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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오직 나만 이렇게 할 수 있다는 믿음

Writer: 신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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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신모래 작가는 2014년부터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특유의 그림체로 대중에게 잘 알려졌어요. 핑크와 보랏빛이 섞인 네온 컬러로 그린 일상 속 모습, 시선이 있는 듯하지만 없고, 또 없다고 하기엔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괄호 눈의 인물은 명실공히 시그너처가 됐죠. 그리기에 대한 재능이 긴가민가한 상황에서 그를 붙잡아주는 것은 다름 아닌, 오직 나만 이렇게 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잘 그리는 건 아니지만, 나만 이렇게 그릴 수 있다는 절대적인 믿음은 창작을 지속시키는 엔진이나 마찬가지예요. 그는 요즘 언젠가 한 번은 마주쳤을 것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느끼고 있어요. 그림을 보기만 했지만, 친구가 아니지만, 어렴풋이 가까운 마음이 드는 어떤 사람 말이죠. 비슷한 온도로 살아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고, 듣고 싶은 신모래 작가. ‘어떻게 그려야 할까?’ 늘상 고민하게 된다는 그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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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하고 잘 모르겠던 밤›, 2024, Acrylic and textured sand on canvas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그림 그리는 신모래입니다.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좀비 영화를 좋아합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꿀프레스ggul press’라는 이름으로 독립 출판물을 만들 때였는데요. 일러스트레이션이 필요한 책이 생기면서 직접 그림을 그리게 됐어요. 돈을 최대한 아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자연스레 일러스트레이터 이름이 필요해져서 아무 생각 없이 모래라고 지었어요. 이름을 짓기 전에 모래 결정 사진을 봤거든요. 현미경으로 확대한 모래알의 결정 모양이 마치 보석처럼 전부 다르게 생긴 게 되게 인상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렇게 이름을 짓고 그림을 그릴 때마다 하나둘씩 소셜미디어 계정에 올리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그림이 퍼져나가면서 ‘그림 그리는 신모래’가 됐답니다. TMI를 말하자면, 바로 직전에 쓰던 이름은 귤무였어요. 하마터면 신귤무가 될 뻔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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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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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작업 공간에 대해서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저는 인천 송도 쪽에서 계속 지내다가 초등학교 때 살던 지역으로 다시 돌아왔어요. 어릴 적 동창이 동네에 아직 살고 있는데요. 새끼 고양이들을 함께 구조하던 중에 “나 그냥 여기에 작업실 구할까?” 하면서 오게 되었답니다. 바로 옆에 산이 있는, 아주 늙고 다정한 빌라 2층에 작업실을 마련했어요. 작업을 늘어놓는 편이 아니라 단출해요. 비 오는 소리가 엄청나게 잘 들려서 참 좋습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 아니라서 그런지, 아예 모르는 사건이나 감정은 다루기 어렵기도 하고 재미가 없더라고요. 저와 완전히 밀착된, 제가 잘 아는 걸 그리는 게 좋아요. 그래서 일러스트레이터로서는 스스로에게 별로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었던 것 같아요. 내용에 구애받지 않고 빼어나게 그릴 수 있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거든요. 다만 제가 잘 아는 것에 대해서는, 오직 저만 이렇게 그릴 수 있는 감각을 가졌다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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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ffering Suffer›, 2021, Digital dra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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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ffering Suffer›, 2021, Digital dra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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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ffering Suffer›, 2021, Digital drawing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우선 제목을 먼저 떠올리고 글을 써요. 그래서 그런지 시리즈로 묶어서 발표한 경우가 많았어요. 텍스트를 자주 내보이지 않아서 다들 잘 모르시지만, 저는 늘상 글을 기반 삼아 그림을 그려왔답니다. 글을 먼저 쓰고 그 정서를 그림에 담기 위해 이것저것 스케치하는 일부터 시작해요. 스케치가 어느 정도 나오면 이제 색감을 정하고 그려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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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 버릇› 텍스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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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 버릇›, 2021, Digital dra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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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 버릇›, 2021, Digital drawing

