽돌식 창고 건물을 사용 중인데요. 1층 작업실의 장점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주변이 공장이어서, 눈치 안 보고 작업할 수 있어요. 가끔 손님이 올 때에는 혹 불편하지 않을까, 신경이 쓰이긴 합니다. 대중교통으로 오기 쉽지 않거든요. 포장지에 싸인 작품과 미발표 실험작, 각종 작업 테이블과 공구로 채워져 있는 공간입니다. 차로 10분 거리에 국립수목원이 있어요. 수목원 주변을 따라 펼쳐진 산책로를 정말 좋아해요.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영감은 이를 얻는 경로보다, 제 상태가 더 크게 작용해요. 주로 휴식할 때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데, 불현듯 나타나진 않고 뭔가를 찾으려는 의지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평소에 가볍게 하는 드로잉과 메모가 도움이 돼요. 요즘은 물건을 강박적으로 모으거나, 버리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 흥미를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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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SAL)-톤(Tone) 8›, 2023, 발포 우레탄 폼, 전등 갓, 보온병, 66 × 46 × 46 cm © 촬영: 김진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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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SAL)-톤(Tone) 8›, 2023, 발포 우레탄 폼, 전등 갓, 보온병, 66 × 46 × 46 cm © 촬영: 김진솔

‹살(SAL)-톤(Tone) 14›, 2023, 발포 우레탄 폼, 유리 도어 수납장, 160 × 80 × 42 cm © 촬영: 김진솔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제가 자연스럽게 변하듯이 창작 방식도 조금씩 달라져요. 이전에는 구체적인 논리 체계를 잡아놓고 작업에 들어갔다면, 최근에는 직관적으로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어요. 재료의 물질적 특성에서 이야기를 찾거나 방향을 틀기도 합니다. 작업이 너무 ‘기획’되지 않고 스스로 열린 공간을 만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해커’로 불리는 디자이너가 DIY 가구를 본래 용도와는 다른 기능의 사물로 조합하는 방식을 조각으로 해석한 ‘해킹 조각’을 실험해 오다 지난 2021년을 기점으로 ‹살(SAL)› 연작을 시작했어요. 제 작업에 새로운 살을 붙이며 자생적인 조형 언어를 만들고 싶었죠. 뼈대와 피부, 근육을 모두 의미하는 이름의 ‹살(SAL)› 연작은 이종의 것들이 만나 스스로 형태를 결정하는 과정을 통해 기능주의 너머를 상상하는 소조(modeling)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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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자소상 1›, 2022, 철제 네스팅테이블, 발포 우레탄 폼, 160 × 100 × 85 cm © 촬영: 김진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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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충동» 전시 전경,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22 © 촬영: 김진솔

흙을 대신하는 재료로 발포 우레탄 폼을 사용하고 있어요. 산업 현장에서 쓰이는 건축용 내장재인데, 단시간에 부풀어서 경화해요. 조형하기 어려운 질료의 특성을 이용해서 우연적이면서도 준(準) 자율적인 형상을 도출시킵니다. 조각의 골조로 사용하는 사물들을 질감이나 색감 등 사용성과는 무관한 맥락으로 엮는데요. 이때 발포 우레탄 폼이 접착제 역할을 하는 동시에, 덩어리(mass)가 됩니다. 만약 물건에 의지가 있다면 이런 모습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마치 ‘대안 가족’처럼요. 2023년 P21에서 진행한 개인전 «필드FIELD»에서는 전시 공간의 구조가 조각의 뼈대(armature)라고 전제한 후, 전면이 유리인 갤러리 안팎에 흙을 붙이듯 과감한 소조 작업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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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FIELD» 전시 전경, P21, 2023 © 촬영: 김진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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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FIELD» 전시 전경, P21, 2023 © 촬영: 김진솔

제주도 남서쪽의 작은 섬 가파도에 있는 ‘가파도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가파도 AiR)에 머물면서 작업한 ‹흰 여›(2023)도 기억에 남아요. ‘섬은 고립된 장소’라는 선입견과 다르게 사람, 물자, 바람 등이 끊임없이 순환하며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었어요. 날씨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고 자연을 받아들이는 생활은 내적으로 더 고립되어 있던 저를 반추하며 경계에 대해 다시 생각할 기회가 됐습니다. 섬을 둘러싸고 있는 바위를 한지로 떠내어 얇은 조각을 만들고, 가파도 AiR에서 운영하는 글라스하우스 전면에 설치했죠. 사면이 유리로 구성된 전시 공간이라서 안에서는 조각의 외부를, 밖에서는 조각의 음각 공간인 내면을 볼 수 있는 구조였어요. 가파도의 해가 뜨고 질 동안, 작업과 전시장이 계속 다른 장면을 만드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종일 쳐다본 날도 있었죠. 마치 유리 전시장이 허파가 되어 섬과 작업이 함께 숨 쉬는 것 같았답니다. 제 작업을 그렇게 오래 본 건 저도 처음이었는데요. 앞으로도 그런 작업을 만날 수 있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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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여›, 2023, 순지, 가변 설치 © 촬영: 최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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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여›, 2023, 순지, 가변 설치 © 촬영: 최태훈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인가요?

해방입니다. 예술은 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줬어요. 무언가를 선택하고 싶은데 이미 답이 나와 있거나 길이 정해져 있는 것만 같아서 무력해질 때, 다른 예술가의 창작물이 파괴적인 상상력으로 저를 꺼내주었죠. 제 작업도 그런 해방의 힘을 가지고 있길 바랍니다.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궁금합니다.

