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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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거주하는 레이 마사키 작가가 교포의 시선에서 바라본 일본의 결혼식 문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으로서 사촌 등 가까운 지인의 결혼식에 참관하여 일본식 결혼 문화를 관찰했답니다. 일본의 종교에서부터 웨딩산업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확인해보세요!
순백의 드레스와 백인 목사: 일본의 기독교식 결혼
일본에서 내가 처음 참석한 결혼식은 당시 60대였던 아버지의 재혼 결혼식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도쿄로 이사한 직후였고 그전 여름에 친구 결혼식에 가려고 뉴욕의 제이크루J.Crew에서 산 날렵한 감청색 수트를 입고 갔다. 검정색 몽크스트랩 구두가 너무 꽉 끼어서 물집이 안 잡히도록 발꿈치에 반창고를 붙여야 했다. (그날 다른 사람들의 차림을 보니 나는 너무 공들여 차려 입은 축에 속했다.)
호텔로 들어가자 직원이 나와서 신랑측 손님인지 신부측 손님인지 물었다. 당시에는 일본어로 ‘신랑’ ‘신부’라는 단어를 몰라서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더듬더듬 아버지가 결혼한다고 했더니 마침내 맞는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예식이 시작되자 나는 예식장 안의 인상적인 예배당(채플)에 앉아, 놀랍게도 대형 십자가와 라이브 성가대가 있는 광경을 마주했다.
무척 당황스러웠다.
비록 우리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해도 아버지가 종교적인 사람인 줄은 정말 몰랐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기 삶의 이런 면을 이제껏 나에게 숨겨온 걸까 궁금했다. 식장에는 중요해 보이는 차림새의 목사가 서 있었다. 그는 중년의 백인 남성으로 일본어를 유창하게 했으며, 예식을 진행하는 동안 하객들이 기독교식 찬송가를 한 목소리로 부를 수 있도록 안내지도 나눠주었다.
약 1년 후 사촌이 결혼했을 때도 같은 식이었다. 우리는 도쿄 소피아 대학교 근처의 인상적인 성당에 갔다. 거기서는 또 다른 백인 성직자가 온통 일본인 하객만 가득한 데서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서 말하고 있었다. 피로연에서 사촌과 신랑은 탑처럼 높은 4단 케이크를 잘랐다. 두 사람이 사진 촬영을 하려고 섰는데 케이크가 거의 천장에 닿을 듯했다. 케이크의 엄청난 크기가 믿기지 않아서 뒤쪽을 봤더니 케이크는 재사용 가능한 소품으로, 그중에서 한 부분만 자를 수 있게 금이 가 있었다.
이 케이크처럼, 일본의 기독교식 웨딩업계의 대부분은 표면만 꾸민 것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 의구심대로 그렇게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며 결혼식은 모두 화려한 퍼포먼스에 불과했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일본 속담이 있다. “일본인은 태어날 때는 신사를 찾고, 결혼할 때는 교회를 찾고, 죽은 후에는 절로 간다.” 간단하지만 놀랄 만큼 복잡한 구절이다. 일본인들과 종교 및 영성 간의 관계를 말해주기 때문에 정확히 무슨 뜻인지 들여다볼 만하다.
일본인들은 자신을 종교적이라 하지 않으나 대체로 꽤 영성을 추구하는 편이다. 넷플릭스의 ‹곤도 마리에: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Tidying Up with Marie Kondo›의 에피소드를 하나라도 봤다면 무슨 의미인지 알 것이다. 곤도 마리에의 정리 철학 일부는 모든 물건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집을 치우고 옷이 가득 든 이케아 가방을 버릴 때도 모든 소유물을 존중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일본의 “800만 신”이라는 신도의 믿음과 관련이 있다. 모든 것에 영적인 존재가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신도의 의식은 출생 때부터 시작된다. 출생 의식 ‘미야마이리(宮参り)’의 일부로 아기가 태어난 지 약 한 달 후에 신사로 데려가 가족들이 감사를 표하고 신생아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한다.
일본인이 삶을 끝마치면, 대다수는 불교 의식을 치르며 화장된다. 불교는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서기 500년 즈음 도입되었으며, 고통과 생사의 순환을 비롯하여 삶의 모든 양상을 자연스레 수용할 것을 강조하는 종교다.