‹우는 우›, 2021, Digital drawing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2024년 하반기에는 페인팅에 집중했어요. 1월 11일까지 성수동 CDA에서 열리는 첫 회화 전시 때문이었죠. 출품작 중 하나를 꼽자면, ‹12월›이란 그림을 좋아해요. 몰래 운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추워 보이는 듯도 하고. 다른 그림과는 다르게 시선이 프레임 바깥을 향하고 있거든요. 보통은 정면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리는데, 처음으로 고개를 돌린 경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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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Acrylic and textured sand on canvas

‹설탕 토끼›도 기억에 남아요. 공정 중에 까맣게 타버린 설탕 토끼에 대한 이야기인데, «토끼展: The Rabbit Universe»이라는 전시를 위해 준비했던 작업이에요. 사람이 살던 빌라를 개조한 신사하우스라는 독특한 공간에서 선보였어요. 이미 설치된 작업들이 무척 밝고 형형색색이라서 그런지 제 작업이 더욱더 어두워 보였죠. 심지어 설치 장소가 1층인데 동선에 따라 전시의 도입부가 되기도 해서, ‘서글픈 내용인데 어떠려나’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송출했답니다. “고립되어 나의 완전함을 인식하기보다 그냥 오류인 채 버려졌다면 좋았을 거예요”라는 대사가 기억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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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토끼› 스틸컷, 2023

‹설탕 토끼›, 2023

최근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디지털 작업을 전시할 때 가장 답답한 부분은 원본을 전시할 수 없다는 점이에요. 제가 작업에 쓰는 모니터와 기종, 배율, 조도, 색 설정값이 동일하지 않으면, 어디까지나 제가 전시하는 작업은 복사본에 머물거든요. 물론 에디션 인쇄를 진행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 바라는 바를 구현해 왔지만, 결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이 존재했어요. 그 멀고 먼 느낌이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해 보니, 관객과 저 사이의 거리감이더군요. 피지컬한 작업도 작업실과 갤러리의 조명 차이에 따라 달라 보일 수 있지만, 그래도 원본을 가져다 놓았다는 느낌이 훨씬 크잖아요. 그래서 그랬는지, 플랫한 화면에서만 작업하다 피지컬한 매체로 넘어올 때 질감 부분에 가장 큰 차이를 두고 싶었던 것 같아요. 디지털로 했을 때 더 효과적인 작업을 캔버스에 옮기는 일을 지양하고, 손에 닿을 수 있는 천에 물감으로 그릴 때 어떻게 표현하고 싶은지 중점적으로 생각했어요.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궁금합니다.

