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경석 작가는 기억을 소재로 3D 그래픽 툴을 활용해 다양한 작업을 풀어냅니다. 중국 상하이에서 부모님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그는 팬데믹으로 국내에 발이 묶이게 되자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추억 어린 상하이의 모습을 생각하며 3D 그래픽 작업을 시작했어요. 이를 계기로 기억의 범위를 넓히고 매체 또한 확장해 요즘은 이제 찾아볼 수 없는 기억 속 현상을 왜곡해 조형물로 재구성하는 일에 재미를 느끼고 있답니다. 자기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을 나누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상황을 바라는 연경석 작가. 그의 독특하고 흥미로운 작업 세계를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The taste(Lanzhou)›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작가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기억을 주제 삼아 3D 그래픽 툴로 작업을 풀어내는 연경석입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학창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어요. 일 때문에 상하이에 계속 계시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혼자 한국에 온 후로는 방학마다 부모님을 찾아뵈었죠. 그런데 팬데믹으로 상하이 방문이 굉장히 힘들어지면서 향수병이 생겼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죠. 그러다가 우연히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와 조우하게 됐어요. 반가운 마음에 밤새 술 마시며 어릴 때 경험한 상하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다음 날 작업을 하려고 데스크탑 앞에 앉으니까 친구와 함께 떠올리던 기억의 장소 중 구글로 검색해도 자료가 나오지 않는 무언가를 3D 그래픽으로 구현하고 싶어지더군요. 그렇게 수 개월간 기억에만 존재하는 장소를 하나둘 구현한 후 나중에 모니터 화면에 쫙 펼쳐놓고 하나씩 살펴보니 신기하게도 향수병이 차츰 나아지더라고요. 이를 계기로 점차 기억의 범위를 넓혀서 3D 그래픽 툴로 작업하는 일을 시작한 것 같아요.
‹The camp(Republic of Korea Army)›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저는 집에서 모든 작업을 해요. 편안한 곳에 있어야 옛 기억이 잘 떠오르거든요. 무엇보다 제 기억을 기록한 자료가 집에 있어서, 집에서 작업하는 게 여러모로 작업에 도움이 많이 돼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평소에는 주변의 사물, 생명체의 형태나 조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아요. 자극이 많이 필요한 시기에는 이어폰 없이 집 밖을 돌아다니며 모든 감각을 활짝 열어두죠. 음악을 듣지 않아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면서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치던 흥미로운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작업에 필요한 단계를 줄이며 최대한 복잡하지 않게 진행하려고 노력해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노트에 메모하고, 진행하던 작업을 끝낼 때마다 노트를 훑어봅니다. 아이디어 리스트 중 제일 꽂히는 주제가 생기면 고민하지 않고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을 시작하곤 해요. 저는 미리 레퍼런스를 찾지 않고 모델링을 할 때 틈틈이 찾는 편인데요. 제가 작업하는 무언가는 이제 찾아볼 수 없는 기억 속 현상이라 현실과는 확연히 다르게 왜곡되기 때문에 레퍼런스를 먼저 준비하고 작업하면 저도 모르게 자료 속 사물의 실제 형태에 의존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레퍼런스는 단지 형태와 구조에 대한 참고 정도로 활용하는 편입니다.
‹Pious attitude 2›
‹Pious attitude 1›
작가님의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예전에는 머릿속 기억을 그래픽으로 끄집어내는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한발 더 나아가 그런 그래픽을 현실 세계에 조형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아요. 예를 들어, 최근 진행한 개인전 «STABLE OVERLOADING»에서 선보인 작업처럼 그래픽을 조형물 형태로 뽑아내는 작업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STABLE OVERLOADING» Installation view
«STABLE OVERLOADING» Installation view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3D 그래픽은 모니터나 액자처럼 평면에 머물지 않고, X, Y, Z축이 만드는 공간에 입체적으로 존재하잖아요. 그래서 다각도로 볼 수 있는 작업을 만드는 데 중점을 두는 것 같아요.
최근 진행한 작업에서 작가님이 만족하는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만족과 불만족보다는 항상 고민이 되는 지점이 있어요. 페인팅이나 일반적인 조형물은 레이어가 층층이 쌓이면서 작품에 무게감이 더해지잖아요. 반면 3D 그래픽 작업은 다른 피지컬 작업에 비해 작품의 무게감이 가볍게 느껴지는 경향이 있어서요. 프로그램 속에서는 레이어가 잘 드러나지만, 종이, 디스플레이, UV 프린트 등 물리적인 매체로 옮기면 레이어의 층이 단면으로 묻어나오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래픽 작업의 피지컬한 모습을 현실 속 레이어의 층을 유지하며 끄집어낼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답니다.