화장된 유해는 보통 직계 가족이 집으로 가져가 불교식 제단인 ‘부츠단’에 모셨다가 나중에 가족묘에 안장한다. 덧없음과 무상함에 대한 인식은 일본인의 삶 여러 측면에서 나타난다. 봄날에 짧게 피고 지는 벚꽃을 즐기거나, 매년 조상의 넋을 기리는 일본식 불교 축제인 오봉을 기리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어릴 적에는 음식을 젓가락으로 옮겨주려고 하면 엄마에게 혼나곤 했다. 그 행동이 죽은 사람을 화장한 다음 뼈를 유골함에 옮기는 불교 의식의 일부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속담 중간에 “결혼할 때는 교회를”은 가장 최근에 추가된 것으로, 내가 보기에는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일본의 서구화 역사 및 비유일신 경향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식 결혼
전후 일본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일본은 미국과 친선을 도모하며 이익을 보았다. 두 나라 관계가 개선되자 점점 더 부유해지는 미국에 일본이 고부가가치 제품을 수출함으로써 번영의 기회가 생겼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기간에 물자와 제조업을 지원하며 막대한 자본이 일본으로 유입되었다. 마침내 미국과의 공생 관계가 형성되었고, 여기서 서구식 생활이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유리하다는 인식이 따랐다.
일본의 현대 생활에도 여전히 전통적인 면이 있지만, 문화의 많은 부분이 이제는 잡다하게 섞여 있다. 그렇지만 미국식으로 변화된 일본인의 생활에 깃든 아이러니는 아마도 문화적으로 고립된 역사 때문인지 일본인들 다수가 본국을 떠나지 않고 대중문화와 미디어를 통해 서구 문화를 간접적으로 경험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내가 목격한 것은 일본의 문화적 반향실(反響室, echo chamber) 테두리 안에서 외국 문화의 낭만화된 측면들이 전용되고 과장되며, 구체적으로 일본식으로 소비할 수 있도록 변형 가능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일본에서 인구의 약 1퍼센트밖에 되지 않는 소수 종교이지만, 일본에서 기독교식 “채플 결혼식”은 놀랄 만큼 인기가 있어 주류를 이룬다.
1982년에는, 전후의 인기 예식 스타일이었던 신도 예식이 90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런데 1998년이 되자 신도 결혼식은 50퍼센트로 줄었다. 오늘날은 기독교식 결혼식이 신도 예식을 완전히 대체하여 주된 결혼식이 되었다. 한국이나 필리핀 같은 이웃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기독교가 일본에서 주요 종교가 된 적이 결코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인기는 가히 놀랍다. 최근까지도 일본에서 기독교는 문제시되었다. 16세기 예수회가 아시아 전역으로 진출할 때 일본으로 기독교를 확장하면서 기독교인들은 외국의 종교적 영향력이 일본 의식ritual의 순수성을 더럽힌다고 생각하는 막부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기독교인들은 현대에 와서 억압에서 해방되었지만, 일본의 기독교인 비율이 극적으로 증가하지는 않았다.
일본인들이 대다수 서양인들이 “종교적”이라고 여기는 많은 활동에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세속적인 국가로 꼽힌다. 일본 문화청 조사에 따르면 일본 인구의 대다수가 신사 참배, 오마모리 부적 구입 등 신도 활동에 참여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 종교를 가진 사람은 3퍼센트에 불과하다.
서구식 종교 개념은 일신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그런 맥락에서 믿어야 할 유일신이 있으므로 복수의 신앙을 믿는다는 건 일반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면서 동시에 라마단에 금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종교가 일반적으로 훨씬 덜 억압적이고, 사람들이 여러 가지 종교적 정체성을 갖는 것이 자연스러워서 독실한 유일신 숭배 개념이 환영받지 못한다. 비록 현대 일본이 서구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근본적인 의례의 전통이 필수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일본의 결혼은 항상 세속적인 문제였고, 결혼은 시청에서 정부 기록에 서명해야만 공식적으로 인정된다. 상대적으로 전통적이라 여겨지는 신도 의식조차도, 채플 결혼식보다 더 공식적인 종교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혼식은 일본에서 큰 사업이 되었고, 이러한 장소들은 신랑 신부뿐 아니라 양가 가족에게 궁극의 서양식 판타지를 소비하도록 조장되었다. 물론 이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혼식은 문화와 상관없이 볼 만한 장면을 연출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인들의 정말 다른 점은 종교 내에서 의도적으로 역할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우리 아버지 결혼식에 온 남자 주례들이 심지어는 목사 안수를 받은 목사도 아니고, 대부분 부수입을 올리려는 영어 교사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보조 영어 교사가 쓴 기사를 읽어보니 그는 성직자로 임명 받은 적도 없는데 “가짜 성직자”로 450건의 결혼식에서 주례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한다. 90분간 일하며 180달러 상당의 돈을 벌었으며 중개업체에서 주말마다 네다섯건의 결혼식을 그에게 배정하곤 했다.