앞으로 제가 하고 싶은 작업에 대한 힌트를 찾은 점은 좋았어요. 대신, ‘와. 공부를 정말 많이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바로 따라왔어요. 아직 능숙하게 재료를 다루지 못해서 머릿속에서 생각한 완성도만큼 구현하지 못한 게 제일 어려웠던 부분이었어요. 하지만 배우고 해나갈 게 한참 남았다고 생각하니까 그만큼 재밌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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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안녕이 오지», CDA,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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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안녕이 오지», CDA, 2024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낮에는 작업하고, 밤에는 게임을 해요. 게임을 정말 정말 너무나… 좋아해서… 어느 날 일기장에 “오픈 월드를 돌아다닐 때 ‘이곳이 세계의 끝입니다’라는 경고가 뜨면 정말 쓸쓸하다”라고 적기도 했네요. 요즘은 ‹데스 스트랜딩Death Stranding› 4회차 플레이를 시작했는데, 하염없이 걸을 수 있어서 좋아요. 가상 세계 특유의 다정하지만 동시에 냉정해지는 부분을 좋아해요. 겪을 수 있지만 닿을 수는 없는, 되게 미묘한 지점이 있거든요.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죽음, 유령. 예전에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함께 사는 고양이들이 나이를 먹다 보니 죽음이란 개념이 무섭게 가까워지고 있어요. 당장 슬픈 감각으로 가까워졌다기보다는 ‘나에게도 오는구나’ 이런 느낌이에요. 고양이들을 바라보다 「말랑하고 따뜻한 죽음」이란 글을 쓰기도 했답니다. 가끔 고양이들에게 ‘오래오래 살다가 유령이 되어줘’라고 말하곤 해요. 찌질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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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유령›, 2024, Acrylic and textured sand on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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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온›, 2024, Acrylic and textured sand on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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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유령›, 2022, Digital drawing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가님의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예전에는 머릿속에 지나가는 장면을 빨리 그리고 잊어버리려고 했어요. 무한히 복사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태도 자체는 일기장처럼, 빨리 그리고 잊어버리기에 가까웠는데 최근에는 조금 달라졌어요. 대체로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고, 당신과 내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무조건적인 공감이라기보다는, 비슷한 온도로 살아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고, 듣고 싶다는 생각이랄까요. 근데 이걸 정확하게 말하기엔 부끄러워서 모호하게 그리는 것 같아요. 괄호 눈이 그래서 생겨났어요. 시선이 있는 듯하지만 없고, 또 없다고 하기엔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너 날 보고 있니? 나한테 뭐 할 얘기 있어?’라고 한 번은 묻게 되는.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될 때까지 자리에 앉아서 하는 편이에요. 이게 극복인지는 모르겠어요. 개운했던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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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iness is a warm gu(m)›, 2024, Acrylic and textured sand on canvas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어떻게 그려야 할까?’를 정말 오랜만에 고민하게 됐어요. 햇수로 12년을 그렸는데, 12년 만에 또 이런 고민에 빠지다니 정말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페인팅을 하며 막막한 마음에 ‘나한테 재능이 정말 있는 걸까?’라는 생각에까지 닿으니, 처음엔 슬프다가 나중엔 웃기더라고요. 청춘 같고… 아무튼 지금은 ‘어떻게, 잘 그려야 할까?’가 당장 해결해야 할 숙제가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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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 2›, 2024, Acrylic and textured sand on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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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꿈›, 2024, Acrylic and textured sand on canvas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오직 나만 이렇게 할 수 있다는 믿음. 이건 절대적이어야 하는 것 같아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그리는 건 아니지만, 나만 이렇게 그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창작을 할 수 있겠더라고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저는 작업과 생활을 분리하는 데 시간을 꽤 많이 썼어요. 아예 다른 직업군의 친구를 사귀거나 다른 활동에 참여해 그리면서 살지 않아도 옳게 기능하는 삶들을 구경했어요. 20대 때는 치열하게 하는 게 멋있고 좋았지만, 그렇게 계속하다 보니까 다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열심히 하되 마음을 너무 많이 축내진 말자고 생각하면서 작업해요. 어쨌든 마음이란 녀석은 창작하다 보면 닳기 마련이니까, 조금이라도 덜 닳게끔 이를 위한 개구멍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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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요하게 있을 때›, 2024, Acrylic and textured sand on canvas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평소 ‘모두의 모두가 아닌 나의 모두’라는 말을 되게 자주 해요. 나의 모두라고 한다면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인데요. 그들에게는 지금처럼 엉뚱하고 짓궂은, 그래도 떠올리면 웃음이 나는 친구, 가족, 연인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창작자로서만 기억되는 건 줄곧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언젠가 한 번은 마주쳤을 것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네요. 친구는 아니지만 어렴풋이 가까운 마음이 드는. 그림을 보기만 했는데도 그런 마음이 든다면 기쁠 것 같아요.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다가오는 모든 것을 잘 겪고, 그리기를 오래, 오래, 오래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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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신모래(@shinmorae_)는 2014년부터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모습을 특유의 핑크톤과 색감, 그만의 감성으로 표현해 온 일러스트레이터 겸 작가다. 평면 작업을 꾸준히 발표하며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해 활동 영역을 꾸준히 넓혀왔다. 핑크와 보랏빛이 섞인 네온 컬러를 통해 일상의 일부분을 자신만의 온도로 표현한 작업은 뚜렷한 화면과 더불어 이와 상반되는 절제된 인물 표정이 특징이다. «언제 안녕이 오지»(CDA, 2024), «우의 버릇»(JN 갤러리, 2022), «SUFFER»(카라스갤러리, 2021), «Your only lover, friend, enemy»(노블레스 컬렉션, 2020)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여름의 모양»(신세계갤러리 센텀시티, 2023), «토끼展: The Rabbit Universe»(신사하우스, 2023), «디지털 웰니스 스파»(DDP, 2021), «TO THE MOON WITH SNOOPY»(롯데뮤지엄, 2019), «I DRAW»(디뮤지엄, 2019) 등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하겐다즈, 토에이 애니메이션, 트레비, 메르세데스-벤츠, 아모레퍼시픽, 랄프 로렌, 헬로키티 등 국내외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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