Lullaby
평소 작가님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매일 하는 일은 다르더라도 운동과 독서만은 빼먹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저는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할 때가 많은데요. 그래서인지 아무리 시간을 내어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노력해도 어려움에 부딪히곤 해요. 그럴 땐 오히려 고민과 전혀 관련 없는, 오직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마련해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습니다. 복잡한 일로 과부하 된 머리를 잠시 식히는 과정이라고 할까요. 특히 책을 읽을 때는 주로 소설을 골라요. 잠시나마 다른 세계에 푹 빠졌다가 나올 수 있거든요. 그렇게 머리를 비우면, 정리하기 힘들던 일을 좀 더 용이하게 해결하는 것 같아요.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세상에는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많은 정보를 빠른 시간 내에 쉽게 접할 수 있는 플랫폼이 많잖아요. 일상에서 보기 어려운 일이나 기묘한 현상을 경험할 수 있어서 레퍼런스 및 영감을 얻는 창구로 한동안 열심히 이용했는데요. 언젠가부터 일상에서 아이디어를 찾기보다, 자연스레 온라인 매체에 의존하게 되었어요. 제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완성하던 작업도 매체에 흔히 등장하는 형태로 획일화되는 게 눈에 보였고요. 그래서 요즘은 여러 매체가 노출하는 영상이나 이미지는 재미 측면으로만 대하고, 오히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방법으로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해요. 예를 들어, 스마트폰이 없던 초등학생 시절처럼 이어폰을 꽂지 않은 채 밖을 거닌다든가,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 활자 매체에서 정보를 얻는 거예요. 이런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하니, 기억에 자리한 다양한 이야기를 더욱더 용이하게 끄집어낼 수 있게 됐어요. 소중하고 값진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깨닫는 요즘입니다.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나요?
팬데믹 기간에 상하이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니 우울함을 많이 느꼈는데요.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향수병을 조금씩 치료할 수 있었어요. 당시의 경험이 지금 하는 작업에 많은 영감을 주었죠. 그래서 작품을 관람하는 분들에게 제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들려드리지 않고, 제가 생각하는 기억과 향수를 포괄적으로 풀어내려고 노력합니다. 제 작품을 매개로 많은 분이 함께 공감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어요. 상대방과의 ‘대화’를 돕는 작업을 만들고 있습니다.
‹One Hundred and One Dalmatians (Shanghai Nostalgia Series)›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진행하던 모든 작업을 중단하고, 오로지 저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요. 얼마 전 개인전을 마치자 처음으로 슬럼프가 찾아왔는데요. 저는 절대 슬럼프를 겪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엄청 당황했답니다. 책을 펼쳐도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그래서 모든 작업을 중단하고 슬럼프가 온 이유를 따져봤는데요. 작업에 쫓겨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원인이더군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채로 작업에 임해야 제 색깔이 두드러지는 작품이 탄생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작업하기에 급급하기보다, 먼저 저 자신을 돌아보고 솔직한 감정을 정리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최근 들어 작가님에게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3D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구현하고 싶은 기술이 많은데요. 어떤 건 지금 사용하는 컴퓨터로 구현이 힘들어요. 그래서 컴퓨터 기능에 무리 가지 않는 선에서 원하는 기술을 구현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활용법을 연구하고 있어요.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창작자는 본인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고, 이를 접한 사람들로부터 또 다른 해석과 다양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작업의 내용을 설계할 때 의미를 단정 짓지 않고, 최대한 포괄적이면서 추상적인 감정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Korean Venus›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시겠어요?
해야만 하는 것이 자꾸만 나를 방해한다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본인의 솔직한 감정에 집중해 보세요. 그래야 더 가벼운 마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작가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한 단어로 정의되는 창작자가 아닌, 여러 단어로 표현되는 창작자를 꿈꿔요. 최대한 다양한 위치에서 저만의 이야기를 펼쳐가고 싶습니다.
현재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나’의 기억과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함께하며 서로 ‘공감’하는 사회입니다. 우리는 지금 매우 빠른 사회에 살고 있어요. 그 속도에 맞춰 달리기 위해 많은 것을 놓치고, 잃어가는 것 같아요. 이런 과정에서 상처도 많이 받게 되고요. 이제는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치유해 나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Artist
연경석(@camelostrich)은 기억을 기반으로 3D 그래픽을 포함한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며 관객과 소통하는 아티스트다. 전시를 비롯해 여러 브랜드와 협업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대중에게 다가선다. 개인전 «STABLE OVERLOADING»(2023, 갤러리 워터마크)와 «Nostalgia»(2022, Fivepointzero)를 열었고, «It’s good weather for airstrikes»(2022, 미러드 스피어 갤러리), «nudge, enudzy!»(2022, 엘레간), «The Void – Art show»(2022, 연희예술극장) 외 다수의 그룹전과 페어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