1990년대에 «Tokyo Classified»에서 결혼식에 성직자를 고용할 때 필요한 목록을 실었다. 이상적인 후보는 일본인들이 영화에서 얻은 이미지에 부합하는 사람으로, 주로 백인 남자였다. 일본어 말하기 실력이 있으면 더 좋긴 하지만, 영문으로 쓴 커닝 페이퍼가 있어서 필수 요건은 아니었다. 중요한 점은 예식의 실상 혹은 성직자가 정식 안수를 받았는지 여부 같은 종교적 진실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하객과 가족 들은 기독교 신앙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행사 전체가 퍼포먼스이기에 성직자가 “가짜”라는 점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1980년대에 아버지와 결혼했던 당시의 결혼식은 어땠는지 물었다. 엄마는 자라면서 서구 문화가 미화되어 지극히 멋있고 트렌디해 보였다고 설명했다. 전후에는 일반적으로 미국적인 것이 사람을 좀 더 현대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정서가 있어서, 당시의 많은 여성들이 아름다운 흰색 웨딩 드레스를 입고 결혼하는 것에 대해 환상을 가졌다. 버블 경제 시기에는 곤돌라를 타고 성 같이 생긴 결혼식장에 도착하거나 리셉션이 진행되는 동안 옷을 몇 번씩 갈아입는 식으로 부유함을 거창하게 드러냈다는 말도 했다.
요즘도 도쿄에서 지하철을 타면 젝시(Zexy, 신부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기획사) 같은 서비스 광고를 마주친다. 몇 년 전, 거대 광고기업 하쿠호도에서 진행한 젝시의 광고가 도쿄 카피라이터 클럽 최고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 광고는 요즘 커플들이 사랑을 위해 결혼한다는 것을 진보적이고 현대적으로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결혼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시대에 나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다’는 뜻으로 대충 해석되는 이 카피는 서양식 결혼 예복을 입은 아름다운 일본인 두 사람을 배경으로 보여주며, 그 주변에는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기독교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자신의 부와 현대적 취향을 보여주는 계급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채플 결혼식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은 채플이 대다수 일본인들의 삶에서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초월적인 공간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독교가 예식의 기반으로 그처럼 매력적이게 된 이유는 바로 기독교가 일본 사회에서 발판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혼주가 신도의 전통을 올바르게 유지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완화하는 동시에, 일상 생활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 인터뷰에서 채플 결혼식을 올린 커플들은 그걸 택한 이유로 “영화 같은 것”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예식장에서는 동화 같고 영화 같은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체험을 제공한다.
이 일환으로, 웨딩업계는 결혼식의 결과물에서 글자 그대로 ‘영화’를 뽑아내는 것에도 중점을 둔다. 하와이에서 열린 형의 결혼식에 갔을 때 일본식 웨딩 패키지로 진행된 그 결혼식에서 우리는 마치 잘 연출된 연극의 배우들 같았다. 어디에 서야 할지, 사진 찍을 때 손은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리고 무빙 카메라에 완벽하게 잡히도록 언제 꽃을 던져야 할지 사사건건 지시를 받았다.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같은 반전은 우리가 어느 방에 들어가서 그날 행사가 온전히 편집된 상태로 재생되는 비디오를 시청한 일이다. 나는 속으로 마지막 작업은 그 비디오를 보고 있는 우리 뒤통수를 찍은 라이브 영상일 거라 기대하고 있었다. 필름 제작의 속도와 효율을 보면 이런 예식이 얼마나 틀에 박힌 것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요소가 조합되어 일본인들이 낭만적으로 여기는 서양식 결혼식의 이미지가 형성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식 결혼식은 유럽이나 미국인들의 예상에 부합하지 않고, 현대 일본의 문화적 환경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설정이 일본인 커플과 그 가족에게 얼마나 매력적인지는 알겠으나, ‘종교적이면서도 비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라야만 이런 욕구가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에는, 2020년 팬데믹이 세상에 내려앉기 시작할 때 시부야 구청에서 동반자와 조용히 정부 기록에 서명했다. 사정상 아직 제대로 웨딩 파티를 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하게 되면 그냥 썰렁한 포트럭 파티 비슷한 것을 할 것 같다. 일본에서 하는 서양식 결혼식은 나에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미국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미국에 대한 낭만적 환상은 산산조각 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Writer
레이 마사키Ray Masaki는 도쿄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계 미국인 그래픽 디자이너 겸 작가이다. 파슨스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쿠퍼유니온에서 타입 디자인을 공부했다. 현재는 버몬트 미술대학 그래픽 디자인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2021년 일본 디자인계의 제도화된 백인 우월주의와 서구화의 역사에 대한 책 『서핑보드를 들고 다니는 회사원Why is the salaryman carrying a surfboard?』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