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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몰입의 예술

Writer: 윤민구

Visual Portfolio

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윤민구 작가는 서체를 만들어요. 2000개가 넘는 글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짧게는 반년, 길게는 몇 년이 걸리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서 그대로 드러나 버린답니다. 좋은 태도를 갖추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창작이 가능하다고 믿는 이유이기도 해요.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덕질하듯 파고드는 힘을 중시하는데요.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윤민구 작가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확인해보세요.

안녕하세요. 먼저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작가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서체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윤민구입니다. 낱글자를 디자인하고, 한 벌의 서체로 만드는 작업을 주로 하고 있어요. ‘윤슬체’, ‘윤슬바탕체’, ‘블랑’, ‘파보리트 한글’ 등의 서체를 디자인했고, 대학교에서 서체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학부 시절 필요한 한글 서체를 직접 그리고 싶다고 생각한 후, 안그라픽스 타이포그라피 연구소에서 서체 디자인을 정식으로 배우며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네요. 그래픽 디자인 전반에 관심이 많아서 이런저런 일을 다양하게 하다가, 지금은 독립 타입 파운드리를 설립해 서체 디자인에 좀 더 집중하는 중입니다.

서체 ‘블랑’, 2018

작가님의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주시겠어요?

서울 서교동의 작은 공간을 작업실로 쓰고 있어요. 서체 디자인이란 분야가 재고를 쌓아두거나, 아주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아서 일에 적당히 집중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담은 액자, 자주 읽는 책을 올려두는 선반과 테이블이 있고요. 남향이라 해가 잘 들어서 식물과 함께 낮에 작업하기 좋은 공간입니다.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필립 로스의 소설 『에브리맨』에 나오는 문장이에요. 예전에는 노력하면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애쓴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더군요. ‘찰싹’이라는 단어를 어느 만화책에서 봤는데, 그 말도 좋았습니다. 지금 제 상황, 가치관, 생각, 컨디션, 건강, 주변 사람과 나눈 대화, 최근에 본 것 등이 마침 ‘찰싹’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아주 가끔 있어요. 그 ‘찰싹’이 오지 않으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고,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억지로 영감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아침에 일어나 일을 꾸준히 하다 보면 가끔 운 좋게 영감이 올 때가 있는 거죠.

탬버린즈의 로고타입과 전용서체, 2019

매거진 «GQ 코리아»를 위한 한글 레터링, 2021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가님은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저는 작업할 때 무척 건조하게 바라보는 편이라 무언가 대단한 것을 창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단순히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서체를’이라는 마음이 전부입니다. 그 필요한 사람이 저 자신일 수도 있고요. 그냥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서체를 만들고, 저에게 꼭 필요한 서체를 만들려고 합니다.

작가님의 최근 작업들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주시겠어요?

최근 ‘노플라스틱선데이’를 위한 베리어블 전용 서체를 재미있게 작업했어요. 그동안 브랜드의 로고와 서체는 대부분 정적인 형태를 고수해 왔는데요.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바뀌는 플라스틱의 물성에서 영감받은 NPS의 베리어블 서체는 글자가 변화하는 물성으로 보이는 지점을 고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작업하는 내내 즐거웠답니다. 송은문화재단이 새롭게 연 문화 공간 ‘송은’을 위한 한글 서체 또한 제가 가장 즐거워하는 한글-라틴 문자 간의 형태적 번역을 시도할 수 있었기에 의미가 남달랐어요. 이러한 다국어 서체의 형태적 번역 작업은 스위스의 타입 파운드리 ‘디나모Dinamo’와 꾸준히 협업 중이에요. 비슷한 결로, 유튜브를 위한 한글 서체도 최근 작업을 마쳤습니다. 더욱 깊이 있는 서체 디자인 교육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자모JAMO’라는 이름의 작은 디자인 워크숍을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어요.

노플라스틱선데이 전용서체, 2022

송은문화재단 전용서체, 2021

최근 작가님이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쓰임에 대한 부분입니다. 전에는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를 지닌 작품 같은 서체를 만들고 싶었어요. 지금은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사용할 때 의미가 부여되는 서체가 좋아졌답니다. 제가 작품을 만들어낼 공력이 부족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좋은 작품이 아닌, ‘좋은 제품’으로 존재할 수 있는 서체를 더 많이 만들고 싶어요.

최근 진행한 작업에서 작가님이 만족하는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앞서 작업할 때 건조하다는 말을 한 것처럼, 일단 끝난 작업에 대해서는 의미 없이 되돌아보지 않으려고 해요. 매번 서체를 그릴 때 저는 항상 제 나름의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지난 작업이 불만족스럽거나, 또는 크게 만족스럽거나 하지 않나요. 물론 자세히 뜯어보면 형태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있겠지만, 그건 당시 제가 그렇게 그리고 싶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믿기 때문에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음 프로젝트에서는 더 나아진 제가, 더 나은 서체를 그리길 바랄 뿐이에요.

평소 작가님이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저는 매우 자기중심적인 편입니다. 그래서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고, 일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 하는 삶을 추구해요. 주변 동료들은 제가 늘 바빠 보인다고 하는데, 사실 바쁘다기보다는 안 바쁜데 바쁜 것처럼 살고 싶어서 그렇게 보이나 봐요. 일이 있을 땐 일찍 일어나지만, 일이 없으면 늦잠도 자고 하루 종일 집에만 박혀있기도 하고, 커피는 하루에 한 잔은 꼭 마시죠. 그냥 누구나 그렇듯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참, 매일 한 시간 정도 게임도 하네요!)