만족스러우면 착각하게 되고, 불만족스러우면 엉뚱한 곳에 집착하게 되네요. 그래서 저 자신이나 외부 평가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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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SAL)-톤(Tone) 10›, 2023, 발포 우레탄 폼, 베개 커버, 73 × 68 × 56 cm © 촬영: 김진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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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SAL)-톤(Tone) 11›, 2023, 발포 우레탄 폼, 베개 커버, 90 × 67 × 60 cm © 촬영: 김진솔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일정한 패턴은 없어요. 강의나 생활을 위한 시간 외에는 작업, 산책, 운동을 우선으로 시간표를 짭니다. 그 외에 볼거리―책, 전시, 영화 등―를 어떻게든 구겨 넣으며 매일 다르게 흘러가죠.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시국이 복잡다단해서 어디에 관심을 두어야 할지 혼란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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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SAL)-톤(Tone) 34›, 2023, 발포 우레탄 폼, 유리 도어 수납장, 155 × 57 × 48 cm © 촬영: 김진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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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SAL)-톤(Tone) 35›, 2023, 발포 우레탄 폼, 유리 도어 수납장, 162 × 70 × 62 cm © 촬영: 김진솔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예전에는 삶이 작업에 그대로 드러난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그렇기도 해서 제 가치관이 작업을 이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보니, 작업이 제 삶의 태도에 주는 영향도 크다는 걸 느껴요. 작업은 거짓말을 못 하거든요. 어떤 척을 하거나 편법을 쓰면 다 티가 나더군요. 정직한 과정에 맞춰 충실하게 작업한 결과물은 항상 기대와 다르고 때론 어설퍼 보이기까지 해요. 하지만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작업을 통해서 세상 사는 법을 배워요. 느리게 돌아가더라도 스스로에게 투명해지고 싶습니다.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산책과 강도 낮은 운동, 그리고 지금이 슬럼프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으면 오히려 도약의 시기로 삼을 수 있어요. 힘든 시간을 지날 때는 가볍게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이 필요한데, 그조차도 어려울 수 있잖아요. 이런 경우에는 누군가 옆에 자리하는 게 좋습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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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SAL)-톤(Tone) 36›, 2023, 발포 우레탄 폼, 유리 도어 수납장, 154 × 85 × 62 cm © 촬영: 김진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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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SAL)-톤(Tone) 36›, 2023, 발포 우레탄 폼, 유리 도어 수납장, 154 × 85 × 62 cm © 촬영: 김진솔

‹살(SAL)-톤(Tone) 37›, 2023, 발포 우레탄 폼, 유리 도어 수납장, 162 × 90 × 90 cm © 촬영: 김진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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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톤TONE» 전시 전경, P21, 2023 © 촬영: 김진솔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지금보다 안 좋은 여건으로 이사를 해야 해서 여기저기 알아보고 돌아다니고 있어요. 처음에는 괴로울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재밌어요. 받아들이면 되는 현실적인 문제들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더군요. 오히려 사회가 극단으로 분열하는 현상이 더욱더 무서워요. 사람들의 사고가 경직되고 대화가 어려워지는 게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타자에 대한 존중과 관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호기심을 동력 삼아 작업으로 구현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존중하는 태도가 창작자에게 필요하죠. 추진력과 끈기, 쌓아놓은 것을 버리는 과감성도 필요한 것 같고요. 개인적으로는 굳건함보다 흔들림을 더 신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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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와 박수무당» 전시 전경, 금호 알베르, 2023 © 촬영: 이강준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제게 그런 노하우는 없어서 다른 분에게 배우고 싶네요.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조금은 부러워하되, 욕심을 내지 않으면서 하나씩 마음속에서 지워갔어요. 실제로 가졌던 적이 없으니까 포기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별생각 없이 그냥 지내온 것에 가까운데요. 대신 제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작업이 좋아서 시작한 쪽보다는, 하다 보니 좋아진 쪽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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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우드타입 8›, 2022, 목재(벽선반, 스툴), 발포 우레탄 폼, 190 × 85 × 45 cm © 촬영: 조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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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타입» 전시 전경, GCS, 2022 © 촬영: 조준용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여전히 써먹을 만한 실패작을 많이 남긴 작가였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다양한 국적, 인종,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 다 함께 사는 모습이요. 여러모로 배울 점도 많고 생활을 바라보는 관점도 풍부해져서 지금보다 재미있을 것 같아요. 노인이 돼서도 비교적 건강하게 작업할 수 있다면 개인적으로 더 바랄 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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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최태훈(@choi.taehoon)은 사물과 인간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특정한 변화를 일으켜 기능주의 너머의 세계를 조망한다. 인간과 물건의 유용한 관계로부터 한 발 떨어져 조각적 실천을 통해 새로운 상호성을 모색하는 그는 흙을 붙이고 떼어가며 덩어리를 만드는 소조적인 감각으로 생활 안팎의 물건을 만지고 형상을 더듬는다. 개인전으로 «톤TONE» «필드FIELD»(P21, 2023), «우드타입»(GCS, 2022), «살(SAL)»(오시선, 2021), «자소상»(탈영역우정국, 2020), «남한 앙상블»(SeMA 창고, 2019), «형태는 형태를 따른다»(스튜디오148, 2018) 등을 열었고, «바람이 시작되는 섬, 가파도»(금호 미술관, 2024), «조각충동»(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2022), «인저리 타임»(뮤지엄헤드, 2021), «트리플 링스: 복각본들, 어제 글피로부터»(문화역서울284, 2021), «트랙터»(페리지 갤러리, 2020) 등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집(ZIP)»(아르코미술관, 2024)을 총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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