요즘 작가님이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방금 말한 평범해 ‘보이는’ 일상 같아요. 아주 평온한 일상을 보내려면 생각보다 엄청 부지런하고 정신이 건강해야 하거든요. 가만히 물에 떠 있는 오리가 사실 물밑에서는 열심히 발을 구르고 있는 것과 비슷하달까요. 단순히 일을 열심히 한다는 뜻이 아니라, 제 주변 사람과 어떤 일상을 보낼지, 어떤 대화를 나눌지, 반려묘와 어떻게 더 건강한 시간을 오랫동안 보낼 수 있을지 등 열심히 살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가 최근 가장 자주 고민 중인 아이러니한 주제예요.

JAMO.WORKS, 2022 (웹사이트 디자인. 손아용)

서체 ‘파보리트 한글 Favorit Hangul’, 2019

작가님이 삶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에 어떻게 묻어나나요?

서체를 그리는 일은 작업의 호흡이 긴 편입니다. 특히 한글 서체는 글자 수가 절대적으로 많다 보니 짧게는 6개월, 길게는 몇 년도 걸려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체에 제가 안 보일 수가 없는 것 같아요. 한두 글자는 제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연기해서 그릴 수 있죠. 하지만 2000여 개의 글자를 그릴 때는 저 자신을 속이며 시작해도, 결국 끝날 때 아주 작은 버릇과 습관 하나하나가 모든 글자에 묻어나게 돼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제 생각과 고민이 너무나 잘 드러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반대로 좀 무섭기도 해요. 제가 좋은 사람이어야 좋은 서체가 탄생할 테니 늘 스스로 되묻게 됩니다.

혹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슬럼프를 꼭 극복해야만 할까요? 저는 슬럼프가 특별하거나 극복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일은 원래부터 하기 싫은 것인데, 하루하루가 슬럼프라고 생각하면 좀 슬프거든요. 일이든 작업이든 열심히 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하기 싫을 때도 당연히 많잖아요. 근데 극복해야만 한다고 억지로 생각하는 순간, 이 또한 새로운 일이 되어요. 안 그래도 하기 싫은데 미뤄도 되는 상황이라면 최대한 미루고요. 선택지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싫어도 해야죠, 뭐.

‘을유1945’ 서체 가이드북, 2021 (디자인. 워크룸, 사진. 김진솔) (좌)

서체 ‘을유1945’, 2021 (우)

을유1945 서체 가이드북, 2021 (디자인. 워크룸, 사진. 김진솔) (상)

을유1945, 서체, 2021 (하)

서체 ‘윤슬체’, 2014

서체 ‘윤슬바탕체’, 2014

최근 들어 작가님에게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건강입니다.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다 서체 작업을 할 때 워낙 움직이지 않다 보니 신체 무료 구독 기간이 끝난 기분이에요. 이제는 여기저기 쑤시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요. 그래서 운동을 더는 미룰 수 없는 시기가 됐습니다. 운동해야 할 것 같아요. 모두 운동하시고 건강 찾으세요!

작가님이 중시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저는 ‘태도’ 자체가 곧 철학이라고 봐요. 창작은 보기 좋은 무언가를 만들어내거나, 새로운 성과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들 생각하는데요. 좋은 창작은 좋은 태도로 대상을 대하는 것이거든요. 글자든, 제품이든, 사진이든 큰 상관없어요. 제가 먼저 좋은 눈을 갖고, 좋은 것을 보려고 노력하고, 좋은 것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좋은 태도로 만들어내려고 하면 어떤 작업을 하든 좋지 않을 수가 없죠. 항상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소외되기 쉬운 부분을 배려하고, 내가 만든 것이 누군가에게 불편을 주지 않을지 섬세하게 고민하는 태도 자체가 좋은 작업이자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 먼저 되려고 노력하는데, 이거 쉽지 않네요. (웃음)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주시겠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누군가 무엇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처음으로 떠오르는 대상을 이야기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거죠. 저는 흔히 말하는 오타쿠를 좋아하거든요. 저 또한 어떤 것의 오타쿠이기도 하고요. ‘덕질’는 다르게 말하면 ‘디깅Digging’이에요. 또는 ‘몰입(沒入)’이라고도 하고요. 가장 나다운 좋은 것은 결국 미칠 듯이 좋아해서 깊게 파야만 나온다고 생각해요. 꼭 디자인이나 예술일 필요는 없어요. 공룡일 수도, 식물일 수도 있죠. 그렇게 깊이 파내어 찾고 알아낸 것을 타인에게 이야기해주면 좋겠어요. “이건 이래서 이런 거야. 저건 저래서 저런 거야. 그래서 너무 좋지 않아?”라는 말을 하는 사람과 일하면 너무나도 즐겁고 행복해요.

‹오리지널 도시 드로잉›, 제4회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문화역서울284, 2015)

작가님은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좋은 사람.

현재 작가님이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Artist

윤민구는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서체 디자이너다. 글자를 그리고, 한 벌의 서체로 만든다. 윤민구 타입 파운드리와 JAMO의 디렉터 겸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홍익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서체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다. ‘윤슬체’, ‘윤슬바탕체’, ‘블랑’, ‘파보리트 한글’ 등 자체적으로 개발한 서체 외에도, 구글, 유튜브, 송은문화재단, 을유문화사, 탬버린즈 등 국내외 다양한 브랜드를 위해 서체를 디자인했다. 한글 문자를 기반으로 해외 여러 예술 분야와 협업하며 다국어 서체 디자인 전반을 다룬다.

www.yoonmingo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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